행주기씨 역사

역사책에 보이는 가장 오래된 기씨(奇氏)기록은 삼국사기 권제50 열전 10 견훤의 멸망에 나오는 기언(奇彦) 기록이다. [대상(大相) 견권(堅權), 술희(述希), 금산(金山), 장군 용길(龍吉), 기언(奇彦) 등으로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좌익(左翼)으로 진을 치게 하였다.(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같은 사건을 기록한 고려사절요/1권/태조신성대왕/병신 19년(936)秋九月(가을 9월) : 가을 9월 기록엔 기언(奇言)으로 나온다 지 천군(支天軍) 대장군(大將軍) 원윤 능달(元尹能達) 기언(奇言) 한순명(韓順明) 흔악(昕岳)과 정조 영직(正朝英直) 광세(廣世) 등으로 보군 10,000을 거느리게 하여 좌강(左綱)을 삼았다.[支天軍 大將軍 元尹 能達 奇言 韓順明 昕岳 正朝英直 廣世 等 領 步軍一萬 爲左綱)

언(彦)과 언(言)은 소리와 뜻은 같지만 모양은 틀린 글자이다.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와 조선초기 고려실록을 보고 요약한 고려사절요의 글자가 다르지만 대종중은 오래된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다.(彦一作言)

기언(奇言)의 직위가 무엇인지는 그앞에 나오는 원윤 능달(元尹能達) 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원윤(元尹)으로 보인다. 그러나이분의 출신이나 나이 등등 다른 정보는 전혀없다. 그러나 이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금석문이 영월 흥령사징효대사 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에 있다. 다음은 호철님의 글을 인용한다.

이것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흥령사 옛터인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신라말의 선사 징효대사 절중(澄曉大師 折中:헌덕왕 18, 826~ 효공왕 4, 900)의 비로 보물 6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이 해서로 썻으며, 최환규(崔奐規)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44년 후인 944년(고려 혜종 원)에 세웠다. 900년에 입적하여 906년에 시호를 내리고 박인범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어 924년에야 비문을 지었으며 다시 비의 건립은 ‘온 나라의 먼지가 멈춘’ 944년에 이루어졌다. 후삼국 시기의 혼란기에 선사들을 우대하는 비의 건립이 지연되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비문은 전면은 36행에 1행 81자, 음기는 29행으로 이루어진 구성이다. 비문의 내용은 징효대사가 탄생하여 오관산으로 출가한 후 화엄을 배우다도윤(道允)과 자인(慈忍) 등 선사를 만나 수학하고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수행한 이력과 헌강왕 정강왕 등의 우대를 받고 진성여왕이 국사의 예를 표하였으나 사양한 등의 생애를 기술하였다. 흥령선원을 중사성에 예속시킨다거나 명주 승정을 파견하여 일을 처리하는 등 중요한 사료가 들어 있다.

이 비에는 징효대사의 승속(僧俗) 제자들이 음기(陰記)에 기록되어 있다. 각 사주(寺主)를 필두로 정종(定宗)과 광종(光宗)이 되는 왕자와 고위 관료 수십 인과 명주(溟州) 등 각 연고 지역의 세력가와 확대된 삼강직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 확인 할 수 있는 인물도 있지만 여타의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물들이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고려초 원윤(元尹)벼슬을 하고 있는 기오(奇悟) 기달(奇達) 두 사람이 나란히 나타나고 있다. 원윤(元尹)은 936년(태조 19)에 제정하였는데 왕건이 태봉(泰封)의 위계(位階)를 본떠서 정한 것으로, 왕건의 직속 부하를 중심으로 하여 고려 왕권에 복속한 친고려적 정치집단인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960년(광종 11)에 제정된 4색공복 규정에 의하면 원윤 이상의 관료, 호족은 자삼(紫衫)으로 정하였으며 976년(경종 1)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의 실시로 원윤 이상은 18품으로 나뉘어 전시를 지급받았다. 또한 성종 때에는 원윤 이상에게 말을 하사하고, 문무관을 구분하여 정계(正階)를 주었다. 이렇게 볼 때 자삼은 관직을 가진 관료층을 포함하면서 원윤 이상의 관계만을 가진 호족층을 포함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광종 때 중국식 문산계(文散階)가 들어와 관계와 같이 사용되다가 995년(성종 14)에 중앙관인의 관계가 전적으로 문산계를 사용하면서 기존의 관계는 향직(鄕職)체제로 존속하였다.

기오(奇悟) 기달(奇達) 양인(兩人)이 제자들을 열거한 음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징효대사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지녔던 인물들임에 틀림이 없으며 기오 바로 다음에 기달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부자(父子), 형제(兄弟) 혹은 밀접한 친척(親戚)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모두 원윤이었다는점으로 보아 형제 혹은 종형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진다. 이 비에 나타나는 인물들 가운데 고려사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고려의 건국공신들이며 대부분 명주, 죽주, 청주, 음성 일대의 호족들로 혜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정종과 광종을 옹립한 세력들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기오 기달 2인은 기씨 족보에 나타나지 않으며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도 확인하기 어려우나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타나는 장군 기언(奇彦)과 무관하지 않은 인물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기씨의 선대를 유추한다면 신라말 고려초 지방(아무래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기도 일대의)호족으로 대체로 육두품 세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징효대사와 직간접으로 제자였다는 사실은 최소한 육두품세력 이상이었을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강성한 호족세력은 아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태조는 강력한 호족들은 혼인을 통해 회유했는데 이 대상은 아니었고 또한 비문에나타나는 것처럼 18품계 가운데 6품에 속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금석문에는 기씨 족보에 나타나지 않는 인물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를 통해 기씨 족보의 보완이 가능하다. 이러한 금석문을 조선시대 족보를 간행하며 확인하지 못하였던 것이주된 까닭이었을 것이다.(기호철 글)

그러나 이 기언과 지금 현재 우리 기씨와 어떻게 세계가 연결이 되는지는 알수가 없다.

인종 때에 사신 기순우 할아버지와 기언과의 사이에 역사에 기록된 다른 기씨는 고려사절요/제2권/목종선양대왕(穆宗宣讓大王)/기유(己酉) 12년(서기 1009년)에 나오는 대의 기정업이다.

왕이 전우(殿宇)와 부고(府庫)가 탄 것을 보고는[王見殿宇府庫煨燼(왕견전우부고외신)] 슬퍼하고 탄식하다가 병환이 나서[悲嘆成疾(비탄성질)] 정사를 보살피지 못하였다.[不聽政(불청정)]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두 중과[王國師二僧(왕국사이승)]

태의(太醫) 기정업(奇貞業)[太醫奇貞業(태의기정업)]

태복(太卜) 진함조(晉含祚)[太卜晉含祚(태복진함조)] 태사(太史) 반희악(潘希渥)[太史潘希渥(태사반희악)] 재신 이부상서[宰臣吏部尙書(재신리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유진(劉瑨)[參知政事劉瑨(참지정사류진)] 이부시랑 중추원사(吏部侍郞中樞院使) 최항(崔沆)[吏部侍郞(리부시랑) 中樞院使崔沆(중추원사최항)] 급사중 중추원부사(給事中中樞院副使) 채충순(蔡忠順) 등은[給事中(급사중) 中樞院副使蔡忠順等(중추원부사채충순등)] 은대(銀臺 승정원)에서 숙직하다.[直宿銀臺(직숙은대)]

이 기정업도 현재의 우리와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계대를 못하고 있다.

기탁성이 의종 때에 무관이 되고 정중부의 무신난에 가담하여 권신이 되면서 기탁성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역사책이나 족보에 보이지 않던 기씨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1178년에 장군 기세준(奇世俊)을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고 1179년엔 중랑장 기세정(奇世貞)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입니다.

족보에서 1세조 순우(純祐) 할아버지는 高麗 仁宗時人 官門下平章事라 하지만 의종의 아버지 인종 때에 이렇게 높은 벼슬하신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선세업적에는 이곡이 지은 영안왕 행장 기록에서 가져왔다고 하지만 영안왕 행장을 읽어보아도 영안왕의 최대 선조는 2세조 수전 할아버지까지는 高祖門下侍郞平章事諱守全으로 나와도 순우 할아버지는 기록에 없습니다. 17세기에 나온 조종운이 지은 씨족원류 책의 행주기씨 부분에서 시조 순우 할아버지를 文林郞追封門下平章事太子太傅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기탁성이 정중부의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평양에서 일으킨 1174년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하러 부원수로 갈 때 19세의 최충헌을 별초도령으로 발탁하여 출정한 기록으로 보아 기탁성이 정3품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라 3성장군쯤되고 최충헌은 별초도령이라 중소위의 소대장 정도로 보면 나이는 20여년 차이가 날테고 크게보면 부모와 자식뻘로 보입니다. 이 최충헌의 첫 번쩨 부인이 송청의 딸입니다. 2세조 수전 할아버지도 부인이 송청의 딸입니다. 그러니까 둘은 동서간이 됩니다. 1세조 순우 할아버지가 벼슬이 말단의 종9품 문관인 문림랑文林郞 있는데 기탁성이 권신이 되어 여러 기씨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고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동서인 2세조 수전 할아버지가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면서 1세조 순우 할아버지도 정2품의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추증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족보에는 2세조 수전 할아버지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이 3세조 4분은 윤위, 윤숙, 필선 , 필준입니다. 같은 아버지 밑의 4형제인데 돌림자를 윤과 필로 2가지를 썼습니다. 족보를 읽다보면 형제를 넘어 4촌, 6촌, 8촌 등이 같은 글자를 돌림으로 쓰고 양자도 나타나는 경우는 고봉 할아버지 이후쯤이 되고 그전에는 4촌만 되어도 돌린자가 틀립니다. 여기에선 형제사이에도 2가지 돌림자를 쓰는 것을 보아서 제 느낌으로는 윤자 형제와 필자 형제는 어머니가 드른 배다른 형제들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가 최충헌 다음에 집권한 최충헌 큰아들 최우로 이어지면서 외4촌들인 윤위와 윤숙은 고려사 책에 기록이 보이지만 필선 할아버지와 필준은 보이지 않습니다. 큰아들 윤위는 아들이 없어 사위 손정렬이 가문을 이었다하고 둘째 윤위는 황후기씨의 고조부라 황후가족 하면서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단지 고려사엔 윤숙을 싫어해서 그런가 길 비키라고 소리지르며 기생집 출입했다고 비웃는 기록이 있는데요, 윤숙의 손녀사위가 송염이고 송염의 외손의 외손이 태종의 비 원경황후 민씨로 양령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도 윤숙의 유전자가 통하는데 너무 박하게 기록 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필선 할아버지의 후손이 현재 살아있는 모든 기씨들의 직계 할아버지이고 넷쩨 필준의 자식 기록은 없습니다. 필선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호철님이 찾아준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1로 471-9 옥천사에 있는 고성 옥천사 청동북(固城 玉泉寺 靑銅金鼓)에 남아 있습니다. 이 절에서 쓰는 꾕과리는 아니지만 그런 종류의 쇠북을 만들면서 제작비의 찬조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윤위의 사위 손정렬과 필선 할아버지의 부인이신 진원군부인 진원오씨 할머니 기록이 나옵니다.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3408)에서 판독문을 인용하면 高麗二十三王環甲之年壬子四月十二日在於京師工人家中鑄成智異山安養社之飯子入重六十餘斤同願施主者」 樞密院右副承宣孫挺烈 尙書皇甫琦檢校尙書兪承錫華嚴業三重勝壽大選景興知識正之 故上將軍奇弼宣之嘉偶珍原郡夫人吳氏」 이하 생략

번역문은 고려 23대왕(고려 고종)의 환갑(環甲)이 되는 해인 임자년(고종 39, 1252) 4월 12일 개경[京師]에 있는 공인(工人)의 집에서 지리산(智異山) 안양사(安養社)의 반자(飯子)를 주조하여 만드니, 무게가 60여 근이었다.. 함께 발원한 시주(施主)는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손정열(孫挺烈), 상서(尙書) 황보기(皇甫琦), 검교상서(檢校尙書) 유승석(兪承錫), 화엄종(華嚴宗) 삼중대사(三重大師) 승수(勝壽), 대선(大選) 경흥(景興), 지식(知識), 정지(正之), 돌아가신 상장군(上將軍) 기필선(奇弼宣)의 아름다운 배우자 진원군부인(珍原郡夫人) 오씨(吳氏) 이하생략

여기서 필선 할아버지를 弼宣이라 했고 족보엔 弼善으로 宣을 善으로 썼지만 선宣은 선善과 하나의 짝을 이룬다(善一作宣)라고 기록되어있어서 이것이 같은 분이라는 것은 명백하지만 공식적으로 사용한 글자가 善이 아니라 宣으로 사용이 되었다고 이렇게 문헌과 금석문이 다를 경우 금석문의 기록이 우선하기 때문에 善을 宣으로 바꾸어 기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족보에 부인 기록은 없는데 여기에 진원군부인오씨라고 기록되어서 진원오씨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행주기씨대동보 갑신보(2004년판)와 같이 배부한 별집의 92페이지 아래부분 추원단축을 보면 1세조모에 대하여 모르니까 군부인 공란 씨, 2세조모에 대하여는 군부인 송씨이고 3세조에서는 갑자기 군부인에서 숙부인 공란 씨로 나옵니다. 이것도 군부인 오씨로 축문을 바로 잡아야 겠습니다. 저는 씨족원류의 책은 없고 10여년전 이메일로 오모씨가 제게 문의가 왔습니다. 그 사람은 해주오씨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메일 중에 오씨는 다 뿌리가 같으나 파정도가 아니라 본관을 달리하는 옸들이 있는데 현재 진원오씨는 멸족하여 없다면서도 자기는 같은 뿌리 오씨들을 연구하는데 3세의 진원오씨 할머니와 4세 겸 할아버지의 부인도 진원오씨인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연속으로 같은 집안에서 시집온 것이 이상하다면서 혹시 4세의 오씨 할머니가 3세의 오씨 할머니인데 4세의 할머니로 잘못 기록된 것은 아닌지 제게 물어본적이 있습니다만 그것에 대하여 전 모르는 사항이라고 답한 기억이 납니다.

최충헌의 집권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기홍수입니다. 족보엔 기윤숙의 큰아들로 나오지만 기록을 찾아보면 최충헌과 함께 여러 국정을 논의한 기윤숙을 최충헌의 처조카의 아들로 족보에 기록한 것은 기윤숙의 아들들 돌림자가 홍이라서 같은 세대로 착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들을 인용하면 기홍수는 어려서는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지였으나, 장년이 되어서 무인이 되었다. 1194년(명종 24) 12월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197년 9월에 참지정사 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 11월엔 수사도 중서시랑 평장사감수국사 판병부사 태자태부(守司徒中書侍郎平章事監修國史判兵部事太子太傅)가 되었다. 1199년(신종 2) 5월에 몇필이라서 신종의 명령으로 『대관전무일편(大觀殿無逸篇)』을 고쳐 썼으며, 12월에 수태위 문하시랑 평장사(守太尉門下侍郎平章事), 1200년 12월에 수태사 주국(守太師柱國), 1201년 12월에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1203년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로 물러났다. 1204년 정월에 최충헌(崔忠獻) 등과 더불어 신종의 희종에게의 선위(禪位)를 논의하였고, 희종 때 이부(吏部)에서 전선(銓選: 인사행정)을 맡았으나, 최충헌에게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음악과 글씨를 즐겼다. 시호는 경의(景懿)이다. 부인은 기록이 없지만 인터넷에는 몰몬교에서 운영하는 족보에 기홍수의 부인이 박씨라고 나옵니다. 몰몬교에서 수집한 어느 박씨보에 기홍수가 사위로 나오는 듯한데 더 검색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기씨로서 기홍수가 높은 벼슬을 지낸 것도 중요하겠지만 기홍수가 물러나 음악과 글씨로 여생을 보낸 집터가 행주산성 안의 우리 행주기씨유허비가 있는 자리입니다. 기감천은 기홍수 집의 샘터이고 기가바위는 정원의 바위입니다. 기윤숙의 장남 기홍영은 황후 기씨의 증조부라서 왕으로 추증이 되었지만 왕이름은 무엇이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2004년판 족보편집을 한창하고 있던 2000년쯤에 원당의 도선산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기홍영의 왕이름을 인왕이라고 한 것을 보고 왕이름은 모른다고 알려졌는데 갑자기 어떻게 알았지 하고 있는데 옆에 계시던 기길수 아저씨가 내가 찾았어 하시더군요. 어디에서요? 하니까 족보의 지장록에 있더라구 하시면서 1982년판 족보의 지장록에서 이규보가 지은 영안왕 행장의 내용 가운데 仁王妃任氏를 보고 기홍영의 부인이 임씨라서 기홈영의 왕이름을 仁王으로 오해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저도 영안왕 행장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고 1세조 순우 할아버지 이름을 찾다가 못찾고 2세조 수전 할아버지 이름만 확인해본 상태였기에 영안왕 행장은 잘알려진 기록인데 왜 사학계는 모르고 있을까 하면서 이름 찾아 다행이다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서 영안왕 행장을 자세히 읽어보니 해답은 뒤에 있었습니다. 仁王妃任氏生毅明神三王號恭睿王太后而公之祖母實后弟平章 諱濡之孫는 기홍영의 부인 임씨에 대한 것은 맞지만 내용은 인왕비 임씨는 의 명 신 3왕을 낳은 공예왕태후의 친동생 濡의 손녀 라고 해석해야 맞는 것이 었습니다. 여기서 인왕이란 인종을 말하는 것으로 원나라에 눌려지내던 시기에 황제들이 쓰는 조나 종을 못쓰고 왕으로 붙인 듯합니다. 후에 인터넷에서 검색 가능한 영안왕 행장 뱐역을 읽어보아도 제가 맞는 해석이었지만 족보는 그후에 기홍영의 왕이름은 인왕이라고 인쇄되어 나왔습니다. 기홍영의 큰아들 기온 할아버지는 고종의 서녀가 부인이며 1274년에 원나라에 파견되어 원종의 서거를 알리고 원나라에 있던 충렬왕과 왕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왕비로 맞아오게 하였는데 손녀사위는 이중육이고 이중육의 사위는 김지복이고 김지복의 사위는 기중평 할아버지로 청파 기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이십니다. 그렇게 또 우리 기씨는 개성왕씨와 유전자가 연결이 됩니다. 무신난 이후에 떠오른 기씨들이 몽골에 굴복하면서 무신정권도 끝나고 이시기에 역사책엔 보이지만 족보엔 안나오던 기씨들을 언급하면 1216년에 기존정(奇存靖)이 거란과의 전쟁에 참전했고 1219년엔 낭장 기인보(奇仁甫)가 최충헌(崔忠獻)을 죽이려다 오히려 살해당했다하고 1228년엔 기저(奇泞)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고 1229년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1279년엔 기홍석(奇洪碩)이 동지밀직사 감찰제헌(同知密直事 監察提憲)이 되는 등의 기록이 보입니다.

기탁성과 기홍수가 기씨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들인데 아쉽게도 두분 다 조상과 자녀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기탁성은 1세조 순우 할아버지와 같은 세대 기홍수는 2세조 수전 할아버지와 같은 세대로 보여서 그 많은 고려시대 유명인사들의 묘지명은 많이 나오는데 이 2분의 묘지명은 없나 아쉬운 마음입니다. 묘지명엔 대게는 위로는 증조부까지 아래로는 후손도 기록이 있으니까 묘지명을 찾으면 혹시나 순우 할아버지나 수전 할아버지와 연결되는 형제 4촌 혹은 6촌의 관계를 찾을 수 있다면 순우 할아버지 이전의 할아버지들을 찾을 수도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입니다. 한족으로는 묘지명은 묘가 도굴꾼들에게나 지역개발로 이름모를 옛무덤이 파해쳐저서 찾아질 텐데 그런 험한 일은 않당해서 다행이다 라는 마음도 들고 아니면 두분 다 자손이 없어서 묘지명을 준비한 후손이 없나 그런 마음도 듭니다.

이번엔 황후에 대하여 정리하려 합니다. 그 전에 황후의 고조부 기윤숙의 큰사위가 족보엔 조순趙珣이라 나오지만 조계순趙季珣(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A%B3%84%EC%88%9C ) 입니다 최충현과 많이 엮였습니다.

공녀로 몽골에간 기자오의 딸이 원나라의 황후가 되자 황후의 아버지 기자오 할아버지 기관 증조부 기홍영은 왕으로 추증이 됩니다. 가자오의 행장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영안왕의 행장은 목은 이색의 아버지 가정 이곡이 지었는데 이곡의 문집인 가정집에 실려 전하고 우리의 대동보 지장록에도 그대로 옮겨져 있습니다. 이 기록이 중요한 것은 우리 행주기씨 상계의 조상이 수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행장의 재목부터 첨의정승僉議政丞이라는 직함이 나옵니다. 아직 영안왕으로 봉해지기 전의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계를 요점만 보면 曾祖증조는 諱이름이 允肅윤숙, 祖할아버지는 諱이름이 洪穎홍영, 考아버지는 諱이름이 琯관, 公공의 諱이름은 子敖자오다. 夫人부인은 三韓國대大夫人삼한국대부인 李氏이씨다.

할머니 임씨에 대하여는 仁王妃인왕비 任氏임씨는 生낳았다 毅,明,神三王의명신 3명의 왕을 。號恭睿王太后호는 공예왕태후라 하며。而公之 祖母공의 할머니가。實后弟친동생 평장平章 휘 유濡의 손녀다 했는데 지난번 대동보편수하며 어느 편수위원님은 기황후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가 왕으로 추증이 되었지만 아버지가 영안왕이라는 것은 알아도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왕이름(왕호)는 모른다고 전해진 기존의 기록이 틀리고 자신이 기황후의 증조부 왕이름은 인왕비 임씨라는 것만보고 인왕이라고 찾았다고 자신있게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 보여주신 것이 이 기록인데 다시보니 여기서의 인왕이란 고려의 인종을 말하는 것으로 인왕이 황후의 증조부 왕호가 아닌것을 잘못아신 것이다. 엉터리 기록이 족보에 남았습니다. 謹按요즘 살펴보니 奇氏기씨는 自國初우리나라(고려) 초기에 以武材稱무예 혹은 무공으로 재능이 알려져。世著其勞세상에 그 공노 혹은 노력을 알렸다。라는 글을 보면 우리 기씨는 왕건의 통일전쟁에서 좌익을 맡은신 삼국사기에는 기언奇彦으로 나오고 고려사에는 기언奇言으로 기록된 할아버지의 후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족보에는 영안왕행장에 나온다는 중시조 순우할아버지는 나오지 않고 2세 수전할아버지만 公공의 內外내외가 皆모두 名家명문가문이다。由즉 高祖고조부 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 諱이름 守全수전 以下이하로。出入將相장군으로 나아가 상국이 되어 혹은 장군과 상국을 배출하여。功施于民공을 백성에게 배풀었다고만 하였다.。영안왕에 대한 다른 기록으로 원나라 구양현이 묘비문을 지었는데 아직 확인을 못해보았지만 그 내용속에 중시조의 기록이 있는듯 하다. 왜냐하면 이곳엔 기록이 없는데 족보는 확실히 중시조의 이름을 기록했고 또한 2세 수전할아버지의 부인이신 홍주송씨 할머니에 대한 기록이 이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혹시나 그곳에도 순우할아버지가 언급이 없다면 이는 전부터 전해오던 가승에 근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녀에 대하여 生낳으니 五男 三女5남 3녀로。分나누어진 皇后황후는 其季그 막네이다. 長男장남 軾식은。先公공보다 먼저 歿죽었다。次다음 轍철은 。以僉議政丞첨의정승으로서。今지금 封德城府院君덕성부원군으로 봉해졌다。次다음 轅원은。以僉議贊成事첨의찬성사로서。今지금 封德陽君덕양군으로 봉했다。次다음 輈주는。大匡元尹대광원윤이다。次다음 輪윤은。右常侍우상시이다。長女 장녀는 適商議評理趙希忠상의평리 조희충을 맞아들였다。次다음 둘째사위는 適典儀令廉敦紹전의령 염돈소를 맞아들였다。孫男 손자는 凡모두 十一11명이다。長큰손자 天麟천린은。小字원나라이름으로 完澤普化완택보화이며。以版圖摠郞판도총랑으로서 入侍輦轂련곡으로 들어와。今지금은 爲直省舍人직성사인을 하고 있다.。次다음 仁傑인걸은 。小字몽고이름이 帖睦邇漙化첩목이단화 이며。以軍簿摠郞군부총랑으로 宿衞闕庭궁궐을 지키고 있다。次다음 天驥천기,有傑유걸,田龍전룡은 。皆모두 郞將낭장이고。餘나머지는 未仕아직 벼슬이 없다。孫女손녀는 七7명으로。長큰 손녀는 適弘福都監判官홍복도감판관 洪寶環홍보환을 맞아했고。餘나머지는 皆모두 幼어리다。 여기에서 족보에는 없는 내용이 손자 天麟천린, 天驥천기 適弘福都監判官홍복도감판관 洪寶環홍보환의 존재인데 이는 영안왕보다 먼저 죽은 큰 아들 軾식의 자녀로 보인다. 큰 아들 軾이 결혼도 하지 않고 어려서 일찍 죽은 듯이 기록된 책들이 있는데 여기엔 공 즉 아버지보다 먼져 죽었다 했지 어려서 죽었다는 말은 없다. 족보엔 기식에게 기철과 같은 덕성부원군이라 했지만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 보지는 못했습니다. 어쨌거나 군으로 봉해질 때는 결혼은 해서 아들도 두었지만 영안왕 먼저 죽었다고 봅니다. 물론 손자들은 어느 아들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족보 기록을 보면 돌림자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초의 찬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 형逈,원遠,괄适,진進,준遵 할아버지까지는 형제 사이에만 쓰였고 그 이후에나 큰대大자 항렬부터 4촌까지 사용한 것을 보면 당연히 당시는 형제 사이에만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 천자를 돌림자로 보면 이는 형제간이고 큰 손자가 천린이라하니 아무래도 큰손자는 큰아들의 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력곡 즉 연경에 들어가서 직성사인을 한다는 것으로 보아 연경의 황후에게로 가서 이 행장을 쓸 당시엔 직성사인을 하고 있었던 듯하고 1364년에 황후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으로 새로 고려왕을 봉하여 보낼 때 덕흥군의 원자로 삼아보낸 기삼보노가 이 천린이나 천기의 아들인 듯합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기록엔 영안왕의 손자들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있기는 합니다. 즉 공민왕 1354년 2월에 기윤(奇輪)을 삼사좌사, 기원(奇轅)의 아들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를 판밀직부사로 삼았고, 1354년 4월에는 기윤을 찬성사 덕산부원군(德山府院君), 기완자불화를 삼사좌사 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에 제배 했다. 그런데 족보는 여기나오는 11명의 손자와 7명의 손녀가 다 기록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씨족원류에 손녀사위 適弘福都監判官홍복도감판관 洪寶環홍보환은 둘째 기원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公之공의 家世가문 선세의 功德공덕은 。載在國史국사에 전재되어 있다 하는 것을 보면 고려실록에는 우리 기씨 선세의 기록이 있었던 듯 하지만 고려실록은 임진왜란 때에 타버려 없어졌고 지금 남아있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기황후가족을 깍아내리고 기철을 반역열전에 넣었으니 재대로 그 조상에 대한 기록을 할리는 없고 우리 선세기록을 잊어버렸으니 안타깝다。公之공의 事業焯焯혁혁한 사업은 。在人사람들의 耳目이목(눈과 귀)을 끌고 있으니。今지금 그 대강을 행장으로 정리할 때 掇其大槪爲行狀。채택될 준비를 한다.以備釆擇焉

1356년 양력 6월 7일엔 원에서 기원(奇轅)의 아들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 기울제이부카)를 보내 영안왕(榮安王)을 경왕(敬王)으로 고쳐 책봉하고, 또 3대를 추봉(追封)하여 왕으로 삼았으며 기철에게 대사도(大司徒)를 제수하였다. 하고 하여 구양현에게 영안왕의 비문을 짖게 하여 보내왔습니다.

高麗國 承奉郞,摠部散郞,賜緋魚袋,贈三重大匡,僉議政丞,判典理司事,上護軍 奇公 行狀。

曾祖 諱 允肅。金紫光祿大夫,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判吏部事 諡 康靖。祖 諱 洪穎。左右衞保勝郞將,贈 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考 諱 琯。奉翊大夫,三司右使上將軍。公 諱 子敖。字 子敖。幸州人。始 以 門功 拜 散員。至元 庚寅。叛王 乃頹之 黨 哈丹。與 其衆 東走 眞番。闌入 我疆。逆氣 張甚。所至殺掠。忠烈王偕帝女 安平公主。率 百官 入 江華島 避 其鋒。州郡皆 據險。且戰且守。中外洶洶。公 時爲 中軍偏將。負纛前驅。頗有功。賊平。累遷 摠部散郞。出 守 宣州。所居稱職。而有去思。自以奕世衣冠。仕不甚達。性又寬厚。且不喜干謁。日與賢士大夫游。務盡其歡。不理家人事產。年六十三。以天曆戊辰卒于家。夫人 三韓國太夫人 李氏。左僕射 諱 湊 之 孫 國學祭酒 諱 行儉 之 女。族大德茂。克配君子。生五男 三女。分 皇后 其季也。謹按 奇氏 自國初 以武材稱。世著其勞。及 仁王妃 任氏 生 毅,明,神三王。號恭睿王太后。而公之 祖母。實后弟 平章 諱 濡 之 孫。判事 諱 景恂 之 女。自是任,奇兩姓。益大以貴。甲於東國。侍中康靖以冡宰相毅,明,神。當 毅王末年 武人 鄭仲夫 作亂。殲朝臣擅廢立。自是權臣繼踵。搢紳重足。而能從容以道。終始扶持。不失舊物。侍中之力居多矣。僕射慷慨持節義。當國步艱難。晉陽公崔怡顓檀。雖連姻權臣不肯阿諛。每曉以逆順禍福。姦不得發。怡旣病。其子沆不肖。人多附沆而僕射獨疾之。怡嘗問後於人。僕射卽擧賢以對。及沆嗣。以前嫌見斥。飮恨以卒。時人惜之。三司 始諱 璋。後 避國 諱 更焉。初以將軍出爲忠州牧。專尙寬和。蒲鞭薤水。民不忍欺。政最。召拜上將軍。俄遷鷹揚軍。國制凡軍政賞罰。將校進退。一聽於鷹揚。三司不私其恩威。動以禮法。軍士感服。由是驟登相府。忠烈王以巨室國老。尤加禮貌。哀榮無及焉者。公之妣。延興郡夫人朴氏。典法判書諱暉之女。侍中李文眞公藏用之外孫也。至元元年。有詔今歲王公群牧咸會上都。王其乘驛而朝。文眞以平章。從忠烈王入覲。寵遇異常。文眞德業文章。聞于中國。時右丞相東平忠憲王甚器重之。待以殊禮。坐必虛其右。翰林王學士諸公歆其風裁。皆願內交。凡所對揚休命與本國興利除害者。民到于今賴之。公內外皆名家。由高祖門下侍郞平章事諱守全以下。出入將相。功施于民。而不食舊德。卒於下位。天將大其報而有待于後乎。長男軾。先公歿。次轍。以僉議政丞。今封德城府院君。次轅。以僉議贊成事。今封德陽君。次輈。大匡元尹。次輪。右常侍。長女適商議評理趙希忠。次適典儀令廉敦紹。孫男凡十一。長天麟。小字完澤普化。以版圖摠郞入侍輦轂。今爲直省舍人。次仁傑。小字帖睦邇漙化。以軍簿摠郞宿衞闕庭。次天驥,有傑,田龍。皆郞將。餘未仕。孫女七。長適弘福都監判官洪寶環。餘皆幼。公之家世功德。載在國史。公之事業焯焯。在人耳目。今掇其大槪爲行狀。以備釆擇焉。至正▣▣ 八月初一日。謹狀。

위의 글을 다음 까페에 쓰고 나서 몇년후에 영안왕 행장이 민족문화추진회 현재의 고전번역원에서 번역되어 인터넷에 올라와서 추가로 올립니다.

증조(曾祖)는 휘 윤숙(允肅)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판이부사(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判吏部事)를 지냈고, 시호는 강정(康靖)이다.

조(祖)는 휘 홍영(洪穎)으로,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保勝郞將)을 지냈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에 증직되었다. 고(考)는 휘 관(琯)으로,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사우사 상장군(三司右使上將軍)을 지냈다.

공의 휘는 자오(子敖)요, 자도 자오(子敖)이니, 행주(幸州) 사람이다. 처음에 문공(門功)으로 산원(散員)에 임명되었다. 지원(至元) 경인년(1290, 충렬왕 16)에 반란을 일으킨 원(元)나라 대왕(大王) 내안(乃顔)의 일당인 합단(哈丹)이 그 무리와 함께 동쪽을 향해 진번(眞番) 쪽으로 도주하여 우리나라 강역으로 난입하였는데, 그 반역의 기세가 매우 성한 가운데 가는 곳마다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충렬왕(忠烈王)이 황제의 딸인 안평공주(安平公主)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 그 예봉을 피하였고, 주군(州郡)도 모두 험한 요새지에 의거하여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지키느라 중외가 흉흉하였다.

공이 이때에 중군 편장(中軍偏將)의 신분으로 깃발을 등에 지고 선두에서 치달리는 등 자못 공을 세웠다. 적이 평정되고 나서 여러 차례 승진하여 총부 산랑(摠部散郞)이 되었고, 외방에 나가서 선주(宣州)를 다스리기도 하였는데, 거하는 곳마다 그 직책에 걸맞게 하였으므로 떠난 뒤에는 사람들이 공을 그리워하였다. 공은 원래 대대로 빛나는 의관(衣冠) 가문의 출신인데도 벼슬길에서 그다지 현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성품이 관후한 데다 높은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청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날마다 어진 사대부들과 어울려 노닐면서 환락을 다하기에 힘썼을 뿐, 집안의 살림살이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63세의 나이로 천력(天曆) 무진년(1328, 충숙왕 15)에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부인 삼한국태부인(三韓國太夫人) 이씨(李氏)는 좌복야(左僕射) 휘 주(湊)의 손녀요, 국학 좨주(國學祭酒) 휘 행검(行儉)의 따님이다. 대족 출신으로 성대한 덕을 갖추고 군자의 짝이 되어 5남 3녀를 낳았는데, 지금의 황후는 그 막내이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기씨(奇氏)는 국가의 초창기부터 무재(武材)로 일컬음을 받으면서 대대로 공로를 드러냈다. 그 뒤에 인왕(仁王 인종)의 왕비 임씨(任氏)가 의왕(毅王 의종)ㆍ명왕(明王 명종)ㆍ신왕(神王 신종) 의 세 왕을 낳고 공예왕태후(恭睿王太后)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공의 조모는 바로 왕태후의 아우인 평장(平章) 휘 유(濡)의 손녀요, 판사(判事) 휘 경순(景恂)의 따님이다. 이로부터 임씨와 기씨 두 성씨가 더욱 커지고 귀해지면서 동국(東國)의 으뜸이 되었다.

공의 증조인 시중(侍中) 강정공(康靖公)은 총재(冢宰)로서 의왕ㆍ명왕ㆍ신왕을 보필하였다. 의왕 말년을 당하여 무인 정중부(鄭仲夫)가 난을 일으켜 조정의 신하들을 죽이고 왕의 폐립을 마음대로 하였다. 이로부터 권신이 계속해서 그 뒤를 이어 나오자 진신(搢紳)들이 겁에 질려 꼼짝하지 못했는데, 이런 와중에서도 침착하게 도를 견지하며 시종 부지(扶持)해서 선왕의 옛 기업을 잃지 않게 한 것은 시중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공의 조부인 복야(僕射) 역시 비분강개하며 절의를 몸에 지녔다. 국가의 운세가 힘들고 어려운 때를 당하여 진양공(晉陽公) 최이(崔怡)가 나랏일을 제멋대로 처리하였는데, 공이 비록 권신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긴 하였으나 아첨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매번 역순(逆順)과 화복(禍福)의 도리를 가지고 깨우쳐서 간특한 짓을 자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최이가 병들어 눕게 됨에, 그 아들 항(沆)이 못나고 어리석은데도 사람들이 대부분 항에게 빌붙었으나 복야만은 그를 미워하였다. 최이가 언젠가 후계자를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에, 복야가 곧장 현인(賢人)을 천거하면서 그를 후계자로 하라고 답변한 적이 있었다. 그 뒤에 항이 후계자가 되고 나서 예전의 유감을 풀려고 공을 배척하였다. 이에 공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니, 당시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공의 부친인 삼사(三司)는 본래 휘가 장(璋)이었으나, 뒤에 국휘(國諱 임금의 이름)를 피하여 개명하였다. 처음에 장군의 신분으로 외방에 나가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었는데, 오로지 관대하고 온화하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포편(蒲鞭)과 해수(薤水)의 정사를 펼쳤으므로 백성들이 차마 기만하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사의 성적이 우수해서 부름을 받고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가 얼마 뒤에 응양군(鷹揚軍)으로 영전하였다.

국가의 제도에 의하면, 군정(軍政)과 관련된 상벌과 장교의 진퇴에 대한 일은 일체 응양(鷹揚)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삼사는 그 은혜와 위엄을 내리는 권한을 사적으로 행사하지 않고 예법에 입각해서 행하였으므로 군사들이 감복하였다. 이로부터 빠른 속도로 승진하여 상부(相府)에 오르게 되었는데, 충렬왕(忠烈王)이 거실(巨室)이요 국로(國老)라고 하여 더욱 예모를 가하였으며, 애영(哀榮)의 은혜에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공의 모친인 연흥군부인(延興郡夫人) 박씨(朴氏)는 전법 판서(典法判書) 휘 휘(暉)의 따님이요, 시중(侍中) 문진공(文眞公) 이장용(李藏用)의 외손이다. 지원(至元) 원년(1264, 원종 5)에 조칙(詔勅)을 내리기를 “올해에는 왕공(王公)과 군목(群牧) 모두 상도(上都)에 서 모일 것이니, 왕은 역마를 타고 입조하라.”라고 하였다. 이때 문진공이 평장(平章)의 신분으로 당시 왕세자였던 충렬왕(忠烈王)을 따라 입근(入覲)해서 비상한 총애를 받았는데, 이로부터 문진공의 덕업과 문장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에 우승상(右丞相)이었던 동평 충헌왕(東平忠憲王)이 문진공을 매우 큰 그릇으로 여겨 특별한 예로 대우하면서 앉을 때에는 반드시 오른쪽 자리를 비워 두곤 하였으며, 한림(翰林) 왕 학사(王學士) 등 제공도 그 풍도를 흠모하여 모두 교제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의 아름다운 명을 선양하는 동시에 본국의 이익을 도모하고 해를 제거하여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덕을 입게 하였다.

공은 이처럼 내외가 모두 명문 출신이다. 고조(高祖)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휘 수전(守全) 이하로부터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백성에게 은공을 베풀었는데, 공이 그 음덕(陰德)을 향유하지 못하고서 낮은 지위로 생을 마쳤으니, 이는 어쩌면 하늘이 그 보답을 크게 하여 후손에게 베풀어 주려고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남 식(軾)은 공보다 먼저 죽었다. 다음 철(轍)은 첨의 정승(僉議政丞)으로 지금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고, 다음 원(轅)은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로 지금 덕양군(德陽君)에 봉해졌고, 다음 주(輈)는 대광(大匡)으로 원윤(元尹)이고, 다음 윤(輪)은 우상시(右常侍)이다. 장녀는 상의 평리(商議評理) 조희충(趙希忠)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전의령(典儀令) 염돈소(廉敦紹)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모두 11인이다. 장손 천린(天麟)은 소자(小字)가 완택보화(完澤普化)인데 판도 총랑(版圖摠郞)으로 연곡(輦轂 연경)에 입시하여 지금 직성 사인(直省舍人)으로 있고, 다음 인걸(仁傑)은 소자가 첩목이보화(帖睦邇溥化)인데 군부 총랑(軍簿摠郞)으로 궐정(闕庭)에서 숙위하고 있고, 다음 천기(天驥)와 유걸(有傑)과 전룡(田龍)은 모두 낭장(郞將)이고, 나머지는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손녀는 7인이다. 장손녀는 홍복도감 판관(弘福都監判官) 홍보환(洪寶環)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공의 가문에서 대대로 쌓은 공덕은 국가의 사책에 기재되어 있고, 공의 빛나는 사업은 사람들의 귀와 눈에 들어 있다. 지금 그중에 대체적인 내용만을 간추려 행장을 지어서 채택할 자료로 제공하고자 한다.

지정(至正) 모년 8월 1일에 삼가 짓다.

[주D-001]포편(蒲鞭) : 때려도 아프지 않도록 부들 가지로 만든 회초리를 말한다. 후한(後漢) 유관(劉寬)이 남양 태수(南陽太守)로 있을 적에 관리와 백성들이 혹 과실을 범하더라도 형벌 대신 포편으로 다스려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여 감화시킨 고사가 있다. 지방 장관이 관후하게 백성을 사랑하며 심복시킬 때의 비유로 흔히 쓰인다. 《後漢書 卷25 劉寬列傳》

[주D-002]해수(薤水) : 지방 장관이 청렴하게 지내면서 호족(豪族)을 진압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것을 말한다. 후한 방삼(龐參)이 한양 태수(漢陽太守)로 부임하여 고사(高士)인 임당(任棠)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가 아무 말 없이 염교의 큰 뿌리 하나〔薤一大本〕와 물 한 사발〔水一盂〕을 문 앞에 놓고는 손자 아이를 품에 안고 엎드려 있자, 방삼이 한참 동안 그 의미를 생각하다가 ‘물처럼 청렴하고, 염교 뿌리를 뽑아 버리듯 힘 있는 자를 억누르고, 손자 아이처럼 약한 백성을 돌보아 주라는 뜻’임을 깨닫고는 돌아가서 그대로 실천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51 龐參列傳》

[주D-003]애영(哀榮)의 은혜 : 임금이 신하에 대해서 생전과 사후 모두 영광스럽게 되도록 해 주었다는 말인데, 《논어》 자장(子張)의 “살아서는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죽어서는 사람들이 모두 애통하게 여긴다.〔其生也榮 其死也哀〕”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4]상도(上都) : 지금의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해당하는 난하(灤河) 북안(北岸)의 개평부(開平府)에 위치하였는데, 난경(灤京) 혹은 난도(灤都)라고도 하였다. 대도(大都)인 연경(燕京)과 함께 양도(兩都)로 칭해졌으며, 1년에 한 번씩 천자가 순행하게 되어 있었다.

기자오가 영안왕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원나라 정부안에서 공민왕과 영앙왕의 지위는 명목상 같았습니다. 원은 자주 사신을 보내 기황후의 어머니 삼한국대부인 이씨를 예우했는데, 공민왕 역시 대우를 극진히 했습니다. 공민왕은 특히 새해의 시작엔 이씨를 방문했으며, 원나라 사신(元使)들이 베푸는 잔치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기황후의 생일에는 예외 없이 사신을 원에 파견했습니다. 1355년 8월에 열린 잔치에서의 자리배치를 보면, 공민왕과 이씨(李氏)는 모두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서 앉고 황후의 언니 조희충(趙希忠)의 처는 동쪽에서(東) 서쪽을 향해 앉고 기철과 원나라 사신(元使)은 서쪽에서(西)에 동쪽을 향해 앉고 재추(宰樞)는 계상(階上)에 앉았다. 만만(巒巒)태자가 황태자에 책봉되어 고려를 방문하여 외할머니께 인사할 때 축하 잔치에서는 노국(魯國)공주와 황태자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고 공민왕은 서(西)쪽에 앉고 이씨(李氏)는 동(東)쪽에 앉았는데, 공민왕이 술을 부어 먼저 무릎을 꿇고 황태자에게 올리니 황태자가 서서 마시고 황태자가 술을 부어 외할머니 이씨(李氏)에게 드리고 다음에 공민왕과 노국공주에게 드렸다.

기원이 공민왕과 말을 나란히 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 황후의 형제들이 공민왕과 같은 지위를 가진 것으로 과시하려 하고, 황후의 친척동생 기삼만은 남의 땅을 함부로 빼앗다가 1347년 감옥에 갇혀 옥사하는 등의 여러 문제를 일으키자 원 황실과 연결된 기씨들은 존재만으로도 공민왕에게 위협적인 세력이었습니다. 이에 1356년에 공민왕은 원나라가 양해진 틈을 타서 기철 등을 제거하고 일부는 원으로 도망갔습니다. 기철 등의 제거는 고려의 국권을 회복하고 국정을 정상화하기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황후는 가만히 있지 않고 공민왕을 폐하고 중으로 원에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하고 중이어서 아들이 없던 덕흥군의 원자로 기씨를 삼아 1만의 군사를 주어 고려로 보냈습니다.

덕흥군이후의 고려는 왕씨고려가 아니라 기씨의 고려로 만들려고 했지만 최영,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지고 물러납니다. 원으로 도망가거나 원에 있던 기철의 아들등은 이성계의 요동 공격으로 물러나 이후엔 역사책에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후손들이 절손되지 않았고 성씨도 기씨를 계속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고려에 남은 기철의 아들들은 머리 깎고 숨은 아이도 찾아내어 다 죽였지만 딸과 손자는 죽이지 않았나 봅니다. 기철의 사위 왕중귀의 먼 외손의 외손 가운데에서 3명의 왕비가 나옵니다. 족보를 인용하겠습니다.

왕중귀王重貴 안동사람安東人이다. 본성本姓은 권씨權氏. 벼슬은 동지밀직同知密. 아버지는 정승政丞 정헌공正獻公 왕후王煦. 아들들이 권씨權氏로 다시 돌아갔다. 큰아들 소윤少尹 권숙權肅, 둘째 집의執義 권엄權嚴, 셋째 사직司直 권도權道, 큰사위 박중의朴仲宜는 본本이 죽산竹山. 둘째사위 순성군順城君 왕정王侹. 셋째사위는 이판吏判에 추증된 허기許愭는 본本이 양천陽川. 허기의 아들은 허비許扉, 허비의 큰아들은 영상領相에 추증된 허손許蓀. 둘째는 군수郡守 허훈許薰, 셋째는 군수郡守 허지許芝. 넷째는 주부主簿 허형許蘅. 허손의 사위는 감찰監察 신영석申永錫, 첨지僉知 박임종朴林宗은 본本이 나주羅州. 신영석의 사위는 사인舍人으로 영상에 추증된 심순문沈順門으로 본本이 청송靑松. 심순문의 아들은 영상 심연원沈連源, 심연원의 아들은 청능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綱으로 명종明宗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를 낳았다. 박임종의 아들은 정랑正郎 박조년朴兆年, 박조년의 아들은 사련司諫 박소朴紹, 박소의 아들은 번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으로 선조宣祖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를 낳았다, 허형의 아들은 부정副正 허감許瑊, 허감의 아들은 찬성贊成에 추증된 허초許礎, 허초의 아들은 지사知事 허잠許潜, 허잠의 사위는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 이광정의 사위는 본이 여흥인 민광훈(閔光勳), 민광훈의 아들은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으로 숙종肅宗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낳았다.

족보에 나오는 명종明宗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선조宣祖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숙종肅宗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 3명의 왕비 말고ᄃᆂ 민유중維重의 5대손五代孫은 민치록致祿의 딸은 고종高宗비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기철이 없었다면 이 4분의 왕비들은 탄생 할 수가 없는 분들이다. 그러나 4분 모두 후손이 왕이 되고 이어진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기철-인걸-신-석손-채로 이어지던 기철의 후손은 현손자 채가 아들없이 딸이 경주정씨 정효상에게 시집가서 황후집안에 내려오던 모든 재산은 경주정씨 문헌공파 제안공종중(http://www.jeangong.com)으로 넘어 갔습니다. 경기도 파주시 금릉동의 파주시청에서 봉일천 방향으로 나가면 파주시에서 건설한 파주스타디움이 있고 그 위가 기철의 선산(경기도 파주시 학령로 41-16)이다. 그러나 묘를 소개하는 경주정씨의 홈에는 기철의 손자 신, 석손, 채의 묘는 소개하는 것이 없습니다. 재산 가운데 가장 가치있는 종산은 가져갔지만 묘는 관리하지 않은 듯합니다.

황후기씨의 묘가 연천에 있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고 굳이 있다면 이곳 파주 금촌에 있을 겁니다. 기황후의 능이 연천에 있지 않은 이유는 원사나 고려사 등에 기황후의 능을 고려에 조성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연천현읍지에 기황후가 죽은 뒤 고려에 묻어 달라는 내용의 기록이 확인되나 조선 말기의 너무 뒷날의 기록으로 전해오는 전설을 적은 것일 뿐입니다. 이 밖에 기황후의 능터로 알려진 건 동국여지지의 영향이 큰데, 연천현 능묘 관련 내용 중 기후(奇后)묘 부분 때문입니다. 내용은 연천현의 동북쪽 15리에 기후묘가 있으며, 기황후의 능으로 전해져 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동국여지지의 편찬자 역시 기황후가 동쪽으로 돌아와 장례를 지낸 일이 없으니, 이 무덤이 황후의 어머니(국대부인, 國大夫人) 장례를 치른 곳이 아닌가?라며 의문을 남겼습니다. 즉, 연천에 있었다는 무덤이 기황후의 능으로 전설이 내려온다는 것일 뿐,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은 없습니다. 전국적으로 공녀를 신분 낮은 출신으로 단정하고 그럼에도불구하고 신데렐라처럼 황후가 되었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은 전국 여러 곳에 황후의 능이라는 전설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중엔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에도 기황후의 능이 있다는 논란을 다룬 중부일보의 2008년 9월 1일자 기사(http://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808)도 찾을 수 있습니다. 내용을 인용하면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궁골' 일대가 때아닌 중국 황후 출생지설에 휩싸였다. 1일 진천군 등에 따르면 이월면 궁골 일대는 오래 전부터 원나라 기황후의 출생지로 알려지면서 진천군지도 마을유래 편에서 이와 관련된 설화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진천군지 내용 중 관련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궁동(궁골 지칭)은 중국의 원나라 황제의 황후 기씨가 탄생한 곳이다. 기 황후는 상산의 아름다운 정기를 타고 옥녀봉의 옥녀와 같은 어여쁜 모습으로 이 고장에 태어났다(…) 중국 홀필렬(忽必烈·원나라 쿠빌라이) 황제가 천지를 두루살펴 황후감을 구했지만 상대자가 전혀 없었는데, 이때에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지역을 살피어 보니 한 지역에 아름다운 서기가 어리고 있었다. 홀필렬은 매우 기뻐하며 서기가 서린 기씨 댁을 찾아가서 기처녀 부모에게 큰절을 하고 사위로 삼아줄 것을 간곡히 졸랐다. 기처녀 부모들은 처음에 반대하였으나 기처녀가 시집가기를 은근히 바라는 기색이라 홀필렬은 기처녀를 황후로 맞이하였다'. '홀필렬은 기황후의 부모를 위해 그가 탄생한 지역에 웅장한 궁궐을 세웠다. 지금은 밭이 되었지만 지금도 거기에 가보면 당시 쓰였던 주춧돌이 아련히 남아있고 부서진 기왓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출처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http://www.jbnews.com) 이것 말고도 찾으면 여렇 있을 겁니다.

행주기씨카페에 올라온 기호철님 글이 있는데 저는 전적으로 동의 하고 정리합니다.

[기황후의 묘소가 연천에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가능성은 전혀 없는 세 가지 이유입니다.

첫번째, 원사를 검색하면 1368년, 주원장의 명나라 군이 대도 즉 북경으로 몰려오자 원나라는 응창부(應昌府)로 천도를 하였고 황후도 이때 응창으로 같이 갔습니다. 1368년 응창에서 포로가 되었고 1370년 순제(혜종)이 죽고 아들 아유르시리다르가 북원 소종으로 황좌를 계승했고 소종은 1378년 죽습니다. 그 소종의 아들은 황제가 되지 못하고 이복 동생이 황위를 이어갑니다.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고 언제 돌아가셨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응창은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에 있습니다. 돌아가신 시기는 이 응창으로 물러난 1368년에서 소종이 죽은 1378년 10년 사이일텐데 누가 시신을 고려로 모셔 왔을 까요? 지금도 이장이 쉬운 일이 아닌데 국가적 사업이 아닌다음에야 누가 그 큰일을 할수있었겠습니까? 국가적 사업이었다면 고려사에 기록이 남았겠지만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항후를 따라 원에 가 있던 황후의 조카들이 이장했을 가능성도 없습니다. 1356년에 병진참화로 기철이하 황후가족이 몰살된후 황후는 1364년엔 충선왕 아들로 중이 되어 원나라에 머물던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고 중이라 자녀가 없는 덕흥군의 양자로 기삼보노를 원자로 삼아 고려로 보내 왕씨고려를 기씨고려로 바꾸려 했지만 이성계이하 고려군이게 대패하여 실패하였고 1370년엔 압록강 건너 동녕부에서 기철의 아들 기새인첩목아가 원나라 평장사로서 아버지 원수를 갚고자 하자 이성계이하 장수를 보내 쫓아 낸 상태라 공민왕 시기에 황후가족이 황후시신을 모셔와 고려땅에 능을 썼을 가는성은 없습니다. 황후가족이 아니라면 우리집안은 어떤가 보겠습니다. 이 시기 1368년에서 1371년까지는 신돈과 엮인 기현 할아버지가 신돈의 힘을 빌려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민왕이 살아있는데 아무리 권력이 있다해도 이장을 실행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더구나 1371년에 신해참화로 기현 할아버지 이하 아들 5형제가 다 죽임을 당하신 마당에 우리 집도 건사하기 힘든 우리 집안에서 이장을 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재산은 남았지만 벼슬도 재대로 못하던 기철의 후손도 힘쓸 여력은 없었습니다.

둘째, 여차저차해서 시신을 국내에 모셨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당시 신흥 강국 명나라와 외교적 분쟁의 소지가 있는 기황후의 시신을 몰래라도 모시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번쩨로 유형원이 편찬한 동국여지지 혹은 조선 영조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 그리고 연천읍지 등에 묘 기록이 나온다지만 황후사후 상당히 후대의 기록이고 앞서 말쓰드린 신데렐라적으로 고려시대 황후가 민중속에서 부러움 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설화로 전설로 남아 연천 지역 설화를 역사적 사실과 혼동한 읍지 편찬자의 소견 부족 때문입니다. 그럼 황후의 무덤은 연천에만 있다고 하는가하면 그것도 아니랍니다. 전라도 보성 모후산도 기황후가 숨어 살았다고 해서 모후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며 남쪽 골짝에 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있다 하고 화순에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한글지명총람에서 찾아보면 기황후 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전하는 곳은 우리나라를 통틀어 그 수가 많이 있다 합니다. 이는 고려시대 기황후가 민중속에서 추앙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설화로, 전설로 남아 점차 그 실체를 다른 것에 부회하면서 빚어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를 추숭하고 그렇게라도 기씨홍보가 된다면 긍정적으로 볼일이지만 단지 연천군에서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기위해 홍보하는 것으로 밖에는 않보이는 일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뭐라 할수 없지만 전 대종중이름 기씨전체이름으로 역사를 조금만 공부한 사람들은 가능성 없어 보이는 연천군의 홍보에 동원되는 것은 반대합니다

대종중에서 그것을 사실이라고 보는 분이 적지 않아 학계에서 웃음거리입니다.

며칠전 연천의 아무개가 기황후 무덤이라는 곳을 파서 나온 유물을 문화재로 지정 신청을 하겠다고 하는 모양이다. 지정신청서를 넣는 그 순간 도굴범으로 바로 형사 구속이다. 그 사람은 확신에 차서 유물을 보이지 않는 모양인데, 이미 간접 확인한 바에 따르면 삼국시대 고분을 도굴한 것이다.

결코 한반도에서 기황후 무덤이 있을 수도 없고 있다면 100% 가짜이니, 혹여라도 땅을 파보거나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기씨로는 국내에서 절손되고 외손은 번성한 황후의 친척들을 끝내고 현재 기씨의 본류를 이루고 있는 3세 필선 할아버지의 후손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3세 필선 할아버지의 사위 김기손에 대하여 족보는 먼 외손들 가운데 4명의 왕비를 배출합니다. 족보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김기손金起孫, 경주김씨慶州金氏, 벼슬은 시중侍中, 아들은 시랑侍郞 신우信佑, 사위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천李仟, 이천의 큰 아들은 전한典翰 이자원李子蒝, 작은 아들은 정승政丞을 지낸 문장공文莊公 이혼李混, 이자원의 아들은 대제학大提學 이언충李彦冲 이언충의 아들은 판사判司 이광기李光起, 이광기의 사위는 본관이 파평坡平사람으로 영평군鈴平君 윤척尹陟, 윤척의 손자는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번尹番이며 세조世祖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를 낳았다, 윤번의 현손자는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 이광기의 동생은 부사副使 이광익李光翊, 이광익의 손자는 판사判司 이욱李勖, 이욱의 사위는 본관이 청주淸州로 판중추判中樞를 지낸 한창韓昌, 한창의 아들은 청주부원군淸州府院君 한백륜韓伯倫으로 예종睿宗비 안순왕후安順王后를 낳았다. 이광기의 넷째 아들은 이사안李思安, 이사안의 현손은 감사監司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이덕영李德榮, 사위는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尹之任으로 중종中宗왕비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낳았다.]

4세 기겸 할아버지에게는 아들이 3명이고 큰아들인 기강 후손은 절손되었고 둘째 아들 기유裕의 후손이 기씨의 대종손가이지만 큰 정치적 화를 당한 것도 없는데 번성하지 못했습니다. 이 집안은 묘의 위치들을 보면 안산의 사내곡과 용인 그리고 충북 옥천 등지에 거주해 왔습니다. 많은 집은 아니고 10가구 이내의 집안으로 보입니다. 역사책에 나오는 기염廉의 문중분은 임진왜란에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경호하여 종전후에 호성공신이 된 12세손 기효복이 있습니다. 그 후엔 크게 이름이 오르신 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의 만전상공이 16세손인 것을 보면 4세손이나 차이가 납니다. 이에 대하여 족보엔 평을 하고 있습니다. 인용하면 [재신宰臣 기염奇廉의 아들 기삼동奇三同의 구보舊譜에 관한 내용은 이 기록이 전부이다. 그러나 지금今 그 세수를 고찰하는데考之其世數 있어서 항상 의문이 있다尙有可疑. 고려말 기염奇廉의 세수차이를 고찰하는데 기록상 현손 고흥군 기효복奇孝福이 있다其玄孫高興君孝福. 고려말 재신宰臣 기염奇廉 공公과 조선 선조 때 임진2등공신壬辰二等功臣 기효복奇孝福 공公과의 사이에 200년간은 맞지 않는다宣廟壬辰功臣則二百年間不應世數止. 즉 2~3세의 누락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지만此宰臣高興之間恐有二三世失漏 옛 기록이 부족하여 확실한 단정은 할 수 없고不能臆斷 이러한 내용을 여기에 기록하여 남긴다故姑錄於此.]

4세손 기겸 할아버지의 사위로 김지수라고 있습니다. 족보엔 화평김씨로 나오고 요즘 본관으로는 광산김씨입니다. 그 손자 가운데에 김원명이 있는데 기철을 제거하는 데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됩니다. 이 김원명이 신돈을 공민왕에게 소개하여 고려 정치에 등장합니다. 기겸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인신 5세손 기절 할아버지의 후손이 현재 남북 전체 기씨의 후손으로 공민왕시대에 사셨고 신돈이 숙청되면서 같이 죽임를 당하신 7세손 기현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기현 할아버지는 2번 결혼하신 족보기록이 있고 첫 번째 부인은 윤씨 할머니이고 두 번째 부인이 김황의 딸 김씨로 자식을 낳아 기른 적은 없다[無育]고 족보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황후 기씨의 할아버지 이신 족보엔 인왕으로 잘못 기록된 기관의 형이 기온 할아버지로 호부상서를 지내셨구요, 그 둘째 아들이 진소 할아버지 이시며 사위는 이중육입니다. 이 이중육의 사위가 강능김씨 김지복으로 김황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기현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 강능김씨와 김지복은 남매사이가 되고 김지복의 사위는 기현 할아버지의 큰아들 8세손 기중평 할아버지입니다. 기중평 할아버지의 부인이신 강능김씨와는 고모와 조카이면서 새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됩니다. 기중평 할아버지는 청파 정무공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입니다. 이 기황의 딸 김씨와 신돈과의 인연으로 기현 할아버지와 연결이 되는 데 고려사의 지저분한 기록을 순화하여 풀어봅니다.

[처음에 기현의 후처가 과부였을 때에 신돈이 승려로서 알고 지내던 사이고, 나중에 기현에게 시집을 갔다. 신돈이 궁궐에서 나와서 기현(奇顯)의 집에 머물렀다. 모든 관리들이 모두 기현 집에 와서 일을 의논하니 기현의 처가 음식 시중을 주관하게 하였다. 신돈(辛旽)이 기현(奇顯)의 집에 살면서 개성 봉선사(奉先寺) 소나무 언덕을 지나 궁을 출입하였다. 봉선사가 있는 언덕 서남쪽에 약간 빈 땅이 있어 신돈이 이곳에 집을 지었다. 이 집을 기현의 처가 관리자가 되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거나 관직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처나 첩을 보내서 먼저 기현의 처에게 뇌물을 주고서야 들어가 신돈을 만날 수 있었다. 처첩들이 뇌물을 가지고 홀로 들어가 바라는 바를 전달하게 하였다. 신돈이 홀로 상대하니 추악한 소문이 돌았다. 기현과 그 처가 신돈을 모시면서 아침 저녁으로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으니, 늙은 노비 같았다.]

[〈공민왕(恭愍王)〉 20년(1371) 신돈(辛旽)의 잔치가 열렸는데, 왕이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니 시중(侍中)부터 그 이하 관작이 있는 자가 모두 참여하여 200여 명이나 되었다. (중략) 신돈이 은혜와 원한이 있으면 반드시 갚으니, 세가대족(世家大族)이 거의 다 죽임을 당하여 사람들이 〈그를〉 범이나 이리처럼 보았고, 심지어 벼슬아치를 밤에 자기 집에서 숙직시키기도 하였으며 자질을 따져 벼슬을 주기도 하니, 나가면 시중 이하가 앞뒤를 에워싸서 도로가 막힐 지경이어서 시장에서는 물건도 벌여놓지 않았다. 기현(奇顯)과 최사원(崔思遠)이 심복이 되고 이춘부(李春富)와 김란(金蘭)이 양팔이 되었으며 그 무리가 조정에 가득 차니, 왕도 스스로 불안한 뜻이 있어 영상(領相)이라고만 부르고 감히 관직명을 부르지 못하였다.]

신돈은 요승이다 개혁가다 등 평가가 여러 가지 이지만 공민왕이 세력이 커진 신돈에게 위협을 느껴 신돈을 숙청하면서 기현 할아버지와 연좌된 아들들 기중평 할아버지, 기중리, 기중제 할아버지, 기중수 할아버지가 다 죽임을 당하십니다.

고려사를 인용하면

[1371년 7월 6일(음) 병진(丙辰) 1371년 8월 16일(양) 병진날에 선부의랑(選部議郞) 이인(李韌)이 익명서를 올려 신돈(辛旽)의 모역(謀逆)을 보고하였고, 〈이에〉 그 일당 기현(奇顯)· 최사원(崔思遠)· 정구한(鄭龜漢)· 진윤검(陳允儉)· 기중수(奇仲修) 등을 국문하고 죽였다. 丙辰 選部議郞李韌上匿名書, 告辛旽謀逆, 鞫其黨奇顯·崔思遠·鄭龜漢·陳允儉·奇仲修等, 誅之.

1371년 7월 26일(음) 병자(丙子) 1371년 9월 5일(양)

병자날에 신돈(辛旽)의 무리 이춘부(李春富)· 김란(金蘭)· 이운목(李云牧)을 죽였고, 그 아들들을 유배 보냈다. 또한 신돈의 아들인 2세 아이와 기현(奇顯)의 아들 기중평(奇仲平)을 죽였고, 김진(金縝) 및 대호군(大護軍) 김정(金鼎)을 장형에 처하고 유배 보냈다. 丙子 誅辛旽黨李春富·金蘭·李云牧編配其子. 又斬旽子二歲兒及奇顯子仲平, 杖流金縝及大護軍金鼎.

1371년 8월 11일(음) 신묘(辛卯), 1371년 9월 20일(양)

신묘날에 신돈(辛旽) 같은 무리인 신돈(辛純)· 신귀(辛貴)· 임희재(林熙載)· 기숙륜(奇叔倫)· 기중제(奇仲齊)· 최진(崔津)을 죽이고, 홍영통(洪永通)· 김횡(金鋐)· 허완(許完)· 오중화(吳仲華)· 성준덕(成俊德)· 오일악(吳一鶚), 그리고 이춘부(李春富)의 아우 이광부(李光富)·이원부(李原富)를 유배 보냈다. 辛卯 誅旽黨辛純·辛貴·林熙載·奇叔倫·奇仲齊·崔津, 流洪永通·金鋐·許完·吳仲華·成俊德·吳一鶚, 及李春富弟光富·原富.]

[기현(奇顯)의 아들 기중제(奇仲齊)·기숙륜(奇淑倫)·기중평(奇仲平) 奇顯子仲齊·淑倫·仲平]

[기현의 아들 전 정랑(正郞) 기중수(奇仲修) 顯子前正郞仲修]

족보엔 기현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 가운데 기숙륜이 안나오고 기중리가 나오는데 벼슬이 사간이라고 하고 고려사엔 우사간(右司諫) 기숙륜(奇叔倫)이라는 기록으로 기숙륜이 기중리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현 할아버지의 형 기자수의 사위인 오일악(吳一鶚)이나 기중제의 사위 고민(高敏)도 같은 무리로 유배를 당합니다. 기현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 기중민 할아버지가 이때 연좌되어 죽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사건 이전에 죽은 듯합니다. 기현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의 부인들과 자녀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을 것입니다. 황후의 일족이 당한 것과 함께 공민왕에게 이때 다시 기씨들이 몰살당하는 처참한 기씨의 가장 침체기를 맞이합니다.

1371년 신해참화가 일어나고 19년후 1392년 고려는 망하고 조선이 됩니다. 조선개국후 17년후이고 신해참화후 38년후인 1409년 4둴 7일의 조선태종실록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임금(태종)이 문소전(文昭殿 : 태조(太祖)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를 모신 사당)에 직접 제사하고, 드디어 인덕궁(仁德宮; 경기도 개풍군 興敎면 흥교리에 있던 정종(定宗)이 退位한 뒤에 살던 궁)에 가서 문병하고 돌아왔다. 상왕(上王:정종)의 궁인(宮人) 가운데 이름이 자재(自在)라는 사람이 있는데, 공안부(恭安府; 정종이 태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자, 태종이 정종의 남은 삶을 돕기 위해 설치한 일종의 비서기관) 여종이었다. 상왕이 불쌍히 여겨 임금에게 부탁하여 왕패(王牌;임금이 서명하고 대보(大寶)를 찍어서 면역시킬 때 내려 주던 서류)를 주어 영구히 양인(良人)으로 방면(放免)하도록 하였다. 대개 상왕에게 총애를 받아 자녀 여덟을 낳았는데, 이군생(李群生)이 그 맏이다.

○己卯/上親祭于文昭殿, 遂詣仁德宮, 問疾而還。 上王宮人名自在者, 恭安府婢也。 上王憐之, 囑于上, 令給王牌, 永放爲良。 蓋寵於上王, 生子女八, 羣生, 其長也。]

여기서 관노비로있던 자재(自在)는 큰아들 이름 이군생으로 알 수 있는데 8세손 기중평 할아버지의 손녀이고 9세손 기면 할아버지의 따님이고 10세손 정무공 청파 기건 할아버지의 누이입니다. 조선시대 여자이름으로 온전하게 전하는 분이 별로 없는 데 조선실록에 정확히 기자재라고 기록이 남은 특이한 경우입니다.

1428년 세종대왕이 선물을 하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실록 41권, 세종 10년 8월 28일

순평군(順平君)의 어머니에게 관곽과 쌀·콩 아울러 20석과 종이 70권을 내려 주었다.

○賜順平君母棺槨及米豆幷二十石、紙七十卷。]

48년후인 1457년 세조실록 세조 3년 6월 13일엔 돌아가신 기록도 있습니다.

[○정석정(貞石正) 이융생(李隆生)의 어머니가 졸(卒)하니, 부의(賻儀)로 쌀·콩 아울러 20석과 종이 70권(卷)과 관곽(棺槨)을 하사(下賜)하였다.

○貞石正 隆生母卒, 賜賻米豆幷二十石、紙七十卷、棺槨。]

1371년 신돈의 숙청과 그래서 돌아가신 7세손 기현 할아버지 그리고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신 8세손 기중평 할아버지이후 9세손 기면 할아버지와 그 자녀분들은 죽음은 면했지만 관노비가 되었다가 1409년 태종이 정종을 문병간 자리에서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의 누이 기자재 대고모를 사면 요청하고 태종이 받아들여서 관노비에서 풀려나고 종2품 내명부의 숙의가 되는 이 과정에서 살아계셨다면 할머니 강능김씨, 아버지 기면 할아버지, 남매사이인 청파 할아버지, 자매 사이인 남원윤씨 윤지득의 부인과 진주류씨 류양식의 부인도 노비 신분에서 양인으로 돌아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벼슬이 없다는 뜻의 베로 만든 옷(布衣포의)으로 계시던 청파 할아버지가 왕가의 인척이 되어 세종시대에 음서로 벼슬을 시작하여 기탁성이후 다시 기씨의 중흥조가 되십니다. 9세 기면 할아버지가 공조전서를 지냈다고 하지만 실재 공조전서를 지내신 것이 아니라 기자재 대고모가 종2품 숙의가 되면서 아버지에게 내린 벼슬이나 추증으로 봅니다.

기자재 대고모가 기씨를 구했다면 원당 정무공 도선산에 있는 남원윤씨 윤지득의 부인이신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의 누이에게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원당 도선산은 기자재 대고모의 왕가와의 인연으로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사패지(賜牌地)로 보이고 그래서 9세 7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를 쓰려고 했는데 윤지득의 부인이 아버지 묘자리가 탐나서 자기 남편 윤지득의 묘자리로 쓰고자 밤새워 파놓은 묘자리에 물을 날라 부어 놓았고 묘자리에서 물이 나온다고 판단한 청파 할아버지는 묘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 명당 자리는 윤지득이 차지하여 몇일전 방문한 남원윤씨의 묘가 우리 도선산에 있는 연유입니다. 옮겨간 묘소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족보의 설명대로 행주기씨 대종중의 진짜 도선산인 지금은 남의 땅이 된 천보산으로 보입니다.

족보상으로 7세조 기현 할아버지에게는 아들이 5형제 있습니다. 순서는 기중평, 기중리, 기중민, 기중제, 기중수입니다. 첫째 기중평 할아버지는 종7품 직장直長 벼슬을 지내셔서 직장공으로 불리시며 청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시고 후손이 기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둘째 기중리 할아버지는 자식이 없다고 하지만 벼슬이 사간司諫이라고 해서 앞서 고려사에서 확인되는 기숙륜의 벼슬 우사간右司諫인 것으로 보아 기중리가 기숙륜으로 판단을 했습니다. 자녀는 없습니다. 셋째 기중민 할아버지는 벼슬이 정6품의 낭장郎將을 지내셔서 낭장공으로 불리시며 후손은 황해도 지역에서 해서문중의 주류를 이룹니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행주기씨 최초로 1664년에 족보를 발행한 곳이 해방전 일제시기까지 가장 큰 행주기씨 집성촌이 황해도 금천군 좌면 암사리에 있었고 그 외에도 많은 가구가 재령평야가 있는 재령군에 살며 가까운 신천군, 봉산군, 평산군, 서흥군, 해주, 연백군, 송화군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일부가 평안도로 넘어가 평양옆의 평안남도 성천군 사가면에 삽니다. 병자호란에 순절한 무과출신의 기효일이 유명합니다. 넷째 기중제 할아버지는 벼슬이 종6품의 규정糾正을 지내셔서 규정공으로 불리시며 후손도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 지역에 살며 해서문중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중민 할아버지 후손에 비해서는 미약합니다. 후손은 군수 현령 등의 벼슬을 재고 있으며 현손녀 사위 2명이 왕족이 있습니다. 큰사위는 검천부정劒川副正 이즙李楫이고 둘째사위가 사천부수泗川副守 이탑李榻으로 효령대군의 증손자입니다. 조선초기까지는 왕족들과도 교류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다섯째 기중수 할아버지는 벼슬이 관리들을 감찰하는 종5품 지평持平을 지내셔서 지평공으로 불리십니다. 지평공은 아들이 다섯이고 첫째 아들 기렴은 딸 하나만 두었고 둘째 아들 기임稔 할아버지의 후손은 경남 김해시에 삽니다. 셋째 아들 기책責 할아버지의 후손은 손자 기정지 할아버지가 파주 교하 송촌에 정착하여 삽니다. 넷째 기질質 할아버지는 벼슬이 강화부사와 부평부사를 거처 호조참판에 이르렀고 부인은 황희정승의 5번째 딸입니다. 족보에 자녀는 아들이 하나 기시경 이라 나오지만 조선세조실록 1461년 7월 3일 기록은 선조와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대입라면 무슨 내용인지 이해 할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질 할아버지의 후손은 족보에 경남 의령군 부림면에 산다고 나옵니다. 실록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부평 부사(富平府使) 기질(奇質)의 첩(妾)의 아들 기중산(奇仲山)은 이미 속신(贖身)하여 양인(良人)이 되어 충찬위(忠贊衛)에 소속되었는데, 기질이 막내아들 기보(奇寶)를 종애(鍾愛) 하여 가계를 이어 제사를 받들게 시키려고 하고 도리어 기중산을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천한 아내에게 장가들었으니 가계를 이어 제사를 받들게함은 도리에 마땅치 못하다.’고 하고, 혹은 말하기를, ‘충찬위에 입속(入屬)한 것은 나의 아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여, 여러 가지로 말을 얽어서 그 아들을 아들로 여기지 아니하여 장고(狀告)까지 하였으며, 큰아들을 폐하고 작은아들을 세우는 것을 그 마음대로 하니, 나라의 법을 허물어뜨리고 강상(綱常)을 어지럽게 하여 형상이 없음이 막심합니다. 만약 사유(赦宥)를 지난 까닭으로써 다스리지 아니하면 징계함이 없을 것이니, 청컨대 기중산으로 하여금 예전대로 가계를 이어 제사를 받들게 하고, 기질은 파직시키소서." 하니, 명하여 기중산은 가계를 이어 제사를 받들게 시키고, 기질은 파직시키지 말게 하였다.

○司憲府啓: "富平府使奇質妾子仲山, 旣贖身爲良, 屬忠贊衛, 質鍾愛季子寶, 欲令承重, 反以仲山爲非己之子, 或言 ‘娶賤妻, 義不當承重’, 或言 ‘入屬忠贊衛, 非吾所知,’ 多般構辭, 不子其子, 至於狀告, 廢立長少任其情私, 棄毁國典, 紊亂綱常, 無狀莫甚。 若以經赦不治, 無以懲戒, 請令仲山仍舊承重, 罷質職。" 命仲山承重, 勿罷質職]

다섯째 아들 기분賁 할아버지는 벼슬이 공조참판工曹參判까지 지내셨고 아들 기자환 할아버지의 막내딸은 덕수이씨 이효조에게 시집갔고 이효조는 영웅을 넘어 성웅으로 불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증조부이니 증조모가 됩니다. 기분할 아버지의 현손자 기원길 할아버지와 큰아들 기복성 할아버지는 묘가 평산에 있다는 것으로 보아 개성 옆의 황해도 평산군에 사신 것으로 보입니다. 기복성 할아버지의 아들 기윤전 할아버지는 묘가 한전에 있고 자손이 이어내려오며 산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한전이 어디 인지는 옛지명이라 모르지만 그 아들 기준영 할아버지의 묘는 정족우산동이라는 것을 보아서는 황해도 재령군으로 이주하여 후손이 사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원길 할아버지의 작은 아들 기복량 할아버지와 아들 기극창 할아버지는 묘가 구례인 것으로 보아 황해도 평산에서 전남 구례로 이주하셨고 다시 아들 기택룡 할아버지부터 묘가 전남 곡성군 죽곡면 반송리인 것으로 보아서 구례에서 다시 곡성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평공 기중수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 가운데 역사책에 명확히 나타나는 넷째 기질 할아버지와 기분 할아버지 기록을 보면서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신해 참화로 중자 돌림 5형제가 모두 죽임을 당한 해는 1371년인데 위의 기분 할아버지에 대한 조선세조실록 기록은 1461년으로 90년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막내 기분 할아버지가 참화가 나던 1371년에 태어났다고 해도 90살이시고 그 바로 위의 형은 2살 터울이라 하면 92살이 됩니다. 92살에 부평부사 벼슬을 하고 있고 나중에 호조참판까지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평공 할아버지와의 사이에 누군가 할아버지가 있어야 하고 5형제분은 지평공 할아버지의 손자들 이어야 나이가 맞습니다. 현대에 와서도 제가 광주문중으로 28세손이고 인너넷 족보에 올라온 족보 통계를 보아 27세와 함께 딱 중간입니다. 장성문중은 평균이 28세나 29세입니다. 그러나 김해와 곡성에 사시는 지평공 후손은 항렬이 25세인 연자 돌림이 중간입니다. 중간에 3세 정도의 누락이 있다고 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시대 인물과 사건을 얘기 하겠습니다. 아시는 것과 같이 조선은 일제가 신분제를 없애기 전까지 500년간 지속된 양반이냐 아니냐 그리고 적자냐 서자냐를 엄격히 따진 신분제 사회입니다. 그것이 오늘을 나는 우리에게도 영향를 미치고 있기 때문에 같은 핏줄의 기씨라도 신분이 달랐던 분들의 후손은 보면서 기분이 나쁠수도 있습니다. 되도록 밝히지 않겠지만 이야기의 흐름으로는 알려야 그 상황을 이해하는 경우는 밝히겠습니다. 양해 해주시고 읽어 주십시오

조선에 처음 시작하신분은 9세손 전서공 기면 할아버지입니다. 전서공 할아버지는 1남3녀를 두셨고 족보상 첫째는 도선산에 전서공 묘자리를 차지한 윤지득의 처입니다. 윤지득의 후손으로 유영한 사람은 병자년전쟁에서 청나라에 대항하여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싸우자고 하던 이른바 3학사의 한사람인 윤집과 구테타를 일으켜 광해 임금을 몰아낸 능양군의 부인으로 있다가 구테타 성공후에 인조비가 되는 장렬왕후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정종의 후궁으로 숙의를 지내신 기자재 대고모로 족보상 외후손으로는 효종비 인선왕후, 그리고 세도정치를 대표하는 안동김씨가 후손으로 순조비 순원왕후, 헌종비 효현왕후, 철종비 철인왕후, 직계후손으로 유명한 사람은 청장관전서를 지은 이덕무와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지은 이규경이 있습니다.

셋째는 류양식 처입니다. 외후손으로는 숙종비 인현왕후와 인원왕후 그리고 고종비 명성황후가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가장 중요하신 원당 도선산의 중심이신 정무공 청파 기건 할아버지입니다.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가 언제 태어나셨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돌아가신 기록은 조선실록에 기록이 있어 1460년을 알고 있습니다. 어느 자료에는 1360년으로 나오기도 합니다만 그러면 100세를 사신 것이 되고 신해참화가 일어난 1371년에 태어나셨 89세까지 사신 것이 되고 조선이 건국되던 1392년에 태어나셨다면 68세까지 사신 것으로 됩니다. 그러나 숙의 기자재 대고모의 큰아들 순평군 이군생이 조선이 건국되던 이 1392년생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고모가 큰아들을 20세쯤에 낳았고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는 대고모보다 10살정도 어리다고 보아 1382년쯤 태어나신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면 대충 78세정도 사신 것으로 추정합니다. 집이 청파만리현靑坡萬里峴에 있었다 합니다. 오늘날의 서울 용산구 청파동은 청파 할아버지가 사시던 동네라고 해서 그 동명이 생긴 유래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는 나라에서 받은 시호인 정무가 더 중요해서 정무공으로 아직도 정무를 더 높게 불리지만 오늘날까지 할아버지의 호가 동이름 청파로 남아서 세상사람들에게 청파 할아버지는 몰라도 청파는 들어봤을 것이기에 정무공은 우리 후손들이 간직하고 청파 할아버지를 정무보다 더 부르는 것이 좋겠다 생각합니다. 옛날 분들 이름은 여러 가지지요. 명은 왕 혹은 족보나 정부같은 공식 문서에 기록하는 이름으로 함부로 부르지도 못하게 하였고 어른이 되며 자를 만들어 불렀지만 이것도 명보다는 못해도 역시나 함부로 부를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 호를 만들어 함부로는 아니지만 후손들도 친근하게 불렀던 이름이라 이제부터 저는 정무공 청파 건 할아버지를 청파 할아버지라고만 하겠습니다. 청파만리현은 청파동에서 훈민정음 반대산소문을 대표로 올린 최만리가 살던 동네이름에서 유래한 만리동의 고개라고 하니까 지금 숙명여대가 있는 청파동에서 북쪽으로 배문중고등학교부근에 집이 있었던 듯합니다. 이 집은 용재총화를 지은 성현의 옆집이라하고 집이 크고 좋아서 명나라 사신이 와서 임시로 묵을 숙소 후보로 나라에서 살펴보았다는 것을 어디서 보았는데 어딘지 차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청파 할아버지께서는 이집에서 걸어서 혜화동의 성균관까지 등교하면서 반드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등의 경서經書를 외우고 다녔다고 합니다. 세종 때에는 포의布衣(벼슬이 없음)로 발탁되어 집의執義를 시작으로 황해도 연안부사, 전라감사겸전주부윤, 제주목사, 호조참판, 중추원부사, 세종이 승하하자 명나라에 이를 알리는 고부사의 부사로 다녀오고 함길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개성부유수, 한성부윤, 사헌부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판한성부사, 중추원사가 되어 명나라에 2번째 다녀오고 행 첨지중추원사,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옛날에 여자들이 집밖에 나올 때에는 머리덥개가 없었으므로 청파 할아버지가 새로이 남바우를 만들어서 임금에게 올렸는데 이것이 조선시대에 여자들이 뒤집어쓰고 다니는 머리덥개가 되었다 합니다. 제주목사 시절에 제주의 풍속은 부모를 매장하지 않고 죽으면 구덩이에 버렸었지만 청파 할아버지가 부임하여 관을 마련하고 염을 하고서 매장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제주도에서는 어버이를 매장하는 방법이 청파 할아버지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청파 할아버지의 꿈에서 300여명이 뜰 아래서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며 그들이 말하기를 [공公의 혜택으로 우리들의 뼈가 땅에 묻히었으니 땅 위에 드러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보은할 길이 없사오나 공公께서는 꼭 금년今年에는 현손賢孫을 보실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전에 公의 아들 세명이 모두 아들이 없었다가 과연 이해에 공公의 아들 장령공 기축軸이 아들을 낳았으니 정렬공 기찬襸이었다 합니다. 또, 황해도 연안부사로 있을 때에는 붕어가 나는 큰 못이 있었는데 전임 부사가 붕어를 먹기 좋아하여 백성들이 붕어 잡느라 고생하여 사람들이 붕어무덤이라고 비웃었지만, 청파 할아버지가 부사로 부임하여 {어찌 입과 뱃속이 즐겁자고 청렴이 상하게 하겠는가?} 하고는 먹지 않았으며 손님을 대접하는 때가 아니면 붕어잡기위해 그물 못하게 금지하였으므로 주민들은 크게 좋아하였다 합니다. 단종 때부터는 벼슬을 끊고서 지낼 때인데 수양대군이 여러 번 찾았으나 눈은 뜨고 있으나 볼 수 없는 청맹과니인척하자 수양대군이 어느날 바늘로 찔러 시험해 보려 했지만 청파 할아버지는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바라보며 눈동자를 굴리거나 피하지 않았으므로 수양대군은 청파 할아버지를 기용하지 못하여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는 계유정란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집안의 화도 면하였다 합니다.

세조실록 22권, 1460년 세조 6년 12월 29일 신축에 청파 할아버지 돌아가신 기록이 있습니다. [중추원사(中樞院使) 기건(奇虔)이 졸(卒)하였다. 기건은 기현(奇顯)의 후손인데,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정고(貞苦)하여 작은 행실도 반드시 조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연안(延安) 군수가 되었는데, 군민(郡民)들이 붕어[鯽魚]를 바치는 것 때문에 그물질하여 잡기에 피곤해 하니 3년 동안 먹지 않고 또 술도 마시지 않았다. 체임(遞任)하여 돌아올 때에 백성(父老)들이 전송하니, 기건이 종일토록 마시어도 취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탄식하기를, ‘이제서야 우리 백성을 위하여 마시지 않은 것을 알겠다.’ 하였다. 또 제주(濟州)를 안무(安撫)하는데, 백성들이 전복[鰒魚]을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니, 역시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두어 도의 관찰사(觀察使)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歷任)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시호(諡號)를 정무(貞武)라 하니, 청렴하고 결백하여 절개를 지키는 것이 정(貞)이요, 백성에게 모범되게 하여 복종시키는 것이 무(武)이다.

○辛丑/中樞院使奇虔卒。 虔, 奇顯之後, 性淸簡貞苦, 細行必謹, 好讀書。 嘗守延安, 以郡民進鯽魚, 困於捕網, 三年不食, 又不飮酒。 及遞還, 父老餞之, 虔終日飮不醉。 父老歎曰, "今乃知爲吾民不飮耳。" 又按撫濟州, 民病所貢鰒魚, 亦三年不食鰒。 歷數道觀察使、大司憲, 所至有名。 諡貞武, 淸白守節 ‘貞’, 刑民克服 ‘武。’]

단종실록 5권, 단종 1년 3월 28일 을유 3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대사헌(大司憲) 기건(奇虔)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출납(出納)의 직책은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소중하여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舜) 임금이 용(龍)206) 에게 임명하여 납언(納言)으로 삼았으며, 말씀하기를, ‘밤낮으로 짐(朕)의 명을 출납(出納)하되 오로지 진실하게 하라." 하셨으니, 순 임금 같은 큰 성인(聖人)으로서는 마땅히 좌우의 광필(匡弼)에 기대하는 것이 없을 듯한데도 반드시 출납의 임직을 소중하게 여기심이 이와 같았습니다. 하물며 지금 주상 전하께서는 어리고 겸억(謙抑)207) 하여 서정(庶政)의 만기(萬機)208) 를 모두 정부에 자문하고, 그리고 승정원(承政院)이 오로지 출납을 관장하므로 그 임무가 더욱 중하고 그 책임이 더욱 크니, 이 직책에 있는 자는 마땅히 더욱 소심하게 근신(謹愼)하며 밤낮으로 혹시 실수함으로써 전하께서 위임(委任)한 높은 뜻을 저버려서 중외(中外)의 대소 신서(大小臣庶)의 소망을 외롭게 할까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지난번에 산릉 도감의 관리가 삼가지 못한 죄를 본부(本府)에 명하여 다스리게 하므로 전 대사헌 이인손(李仁孫) 등은 추핵(推劾)하여 죄 주기를 청하니,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죄를 청하는 것이 과중하다.’ 하여, 도리어 헌부(憲府)를 탄핵하였으므로 정부로 하여금 불문(不問)에 붙이기를 청하였으나 그렇게 되지 못하였습니다. 헌부에서 용서를 받음에 이르자, 또 다시 도감의 죄를 굳이 청하는 의논을 내어 위험을 무릅쓰고 강력히 다투니 말이 격렬하게 나왔고, 승정원은 헌관(憲官)의 강경(剛鯁)함을 꺼리어 또 아뢰어 모조리 가두었습니다. 그 전지를 초하여 올릴 적에는 ‘고집하여 고치지 않는 것’을 가지고 허물을 삼았으며, ‘언사가 과격한 것을 가지고 말이 무례(無禮)에 관계되었다.’고 하였는데, 의금부에서 국문하여 아뢰는 날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제서유위(制書有違)의 율(律)’ 과 ‘난언(亂言)의 율(律)’ 로써 하여야 하는데도 의정부에서는 협조하지 않고 그 서장을 보류(保留)하도록 청하였으며, 승정원은 급하게 이 형률에 의하여 교지를 받드니, 비록 좌죄(坐罪)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특별한 은전에서 나온 것이어서 실상 그 율(律)을 적용한 것입니다. 처음에 형조로 내렸을 적에 ‘정부에서 묻지 말기를 청하였다.’ 하였은즉, 그것은 정부에 의논하지 않고 스스로 전단한 것이 분명합니다. 정부에서 묻지 말기를 청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또 조율장(照律狀)209) 을 보류하도록 청하였어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공의(公議)를 두려워하지 않고 뜻대로 맡겨 스스로 방자하게 한 것이며, 그리고 속으로부터 막아 누른 것도 또한 분명합니다.

대체로 시시비비(是是非非)란 스스로 공론이 있는 것이라, 공론이 있는 것이라면 비록 하관과 말단 관료[末僚]의 말일지라도 진실로 마땅히 돕고 인도하여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묘당(廟堂)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묘당 공론(廟堂公論)도 오히려 억제를 당한다면 비록 가모(嘉謀)210) 와 직언(直言)이라 하여도 진실로 그 마음에 기뻐하지 않는 것이니 어찌 기꺼이 아뢰어 드림으로써 전하의 총명을 넓히기를 즐겨 하겠습니까? 대간은 전하의 귀와 눈이므로 이로써 기강을 유지하는 것인데, 정원은 가볍게 스스로 굴욕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전하의 팔과 다리이므로 함께 정사(政事)를 도모하고 의논하는 것인데도 정원에서 그 바른 의논을 쓰지 아니하니, 그 중앙에 있으면서 권세를 희롱하는 버릇이 점점 현저(顯著)하여 기탄하는 바 없음이 심합니다. 혹시 ‘이 일은 모두 주상의 교시에서 나왔고 정원에서 천단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크게 옳지 못합니다. 평상시에 있어서 〈왕명을〉 출납할 적에 비록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먼저 승정원으로 하여금 상의하도록 되어 있는데, 언관(言官)을 책출(責黜)하는 일보다 더 큰일이 무엇이길래, 정원에 내보내지 않겠습니까? 정원에서 비록 교묘한 말로 스스로 면하려고 하지만 어찌 온 나라의 귀와 눈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에 사두(詞頭)를 봉하여 돌려보내고, 조서(詔書)를 봉하여 돌려보내며, 황마(黃麻)를 찢어 버리고 조칙을 받들지 않으려고 어찰(御札)을 불사른 자도 있고, 또 걸(桀)·주(紂)에 비하는 자나, 욕심이 많다고 면대하여 꾸짖은 자도 있어서 군상(君上)을 지탄(指彈)하기를 이를 데 없이 함부로 한 자도 많았지만, 당시에 ‘위제(違制)’와 ‘난언(亂言)’으로 죄 주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언관(言官)이 그 책임을 다하고자 하여 한번 과격한 말을 하였다고 과죄(科罪)하는 것이 이에 이른다면, 그것은 오직 말씀에 순종하여 어기지 않게 한 뒤에야 그만두려 하십니까? 대체로 간언을 막는 것은 크게 임금의 미덕이 아닙니다. 도승지(都承旨) 강맹경(姜孟卿)은 한 아문의 장(長)이 되어 〈왕명의〉 출납을 전담 총찰하였고, 좌승지(左承旨) 박중손(朴仲孫)은 직책이 형옥(刑獄)을 관장하여 실로 이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전하의 초복(初服)211) 을 당하여 계옥(啓沃)212) 하여야 할 지위에 있으면서도 간언을 용납하는 미덕으로써 보도(輔導)하지 아니하고, 그른 데로 인도함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로서 평안하게 여길 것이겠습니까? 맹자(孟子)께서 말하기를, ‘임금의 악(惡)을 조장(助長)하는 것은 그 죄가 작고, 〈착한 임금에게 아첨하여〉 임금을 그르고 악하게 유도하는 것은 그 죄가 크다.’ 하였습니다. 지금 이 일은 두 사람의 농간에서 나온 것으로서 전하께서 간언에 따르시기를 물 흐름과 같이 하는 덕(德)을 욕되게 함이니, 그 죄는 임금을 악으로 유도하는 사람의 〈죄〉보다도 더 심하여 신린(臣隣)213) 이 함께 분개하는 것입니다. 신 등은 ‘강맹경과 박중손은 결코 좌우에 있음이 마땅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원대(遠大)한 도모를 생각하시어 빨리 파출(罷黜)하도록 명하여 먼저 근밀(近密)한 자리를 숙청하고, 이어서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정유(情由)를 국문하여서 법으로 밝게 처치함으로써 신린의 분함을 쾌(快)하게 하는 동시에, 근신(近臣)이 권세를 희롱하는 버릇을 막고, 곧은 선비가 과감하게 말하는 기상을 진작하소서. 또 옥관(獄官)은 모든 형률을 의논할 때 반드시 정상에 맞게 한 뒤에야 형벌이 적중하여 후세에 법을 삼게 하는 것입니다. 의금부는 언관(言官)으로서 그 의논을 고집함을 ‘제서유위(制書有違)’라 하고 충분(忠憤) 격절(激切)한 말을 ‘난언(亂言)’이라고 하여, 죄명을 짜내고 언로(言路)를 굳게 막음은 후세에 보일 수 없는 일입니다. 의금부 관리의 죄 또한 작지 아니하니, 또한 파출하여 공도(公道)를 밝게 하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니, 승지 등을 인견하고 의논하여 말하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니, 권준(權蹲)이 아뢰기를,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박중손은 자리에 있다가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고, 여러 승지도 역시 얼굴빛이 변하며 인혐(引嫌)하니, 전지하기를, "피혐(避嫌)하지 말라." 하였다. 그때의 공론이 그것을 시원하게 여기어 말하기를, "헌사(憲司)에서 사람을 얻었다." 하였다.

註 206]용(龍) : 순임금의 신하.

註 207]겸억(謙抑) : 겸손한 태도로 자기를 억제하는 것.

註 208]만기(萬機) : 정치상의 여러 중요한 기틀.

註 209]조율장(照律狀) : 죄를 법률에 비추어 그 형을 매기어 임금에게 아뢰던 장신(狀申).

註 210]가모(嘉謀) : 나라 일에 대하여 임금께 권하거나 아뢰는 좋은 의견.

註 211]초복(初服) : 왕이 처음으로 정치를 잡고 교화를 베풀음.

註 212]계옥(啓沃) : 흉금을 털어 놓고 생각하는 바를 임금에게 말함.

註 213]신린(臣隣) : 한 임금을 보필하고 있는 신하끼리의 처지.

○大司憲奇虔等上疏曰:

臣等竊惟, 出納之職, 所係至重, 不可不愼。 舜命龍作納言曰: "夙夜出納朕命, 惟允。" 以舜大聖, 宜若無待於左右之匡弼, 而必歸重於出納之任, 如此。 況今主上殿下幼沖, 謙抑庶政, 萬機悉咨政府, 而承政院專掌出納, 則其任益重, 其責益大, 居是職者, 尤當小心謹愼, 夙夜危慮, 常恐一辭之或差, 一事之或失, 以負殿下委任之隆, 而孤中外大小臣庶之望也。 項者, 山陵都監官吏不謹之罪, 命本府治之, 前大司憲李仁孫等推劾請罪, 承政院啓, 以請罪過中, 反劾憲府, 至使政府, 請置勿問而不得。 及憲府蒙宥, 復出固請都監之罪, 冒威力爭, 言出激切, 承政院忌憲官之剛鯁, 又啓而盡囚之。 其草進傳旨也, 以固執不改爲咎, 而以言辭過激, 爲語涉無禮, 及義禁府鞫啓之日, 當以制書有違及亂言之律, 政府不以爲協, 請留其狀, 而承政院遽依此律奉敎, 雖不坐罪, 是則出於特恩, 而實用其律也。 初下刑曹, 政府請勿問, 則其不議於政府而自專, 明矣。 政府請勿問而不得, 又請留照律狀而不得, 則其不畏公議, 任情自恣, 而從中沮抑, 亦明矣。 夫是是非非, 自有公論, 公論所在, 雖下官、末寮之言, 固當贊導聽納, 況廟堂乎? 廟堂公議猶見沮抑, 則雖嘉謀直言, 苟非其心之所說, 安肯敷達, 以廣殿下之聰明乎? 臺諫, 殿下之耳目也, 所以維持紀綱, 而政院輕自屈辱之; 政府, 殿下之股肱也, 所與圖議政事, 而政院不用其正議, 其居中弄權之漸著, 而無所忌憚, 甚矣。 儻曰: "此事皆出上敎, 非政院所擅。" 則是大不然, 居常出納之際, 雖小事, 必先令政院, 商議而爲之, 責黜言官事, 孰爲大而不出於政院哉? 政院雖巧辭以自免, 安能掩一國之耳目哉? 古人有封還詞頭、封還詔書, 欲毁麻不奉詔、焚御札者, 又有比諸桀、紂者, 面折多慾者, 指君上無所不至者, 多矣, 未聞當時以違制、亂言而罪之也。 言官欲盡其責, 言一過激, 而科罪至此, 是欲使惟其言而莫違, 然後已耶? 夫拒諫, 大非人君之美德。 都承旨姜孟卿爲一司長, 專摠出納, 左承旨朴仲孫職管刑獄, 實主是事。 方殿下初服, 居啓沃之地, 不輔以容諫之美德, 而導非若是, 是豈有憂國、愛君之心者之所安乎? 孟子曰: "長君之惡, 其罪小; 逢君之惡, 其罪大。" 今此事出於二人之所弄, 而忝殿下從諫如流之德, 則其罪有甚於逢君之人, 而臣隣之所共憤者也。 臣等以爲, 孟卿、仲孫斷不宜在左右。 伏望, 殿下深惟遠圖, 亟命罷黜, 先淸近密之地, 仍令攸司鞫問情由, 明置於法, 以快臣隣之憤, 以杜近臣弄權之漸, 以作直士敢言之氣。 且獄官凡諸擬律, 必當於情, 然後刑罰中, 而爲法於後。 義禁府, 以言官固守其議, 爲制書有違, 忠憤激切之辭, 爲亂言, 織成罪名, 錮塞言路, 不可示後世也。 義禁府官吏罪亦不小, 亦望罷黜, 以昭公道。

疏入, 引見承旨等議之曰: "何以處之?" 權蹲啓曰: "議諸大臣爲可。" 仲孫在坐, 愕然失措, 諸承旨亦變色引嫌。 傳曰: "毋避嫌。" 時論快之曰: "憲司得人。"

10세 기자재 대고모가 조선왕실과 인연이 되면서 청파 할아버지의 후손들은 서울사는 동안은 조선왕실과 혼인으로 연결이 됩니다. 우선 아들이신 11세 기축 할아버지의 족보기록을 보면 단종 때에 음서로 주부主簿를 세조 때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그리고 조봉대부朝奉大夫 행풍저창부사行豐儲倉副使 지낸후에 증손자 기대항이 한성판윤 그러니까 정2품의 서울시장이 되면서 정3품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십니다. 부인이신 해주정씨 할머니의 고모는 효령대군의 부인인 예성부부인 정씨이고 남동생은 문종의 사위이며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이고 여동생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사이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부인인 춘성부부인 정씨입니다. 아들 5형제를 두었고 둘째 기찬 할아버지께서 역시 5형제를 두어 5대 문중을 이루고 있습니다.

행주기씨가 고려시대엔 무관이었고 문과 과거 급제자가 없다가 12세 기찬 할아버지는 행주기씨 최초로 과거에 급제하십니다. 족보기록을 정리하면 성종 때에 이조전랑, 영광군수, 응교 등을 지냈고 손자 기대항이 한성판윤이 되면서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으로 추증되십니다. 첫 번째 부인은 파평윤씨이시고 2번째 부인은 안동김씨입니다. 기찬 할아버지의 바로 아래 동생이신 기저 할아버지도 과거에 급제 하시고 연산군 때 벼슬을 하셨는데 예문관봉교禮文館奉敎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첨정僉正으로 있으면서 함경도채은경차관咸鏡道採銀敬差官을 맡아 함경도咸鏡道 은광銀鑛 개발開發을 답험踏驗했다 합니다. 중종 때에 벼슬이 부평부사富平府使에 이르렀다 합니다. 연산군 때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있던시기에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編纂에 참여參與하였다 합니다

이제부터는 가장 민감한 정렬공 기찬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의 후손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세상사가 꼭 좋은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단어 하나에도 마음 상하셔서 절 죽일놈으로 보실 분들도 있으실 것으로 걱정도 됩니다. 최대한 개관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기록을 찾다보니 제가 옛날에 썼던 글이 까페에 있어서 소개합니다.

청파 할아버지 신도비를 보면 할아버지가 제주목사시절 장례 풍습없는 제주민들을 교화시켜 장례를 치르게 했고 그보답으로 할아버지 꿈에 많은 제주의 은혜받은 귀신들이 나타나 그보답으로 할아버지가 아들이 셋인데 손자가 없더니 장차 귀한 손자를 얻을 것이라 하고 그해에 아드님 기축 할아버지께서 기찬 할아버지를 낳고 가문이 번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족보에는 청파 할아버지의 아드님은 기축 할아버지 한 분밖에 않계십니다. 두분 아드님은 어디 가셨을 까요? 기록의 누락인가 아니면 두분 따님까지도 합쳐서 자녀가 셋인데 아들이 셋이라 한 것일까요?

청파 할아버지가 꿈을 꾼 후에 손자들이 전혀 없다가 손자 기찬 할아버지를 본 것으로 나옵니다, 족보엔 청파 할아버지는 손자가 다섯이고 그 가운데에 기찬 할아버지는 둘째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처음 손자를 본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큰손자가 있었습니다. 기찬 할아버지는 족보에 영락 갑진에 태어나셨다고 기록돼있습니다. 서기로는 1424년이다, 청파 할아버지가 제주에 가신 것은 1443년 12월이라 하셨고 양력으로는 1444년 1월쯤 되겠지만 이해는 기찬 할아버지가 19살이 되던 해입니다. 꿈꾸기 20여년 전에 태어나셨으니 당연히 기찬 할아버지가 제주귀신들 덕에 태어나신게 아닙니다, 기찬 할아버지가 제주도의 은덕 받은 귀신들의 공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면 기찬 할아버지의 아들들 즉 창파 할아버지의 증손자분들을 손자로 잘못 기록했나 검토해 보았습니다. 청파 할아버지의 증손자이며 기찬 할아버지의 아들들은 다섯이 있습니다. 기형, 기원, 기괄, 기진, 기준이 이분들로 족보에 첫째 기형 할아버지의 태어난 날짜는 기록이 없습니다, 둘째 기원 할아버지는 1481년 태어나셨고 셋째 기괄 할아버지는 기록이 없지만 넷째 기진 할아버지는 1487년에 태어나셨고 셋째 할아버지부터는 첫째, 둘째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르니까 1484년이나 1485년쯤 태어나셨을 듯합니다. 다섯째 기준 할아버지는 1492년에 태어나시고 한달후에 아버지 기찬 할아버지는 돌아가십니다.

그렇다면 청파 할아버지가 꿈꾸셨을 1444년이나 1445년에 첫째 기형 할아버지가 태어났어야 합니다, 그러면 꿈은 맞겠지만 둘째 기원 할아버지의 태어난 해 1481년과는 36년이나 37년의 차이가 납니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어떻게 이런 나이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요? 중간에 한두명이 돌아가시어 기록에서 뺏다 해도 너무한 나이 차이로 가능성이 없습니다, 증손자들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청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50여년 후에 기록된 이글은 할아버지가 제주도에서 좋은 일을 하신 뛰어난 업적을 기리는 전설은 어디까지나 고귀하신 전설이고 그 후에 태어나신 할아버지들께서 제주도 귀신들 은공으로 본래는 별로인데 남의 도움으로 간신히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다기보다는 우리 집안의 뛰어난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나시어 고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찬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 책받침 부수 돌림의 다섯 할아버지의 후손이 지금의 행주기씨 대종중의 5대 문중이고 이 분들 가운데 막내 기준 할아버지가 가장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호는 복재 혹은 덕양이시고 남기신 문집은 유고로 덕양문집이 있습니다. 기씨가 당한 3번째 화로 위의 2번은 참화이고 이번엔 사화 곧 기묘사화를 당하십니다. 연려실기술에서 기묘사화의 문민공 기준 할아버지 부분을 추려서 옮겨왔습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 임금이 언문으로 쓴 밀지에 말하기를, 지난번에 경연에서 기준(奇遵)이 말하기를, ‘조광조 같은 자는 정승 자리에 합당하다.’ 하였으니, 벼슬을 명하는 것이 모두 이 무리들한테서 나오는 터이니 나를 반드시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요, 한갓 그 이름만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내가 이름은 임금이나 실상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옛날에 유용근이 거만하게 나를 보았으니 반드시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경들은 먼저 그를 없앤 뒤에 보고하라.” 하였다. 《당적보》

○ 기묘년 11월 15일 밤에 밀교(密敎)를 내려 신무문을 열고 여러 정승들을 들어오게 하였다.

○ 근정전(勤政殿) 서쪽 뜰에는 군사들이 죽 둘러서 있었다. 승지 성운(成雲)이 나와 소매에서 쪽지를 꺼내어 말하기를 “이것은 어필(御筆)이다. 이 사람들을 즉시 금부에 내리라.” 하였다. 그들은 바로 윤자임ㆍ공서린ㆍ안정ㆍ이구(李構) 및 응교 기준(奇遵)과 수찬 심달원(沈達源) 등이었다. 모두 입직해 있었다. 이에 궐문이 열리고 조금 있다가 대사헌 조광조, 우참찬 이자(李耔), 형조판서 김정(金淨),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 박훈(朴薰), 부제학 김구(金絿), 대사성 김식(金湜) 등이 함께 대궐 뜰로 붙들려 왔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이날 초저녁에 기준이 윤자임ㆍ안정ㆍ이구 등과 함께 천문(天文)을 관측하기 위해 간의대(簡儀臺)로 갔는데, 이윽고 정원 사령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몇 정승이 서문으로 입궐을 했고, 또 근정전 가운데에 불빛이 있는데 군사가 호위해 서 있다 운운.” 하니, 서로 말하기를, “어째서 정원에서 모르는 일이 있단 말이냐.” 하고, 곧 내려왔다. 조금 있다가 입번 승지 두 사람 윤자임과 공서린과 홍문관 두 사람 기준과 심달원과 한림 이구, 주서 안정 등을 의금부에 내리라고 명하니, 이경(二更)에 이미 옥에 가두었다. 조금 있다가 이자ㆍ김정ㆍ조광조ㆍ김식ㆍ김구ㆍ유인숙ㆍ박세희ㆍ홍언필ㆍ박훈 등을 잡아 가두었다. 조금 뒤에 유인숙ㆍ공서린ㆍ홍언필 세 사람을 놓아주라고 명하고, 또 심달원ㆍ안정ㆍ이구 세 사람을 놓아주라고 명하고, 또 이자를 놓아주라고 명하였다. 《덕양일기(德陽日記)》

○ 임금이 남곤에게 명하여 조광조 등의 죄안(罪案)을 초(草)하게 하였다. 남곤이 쓰기를 마치고 임금 앞에 올리니, 임금이 이를 보고 전교하기를, “죄안이 이미 성립되었으니, 다만 조광조 등 8명만 가두고 나머지는 모두 방면하라.” 하였다. 그 죄안에,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이 서로 붕당을 지어 자기들과 뜻을 같이하는 자는 진출시키고 자기들과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서로 의지하고 중요한 자리에 들어앉아 후진들을 꾀어 궤격(詭激)이 습성이 되게 하여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이 날로 글러지게 하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윤자임ㆍ기준(奇遵)ㆍ박세희(朴世熹)ㆍ박훈(朴薰) 등은 조광조의 무리의 궤격한 버릇에 부화뇌동하였다.” 하였다. 《동각잡기》

○ 16일 아침 의금 부사 김전(金詮)ㆍ이장곤(李長坤)ㆍ홍숙(洪淑) 등이 좌기(坐起)하여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 등이 사사로이 붕당을 지었다는 것과 윤자임ㆍ박세희ㆍ박훈ㆍ기준 등이 조광조에게 부화뇌동한 일들을 국문하였다.

○ 기준이 공술하기를, “신은 어려서부터 옛사람의 글을 읽어 자못 향방을 알아서 집에 있으면 효도와 우애를 다하고, 나라에 있어서는 충의를 다할 것을 생각하였고, 뜻을 같이하는 선비와 더불어 옛 도리를 강마하여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세도(世道)가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게 하려고 작은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또 남이 착한 것은 착하다 하고 착하지 않은 것은 착하지 않다고 하였는데, 어찌 감히 사사로이 부화뇌동하였겠습니까. 조광조 등과는 뜻이 같고 도가 합하였기 때문에 서로 사귀어 좋아했을 뿐, 궤격한 줄은 몰랐습니다.”고 하였다. 《덕양일기》

○ 의금부에서 형신(刑訊)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조율하라고 명하였다. 추관(推官) 김전(金詮) 등이 마땅히 간당(奸黨) 죄에 해당되는 율을 써서 마땅히 베야 하고 그 집을 몰수하고 처자를 노비로 삼아야한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조정은 이것으로 죄를 결정한다.” 하고, 이에 하교하기를,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 네 사람은 사사(賜死)하고, 나머지는 귀양보내라.” 하였다. 이때 날이 이미 저물었다. 《석담일기》

○ 날이 저물자 또 앉아 모두 지만(遲晩)을 취하였다.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 등 4명에게는 사형을 결정하고 나머지 4명은 곤장 일백대에 유배 삼천리(流三千里)로 아뢰니, 임금이 승지 김근사(金謹思)를 불러 탑전에서 판부(判付)를 쓰게 하기를, “조광조와 김정은 사사하고 김식과 김구는 곤장 일백 대를 때려 먼 곳에 안치하고, 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은 먼 곳으로 부처하라.” 하였다. 김근사가 명을 받고 머뭇거리니 사관 채세영(蔡世英)이 아뢰기를, “대신에게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과연 다시 의논하는 게 옳겠다.” 하였다. 정광필 등이 빈청에 있는데 김근사가 나와 임금의 뜻을 전했다. 그 때 날이 저물어 촛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정광필이 하교를 듣고 촛불을 만지다가 놀라 좌우를 돌아보고 곧장 입대를 청하여 아뢰기를, “소신이 이 직에 있는 지 또한 오래되었으나, 오늘같은 일이 생길 줄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단지 어리석어서 사리를 알지 못하고 이같이 되었으니, 중죄라면 신들이 어찌 청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힘써 사형에서 감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말을 따라 눈물이 떨어졌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과연 중대한 일이다. 마땅히 다시 생각해서 해야겠다.” 하고, 승지 성운(成雲)을 불러 하교하기를, “조광조 등 4명은 장을 쳐 먼 곳에 안치하고, 윤자임 등 4명은 먼 곳에 부처하라.” 하였다. 성운이 판부를 쓰고 물러나자 정광필이 빈청으로 물러나 안당(安瑭)과 함께 또 아뢰기를, “이 사람들이 죽음을 면한 것은 하늘과 땅 같은 어짐 덕분입니다. 그러나 다만 모두 병약하여 만일 장을 맞고 멀리 가면 중도에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정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얻게 되고 사형을 감해준 실재가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7번이나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동각잡기》

○ 조광조 등이 금부에 갇히던 날 밤 모두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날 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밝은 달이 뜰에 가득히 비쳤다. 빈 마당에 늘어앉아서 서로 술을 따르며 이별하는데, 김정의 시(詩)에, “오늘밤 황천으로 갈 사람들, 속절없이 밝은 달만 인간을 비치네[重泉此夜長歸客 空照明月照人間]” 하였다. 김구는 또 옛 시를 읊기를, “흰 구름 속에 백골을 묻으면 영원히 그만, 공연히 흐르는 물만 남아 인간으로 향하네[埋骨白雲長已矣空餘流水向人間]” 하고, 또 시를 짓기를, “긴 하늘 밝은 달밤[明月長天夜]” 하니, 김정이 화답하기를, “추운 겨울 작별 애석히 여기는 때[儼冬惜別時]” 하였다. 모두들 조용히 자득(自得)하여 서로 말하기를, “차야(次野)이자의 자는 반드시 면할 것이다.” 하니, 차야가 울음을 터뜨렸다. 유독 조광조만이 통곡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을 만나고 싶다.”고 하니, 서로 권면하기를, “조용히 의(義)로 죽어야지 어찌 울기까지 하는가.” 하자, 조광조가 말하기를, “조용히 의롭게 죽어야 할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만, 우리 임금님을 만나고 싶을 뿐이다. 우리 임금이 어찌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며, 밤새도록 울다가 이튿날 사형에 처한다는 말을 들은 뒤에 태연해졌다. 《덕양일기》

○ 16일 밤 삼경에 모두 풀어주자 집으로 와서 조금 자게 하고, 17일 이른 아침에 동소문(東小門) 밖 민가로 나가 있게 하였다. 또 모두 금부에 모이라고 명하니 승지 성운(成雲)이 와서 전교하기를, “근래에 너희들이 조정 일을 처치한 것이 지극히 그릇되어 인심을 불평하게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죄주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사사로운 마음이 없이 나라를 위했기 때문에 형벌을 가볍게 하여 죄주는 것이니, 너희들도 알고 가라.” 하였다. 이날 밤은 동소문 밖 민가에서 잤다. 《덕양일기》 《동각잡기》

○ 드디어 조광조를 능주(綾州)로, 김정을 금산(錦山)으로, 김구를 개녕(開寧)으로, 김식을 선산(善山)으로, 박세희를 상주(尙州)로, 박훈을 성주(星州)로, 윤자임을 온양(溫陽)으로, 기준을 아산(牙山)으로 귀양보냈다.

○ 21일에 전교하기를 “저번에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ㆍ윤자암ㆍ기준ㆍ박세희ㆍ박훈이 모두 시종(侍從)에 있어서 성리학(性理學)으로 밤낮 강론하므로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사람됨이 더불어 나의 정치를 도와서 이룩하겠기에 좋은 벼슬을 주고 대우하였다. 그런데 조광조가 서로 결탁하여 자기들에게 붙는 자는 올려 쓰고 자기들과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해서 세력으로 서로 의지하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심지어 일을 의논할 적에 조금만 의견이 다르면 반드시 극력 배척하고 막아서 기어이 꺾어놓고야 마니, 국가의 의논이 거꾸로 되고 조정이 날로 잘못되어도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들이 한 바를 살펴보니, 정치를 어지럽히는 데로 귀결되었다. 이 어찌 내가 그만둘 수 있는 일이겠느냐. 오직 너희 의정부는 안팎에 포고해서 다 같이 내 뜻을 알게 하라.” 하였는데, 이 글은 남곤이 초한 것이다. 《동각잡기》

○ 정광필이 드디어 남곤과 어긋나 즉시 정승에서 파면되자, 조정에 다시 말하는 자가 없어 조광조가 마침내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사재척언》 《석담일기》

○ 이날 어필로 남곤과 이유청을 제수하여 좌상과 우상으로 삼고, 김전을 올려서 영상으로 삼아 즉시 비현각(丕顯閣)에서 소대하여 조광조 등에게 죄 줄 뜻을 하교하고, 또 금부 당상 심정(沈貞)ㆍ손주(孫澍) 등을 불러서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를 사사(賜死)하고, 윤자임ㆍ기준ㆍ박세희(朴世熹)ㆍ박훈(朴薰)을 절도(絶島)에 안치하라고 하교하였다.《동각잡기》 《황토기사》

○ 김식(金湜)은 절도로 이배되자 망명하다가 자살했다. 김구(金絿)는 남해(南海)로 옮겼다가 신사년에 다시 임피(臨陂)로 양이(量移) 되고, 계사년에 풀린 뒤에 죽었으며, 김정(金淨)은 진도(珍島)로 옮겼다가 경진년에 잡혀서 국문을 당한 뒤에 제주(濟州)에 위리안치되었다. 윤자임(尹自任)은 북청(北靑)으로, 박세희(朴世熹)는 강계(江界)로, 박훈(朴薰)은 의주(義州)로, 기준(奇遵)은 온성(穩城)으로 옮겼다가 경진년에 잡혀서 국문을 당한 뒤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도로 귀양갔다.

○ 세상에서 영의정 정광필, 우의정 안당, 병조판서 이장곤, 형조판서 김정, 대사헌 조광조, 대사성 김식, 응교 기준, 유생 신명인(申命仁)을 팔현(八賢)이라고 한다.

○ 처음에 기준(奇遵)이 홍문관 직소(直所)에 있다가 옥에 갇히고 매질당하여 아산(牙山)으로 귀양 갔다. 아산으로 귀양가 있을 때 그의 형인 기형(逈)이 무장 현감이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임지로 갈 때 직산(稷山)을 지나게 되었는데, 아산과의 거리가 50리 밖에 되지 않았다. 기준이 그 현감 배철중에게 간청하여 중도에 그 어머니를 보고 하룻밤 자고 돌아왔다. 그 뒤에 그 사실이 발각되어 아산 현감 배철중(裵鐵重)과 함께 옥에 갇혔다. 배철중이 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기준이 도망치다가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기준이 옥중에서 옷자락을 찢어서 상서했는데, 그 대략에, “신은 태어난 지 1개월이 지나서 부친을 잃고 오직 편모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처음 신이 죄를 입었을 때 어머니가 무장에 있어서 신이 귀양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 없이 울면서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비록 가서 뵙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는데 마침내 온성으로 옮기게 되자 철없는 생각에 북쪽 하늘과 남쪽 땅이 서로 먼데 한번 북방으로 가면 다시 볼 길이 없고 생사도 모르고 소식조차 서로 통할 길이 없을 것 같아서 한번 얼굴이나 보고 서로 영원히 이별하려고 생각하니, 슬픈 심정을 다시 스스로 그치지 못하고 사세가 급박하여 갑자기 경망히 뛰어 나갔으나, 나가서 다시 생각하니 뒷일이 난처하므로 뉘우치고 배소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도망한 죄를 스스로 변명하기 어려우나, 단 하루 사이의 일이요 다른 뜻이 없었으며, 신이 비록 사람답지 못하지만 일찍이 사대의 반열에 있던 터인데, 어찌 끝내 망명한 사람이 되어 밝은 태양 아래에서 구차히 살려고 했겠습니까. 진정 모자지간에 참지 못하여 이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마땅히 그 죄를 받아야 할 것이나, 효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전하께서 이 하찮은 심정을 살피신다면 또한 거의 만물을 기르시는 덕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장을 때리고 배소로 돌려보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논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묘록》

기준(奇遵)

○ 기준은 자는 경중(敬仲), 또는 자경(子敬)이며, 호는 복재(服齋)요,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판중추 건(虔)의 증손이고, 응교 찬(襸)의 아들이다. 판서 윤금손(尹金孫)의 사위이다. 계유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갑술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년에 아산(牙山)으로 귀양 갔다가 온성(穩城)으로 옮겼다. 다시 올려 국문하고서 배소로 돌려 보내어 위리 안치하였다가 신사년에 사사하였다. 인종이 복직을 명하였다. 아들 대항(大恒)은 벼슬이 판윤에 이르렀다.

○ 공이 일찍이 정암 조광조에게 편지하기를, “벼슬을 버리고 산림 속에 몸을 감추고 싶을 뿐 세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하니, 정암이 말하기를, “나도 그렇다.”고 하였다. 《정암집》

○ 기준이 하루는 궐내에서 숙직하다가 관외(關外)를 여행하는 꿈을 꾸었는데,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등 기구한 노정을 전전하면서 여행 길에서 근체율시(近體律詩) 한 수(首)를 읊기를,

낯선 땅 강과 산은 고향과도 같은데 / 異域江山故國同

하늘 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높은 봉우리에 기대었네 / 天涯垂淚倚高峰

아득한 검은 구름에 (다른 기록에는 호수 소리 적막하다로 되어있다.) 강가 관문이 닫기고 / 頑雲漠漠河關閉

고목 나뭇잎 지는 소리에 (다른 기록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쓸쓸하다로 되어있다.) 빈 성곽이 쓸쓸하다 / 古木簫簫城郭空

들 길은 가을 풀 밖으로 가늘게 뻗치었고 / 野路細分秋草外

인가는 멀리 석양 속에 있구나 / 人家遙住夕陽中

가는 배 만리에 돌아오는 돛대 없으니 / 征帆萬里無回棹

망망한 푸른 바다에 소식 통하지 못하네 / 碧海茫茫信不通

하였다. 갑자기 불쑥 깨어나 꿈을 기억하며 관청의 벽에다 시를 썼다. 얼마 되지 않아서 기묘 당적에 연좌되어 충청도로 귀양갔다가 얼마 안 되어 또 온성으로 옮겼는데, 도중에 보이는 것이 모두 시에 읊은 경치 그대로였다. 말을 멈추고 꿈속의 시를 읊으면서 처량하게 흐느끼니 따라온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뿌렸다. 온성에 이르러 조금 있다가 사사되니, 사람의 일이 미리 정해진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림들이 그 시를 전하여 외면서 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재척언》

○ 《덕양유고(德陽遺藁)》에는 깬 뒤에 꿈속에서 본 바를 기억하여 지은 것으로 되어있다.

기묘사화로 문민공 기준 할아버지가 죽임을 당하자 큰형 도승지공 기형 할아버지는 무장현감으로 있다가 함경도 온성으로 천리먼길에서 막내동생의 시신을 운구하여 원당 도선산에 장사지내고 더 이상의 벼슬을 그만두십니다. 잘 아시는 대로 둘째 참판공 기원 할아버지와 넷재 기진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장성으로 내려오십니다.

5형제 후손은 첫째 도승지공 기형 할아버지 후손과 셋째 별좌공 기괄 할아버지 후손이 친근하게 엮이고 둘째 참판공 기원 할아버지 후손과 넷째 덕성군 기진 할아버지 후손이 친근하게 엮여 나가는 양상을 보입니다.

족보의 2페이지 맨위에 보면 느닷없이 태종원경왕후라고 나옵니다. 그 뒤로도 여러 왕비들이 나옵니다. 저도 처음에 이게 뭔가 했습니다. 조선의 왕비들을 적은 건가 하면서도 그럼 왜 1대 태조부터 죽 나와야지 3대 태종비부터인가 더구나 왕비순서도 뒤죽박죽으로 나옵니다. 이건 밑에 나오는 기록 가운데 이렇게 왕비를 기록해야 하면 존귀한 왕비를 밑에 적을 수 없어 책강의 맨위에 적고 그 왕비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는 oooooo 라고 빈자리로 남긴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기홍영 왕의 사위 가운데 송염이라고 있고 이 송염의 외손의 외손들 가운데 태종원경왕후가 있다는 겁니다. 아시는 것처럼 태종의 큰아들은 양령대군이고 양령대군이 왕이 되었다면 왕비가 되었을 광산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딸이 있습니다. 왕의 딸은 공주이지만 대군의 딸은 현주 품계를 주는 것인지 양령대군에서 검색해 보면 영평현주(永平縣主)하고 합니다. 안동김씨 김철균(金哲勻)과 결혼하시어 4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김철균의 4째아들 김수형의 따님은 정렬공 기찬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신 안동김씨 할머니이시며 별좌공 기괄 할아버지 덕성군 기진 할아버지 문민공 기준 할아버지를 낳았습니다. 김철균의 첫째아들 김수인의 따님은 참판공 기원 할아버지의 부인 이십니다. 김수형의 아들 김언묵의 아들 김석 그러니까 영평현주의 현손자 김석은 도승지공 기형 할아버지의 큰사위이고 김석의 손자는 임진전쟁 진주성 전투의 영웅 충무공 김시민 장군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참판공 할아버지와 덕성군 할아버지는 친가로는 배다른 형제이지만 외가로는 4촌 이모부와 처조카 사이가 됩니다. 덕성군 할아버지가 기묘사화후에 참판공 할아버지와 형수이자 이모 그리고 3명의 조카와 함께 서울에서 장성으로 이주를 하십니다.

정렬공 기찬 할아버지의 첫 번쩨 부인이신 파평윤씨 할머니는 할아버지 윤암(尹巖)이 태종의 부마로 숙경옹주(淑慶翁主)와의 사이에선 태어난 윤준원(尹俊元)의 따님이며 큰 아들 기형 할아버지와 둘째 기원 할아버지를 낳으셨습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1521년 막내 기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첫째 기형 할아버지는 벼슬을 그만두었고 둘째 기원 할아버지는 장성으로 내려와 그 다음 해인 1522년 돌아가시고 부인이신 안동김씨 할머니는 1523년 돌아가십니다. 정렬공 기찬 할아버지와 안동김씨 할어니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기괄 할아버지는 서울에 사셨지만 다른 일이 없으셨고 넷째 기진 할아버지는 1522년 생원,진사 과거시험을 보고 1528년에 어머니 안동김씨가 돌아가시자 완전히 광주로 내려가십니다. 기진 할아버지는 처음 남양방씨와 결혼 하셨지만 자녀없이 돌아가셔서 청주 수신리에 묘가 있지만 잃어버렸습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구테타를 일으키고 왕이 될 때 회군에 참가하여 회군공신이된 심덕부가 조선왕가와 인연을 맺어 심덕부의 5째 아들 심온의 큰딸이 충령대군의 부인이 되고 나중에 세종의 왕비가 되고 심온은 태종이 세종의 외척을 제거하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고 오다가 죽습니다. 심온의 둘째 딸이 강석덕(姜碩德)과 결혼하여 큰아들 강희안의 훈민정음 책을 지은 8명의 유학자들 중의 한명이고 둘째 아들로 강희맹을 낳았습니다. 강희맹의 둘째 아들 강학손(姜鶴孫)이 훈민정음 책을 지은 8명의 유학자들 중의 한명인 신숙주의 둘째 아들 신면(申㴐)의 딸과 결혼하여 강영수(姜永壽)를 낳으니 이분이 기진 할아버지의 두 번쩨 부인이신 진주강씨 할머니의 아버님이십니다.

고봉집에서 기진 할아버지의 묘기와 진주강씨 할어니의 묘를 이장한 기록을 옮깁니다.

현고(顯考) 장사랑(將仕郞) 경기 참봉(慶基參奉) 기 부군(奇府君)에 대한 묘기(墓記)

아버지(선부군:先府君)의 이름은 진(進)이요, 자는 자순(子順)이며, 성은 기씨(奇氏)이니, 행주인(幸州人)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건(虔)인데 판중추부원사(判中樞府院使)로 시호는 정무공(貞武公)이며, 증조의 부인은 정부인 홍씨(洪氏)이다. 조부의 이름은 축(軸)인데 행 풍저창 부사(行豐儲倉副使)로 사헌부 장령에 추증되었으며, 조부의 부인은 영인(令人) 정씨(鄭氏)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찬(襸)인데 홍문관 부응교이며, 어머니는 숙인(淑人) 김씨이다. 아버지께서는 성화(成化) 정미년(1487, 성종18) 12월 정해일에 출생하였는데, 6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성하자 아우 준(遵)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하루에 수백 자를 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자에 힘을 써 경사(經史)를 통달하고 옛날과 지금의 일을 꿰뚫었다. 아버지께서ᄂᆖᆫ 널리 배우고 예(禮)로 몸을 단속하고자 하였고, 오로지 과거에 급제하여 녹을 먹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아우가 먼저 조정에 올라 이름을 드날렸는데 불행히도 견책을 받아 죽자 아버지께서ᄂᆖᆫ 이미 당세에 벼슬할 뜻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님께서 살아 계셨으므로 남을 따라 과거에 응시하였다. 가정(嘉靖) 원년인 임오년(1522, 중종17)에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며, 그 후 1527년에 재상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고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다음 해인 무자년(1528)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며, 초상을 마치자 벼슬을 하려 하지 않고 마침내 광주(光州)에 거주하였다. 집은 광주 읍내의 서북쪽 40리쯤 되는 곳에 있었으니, 지방 이름을 고룡(古龍)이라 하고 동네 이름을 금정(金井)이라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집에 있을 때에 쓸쓸하여 일이 없는 듯하였다. 꽃과 나무를 심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구경하였으며, 책을 읽고 얻는 것과 잊는 것을 따질 뿐이었다. 말년에 흉년을 만나 아침저녁의 끼니가 걱정인데도 태연히 지내셨다. 을묘년(1555, 명종10) 1월 신해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 69세였다.

아버지께서ᄂᆖᆫ 천품이 정직 성실하고 소탈하여 자기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엄하면서도 까다롭지 않고 검소하며 사치하지 않았다. 책을 볼 때에는 대의를 통달하기에 힘썼으며, 일찍이 글귀를 표절이나 하려고 하지 않았다. 지은 시문이 수백 편이다.

첫 번째 부인[前配]은 남양 방씨(南陽房氏)인데 일찍 별세하였고, 두 번째 부인[後配]은 유인(孺人) 강씨(姜氏)인데 관향이 진주(晉州)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영수(永壽)로 충좌위 사과(忠佐衛司果)이며, 조부의 이름은 학손(鶴孫)으로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이며, 증조부의 이름은 희맹(希孟)으로 의정부 좌찬성을 지내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다. 어머니는 단정하고 공손하며 은혜로워 아버지에게 배필할 만하였다. 5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대림(大臨)이요, 차남은 대승인데 생원이며, 막내는 대절(大節)이다.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22년 전에 별세하였는바 집 뒤 2리쯤 되는 동북쪽을 등지고 서남쪽을 바라보는 자리(갑좌경향;甲坐庚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아버님이 별세하자, 그해 3월 경신일에 어머니의 무덤 남쪽에 장례하니 선산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 별세할 때에 여러 아들들은 모두 10세가 넘지 못하였다. 아버지께서는 홀아비로 살면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자식들을 부지런히 어루만지고 가르쳐 장성함에 이르렀는데, 모두들 미련하고 어질지 못해서 가정의 교훈을 만분의 일도 현양하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죄악이 쌓여 마침내 아버지에게 화가 미쳐 별세하였으니, 슬피 울부짖으매 애통한 마음이 뼛속에 사무친다. 이에 감히 묘기를 이와 같이 짓는 것이다. 묘표에 글을 적는 일은 후일을 기다려 할 것이다. 슬픈 마음 하늘처럼 다함이 없으니, 아, 애통하다.

선비(先妣) 유인(孺人) 강씨(姜氏)를 이장한 묘기

아, 슬프다. 우리 어머니께서 동원(東原)에 안장된 지 22년 만에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버리고 별세하였다. 그리하여 장차 그해 3월 경신일에 장례하여 쌍분(雙墳)을 만들려고 했는데, 땅을 파자 물이 나와 마침내 어머니의 묘 위 5, 6보 되는 곳으로 옮겨 묏자리를 잡고 장례를 마쳤다. 아들들은 어머니를 모신 곳이 좋은 땅을 얻지 못함을 서글퍼하여 애통함이 뼛속에 사무쳤으므로 즉시 옮겨 모시기로 상의하였으나, 빈궁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마침내 금년 3월 경신일에 아버지의 묘 옆에 옮겨 모셨다. 성계(姓系)와 행실은 아버지의 묘기에 대략 서술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7)에 태어나서 향년 34세에 별세하였으며, 5남 1녀를 낳았는데 생존한 자는 세 사람이다.

거듭 생각건대 어머니께서는 부도(婦道)를 닦아 아버님과 짝하였는데, 아버님은 은둔하여 덕을 쌓고 드러내지 않았으며, 후손들에게 법을 남겼으나 여러 아들들은 어질지 못하여 만분의 일도 현양하지 못하니, 사무쳐 울부짖으니 하늘도 다함이 없다. 이에 감히 그 일을 이와 같이 기록하는 것이다. 훌륭한 작자(作者)에게 묘문을 청하여 덕행의 대략을 자세히 드러내어 묘에 표하는 것으로 말하면 장차 기다림이 있는 것이지, 감히 뒤늦게 하려고 해서가 아니다. 아, 애통하다. 아들 대승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기록한다.

과정기훈(過庭記訓)

내가 어릴 때부터 부친의 훈육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이룬 것이 있음직하다. 그런데도 기질이 낮고 용렬하여 어리석기가 처음과 같으니 생각하면 슬프기 그지없다. 지나간 일은 지금 어찌할 수 없지만 앞으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소씨(邵氏)에게도 《문견록(聞見錄)》이 있었다. 학자들은 모름지기 듣고 보는 대로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하셨다. 이에 들은 것을 기록하여 조석으로 완미하려 한다.

선친께서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문을 하는 데는 모름지기 부지런해야 하고 또 반드시 외워야 하며 슬쩍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된다. 읽으며 생각하고 생각하며 짓곤 하되 모두 부지런히 해야 하며 또 그중에 한 가지도 폐해서는 안 된다.”

“내가 너희들에게 학문에 힘쓰게 하고자 한 것이 어찌 작록(爵祿)을 바라서이겠느냐. 바로 너희들로 하여금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다행히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게 하고자 함일 뿐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과 행동을 너무 달리해서는 안 된다. 다만 모쪼록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다. 요컨대 순수한 태고(太古)로 마음가짐을 하고 자연스러움으로 몸가짐을 하는 것이 매우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연못에 가서 고기 낚고 산에 가서 땔나무 하고 거친 밭을 김매고 가꾸어 어버이를 섬기게 하려고 한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내가 어렸을 적에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께서 몹시 고생하시면서 나를 길러 주셨다. 그래서 매양 어서 입신출세하여 이 망극한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그 뜻을 이루기도 전에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이것이 나의 영원한 슬픔이 되어 버렸다. 너희들은 오늘날 잘 먹고 잘 입고 살면서 왜 공부를 하지 않느냐? 내가 자경(子敬)- 복재(服齋)이다.- 과 가장 우애로워 항상 한이불을 같이 덮고 누워서 ‘우리 형제가 모름지기 한 모퉁이를 담당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항상 천문도(天文圖)를 모사(模寫)하고 또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베끼고 기예(技藝)에도 두루 통하기를 기약하여, 한 가지라도 터득한 것이 있게 하고자 했다.”

“나더러 ‘우리가 뜻을 얻으면 의당 다른 궁핍한 이들을 구휼할 것이고 만일 뜻을 얻지 못하더라도 남의 구휼을 받지는 않겠습니다.’ 하였다. 불행하게 자경(子敬)은 죄를 얻어 유배되었고 나 또한 떠돌아다니느라 한 번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한탄을 금할 수 없다. 너희들은 이 뜻을 알아야 한다.”

“지금 세상에는 학문을 강구하지 않아 한때는 서로 좋게 지내다가도 뒤에는 도리어 곤욕을 보이곤 하니, 말을 하자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부디 함부로 친구를 사귀지 말라. 요컨대 친구가 없을 수는 없지만 또한 사귐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벼슬길의 풍파는 매우 두려운 것이다. 자기의 뜻을 행하기도 전에 재앙이 이미 따르게 되니 다만 잘 헤아려서 가고 오고 하는 것이 좋으나, 그것도 은거하는 것만은 못하다.”

“주자(朱子)는 벼슬한 날짜가 겨우 40여 일밖에 되지 않았으니, 학자들은 또한 이 뜻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진실로 자기의 뜻을 행하려면 일개 현(縣)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주-D001] 소씨(邵氏) : 북송의 학자 소백온(邵伯溫 : 1057~1134)을 말한다. 자는 자문(子文)이며, 소옹(邵雍)의 아들이다. 휘종(徽宗) 초년에 상소를 올려 당고(黨錮)를 풀어 주고 옛 제도를 회복할 것을 청하다가 당로자에게 미움을 받았다. 지과주(知果州)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하남집(河南集)》, 《소씨문견록》, 《역변혹(易辨惑)》 등이 있다.

[주-D002] 자경(子敬) : 기준(奇遵 : 1492~1521)의 자이다. 본관은 행주, 호는 복재(服齋)ㆍ덕양(德陽),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수찬(修撰), 시강관(侍講官), 응교(應敎)를 지냈으며,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온성(穩城)으로 유배가서 처형되었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시에도 능하였다. 저서에 《복재집》, 《무인기문(戊寅紀聞)》, 《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3세 필선 할아버지의 사위 김기손의 외손의 외손들 중에서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와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 윤원형이 대윤 소윤하면서 싸워 이기고 외척으로 권세를 부리자 윤원형을 견재 제거하기위해 효령대군의 5세손 이량을 중용하여 이량이 정권을 잡습니다. 기형 할아버지의 아들 기대복 할아버지의 부인은 2분이신데 모두 전주이씨입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시간이 흘러 왕과는 10촌이상이 되는 사람들이 많아져 옹족을 벋어난 전주이씨라고만 나오지만 역시나 유력 가문들입니다. 2번째 부인이신 전주이씨 할머니의 아버지가 위에 언급한 이량입니다. 서울살던 정무공의 후손들도 이량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량은 사림을 싫어하여 기대승 할아버지 등 사림을 배척하다가 준 할아버지의 아드님이시고 이량과 가까운 사이이던 기대항 할아버지가 왕에게 차자를 올려 숙청시킵니다. 이후에 기대항 할아버지는 기묘8현이신 아버지 기준 할아버지의 후광도 더해져 승승장구하여 정2품 판서급의 한성판윤이 된지 10여일만에 종기가 퍼져서 돌아가십니다. 몇일의 서울시장기간이었지만 정2품의 품계를 받자 아버지 기준 할아버지는 같은 품계의 정2품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할아버지이신 기찬 할아버지는 한등급아래의 종2품 이조참판겸 홍문관대제학으로 증조부인 기축 할아버지는 다시 한등급아래 정3품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이 되십니다. 고봉집에는 4촌형인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와 작은 어머니이신 파평윤씨 할머니에 대한 글들이 많이 나옵니다. 판윤공 제문을 보면 1564년 여름에 판윤공 어미니가 병환이 나시자 판윤공이 극진히 보살폈고 그러다 판윤공 몸에 종기가 나서 요즘 같으면 항생연고 바르면 금방 고칠 것을 당시엔 종기가 몸에 퍼져 돌아가시고 파령윤씨 할머니도 병환 가운데 아들이 죽자 그 한달후에 돌아가신 것으로 나옵니다.

4촌형 한성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의 행장과 작은 어머니 파평윤씨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고봉할아버지가 지으신 만장시를 올립니다.

덕양유고(德陽遺稿)를 보내 주신 데 사례하는 글

제(弟;동생)는 아룁니다. 인편을 통하여 형께서 어진 정사를 펴는 가운데 신수가 다복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또 《덕양유고》까지 받자오니 기쁘고 흐뭇한 마음 한량없습니다. 다만 겨울철로 들어와서 시봉(侍奉)은 어떠하신지요? 삼가 생각건대 평안하고 순조로우실 줄 믿습니다. 지난여름에 계부(季父)의 유고(遺稿)를 이미 간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으나, 인편이 없고 길도 멀어서 그 유고를 얻어 볼 길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평소 스스로 생각하며 항상 혼자서 다음과 같이 탄식을 하였습니다.

“천지 사이에 소장(消長)하는 운수에 대해서는 이미 그 소이연(所以然)을 알 수 없고, 인사(人事)의 흥폐(興廢)에 대해서도 또한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으니, 그렇다면 천 년 뒤에 천 년 이전의 일을 점검해 본다면 그 역시 알 수 없을 뿐인 것인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시(是)와 비(非)가 서로 배치되고 현(賢)과 불초(不肖)가 품등을 달리하니 또 어찌 모를 것이 있겠는가. 다만 그 알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또 급히 구하여 행하기를 힘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계부의 한때 일은 역시 한두 마디 말로 밝힐 수 없는 것이니 다만 알 수 있는 것을 믿을 뿐인데, 알 수 있는 것을 나도 아직 얻어 보지 못하였으니 더구나 다른 사람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한번 유고를 보고서 계부의 마음을 구하여 그 알 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얻어 보지 못하여 매양 스스로 탄식하며 가슴에 응어리가 지고 마음에 불만스러웠습니다.

이제 갑자기 유고를 보내 주시니 슬픈 감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때 마침 날이 저물었기에 계집종을 불러 어두운 등잔에 기름을 부어 불을 돋우고 삼가 읽어 보니 그 알 수 있는 것이 적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신하는 충성해야 하고 자식은 효도해야 한다. 그 이외의 것은 나는 모른다.” 하신 말씀은 더욱 대단히 밝게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임금을 사모하고 어버이를 생각하며 도를 실행하고 선악을 분별한다는 등의 말은 한마디 말로 총괄하여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이분의 재주는 세상에 다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형께서 지으신 이 유고의 서문을 읽어 전말을 살펴보고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하는 바입니다.

아, 공(公)께서 세도(世道)를 자임한 것과 행사(行事)한 시종(始終)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현능하면서도 지위는 운부(雲傅)를 바라보지 못했고 쫓겨난 것은 유하혜(柳下惠)와 같은 데다 끝내 안연(顔淵)의 수명도 누리지 못했으니, 저는 또 운명이 과연 무엇이고 시기가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반드시 영화를 누리고 수를 누린다는 데 대해서는 제가 매우 의혹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늘이 인물을 내고서 그를 제대로 쓰지 못한 데 대해서는 제가 또 꼭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없으니, 저 영화도 수도 누리지 못한 것을 또한 한탄할 게 무어 있겠으며, 천 년 뒤에 알 수 있는 것도 제가 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 크나큰 우주(宇宙) 사이, 그 많은 인물 가운데에는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깨끗한 사람, 더러운 사람이 있거니와 궁한 사람과 현달한 사람의 경우는 비록 한때의 득실(得失)은 혹 알 수 없지만 그 천 년 뒤에 알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 이것으로 높낮이를 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곧 이 유고를 간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제가 몹시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여 마지않는 것이 어찌 영화도 수도 누리지 못한 그것 때문이겠습니까.

형께서는 지금 그 마음을 다하여 능히 이 뜻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한갓 계부의 뜻을 천 년 뒤에 알게 되어 그 당시에 겪은 불행을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일 뿐만 아니라, 곧 우리 집안 대대로 크게 사모하고 우러러서 절로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자질이 박잡하고 어리석고 얕아서 약간이나마 글을 아는 것은 특히 말단적인 것일 뿐입니다. 사업이나 문학은 본디 보통 이하의 사람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저 역시 뜻한 바에 있어서야 어찌 일찍이 자신을 보통 사람으로 기약했겠습니까. 지금 제가 구구하게 여러 말을 하여 그칠 줄 모르는 것은 진실로 이것으로 초지일관의 뜻을 표하고, 또 저의 회포를 쏟아서 장차 형과 함께 -원문 1자 빠짐- 이와 같이 하기를 도모하고 또 스스로 면려하고자 해서입니다.

부디 형께서는 저의 간측(懇惻)한 정성이 이처럼 범연한 것이 아님을 생각하시어 어긋나고 거친 것을 책망하지 말아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주-D001] 운부(雲傅) : 미상(未詳)이다.

[주-D002] 쫓겨난……같은 데다 : 유하혜(柳下惠)는 춘추 시대 노나라 사람이다. 《논어(論語)》〈미자(微子)〉에 의하면, 유하혜가 사사(士師)가 되었다가 세 번을 쫓겨나자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대는 이 나라를 떠날 수 없는가?” 하니, 유하혜가 대답하기를 “도를 곧게 하여 사람을 섬기면 어디 간들 세 번 쫓겨나지 않겠으며, 도를 굽혀서 사람을 섬기려면 왜 꼭 부모의 나라를 떠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고봉집

취중에 아내에게 주다〔醉贈細君〕

백 년도 이제는 꿈속만 같으니 / 百歲如今醉夢間

기쁘게 놀면 어느 곳이 편안치 않겠나 / 歡遊何處不淸安

밤이면 등잔불 그대와 함께하여 / 夜來燈火唯君共

그윽한 기약 얘기하며 만년의 한거를 점치네 / 細討幽期卜晩閑

기판윤(奇判尹)에 대한 제문

가정(嘉靖) 43년(1564, 명종19) 세차 갑자(歲次甲子) 9월 경자삭(庚子朔) 30일 을사(乙巳)에 종제(從弟)인 선무랑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宣務郞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 기대승은 삼가 주과(酒果)의 제전(祭奠)을 가지고 망형(亡兄) 판윤(判尹)의 영령께 밝게 아룁니다.

아, 나의 형님이시여! 어찌하여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셨단 말입니까. 인사(人事)를 믿을 수 없고 천도(天道)를 알 수 없습니다. 사림(士林)을 누가 장차 붙들어 주며 국맥(國脈)을 누가 장차 튼튼히 하겠습니까. 간신들이 원숭이처럼 엿보며 은밀히 교만을 부리니, 착한 선비들은 기가 꺾여 모두 저상(沮喪)되고 있습니다. 이는 도(道)의 소장(消長)에 관계되고 시운의 성쇠(盛衰)에 관계되오니, 한 세상을 돌아보며 놀라 울부짖습니다. 어찌 저의 사사로운 정 때문에 통곡하는 것이겠습니까.

아, 애통합니다. 형이 세상에 태어나신 지 지금 46년인데, 장도(長途)를 달리기도 전에 대운(大運)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형의 아름다운 자질은 천부적으로 타고났습니다. 흉금이 너르디너르며 아름답디아름다워서 다른 사람들은 잘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단지 그 외면이 진중한 것만을 보았고 흉중의 명쾌한 것은 알지 못하며, 사람들은 단지 온화한 기색이 있음만 좋아하였고 드높은 절개가 있음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여러 관료들을 따라 봉직하여 큰일을 시행하지는 못했사오나 국가에 끼친 공과 이익은 또한 매우 넓습니다. 하늘은 어찌하여 덕은 후하게 주고 수명은 인색히 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그 혜택을 끝까지 받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아, 애통합니다. 형은 약관 시절에 명성이 이미 높았으며, 과거에 급제하자 문채가 더욱 성대하였습니다. 높이 나는 기러기와 같았고 아침 햇볕에 우는 봉황새와 같았습니다. 미원(薇垣 사간원 )과 백부(栢府 사헌부 )에서는 군주의 과실을 바로잡아 보필해서 속임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권신(權臣)이 조정의 권력을 천단(擅斷)하여 감히 위복(威福)을 몰래 농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선비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려는 기미가 치밀히 이루어졌고,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指鹿爲馬〕’ 참혹한 화가 이르게 되었습니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두려워 떨고 있었으니, 누가 이리 떼처럼 뒤를 돌아보고 숨을 죽이지 않았겠습니까. 이때 형은 옥당(玉堂)에서 선창하여 차자(箚子)를 올려서 외로운 충성의 강직함을 드날렸습니다. 납약자유(納約自牖)의 정성이 깊으시니, 우주우항(遇主于巷)하여 도가 부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간당(奸黨)이 흩어지니 종묘사직이 더욱 튼튼해졌습니다. 자취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지혜를 굽히지 않으니, 사람들은 모두 흡연(翕然)히 심복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주석(柱石)의 중임을 맡아 낭묘(廊廟 의정부)에 오를 것을 기대하였으나 형은 도리어 부족하게 여겨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성만(盛滿)함을 두려워하면서 더욱 조심하였습니다. 매양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됨을 염려하여 더욱 속으로 걱정하며 근심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한 병환으로 끝내 일어나지 못하여 어리석은 사람들은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애통하게 만드십니까. 구원(九原)에 계신 분을 다시 살리기 어려움을 애통해하고, 오도(吾道)가 끝내 땅에 실추됨을 탄식하옵니다.

아, 애통합니다. 형은 금년 중하(仲夏)에 자친께서 병환으로 당(堂)에 계시자 지극히 애쓰며 약을 받들어 올렸습니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손상을 입어서 원기가 소모되어 점점 파리해졌고, 종기의 독이 흩어져 퍼지기 쉬웠습니다.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속을 해치니, 귀신이 서로 침노하매 어쩌겠습니까.

아, 어버이의 병환이 쾌차하기도 전에 복이 적어 혹독한 화를 만나니, 자친께서는 홀로 가슴을 어루만지며 길이 울부짖다가 겨우 한 달을 넘기고 운명하셨습니다. 아, 흉변(凶變)이 거듭 이르니 참혹함을 다시 차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가업(家業)이 영락(零落)하니, 끝내 누가 보호하며 누가 구원해 주겠습니까.

아, 애통합니다. 형은 큰 덕을 힘쓰고 작은 행동에는 구애되지 않으셨으니, 소소한 절목(節目)은 엉성한 듯하였으나 큰 강령은 매우 올발랐습니다. 비유하면 백옥(白玉)과 같으니, 작은 티가 어찌 아름다움을 엄폐할 수 있겠습니까. 낭랑(琅琅)하고 찬란함은 끝내 변치 않습니다. 지금 사람들의 평판은 실로 이동(異同)이 많습니다. 형을 크게 욕하고 꾸짖는 자들은 다만 회오리바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저들은 어지러이 참소하는 말을 하여 참 모습을 손상시키며 옳지 못한 말을 늘어놓아 공격하고 있으나, 이것은 이른바 올빼미와 솔개가 봉황새를 비웃는다는 것이니 또한 어찌 도마뱀이 용을 조롱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아, 애통합니다. 저는 성질이 강하고 옹졸하여 남과 합하는 일이 적습니다. 다행히 형을 의뢰하여 행동을 힘쓰며 스스로 몸을 바로잡아 얼굴을 낮추고 대오(隊伍)를 따라 행여 훌륭한 일을 하며 힘쓰고 서로 구제하여 말년을 기약하려고 했었는데, 형이 이제 별세하셨으니 하늘에 무슨 죄가 있어서입니까. 간장이 꺾이고 찢어지오니 눈물이 샘물 솟듯 하옵니다. 영거(靈車)를 메고 떠나는 것을 보오니, 길일(吉日)이 머물지 않음이 서글프옵니다. 촌심(寸心)을 맹세하면서 길이 영결하오니, 우리 인생은 부생(浮生)과 같음을 보겠습니다. 아, 슬프옵니다. 흠향하소서.

[주-D001] 위복(威福) : 위복은 벌(罰)과 상(賞)을 뜻한다. 원래는 군주만이 상벌을 행할 수 있는데, 후대에는 집권자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 내치기도 하고 벼슬을 주기도 하는 것을 이른다. 《서경》〈홍범(洪範)〉에 “오직 군주만이 복을 짓고 오직 군주만이 위엄을 지을 수 있다.〔惟闢作福 惟闢作威〕” 하였다.

[주-D002] 사슴을……하는 : 진(秦)나라의 간신 조고(趙高)가 권력을 독단하기 위하여 이세황제(二世皇帝)를 속여서 한 말이다. 조고가 이세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말하자 이세황제가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사슴이라고 옳게 말하는 자도 있었고 조고의 비위를 거스르기 어려워 침묵을 지키거나 말이라고 대답하는 자도 있었다. 그 후 조고가 그때 사슴이라고 말한 자를 골라 은밀히 제거하니, 이후로 신하들은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주-D003] 납약자유(納約自牖) : 《주역》 〈감괘(坎卦) 육사(六四)〉에 “맺음을 들이되 통한 곳으로부터 하면 끝내 허물이 없으리라.〔納約自牖 終无咎〕” 하였는데, 이는 신하가 군주를 깨우칠 때에는 극진한 충성과 옳은 방법으로 군주의 마음을 유도하되, 반드시 군주가 잘 알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주-D004] 우주우항(遇主于巷) : 《주역》 〈규괘(睽卦) 구이(九二)〉에 “군주를 골목에서 은밀히 만나면 허물이 없으리라.〔遇主于巷 无咎〕” 하였는데, 이는 신하가 군주를 극진히 받들어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야 서로 도(道)에 합하고 뜻이 통하여 일을 이루게 된다는 뜻이다.

판윤 종형을 애도하다〔悼判尹從兄〕

큰 꾀와 굳센 도략 한량없이 넓어 / 洪謨毅略廓無方

주선하고 조화함 헤아릴 수 없었네 / 烹斡調和窅莫量

하늘이 남겨 주지 않아 인망이 끊어지고 / 天不憖遺人望絶

나라는 무엇에 의뢰하나 임금 마음 슬퍼하네 / 國將何賴聖情傷

깊은 산에 범 떠나니 살쾡이 달리고 / 深山虎逝狸還騁

큰 못에 용 없어지니 미꾸라지 날뛴다 / 大澤龍亡鱔更揚

어찌 소신의 가화가 참혹할 뿐이리오 / 豈但小臣家禍慘

세상 걱정 때문에 눈물이 쏟아지네 / 自緣憂世淚滂滂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기공(奇公) 행장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이름은 대항(大恒)이요, 자는 가구(可久)이며, 성은 기씨이니, 그 선대는 행주인(幸州人)이다. 증조의 이름은 축(軸)인데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로 여러 번 추증되어 승정원 좌승지에 이르렀으며, 증조모는 해주 정씨(海州鄭氏)로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찬(襸)인데 홍문관 부응교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할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와 안동 김씨(安東金氏)인데,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준(遵)인데 홍문관 응교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윤씨(尹氏)로 파성군(坡城君) 휘 금손(金孫)의 따님인데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 공이 높은 벼슬에 올라가면서 3대를 추증한 것이다.

기씨는 고려 초기로부터 무재(武才)로 일컬어져 대대로 공로를 드러냈다. 먼 할아버지이신 이름 수전(守全)은 지위가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는데,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공로가 백성들에게 베풀어졌으며, 그 후 자손들이 높은 벼슬을 지낸 이가 많아 집안이 크게 번성했는데, 그 후 다소 침체되었다. 이름 면(勉)은 조선조에 벼슬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가 되었는바 이분이 휘 건(虔)을 낳았는데, 청렴하고 지조가 있어 세종조에 유명하였다. 벼슬은 정헌대부 판중추부원사를 지냈으며, 별세하자 정무(貞武)로 시호하였으니, 바로 공의 고조이다.

공의 증조이신 승지공께서는 화를 만나 벼슬하지 못하고 집에서 있었으며, 할아버지인 참판공이 비로소 문장으로 이름났으나, 모두 장수하지 못하였다. 아버지인 판서공께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질로 성리학을 탐구하였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있어 일찍 큰 명망을 지니고 있었다. 중종께서 정치를 힘쓰던 때를 당하여 한두 명의 신하들과 함께 특히 신임을 받고 세속을 크게 변혁하려는 뜻을 두었다. 그리하여 경연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아는 것을 모두 말하여 국가를 위해 순고(淳古)한 정치를 다시 회복하려고 했었는데, 불행히도 죄를 입고 온성(穩城)으로 유배되었다가 마침내 옥리(獄吏)의 논죄를 받아 나이 30세에 별세하니, 말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애석히 여긴다.

공은 정덕(正德) 기묘년(1519, 중종14) 6월 17일에 태어났다. 태어나서 겨우 3세에 부친을 잃었는데, 어려서부터 빼어난 자질이 있었다. 차츰 장성하자 외가에서 공부하였는데, 영특하고 총명함이 뛰어나 하루에도 100여 자를 기억하였다. 외조이신 파성군은 공을 사랑하면서도 가엾게 여겨, 매양 억제하기를 “나는 온갖 세상의 화를 겪었으니, 자손 중에 뛰어난 재주가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였다. 공은 이로 말미암아 학문하는 데 느슨하여 재질을 다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약관 시절에는 우뚝이 두각을 나타내어 이미 명사들과 사귀었다.

가정(嘉靖) 경자년(1540) 봄에 사마시에 참여하여 반궁(泮宮 성균관 )에서 유학하니, 명성이 더욱 드러났으며 교유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병오년(1546, 명종1) 가을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정미년(1547) 8월에 추천되어 예문관 검열로 있다가 얼마 후 주서에 임명되었는데, 잘못한 일로 말미암아 체직되었다가 다시 검열이 되고 봉교로 전직되었다. 무신년(1548) 7월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고 저작과 박사를 지냈으며, 기유년(1549) 가을에는 부수찬으로 승진되고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부수찬이 되었다. 경술년(1550) 1월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체직되고 전적에 제수되었으며, 예조 좌랑으로 전직되었다가 다시 부수찬이 되고 수찬으로 승진되었다. 7월에 이조 좌랑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자년(1552) 9월에는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나갔다. 10월에는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는데, 계축년(1553) 봄에 대관(臺官)이 전조(銓曹)에서 인물을 잘못 주의(注擬)하였다고 탄핵하여 장관인 판서와 차관인 참판이 함께 파직되었다. 공 역시 색랑(色郞)으로 파직되었는데, 얼마 안 있어 다시 서용되어 헌납에 임용되고 부교리가 되었다가 지평과 교리를 지냈으며, 또다시 헌납이 되었다가 체직되고 직강(直講)에 임명되었으며 병조 정랑이 되었다.

갑인년(1554, 명종9) 1월에 다시 이조 정랑이 되었으며, 2월에는 검상(檢詳)으로 전직되었다. 6월에 함경도 감군어사(咸慶道監軍御史)로 나가라는 명령이 내리자, 의정부에서는 전직에 유임할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체직하여 직강으로 삼아 군기시 첨정으로 옮겨졌다. 12월에 감군의 6개월간 임기가 차서 조정으로 돌아올 때 도중에서 사간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인 을묘년(1555) 6월에 다시 검상이 되었으며, 8월에는 전한에 임명되고 11월에는 다시 검상이 되었다가 얼마 후 사인(舍人)으로 전직되었으며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병진년(1556) 5월에 통정대부로 특진되어 병조 참지가 되었는데, 전 참지가 그 임무를 그대로 수행하게 되어 공은 서반직(西班職)으로 옮겨져 호군 겸 오위장(護軍兼五衛將)에 보직되었다. 12월에는 황해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정사년(1557) 2월에 병으로 체직되어 조정으로 돌아오고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공이 서해(西海 황해도)에 부임해 있을 때에 간사한 사람 중에 자기를 추천해 주지 않는다고 공을 원망하는 자가 있어 비방하는 말을 퍼뜨려 공을 축출하려고 하였다. 이에 김홍도(金弘度) 등은 공을 헐뜯었는데, 이때까지도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공은 대부인이 당(堂)에 계심으로 인하여 외직으로 나가 봉양하기에 편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무오년(1558) 봄에 춘천 부사로 나갔는데, 관직에 있은 지 3년 동안 관리와 백성들이 크게 편안하였다.

경신년(1560) 7월 임기가 만료되어 예조 참의로 들어왔고, 호조 참의로 옮겨졌다가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우부승지로 옮겨졌다가 체직되고 부호군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예조 참의가 되었다. 신유년(1561, 명종16) 2월에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글을 올려 과실을 규탄해서 조정에 도움이 매우 많았다. 이보다 먼저 시종관(侍從官)이 시호를 정하는 일로 유언비어를 당하여 화가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은 주선하여 힘을 다해서 이 화를 막으려고 노력하였는데, 마침 대관(臺官)이 다시 한두 명이 시세(時勢)를 좇아 이랬다저랬다 하는 모습을 논박해서 그 사이를 싸움 붙이려고 하였다. 이때 공은 건의하여 이것을 배척해서 이 사건이 마침내 가라앉게 되었다. 6월에 대사헌으로 특별히 제수되니, 품계는 가선대부였다. 공은 기강을 바로잡고 힘써 충성을 다하였다. 임술년(1562) 1월에 병으로 체직되고 4월에는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에 제수되었다. 계해년(1563) 2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5월에 병으로 체직되고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후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8월에 사헌부에서는 이량(李樑)의 사주를 받

아 사림에게 화를 전가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은 동료들을 거느리고 차자(箚子)를 올려 이량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죄를 탄핵하고, 아울러 대간들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을 논박하였다. 차자를 올리자, 상께서는 크게 깨닫고 즉시 이량을 축출하도록 명하고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을 교체시켰다. 공은 이날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자 사간원과 함께 아뢰어 화근에 대해 극진히 말하고, 이량 및 그 무리들을 귀양 보낼 것을 청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차등을 두어 처벌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량은 외척을 이용하여 좋은 벼슬을 은밀히 차지하니, 청의(淸議)가 그를 비루하게 여겨 돌보아 주지 않았다. 이량은 이에 크게 분함을 머금고 밤낮으로 나쁜 사람들과 결탁한 다음, 총애를 믿고 권력을 남용하여 간계를 이루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몇 년 사이에 기세가 등등하여 흉계가 하늘을 찌르니, 사람들이 감히 어쩌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청의들이 자기들을 비난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이감(李戡)을 끌어들여 대사헌으로, 윤백원(尹百源)을 사간으로 삼고는 서로 음모하기를, 일시의 명유(名儒)로서 자기들과 이의(異議)하는 자들은 죄줄 만한 큰 잘못이 없으니 이들을 한 가지 죄목으로 지적하기가 어렵다고 하고는, 마침내 이들이 “선을 한다고 칭탁하고 청담(淸談)으로 정사를 비방한다.”고 모함하여 자기가 평소 미워하던 자들을 먼저 공격해서 그 솜씨를 시험해 본 다음, 장차 차례로 자기에게 붙지 않는 자들을 모두 제거하려고 하였다. 당시 국세가 매우 위태로웠으니, 만일 공께서 기미를 알고 임금에게 올바른 말을 아뢰어 상의 마음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사림은 거의 어육(魚肉)이 됨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에 사림들은 모두 공의 공로를 위대하게 여기고 공의 식견에 감복하였다.

이량이 권세를 부릴 때에는 조정에 있는 대소 관원들이 그의 앞에 달려 나가 아첨하였다. 그러나 그가 실패하자, 의논들이 과격해져서 모두 뿌리를 찾아내어 통렬히 단죄하려고 하였다. 공은 말씀하기를 “죄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많은 것은 조정의 좋은 일이 아니니 마땅히 공평하고 용서함을 힘쓸 것이요, 각박한 의논을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들에게 죄상을 논할 때에 너무 너그러운 결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크게 일어나 다투어 공을 비난하니, 공은 책임을 지고 면직되기를 요청하였다.

얼마 후 예조 참판으로 겸지성균(兼知成均)이 되었으며, 다시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으로 바뀌었다. 이때 권간(權奸)들을 새로 물리친 뒤라서 인재 등용을 매우 삼가고 있었는데, 공은 이조 참판이 되어 인물을 등용할 때에 선발을 잘하여 국가가 힘입은 바가 많았다. 당시 훈척대신(勳戚大臣)이 위엄과 권세를 농간하여 권력이 임금에 비견되니, 조야(朝野)에서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였다. 공은 마침내 왕실에 마음을 두고 끝내 화의 빌미가 될까 두려워하여 차츰 억제해서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형세상 어려움이 있어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갑자년(1564, 명종19) 5월에 대부인께서 종기를 앓아 매우 고생하니, 공은 정성을 다해 약을 쓰고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직하고 6월에 서반(西班)으로 옮겼다가 공조 참판으로 바뀌었다. 대부인의 증세는 조금 덜하였는데, 공이 또 어깨와 목 사이에 종기가 나 의원에게 치료를 받고 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어 날로 점점 위독하였다. 7월 갑진일에 특별히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니, 품계는 자헌대부였다. 공은 항상 지위가 높아짐을 두려워하였으므로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는 교서가 내리자, 아들과 조카들은 공이 놀라고 동요될까 염려하여 아뢰지 않았다. 그랬는데 9일이 지난 임자일에 병세가 더욱더 위중해져서 치료할 수가 없게 되자 마침내 이 사실을 아뢰었다. 공은 낙심하여 한동안 있다가 말씀하기를 “나의 병세는 이와 같은데 특별한 총애가 거듭 이르니, 나는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시고는 말씀을 거듭하셨으나 분명하지 않았고,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니 향년 46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께서는 크게 애통해하고 철조(輟朝)하였으며 부의와 구휼함을 특별히 더하였다.

공은 덕성이 심후(深厚)하여 외모 꾸미기를 일삼지 않았으며, 마음을 두고 행신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집에서 어버이를 받들 때에는 그 정성을 지극히 하였으며, 규문(閨門) 안에서는 매우 화락하였다. 벼슬을 담당하여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너그러움과 용서를 근본으로 삼고 세세히 살피는 것을 현명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사람을 널리 사랑하고 용납하여 신분의 귀천과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다 기뻐하였다. 손님과 벗이 항상 자리에 가득하여 하루 종일 담소하면서 게으른 빛이 없었다. 흉금이 화평하고 도량이 넓어 흔들리지 않았다. 혹자는 청탁이 서로 뒤섞여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마음은 경위(涇渭)가 매우 분명하였다.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거워함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와 남들이 기예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좋게 여겼으며, 기상이 후중하여 바라보면 매우 의젓하였다. 겉으로는 심히 가타부타하는 것이 없는 듯이 보였으나, 중심은 참으로 밝고 결단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큰 의심스러운 일을 결단함에 있어서는 크게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간사한 사람들을 제거할 때에 공이 힘을 가장 많이 썼으므로 중망이 더욱 공에게 돌아갔다. 공 역시 세상을 바로잡는 것으로 자임하여 선한 사람들을 북돋아 주고 심어 줘서 국운을 붙들고자 하여 비호하고 장려 선발하기를 항상 미치지 못할 듯이 하니, 사림에서는 공을 의지하기를 마치 제방이 홍수를 막아 주듯이 여겨 두려움이 없어졌으며, 간사한 무리들은 공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쁜 마음을 내지 못하였다.

공이 별세하자,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아래로는 마을에 있는 선비에 이르기까지 공을 아는 자들은 놀라 부르짖고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모두들 말하기를 “공의 존망에 국운이 달려 있는데 하늘이 갑자기 공을 빼앗아 갔으니, 하늘은 참으로 알 수 없다.” 했으며, 명종께서 어제(御題)로 독서당(讀書堂)에 내린 글에 맨 먼저 말씀하기를 “기 판윤(奇判尹)을 애도하노라.”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상이 친필로 쓰신 것이다. 공의 사망에 대해 애통해한 것은 비단 아랫사람들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성상께서도 그러했던 것이다. 대부인께서는 애통해한 나머지 옛날의 병이 다시 도져서 1개월 후에 또다시 별세하였으니, 하늘의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이 이러하단 말인가.

이해 10월 1일 경오에 고양군 원당리(元堂里)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안장하니, 참판 부군의 묘 아래에 있었으며 판서 부군의 묘와는 서로 바라보이는 수백 보 사이에 있었다. 공이 처음 별세하자 친구들과 관리들이 애통하고 실성통곡하여 친척을 잃은 듯이 슬퍼하였는데, 장례 때에도 이와 같이 해서 더욱 지극히 하였으니, 여기에서도 공의 덕이 인심에 사무쳤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공은 양주 조씨(楊州趙氏)에게 장가드니, 성균관 사성 조방종(趙邦宗)의 따님이다. 아들은 한 사람인데, 응세(應世)로 부원군 임백령(林百齡)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으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직남(直男)인데 어리다.

공은 큰 재주와 훌륭한 그릇으로 마땅히 크게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수(壽)가 덕에 차지 못하여 중도에 탈락되었고 학문 또한 세상에 크게 드러나지 못했으니, 이는 슬퍼할 만하다. 감히 역임했던 관직과 행적의 대강을 상고하여 위와 같이 기록해서 작자에게 묘지(墓誌)를 청하여 불후(不朽)를 도모하려고 하는 바이다. 삼가 행장을 짓는다.

[주-D001] 경신년 : 원문은 ‘庚戌’인데, 앞뒤의 간지로 따져 보아서 ‘戌’을 ‘申’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 훈척대신(勳戚大臣) : 훈(勳)은 훈구(勳舊)이며 척(戚)은 외척(外戚)으로,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을 가리킨 것이다.

[주-D003] 경위(涇渭) : 옳고 그름과 청탁(淸濁)에 대한 분별이 엄격함을 이르는 말이다. 원래 중국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두 물 이름인데, 경수(涇水)는 물이 탁하고 위수(渭水)는 맑기 때문에 비유한 것이다.

숙모에 대한 만장〔挽叔母〕 ; 판윤공(判尹公)의 모부인(母夫人)이다.

이위를 슬퍼하는 외로운 인생 / 孤露悲伊蔚

오히려 숙모님을 의존하였네 / 猶依叔母存

말씀을 받든 지 얼마였던고 / 幾多親警欬

돌이켜 혼정신성하는 것 같았네 / 還似奉晨昏

이다지도 갑자기 돌아가시니 / 奄忽今何遽

쓸쓸함은 차마 말할 수 없네 / 凋零不忍言

거친 산 상여끈을 자르는 곳에 / 荒山斬紼處

통곡의 눈물 물동이 기울인 듯 쏟아지네 / 摧痛淚傾盆

[주-D001] 이위(伊蔚) : 《시경》〈소아(小雅) 육아(蓼莪)〉에 “길고 큰 아름다운 쑥이라 여겼더니, 아름다운 쑥이 아니라 제비쑥이로다. 슬프고 슬프다 부모여, 나를 낳으시느라 몹시 수고롭고 병드셨도다.〔蓼蓼者莪 匪莪伊蔚 哀哀父母 生我勞瘁〕” 하였다. 이는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생전에 효도하지 못한 슬픔을 노래한 시이다.

조선시대에 주자가례에 따라 사대부는 4대를 기제사지내고 그후엔 신주를 사당에서 옮겨 땅(묘)에 묻습니다. 4대를 기제사 지내면 한세대를 20년으로 보면 100년이고 30년으로보면 120년으로 대략 100년은 넘어갑니다. 저는 제사는 장손만 지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4대를 봉사한다는 것이 장손 4대가 아니라 살아있는 후손 4대였습니다. 그러니까 장손의 4대는 고조부까지 기제사 지내는 것이고 큰아들로만 이어져 100년쯤 가는 동안 4세손이 죽고 5세손이나와 5대조인 현조부는 신주를 묘에 묻는 매안을 해야 하지만 작은집의 작은집에서는 장손에게는 현조부가 아직 고조부이거나 증조부인 후손이 있다면 신주를 묻는 것이아니라 신주를 그 최장의 집으로 옮겨 기제사를 이어나가고 모든 현손자가 모두 죽어야 신주를 묘에 묻는 매안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봉 할아버지가 퇴계선생에게 질문하는 이 편지글은 그러면 현손자는 죽었지만 그 부인이 살아있다면 이때 신주를 묻는 매안 해야 하나 아니면 그대로 있어야 하나 하는 문제입니다. 공봉 할아버지에겐 고조부이신 청파 할아버지의 신주에 대한 물음에 대한 건 제 12대조이신 기은 할아버지에 대하여 아드님 정자공 기침 할아버지가 쓰신 기의헌 행장을 소개 하면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책에서 가져옵니다. 그냥 읽으면 무슨 말인가 모르 실듯하여 갈호안에 약간의 제 나름의 주를 달았습니다.

[저의 가문은 영락하여 여러 종반들이 흩어져 살기 때문에, 온 집안의 높은 조상에 대해 오래도록 예를 거행하지 않아, 고조(청파 할아버지)의 신주가 아직도 제사를 주재하는 집에 있는데, 제사를 주재하는 이는 바로 그분의 5대손(의 할아버지인 듯)입니다, 전에 숙모(준 할아버지의 부인)가 살아 계실 때는, 그 분이 증손대(청파 할아버지의 증손자대는 책받침부수 돌림자 5형제대)가 되기 때문에, (옮겨야 하지만 준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않계시는 등 사정상)옮겨다가 모실 수가 없어서 감히 체천(신주를 옮김)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숙모 역시 돌아가셨으니, 지금의 제도로 미루어 보건대 체천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이고, 증조(축 할아버지)도 제사를 이은 이(의 할아버지인 듯)에게는 고조가 되니, 이 분도 옮겨다가 모셔야 마땅합니다. 다만 최장(항렬상 가장 높은 분)이 되는 형(대림 할아버지)이 멀리 호남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옮겨다 모시는 예를 실행하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주재하는 이(의 할아버지인 듯)가, 어머니(대복 할아버지의 부인 전주이씨)가 아직 살아 계신다 하여, 다른 집으로 옮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비록 맏며느리가 주제하는 것에 관계되지만, 한때의 편의를 따른 것이니, 행할 수 있는 일인 듯합니다.

고조를 체천하는 의논에 대해서는 종형(친형인 대림 할아버지가 같은 대자 돌림 가운데 가장 연장이라 했으니까 4촌형으로는 이웃의 호남에 살던 참판공의 아들 3형제와 서울사는 고봉 할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의 대항 할아버지가 있지만 아마도 대항 할아버지인 듯) 이 “『주자가례』에도 고조까지 제사한다는 말이 있으니, 지금 체천하는 것은 편치 않다” 했습니다. 만약 다른 집으로 옮기고자 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실행하기 어려운 형편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주재하는 이의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다 하여 그대로 그 집의 별실에 모셔 두면, 이것은 5대를 제사하는 것이 됩니다. 제사를 주재하는 이의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천봉하기가 이미 어렵고 그렇다고 매안(땅에 묻음)하는 것도 편치 않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제사를 주재히는 이의 나이가 많아서 종숙의 항렬에 있는 이들 가운데 도리어 젊은 사람이 많습니다. 상식적인 이치로 말하자면, 제사를 주재하는 이가 혹시 먼저 죽고 그 아들이 제사를 이을 경우, 한 집안에 6대의 제사가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예의 본뜻에나 시속의 편의에나 더욱 방해됩니다.

저희 집안이 비록 한미하다고는 하지만, 소종小宗을 받드는 이들이 무려 여나문 집이나 됩니다, 만약 4대를 봉사하는 것으로 정한다면, 마땅히 집안의 일족이 돌아가면서 받들어야지, 단지 종가에서만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도를 어기고서, 집안이 돌아가며 제사를 받드는 것을 한 집안의 법으로 삼고자 한다면, 또한 의례가 꺼리는 데에 걸리고 옳지 못한 죄를 범하게 되어 매우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지금의 제도를 따르는 쪽으로 결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형님이 마침 사당을 세운다고 하시며, 편지를 보내어 몇 분의 감실을 만들어야 하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그 때문에 다시 마음이 편치 아니하여, 새로이 『가례』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결정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종가의 경우에는 3대로 결정하고 우리 사당의 경우에는 4대로 정한다면, 남의 일을 처리하고 나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판이하게 둘로 갈라져, 더욱 편치 않게 느껴집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예에도 맞고 지금의 제도도 거스르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가르쳐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무릇 이러한 여러 곡절에는 또한 편지로 말씀드리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고봉 선생이 19살에 자기 생을 뒤돌아보며 지은글

자경설(自警說)

고인(古人)들은 모두가 과거의 허물을 자책하여 스스로 경계하였으니, 이는 과거의 실수를 마음 아프게 여기고 앞으로 잘하겠다는 생각을 일으키려고 해서이다. 이는 모두 성인(聖人)과 현사(賢士)들이 뜻을 붙여 공부하던 것인데, 나만 어찌 유독 그러하지 않겠는가. 가영(歌詠)하던 나머지 아득히 19년 전의 일을 멀리 생각해 본다.

나는 가정(嘉靖) 정해년(1527, 중종22)에 태어났으니, 곧 대행왕(大行王) -중종- 22년이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할머니를 여의고 이갈이를 할 무렵에 어머니를 여의고서 오직 아버지만을 의지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고생하시면서 나를 길러 주셨는데, 나는 어려서부터 질병이 많아 죽다가 살아나곤 하였다. 이제 와서 아련히 그때 일을 생각하니, 비통함이 하늘에 사무친다. 아,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가끔 소싯적 일을 생각해 보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한두 가지 생각나는 것도 있다. 계사년(1533)에 비로소 가정에서 수학하였다. 이듬해인 갑오년(1534) 초가을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이로 인해 결연히 학업을 내팽개치고 더 이상 학문을 일삼지 않았으며, 아버지께서도 막 상(喪)을 당한 터라 가르치지 않으셨다.

을미년(1535)에 효경(孝經)을 읽고 글씨를 배웠으며, 또 소학(小學)을 외우기도 하여 거의 자포자기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고 귀신 역시 무정하여 병신년(1536) 겨울에 작은누이가 역질로 죽었다. 아버지께서는 환난과 재앙이 거듭 미침으로 인해 산의 절로 피해 가 계셨으므로 나 또한 따라가서 글을 읽고 글씨도 익혀 자못 학업이 진전될 가망이 있었다.

병신년 겨울부터 정유년(1537) 가을까지 아버지께서 절에 계시다가 늦가을에 서울에 가실 일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서울에 가신 뒤 나는 집에 있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10월 초에 스스로 분발하여 서당에 가서 대학을 다 배우고 이어 한서(漢書)와 한유(韓愈)의 문장을 읽으니, 그해가 벌써 저물었다. 따라서 집에 내려와 근친(覲親)한 다음 다시 올라가서 맹자와 중용을 읽었으며, 늘 동료들과 더불어 연구(聯句)를 짓거나 문장을 짓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공부에 소질이 있다고 하였다. 고문진보 전집(前集)을 읽고 또 고부(古賦)를 읽고는 끊이지 않고 줄줄 외웠는데, 그때가 무술년(1538, 중종33)이었다.

이 당시 내 외조부(강영수)의 첩인 외조모께서 가문의 어른으로서 항상 여러 손자들을 어여삐 돌보셨다. 나의 어머니께서 어릴 적에 일찍이 그 집에서 자랐고 나의 형(기대림)도 그 집에서 자랐는데, 우리들이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매우 극진하게 돌보아 주셨다. 연세가 팔순이 넘었는데도 청력이나 시력이 조금도 감퇴하지 않았다. 항상 나를 어루만지며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이니 열심히 글을 읽으라!” 하셨는데, 그해 봄에 별세하였다. 집안에 화(家禍)가 갑자기 닥치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고문진보 후집을 수백 번 읽고 나니 때는 7월이었다. 그대로 이듬해 10월까지 읽어 마치고 나니, 기해년(1539)이었다.

이때 선배들이 감시(監試)를 보기 위해 서당에 모여 글을 읽고 문장을 짓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나도 따라 배웠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가송(歌誦)은 시속을 따르지 않았고 시부(詩賦)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 비록 법도에 맞지는 않았지만, 더러 글을 잘 짓는다고 칭찬한 사람도 있었다. 10월 그믐께 아버지께 사략(史略)을 배우기 시작하여 3개월에 걸쳐 끝내고 나니, 해는 경자년(1540)이요 달은 1월이었다.

그 후 차츰차츰 우매함이 트이고 학업이 진전되었다. 이어서 논어(論語)를 수학하여 가을에 끝마쳤다. 이해 봄에 외숙부께서 문과에 급제하여 가을에 성묘를 하러 이곳에 오셔서는 내가 닦은 학업을 살피시고 당시 배우고 있던 것을 강론하시면서 나에게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고 면려하셨다. 그러자 서울의 친척들이 내가 장차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내가 저술한 글들을 요구하였으므로 나는 즉시 글을 다 모아서 친척들에게 부쳐 주었다. 이 때문에 나의 상자 속에는 그전에 지었던 초고(草稿)가 없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는 서전(書傳)을 읽어 모두 외웠다.

이듬해 가을에는 시전(詩傳)을 읽고 이어 주역(周易)을 읽었다. 경자년(1540, 중종35)부터 신축년(1541)까지 8개월 동안과 신축년부터 임인년(1542) 봄까지 10개월 동안을 합해서 계산하면 달로는 18개월이요, 햇수로는 1년 반쯤 되는데, 그동안 뜻이 해이해지고 성질이 나태해져서 입으로 읊지도 않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않은 시간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비록 가끔씩 분발하려는 기분을 가져 보기도 했지만 상황이 도와주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아버지께서 내가 조금 아는 것이 있다고 하여 항상 수강(授講)을 엄하게 하지 않으시고 훈계하고 권장하는 일도 소홀히 하셨으며, 때로 방탕하게 노는 일이 있어도 심히 책망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내 안일하게 지낼 수 있다고 여겨, 그 결과 나이가 들수록 학문은 더욱 떨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뜻은 더욱 해이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소득이 없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신축년 봄에는 외종조모(外從祖母)를 곡(哭)하였다. 외종조모께서는 항상 우리 어머니를 양녀로 삼아 오시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우리를 자식처럼 여겨서, 추울까 염려하여 옷을 입히시고 주릴까 염려하여 밥을 먹여 주셨다. 어린 내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오직 외종조모가 내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때 이르러 별세하여 영원히 이 세상을 하직하셨으니, 이 원통함이 어찌 다하겠는가. 하늘이여, 귀신이여! 몇 해 전에는 우리 어머니를 빼앗아 가고 이제는 또 우리 외종조모를 빼앗아 가니, 하늘이여, 귀신이여! 한결같이 어쩌면 나에게 이처럼 모진 고초를 내린단 말인가! 아버지를 수발하여 봉양하는 일로부터 많은 식구들과 어머니 여읜 우리 두 형제에 이르기까지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옷이 해지거나 하면 어디서 도움 받아 구할 것이며, 제쳐 두고 거행하지 않은 뒷일은 누구에게 고할 것이며, 어리석고 용렬한 노비들은 누구에게 명령을 받아 일을 한단 말인가! 밤낮으로 묻고 배우며 출세하기를 바라던 것도 이제는 영화롭게 봉양하는 데 쓸모가 없게 되고 말았으니,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이해 늦봄에 모두 130구(句)가 되는 서경부(西京賦)를 지었다. 용산(龍山 정즐(鄭騭))이 평론하기를 “그 글을 읽어 보면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있으니, 그 명성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퍼지겠다. 생각이 심원하고 기상이 장대하며, 어조가 고상하고 문장이 통창하다. 비록 간간이 서투르고 껄끄러운 데가 있기는 하나 단지 이것은 조그마한 흠일 뿐이다. 조금만 더 진취하면 곧 옛 작자(作者)의 경지에 이를 것인데, 더구나 그 밖의 과문(科文)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축하할 뿐이다.” 하였다. 여름에는 서정부(西征賦)를 차운(次韻)했는데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이듬해 봄에는 가을에 과거를 보리란 기대를 갖고 시험 삼아 시부를 지어 보았다. 그러나 학문을 한 것이 보잘것없고 생각이 꽉 막혀서 끝내 편(篇)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슬퍼하기를 “나는 다행히 세상에 태어나 두 가지 낙(樂)을 얻었으니, 질병과 가난에 대한 걱정도 없고 농사짓는 수고로움도 없다. 그런데도 포기한 채 학문을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일삼을 것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개탄스러워 말을 하지 못했다. 며칠 뒤 선배들이 서당에 모였다는 말을 듣고 나도 가서 어울렸지만, 거기서도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다. 한번은 조정몽주부(吊鄭夢周賦)를 지어 보았는데 이때는 붓끝이 저절로 막힘이 없었으니, 끝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5월에는 제생(諸生)들이 모두 돌아갔으므로 나 또한 집에 내려와 매일 부지런히 하여 날마다 한 번 읊을 때마다 고부(古賦) 10여 수를 온습(溫習)하고는 시험 삼아 의정부부(議政府賦)와 고소대부(姑蘇臺賦) 총 100여 구를 지어 보았는데, 그제야 비로소 옛날에 배웠던 것을 회복하여 거의 학업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기대하게 되었다.

가을에 시험에 응시했으나 끝내 이룬 것이 없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지기(志氣)가 쇠퇴하여 끝내 개연히 분발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대학 한 책만 끼고 어영부영 한 해를 마쳤다. 그 후 파방(罷榜)되었다는 기별을 듣고는 열흘 동안 산의 절에서 원부(元賦) 가운데 초(抄)한 것을 외웠다. 그러나 하해(河海)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한갓 근원 없이 두절된 연못가에서 머뭇거리며 큰 바다에 나아가지 못하여 소견이 커지지 못했으니, 아무리 속을 태우고 오래 생각을 해 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떤 직무에 종사도 해 봤지만 역시 남에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의의(疑義)를 지은 것이 매우 좋아 사람들이 모두 허여하였으므로 하나라도 얻은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끝내 얻지 못했으니,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책을 싸 들고 산의 집으로 갔으니, 때는 벌써 초여름이었다. 목사(牧使) 이공 홍간(李公弘幹)이 제생들을 불러 모아 학교에서 강의를 하였으므로 나도 찾아가서 함께 어울리며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는 6월 그믐에 파접(罷接)하고 돌아왔다. 그 후 8월 초하루에는 목사가 다시 생도 10여 명을 모아 놓고 소학을 강의하였으므로 나도 거기에 끼었다. 그로 인하여 교적(校籍)에 이름을 올리고 분주히 맡은 직분을 수행하였는데, 길이 또 매우 멀고 험해 한 번 출입할 때마다 4, 5일씩 쉬는 바람에 학업이 폐해지고 뜻이 해이해졌으니, 그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오가는 가운데 홀연히 세모(歲暮)를 만났으니, “세월은 말 위에서 다 보내고, 시서는 상자 속에 쟁여 두었다.〔日月馬上過 詩書篋中藏〕”고 한 옛사람의 말이 꼭 맞는 말이라 하겠다.

다음 해 갑진년(1544, 중종39)에 목사 송공 순(宋公純)이 유생 가운데 더 배우기를 청한 자들을 선발하여 글을 강송(講誦)하도록 하고, 반드시 그 강송하기 시작한 때를 기록하여 기간이 오래되었으면 곧 학업이 얼마나 성취되었는지 심사하곤 하였다. 나는 이로 인해 맹자를 읽어 3월 그믐에 끝내고 한유(韓愈)의 글을 읽었다. 4월 보름에는 용산(龍山) 선생을 찾아뵈었다. 5월에 장차 도회(都會)에 가려고 선생을 뵈었더니, 선생께서 민암부(民嵒賦)를 지으라고 명하셨다. 부를 다 짓자 선생께서는 자주 칭찬하셨다. 한유의 글은 제문(祭文)까지 읽고 돌아왔는데, 5월도 이미 그믐이 되었다. 6월에 도회에 갔다가 그믐에 집으로 돌아왔다. 초가을에는 재차 용산 선생께 가서 또 한유의 글을 읽다가 보름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달부터 8월 말까지는 더위에 지친 나머지 마냥 누워 책상만 마주하였을 뿐이다. 9월 초에는 용산 선생께 가서 문선(文選)을 강습하다가 열흘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10월 초하루에 또 용산 선생께 가서 상서(商書)의 대문(大文)을 읽다가 1, 2권도 못다 읽고 돌아오니 그때가 이미 16일이었다. 세월이 하도 빨리 흘러 또 세모를 만났다. 머리 돌려 천지를 바라보매 해는 곧 지려고 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처음에는 수년 이래로 게으르고 방탕함이 고질이 되어 학업은 진취되지 못하고 나이만 많아진다고 여겨 매우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겨울철이나마 학업을 부지런히 닦으려니 하였으나 입지(立志)가 견고하지 못하고 습관을 제거하지 못하여 헛되이 세월만 보냈을 뿐이다.

아, 내가 태어난 해의 1월 1일이 기묘일이었는데 지금 벌써 110번째의 기묘일을 맞게 되었다. 유학(儒學)을 공부한 날도 꽤 오래되었고 세상에 태어난 지도 적지 않은 햇수가 되었건만 포기해 버리고는 성립할 것을 미처 꾀하지 못했으니 심하다, 나의 무지함이여! 역시 좋은 쪽으로 변화하지 못한 것이로다. 돌이켜 생각하니 참으로 분하고 가슴 아프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 슬프고 괴로운 나머지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때를 헤아리고 자신을 헤아려 보니, 슬픔이 가슴에 가득하여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지나간 일들을 편차(編次)하여 행해 온 일들이 어떠했는가를 추적해서 한편으로는 경계를 하고 한편으로는 권면을 하고, 또 스스로 좋지 않은 때에 내가 태어났음을 슬퍼하는 바이다.

아마도 이 말들은 모두가 지난날의 사소한 일로서 과실을 경계하고 공부에 진취하지 못했던 일에 관한 것이니, 대체로 기억하여 잊지 않으면 되지 언외(言外)의 의미는 논할 바가 아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를 항상 나의 이목(耳目)에 접하게 하여 옛날의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고 지금의 성취 없음을 돌아보면서 개연히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감발하고 격려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밖의 일의 내용에 대해서는 생각은 빤하지만 글로 옮기기는 참으로 쉽지 않아 마침내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주-D001] 내……외조모 : 뒤의 문맥과 연관지어 볼 때 외종조모가 되어야 될 듯하다.

[주-D002] 서정부(西征賦) : 진(晉)나라 반악(潘岳)의 작품이다.

[주-D003] 세월은……두었다 : 당나라의 문장가 장문잠(張文潛)의 〈문주한요지왕재원원음(文周翰邀至王才元園飮)〉 중 일부이다.

행장(行狀)

정홍명(鄭弘溟) 기암(畸菴) 지음

선생의 휘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 성은 기씨(奇氏), 관향은 행주(幸州)이다. 행주에 고봉 속현(高峯屬縣)이 있어서 이 때문에 자호를 고봉(高峯)이라 하였다. 기씨는 고려조에 무예(武藝)로 입신하여 장상(將相)을 지낸 이가 퍽 많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면(勉)이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이분이 휘 건(虔)을 낳았는데 세종조에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고, 문종 말년에 연세 50세가 채 안 되어 치사(致仕)하였다. 세조가 즉위한 뒤 권람(權擥)을 시켜 다시 나오도록 강요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졸하였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이분이 선생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축(軸)은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를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丞政院左丞旨)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휘 찬(襸)은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고(考) 휘 진(進)은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아우가 죄를 입은 뒤부터 세상일에 마음을 끊고 광주(光州)의 고룡향(古龍鄕)에 은거하였다. 대신(大臣)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은(謝恩)하고 취임은 하지 않았다. 뒤에 선생이 광국 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된 것 때문에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덕성군(德城君)에 봉해졌다. 부인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요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증손녀인데, 가정(嘉靖) 정해년(1527, 중종22) 11월 18일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겨우 이를 갈 나이가 지나자 성인처럼 의젓하였다. 7세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는데,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서 쉬지 않고 글을 읽었다. 누가 혹 위로 삼아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저는 스스로 이것을 즐깁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세에 모부인 상을 당하자 사람들이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애통하게 울부짖었다. 조금 장성하여 선생은 집에서 공부를 하면 구애되는 점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마침내 향숙(鄕塾)에 나아가 글을 읽되 날마다 과정(課程)을 두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또 한가한 날에는 육갑(六甲)이 쇠락하고 왕성해지는 이치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대략 통달하였다. 한번은 어떤 객이 연구(聯句)를 가지고 선생을 시험하려고 ‘식(食)’ 자를 들어 시제(詩題)를 냈다. 이에 선생이 즉시 응수하여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食無求飽君子道〕” 라고 읊었다. 그러자 객은 한참이나 칭찬하다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너의 계부(季父) 덕양공(德陽公 기준(奇遵) )이 도덕과 문장으로 사림(士林)의 영수였는데, 그 가업을 이을 사람이 바로 너로구나.”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선친께서 훈계한 말들을 손수 기록하여 조그만 책자로 만들고 스스로 펼쳐 보면서, “내가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훈계를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꽤 진취된 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질이 범상하여 여전히 거치니, 이 일을 생각하면 늘 스스로 송구스러워진다. 일찍이 듣건대 옛사람에게는 문견록(聞見錄)이 있었다 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때에 따라 기록하는 차기(箚記)를 두어 잊어버릴 것에 대비해야 한다.” 하였다. 이로부터 자신을 수양하는 위기(爲己)의 학문에만 전념하여 세속에서 익히는 과문(科文)엔 마음을 두지 않았다.

갑진년(1544)에 중종(中宗)이 승하하자 곡림(哭臨)하고 소식(素食)하였으며, 졸곡(卒哭)에 이르러서야 그만두었다. 인종(仁宗)의 초상 때도 이렇게 하였다.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사림의 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물리치고 문을 굳게 닫은 채 밖에 나오지 않았다. 기유년(1549)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

을묘년(1555)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이 무렵에 원근에서 찾아와 배우는 이가 매우 많았다.

무오년(1558)에 문과(文科)의 을과(乙科) 제1명(第一名)으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천거로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대교(待敎)를 거쳐 봉교(奉敎)에 올랐다. 이때 휴가를 얻어 남중(南中)에 내려와 있었는데, 빨리 서울로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교지가 있었다.

계해년(1563)에 승정원 주서(丞政院注書)에 제수되었다. 잠시 후 병으로 체직되어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겨 호당(湖堂 독서당 )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문(吏文)에 대한 고과가 중(中)을 맞았다는 이유로 다시 체직되어 남쪽으로 돌아왔다. 이 당시에 이량(李樑)이 국정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그는 선생이 한 번도 사적으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생에게 깊이 원한을 품고는 대관(臺官)을 사주해서 “사론을 가탁하여 조정을 비난한다.〔假托士論 謗訕朝政〕”고 지목하여 선생을 삭출(削黜)하기까지 하였다.

이량이 쫓겨나자 다시 서용되어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선생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국가의 안위는 재상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책임은 경연에 있으니, 경연의 소중함이 재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이 성취된 다음에야 훌륭한 재상의 그릇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서 임용할 수 있을 터이니, 그렇다면 경연이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성덕(聖德)이 일찍 성취되시어 성리학에 마음을 두고 계십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경연에 나오신다면 나날이 진보하고 성취하실 것이니, 어찌 크나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아뢰었다. 또 언로(言路)를 개방하고 충직한 간언을 잘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반복하여 진술하였다.

병 때문에 홍문관의 직책이 체직되었다. 성균관 전적과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병조를 거쳐 이조 정랑에 옮겨졌으나 휴가를 요청하여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예조 정랑에 옮겨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며 취임하지 않으니, 계속해서 교리(校理)와 헌납(獻納)을 제수하며 조정으로 불렀다. 선생은 본디 한가히 지내면서 학문에 모든 힘을 쏟으려 하였으나, 한 달 동안 은혜로운 명이 누차 내렸기 때문에 애써 일어나 달려갔다. 올라가는 도중에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제수되고 이어 관례대로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으며, 헌부에서 장령이 두 번이나 되었다.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조사(詔使)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이때 선생이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관서(關西)에 갔다. 두 조사는 모두 중국 조정의 이름난 유학자로 가끔 어려운 질문을 하였는데, 원접사가 일체 선생에게 대답하도록 맡기자 선생은 응수와 대답을 모두 알맞게 해냈다.

조정에 돌아오자 집의(執義)에 제수되었다. 조강(朝講)하는 때에 다음과 같이 진계(進啓)하였다.

“천하의 일에는 반드시 시비가 있는 법이니, 시비가 밝지 못하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정사(政事)가 전도됩니다. 지난날 중종 초기에 조광조(趙光祖)가 끊어진 도학을 제창하고 밝혀서 당대의 임금과 백성을 요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처럼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간악한 소인배의 모함을 입고 귀양 가서 죽기에 이르렀으니, 지금까지 사림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조광조의 학문은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전해 받았고 김굉필은 김종직(金宗直)에게서 전해 받았으며 김종직은 정몽주(鄭夢周)를 사법(師法)으로 삼았으니, 그 연원(淵源)의 유래가 바르고 순수하여 아무 흠이 없습니다. 이언적(李彦迪)은 당대의 이름 높은 선비로 억울하게 죄를 덮어쓰고 멀리 서쪽 변방에 귀양 가서 죽었습니다. 이상의 두 선비는 이름이 죄인의 장부에 오른 채 오래도록 씻기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명(聖明)하신 전하께서 즉위하시어 그 사정을 밝게 아셨으니, 의당 먼저 그분들을 표창하여 존숭하소서. 이렇게 한다면 국시(國是)가 정해지고 인심이 복종할 것이니, 선조(先祖) 때 있었던 일이라 핑계 대고 머뭇거리며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대한 사실은 《논사록(論思錄)》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날 전한 겸 예문관응교(典翰兼藝文館應敎)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대신이 대원군(大院君)의 사묘(私廟)에 제향을 올리라고 의견을 올렸다. 이에 대해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상께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시고부터는 대통은 중하고 사친(私親)은 가벼운 법이니, 예에 있어 의당 압존(壓尊)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를 초월해서 제향을 올리는 것은 극히 온당치 않으니, 의당 예관에게 명하여 십분 예를 강구해서 반드시 예에 부합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21)에 직제학 겸 교서관판교(直提學兼校書館判校)에 제수되었다. 곧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를 거쳐 우승지에 이르러 병으로 체직되었다. 다시 대사성과 대사간에 각각 두 번씩 제수되었다.

경오년(1570)에 벼슬을 그만두고 남쪽으로 돌아와 있었다. 소명(召命)이 이른 것으로 말미암아 수백 언(言)의 상소를 올려 고질 때문에 벼슬할 수 없다는 뜻을 진술하였다. 그리고 청량봉(淸凉峯) 아래에 작은 암자를 지어 ‘귀전암(歸全庵)’이라 이름을 붙이고 그곳에서 노년을 마치기로 계획하였다. 그래서 누차 부제학, 이조 참의, 대사성 등의 관직으로 불렀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조정에서 마침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중국 조정에 주청(奏請)하고자 하여 선생을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발탁하니, 선생은 부득이 병을 무릅쓰고 명에 응했다. 이어 공조 참의와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봉직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였다.

선생이 남쪽으로 내려오던 날,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한강(漢江)에 나와 전별하였다. 이때 배 안에 앉아 있던 어떤 객이 선생에게 “사대부가 조정에서 처신할 때 시종 명심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선생이 이에 대해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면 더 말할 것이 없겠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이 뜻은 대체로 군자가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 의당 먼저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하고, 나아가 시세(時勢)를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게 하며, 마침내는 목숨을 걸고 도(道)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내려오는 길에 병이 나서 고부(古阜)의 사돈댁 김점(金坫)의 집에 들어갔다.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주위의 사람들에게 “명이 길고 짧은 것이야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다만 학문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여 뜻만 품은 채 그것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약을 올려도 들지 않고 가사(家事)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은 채 새벽 4경(更)에 돌아가시니, 향년 46세였다.

상께서 선생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내의원을 보내 약을 지어 병을 보살피게 하였으나, 내의원이 도착해 보니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상께서 몹시 애도하고 특별히 내리는 부의(賻儀)를 하사하였다. 서울에 사는 선비와 서민들은 선생이 예전에 거처했던 남산 밑 우사(寓舍)에 모여 곡하였는데, 모두 탄식하며 서로 조문하기를 “철인(哲人)이 죽었으니 국가가 누구를 의지할꼬.” 하였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대사간 기대승은 젊어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식견이 고명하였으니, 이황(李滉)과 의리(義理)를 논변(論辯)하여 앞 시대 사람들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것을 많이 밝혔습니다. 그리고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임금을 인도하기 위해 진달했던 말들은 모두가 성스럽고 현명한 제왕들의 도였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그를 떠받들어 유종(儒宗)으로 삼았습니다만, 불행하게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죽었습니다. 그의 가세가 청빈하여 상(喪)을 치를 수가 없으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넉넉히 도와주도록 하여 국가가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만력(萬曆) 원년(1573, 선조6) 2월 8일에 나주(羅州) 관아 북쪽 오산리(烏山里)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선생을 안장했다. 이는 선생이 평소에 지정해 둔 곳을 따른 것이다. 원근에서 장사를 지내기 위해 모인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다. 궁벽한 시골구석에 거처하여 스승으로 섬길 만한 분이 없었음에도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경전에 침잠하여 깊고 오묘한 뜻을 연구하고 찾되 항상 거기에 급급하여 완전히 알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아서 고금의 일에 널리 통달하였고 전고(典故)에도 매우 밝았다.

조정에 벼슬하여 임금을 섬기게 되어서는 매양 고인을 법으로 삼아 거취(去就)와 진퇴(進退)를 의리에 꼭 맞게 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였다. 경악(經幄)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실 적에는 임금을 정도(正道)로 인도하고 왕도정치를 회복시키는 것으로 간곡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입시할 때마다 한갓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의리를 따져 밝힐 뿐만 아니라 치란(治亂)과 현사(賢邪)에 대한 변설까지 곁들였는데, 언론이 매우 자상하고 주도면밀하여 충분히 임금을 감동시키고 뭇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는 점이 있었다. 또 제반 시설을 계획하는 경우 반드시 선왕의 법을 준수하려 하며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의 처사가 세도(世道)의 장부(臧否 선악 )에 관계되는데도 논의가 정해지지 않는 것을 볼 경우에는 그때마다 옛일을 인용하고 의리에 근거하여 뭇사람의 의심을 해결했다.

몇 가지 사례로 이런 것을 들 수 있겠다. 당시의 재상 이준경(李浚慶)이 인종(仁宗)을 곧장 체천(遞遷)하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다. 허엽(許曄)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의논에 쏠려 동조하며 왕께 아뢰어 윤허를 얻기까지 하였는데, 선생이 당시 간장(諫長)으로서 매우 강력하게 논쟁하여 끝내 그 일을 바로잡았다. 또 명종의 초상 때에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공의전(恭懿殿)이 대행왕(大行王)과 수숙(嫂叔) 사이인데, 옛날에는 수숙 사이에 복(服)이 없었다.” 하자, 선생이 “형제가 나라를 전하고 왕위를 계승할 경우 본디 군신과 부자의 의리가 있는 법이니, 어찌 복이 없을 리가 있단 말인가.” 하고, 이에 형제가 서로 대통을 계승하는 일과 거기에 따른 복제례(服制禮) 의논을 만들어 밝혔다.

선생이 우리 유학의 도를 존숭하고 믿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그래서 이현(二賢 조광조와 이언적 )의 억울함을 씻어 달라고 청하여 사림(士林)의 뿌리를 든든하게 북돋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분이 누구인 줄을 알게 하였다. 퇴계(退溪) 선생과 의리를 논변할 때, 처음에는 의견이 서로 부딪치기도 했지만 만년에는 퇴계가 선생의 말을 따른 것이 많았다. 자세한 내용은 《사칠왕복서(四七往復書)》에 있다. 어떤 이가 퇴계에게 “고봉(高峯)은 실천이 앎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고 여쭙자, 퇴계가 “예(禮)로써 임금을 섬기고 의(義)로써 나아가고 물러났거늘 어째서 앎과 실천이 다르다고 하는가.”라고 대답하였다. 퇴계가 벼슬을 사퇴할 적에 상이 이 시대에 학문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고 묻자, 퇴계가 답하여 아뢰기를 “학문에 뜻을 둔 선비가 요즈음 세상에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중에도 기대승은 널리 알고 조예가 깊어 견줄 만한 사람이 드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통유(通儒)라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평소 주상께 아뢰거나 대답했던 말들을 당시의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국사(國史)에서 조사하고 초록(抄錄)해서 2권의 책자로 만들게 하고 《논사록(論思錄)》이라 이름을 붙였다. 선생이 저술한 시문(詩文) 약간 권 및 퇴계와 주고받았던 서한(書翰)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선생이 일찍이 변무주문(辨誣奏文)을 지어 녹훈된 것 때문에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 덕원군(德原君)에 추증하고, 부인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하였다. 부인은 충순위(忠順衛) 보공장군(保功將軍) 휘 임(任)의 따님이다.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효증(孝曾)이고 차남은 효민(孝閔)과 효맹(孝孟)이다. 딸은 사인(士人) 김남중(金南重)에게 시집갔다. 아들 하나와 딸 둘은 모두 요절했다. 효증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 김점(金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정헌(廷獻)은 현감(縣監)이고, 장녀는 승지 조찬한(趙纘韓)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한이겸(韓履謙)에게 시집갔다. 효민은 참봉 양홍도(梁弘度)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두었고, 효맹은 승지 정엄(鄭淹)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정헌은 정즐(鄭騭)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고, 측실(側室)에게서 낳은 아들은 국주(國柱)이다. 정유왜란(丁酉倭亂, 1597) 때에 효민과 효맹은 길에서 적을 만나 죽었고, 김씨에게서 낳은 딸과 양씨ㆍ정씨는 겁박을 당하자 굴하지 않고 모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주-D001] 권람(權擥) : 1416~1465. 자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본관은 안동,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계유정란(癸酉靖亂) 때 한명회(韓明澮)와 더불어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 대신들을 제거하고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였고,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의 감수 책임을 맡았다. 저서에 《소한당집》 등이 있다.

[주-D002]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 : 강희맹(1424~1483)을 말한다.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ㆍ운송거사(雲松居士)ㆍ무위자(無爲子)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조선 초기 의례와 행정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문학에도 재주를 보였다. 저서에 《사숙재집(私淑齋集)》, 《금양잡록(衿陽雜錄)》, 《촌담해이(村談解頤)》 등이 있다.

[주-D003] 위기(爲己)의 학문 :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하였다.

[주-D004] 졸곡(卒哭) : 삼우제(三虞祭)가 지난 뒤에 지내는 제사이다. 죽은 지 석 달 만에 오는 첫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받아서 지낸다.

[주-D005] 사가독서(賜暇讀書) : 학자 양성의 한 방법으로 젊은 관료 가운데 총명한 자를 선발하여 휴가를 주고 독서당에서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주-D006] 이문(吏文) : 중국과 교환하던 특수 관용 공문서로 자문(咨文)이나 서계(書契) 등에 사용되었다. 일반적인 한문과 달리 중국 속어가 더해진 것이 특징이다. 승문원에 이문학관(吏文學官) 3명과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 20명을 두었다.

[주-D007] 이량(李樑) : 1519~1563. 자는 공거(公擧), 본관은 전주(全州)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5세손이다. 명종의 총애를 믿고 전횡을 일삼으며 비리를 저질렀다. 1563년(명종18)에 사림을 숙청하려 계획하였으나 심의겸(沈義謙)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어 기대항(奇大恒)에게 탄핵받고 강계(江界)에 유배된 뒤 죽었다.

[주-D008] 대원군(大院君) : 중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선조의 생부인 덕흥군(德興君)을 가리킨다. 이름은 소(岧)이다.

[주-D009] 종계변무(宗系辨誣) : 조선 건국 초기 왕실의 종계가 명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전회전(大典會典)》에 잘못 기록되어 있어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던 일이다.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잘못 기록되어 조선은 명나라 측에 수없이 정정을 요청했고 선조 17년(1584)에 가서야 뜻을 이루게 된다.

[주-D010] 목숨을……한다 : 공자(孔子)의 말로 《논어》〈태백(泰伯)〉에 나온다.

[주-D011] 내려오는……들어갔다 : 〈고봉 선생 연보〉와 택당이 지은 〈시장(諡狀)〉에는 태인(泰仁)에 이르러 볼기에 종기가 났으며 고부(古阜)에서 사돈 김점(金坫)이 문병을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점은 고봉의 큰며느리 친정 부친으로 호가 매당(梅塘)이다.

[주-D012] 이준경(李浚慶) : 1499~1572.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ㆍ남당(南堂)이고, 본관은 광주(廣州),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홍문관 직제학과 대사헌 등을 지냈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565년(명종20) 영의정에 올랐다.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동고유고(東皐遺稿)》 등이 있다.

[주-D013] 허엽(許曄) : 1517~1580. 자는 태휘(太煇), 호는 초당(草堂),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의 아버지이다. 어려서 나식(羅湜)에게 《소학》과 《근사록》 등을 배웠고, 서경덕(徐慶德)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노수성(盧守成)과 벗하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초당집》과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주-D014] 공의전(恭懿殿) : 인종(仁宗)의 비(妃)인 인성왕후(仁聖王后 : 1514~1577)의 존호이다. 성은 박씨(朴氏),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의 따님이다. 능호는 효릉(孝陵)이다.

[주-D015] 대행왕(大行王) : 임금이 죽은 뒤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호칭이다. 여기서는 명종을 가리킨다.

[주-D016] 변무주문(辨誣奏文) : 1577년(선조10) 고봉이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가 되었을 때 중국 조정에 조선의 종계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지은 주문을 말한다.

시장(諡狀)

이식(李植) 택당(澤堂) 지음

공의 휘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이니 세상에서 고봉(高峯)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존재(存齋)라고도 칭한다. 기씨(奇氏)는 관향이 행주(幸州)인데, 행주는 지금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에 예속되어 있다. 선대는 고려 때에 현달하여 장상(將相)과 훈척(勳戚)을 배출한 문벌의 융성함이 국사(國史)에 갖추 실려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면(勉)이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이분이 휘 건(虔)을 낳았는데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조(世祖)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하고 다시 불러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며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축(軸)은 승지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찬(襸)은 응교(應敎)로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고(考) 휘 진(進)은 호가 물재(勿齋)이다. 아우 복재(服齋) 준(遵)과 함께 학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나,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자 시골에 물러나 살았다. 대신(大臣)의 천거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공이 공신에 녹훈됨에 따라 좌찬성에 추증되고 공신호(功臣號)가 내렸으며 군(君)에 봉해졌다. 부인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사과(司果) 영수(永壽)의 따님이요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증손녀로 가정(嘉靖) 정해년(1527, 중종22) 11월 18일에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겨우 5, 6세가 되자 마치 성인처럼 침착하고 점잖았다. 7세부터 글공부에 힘써 일과(日課)를 정하여 읽되 새벽이면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서 저녁 늦게까지 소리 내어 읽었다. 한번은 노복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며 넌지시 마음을 떠보니, 공이 “너희들이 어찌 이 맛을 알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8세에 모부인(母夫人)이 돌아가시자 울부짖고 통곡하며 하도 슬퍼하여 사람들이 차마 듣지 못했다.

상을 마치고 나서 집안의 번잡한 일이 공부에 방해되는 것을 싫어하여 향숙(鄕塾)에 나아가 배우며 학업을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총명한데다 기억력도 대단히 뛰어나 같이 배우던 뭇 아이들의 학업 내용까지 겸하여 통달했으며, 시구를 짓기만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물재공(勿齋公)이 일찍이 훈계한 글이 있었는데, 공은 그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 그대로 실천하였다. 그리고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정하고 오직 날마다 부지런히 정진할 뿐 과거를 보기 위한 공부는 안중에도 없었다. 중종과 인종이 잇달아 승하했을 때, 공은 벼슬도 아직 없고 관례도 올리지 않은 몸으로 졸곡(卒哭)에 이르기까지 소식(素食)을 하였다. 을사년(1545, 즉위년)에 사림의 참변을 듣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문을 굳게 닫고 여러 해 동안 밖을 나가지 않았다.

기유년(1549)에 처음으로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 두 시험에 모두 입격해 약관의 나이에 벌써 이름이 사림에 드러났다. 문장(文章)이 과거장을 휩쓸었기에 윤원형(尹元衡)이 공을 꺼리던 중에 공의 시권(試卷)이 높은 등급에 들어갈 것을 알고 고의로 떨어뜨려 버렸다. 그러나 공 또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을묘년(1555, 명종10)에 물재공이 돌아가셨다. 여묘살이 3년을 마치고 32세에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무오년(1558) 문과에 급제하였다. 마침 퇴계 선생이 소명을 받고 서울에 와 계시던 때라 선생에게 나아가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사단(四端)ㆍ칠정(七情)에 대한 논변이 있었다. 뒷날 퇴계가 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오년에 서울에 들어간 것은 매우 낭패스러운 길이었지만, 오히려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이어 정자(正字)에 올라 사관(史官)의 천거를 받았으나 오랫동안 응시하지 않았다. 신유년(1561) 여름, 비로소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고 전례에 따라 봉교(奉敎)에 승진되었다. 계해년(1563)에 승정원 주서로 옮겨졌다가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갔다. 다시 봉교가 되었으나 이문(吏文) 고과(考課)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벼슬이 깎여 체직되었다.

이에 앞서 윤원형이 국정을 도맡아 하면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명종 말기에 그 세력을 꺾기 위해 이량(李樑)을 등용하여 견제하였다. 그러나 이량이 다시 인척(姻戚) 관계를 믿고 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공은 당대의 명류(名流)인 윤두수(尹斗壽) 형제,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 등과 더불어 올바른 논의를 주장하는 인물들을 극력 끌어들였다. 그러자 이량이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붕당(朋黨)으로 지목하여 사헌부를 사주해서 논핵하게 하고 관직을 삭탈하여 밖으로 축출했다. 사림의 화가 막 일어나려 하매 온 나라가 크게 경악하였는데, 수일 후에 옥당(玉堂)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자 명종이 크게 깨달아 이량 등을 찬출(竄黜)하고 공을 다시 서용하여 사관으로 삼았다. 공은 이어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승진되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로부터 사림이 공을 존숭하였고 명종과 선조 연간에 조정이 다시 바르게 되었다.

갑자년(1564, 명종19)에 병으로 사직하여 물러났다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지제교(知製敎)에 뽑혔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수찬에 제수되었고, 병조 좌랑ㆍ성균관 전적ㆍ직강(直講)을 거쳐 이조 정랑에 승진하여 교서관 교리를 겸했다. 잠시 뒤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갔다. 예조 정랑ㆍ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병인년(1566) 10월에 헌납으로 부름을 받고 올라와 의정부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에 승진되었다.

정묘년(1567)에 장령(掌令)으로 옮겨졌다가 곧 사예(司藝)로 체직되었으며, 다시 사인과 장령에 제수되었다. 공은 스스로 자신의 학문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여겨 누차 요직을 역임하였으면서도 항상 한직을 요구하였다. 정묘년 5월에 홍문관 응교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중국에서 보내온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 두 조사(詔使)를 맞이하였다. 때마침 명종이 승하하여 조사가 오는 길에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빈주(賓主) 간의 예의 절차에 변례(變禮)가 많았다. 두 조사가 모두 박식하고 예의에 정통한 유신(儒臣)들인 데다가 의논하고 결정해야 할 절차들이 대부분 일반 규정에서 벗어난 것들이었는데, 공이 혼자서 그 응접을 담당하여 모두 그들의 뜻에 맞도록 하였다.

조정에 돌아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전직되었다. 경연에 입시하여 맨 먼저 논하기를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는 소인들의 참소를 입어 죽었습니다. 중종 말기에 비로소 그 억울함을 알아서 동시에 죄를 입었던 사람들 가운데 혹은 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왕(先王 명종 )이 어린 나이로 막 즉위한 을사년(1545)에 소인들이 또 학행이 있는 사림을 무함하여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기묘사화와 같은 못된 버릇을 다시 일으킨다.’라고 하며 몰아붙여 끝내 반역죄를 덮어씌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언적(李彦迪)은 세상에 드문 큰 선비였는데, 역시 죄를 얻어 귀양 가서 죽었습니다. 지금 비록 금망(禁網)이야 이미 열렸다 할지라도 시비는 아직 분명치 않으니, 청컨대 조광조와 이언적을 표창해서 시비를 바르게 하고 인심을 바르게 하소서.” 하였다. 또 논하기를 “노수신(盧守愼)과 유희춘(柳希春) 등은 모두 학문이 높은 유신으로서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방면되어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나이가 이미 5, 6십 세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을 차례에 따라 승진시킨다면 크게 쓸 수가 없을 것이니, 의당 품계를 뛰어넘어 발탁하여서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였다. 상이 모두 들어주었다.

이윽고 전한(典翰)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승진되었고, 교서관 판교(校書館判校)를 겸하였다. 곧이어 품계가 통정(通政)으로 승진되어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다시 우부승지로 바뀌었으며, 겸직은 전례와 같았다. 그 후 명을 받고 의주(義州)에 가서 조사(詔使)를 전위(餞慰)하고 돌아와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체직하여 공조 참의가 되었다가 다시 우승지에 제수되었다. 또 체직하여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

당초에 인종의 재위(在位) 기간이 1년이 채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윤원형이 문소전(文昭殿)에 인종을 부묘(祔廟)시키지 않았으므로 인심이 매우 분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명종을 부묘하게 되자 사림의 여론이 이때를 계기로 인종까지 아울러 부묘시키려고 하였고, 공이 그 논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신과 뜻이 서로 맞지 않아 공이 입시하여 앞의 조처가 잘못된 일임을 극력 논변하였는데, 이 때문에 대신의 뜻에 거슬리게 되었다. 대사헌 김개(金鎧)는 오랫동안 폐해졌다가 다시 들어온 인물로, 마음속으로 사림의 여론을 꺼리던 터라 먼저 기묘사류(己卯士類)를 비난하고 이어서 조정에 또한 이런 기습이 있다고 배척하자 상의 마음이 꽤 그에게 쏠렸다. 이때 공이 동료들과 더불어 입대하기를 청하여 음험하고 사특하며 정인(正人)을 해치고자 하는 김개의 실상에 대해 아뢰었으나, 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앞서 이런 일이 있었다. 예관(禮官)이 관원을 보내 사친묘(私親廟)에 제향을 올리고 사친을 황백부(皇伯父)로 칭하자고 청하였다. 공이 밖에서 이 말을 듣고 “이것은 창읍왕(昌邑王)이 즉위하여 태뢰(太牢)로 애왕(哀王)을 제사 지낸 일과 똑같은 잘못이다.” 하였다. 그래서 이때에 이르러 입시하여 예학(禮學)이 밝지 못해서 즉위 초년의 과오를 남기게 되었다고 논하고 이어 황백부의 ‘황(皇)’ 자를 제후국에서 칭하는 것은 부당하므로 의당 먼저 명분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주자(朱子)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간행ㆍ반포하여 사대부로 하여금 예학을 익혀 알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전후로 경연에 입시하여 글을 대하고 강설(講說)할 때면 정미한 뜻을 깊이 분석하고 이를 시사(時事)에 관련시켜 임금을 선으로 인도하고 악을 징계하여 보필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으나 반면에 좋아하지 않는 자들도 많았다. 이 무렵 수많은 인재가 한창 진출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에 급급하여 다양한 문제들을 건의하였기 때문에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러나 공은 ‘뜻을 세우고 어진 이를 구하여 임무를 맡겨서 성사하기를 책임 지우는 것’으로 대강의 선무(先務)를 삼았으니, 대체로 공의 뜻은 근본을 바르게 하는 데 있었기에 법제(法制)보다는 교화(敎化)를 우선으로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경장파(更張派)의 의논과 상당히 어긋났고 대신들은 더욱 언짢아했다.

이 무렵에 퇴계 선생은 이미 남쪽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공에게 편지를 보내 거취(去就)를 논하면서 장남헌(張南軒)이 우윤문(虞允文)과 뜻이 맞지 않아서 벼슬을 버리고 출사하지 않았던 고사를 인용하여 공의 처지에 비겼다. 공은 이로 말미암아 물러갈 것을 결심하였다. 뒤에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체직되었다.

경오년(1570, 선조3) 봄,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온 경중(京中)의 사대부들이 나와서 전송하였다. 공은 고향에 돌아와 고마산(顧馬山) 남쪽에 서실을 짓고 퇴계의 글 가운데 “가난할수록 더욱 도를 즐길 수 있다.〔貧當益可樂〕”는 말을 취하여 ‘낙암(樂菴)’이라 편액을 걸고 학문을 닦는 곳으로 삼았다. 이에 종유하는 제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대사성에 제수되고 또 부경사(赴京使)에 제수되었으나, 공은 재차 소장을 올려 병을 이유로 사직하며 대죄(待罪)하였다. 그리고 성현이 제시한 출처의 의리를 말하고 또 대신의 뜻을 거슬러 의리상 나아가 벼슬할 수 없다는 뜻을 언급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체직되었다. 신미년(1571) 여름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부르고 또 이조 참의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임신년(1572)에는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 때문에 공을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선발하고 그대로 대사성에 제수하였다. 공은 사신이라는 직무의 중요함 때문에 부득이 조정으로 나아갔다. 도중에서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조정에 들어간 즉시 사직하여 체직되었고, 사행(使行)도 다른 일 때문에 정지되었다. 뒤로도 계속하여 공조 참의와 대사간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천안군(天安郡)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볼기에 종기가 나더니 태인현(泰仁縣)에 이르러 병이 더욱 위독해졌다. 유사(儒士) 김점(金坫)은 공의 맏며느리의 친정아버지였다. 그가 고부(古阜)에서 달려와 문병을 하자, 공이 말하기를 “명이 길고 짧은 것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니 괘념치 마시오. 다만 젊어서부터 문한(文翰)에 힘을 쓰다가 또 성현의 학문에 마음을 쏟았는데, 중년 이후로 비록 얻은 것이 있기는 하나 공부가 독실하지 못하여 평소의 뜻을 이루지 못했기에 날로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만일 옛 성현의 얼굴을 뵙고 토론하는 경우라면 나 역시 부끄러울 게 없을 것입니다만, 학문이 고인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것을 한스럽게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나의 수명을 늘려 주어 산림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며 학자들과 더불어 성현의 도를 강구할 수 있게만 된다면 이 또한 하나의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병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김점이 가사(家事)에 대해 묻자, “척박한 토지나마 몇 경(頃)이 있으니 자손들이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라고 대답하고, 또 “그대의 집에서 며느리를 보았으니 내 집과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곧 죽을 것 같은데, 병이 비록 위중하지만 그래도 죽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튿날 속히 출발하라고 명하자 시자(侍者)가 병이 위독하다는 이유로 중지하기를 청하였다. 공은 “내가 공관에서 죽을 수는 없다.” 하고는 마침내 관(冠)을 바르게 쓰고 가마에 올랐다. 김공의 집에 도착하여 이틀 밤을 넘기고 세상을 마쳤다. 임종시에 아들 효증(孝曾)에게 이르기를 “너는 성질이 경박하니 마음을 겉으로 표현하지 말고 속에 깊이 간직한다면 내가 걱정이 없겠다.” 하였다. 말을 마치고 서거하니, 11월 1일이었다. 이날 밤 공이 숨을 거두려 할 적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고 천둥과 번개가 크게 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향년 46세였다.

상께서 공이 길에서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의(御醫)를 보내 약을 가지고 달려가 구하게 하고 어찰(御札)로 위문까지 하였으나, 모두 생전에 도착하지 못했다. 상께서는 공의 부음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며 관례적으로 하사하는 부의(賻儀) 외에 수의(襚衣)까지 더 내려 주었고, 서울의 사대부들은 모두 슬퍼하며 공의 옛 우사(寓舍)에 찾아가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하였다.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기모(奇某)는 젊어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소견이 뛰어나서 이황(李滉)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성리학을 강론하여 전현(前賢)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경악(經幄)에 입시하여 진술한 말들은 모두가 이제(二帝)ㆍ삼왕(三王)의 도였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그를 유종(儒宗)으로 추앙했는데, 불행하게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던 차에 중도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청빈하여 장사를 치를 수가 없으니, 관청에서 상례와 장례를 도와주도록 하여 국가가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듬해인 계유년(1573, 선조6) 2월, 나주(羅州) 관아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卯坐)의 언덕에 공을 안장했다. 이곳은 공이 평소에 정해 놓았던 곳이다. 원근에서 장례에 참여한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경인년(1590, 선조23) 녹훈할 때에 이르러 공이 일찍이 종계변무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고 주문(奏文)을 찬술했던 것 때문에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 덕원군(德原君)에 추증되었다.

공은 천품이 뛰어나고 기상이 고상하여 나이 겨우 15세쯤 되자 문득 옛 성현처럼 되기를 스스로 기대하였다. 그래서 경전(經傳)을 널리 종합하면서도 미묘한 이치를 정밀히 연구하였고, 고금의 역사와 전기(傳記)에도 두루 통하여 무엇이든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천(天)ㆍ인(人)ㆍ성(性)ㆍ명(命)에 관한 이치를 눈앞에 보듯 환하게 알았고, 국가의 흥망과 인물의 득실에 대해서도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 분명하게 알았다.

그중에서도 예학에 더욱 조예가 깊어 조정으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 내용과 형식, 상례(常禮)와 변례(變禮), 의절(儀節)과 도수(度數)에 대해 연구하고 검토하여 절충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구류백가(九流百家)와 같은 이단(異端)의 학문 또한 광범하게 섭렵하여 요지를 탐구하였다. 특히 산법(算法)에 가장 정통하여 비록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대가라 할지라도 모두 공을 따를 수 없었다. 이는 대체로 총명함이 남달라 보고 들으면 무엇이든 얼음 녹듯 이해가 되어서 그런 것이다.

공은 마음 씀이 고명하고 몸가짐이 방정하여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주는 것과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반드시 옳은 방도로 하였다. 청렴하면서도 각박하지 않았고 온화하면서도 무절제한 데로 흐르지 않았다. 그래서 비록 영기(英氣)가 흘러넘쳤지만 처신과 행사를 항상 겸손하게 하여 중도(中道)에 맞지 않은 일이 거의 없었다. 또 지성으로 효도하고 우애하였는데 몇 가지만 말해 보자면 이렇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여의어 미처 복(服)을 입지 못했던 것을 늘 가슴 아프게 여겨 휘일(諱日)이 돌아오면 반드시 한 달 동안 소식(素食)을 하며 애모하는 마음을 변치 않았다. 아버지를 섬길 때는 안색을 잘 살펴 봉양하였는데 자랄수록 효성이 더욱 독실하였다. 백형(伯兄)인 대림(大臨)이 공보다 한 살 위였는데, 그 형을 마치 아버지 섬기듯이 하여 집안일에 대해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다. 집에 있을 때 상례와 제례를 일체 고례(古禮)로 지냈고, 집안이나 마을 사이에서 처신할 때 마음은 정직하고 외모는 온화하였으므로 공을 비방하는 말이 전혀 없었다.

명종 말년에 위의를 엄정히 갖추고 벼슬길에 나가니 사대부들이 마치 상서로운 기린이나 봉황처럼 우러르며 공에게 의지하여 매우 중히 여겼다. 선조(宣祖)를 만나 오랫동안 경악(經幄)에서 모시게 되어서는 요순 같은 임금을 만들고 삼대(三代)와 같은 정치를 이룩하기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 입대할 때면 언제나 마음을 다해 지적하여 진달하되 제일의(第一義)가 아니면 거론하지 않았다.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근본적이면서도 장기적인 정책을 만드는 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시속의 관습에 구애되지도 않고 공허한 이상론에 빠지지도 않아서, 반드시 제반 여건을 충분히 준비하여 때가 된 뒤에야 시행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임시로 변통하는 논의에 대해서는 오히려 급급하게 여기지 않아 심지어는 상의 앞에서 간쟁하여 논하기를 “이 일은 뒤에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까지 하였는데, 이윽고 과연 그렇게 되었다. 이는 대체로 웅굉한 강령과 커다란 쓰임을 평소에 본디 정해 놓아서 그런 것이다.

선조 초기 퇴계가 조정에 있을 적에 사친을 추봉(追奉)하는 전례와 문소전(文昭殿)에 관한 의논을 본디 모두 공이 강구하여 제정하였고 퇴계가 공의 의견을 많이 따랐다. 그때에 “공의전(恭懿殿 명종의 형인 인종의 왕비 )은 명종과 서로 수숙(嫂叔)의 사이이니, 의당 복(服)이 없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어 퇴계도 그렇게 여겼다. 공이 말하기를 “형제가 왕통을 계승하여 군신 관계가 성립되었으면 곧 부자간과 같으니 의당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 하니, 퇴계가 크게 잘못을 깨닫고 조정에 글을 보내어 “군자가 있지 않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변례(變禮)에 통달한 공의 학식을 훌륭히 여기고 신속하게 선(善)을 따르는 퇴계의 태도를 칭찬하였다.

권신과 간신이 조정을 혼탁하고 어지럽게 만든 이후라 사기(士氣)가 시들시들 기운을 펴지 못하였다. 공이 그 사이에 우뚝 서서 어진 이들을 사우(師友)로 삼고 후진들을 인도하여 물길을 막는 제방처럼 혼탁한 물줄기를 배격하고 맑은 물줄기를 가득 넘치게 한 지 몇 해에 당시 사람들이 공을 소기묘인(小己卯人)으로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공이 선조 초년의 정치에 기여한 공로가 매우 컸으나, 이윽고 상신(相臣)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은 잊은 적이 없었다.

임신년(1572, 선조5)에 다시 조정에 들어갔는데, 이것이 비록 종계변무란 특수한 일로 부름을 받고 가는 것이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처음 먹은 뜻을 잊지 않고 조금 시험해 보아 가능 여부의 조짐으로 삼아 보려 하였다. 그런데 들어가서 가만히 상하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물러나와 탄식하기를 “국사(國事)는 이미 글렀다.” 하였다. 이후로 벼슬하는 데 더욱 뜻이 없었고, 장차 포부를 감추고 조용히 심신을 수양하면서 평소 부족했던 것을 더욱 보충하는 한편 후진들을 가르치고 글을 저술하여 후세에 덕을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이루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공이 돌아가신 뒤에 세도(世道)가 바로 어그러져서 동인과 서인의 당론(黨論)이 나라의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공이 건의하여 세워 놓았던 제반 정책들이 모두 시행되지 않았으며, 사대부 사이에 알력이 생기고 현인과 소인이 한데 뒤섞여 조정이 마침내 크게 어지러워졌다. 정해년(1587, 선조20)에 이르러서는 잘못된 의논들이 마구 기승을 부려 당적(黨籍)을 만들고 상대편을 금고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당론을 조정하고 고쳐 보려는 노력을 하였던 선진(先進)의 명현들도 또한 당고를 면치 못하였다. 당시에 공을 추급하여 당적에 넣으려는 자가 있었으나, 바른 의논을 가진 자가 있어 “당론을 고봉에게 연루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여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식견 있는 이가 이 사건을 계기로 논하기를 “공이 만일 죽지 않았더라면 당론을 조정하여 고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국가에 관계됨이 이와 같이 중하였다.

공은 자품이 현덕(賢德)하여 도의 본체를 환히 꿰뚫어 알았다. 퇴계와 토론한 이기론(理氣論)과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은 정통하면서도 해박하여 퇴계의 논리를 가지고 퇴계의 오류를 비판하였으니, 퇴계가 여러 번 자신의 견해를 굽혀 공을 따르면서 “홀로 도의 밝은 근원을 보았다.”라고 칭찬하였다. 주자 이후 여러 유학자들이 육구연(陸九淵)과 왕수인(王守仁)의 사이비 견해를 통렬하게 반박한 내용들을 퇴계가 절충하다가 의심스럽고 막힌 데가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물었는데, 다른 문인들은 바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공은 또 노소재(盧蘇齋)와 더불어 나정암(羅整菴)이 지은 《곤지기(困知記)》의 오류에 대해 설(說)을 지어 변론하고 밝혀 퇴계의 뜻을 완결하기도 했다. 이런 내용은 모두 《퇴계집(退溪集)》에 자세히 실려 있다.

퇴계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갈 적에 선조 임금이 조정의 신하 가운데 누가 학문을 제대로 한 사람이냐고 물었다. 당시 뭇 현인들이 조정에 가득하였으나 퇴계가 감히 알 수 없노라고 사양하다가 오직 아뢰기를 “기대승은 문자를 널리 보았고 이학(理學)에도 조예가 깊어 통유(通儒)라 이를 만합니다. 다만 수렴(收斂)하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어떤 이가 퇴계에게 묻기를 “기고봉은 실천이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하자, 퇴계가 말하기를 “고봉은 의로써 임금을 섬기고 예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났는데, 어떻게 실천이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하였다.

퇴계가 영남에서 도를 제창하여 선도할 무렵부터 공은 멀리 호남에 있었기에 퇴계와 서울에서 세 차례 만났을 뿐 그 밖에는 오직 편지만 주고받았다. 퇴계는 겸허하고 장중하였으며 공은 호협(豪俠)하고 빼어나 기상이 또 같지 않았으나, 공은 퇴계를 존경하고 섬겨 언행과 몸가짐에 대해 오직 퇴계만 본받았다. 퇴계 문하에 종유한 인물이 수백 명이나 되었지만 마음이 통하여 인정하고 추천한 이로는 공이 제일이었다. 이는 대개 부드러움과 팽팽함이 서로 도움이 되고 궁성(宮聲)과 치성(徴聲)이 서로 어울리는 것처럼 세상에 드문 만남이었다. 이런 까닭에 뒷날의 선비들이 “공만이 퇴계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퇴계 또한 공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고, 또 “공과 퇴계의 관계는 마치 횡거(橫渠 장재(張載) )와 정자(程子) 또는 서산(西山)과 주자(朱子)의 관계와 같다.”라고 하니, 이 말은 옳은 것이다.

아, 우리 동방의 도학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로부터 시작하여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네 현인이 차례로 계승했다. 그러나 학문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는 뜻과 잘못된 행동을 막고 부정한 말을 그치게 한 공은 아직 완전히 갖추어지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퇴계에 이르러 학문의 표준이 비로소 바르게 확립되어 이단(異端)의 학문과 사특한 학설이 말끔히 없어지게 되었다.

공의 도는 퇴계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어진 임금과 훌륭한 신하가 정치하는 시대에 경륜을 펴는 행운을 얻지 못해 오직 학문을 강구하고 밝혀서 정치를 보좌하려 했던 내용만 서책에 실려 있을 뿐이다. 이는 실로 횡거와 정자 같은 송대의 명현들이 처했던 경우와 같으니, 우리 유학의 흥망성쇠가 어찌 우연한 운수이겠는가. 공이 대각(臺閣)에 있을 적에는 알고 있는 것이라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을 하는 경우라면 극진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물러나 고향에 돌아온 이후로는 소장을 올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는 그 마음에 지위에서 벗어난 무익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공이 세상을 마친 뒤 허봉(許篈)이 사관이 되어 비로소 공이 주대(奏對)한 말들을 뽑아내어 《논사록(論思錄)》 2권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퇴계와 문답한 책3권과 문집 약간 권이 세상에 유행한다. 그 글은 모방하고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기력이 크고 법도가 준엄하다. 그 가운데서도 비지(碑誌)와 간독(簡牘)에 더욱 뛰어났으니, 진실로 덕 있는 군자의 말이었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이씨는 함풍(咸豐)이 관향으로 19세에 공에게 시집왔다. 공이 가훈을 잘 신칙하였는데, 부인은 오직 삼가서 뜻을 잘 받들었다. 부인은 식견과 사려가 남보다 뛰어나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도 부지런하였으며, 홀로되고 25년 동안 자녀를 교육할 때 올바른 교육 방법이 칼로 자른 듯 반듯하였으니 가정 훈육의 감화에서 배운 점이 많았던 것이다.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효증(孝曾)은 일찍부터 재명(才名)이 있어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벼슬은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다음은 효민(孝閔)과 효맹(孝孟)이다. 딸은 사인(士人) 김남중(金南重)에게 출가했는데, 정유왜란(丁酉倭亂) 때 효민, 효맹과 함께 적을 만나 굴복하지 않다가 죽었다. 효증은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정헌(廷獻)은 현감이고, 장녀는 승지(承旨) 조찬한(趙纘韓)에게 출가했으며 차녀는 첨지중추(僉知中樞) 한이겸(韓履謙)에게 출가했다.

공의 언행에 대한 자료로는 가장(家狀)과 연보(年譜)가 있고 국사(國史)의 기록과 여러 유현들의 평가도 있다. 그래서 모두 싣기 어려우므로 이제 그 큰 것들만 모아서 시호(諡號)를 내리는 데 참고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주-D001] 이식(李植) : 1584~164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광해조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은퇴하여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대사간, 대제학을 역임하고,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여 심양에 잡혀갔다가 돌아왔다. 신흠(申欽), 이정귀(李廷龜), 장유(張維)와 함께 4대가로 꼽혔다. 저서에 《택당집》, 《두시비해(杜詩批解)》 등이 있다.

[주-D002] 사친묘(私親廟) : 중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선조의 생부인 덕흥군(德興君)를 모신 사당이다. 이름은 소(岧)이다.

[주-D003] 창읍왕(昌邑王)이……일 : 창읍왕은 한나라 창읍애왕(昌邑哀王) 부(髆)의 아들로, 이름은 하(賀)이다. 한 소제(漢昭帝)가 죽은 뒤 후사가 없어 곽광(霍光) 등 대신에 의해 창읍왕이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음란한 행동을 자행하다가 즉위한 지 27일 만에 폐해지고 말았는데, 그가 제위에 있는 동안 자기 생부(生父)인 애왕(哀王)에게 태뢰(太牢)로 제사 지냈다. 《前漢書 卷68 霍光傳》

[주-D004] 장남헌(張南軒)이……고사 : 장남헌은 남송의 학자 장식(張栻 : 1133~1180)이다. 남헌은 그의 호이고, 자는 경부(敬夫)ㆍ흠부(欽夫)ㆍ낙재(樂齋), 시호는 선(宣)이다. 호굉(胡宏 : 1106~1161)에게 정자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저서에 《논어해(論語解)》, 《맹자해(孟子解)》, 《남헌역설(南軒易說)》 등이 있다. 우윤문(虞允文)은 남송의 중신으로 자가 빈보(斌父)이다. 효종(孝宗) 앞에서 금나라를 쳐서 나라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고 말하여 재상이 되었다. 장식이 좌사 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 재직하던 중에 근신(近臣)인 장열(張說)이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임명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장식이 소를 올려 부당함을 극간(極諫)하는 한편, 묘당에 나아가 재상인 우윤문을 대면하고서 “환관의 집정(執政)이 경(京)과 보(黼)에서부터 시작되더니, 근신의 집정이 또 상공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질책하였다. 이 뒤로 장식은 우윤문의 미움을 받아 원주(袁州)로 쫓겨났다가 급기야는 시골로 돌아가 수년간 집에서 거처하였다. 《宋史 卷429 張栻列傳》

[주-D005] 구류백가(九流百家) : 구류는 아홉 가지 학파로 유가(儒家)ㆍ도가(道家)ㆍ음양가(陰陽家)ㆍ법가(法家)ㆍ명가(名家)ㆍ묵가(墨家)ㆍ종횡가(縱橫家)ㆍ잡가(雜家)ㆍ농가(農家)를 말하고, 백가는 유가 이외에 일가(一家)의 설을 세운 수많은 학파와 학자를 가리킨다.

[주-D006] 제일의(第一義) : 가장 중요한 일이나 급선무로 해야 할 것을 말한다. 또는 최상의 방법을 뜻하기도 한다.

[주-D007] 문소전(文昭殿)에 관한 의논 : 문소전의 소목(昭穆) 위치와 인종(仁宗)의 부묘(祔廟)에 대해 고봉이 의견을 피력한 일을 말한다.

[주-D008] 소기묘인(小己卯人) : ‘작은 기묘인’이란 뜻으로 고봉을 조광조(趙光祖)에 비겨 표현한 말이다. 도학을 일으키고 사류들을 진작시킨 공이 조광조에 버금간다는 의미이다.

[주-D009] 퇴계의……비판하였으니 : 원문은 “창을 잡고 방에 들어오다.〔操戈入室〕”로, 하휴(何休)의 고사를 빌린 것이다. 후한(後漢)의 하휴가 《춘추(春秋)》 삼전(三傳)에 대한 3책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폐질(穀梁廢疾)》을 저술하였는데, 정현(鄭玄)이 이를 읽고 논박하여 수정을 가하자 하휴가 “나의 방에 들어와서는 나의 창을 잡고서 나를 치는구나.” 하고 탄식했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주-D010] 육구연(陸九淵) : 1139~1192. 남송(南宋)의 사상가로, 자는 자정(子靜), 호는 존재(存齋) 또는 상산(象山)이다. ‘심즉리(心卽理)’ 설을 주장하였고, 그 결과 유교의 고전인 육경(六經)조차도 ‘내 마음의 주각(註脚)’이라 하여 주자와 대립하였다.

[주-D011] 왕수인(王守仁) : 1472~1528. 명나라의 사상가로, 자는 백안(伯安), 호는 양명(陽明),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절강성(浙江省) 여요(餘姚) 출신의 학자로 양명학(陽明學)의 시조이다. 저술에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가 있다.

[주-D012] 노소재(盧蘇齋) : 노수신(盧守愼 : 1515~1590)을 말한다. 소재는 호이고 자는 과회(寡悔), 또 다른 호는 여봉노인(茹峯老人)ㆍ암실(暗室)ㆍ이재(伊齋) 등이다. 을사사화로 유배되었다가 복귀하여 영의정에 올랐으나 기축옥사로 파직되었다. 저서에 《소재집》이 있다.

[주-D013] 나정암(羅整菴) : 명나라 때의 유학자 나흠순(羅欽順 : 1465~1547)을 말한다. 정암은 호이고, 자는 윤승(允升)이다. 국자감 사업(國子監司業)과 이부 상서(吏部尙書) 및 예부 상서(禮部尙書) 등을 지냈으나, 사직하고 학문에 투신하였다. 처음에 불교의 선학(禪學)을 연구하였으나 후에 주자학(朱子學)으로 돌아섰다. 저서에 《곤지기(困知記)》, 《속기(續記)》, 《나정암집》 등이 있다.

[주-D014] 곤지기(困知記) : 나흠순(羅欽順)의 저작이다. 일찍이 자신이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공부하여 깨달아서 심성(心性)의 참된 이치를 보았음을 스스로 서술한 내용이다. 대체적으로는 주자학을 신봉하면서도 일원기론(一元氣論)을 주장하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주-D015] 부드러움과……되고 : 성질이 급했던 서문표(西門豹)는 부드러운 가죽〔韋〕을 몸에 지녀 관대함을 유지하고, 성질이 느슨했던 동안우(董安宇)는 팽팽한 시위〔弦〕를 몸에 지녀 긴장함을 유지했다. 《韓非子 觀行》 여기서는 성격이 관유한 퇴계와 자질이 강명한 고봉이 상호 보완의 관계에 있었다는 말이다.

[주-D016] 서산(西山) : 채원정(蔡元定 : 1135~1198)의 호이다. 자는 계통(季通), 시호는 문절(文節)이며,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 사람이다. 어려서 부친 채발(蔡發)에게 정자의 학문을 배웠으며, 뒤에 주희에게 찾아가 수학하여 그의 이학(理學)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주요 인물로 평가된다. 권신 한탁주(韓侂胄)가 이학을 위학(僞學)이라며 금하자, 벼슬하려는 뜻을 접고 학문과 강학에만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은 아들 채연(蔡淵), 채항(蔡沆), 채침(蔡沈)에게 가학으로 계승되었다. 저서에 《홍범해(洪範解)》, 《팔진도설(八陳圖說)》 등이 있다.

[주-D017] 허봉(許篈) : 1551~1588. 자는 미숙(美叔), 호는 하곡(荷谷),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저서에 《하곡집(荷谷集)》,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 《해동야언(海東野言)》 등이 있다.

광국공신(光國功臣)

1518년(중종 13) 4월 21일 조선에서는 명에 다녀온 사신의 보고를 통하여 『대명회전』의 조선국(朝鮮國) 항목에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 지금 이름 단이라고 하는 사람이 1375년(홍무 8)부터 1392년(홍무 25) 전후에 무릇 고려의 왕씨 임금 4명을 시해하였는데’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음을 알았다. 중종은 곧바로 태조 이성계의 종계를 바로잡기 위하여 사신을 보냈다. 명은 회답문을 통해서 요청한 대로 종계를 개정하겠다고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대명회전』은 명 태조의 말씀이므로 함부로 고칠 수 없다는 명분이었다. 중종·인종·명종 3대에 걸친 60여 년간 조선과 명 사이에는 종계변무가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종계변무는 선조가 왕위에 오른 후 최대의 외교 현안으로 대두하였다.

선조는 1573년(선조 6)에 종계변무를 위한 주청사(奏請使)를 보냈다. 당시 주청사는 이후백과 윤근수였으며 서장관은 윤탁연이었다. 명은 조선에서 요청한 종계변무의 사연을 명 실록에 싣고, 새로 편찬하는 『대명회전』에도 개정한 내용을 싣겠다는 답을 보냈다. 마침내 1588년(선조 21) 5월 2일에 사은사 유홍, 서장관 윤섬이 『대명회전』 가운데 조선 부분을 가지고 왔는데 이성계의 종계가 완전하게 개정되어 있었다. 1589년 11월에 선조는 그 동안 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오거나 또는 주문(奏文)을 지은 이로서 공로가 뚜렷한 사람들을 공신에 책봉하라 명령하였다. 1589년 11월 22일에 공이 있는 19명을 선정하고 이들을 다시 세 등급으로 구분하여 논공한 뒤 책봉이 확정되었다. 이어서 1590년 8월 1일에 녹권(錄卷)을 반사하고 고유제(告由祭)와 회맹(會盟)을 의례대로 한 뒤 물품을 등급별로 하사하고 나라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백관이 진하(進賀)하니 궐정(闕庭)에서 사연(賜宴)하였다.

일등은 3명으로, 1584년 종계변무 주청사(奏請使)로 명에 가서 개정, 간행된 『대명회전』을 확인하고 돌아온 황정욱(黃廷彧)에게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을, 1587년 주청사로 명에 가서 고쳐진 『대명회전』가운데 조선에 관계된 한 본(本)을 받아온 유홍(兪泓)에게 기계부원군(杞溪府院君)을, 158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가서 개정된 『대명회전』전질을 가지고 돌아온 윤근수(尹根壽)에게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을 봉하고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라 하였다.

2등은 7명으로, 1573년 주청사로 명에 다녀온 이후백(李後白)에게 연양군(延陽君)을 추봉하고, 1575년 사은사로 명에 가서 종계변무를 주청한 홍성민(洪聖民)에게 익성군(益城君)을, 1577년 사은사로 명에 다녀온 윤두수(尹斗壽)에게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을, 1584년 종계변무사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온 한응인(韓應寅)에게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을, 1584년 변무사의 역관(譯官)으로 명에 다녀온 홍순언(洪純彦)에게 당릉부원군(唐陵府院君)을, 158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다녀온 윤섬(尹暹)에게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을, 1589년 성절사로서 종계변무를 주청한 윤형(尹泂)에게 무릉부원군(茂陵府院君)을 봉하고 수충공성익모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光國功臣)이라 하였다.

3등은 9명으로, 생전에 종계변무의 주문을 지은 기대승(奇大升)에게 덕원군(德原君)을, 1563년(명종 18)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곳 객사에서 죽은 김주(金澍)에게 화산군(花山君)을 각각 추봉하였고 이양원(李陽元)에게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을, 황림(黃琳)에게 의성군(義城君)을, 윤탁연(尹卓然)에게 칠계군(漆溪君)을, 정철(鄭澈)에게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을, 이산해(李山海)에게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을, 유성룡(柳成龍)에게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을, 최황(崔滉)에게 해성군(海城君)을 각각 봉하고,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謀光國功臣)이라 하였다.

고봉 할아버지가 1572년 돌아가시고 17년뒤인 1590년에 광국공신으로 덕원군에 봉해지면서 아버지 기진 할아버지는 덕성군에 봉해지고 할아버지 기찬 할아버지나 증조부 기축 할아버지는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가 한성판윤이 되면서 추증된 품계보다 더 높지 않아서 추가 추증은 없었습니다. 형제인 형 기대림 할아버지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되고 동생 기대절 할아버지, 아들 기효증, 기효민, 기효맹, 조카 기효분, 기효전 할아버지는 모두 광국공신으로 녹훈을 받았습니다.

선조수정실록 24권, 선조 23년 8월 1일 경오 1번째기사 1590년 명 만력(萬曆) 18년

광국 공신(光國功臣)과 평난 공신(平難功臣)의 녹권(錄卷)을 반사하고 고유제(告由祭)와 회맹(會盟)을 의례대로 한 뒤 물품을 등급별로 하사하고 나라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백관이 진하(進賀)하니 궐정(闕庭)에서 사연(賜宴)하였다.

일등은 3명으로, 1584년 종계변무 주청사(奏請使)로 명에 가서 개정, 간행된 『대명회전』을 확인하고 돌아온 황정욱(黃廷彧)에게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을, 1587년 주청사로 명에 가서 고쳐진 『대명회전』가운데 조선에 관계된 한 본(本)을 받아온 유홍(兪泓)에게 기계부원군(杞溪府院君)을, 158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가서 개정된 『대명회전』전질을 가지고 돌아온 윤근수(尹根壽)에게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을 봉하고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라 하였다.

2등은 7명으로, 1573년 주청사로 명에 다녀온 이후백(李後白)에게 연양군(延陽君)을 추봉하고, 1575년 사은사로 명에 가서 종계변무를 주청한 홍성민(洪聖民)에게 익성군(益城君)을, 1577년 사은사로 명에 다녀온 윤두수(尹斗壽)에게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을, 1584년 종계변무사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온 한응인(韓應寅)에게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을, 1584년 변무사의 역관(譯官)으로 명에 다녀온 홍순언(洪純彦)에게 당릉부원군(唐陵府院君)을, 158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다녀온 윤섬(尹暹)에게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을, 1589년 성절사로서 종계변무를 주청한 윤형(尹泂)에게 무릉부원군(茂陵府院君)을 봉하고 수충공성익모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光國功臣)이라 하였다.

3등은 9명으로, 생전에 종계변무의 주문을 지은 기대승(奇大升)에게 덕원군(德原君)을, 1563년(명종 18)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곳 객사에서 죽은 김주(金澍)에게 화산군(花山君)을 각각 추봉하였고 이양원(李陽元)에게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을, 황림(黃琳)에게 의성군(義城君)을, 윤탁연(尹卓然)에게 칠계군(漆溪君)을, 정철(鄭澈)에게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을, 이산해(李山海)에게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을, 유성룡(柳成龍)에게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을, 최황(崔滉)에게 해성군(海城君)을 각각 봉하고,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謀光國功臣)이라 하였다.

광국 공신은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한 공인데, 1등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은 윤근수(尹根壽) 【이상(貳相)을 지냈고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이다.】 ·황정욱(黃廷彧) 【예조 판서를 지냈고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이다.】 ·유홍(兪泓) 【우의정을 지냈고 기계 부원군(杞溪府院君)이다.】 등 3인이고, 2등 수충 공성 익모 광국 공신은 홍성민(洪聖民) 【이조 판서를 지냈고 익성군(益城君)이다.】 ·이후백(李後白) 【이조 판서를 지냈고 연양군(延陽君)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윤두수(尹斗壽) 【영의정을 지냈고 해원 부원군(海原府院君)이다.】 ·한응인(韓應寅) 【좌의정을 지냈고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이다.】 ·윤섬(尹暹) 【교리를 지냈고 용성군(龍城君)으로 추봉되었다.】 ·윤형(尹泂) 【공조 판서를 지냈고 무릉 부원군(茂陵府院君)이다.】 ·홍순언(洪純彦) 【당릉군(唐陵君)으로 역관(譯官)이다.】 등 7인이고, 3등 수충 공성 광국 공신(輸忠貢誠光國功臣)은 기대승(奇大升) 【대사간을 지냈으며 덕원군(德原君)으로 추봉되었다.】 ·김주(金澍) 【화산군(花山君)으로 추봉되었다.】 ·이양원(李陽元) 【우의정을 지냈고 한산 부원군(漢山府院君)이다.】 ·황임(黃琳) 【호조 판서를 지냈으며 의성군(義城君)이다.】 ·윤탁연(尹卓然) 【순찰사를 지냈고 칠계군(漆溪君)이다.】 ·정철(鄭徹) 【좌의정을 지냈고 인성 부원군(寅城府院君)이다.】 ·이산해(李山海) 【영의정을 지냈고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이다.】 ·유성룡(柳成龍) 【영의정을 지냈고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이다.】 ·최황(崔滉) 【이상을 지냈으며 해성군(海城君)이다.】 등 9인으로 19인이다. 전후 사신으로 가서 허락을 받아냈거나 의논을 드리고 주문(奏文)을 지은 공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변무주(辨誣奏)

조선국왕(朝鮮國王) 신(臣) 성휘(姓諱 선조)는 은혜를 받아 무함을 변명하는 일을 삼가 아뢰옵니다. 지난 가정(嘉靖) 42년(1563, 명종18) 4월에 신의 아비인 선신(先臣) 공헌왕(恭憲王) 휘(諱 명종)가, 《대명회전》에 국조(國祖)의 선신인 강헌왕(康獻王) 휘(태조)를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 한 것과 왕씨(王氏)의 네 왕을 시해(弑害)했다는 등의 말은 모두 억울한 무함에 해당되는지라 열성조(列聖朝)에서 개정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에 전후의 변명한 사정을 통찰하시고 조사해서 새로 편찬하는 대명회전에 넣을 것을 바란다는 뜻으로써 주문(奏文)을 갖추어서 차임(差任)한 배신(陪臣) 김주(金澍)에게 아뢰게 하였습니다.

그 후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받았는데, 그 대략에 “내부(內部)에 공문을 보내어 전년에 간행한 대명회전 가운데 조선국에 대한 책 하나를 한림원(翰林院)에 보내어 본국에서 아뢰어 온 내용을 요약하여 찬정해서 황제께서 흠정(欽定)하신 후 본조(本條)의 끝에 부록(付錄)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황제께서 칙서(勅書) 한 통을 내리시어 성상의 뜻을 밝게 보이라는 등의 내용으로 본부상서 겸 한림원학사(本部尙書兼翰林院學士) 이춘방(李春芳) 등이 제(題)를 갖추어 올렸던바 가정 42년 9월 8일에 성지(聖旨)에 시(是)라 함을 받았으므로 이것을 준행하기 위해 한림원에 공문을 보내어 기록하게 하였다. 그 후 이어서 소사 겸 태자태사 이부상서 무영전태학사(少師兼太子太師吏部尙書武英殿太學士) 서계(徐堦) 등이 ‘대명회전에 원래 기록되어 있는 조선국의 일을 금주(今奏 조선국 주문)에 찬입하여 게첩(揭帖)을 갖추어서 어람(御覽)에 올리오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채택하소서.’라고 제하였던바 성지에 시(是)라 하셨고, 예부에 알리라 하셨으므로 이것을 공경히 받들어 행한다. 이에 자문을 보내며 아울러 흠정회전(欽定會典)에 부록하여 자못 조사해서 시행하려 하였는지라 그 부록인 흠정개정회전(欽定改正會典)에 ‘영락(永樂) 원년(1403, 태종3)에 국왕이 조훈조(祖訓條) 장에 실린 종계를 변명해 줄 것을 아뢴바 황제께서는 개정하도록 허락하였으며, 가정 8년(1529, 중종24)에 조선국의 사자(使者)가 자세히 말하기를 ‘국왕의 시조(始祖) 성휘(태조)의 아버지는 바로 이자춘(李子春)이요 이인임(李仁任)이 아니다.’ 하였으므로 우리는 종계를 대조하여 사관(史館)에 보냈고, 42년에는 조선국왕이 다시 종계를 개정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예부에서 변무주를 본국 사실의 아래에 기록할 것을 요청하였던바, 황제께서는 이를 따르셨다.’고 하는 내용이다.” 하였습니다.

가정 42년 12월에는 원차 배신(原差陪臣)인 서장관(書狀官) 이양원(李陽原)이 칙유(勅諭)를 받들어 왔는데, 그 내용에 “아, 그대 조선국왕 휘(명종)는 대대로 공순하여 나의 동쪽 번병(藩屛)이 되었다. 여러 번 선조(先祖)의 종계를 가지고 개정할 것을 요청하였으니, 이는 선조가 무함을 받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밝게 씻으려고 급급해하는 것이다. 그 정성이 말에 나타나므로 나는 특별히 그대가 아뢴 것을 윤허한다. 그리하여 사관(史館)에 선부(宣付)하여 대명회전의 예전 글 밑에다가 그대 조상의 진짜 파(派)를 기재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사실을 기록하여 해와 별처럼 밝게 하려고 한다. 중국 조정과 그대의 나라에서는 조선국왕의 시조가 이자춘에게서 나왔고 이인임에게서 나오지 않았음을 모두 알고 있다. 이에 칙서를 내려서 그대에게 보여 주노니, 그대는 공경히 받들라.” 하였습니다.

이것을 받자옵고 선신인 휘(명종)와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은 기뻐하고 감격하여서 표문을 올려 사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흠정개정(欽定改正)한 것을 살펴보오니,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있사옵니다. 다만 국조의 내력만을 기록하였고, 네 왕을 시해했다는 무함의 본말은 서술하지 않아서, 선신인 휘(명종)로 하여금 악명(惡名)을 입게 하여 끝내 천하에 이것을 드러내어 밝히지 못하게 하였으니, 후세 신자(臣子)의 정리에 더욱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신인 휘(명종)는 애통한 마음을 안고 다시 아뢰고자 하였으나, 그 후 모친상을 당하여 애훼(哀毁)로 병이 들어 한을 품고 죽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신하와 온 나라 신민들이 깊이 애통해하는 바입니다.

신은 삼가 성은을 입어 옛 전통을 이었사온데, 매양 선조의 원통함이 완전히 신설(伸雪)되지 못하였고, 선부(先父)의 뜻이 다 펴지지 못함을 생각하여 근심하고 민망해한 지가 여러 해이옵니다.

신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하가 임금을 섬김은 자식이 아비를 섬기는 것과 같으니, 신하가 억울하고 절박한 뜻이 있으면 군부(君父)에게 하소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옵니다. 이것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으로 볼 때 필연적인 것입니다. 신이 만일 치욕을 참고 민망함을 가슴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끝내 성상 폐하에게 토로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도리어 천지가 만물을 길러 주는 인(仁)을 스스로 막는 행위이니, 신은 감히 이런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적이 살펴보오니, 영락(永樂) 원년(1403, 태종3) 11월에 선신인 공정왕(恭定王) 휘(태종)가 종계에 관한 일을 가지고 사유를 갖추어 주문을 올렸던바, 예부 상서 이지강(李至剛) 등이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의 성지에 ‘조선국왕이 아뢴 것을 보니, 이미 이인임의 후손이 아니다. 생각건대 이것은 전에 잘못 전해진 말을 들어서 잘못 기록한 듯하니, 이를 개정하도록 허락한다.’ 하시는 황제의 분부를 공경히 받았다.” 하였습니다.

그 후 정덕(正德) 13년(1518, 중종13) 7월에는 선신 공희왕(恭僖王) 휘(중종)가 종계와 악명 등의 내용을 가지고 주문을 갖추어 올렸던바, 예부 상서 모징(毛澄) 등이 “이 아무개가 나라를 얻고 국호를 고친 것은 모두 태조황제(太祖皇帝)의 명에서 나왔습니다. 성은으로 내려 주신 것을 보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요, 또 이인임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태종황제의 조지(詔旨)가 있으셨으니, 개정하도록 허락하소서. 일통지(一統志)에는 또 분명히 ‘왕요(王瑤 공양왕(恭讓王))는 혼미하여 이 아무개가 사람들에게 추대되었다.’라고 기재되어 있어서 조선에서 지금 아뢴 것과 대략 서로 부합합니다. 신들은 바라옵건대, 황상(皇上)께서는 조선이 문(文)을 좋아하고 예(禮)를 지키는 나라임을 생각하시고 조상을 위하여 변무하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저들의 요청을 들어주시고 칙서 한 통을 내려서 성상의 뜻을 효유하도록 하소서.”라는 내용의 제문을 올렸던바, 무종황제(武宗皇帝)의 성지에 “조선국왕의 효성은 생각할 만하니, 다시 칙문을 써서 왕에게 주어 알리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정덕 14년(1519) 4월에 원차 배신인 남곤(南袞) 등이 칙유(勅諭)를 받들고서 왔는데, “그대 선조인 성휘(태조)는 원래 이인임의 후손이 아님을 우리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이미 명령을 내리시어 개정하도록 준허(准許)하셨으며, 이제 또 그대가 주문을 갖추어 진정(陳情)하니, 그대의 효성을 생각할 만하다. 특별히 요청한 바를 윤허하여 주고 칙문을 내리어 나의 뜻을 효유하노니, 그대는 공경히 받들라.” 하였습니다.

가정 8년(1529, 중종24) 8월에 배신인 유보(柳溥) 등이 경사(京師)로 달려가 대명회전을 중수(重修)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본국의 원래 주문 및 태종황제와 무종황제의 성지(聖旨)에 있는 사리(事理)를 사실대로 기록해서 개정해 줄 것을 예부에 올렸던바, 예부에서는 “세종황제(世宗皇帝)의 성지에 ‘조선국 배신이 올린 본국 종계의 일은 이미 조종조의 분명한 말씀이 있으셨으니, 너희 예부에서 자세히 조사하여 바른대로 기재하여 사관(史館)에 송부(送付)하여 채택해서 시행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였습니다.

가정 18년(1539) 윤8월에 선신인 공희왕(중종) 휘가 다시 전후에 변명한 주문 및 성지를 받든 사실을 가지고 상세히 교정하여 전말을 기록해 주십사 하는 내용으로 주문을 만들어 예부에 올렸던바, 예부 상서 엄숭(嚴嵩) 등은 “성지를 받자오니 ‘황조(皇祖)의 큰 훈조(訓條)는 감히 별도로 의논할 수가 없다. 조선국에서 아뢴 말과 아울러 열성조의 분명한 뜻을 이 뒤에 새로 찬수할 때에 마땅히 부록하고, 인하여 칙문을 써서 왕에게 보여 주라.’ 하셨다.” 하였습니다.

가정 19년(1540) 2월에 원차 배신 권벌(權橃) 등이 칙문을 받아 왔는데, “그대의 나라에서는 여러 번 종계가 이인임의 후손이 아니라는 내용을 가지고 와서 우리 성조 및 무종조에 아뢰어 모두 분명한 말씀이 있으셨고, 나 역시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다. 단 우리 고황제의 조훈(祖訓)은 만세에 변할 수 없는 것이니, 대명회전에 기재된 것은 후일 수찬(修撰)할 때에 마땅히 너희들이 아뢴 말을 자세히 부록할 것이다. 그대는 번병의 직무를 공손히 수행하라. 짐은 그대의 충성과 효성을 가상히 여기고 있으니, 다시 염려할 것이 없다. 공경히 받들라.” 하였습니다.

가정 36년(1557, 명종12) 4월에는 선신인 공헌왕(恭憲王) 휘가 전에 아뢴 내용을 주문으로 올렸던바, “예부에서 복주(覆奏)하여 성지를 받아 한림원(翰林院)에 이문(移文)하였는데, 본원(本院)의 수본(手本)에 ‘사관에서 전항의 사정을 조사하여 이미 채택해서 부록하도록 했다.’ 하였다. 이에 자문을 보낸다.” 하였습니다.

신은 적이 생각하오니, 신의 선대는 원래 본국의 전주(全州)에서 나왔는데, 먼 시조인 한(翰)은 신라 때에 사공(司空)이 되었으며, 6대손 긍휴(兢休)가 고려에 들어왔습니다. 13대손 안사(安社)는 전원(前元)에 벼슬하여 남경 오천호(南京五千戶)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는데 아들 행리(行里)를 낳았고, 행리는 춘(椿)을 낳았고, 춘은 자춘(子春)을 낳았습니다. 조(祖)ㆍ자(子)ㆍ손(孫) 3대가 대대로 그 직무를 세습하였는데, 원나라 말기에 전란이 일어나자, 자춘은 땅을 피하여 동쪽으로 돌아오니, 이가 선신 휘(태조)의 아비입니다.

이인임은 바로 본국 경산부(京山府) 아전인 장경(長庚)의 후손입니다. 그 할아비 조년(兆年)은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아비 포(褒)는 동지밀직(同知密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인임의 대에 와서는 형제 여섯 사람이 모두 중요한 지위에 올라서 세력이 중외(中外)를 휩쓸었습니다. 그런데 이인임은 악을 쌓고 화를 불러 끝내 귀양가 죽었습니다.

고려의 네 왕에 대한 일로 말하면 공민왕(恭愍王)은 아들이 없자, 총애하는 신하인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를 은밀히 자기 아들로 삼아 궁중에서 길렀습니다. 그러다가 공민왕이 총애하는 간신인 홍륜(洪倫) 등에게 시해되자 이인임이 국정을 담당하고는 신우(辛禑)를 세워 후사로 삼았으며, 그의 아들 신창(辛昌)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우왕(禑王) 14년(1388)에 이르러 무신인 최영(崔瑩)이 신우에게 권하여 군대를 일으켜서 요동을 침범하려고 여러 장수를 감독하여 보냈습니다. 이때 선신인 휘(태조)도 부장(副將)이 되어서 또한 그중에 있었는데, 행군하여 압록강에 이르러서는 상국(上國)에 죄를 얻기보다는 차라리 거짓 조정인 신우에게 죄를 얻어 한 지방을 편안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고는 마침내 여러 장수들과 회군(回軍)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이에 신우는 놀라고 두려워하여 지위를 사양하고 아들 창(昌)에게 전위(傳位)하였습니다.

이때에 인심이 이반되고 국세가 위급하였으나, 그의 당여(黨與)들이 많아서 사람들은 감히 그를 폐위할 것을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때 마침 배신 윤승순(尹承順)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와 태조황제의 선유(宣諭)를 전달하기를 “왕씨가 시해를 당하여 후손이 끊겼으니, 비록 왕씨의 성을 빌리고 있으나 다른 성씨로 군주를 삼는 것은 삼한(三韓)의 대대로 지켜 오는 좋은 법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는 선유문을 받고는 공민왕의 비(妃)인 안씨(安氏)가 여러 재상들과 상의하여 비로소 거짓 왕씨라고 칭하던 신가(辛哥)를 축출하고 왕씨의 후예를 세워서 정창군(定昌君) 요(瑤)가 임시로 국사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우와 창 부자는 모두 왕요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후 왕요 역시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육을 함부로 자행하자, 국민들이 분노하고 원망하여 서로 선신(先臣)인 휘(태조)를 추대하여 국사를 주관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선신은 여러 사람들의 요청에 만부득이하여 즉시 주문을 갖추어 아뢰었던바, 태조 고황제로부터 ‘그대를 명하여 국왕으로 삼고 국호를 조선으로 하사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에 선신인 휘(태조)는 비로소 휘를 고치고 왕요를 사저(私邸)에서 편히 봉양하여 천명을 마치도록 하였습니다.

선신의 종계에 대한 원류(源流)와 네 왕에 대한 사적은 신의 선조(先祖)와 선부(先父)들이 차례로 아뢴 내용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사오니, 진실로 천조(天朝)에서 이미 살피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함을 입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선신 휘(태조)가 국정에 참여한 이래로 이인임의 불법한 소행을 모두 개정하여 그 당여들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그들은 선신을 무함하려고 도모하였습니다. 이에 심지어는 윤이(尹彝)와 이초(李初)의 무리들은 몰래 상국(上國)에 가서 거짓말을 날조하여 감히 천조를 속이려는 계책을 하였으며, 이인임은 종족이 강하고 권력이 막중하여 죄악이 평소 드러났으므로, 그의 자식이라고 지적하면 자취가 의심스러워 현혹시키기 쉽고 분간하기 어렵다고 여겼으므로, 이렇게 무함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태조 고황제께서 만 리를 밝게 보시어 이들 두 사람이 모두 죄를 받아 죽었는데, 조훈(祖訓)의 기록이 이와 같이 사실과 다르게 잘못 기록된 것은 우연히 미처 산정(刪定)하지 못해서인 듯합니다. 그 후 일통지를 편찬할 때에 본국의 연혁을 기재하면서 말하기를 “왕요가 혼미하여 여러 사람들이 문하시중(門下侍中) 이모(李某 태조)를 추대해서 국사를 주관했다.” 하였으니, 이 어찌 조훈이 미처 산정되지 못함을 알고서 그 사실을 분명히 기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명회전의 편찬으로 말하면, 다만 조훈의 옛글을 그대로 기록했을 뿐이요, 애당초 태종황제가 개정하도록 준허(准許)한 뜻을 살피지 못한 것이며, 또 잘못된 기록을 개정하여 사실대로 밝힌 일통지의 뜻을 조사하지 못하고 옛글을 그대로 기록하여 개정하지 않은 것이니, 그 원통함이 하늘에 닿아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선조와 선부들은 혈성(血誠)을 다한 진정을 두 번 세 번 올렸던 것입니다.

그 후 다행히 무종황제와 세종황제께서 요청을 윤허하여 상세히 기록해 주겠다는 명령을 받자옵고, 공손히 속찬(續纂)을 반포할 날을 밤낮으로 목을 늘이고 기다렸사온데, 근래에 흠정개정(欽定改正)한 조항을 보니, 종계 한 가지 일만을 바로잡았고, 악명에 대한 무함은 다시 서술해 넣지 않았으며, 또 개정한 것은 대명회전의 옛 책이요, 속찬한 새 책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후일 새 책이 반포되고 옛 대명회전이 폐지되면 이른바 개정했다는 것은 끝내 허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선신이 무함을 받은 원통함은 이미 씻을 날이 없게 되고, 열성조들이 개정하도록 준허하신 명령 또한 증거할 만한 곳이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 때문에 신은 폐하에게 번독(煩瀆)하게 아뢰면서 스스로 그칠 줄 모르는 것이옵니다.

신은 또 생각하건대, 세종황제의 성지에 “사관에 송부(送付)한다.” 하였고, 또 “사관에 선부(宣付)한다.” 하였으니, 그 개정하는 일은 바로 사관의 임무에 관계되옵니다. 더구나 지금은 세종황제의 실록(實錄)을 편수하고 있어서 은미한 것과 밝은 것을 편집하여 완성된 법이 있사오니, 만일 성은을 입어 신의 주문과 신의 선부와 선조가 전후에 주문한 내용을 실록에 자세히 기재하고 외국이라 하여 소략히 하지 않으신다면, 선신이 무함을 받은 원통함이 참으로 만대에 밝게 씻기게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인자하신 성상께서는 열성조의 개정하라는 명령을 생각하시고 소신의 누대의 원통함을 가엾게 여기어 종계와 악명을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사, 특별히 성지를 내리시어 새로 편찬하는 대명회전과 실록에 명백히 기재하도록 하소서. 이렇게 해 주신다면 흡족한 황제의 은택은 천지가 생성해 주시는 은덕보다도 클 것이오며, 소신이 후일 지하에서 선조와 선부에게 아뢰는 것 또한 장차 할 말이 있어서 유감이 없게 될 것이옵니다. 신은 간곡히 기도하며 이에 주문을 갖추어 삼가 아룁니다.

[주-D001] 변무주(辨誣奏) : 무함당한 일을 해명하는 주문(奏文)이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며, 고려의 네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대명회전》에 기록된 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올린 주문이다. 제목 아래에 이 변무주로 인하여 종계(宗系)가 바로잡혔다고 부기(附記)하고 있으나, 실제는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 비로소 수정되었다.

[주-D002] 윤이(尹彝)와 이초(李初) : 공양왕 때 파평군(坡平君) 윤이와 중랑장(中郞將) 이초는 함께 명나라에 있으면서 명국 황제에게 본국의 공양왕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국을 공격하려 하며, 이에 반대하는 이색(李穡) 등을 처형하였다고 무함하였다. 이 사실이 명국에 가 있던 사신(使臣) 조반(趙胖)의 귀국 보고서에서 밝혀져 큰 옥사(獄事)가 발생하였는데, 이것을 이초(彝初)의 옥(獄)이라 한다.

金顧- 金孟廉 - 金哲鈞 - 金壽亨 - 金彦黙 - 金錫으로 이어지는 가계로서 여말선초에 입신하고 충청도 괴산에 근거지를 둔 가문이었다. 金彦黙의 아들인 金錫은 忠甲, 孝甲, 友甲, 悌甲, 仁甲 등 5형제와 딸 柔順을 두었는데, 딸은 이문건의 조카인 李煇와 혼인

이제부터 임진전쟁 전후의 기씨 역사를 청파 할아버지 후손 5형제의 문중별 역사입니다.

기형 할아버지의 아들 기대복 할아버지와 이량의 딸 전주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기령 할아버지는 1568년 대과에 급제하여 선천군수와 승지를 지내고 1589년에는 사신으로 명에 다녀와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임지전쟁이 나던 1592년에는 형조참의오 있으면서 전시에 강원도의 군사를 맞은 강원도순찰사를 지내고 1594년 돌아가십니다. 임진전쟁이 끝나고 큰 공을 세운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원균(元均) 1등공신 3명과 2등공신 5명, 3등공신 10명 등 모두 18명의 무신(武臣)에게 녹훈한 것이 선무공신(宣武功臣)이고, 이에 들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에 9,060명을 1. 2. 3등으로 나뉘어 녹훈한 것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며 선무원종공신 1등에 錄勳되었으며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 기대복 할아버지는 이조참판으로 할아버지이신 기형 할아버지는 도승지로 추증이 되시어 도승지공 문중을 이룹니다. 증조부 기찬 할아버지는 앞서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가 한성판윤이 되면서 추증받은 종2품 이조참판보다 더 높지 못해 추가 추증은 없었습니다. 아들 홍헌 할아버지의 장자 기혼 할아버지 집에 장성문중에서 복제공 문중으로 양자간 분의 후손이신 기성휘 할아버지가 또 도승지공 문중으로 양자가서 춘천에 정착합니다. 둘째 기심의 후손집으로는 별좌공 문중에서 양자오고 또한 직계손과도 함께 김포로 이주합니다. 기령 할아버지의 다른 아들인 기수 할아버지는 나주에 정착합니다. 기령 할아버지의 동생 기수 할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여 부평부사富平府使, 삼수, 안성, 서산군수를 지내고, 훈련원정, 인산첨사를 거쳐 충청수사를 지냈고 후손은 수원에 정착합니다. 대복 할아버지의 막내아들 기란 할아버지의 아들 기만헌 할아버지는 1628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 사간을 거쳐 벼슬은 府使에 이르렀다. 함경난도 단천에 공덕비가 있다. 족보엔 이 공덕비문을 인용한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비의 겉면에 정녀 관비 일선은 곧 공의 아들 진사 인의 사랑하는 여인이다.(碑傍有旌女官婢日仙卽公之子進士寅所眄也. 所眄;좋아지는 여인)라는 기록으로보아 뭔가 전설이 있는 듯하지만 자세한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 후손은 부당으로 나와 절손 된 것으로 보입니다. 기대복 할아버지의 큰아들 의 혹은 억으로 읽는 기의 할아버지의 후손은 아들 기성헌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신 기협 할아버지가 문과 급제하고 선천부사로 있을 때 청나라가 처들어온 병자호란이 일어나 능한산성에서 전사하면서 덕풍군에 봉해지고 아버지 기성헌 할아버지는 호조참판으로 추증되고 핳아버지 기의 할아버지는 좌승지로 추증되지만 증조부 기대복 할아버지는 둘째 아르이신 기영 할아버지가 선무원종공신이 되면서 이조참판으로 추증 되었기 때문에 더 추증은 없습니다. 기협 할아버지의 아들인 기진흥은 1644년에 문과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651년(孝宗2년) 경기도 교동수사에 이르렀으나 이해에 김자점의 숙청 사건이 일어나 같이 죽습니다. 김자점은 능양군이 광해를 몰아내는 구테타에 가담하여 권신이 된 후에 병자년 청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엔 임경업 장군을 죽게하는 등 친청파가 되었으나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친청파를 숙청하면서 홍천에 유배당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청나라에 새 왕이 옛 신하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내어 청나라가 조사단을 파견하게 하였으나 여러 신하가 간신히 무마시키고 그 죄로 광양으로 유배되었습니다. 1651년에 손자 며느리 효명옹주의 저주 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김익(金釴)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해 원두표 · 김집 · 송시열 · 송준길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발각되어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때 교동수사로 있던 기진흥도 김자점과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로 가까운 사이라 역모 가단자가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이후 도승지공의 후손은 과거볼 자격이 박탈되어 신분사회인 조선에서 더 이상 양반이 아닌 상태가 되었습니다. 청파 할아버지의 장손집으로 청파 할아버지의 불천위 혹은 부조명 제사도 끈기게 되는데 기대복 할아버지의 큰아들과 나머지 아들들은 어머니가 다르고 나차이도 많이 나서 헌자 돌림에서 거의 막내인 기만헌 할아버지와 큰집에서 종손인 기진흥은 할아버지와 손자 항렬이지만 나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은 듯합니다. 앞서 소개한 고봉 할아버지가 퇴계선생에게 질문한 것 가운데 4대 기제사가 마지막 남은 현손자가 죽으면 그만하고 신주는 매안 하는데 현손자는 죽었지만 현손자의 부인이 살아있으면 매인해야 하느냐를 묻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 당시는 청파 할아버지가 불천위는 아니고 기제사만 지냈는데 제 12대조이신 기은 기의한 할아버지의 행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무자(戊子:1648)년에 서울에 사는 대종(大宗)에서 정무공 제사를 폐하지 않는 사판(不祧祀板)을 함부로 묻어버렸다. 어버지께서는 종손(宗孫) 진흥(震興)과 8촌 동생(三從弟) 전정언(前正言) 만헌(晩獻)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속히 다시 만들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정언(晩獻)은 병으로 죽고, 진흥(震興)은 죄로 죽었다. 끝내 일을 이루지 못하여 종사(宗祀)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아버님은 항상 이를 통한(痛恨)으로 여겼다.(戊子年間, 京居大宗擅埋貞武公不祧祀板, 府君貽書宗孫震興及三從弟前正言晩獻, 令速改造, 未幾正言病卒, 震興罪死, 竟不就而宗祀遂絶, 府君尋常痛恨焉).

이것을 보면 도승지공 후손들은 양반신분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고 불천위이던 청파 할아버지의 신주는 묻어버리고 선산도 판 다음에 서울을 떠났습니다. 10여년전에 보면 지금 도승지공 기형 할아버지의 묘로 몰라서 대충 이 묘일 것이다 하고 있는 상태인데 알고 있는 묘가 정확히 도승지공 묘인지 대복 할아버지 묘에서 나온 묘지명처럼 혹시 묘지명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파보자고 하는 논의를 보았는데 그처럼 기형 할아버지 묘도 잊을 정도로 원당 선산을 잊고 다 떠났습니다. 그 후에 실재로 파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역사 책에 보이는 도승지공 인물은 없습니다.

둘째 기원 할아버지에 대한 자세한 사실은 알려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1480년에 태어나시어 1521년 막내동생 기준 할아버지가 기묘사화 후에 유배지에서 돌아가시자 넷째 기진 할아버지와 함께 장성 아치실로 내려오시어 1522년 42세로 돌아가시고 부인이신 안동김씨 할머니는 그 다음해인 1523년 돌아가신 것으로 족보에 나옵니다. 아드님이 3형제가 있으셨고 생년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둘째 아들이신 기대유 할아버지의 부인 함양오씨 할머니가 1507년생인 것으로 추정은 할수 있습니다. 기대유 할아버지도 대략 동갑으로 가정하면 어머니이신 안동김씨 할어니가 돌아가신 1523년엔 16살 정도 되셨고 형인 기대익 할아버지는 2~3세 많은 18살이나 19살 동생이신 기대이 할아버지는 13살이나 14살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 기준으론 모두 미성년으로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아마도 작은 아버지 기진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나이에 경제적으로 어떻게 사셨을까 걱정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지금은 웹페이지가 없어졌지만 고봉선생의 문헌공종중 홈페이지에 올라온 기진 할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나누어준 유산분배 문서인 분배기에 보니까 재벌만 아니었지 엄청 부유했습니다. 고봉선생이 쓰신 아버지 기진 할아버지 행장에 흉년이 들어 끼니가 없었다거나 고봉선생이 돌아가시자 가난하여 장례치르기 힘드니까 정부에서 보조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하여 허락 받은 건들은 그냥 청빈을 강조한 것이고 꽃과 나무를 가꾸며 유유자적했다는 표현대로 먹고사시는 대는 아무 지장없으셨던 분들입니다. 물론 부인이신 강씨 할어니가 가져온 재산일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서울에서 내려가실 때 빈손으로 오셨을 리는 없어 보이고 기원 할아버지도 역시나 재산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물론 후대로 내려가면서 후손은 늘어나고 분배되면서 거의 없어졌겠지만 끼니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기원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 기대유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 기효근 할아버지가 임진전쟁에서 원균의 부하로 전공을 세웁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기효근을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당시 왕의 명을 받아 주와 군의 군비를 두루 점검하였다. 1590년 남해현령(南海縣令)으로 부임하여 전선[戰艦]과 병기를 수리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元均)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해전에 참가하였다. 그때마다 선봉이 되어 큰 공을 세웠으므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병으로 현령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적병을 만나 어머니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이 되어 개백군(皆伯君)에 추봉되고 정2품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때 아버지 기대유 할아버지는 같은 품계의 호조판서 고흥군으로 봉해지고 할아버지 기원 할아버지는 한등급아래 종2품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시어 참판공 문중으로 불리우있습니다. 증조부 기찬 할아버지는 한등급아래 정3품으로 추증이 되어야겠지만 이미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 때 종2품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어 더 이상 추증은 없습니다. 아들이신 기종헌 할아버지도 아버지를 따라 종군한 공으로 행원군에 봉해지고 충청도수군절도사까지 지냅니다. 참판공 문중은 기효근 할아버지의 큰형이신 기효간 할아버지 후손이 금강공문중을 이루며 인원수로 보나 배출된 할아버지분들을 보나 큰 줄기를 이룹니다. 기효간(奇孝諫, 1530~1593) 할아버지는 문묘에 종사된 김인후(金麟厚)에게 배웠으며, 기정익(奇挺翼, 1627~1690) 할아버지는 송시열에게 배웠습니다. 서경덕(徐敬德)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임성주(任聖周)ㆍ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히는 노사 기정진 할아버지가 가장 유명합니다. 기정진 할아버지는 소과를 장원했지만 대과는 응시하지 않았고, 높은 명성 때문에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지만 아주 잠깐을 빼고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1910년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한말의 유명한 의병자이자 문장가인 기우만 할아버지는 손자이고 의병장 기삼연. 기재, 기산도 등등의 여러 분들이 배출되었으며 자세한 역사는 저보다 더 잘 아시는 분들이 마ퟋ은 것으로 생각되어 이만 줄입니다.

셋째 기괄 할아버지에 대하여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별좌를 재내고 남기신 시가 막내동생 기준 할아버지의 문집인 덕양집에 전한다고 하고 묘가 포천에 있다고 합니다. 첫째 아들 기대관 할아버지도 별좌를 지내고 묘가 포천에 있다고 했습니다. 부인이 전주이씨로 증조부가 세종대왕의 아들 임영대군이고 할아버지가 익주군이고 아버지가 윤산군으로 왕족입니다. 그래서 아들 기경중 할아버지는 음직으로 하양현감을 재냈고 이때 아들 기웅헌 할아버지가 경주에 정착합니다. 둘째 아들 기대정 할아버지는 1573년(선조6년)에 종9품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다가 산야(山野)의 행실이 있는 사람이나 이미 벼슬을 제수한 자 중에 더욱 특이한 자는 차서에 구애없이 발탁하여 쓰라는 선조의 명령에 따라서 다른 6사람과 함께 6품으로 승직하고 1579년에 지평이 되었으며 1583년에 장령에 임명되었습니다. 태조(太祖)의 계비(繼妃) 강씨(康氏)가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에 태조의 사당에 배향(配享)되지 못하였는데 선조(宣祖) 때에 와서, 신덕왕후는 태조의 정비(正妃)이니 태묘(太廟)에 배향해야 한다는 논의가 몇 년 동안 제기되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화고, 제사만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 때 기대정 할아버지가 양사는 부묘(祔廟)를 청해야 하는데도 각(閣)만 세우고 제사지내기만을 청한 것은 잘못이라고 하여 이를 지지하는 홍문관(弘文館)과 양사 모두 사직시켰고 함께 벼슬을 그만두었습니다. 이후에 같이 서울사는 도승지공 문중과 양자를 교환하며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이량의 숙청과 김자점을 숙청하면서 기진흥이 역모로 죽자 더 이상 도성에 살수 없어 기대관 할아버지 후손은 충북 제천으로 기대정 할아버지 후손은 평택 현덕면 권관리로 낙향합니다. 백범일지 등을 보면 김자점과 14촌관계로 얻을 게 있으면 친척이고 잃을 게 있으면 남이라고 할 정도의 촌수인데도 김구의 조상도 서울에서 황해도로 낙향하여 사는데 별좌공 문중도 서울을 떠납니다. 그 후에 역사책에 나오는 분들은 없습니다. 기대정 할아버지 후손이 낙향한 평택의 현덕면 권관리는 권세를 부렸던 이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권세 권權', '벼슬 관官'자를 써서 권관리權官里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변경하면서 주관할 관管으로 바뀌어 京畿道 平澤市 玄德面 權管里가 되었다 합니다. 경주에 정착해 살던 기웅헌 할아버지 후손 일부가 충북 금산을 거쳐 경북 영동, 상주에 기준헌 할아버지 후손이 경북 상주에 삽니다. 경북 예천에 광주 고봉 할아버지 후손이신 기학신 할아버지 후손이 산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그래서 옛날 족보를 구해서 비교해 보니 광주에 사셨던 기학신 할아버지는 아들이 기상건이고 기상건은 기항국恒國이 있었으나 일찍 죽고 딸만 한명 있다가 아들을 보기위해 첩을 들여 아들 기順國을 보았지만 이마저도 자식이 없다(无后)고 합니다만 1982년판을 보면 기상건 대신해 기상형을 넣고 둘을 합치면서 기상건 자리를 차지한 것이라 초명은 상건이라 하고 부인도 기상건의 부인은 상산김씨인데 기상형에서는 두 번째 부인으로 경주손씨를 추가 하였습니다. 언젠가 제천의 기노환님이 별좌공 문중에서 고봉선생의 문헌공문중으로 많이 옮겨갔다고 해서 설마 했었는데 예천문중의 기해석님이 가기 할아버지가 그렇게 했다고 해서 기해석님은 예천문중에서 완전히 왕따가 되었습니다. 예천문중은 광주문중 아니고 인근의 상주와 같은 별좌공문중입니다.

넷째 기진 하ퟝ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신 고봉 기대승 할아버지의 큰아들 기효증 할아버지는 1570년(선조 3)에 식년시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람들이 장성(長城)에서 모여 의곡장(義穀將)으로 추대하자 나주(羅州)에 의곡도청(義穀都廳)을 설치하고 격문을 돌려 의곡(義穀) 3,000석을 모았습니다. 이후 윤승훈(尹承勳)이 선조의 전지(傳旨)를 가지고 오고 김덕령(金德齡)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도유사(都有司)로 격문을 짓고 의병들을 모으자 사람들이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이에 영광(靈光)과 법성포(法聖浦)에서 모은 의곡 3,200석과 의병 460명을 이끌고 배를 타고 의주 용만(龍灣)으로 임금을 찾아갔다. 이끌고 간 의병으로 행조(行朝)를 호위하였고, 싣고 간 의곡은 명국 군사의 식량으로 사용하였으며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제수하였다. 또한 1593년(선조 26) 천리 길을 근왕(勤王)했다는 공로로 형조정랑(刑曹正郞)과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등을 제수받았으나 사헌부에서 적을 토벌한 공은 없고 군사와 군량을 수송하면서 각 고을에 횡포만 부린다는 내용으로 탄핵하자 상소하여 사퇴하였습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며 근왕록 1권이 전하고 있이며 1616년(광해 3) 돌아가십니다. 임진전쟁에서 육지에서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진주성을 지킨 김시민 장군과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막았기 때문에 전라도가 무사하였지만 정유년에 다시 일어난 전쟁에서는 진주성도 무너지고 이순신 장군도 백의종군하던 시기에 일본군에 장성에도 침입합니다. 이 때 기효증 할아버지의 동생 들인 기효민 할아버지와 부인 남원양씨 할머니, 기효맹 할아버지와 부인 광산정씨 할머니, 그리고 하서 김인후의 손자 김남중의 처 행주기씨 대고모는 피난 중에 맥동에서 일본군을 만나 겁탈하려하자 몸에 지니고 다니던 은장도로 일본군에 잡혀있던 팔을 자르고 일행과 함께 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습니다. 의병에 참여 했다가 돌아온 김남중이 돌아와 봐관 되어있던 팔뚝만으로 장사지내니 이를 일비장 묘라고 합니다. 기효증 할아버지의 아들 기정헌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고 현풍현감을 지냈습니다, 고봉선생의 형인 기대림 할아버지는 광국훈으로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되어 승지공으로 불리우고 큰아들 기효분 할아버지는 광국훈으로 공조참의로 추증이 되시지만 일찍 돌아가시고 아들 3형제 기방헌, 기창헌, 기의헌 할아버지 3분은 작은 아버지이시고 곡성현감을 지내셔서 공성공으로 불리우는 기효건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습니다. 당고모 김남중의 처가 팔을 자르고 강에 투신 자결하던 정유전란 중에는 누이이신 당고모 이제남의 처가 시댁이 흑산도로 피난간다고 하자 부탁하여 따라서 흑산도로 가서 전란을 피합니다. 기은 기의헌 할아버지는 후금이 처들어 오자 의병을 일으켜 여산에 이르렇을 때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큰형인 기방헌 할아버지와 기창헌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어 큰 조카 기수백 할아버지 이하 여러 조카들을 돌봅니다. 기창헌 할아버지의 막내 아들 기원 할아버지가 고봉 할아버지의 큰손자 기정헌 할아버지의 양자로 가면서 고봉 선생집인인 문헌공종중의 종손이 됩니다. 우리 기씨 집안의 최초의 양자사례이고 이훙의 양자제도의 기본이 됩니다. 기의헌 할아버지는 만년에 광주 덕성군 문중의 가장 연장자로 서울의 청파 할아버지의 불천위 제사도 챙기고 기의헌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 기침 할아버지가 문과에 급제하고 정자벼슬을 하여 정자공으로 불리웁니다. 정자공 후손은 샛말에 주로살며 장성 기효간 할아버지의 아치실, 고봉 할아버지의 너부실 문중과 함께 호남의 크게 번성한 행주기씨 3대 소문중입니다. 정자공의 후손으로 조선말에 기관현 할아버지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정헌을 역임합니다. 문헌공 문중에서는 기원 할아버지가 양자는 갔어도 법적으로만 간듯합니다. 묘소는 친증조부인 승지공 기대림 할아버지 묘소 아래에 모셨고 기원 할아버지의 큰아들이신 기진열 할아버지에 가서야 양할머니이신 기정헌 할아버지의 부인 서령정씨 할머니묘소가 있다는 소고룡에 묘소가 있습니다. 기원 할아버지의 증손자 기언관 할아버지는 39세가 되는 1744년(영조 20) 춘당대시(春塘臺試)에서 병과 7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춘당대시는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시행된 과거로, 영조가 직접 창경궁(昌慶宮)의 춘당대(春塘臺)에 나와 진행된 시험이었다. 그런데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문과에 급제한 1744년에 예문관의 검열을 채용하기 위해 임금 앞에서 시행되는 소시(召試)에 영조는 기언관 할아버지가 고봉 할아버지의 후손임을 알고는 어필로 특별하게 한권(翰圈) 2점을 더해 주었는 데도 기언관이 소시에 응시하지 않은 것에 분노하였기 때문에 종성(鍾城)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46년(영조 22)에 풀려나고 22년 뒤인 1768년에 헌납(獻納)에 임명됩니다. 1780년(정조 4)에는 인재 수습의 뜻에서 품계를 올려 호조참의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였습니다. 광주읍지나 호남인물지에는 기언관 할아버지가 일찍이 고봉 할아버지의 묘소 부근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산림에서 즐거움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언정 할아버지는 기언관 할아버지의 동생으로 1763년(영조39) 10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771년(영조47)에는 정언이 되었습니다. 고봉선생의 후손으로 후광을 입어 1782년(정조6)에는 당상관으로 특별히 초자(超資)되어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성격이 청렴하고 강직해서 1786년 대사간에 발탁된 뒤, 세 번이나 연달아 이를 역임하다가 1792년에는 대사헌에 취임하여 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진력하였습니다. 1795년에는 다시 공조 판서가 되었으며 이 때 아버지 기정후 할아버지는 덕창군으로 봉해졌고 할아버지 기진열 할아버지는 호조참판으로 추증되고 증조부 기원 할아버지는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되십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기언관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 기학경 할아버지는 1783년(정조 7) 식년시에서 진사에 입격하였고, 8년 뒤인 1801년(순조 1)에 증광시에서 병과 4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나이 61세였습니다. 1802년(순조 2) 순조에게 지켜야 할 7개의 조항을 정리하여 제출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칠조소(七條疏)’로, 그 내용은 첫째 성학(聖學)을 부지런히 할 것, 둘째 기강을 진작시킬 것, 셋째 인재를 얻을 것, 넷째 폐단을 바로잡을 것, 다섯째 작은 현(縣)을 혁파할 것, 여섯째 구임(久任)을 책임 지울 것, 일곱째 군정(軍政)을 정비할 것 등입니다. 이를 받은 순조는 기뻐하며 답서를 내리고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무장현감(茂長縣監),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지냈으며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안과 밖을 드나들며 다양한 관직 생활을 경험하고 1809년(순조 9) 돌아가셨습니다. 기학경 할아버지의 증손자 기우현 할아버지는 37세가 되던 1850년(철종 1)에 증광시에서 병과 19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시험은 철종이 즉위한 것을 기념하여 창경궁(昌慶宮) 춘당대(春塘臺)에서 치러졌는데, 방목에는 ‘유학(幼學) 기경현(奇慶鉉)’이라 되어 있고 오른쪽에 아주 작은 글씨로 ‘개명(改名) 우현(禹鉉)’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철종 1년의 증광시에는 ‘기경현’이라는 이름으로 응시하였고, 이후에 ‘기우현’으로 개명하였습니다. 1861년(철종 12) 동지삼사(冬至三使)에 임명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사은사(謝恩使) 업무를 수행한 사실도 있습니다. 1864년(고종 1)에 부교리(副校理)에 발탁되어 홍문관(弘文館)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 각종 자료에 의하면 홍문관에서 줄곧 관직 생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는 부교리와 집의(執義)로 활동한 기록이 확인되며, 이후에도 홍문관집의(弘文館執義), 부수찬(副修撰) 등을 지냈습니다. 기문현 할아버지는 장성 금강공 문중에서 정간공 기언정 할아버지의 현손자로 양자오고 노사 기정진(奇正鎭) 할아버지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844년(헌종 10)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1844년 12월 가주서(假注書)에 임명되었고, 1853년(철종 4) 12월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1854년에 충청도사(忠淸都事), 웅천현감(熊川縣監)을 역임하였습니다. 이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역임하였고, 1857년에 은산현감(殷山縣監), 이후 1859년 장령(掌令), 1860년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습니다.

다섯째 기준 할아버지는 아들이 한 분 있습니다. 한성판윤 기대항 할아버지기입니다. 기대항 할아버지는 아들이 2분인데 적자는 기응세 할아버지이고 서자로 기직남이 있습니다. 기응세 할아버지는 효행으로 삼강록 속편에 기록이 있다하여 삼강공이라 불립니다. 만전당 기자헌 할아버지는 기응세 할아버지의 큰아들로 문과급제하였고 영의정까지 올라 행주기씨 가운데 최고위 관직을 역임합니다. 부인은 선조의 형 하원군의 딸 전주이씨입니다. 영의정이 되면서 덕평부원군에 봉해지고 아버지 기응세 할아버지는 같은 품계의 영의정 덕창부원군으로 추증되고 할아버지 기대항 할아버지는 종1품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증조부 기준 할아버지는 정2품 판서로 추증되어야 하지만 아들 기대항 할아버지가 정2품 한성판윤이 되면서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기 때문에 더 추증은 없습니다. 영의정까지 올랐기 때문에 당색도 알아야 돌아가는 사항을 참고 할 수 있습니다. 만전상공의 처음 당색은 동인이고 정철의 처벌을 놓고 당이 나뉠 때는 강경론을 지지하여 북인(北人)이 되었고, 북인이 다시 홍여순의 대사헌 천거를 지지하는 대북과 반대하는 소북으로 나뉠 때는 대북(大北)에 가담했습니다. 대북은 폐모론이 불거지는 과정에서 또 다시 영창대군만 죽여야 한다는 계통의 골북(骨北), 인목왕후도 죽여야 한다는 이이첨, 허균 계통의 육북(肉北),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사형을 모두 반대하는 소수의 중북(中北, 기자헌, 유몽인)으로 나뉘었습니다. 1605년 죄의정(左議政) 일 때 선조가 광해군을 왕세자(王世子)에서 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세자(王世子)로 삼으려 하자 이를 끝까지 반대하여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1614년 영의정이 되었고 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않된다고 끝까지 알리다가 문외출송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홍원(洪原)에 유배되었다가 함경북도 길주(吉州)로 옮겨 유배되었습니다. 이때 아들 기준격은 글 잘하기로 소문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에게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허균은 기준격 앞에서 언행을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준격은 허균의 위험한 사상과 행보를 보게 되었습니다. 기준격이 이 유배를 허균의 짓으로 보고 그를 공격하여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허균이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보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서 허균이 체포되었습니다. 허균은 1589년 같이 생원시에 합격한 이이첨과 합류해서 대북에서 인목대비를 폐모하는 주장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대북의 영수 이이첨은 허균을 신뢰했고 허균이 인목왕후를 몇 차례에 걸쳐 암살을 기도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암살을 기도하는 과정에서 하인준 등 사람을 시켜 도성 내외에 유구국인들이 쳐들어온다는 내용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당시 소외되어 있던 불교계를 끌어들여 봉기 계획을 진행하면서 이이첨과 관계가 틀어졌습니다. 이후 허균의 일당 하나가 불심 검문으로 붙잡혀 계획이 탄로났습니다. 이후 능지처참 되었습니다. 1623년 능양군과 서인이 구테타를 모의할 때 김유와 이귀 등이 의사를 타진해 오자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하여 거절하였습니다. 구테타 성공 후에 남인 이원익 등의 추천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폐주 광해군을 모셨던 사람으로서 옛 주인을 배신할 수 없다며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그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고 의심하고 혐의를 입증할 만한 물증 없이 의금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1624년 1월 25일 이괄의 난이 일어나 한성이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집권 서인에 의해 다른 반대파들과 죽었습니다. 당시 좌찬성 이귀(李貴)는 죄가 있다면 국문해서 죄를 밝히고 유배 보내거나 사형시키자고 했으나, 판의금 김류(金瑬)는 내통의 우려가 있으니 죽이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밖에 김자점 등도 이들의 처형을 상주하였다. 사형된 이들 중에는 그 외에도 아들 기준격과 기순격(奇順格)이 있습니다. 이때 일족들 역시 모두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 뒤 동생 기윤헌 등도 투옥되었고, 기윤헌은 혐의를 승복하지 않다가 형장을 맞다가 죽었고 기윤헌의 아들 기수발도 죽었습니다. 이후에 이원익, 이귀 등의 상소로 신원, 복구되었다. 이렇게까지 내통을 걱정한 이유는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의 서자 기직남의 아들 기익헌이 반란군 이괄의 부하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익헌은 얼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고위직으로 진급할 수 없었으나 무과에 급제하고 왕족이었던 이문빈(李文賓)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이후 궁궐 재건과 조선(造船) 등에 공을 세워, 광해군의 특명으로 고원군수(현 함경남도 고원군)에까지 오릅니다. 아마 광해군의 총신이었던 점이 이괄에게 동조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괄이 패주하여 도망가는 도중에 이수백(李守白)과 함께 이괄을 배신하여 이괄과 한명련(韓明璉)의 목을 베어 바쳤고, 반란의 주동자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사형당해야 하지만 인조와 이귀의 두둔으로 진도로 유배를 갔다가 7년 후 풀려납니다. 정작 반란에 가담한 자신은 멀쩡히 살아남고 무고한 친척들만 죽게 된 경우입니다. 기익헌은 출신이나 관직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붕당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배경이 없어서 오히려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이수백은 유배를 갔다가 풀려난 지 몇 해 안 있어, 관군출신으로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이중로(李重老), 박영신(朴榮臣)의 아들들인 이문웅(李文雄), 이문위(李文偉), 박지병(朴之屛), 박지원(朴之垣), 박지번(朴之藩)에게 대낮에 살해당합니다. 그러나 기익헌은 도성에서 살아갑니다. 기준격의 후손은 무주 풍동면에 옭겨 숨어살다가 전남 순천과 경남 함양군 안의면 상비리에 옮겨삽니다. 기순격 후손은 전남 무안 함평에 삽니다. 기신격은 옛족보엔 자식없다고 했는데 요즘 족보엔 후손이 잠시 귀양갔던 길주와 명천지역에 산다고 합니다. 김격의 후손은 충남 서산에 산다고 합니다. 기윤헌의 아들 기수발은 이괄의 난 때 죽고 양자가 장성 참판공 문중에서 왔는데 전남 무안 지역에 삽니다. 여기에서 기성휘 할아버지가 도승지공문중으로 양자가서 춘천문중이 됩니다. 기수실의 후손이 나주 무안 영광에 삽니다.

인터넷에 돌아디니는 만전상공에 대한 글

기자헌(奇自獻:1562~1624)-광해군에게 의리를 지킨 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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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죽음과 함께 권력의 끈이 풀어져 버린 유영경을, 틈을 주질 않고 요절내 버린 광해군은, 만 백성들이 우러러 보던 이원익·이덕형 등 명신들을 차례로 다시 기용하여, 새로운 정치 기풍을 진작하려 마음을 썼다. 그러나 곧 광해군을 둘러싼 서투른 패거리들의 농간으로 영창대군 증살(蒸殺), 인목대비 폐서인 등 일련의 극악 무도한 사태가 빚어지니, 이원익·이덕형 같은 현인들은 마귀들의 놀이터 같은 정치판에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판국에 영의정에 오른 인물은, 유영경의 영창대군 옹립 음모를 뭉개버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기자헌이었다.

기자헌은 본관이 행주, 명종17년 사간(司諫) 기응세(奇應世)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 기대항(奇大恒)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격인 한성부윤이었고, 증조부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사람으로 명성이 높았던 기준(奇遵), 그의 가문은 고려때 원나라 ‘기황후(奇皇后)’의 그늘 아래 한때 나라를 쥐고 흔들었다가 공민왕때 멸문의 화를 당했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 세종때 걸출한 인물 기건(奇虔)이 두각을 나타내 가문을 다시 일으켰다. 청백리로 대사헌을 거쳐 판중추부사에 오른 기건은 곧 기준의 증조부였다. 기자헌은 선조23년(1590) 29세 나이로 문과에 급제, 사가독서에 뽑혀 학문에 전념한 뒤 검열이 되고, 이어 장래가 촉망되는 청요직을 두루 거쳐 호조참판에 올라 국가재정을 관장한 뒤,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내직으로 들어와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을 때는, 정여립모반사건에 휘말려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진주의 선비 최영경(崔永慶)의 허물을 벗겨 주고, 최영경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 좌의정 정철(鄭澈) 등 서인 일파를 실각시켜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어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세자를 훈육하는 직위를 맡아 광해군에게 <맹자>를 강의하였고, 곧 공조판서에 기용되어 병조·이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한 뒤 두 번째 대사헌이 되었다. 선조37년(1604) 5월 우의정에 오르고 이어 12월 좌의정이 된 기자헌은, 그 무렵 선조가 세자 광해군을 버리고 갓 태어난 영창대군을 새로 세자로 삼으려는 은근한 속내를 비추니 이를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선조39년 그는 관직에서 물러 나고자 무려 12차레나 사직상소를 올린 끝에 판중추부사라는 실권없는 자리에 머물게 되었다. 뒤에 선조가 숨을 모우는 과정에서 빚어진 유영경의 영창대군 옹립 음모를 좌절시키고 광해군 등극에 크게 힘을 보탠 기자헌은 좌의정에 복직한 뒤, 광해군을 둘러싼 또 다른 측근들의 전횡을 막는데 힘을 쏟았다. 광해군6년(1614) 1월 기자헌은 53세 나이로 영의정에 올라 광해군이 바른 정치를 하도록 힘써 보필하는데, 1617년 광해군 측근들이 인목대비 폐비론을 들고 나오자 이를 강도 높게 반대하였다. 이 일로 모함을 받은 기자헌은 끝내 멀리 함경도 길주까지 내 쫓겨 유배생활을 하다가 강능에 은거하였다. 1620년 광해군이 특별히 그를 덕평부원군에 봉하고 영중추부사에 임명하여 조정에 나오도록 하였으나, 영창대군 죽음과 인목대비 폐출에 항거하는 뜻으로 끝내 나오질 않았다. 1623년 마침내 김류(金류)·이귀(李貴) 등이 인조반정을 획책하고 광해군 퇴출에 함께 참여하기를 권하니, 기자헌은 “신하로써 왕을 폐할 수없다”며 거절, 받들었던 왕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반정이 성공하여 인조가 등극하던 날 뭇 신하들이 모두 새 임금 앞에 머리를 조아렸으나 기자헌은 꼿꼿이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숙이질 않았다. 이런 기자헌을 새 임금 인조가 가상하게 여겨 관직을 내려 새조정에 나오라 하였으나 결코 나가지 않았다. 이일로 그는 정적들로부터 역모의 뜻을 품고있다는 오해를 받고 말았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감옥에 갇힌 범법자들을 내응 할 우려가 있다하여 모두 끌어내 목을 베어 버리는데, 이때 기자헌도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지 못해 서소문밖 자신의 집에서 자결하라는 왕명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1624년 1월 25일이었으니 그의 나이 63세였다.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俊格)은 병조좌랑이었는데, 일가족이 모두 몰 죽음을 당할 때 함께 죽으니 나이 31세였다.

기자헌의 아버지 응세(應世)는 일찍이 효행이 높아 선조때 정려가 세워지고 <삼강록(三綱錄)>에 책록 되었다. 특히 경기도 고양에 문화재로 지정 된 그의 묘비는, 앞면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였고, 뒷면은 조선의 명필 한석봉의 글씨로 유명하다. 기자헌의 묘소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가 최근에 경기도 고양 행주기씨 묘역 어느 곳에 묻힌 것으로 짐작은 하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 되지 않았다. 기자헌의 생전 업적은 한참 뒤 좌의정 허목이 기록으로 엮어 남겼고, 최근에 세워진 묘비명은 변시연(邊時淵)이 썼다.

호철님이 찾아준 고전번역원에 실린 미수 허목의 글과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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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에 실린 미수 허목의 글과 해석

미수기언 제26권 원집 하편

奇相國事

相國姓奇氏。本德陽人。初名自靖。後改自獻。字士靖。己卯名臣應敎遵之曾孫也。少以才藝發聞。二十一。陞太學。二十九。擢大科。選入翰苑。旣光顯於朝。沈毅有力量。無細故數數態色。宣祖信任賢之。常侍帷幄。爲大司憲。論徵士崔永慶冤死事。當時鍛鍊成獄者。皆抵罪。而其已死者。皆追奪官爵。及爲右相。王子㼁生。上素不快於世子。欲易世子。私問公。公對曰。建立已久。人心已固。不可動也。縱不果易。然上心已定矣。有大臣居公右者。執國命。上亦專任之。公遂謝病。光海時復入相。時事已大變矣。用事者屢起大獄。日以論死制人。公每議獄。務寬平。傅生議者不數。而亦不使之覺也。常言曰。匹夫之死生。不足爲國家存亡之大數也。光海殺王子㼁。鄭蘊上疏力諫。光海怒。欲殺之。公執不可。光海不得殺。囚之耽乇羅十年。太妃閉時。諸阿縱者。爭言當廢上書者。至累數百人。下政府議。公雖極言往古成敗之事。以冀改悟。然獨爭力尠。不足以動上意。請廣收群臣議。坐政府。會宗室文武百官雜議。於是三司論以黨逆。欲沮其議也。公不爲動。故久坐不起。議畢上。皆畏懼。終無一人敢言不可者。公嘆之曰。有宗室貴臣。休慼共之者。亦不顧大義。負國家至此耶。因出國門。繼而有故相李恒福以下諸言不可者。皆重於時而盡斥去。公竄吉州。人心擾亂。鄭仁弘。初旣主張此事者。而當上議。爲兩端說曰。君臣母子。名義出天而不可易。爭論者。皆惜此名義云。至此。光海亦心畏難。閉之西宮而已。亦莫之敢顯言廢之也。公實有力焉。李爾瞻旣用事日久。能禍福人。惟所欲。自公卿以下。仄目畏事之。公獨自重無所憚。瞻忌嫉之殊甚。顧無詞以斥之也。至是乃竄。初。光海幾不得立。賴公旣得立。心德之。尊寵賜賚之。雖一朝放流之。示譴而已。特召之。待之如舊。而見國勢已去。知不可有爲也。東遊海上。不復預國家事矣。仁祖反正時。功臣等私遣韓嶠。試公意。欲問計。公心知之。佯聾。再問而再不答。嶠去而功臣等相謂曰。彼大臣持重多智。彼旣得志。行其所爲。吾等不得禁。遂不召。其人多執法時論法抵罪者之親屬諸客。積怒於公者。反爲必報之計。陰求其過日密。仁祖旣反正。收召先王舊臣。而公不拜相。識者。皆知其必死也。功臣等旣成功。陰設機。所忌者皆殺之。次及公。惟元功李貴。獨言公無罪。不當死。尋陷大獄。付處瑞山。陰使人告有變。詔王府召問之。公對獄自言無罪。且曰。熒惑入南斗。可移於相。必殺臣以弭災。時李适叛書聞。功臣等大懼。陰謀曰。囚不殺。必內應爲亂。密白上。盡出公及士大夫失志者三十七人。皆斬之。公以大臣。不加誅。令之自處。於是公之昆弟諸子皆僇死。奇氏族矣。後李相國元翼白上曰。奇自獻。當宥及苗裔者。而其身不免。親戚皆死。甚可哀也。李贊成貴。亦爲上言之。上始感悟。命復其官。公布衣時。從先生長者。習聞古人餘敎。嘗爲東省。執弟子禮。見朴洲先生。後薦士二人。趙穆,朴洲。洲不出。樂山澤之遊。多所博觀外家遐遠奇偉之術。而門無迂怪客言神仙者。 記言卷之二十六終

세변(世變)

기상국(奇相國) 사적

상국(相國)은 성이 기씨(奇氏), 본관이 덕양(德陽 행주(幸州))이다. 초명(初名)은 자정(自靖)이었는데 뒤에 자헌(自獻)으로 고쳤고, 자는 사정(士靖)이다. 기묘 명신(己卯名臣) 응교(應敎) 기준(奇遵)의 증손이다. 어려서는 재예(才藝)로 이름나고 21세에는 태학(太學)에 오르고 29세에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원(翰苑)에 뽑혀 들어갔다. 조정에 현달하여서는 침착하고 역량이 있어서 소소한 일로는 낯빛을 붉히는 적이 없으므로, 선조가 신임하고 어질게 여겨 항시 측근에서 모셨다.

대사헌이 되었을 때 징사(徵士) 최영경(崔永慶)이 원통하게 죽은 일을 논하자, 당시 옥사를 조작한 자들은 모두 죄를 받고 이미 죽은 자들은 관직을 추탈당했다. 우상(右相)이 되었을 때 왕자 의(㼁 영창대군(永昌大君))가 태어났는데, 상은 본디 세자(世子 광해군(光海君))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므로 세자를 바꾸고 싶어서 사적으로 공에게 물으니, 공은 대답하기를, “책봉한 지 이미 오래라 인심이 이미 굳혀졌으니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비록 바꾸지는 않았으나 상의 마음이 이미 정해졌을 뿐만 아니라 대신(大臣)으로서 공의 위에 있는 자가 국명(國命)을 잡았고, 상도 또한 그를 전임(專任)하므로, 공은 결국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광해군 때 공은 다시 들어가 정승이 되었는데, 시사(時事)가 이미 크게 변하였는지라, 용사자들이 자주 큰 옥사를 일으켜 날마다 죽이는 것으로써 사람들을 제압하였다. 공은 옥사를 다룰 때마다 관용을 베풀어서 살려낸 자가 매우 많았는데, 또한 그들이 알지 못하게 하느라고 항시 말하기를, “필부(匹夫)의 죽고 사는 것이 족히 국가 존망의 큰 운수가 되지 않는다.” 고 하였다. 광해가 왕자 의를 죽이니, 정온(鄭蘊)이 상소하여 힘껏 간하자 광해는 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공이 불가함을 고집하자 광해는 죽이지 못하고 10년 동안 제주도에 유배하였다. 대비(大妃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幽閉)될 때 여러 아부하는 자들이 ‘마땅히 폐해야 된다.’고 다투어 말하였고, 상소한 자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그러자 의정부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였는데, 공이 옛날의 성패(成敗)한 일을 말하여 개오(改悟)하기를 바랐으나 혼자만이 간쟁하므로 힘이 약해서 상의 뜻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래서 공은 널리 군신(群臣)들의 의논을 거두자고 청한 다음, 의정부에 앉아서 종실(宗室)과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을 모아 같이 의논하였다. 이때 삼사(三司)가 당역(黨逆)으로 논죄하였으니, 그 의논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공은 요동하지 않고 짐짓 오래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의논이 끝나서 올리는데 모두 두려워서 감히 불가함을 말하는 자가 끝내 한 사람도 없자, 공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종실(宗室)ㆍ귀신(貴臣)으로서 국가와 휴척(休戚)을 같이할 자들이 있는데도 또한 대의(大義)를 돌아보지 않으니, 이렇게까지 국가를 저버릴 수 있을까.” 하고, 이내 성문(城門)을 나가 버렸다. 이어서 고상(故相) 이항복(李恒福)을 위시하여 폐모(廢母)를 반대한 이들은 모두 당시의 중망을 받는 분들이었는데 다 내침을 당하고, 공도 길주(吉州)로 유배되니 인심이 크게 요란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은 당초 이 일을 주장한 자인데, 의논을 올릴 때 양단설(兩端說)을 말하기를, “군신(君臣)과 모자(母子)는 명의(名義)가 하늘에서 나온 것이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쟁론(爭論)하는 자들은 모두 이 명의를 아껴서입니다.” 라고 하였다 한다. 일이 이리되자, 광해군도 또한 마음에 두려워서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할 뿐, 감히 폐한다고 드러나게 말하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실로 공의 힘이 컸던 것이다. 이이첨(李爾瞻)이 오랫동안 용사하여 남에게 화복(禍福) 주는 일을 마음대로 하였으므로 공경(公卿) 이하 모두가 그를 곁눈질하며 공손히 섬기는데, 공만은 자중하고 꺼리는 바가 없었으므로 이이첨은 몹시 미워하였으나 배척할 구실이 없었다가 이에 이르러서 곧 귀양 보내게 된 것이다. 처음 광해군이 거의 즉위하지 못하게 되었다가 공의 힘을 입어서 즉위하게 되자, 마음에 고맙게 여겨서 특별히 우대를 하였다. 비록 일조에 유배시켰으나 견책을 보이는 정도에 불과했을 뿐이었고, 특별히 불러서 대우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는데, 공은 국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보아 무슨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 동으로 바닷가에 노닐며 다시는 국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공신(功臣) 등이 사적으로 한교(韓嶠)를 보내어 공의 뜻을 시험하고 계책을 묻게 하였는데, 공은 마음속으로 그것을 알고는 거짓 귀먹은 체하고, 두 번 물었으나 두 번 다 대답하지 않았다. 한교가 돌아가자 공신들은 서로 말하기를, “저 대신(大臣)은 몸가짐이 진중하고 꾀가 많다. 제가 이미 뜻을 얻어서 할 바를 행하고 있으니 우리들은 금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부르지 않았다. 공과 그 당여가 많이 집법(執法)을 하였는데 당시 법에 논죄된 자의 친속(親屬)이나 제객(諸客)으로 공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이 도리어 반드시 보복할 계책을 세워 몰래 그 허물을 찾되, 날마다 치밀하게 하였다.

인조가 이미 반정하고 나서 선왕(先王 선조(宣祖))의 구신(舊臣)들을 모두 불렀는데 공이 정승에 제배되지 못하자, 식자들은 다 그가 꼭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공신들이 이미 성공하고 나서 몰래 함정을 파서 꺼리는 자들을 죽이는데, 차서가 공에게 미치자 오직 원훈(元勳) 이귀(李貴)만은 홀로 말하기를, “공은 죄가 없으니 죽여서는 아니 된다.” 고 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큰 옥사에 빠뜨려서 서산(瑞山)에 부처(付處)하고, 몰래 사람을 시켜서 고변(告變)하게 하였다. 상이 의금부에 명하여 불러서 심문케 하니, 공은 공초에서 스스로 죄가 없음을 말하고, 또, “형혹성(熒惑星)이 남두(南斗)에 들어갔으므로 그 재앙을 재상에게 옮길 만하니, 반드시 신을 죽여야 재앙이 풀릴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이괄(李适)이 반(叛)하였다는 보고가 이르자 공신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가만히 꾀하기를, “죄수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내응하여 난을 꾸밀 것이다.” 하고, 비밀히 상에게 여쭈어서 공과 사대부로서 실지(失志)한 자 37인을 내다가 모두 베었는데, 공은 대신(大臣)이라 해서 베지 않고 자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에 공의 형제와 여러 아들과 조카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으니, 기씨가 멸족되었다.

그후 상국 이원익(李元翼)이 상에게 아뢰기를, “기자헌은 자손까지 죄를 용서받아야 할 처지인데 그 몸도 형을 면치 못하고 친척이 모두 죽었으니 매우 애처롭습니다.” 하고, 찬성 이귀 또한 상에게 말씀드리니, 상은 비로소 감오(感悟)하고 관작을 회복시켰다.

공은 포의 시절에 선생ㆍ장자를 따라 고인(古人)이 남긴 가르침을 익히 들었으며, 일찍이 동성(東省)이 되었을 때에는 제자의 예를 갖추어 박주(朴洲) 선생을 뵈었다. 뒤에 선비 두 사람을 천거하였으니 그는 바로 조목(趙穆)과 박주였다. 박주는 나가지 않고 산수(山水)의 놀이를 즐겼으며, 외가서(外家書)나 기위(奇偉)한 술책들을 많이 보았는데도 그 문하에는 신선술(神仙術)을 말하는 우괴(迂怪)한 자가 없었다.

[주D-001]기묘 명신(己卯名臣) : 중종 14년(1519) 11월에 남곤(南袞)ㆍ심정(沈貞)ㆍ홍경주(洪景舟) 등 훈구 재상(勳舊宰相)들에 의하여 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ㆍ김식(金湜) 등 신진 사류(新進士類)를 가리킨다. 《中宗實錄 14年 11月 辛亥》

[주D-002]형혹성(熒惑星)이 …… 들어갔으므로 : 《한서(漢書)》 예문지(藝文誌)에 ‘형혹성이 나타나면 큰 병화(兵禍)가 있다.’고 한 때문에 그 조짐을 재상인 자기에게 옮겨 재앙을 풀게 하라는 뜻이다.

[주D-003]동성(東省) : 동벽(東壁)의 뜻으로 벼슬아치가 사진(仕進)하여 모여 앉을 때 좌석 동쪽에 위치한 벼슬 곧 의정부 좌참찬, 홍문관 응교와 부응교, 통례원의 인의 등을 이른다.

고전번역원에 실린 만전상공 묘소기록

성해응(成海應)의 硏經齋全集卷之十四

奇相國遺墟記

抱川香積山之陰。有奇相國遺墟。公名自獻字士靖。德陽人。宣廟朝柄用大臣。至光海時。凶徒讎視君母。彜倫斁壞。光海入其議。公諫不聽。遂招文武諸臣雜議。欲以衆議動之。卒未有明言不可者。公遂出國門。竟竄吉州府。然光海終畏難之。閉西宮。莫敢顯言廢之者。公之力也。已而見釋。公遂遊東海上。不立昏亂之朝。及仁廟御極。朝著一新。公反中流言。及适兵薄都。公死獄中。余甞歎當時大臣苟能一操公爰辭决之。公其不死矣。公旣不事昏朝。棲遑不返。則已心絶之矣。當其自絶于天也。寧復嚮之。公之不歸心於光海者明甚。方賊适之稱亂也。不但逆順之辨易見。狂悖如此。其敗可立而待。而謂公之智而遙相和應哉。此不待明者而知之。且公之庶從弟益獻雖從适。公旣不顧一身之禍。而樹大義於昏朝者如此。豈爲益獻而撓其節哉。時雖當危疑之際。何其不辨而徑殺之也。子孫宗族皆被夷㓕。其先世墳墓在石門山下。爲土人所攘奪。余甞登其墟而望之。其東白沙李文忠衣冠之葬也。又其東忠簡金公之所居也。二公皆抗議於昏朝。與公同時被竄。至今爲朝野之所誦慕。公則不然。公在昏朝時。雖有招權之誚。豈以是掩其大節哉。余甞怪事之當然而不然。謂之有幸有不幸。未知主張是者誰歟。謂之天歟。天之祐善。豈有彼此。而顧二公之義如彼其顯。謂之人歟。人之公議。久則能必伸。而公之節。久而益晦。幸不幸固不足道。而恐其大節之遂不傳也。爲鄕人道之如此云。

번역하여보자

포천 향적산의 그늘진 곳에(抱川香積山之陰。) 기상국의 유허가 있다(有奇相國遺墟。) 공의 이름은 자헌이고 자는 사정이다(公名自獻字士靖。) 덕양사람이다(德陽人。) 선조임금 때에 대신을 지냈다(宣廟朝柄用大臣。) 광해군 때에 이르러(至光海時。) 흉도들이 임금의 어머니를 원수로 여겼다(凶徒讎視君母。) 이는 인륜이 무너지는 일이다(彜倫斁壞。) 광해임금이 그 의논을 받아들이자(光海入其議。) 공이 듣지 말라고 만류했다(公諫不聽。) 문무의 모든 신하들을 불러들여 여러 가지로 의논하게 하여(遂招文武諸臣雜議。) 많은 사람의 뜻으로 밀어붙이려했다(欲以衆議動之。) 모인 사람들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숨기지 않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했다(卒未有明言不可者。) 공이 마침내 나라 문밖으로 쫓겨나(公遂出國門。) 길주부 끝에 숨었다(竟竄吉州府。) 그리하여 광해임금은 마침내 외난을 일으켜(然光海終畏難之。) 서궁을 닫았다(閉西宮。) 감히 현언을 그만두는 자가 없는 것은(莫敢顯言廢之者。) 공의 노력이다(公之力也。) 이윽고 오해가 풀어짐을 보게된다(已而見釋。) 공이 동해상에 이르러 유람할 때(公遂遊東海上。) 혼란의 조정을 세우지 못하고(不立昏亂之朝。) 인조가 왕이되다(及仁廟御極。) 조정은 새롭게 나타나니(朝著一新。) 공은 터무니없는 말에 치우치지않았다(公反中流言。) 이괄이 도성에 다가오자(及适兵薄都。) 공은 옥중에서 죽었다(公死獄中。) 남은 사람들이 탄식하고 당시 대신이 도와주는 말로 일조를 했더라면(余甞歎當時大臣苟能一操公爰辭决之。) 공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公其不死矣。) 공은 이미 혼조를 따르지 않으니(公旣不事昏朝。) 반대편에서 살지 않았을 것이다(棲遑不返。) 즉 이미 마음이 단절된 것이다(則已心絶之矣。) 당연히 그 스스로 하늘의 이치를 끈은 것이다(當其自絶于天也。) 또다시 이를 향할 것인가(寧復嚮之。) 공의 돌아오지 않는 마음을 광해의 추종자들은 명심하다(公之不歸心於光海者明甚。) 사방의 적들이 괄의 난이라 한다(方賊适之稱亂也。) 부단히 역순의 분별을 쉽게 본다(不但逆順之辨易見。) 미치광이처럼 어지러짐이다(狂悖如此。) 그 세우고 기다림의 무너짐이다(其敗可立而待。) 공의 지혜이고 아득히 멀리 서로 재앙을 받아들인다 함은(而謂公之智而遙相和應哉。) 이를 기다리지 않는 밝고 아는 것이다(此不待明者而知之。) 이는 공의 서 4촌동생 익헌이 비록 이괄을 따랐고(且公之庶從弟益獻雖從适。) 공은 이미 한몸의 재난도 원하지 않았지만(公旣不顧一身之禍。) 재앙(樹)의 큰 뜻은 혼조(광해)를 따르는 자들과 같이 보았다(而樹大義於昏朝者如此。) 어찌 익헌이 그 재앙(哉)의 마디를 구부릴수 있었겠는가?(豈爲益獻而撓其節哉。) 때에 비록 의심을 사는 것은 당연하지만(時雖當危疑之際。) 어찌 그것이 변명도 못하고 죽어야 했나?(何其不辨而徑殺之也。) 자손과 종족 모두 피살되어 없어졌다(子孫宗族皆被夷㓕。) 그 선세의 분묘는 석문산 아래에 있는데(其先世墳墓在石門山下。) 토인들이 빼앗아 파헤쳤다(爲土人所攘奪。) 나는 그 옛터에 올라 바라보며 감상하니(余甞登其墟而望之。) 그 동쪽으로 백사 이문충공이 의관을 갖추고 장례지내진 곳이요(其東白沙李文忠衣冠之葬也。) 또한 그 동쪽으로 충간김공이 사는 곳이다(又其東忠簡金公之所居也。) 두분이 모두 혼조(광해)에게 항의 한분들이니(二公皆抗議於昏朝。) 공과 함께 동시에 피해 숨어있다(與公同時被竄。) 지금에 이르러 조야가 그리움을 암송하니(至今爲朝野之所誦慕。) 공은 즉 당연한 것 아닌가?(公則不然。) 공이 혼조와 있을 때에(公在昏朝時。) 비록 대소를 분별하여 책망하였지만(雖有招權之誚。) 어찌 이것으로써 그 큰 재앙을 막을 수 있겠는가?(豈以是掩其大節哉。) 나는 괴이한 사건의 당연과 부당연함을 생각한다(余甞怪事之當然而不然。) 행과 불행이 있다지만(謂之有幸有不幸。) 잘 알지 못하는 이 것을 누구에게 묻겠는가?(未知主張是者誰歟。) 하늘의 이치가 있다지만(謂之天歟。) 하늘이 돕는 정당함을(天之祐善。) 어찌 이렇다 저렇다하랴?(豈有彼此。) 그러나 돌아보면 두분의 정의는 그 사람의 표현되어 나타남과 같다(而顧二公之義如彼其顯。) 사람들이 말하길(謂之人歟。) 사람들이 공의 뜻을(人之公議。) 오래도록 즉 반드시 펼쳐 놓을 것이다(久則能必伸。) 그리고 공의 절의는 (而公之節。) 오래도록 그믐을 더할 것이다(久而益晦。) 행과 불행은 이치가 부족라게 단단하다(幸不幸固不足道。) 그러나 고포스런 그 재앙의 끝은 전하지 않는다(而恐其大節之遂不傳也。) 시골사람의 이치는 이것과 같다한다(爲鄕人道之如此云。)

포천군(抱川郡) 소흘면(蘇屹面) 고모리(古毛里) 향적산(香積山) 변동(邊洞)

以上墓所失傳未詳或言抱川西面天寶山檜岩下新基村上大路邊庚坐長穴連有七八墳碑碣俱存人稱奇政丞宅山所其下洞口內田畓皆位田故癸卯改量時量任以奇僕作名懸主而近來居民拔去碑碣云右甲午譜所錄如是故依錄焉其後海西宗人開墳以求誌石而不能得 二○○○年庚辰2000경진년設壇於元堂先塋

이상의 묘소는 모두 모른다. 혹은 포천抱川 서면西面 천보산天寶山 회암檜岩 아래 신기촌新基村 큰 길가위에 경좌庚坐(2시30분방향)로 7~8개의 묘와 비가 연이어 있는데 사람들이 기정승댁奇政丞宅 산소라 하고 그 아래의 논과 밭이 모두 이 묘들을 위한 위전位田이라 한다. 그래서 계묘년癸卯年(1663) 개량改量할 때에 기가의 종(아마도 묘지기)으로 이름을 올려 기록했다. 그런데 근래에 거주민들이 묘비를 뽑아 버렸다 한다. 이상의 내용은 갑오보甲午譜 (1714년판) 기록을 그대로 옮긴다. 그 후에 해서문중海西門中 사람들이 묘지석墓誌石을 찾기 위해 묘를 파고 찾았으나 얻지 못하였다.

기자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아 건국한 조선 왕조기는 왕도정치의 구현과 사대관계의 유지가 이상적인 정치와 외교로 인식되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기자와 같은 중국의 현인이 고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한 사실을 명예스러운 일이었다고 이해해 기자동래설이 긍정적으로 수용되었고, 고려 숙종 때 평양에 축조한 기자릉(箕子陵)에 대한 제사도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하였다.

기자는 상나라의 왕족으로 폭군 주왕의 친척이었다. 상나라의 태사(太師)로 관직에 있을 무렵 주왕이 폭정을 행하는 것을 보고 이를 그만둘 것을 간언하였다가 감옥에 갇혔다. 이에 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주왕은 그를 노비로 삼았다고 한다. 기원전 1122년에 상나라가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1]당하고 기자를 석방하여 신하로 삼고자 하였으나 기자는 이를 거부하고 은둔하였다. 기자는 주나라의 무왕이 천도(天道)를 묻자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진술하기도 하였다고 하며 기원전 1119년에 주나라 왕실에 조빙[2](朝聘)하였다고 한다.

한편, 기자동래설은 위의 기자 전설과 약간 다르다. 상나라가 멸망하자 기자는 주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주나라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한다. 기자는 5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조선으로 와서 조선의 백성들에게 문명을 가르쳤다고 한다. 일부 기록에서는 기자가 건너오자 원래 조선의 군주였던 단군이 기자를 피해 장당경으로 옮겨 갔다고 나타난다. 기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8조의 법금을 베풀어 나라를 다스렸다. 또한 정전제(井田制)[3]를 실시하고 농사짓는 법과 누에치는 법을 가르쳐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가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신라의 최치원도 기자동래설을 긍정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점차 굳어져 가면서 한국 유교문화의 시원적 존재로 기자에 대한 숭배가 강화되었다. 그 결과 1102년에는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져 국가의 제사를 받았으며 기자의 묘까지 만들어졌다. 이후 조선 초기에는 단군과 기자가 나란히 국조로 숭상되었으며 《동국사략》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삼조선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정립하면서 기자조선이라는 왕조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사림에 의해 기자 존숭 의식은 더욱 발전하였고, 이이의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같은 기자를 존숭하는 서적까지 편찬되었다. 개항기 이후에도 기자에 대한 존숭 의식은 계속되었으나 자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자가 무왕에 의해 조선의 군주로 책봉된 것이 아니라 기자가 조선의 군주가 되고 난 후에 무왕이 책봉하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이 되었다. 기자동래설은 현재 한국사학계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기자동래설이 삼국시대 이후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에 그 영향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평양에는 기자(箕子)를 모시는 사당인 숭인전(崇仁殿)이 있다. 숭인전의 전신은 고려 시대에 세워진 기자사(箕子祠)이다. 고려 숙종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의 건의로 인해 기자의 무덤을 찾아 사당을 세웠으며, 충숙왕(忠肅王) 때 기자사를 건립하여 그에 대한 제사를 본격적으로 지내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변계량(卞季良)으로 하여금 기자 사당에 대한 비명(碑銘)을 지어 세우도록 하고, 평안도 관찰사에게 참봉을 선출해 이곳을 지키도록 하는 등 기자에 대한 예우를 더욱 두터이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611년(광해3) 기자의 후손을 별도로 세워 사당 제사를 주관하도록 해 달라는 평양 지역 인사들의 청원에 따라, 이듬해 기자사의 명칭을 ‘숭인전’으로 고치고 기자 후손 중 한 명을 정6품 지위의 전감(殿監)으로 삼아 이를 대대로 지키도록 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에 평안도 태천(泰川) 사람 선우식(鮮于寔)이 초대 숭인전 감으로 임명되어 기자의 후손으로서 그 직임을 세습하게 되었다. 기실 당시까지만 해도 한씨(韓氏), 공씨(孔氏), 인씨(印氏) 등 기자의 후예로 일컬어지는 가문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선우씨(鮮于氏)가 제사를 받들 후손으로 특별히 지목된 것이다.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으로 선정된 이유는 당시 평안도 유생 정민(鄭旻) 등이 올린 상소에서 살펴볼 수 있다. 상소에 따르면, 사서(史書)에 마한(馬韓) 말엽 기자의 후손인 양(諒)이 평안도 용강(龍岡) 오석산(烏石山)에 들어가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운부군옥(韻府群玉)』과 『강목(綱目)』에 기자의 지자(支子)인 중(仲)이 ‘우(于)’ 땅을 식읍으로 받아 선우를 성씨로 삼게 된 일이 실려 있다고 한다. 또한 조맹부(趙孟頫)가 선우추(鮮于樞)에게 준 시에도 ‘기자의 후손에 구레나룻 좋은 노인 많아라.[箕子之後髥翁多]’라 한 대목이 등장한다고 한다.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평안도 유생들은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였고, 이는 조정의 심의와 평안도의 조사를 거친 끝에 결국 사실로 받아들여졌다.(이정귀(李廷龜), 「기자묘비명(箕子廟碑銘)」 / 차천로(車天輅), 「숭인전비(崇仁殿碑)」) 17세기 초에 이르러 선우씨가 처음으로 기자 후손으로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정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존재하였다. 대표적으로 김시양(金時讓)은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이라고 한 것은 소동파(蘇東坡)가 선우신(鮮于侁)에게 지어 준 시와 조맹부가 쓴 「선우추서서(鮮于樞書序)」에 기자의 후예라고 한 말에서 취한 듯하나 또한 근거가 미약하다. …… 기자전을 숭인전이라 하고 선우씨를 전감으로 삼은 것은 모두 광해조의 혼란한 정치가 서로 이끌어 거짓된 일을 행한 결과이다. 인조반정 초기에 즉각 혁파하고 조종의 옛법을 회복하는 것이 마땅하였을 것인데 지금까지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실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라 하여,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공인한 조치가 적절치 못하였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김시양,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이처럼 진위 여부 및 적절성을 둘러싼 논란이 일부 존재하기도 하였지만, ‘기자 후손’으로서 지니는 선우씨의 지위와 역할은 광해조 이래 조선 후기까지 공고하게 이어졌다. 선우씨들이 이후 숭인전 감을 대대로 계승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은 다양한 문헌 기록에서 언제나 ‘기자의 후예’라는 이름으로 특기(特記)되며 조선인들의 후한 예우를 받았다. 숭인전 개칭과 함께 기자 후손으로서 국가적인 공인을 받은 선우씨는, 이제 조선 사회에서 그만의 남다른 위상을 점유한 가문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높아진 사회적 위상은 때로 집안 간의 다툼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1807년(순조7) 평안도 태천에 거주하던 선우욱(鮮于郁)이, 격쟁(擊錚)을 통해 현재 다른 지손(支孫)이 세습하고 있는 숭인전 감의 직책을 종손인 자신에게 돌려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선우욱이 올린 이러한 청은 도신(道臣)의 조사를 거친 끝에 근거가 있다고 판단되어 그에게 숭인전 감 자리가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인 1809년(순조9), 이번에는 선우욱에게 전감의 지위를 빼앗긴 선우규(鮮于楏) 집안에서 격쟁하여 자신들이 이어받기로 되어 있던 직임을 본래대로 되찾아 계승할 수 있기를 청하였다. 숭인전 감을 둘러싸고 후손 간에 다툼이 지속되는 모습을 지켜본 조정에서는, 결국 초대 숭인전 감이었던 선우식의 직계 자손 가운데 한 명을 다시 찾아 임명하여 그 지위를 승습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승정원일기』, 순조 9년 5월 7일) 『일성록』을 비롯한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사실들은, 조선에서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었던 ‘기자’의 위상과 그로 인해 후예 선우씨들이 지니게 된 당대 사회에서의 변별적 지위를 아울러 살필 수 있게 한다.

○ 숭인전(崇仁殿)은 평안도 평양성 밖 기자묘(箕子墓) 옆에 있는데, 기자를 향사하는 전각이며,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과 폐백을 내렸다. 고려 숙종조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이 건의하여 기자의 무덤을 찾아 사당을 세워 중간 제사를 지냈는데, 충숙왕(忠肅王)이 평양부에 명하여 기자사(箕子祠)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세종조에 판한성부사 권홍(權弘)이 임금에게 글을 올리기를, “기자의 어짊은 온 천하 만대에 이르도록 다 함께 경모하는 바입니다. 공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은(殷) 나라에 3인(三仁 미자(微子)ㆍ기자(箕子)ㆍ비간(比干))이 있다.”고 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예약과 문물이 중화(中華)와 견줄 수 있는 것은 기자가 조선에 봉함을 받아서 팔조의 교화[八條之敎]를 시행한 까닭이오니, 동방에 끼친 공이 대단히 크므로 태조가 개국한 뒤에 사전(祀典)의 첫머리에 기자를 실었사오니, 옛 성인을 존중하고 숭배하는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묘에 사적을 새긴 비가 없어서 공덕을 세상에 찬양하여 나타낼 수 없사오니, 청컨대, 문신을 시켜 비문을 지어 묘 아래에 세워 후세에 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참찬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여 묘 아래에 세웠다.

○ 기자전(箕子殿)은 평안 감사가 참봉을 선출ㆍ임명하여 지켜왔다. 광해조 계축년, 정사호(鄭賜湖)가 감사로 있을 때에, 칭호를 고쳐 ‘숭인전(崇仁殿)’이라 편액을 내리고, 선우식(鮮于寔)을 기자의 후손이라 하여 숭인감(崇仁監)으로 임명하니, 품계는 정6품이었다. 그런데 정묘년의 난리에 숭인감인 선우흡(鮮于洽)이 노(虜 청병(淸兵))에 항복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그 죄를 논하여 관직을 삭제하여 버리고, 그 도에 명하여 다시 선우 성 가진 자를 뽑게 하였더니, 감사 김시양(金時讓)이 태주(泰州) 사람 선우경(鮮于慶)을 임금에게 아뢰어 보고하였다. 조정에서 명하여 그가 적손인지 지손인지를 조사하게 하니, 시양이 다시 아뢰기를 “멀고도 아득한 명족의 후예를 누가 원손인지 지손인지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성이 ‘선우’인 까닭에 그 명에 응한 것뿐입니다.” 하였다.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삼은 것은 소식(蘇軾)이 선우신(鮮于侁)에게 준 시와 조맹부(趙孟頫)가 선우추(鮮于樞)의 글씨본에 쓴 서문에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이라고 한 것을 취한 것이니, 이 말도 또한 근거가 박약하다. 광해조 때에 정치가 어지러워 서로 허위로 만든 것은 반정 초에 즉시 폐지했어야 마땅한데, 지금까지 그대로 좇고 있으니 탄식할 일이다. 《하담파적록》

뒤에 전감(殿監)을 고쳐 ‘참봉’으로 하였다.

인조 계해년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고, 정축년에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다.

숙종 기미년에 도승지를 보내어 치제하고 기축년에 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였다.

숭인전비(崇仁殿碑)

만력(萬曆) 39년(1611, 광해군3) 가을에 평안도(平安道)에 사는 진사(進士) 정민(鄭旻) 등이 상소하기를, “우리 동방이 해외 한편에 있어 중국의 교화가 있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천행으로 우리 기자(箕子)가 5000명의 은(殷)나라 백성과 시서(詩書)ㆍ예악(禮樂)ㆍ음양(陰陽)ㆍ복서(卜筮)에 관한 책을 가지고 와서 여덟 조목을 번역하여 가르쳐 오랑캐의 풍속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에 기자에 힘입어 군신(君臣)ㆍ부자(父子) 등 오륜(五倫)이 펼쳐졌으니, 인현(仁賢)의 교화가 그 소종래가 있는 것입니다. 고려(高麗) 현종(顯宗)이 비로소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고 우리 조선 공정대왕(恭定大王)이 명하여 새로 단장하였고 장헌대왕(莊憲大王)이 또 명하여 글을 지어 비를 세웠는데, 이는 모두 그분의 성덕(盛德)을 숭배한 것입니다. 대체로 기자의 교화는 공자(孔子)보다 훨씬 더 앞섰기 때문에 공자가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은 뜻을 두신 것이 어찌 그 효과가 아니겠습니까. 기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동방이 오랑캐의 복장을 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뒤에 비록 공자의 도가 있어도 그 교화가 들어올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동방의 백성이 공자만 숭배할 줄 알고 기자를 숭배할 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기자를 숭배할 때 반드시 공자를 숭배할 때처럼 예가 갖추어져야만 결여된 바가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사가(史家)의 기록을 상고해 보니, 기자의 후손이 41세를 전해 오다가 준(準)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에게 축출되어 삼한(三韓)에다 나라를 세웠습니다만 위아래가 1000여 년이 넘어 문헌(文獻)을 상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우씨(鮮于氏)가 기자의 후손이라는 것이 운부군옥(韻府群玉) 우자부(于字部)에 기록되어 있고 강목(綱目) 선우보(鮮于輔) 주(註)에 쓰여 있으며 씨족대전(氏族大全), 후한서(後漢書), 위략(魏略), 한묵전서(翰墨全書) 등에 뒤섞여 나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원(元)나라 때 선우추(鮮于樞)란 사람이 조맹부(趙孟頫)에게 진금(震琴)을 주자 조맹부가 그 사례로 지어 준 시에 “기자의 후손들은 수염이 아름다운 이가 많으니 재주가 뛰어나 몽매를 놀래었네.〔箕子之後多髥翁 才猷邁俗驚愚蒙〕”라고 했으니,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임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마한(馬韓) 말엽에 기자의 후손 3명 중에 우친(友親)이라는 사람의 후손은 한씨(韓氏)가 되고 우평(友平)이라는 사람의 후손은 기씨(奇氏)가 되고 우량(友諒)이라는 사람은 용강(龍岡) 오석산(烏石山)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 자손들이 중국에 있는 선우씨를 적(籍)으로 삼아 이미 기자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니, 동방에 있는 사람들만 기자의 후손이 아니란 말입니까? 기자의 후손이 만약 자씨(子氏)의 성을 그대로 썼다면 후세에도 반드시 그 성씨를 계승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도 자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고 나라의 성씨는 본도의 선우씨밖에 없으니, 이른바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이 아니고 누구란 말입니까. 고려 왕씨는 삼한(三韓)을 통일한 공로로 인하여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하여 녹을 받아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자는 다만 단군(檀君), 혁거(赫居), 동명(東明), 온조(溫祚)와 더불어 시조의 제사만 흠향할 뿐이고 지금까지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나라의 전장(典章)에 결여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점을 신들이 매우 한스러워하는 바입니다. 지난날 본도의 사람들이 이 일을 조정에 요청하였으나 일이 취소되어 실행되지 않았고 지금 선우식(鮮于寔)이란 사람이 태천(泰川)을 떠나 기자전(箕子殿)의 곁에 와서 산 지 이미 10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기자의 후손으로 똑같이 호적에 편입되었으나 도리어 왕씨의 자손보다 못하게 되었으므로 신들이 민망하고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연성공(衍聖公)과 숭의감(崇義監)의 고사처럼 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니, 그 사안을 예조에 하달하였다. 예조 판서 신흠(申欽) 등이 심의하여 아뢰기를, “우리 동방 문명의 교화는 털끝만 한 것도 모두 기자의 덕택입니다. 높이 받드는 전례가 결여되어서는 안 되니, 다시 의논하고 참작하여 시행하기 바랍니다.” 라고 하니, 대신(大臣)이 의논한 다음 평안도에 공문을 하달하였다. 관찰사 최관(崔瓘)이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지금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이라는 설은 일도의 백성들이 입을 모아 일컬을 뿐만 아니라, 옛날의 서적에도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선우씨가 또 기성(箕城;평양)에 살고 있는 데다가 본도의 유민(遺民)들이 제사의 주인으로 세울 것을 요청하고 있으니, 그들의 말을 폐기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니, 그 사안을 예조에 하달하였다. 예조 판서 신흠이 또다시 심의하여 아뢰기를, “본도의 백성들이 모두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기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전례에 있어서는 나라에서 이미 사당을 지어 제사를 거행하고 있으나 다만 왕씨의 후손처럼 그의 자손을 감(監)으로 삼아 제사를 주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왕조에서 미처 거행하지 못한 일을 하루아침에 창설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니,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해 보게 하소서.” 라고 하니, 주상이 그대로 명하였다.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 등이 의논하기를, “지난날 기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동방이 오랑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 중엽에 이르러서야 기자의 사당을 건립하였으니, 우리 조정 이상으로 결여된 전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머뭇거리며 시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과거와 똑같은 꼴이 됩니다. 게다가 정민 등의 상소와 감사의 장계가 근거와 고증이 있으니, 마땅히 숭의전(崇義殿)의 관례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윤허한다고 하였다. 신흠 등이 또 아뢰기를, “기자전을 한결같이 숭의전의 고사에 따라 전각의 이름은 대제학(大提學)이 지어서 올리고 그 자손의 벼슬도 왕씨 자손을 감으로 삼은 예와 같이 하되 이조에서 그 일을 관장하도록 하소서.” 라고 하니, 이에 전각의 이름을 숭인(崇仁)으로 걸고 선우식에게 감의 벼슬을 주되, 대대로 이어받도록 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아 은나라 태사 기자는 / 粤殷太師

명이의 때를 만나 자신을 깨끗이 했도다 / 明夷自靖

천지와 함께 분신하여 죽으니 / 天智之焚

주 성왕(聖王)께 홍범을 주었네 / 錫範周聖

의리상 주나라 신하 될 수 없어 / 義罔臣僕

경륜의 뜻 거두고 동쪽으로 왔도다 / 卷懷而東

여덟 조목으로 백성을 가르치니 / 八條軌民

어진 현인의 기풍이었도다 / 仁賢之風

오랑캐를 문명의 나라로 바꾸니 / 革夷而夏

하늘이 주신 것이었도다 / 繄天其賜

대수(代數)는 사십 세를 전해졌고 / 歷世四十

나라는 천 년간 지속되었도다 / 國以千禩

그 성대한 덕이야말로 / 惟厥盛德

백세토록 제사 지내야 하리 / 百世祀之

당나라에 이르러 사당을 세우니 / 洎廟于唐

유종원(柳宗元)이 비문을 지었도다 / 宗元有碑

더구나 우리 해동은 / 矧我鰈域

주나라에서 봉해 준 구지(舊地)임에랴 / 周封之舊

평양의 유민들이 / 箕壤遺民

처음의 터를 지켰도다 / 肇基是守

금화가 번갈아 뒤바뀌어도 / 金火遞遷

능침은 옛날과 다름없도다 / 陵寢猶昔

하늘이 도와주니 / 天其祐之

성인의 자취 인멸되지 않았도다 / 不沫聖迹

기자의 교화는 / 父師之化

만고토록 하루 같도다 / 萬古一日

찬란한 태평시대에 / 於赫昭代

분향을 거르지 않았도다 / 肹蠁罔缺

제단을 쌓지 않고 사당을 세우니 / 不壇而屋

고려보다도 더 빛났도다 / 有光麗氏

비문에 사실을 기재하니 / 克載于碑

예와 물이 겸비되었도다 / 禮物兼備

정성스러운 우리 임금께서 / 亹亹我王

더욱더 제사의 예를 높였도다 / 益隆祀典

숭인으로 게시하니 / 揭以崇仁

전각의 이름이었도다 / 乃顔其殿

후손에게 벼슬을 주니 / 官其苗裔

사당을 지키게 되었도다 / 守祧是修

삼각을 본받으니 / 式是三恪

나라와 더불어 모두 빛났도다 / 與國咸休

제때에 제사를 지내니 / 祼薦孔時

명덕이 향기롭도다 / 明德惟馨

이에 바위를 깎은 다음 / 爰斵樂石

명을 새기어 후세에 보이도다 / 垂後于銘

고사를 상고하여 덕을 숭배하니 / 稽古崇德

더욱더 찬란하도다 / 不顯其光

숭인사(崇仁祠)에 성인의 은택이 / 仁祠聖澤

패수처럼 양양하도다 / 浿水洋洋

[주-D001] 구이(九夷) : 고대 동방의 9종 민족을 일컫는 말이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오랑캐가 9종이 있는데, 견이(畎夷)ㆍ우이(于夷)ㆍ방이(方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풍이(風夷)ㆍ양이(陽夷)이다.”라고 하였다.

[주-D002] 명이(明夷)의 …… 했도다 : 명이는 환란과 암울함을 상징하는 괘로 어리석은 군주가 위에 있어 명철한 자가 해를 당하는 때이다. 《주역》 〈명이괘 단전(彖傳)〉에 “어려울 때 정정함이 이로움은 밝음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나라 안이 어려우나 능히 자신의 뜻을 바르게 하였으니, 기자가 이것을 실천하였다.〔利艱貞 晦其明也 內難而能正其志 箕子以之〕”라고 하였다.

[주-D003] 천지(天智)와 …… 죽으니 : 천지는 아름다운 옥의 이름이다. 일주서(逸周書) 세부(世俘)에 “상왕(商王) 주(紂)가 천지를 몸에 감고 스스로 불타 죽었다.”라고 하였다.

[주-D004] 홍범(洪範) : 서경(書經)의 편명인데,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을 위하여 지은 것으로서 정치의 개요를 설명한 것이다. 기자가 무왕(武王)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우(禹)에게 큰 규범 아홉 가지를 내리시어 일정한 윤리가 베풀어졌습니다. 첫째는 오행(五行)이요, 둘째는 다섯 가지 일을 공경히 행하는 것이요, 셋째는 여덟 가지 정사를 힘써 행하는 것이요, 넷째는 다섯 가지 기율을 조화되게 쓰는 것이요, 다섯째는 임금의 법칙을 세워 쓰는 것이요, 여섯째는 세 가지 덕을 다스려 쓰는 것이요, 일곱째는 의문을 물은 것을 밝혀 쓰는 것이요, 여덟째는 여러 가지 징험을 생각하며 쓰는 것이요, 아홉째는 다섯 가지 복을 길러 쓰는 것과 여섯 가지 궁함을 위압하여 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書經 洪範》

[주-D005] 삼각(三恪) : 주(周)나라가 천하를 얻은 이후로 순(舜)과 하(夏)ㆍ은(殷) 두 나라 임금의 후손에게 벼슬을 준 것을 말한다.

五山集卷之五 延城車天輅復元著 / 碑銘

崇仁殿碑

萬曆三十九年秋。平安道居進士臣鄭旻等上䟽曰。惟東方海外一域。未嘗知有中國風敎。幸天惠我箕子。率五千殷民詩書禮樂陰陽卜筮而從。譯敎八條。變夷化俗。君臣父子五倫之敍。繄父師是賴。仁賢之化。所從來矣。高麗顯宗始立廟以祀。我恭定大王命新之。莊憲大王又命文而碑之。是皆崇奉其盛德也。盖箕子之敎。久在孔子之先。故孔子有欲居九夷之意。豈非其效耶。微箕子。吾東方其被髮左袵矣。後雖有孔子之道。其化無由入矣。吾東民知尊孔子。而不知尊箕子。可乎。若然。崇奉箕子。必若孔子之備禮。然後爲無闕也。臣等嘗竊考史家。箕子之世傳四十一。而至準爲燕人衛滿所逐。爲國於韓。上下餘千載。文不足徵。然以鮮于氏爲箕子後者。載於韻府羣玉于字部。書於綱目鮮于輔註。雜出於氏族大全後漢魏略翰墨全書。胡元時有鮮于樞者。遺趙孟頫震琴。其謝詩曰。箕子之後多髯翁。才猷邁俗驚愚蒙。則鮮于氏之爲箕子後章章明矣。馬韓末有孱孫三人。曰友親。其後爲韓氏。曰友平。其後爲奇氏。曰友諒。入于龍岡烏石山家焉。其子孫以籍。鮮于氏之在中國者。旣爲箕子後。則在東方者獨非其苗裔耶。箕子之子孫。若蒙其子姓。則後世亦必有承其氏者。某地未嘗聞有曰子姓者。以國氏者只有本道之鮮于。則所謂鮮于氏者。庸詎非箕子後而誰也。高麗王氏統三爲功。子孫世官而享之。箕子則但與檀君,赫居,東明,溫祚。竝受其始祖之祀。至今主祀無其人。豈非有國者缺典乎。臣等之所痛恨者此也。往者本道人。有以此事上請。事寢不行。乃今者有鮮于寔者。去泰川來居箕子殿側已十年矣。夫以箕子之苗孫。乃同編戶。反不如王氏之子孫。臣等竊愍惜之。伏願如衍聖公崇義監故事。事下禮曹。判書臣申欽等啓復曰。吾東文明之敎。秋毫皆箕子賜也。崇奉之典。固不可闕。更議酌行。大臣議之。遂下牒于平安道觀察使臣崔瓘狀列曰。今玆鮮于氏。爲箕子之後之說。不惟一道士民所共稱。古子史班班可見。而况鮮于氏者又在箕城。本道遺民。請立其祀主。其言不可廢也。事下禮曹。判書臣申欽等又上復曰。本道士民。皆以鮮于氏爲箕子後。其祀典則國家已廟而禮之。惟立後倣王監獨未耳。然祖宗朝所未遑。而刱設一朝。玆事軆大。請令大臣議之。命下。相臣李元翼等以爲鄕微箕子。我東其夷矣。至高麗中葉。乃始建廟。則我朝以上闕典多矣。今若依違。猶夫昔也。且旻等之䟽。藩臣之狀。有據有徵。合依崇義殿爲宜。敎曰可。申欽等又啓曰。箕子殿一如崇義殿故事。殿號則大提學上之。其子孫之爵亦王監是視。令吏曹事之。於是。命揭殿曰崇仁。官鮮于寔爲監。世授之。銘曰。

粤殷太師。明夷自靖。天智之焚。錫範周聖。義罔臣僕。卷懷而東。八條軌民。仁賢之風。革夷而夏。繄天其賜。歷世四十。國以千禩。惟厥盛德。百世祀之。洎廟于唐。宗元有碑。矧我鰈域。周封之舊。箕壤遺民。肇基是守。金火遆遷。陵寢猶昔。天其祐之。不沫聖迹。父師之化。萬古一日。於赫昭代。肸蠁罔缺。不壇而屋。有光麗氏。克載于碑。禮物兼備。亹亹我王。益隆祀典。揭以崇仁。乃顔其殿。官其苗裔。守祧是修。式是三恪。與國咸休。祼薦孔時。明德惟馨。爰斵樂石。垂後于銘。稽古崇德。不顯其光。仁祠聖澤。浿水洋洋。

월사집 제45권 / 비(碑)

기자묘비명(箕子廟碑銘) 병서(幷序) ○ 응제(應製)

은(殷)나라가 망했을 때 세 사람의 행실이 같지 않았으나 공자는 병칭(竝稱)하여 삼인(三仁)이라 하였고, 주자(朱子)는 “이 세 사람이 처지가 서로 바뀌었다면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기자(箕子)가 주(紂)에게 충간(忠諫)한 것은 비간(比干)보다 먼저였는데 주가 수금(囚禁)하고 죽이지 않은 것은 하늘이 한 것이고, 무왕(武王)이 다른 나라에 봉(封)하지 않고 조선에 봉한 것도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하늘이 하도(河圖)를 복희씨(伏羲氏)에게 주었으나 팔괘(八卦)의 변화가 그래도 드러나지 않았고 문왕(文王)이 수감되어 비로소 역(易)을 연역하였으며, 하늘이 낙서(洛書)를 우(禹) 임금에게 주었으나 구주(九疇)의 수(數)가 그래도 밝혀지지 않았고 기자(箕子)가 곤액(困厄)을 당하여 비로소 홍범(洪範)을 서술하였습니다. 천인(天人)의 묘리(妙理)가 이에 크게 밝혀지고 제왕의 정치의 대경(大經)ㆍ대법(大法)이 천하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령 문왕이 역(易)을 연역하지 않고 기자가 홍범을 서술하지 않았다면 하도와 낙서는 단지 일개 구멍이 뚫리지 않은 혼돈(混沌)일 뿐이었을 것이니, 하늘이 복희씨와 우 임금에게 이를 준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게다가 하늘이 증민(蒸民)을 냄에 반드시 성현을 탄생시켜 임금과 스승을 만들어 삶을 이루어 주고 교화를 세워 주었으니, 복희씨, 헌원씨(軒轅氏), 요(堯), 순(舜)이 중국을 교화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동방은 비록 외진 곳이지만 사람들은 역시 천민(天民)입니다. 그러나 단군(檀君)으로부터 인문(人文)이 계명하지 못하여 무지몽매한 상태였으니, 혹여 기자의 팔조(八條)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끝내 오랑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기자가 동방을 교화한 것은 복희씨, 헌원씨, 요, 순이 중국을 교화한 것과 같은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늘이 기자를 죽이지 않은 것은 세상에 도(道)를 전하기 위해서였고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서였으니, 가령 기자가 죽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지 않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그렇고 보면 기자가 사도(斯道)에 끼친 공로는 실로 천하만국(天下萬國)이 다 함께 도움을 받는 것인데 직접 그 가르침을 받은 은덕은 우리 동방이 가장 많았습니다. 삼한만세(三韓萬世)에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게 한 그 공덕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공자(孔子)의 도가 비록 더없이 크지만 만맥(蠻貊)의 나라에는 교화가 미치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기자가 동방을 교화한 것은 공자가 탄생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공자가 심지어 승부(乘桴)ㆍ욕거(欲居)의 뜻이 있었던 것이니, 예의와 문명의 교화의 소종래(所從來)가 오래입니다. 가령 기자의 교화가 있지 않았다면 후대에 비록 공자의 도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 교화가 어찌 쉽게 먹혀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고 보면 우리나라가 기자를 숭배하고 그 은덕에 보답하는 예(禮)는 응당 공자와 같은 수준으로 높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향사(享祀)하는 곳이 많지 않고 그 후손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 어찌 때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 되는 해인 만력(萬曆) 신해년(1611, 광해군3)에 본도(本道)의 선비 정민(鄭旻) 등이 항소(抗疏)하여 말하기를, “사서(史書)에 의하면 기자 이후 41대(代) 만인 준(準)에 이르러 위만(衛滿)에게 축출되었으며, 마한(馬韓) 말엽에 잔손(孱孫) 세 사람이 있었는데 친(親)은 후대에 한씨(韓氏)가 되었고 평(平)은 기씨(奇氏)가 되었고 량(諒)은 용강(龍岡) 오석산(烏石山)에 들어가 선우(鮮于)에게 계통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 세계(世系)는, 운서(韻書)에서는 ‘선우는 성찬자성(姓簒子姓)에 의하면, 주(周)나라가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封)하였고 그 지자(支子)인 중(仲)이 우(于) 땅을 식읍으로 받았기에 선우를 씨(氏)로 삼게 되었다.’ 하였고, 강목(綱目)에서는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고 그 아들이 우 땅을 식읍으로 받았기에 선우를 성(姓)으로 삼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맹부(趙孟頫)가 선우추(鮮于樞)에게 준 시에 ‘기자의 후손에 구레나룻 좋은 노인 많아라.〔箕子之後髥翁多〕’ 하였으니, 선우가 기자의 후손임은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지 않겠습니까? 홍무(洪武) 연간에 선우경(鮮于景)이란 사람이 중령별장(中領別將)이 되었고 그 7대손(代孫) 식(寔)이 태천(泰川)에서 와서 기자묘(箕子廟) 곁에 산 지가 어언 10년이 되었습니다. 청컨대 식(寔)에게 기자의 제사를 맡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그 일을 중히 여겨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자문하게 하는 한편 본도(本道)로 하여금 식(寔)을 탐방하고 복계(覆啓)하게 한 결과 모든 사실이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정 의론이 모두 찬성하여 드디어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임자년(1612) 봄에 어명으로 사당에 ‘숭인(崇仁)’이란 전호(殿號)를 걸었고, 선우씨에게 벼슬을 내려 식(寔)을 전감(殿監)으로 삼고 자손들이 이 벼슬을 이어받게 하였습니다.

옛날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황제(黃帝)와 요(堯)ㆍ순(舜)의 후손을 찾아 세워서 삼각(三恪)으로 삼아 그 선조의 제사를 모시게 하였으니, 성인의 숭덕계절(崇德繼絶)의 뜻은 천고에 걸쳐 다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부윤(府尹)에게 명하여 묘소를 증축하고 사우(祠宇)를 수리하였으며 제전(祭田)과 수호(守戶)를 증설하여 제수를 공급하고 청소를 하게 하였습니다. 또 무릇 성(姓)이 선우인 사람은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고 군적(軍籍)에 넣지도 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기자의 사당 아래 모여 살게 하는 한편 근신(近臣)을 보내 향을 가지고 가서 사당에 축제(祝祭)하여 고유(告由)하게 하였으니, 기자를 존숭하는 예전(禮典)이 이에 이르러 더할 나위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이륜(彝倫)을 부식(扶植)하고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일대(一大) 기회인 것입니다. 아아, 성대합니다.

당초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에 본도의 선비들이 성사(聖師)의 유택(遺澤)을 존모하여 부(府)의 서남쪽 창광산(蒼光山) 아래 서원을 세우고 강당을 설치하여 이름을 홍범서원(洪範書院)이라 하여 유생들이 성사를 흠숭(欽崇)하고 도학을 강명(講明)하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무신년(1608, 선조41) 겨울에 인현서원(仁賢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았습니다.

이에 이르러 관찰사 정사호(鄭賜湖)가 조정에 보고하기를, “지금 기전(箕殿)에 명호를 걸고 후손을 세워 치제(致祭)하게 한 것은 수천 년 이래 없었던 성대한 일입니다. 이 지역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부사(父師)의 문명의 교화를 다시 입은 것처럼 기뻐 용동(聳動)하며 모두 이 사실을 비석에 새겨 크나큰 경사를 기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유신(儒臣)을 시켜 전후의 사적을 기술하여 사람들이 눈으로 우러러보고 무궁한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이에 전하께서 좋다고 하시고 신에게 명하여 사적을 서술하게 하셨습니다. 신은 마침 예관(禮官)이라 이 일을 의논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세상에 드문 예전(禮典)을 목도했던 터이므로 명을 받고 황공하여 감히 문사(文辭)가 천루(淺陋)하여 이러한 큰 글을 지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삼가 머리 조아려 절하고 명(銘)을 바칩니다.

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이 큰 법을 내려 주시니 / 天錫大範

우 임금께서 그것을 본받으셔서 / 神禹則之

은사이신 기자에게 전해졌어라 / 以傳殷師

은사께서 뒤이어 출현하시니 / 殷師嗣興

그 감춰진 뜻이 드러나서 / 蒙難乃闡

인문이 비로소 밝아지게 됐네 / 人文始顯

이에 이륜의 이치를 펼쳐서 / 爰敍彝倫

성인의 물음에 대답하셨으니 / 以承聖問

이는 바로 상제의 가르침이어라 / 寔維帝訓

이미 무왕의 스승이 되시어 / 旣師武王

백성들의 표준을 내려 주시고 / 錫民之極

의리상 신하로 섬기지 않으셨지 / 義罔臣僕

하늘과 땅의 변화에서 / 天地變化

그 바른 이치를 얻어서 / 我得其正

명이로 자정하였어라 / 明夷自靖

이에 동토를 돌아보시고 / 乃睠東土

이에 사도를 미루어 폈으니 / 乃推斯道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 / 實天所造

먼 곳도 없고 누추한 곳도 없어 / 無遠無陋

팔조의 법으로 교화를 펴시어 / 八條以化

오랑캐를 중화로 변화시키셨네 / 變夷爲夏

그 어진 덕이 피부에 스며들어 / 仁涵于膚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으니 / 道不拾遺

예의가 잘 구현된 치세였었지 / 禮義之治

위대하여라 그 성대한 덕이여 / 巍乎盛德

백세토록 길이 흠앙하나니 / 百世以欽

그 은덕이 지금까지 이어지도다 / 受賜到今

패수의 서쪽 기슭에는 / 浿水西涯

정전의 옛터가 남아 있으니 / 不沫井洫

신성한 자취가 엊그제 일 같아라 / 神迹如昨

고려 때 사당을 처음 지었으나 / 肇祠于麗

예식이 잘 갖추어지지 못했고 / 禮式不備

세월이 갈수록 해이해졌어라 / 寢遠以弛

저 아득한 성인의 계통은 / 遙遙聖緖

후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나 / 不絶來雲

지파가 흩어지고 나뉘었었지 / 派散支分

밝으신 우리 임금께서는 / 惟明我后

홍범을 따라 큰 법도를 세우고 / 遵範建極

멀리 전승이 끊어진 학문을 이으셨네 / 遠紹絶學

이에 사당에는 아름다운 명호가 있고 / 殿有美號

서원에는 빛나는 사액이 걸렸으니 / 院有華額

더욱 빛나고 또 성대해졌도다 / 益光且碩

후손을 세워 끊어진 계통을 잇고 / 立後繼絶

대대로 작록을 세습게 하셨으니 / 永襲世爵

이것이 바로 삼각이라네 / 式是三恪

사당에 특별한 향사를 모시니 / 特祀于廟

희생은 살지고 술은 향긋해 / 牲肥酒香

예의가 가득 넘쳐 흐르도다 / 禮意洋洋

훌륭하여라 우리 왕이시여 / 猗歟我王

성인의 가르침을 이으셔서 / 聖謨其承

이 나라의 중흥을 이룩하시고 / 賁我中興

실추된 예전(禮典)을 모두 정비하니 / 墜典畢擧

그 의식의 법도가 찬란하여 / 縟儀彬彬

천고에 면모를 일신하였어라 / 千古一新

아아 빛나게 드러나지 않으랴 / 於乎不顯

문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 文在於玆

영원토록 사람들 사모하리라 / 沒世之思

[주-D001] 구멍이 …… 혼돈(混沌) : 중앙의 제(帝)인 혼돈이 남해(南海)의 제인 숙(儵)과 북해(北海)의 제인 홀(忽)을 융숭히 대접하자, 숙과 홀이 이에 보답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음식을 먹고 숨을 쉬는데 이 혼돈은 그것이 없으니, 뚫어 주어야겠다.” 하고, 하루에 구멍 하나씩을 뚫으니 7일 만에 혼돈이 죽었다 한다. 《莊子 應帝王》

[주-D002] 승부(乘桴)ㆍ욕거(欲居) : 공자가 동방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는 뜻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는 “공자가 ‘도가 행하지 않는지라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리라.〔道不行 乘桴 浮于海〕’ 하였다.” 하였고 〈자한(子罕)〉에는 “공자께서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 하셨다.〔子欲居九夷〕” 하였다. 여기서 구이는 동이(東夷)를 가리킨다고 본다.

[주-D003] 삼각(三恪) : 주(周)나라 때 세 제후국(諸侯國)으로, 무왕(武王)이 천하를 통일한 뒤 황제(黃帝)와 요(堯)ㆍ순(舜)의 후손을 제후로 봉하여 황제와 요ㆍ순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이들을 공경한다는 뜻에서 삼각이라 하였다.

[주-D004] 숭덕계절(崇德繼絶) : 덕(德)을 숭상하고 지난 왕조(王朝)나 제후의 끊어진 세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게 해 주는 것이다. 《論語 堯曰》

[주-D005] 이에 …… 대답하셨으니 :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이륜(彝倫)을 펴는 이치에 대해 물었고, 이에 기자가 대답한 것이 홍범구주(洪範九疇)이다. 《書經 洪範》

[주-D006] 의리상 …… 않으셨지 : 기자는 은나라의 신하이므로 주나라 무왕을 임금으로 섬길 수는 없었다는 뜻이다.

[주-D007] 명이(明夷) : 군자가 소인에게 해침을 당하는 어려운 때를 만나 정도를 굳게 지키는 것이다. 《주역》 명이괘(明夷卦)에 “명이는 어려울 때에 정도를 지킴이 이롭다.〔明夷 利艱貞〕” 하였다.

[주-D008] 먼 …… 없어 : 성인이 살면 아무리 문명이 미개한 변방일지라도 교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공자가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자 하자 혹자가 “누추하니 어떻게 살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공자가 “군자가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君子居之 何陋之有〕” 하였다. 《論語 子罕》

[주-D009] 패수(浿水)의 …… 있으니 : 평양성(平壤城)의 남쪽에 은나라의 기자(箕子)가 와서 실제로 정전(井田)을 구획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주-D010] 성인의 …… 이룩하시고 : 무왕(武王)이 폭군 주(紂)를 정벌했듯이 인조(仁祖)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反正)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주-D011] 문(文)이 …… 있으니 : 문은 사도(斯道)를 뜻한다. 공자가 “문왕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문이 이 몸에 있지 않은가.〔文王旣沒 文不在茲乎〕” 하였다. 《論語 子罕》

月沙先生集卷之四十五 / 碑

箕子廟碑銘 幷序應製。

殷之亡也。三人之行不同。而孔子竝稱三仁。朱子以爲易地則皆然。臣竊嘗以謂箕子之諫紂。在於比干之先。而紂之囚而不殺。天爲之也。武王之不封於他方。而封於朝鮮。亦天也。何者。天以河圖授伏羲。而八卦之變猶未著。文王囚而始演易彖。天以洛書授神禹。而九疇之數猶未明。箕子厄而始敍洪範。天人之妙。於是大明。而帝王爲治之大經大法。得傳於天下後世。使文王不演易。箕子不敍疇。則河之圖洛之書。特一未竅之混沌耳。天之授羲,禹。豈端使然哉。茲非天意而誰歟。且天生蒸民。必降聖賢。作之君作之師。以遂其生。以立其敎。羲軒堯舜之敎中土是已。我東雖僻。亦天民也。而曰自檀君。人文未彰。泯泯棼棼。倘微箕子八條之敎。則終未免爲左袵之歸。箕子之敎東方。是猶羲軒堯舜之敎中土。蓋有不可得而已者。此又非天意而誰歟。天之不死箕子。爲傳道也。爲化民也。箕子雖欲死。得乎。武王雖欲不封于朝鮮。得乎。然則箕子之有功於斯道。實天下萬國之所共賴。而其親炙之恩。則吾東國最偏受。三韓萬世。人得以爲人。之功之德。爲如何哉。孔子之道。雖大而無外。蠻貊之邦。猶有所不化。箕子之敎東方。在孔子未生之前。故孔子至有乘桴欲居之志。禮義文明之化。其所從來久矣。倘使箕子之敎。不有以先之。則後雖有孔子之道。其化豈易以入哉。然則我國崇報之禮。當與孔子竝隆。然而享祀之制不廣。立後之典尙闕。誠欠事也。豈亦有待歟。我殿下嗣服之三年萬曆辛亥。本道士人鄭旻等抗疏言。史稱箕子之後傳四十一。而至準爲衛滿所逐。馬韓末有孱孫三人。曰親。其後爲韓氏。曰平。爲奇氏。曰諒。入龍岡烏石山。以傳鮮于。世系韻書曰。鮮于子姓。周封箕子于朝鮮。支子仲食采於于。因氏鮮于。綱目稱箕子封於朝鮮。其子食采於于。因姓鮮于。趙孟頫贈鮮于樞詩曰。箕子之後多髥翁。鮮于之爲箕子後。不旣章明較著乎。洪武間。有鮮于景者爲中領別將。其七代孫寔。自泰川來居殿側今十年。請以寔守箕子祀。殿下重其事。命禮官詢于大臣。且令本道採訪覆啓。事皆有據。廷議咸以爲可。遂以鮮于氏。定爲箕子後。至明年壬子春。命揭殿號曰崇仁。官鮮于。寔爲殿監。子孫世授焉。昔周武王求黃帝堯舜之後。立爲三恪。以奉其祀。聖人崇德繼絶之意。可謂千載一揆也。且命府尹封墓道修祠宇。增置祭田及守戶。使之供粢盛備洒掃。凡姓鮮于者復其家。毋籍于軍。俾聚居祠下。仍遣近臣。齎香祝祭于廟。以告厥由。尊崇之典。至是而無復遺憾。此實扶植彝倫。挽回世道之一大機會。嗚呼盛矣。始萬曆丙子。本道士子慕聖師之遺澤。立書院於府西南蒼光山下。設講堂。名曰洪範。以爲多士欽崇講明之所。歲戊申冬。命扁額曰仁賢。至是觀察使鄭賜湖上聞曰。今茲箕殿揭號。立後致祭。是數千年來所未有之盛擧。一域臣民。擧歡欣聳動。有若重被父師文明之化。咸願勒之貞珉。以揚閎休。乞命儒臣備述前後事迹。庶幾表著觀瞻。傳示無極。殿下曰可。遂命臣敍之。臣適忝禮官。與聞末議。而獲覩曠世之典。承命秪慄。不敢以文辭淺陋。不足以自效爲解。謹拜手稽首而獻銘。銘曰。

天錫大範。神禹則之。以傳殷師。殷師嗣興。蒙難乃闡。人文始顯。爰敍彝倫。以承聖問。寔維帝訓。旣師武王。錫民之極。義罔臣僕。天地變化。我得其正。明夷自靖。乃眷東土。乃推斯道。實天所造。無遠無陋。八條以化。變夷爲夏。仁涵于膚。道不拾遺。禮義之治。巍乎盛德。百世以欽。受賜到今。浿水西涯。不沫井洫。神迹如昨。肇祠于麗。禮式不備。寢遠以弛。遙遙聖緖。不絶來雲。派散支分。惟明我后。遵範建極。遠紹絶學。殿有美號。院有華額。益光且碩。立後繼絶。永襲世爵。式是三恪。特祀于廟。牲肥酒香。禮意洋洋。猗歟我王。聖謨其承。賁我中興。墜典畢擧。縟儀彬彬。千古一新。於乎不顯。文在於茲。沒世之思。

청주한씨 세보[ 淸州韓氏 世譜 ]

정의

조선시대 문신 한효중과 한혁 등이 1617년에 간행한 청주한씨의 족보.

내용

분량은 불분권 1책이며, 표제와 판심제 모두 “청주한씨세보”이다. “황명 만력 사십오년 정사 초봄에 서원의 보살사에서 개간했다(黃明萬曆四十五年丁巳孟春西原菩薩寺開刊)”는 간기에 따르면, 1617년 청주의 보살사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칭은 편의상 ‘청주한씨 만력보(萬曆譜)’ 또는 ‘청주한씨 정사보(丁巳譜)’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크기는 반곽이 가로 23.5cmx 세로 26cm이며, 서발문, 범례, 부록은 항자수부정(行字數不定),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선장(線裝), 저지(楮紙)이다.

체제는 표지(表紙), 청주한씨전대사적(淸州韓氏前代事蹟), 반시당기(返始堂記), 청주한씨시조유기서사비(淸州韓氏始祖遺基叙事碑), 발문(跋文), 왕후세계(王后世系), 본문에 해당하는 보도(譜圖), 간기(刊記)로 구성되어 있다.

청주한씨전대사적은 시조 한란(韓蘭) 이하 한강(韓康), 한사(韓謝), 한악(韓渥), 한방신(韓方信), 한수(韓脩), 한상질(韓尙質), 한명회(韓明澮), 한충(韓忠) 등 현조(顯祖)들의 사적으로 「위지(魏志)」, 『고려사(高麗史)』, 『목은집(牧隱集)』, 『사가집(四佳集)』 등에서 자료를 발췌 · 수록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청주한씨는 선우씨(鮮于氏), 기씨(奇氏)와 함께 기자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시조 한란의 사적 역시 기자(箕子)의 후손임을 강조하는데 주안점이 있다.

여기에 대해 본 족보의 찬자는 위지의 “기자의 후손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축출되어 마한을 건국하면서 자손들이 한(韓) 성(姓)을 가지게 되었다는 기록과 기자의 자손 중 우평(友平)의 후손은 선우씨, 우량(友諒)의 자손은 한씨, 우성(友誠)의 자손은 기씨가 되었다”는 기록을 인용하여 한씨가 기자에서 출자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반시당기」는 1607년(선조 40) 청주목사 한백겸(韓百謙)이 시조 한난을 위해 재당(齋堂)을 건립하고 지은 기문이다. 기문에 따르면, 한백겸은 재당 건립 이전인 1605년(선조 38)에 이미 시조의 제단과 기적비를 세운 바 있으며, 재당의 건립은 그 연장 선상에서 이루어진 위선 사업이었다. 「청주한씨시조유기서사비」는 한백겸이 세운 기적비의 비문으로 찬자는 한준겸(韓浚謙)은 한백겸의 동생이다.

발문은 모두 2종인데, 족보 간행을 주관한 한혁과 한효중이 1617년에 지은 것이다. 발문에 따르면, 당시 청주한씨는 일부 보첩(譜牒)이 전해지고 있었지만 각 지파의 파보(派譜)에 불과하였고, 이마저도 공간된 것은 없었다고 한다.

이에 청주목사 한효중이 한혁에게 족보 간행을 요청하자 한혁은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제공한 초보(草譜)와 한효중이 작성해 둔 호서지역 자손들의 초보를 정밀하게 교감하는 한편 보단(譜單)을 두루 수렴하여 간행을 완료한 것이다.

물론 간행 논의는 청주에서 일어났지만 한효순의 주선하에 경향의 동종들이 여기에 적극 참여함으로서 내용의 충실성을 기할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 간행 경비는 한효중이 대부분 부담하고 일부 호서지역 동종들이 여기에 보조하였으며, 간역의 실무는 한혁, 한담(韓潭), 한순립(韓純立), 한급(韓岌) 등 주로 청주지역 인사들이 담당하였다.

한편 발문 뒤에 있는 왕후세계는 한씨가문에서 배출된 역대 왕비들의 명단으로 모두 16명이 수록되어 있다. 청주한씨는 여흥민씨와 더불어 왕후를 많이 배출하기로 이름난 가문이었는데, 여기에는 우리나라는 물론 2명의 명나라 황후도 포함되어 있다.

기록 방식은 누구의 딸이라 기록한 다음 항을 바꾸고 1자 대두하여 모왕(某王)의 모후(某后)라 표기하였는데, 예컨대 예종비 장순왕후의 경우에는 “한명회녀”(韓明澮女) “예종대왕비장순왕후”(睿宗大王妃章順王后)라 표기하였다.

보도는 7층 횡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맨 앞에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라 판각되어 있다. 자표(字標)는 다른 족보와 마찬가지로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매겨져 있다. 이 족보는 청주한씨 중에서도 시조의 8세손 한악의 2자 공의(公義)→수(脩) · 리(理) 계열, 4자 공연(公衍)→주(柱) 계열, 5자 공신(公信)→휴(休) · 영(寧) 계열을 중심으로 수록되어 있다.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는 한수(韓脩)의 증손이며, 족보 간행에 참여한 한급(韓岌)은 한명회의 5세손이다. 선대의 위선사업은 물론 본 족보 간행을 사실상 주도했던 한효순과 한백겸형제는 한수의 3자 한상경의 6세손과 7세손이다.

자손의 총 수록대수는 시조로부터 대략 21-23대이다. 자녀는 선남후녀(先男後女)에 따라 수록하되 사위만 기록하고 외손은 전혀 수록하지 않았다. 다만 왕후세계는 내외손을 막론하고 별판에 수록하였는데, 이는 왕실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서자녀는 이름 위에 서자(庶子) · 서녀(庶女)라 표기하였고, 계후한 경우에는 계자(繼子)라 표기하여 적서와 출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각 인물의 주기는 상대로 올라갈수록 자세하고, 아래로 내려 올수록 소략한 편이다. 예를 들어 한명회는 자(字), 관직(官職), 군호(君號), 시호(諡號), 묘소 위치 등이 배위(配位)의 성관(姓貫)과 봉호(封號) 등이 상술된 반면 그 이하로는 관직만 약술된 경우가 많다.

한편 말미의 간기에는 한효순 등 족보 간행 주관자의 명단은 물론 각수(刻手)들과 서리들의 명단까지 기록되어 있어 서지학적으로도 매우 중요시된다.

이 족보는 조선초기 최고의 문벌을 자랑했던 청주한씨족보의 초간본이라는 점에서 일차적인 중요성이 있다. 그리고 전반적인 체제와 수록 방식이 다른 족보와는 차이점이 있고, 왕실관련 기록에 커다란 비중을 두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만 자녀를 선남후녀에 따라 수록하고 외손을 생략했다는 점에서는 자료적 가치에 있어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기자의 후손설 이다.

먼저 대종중의 공식적인 입장인 기자후손설을 살펴보자.

2003년에 대종중홈페이지를 만들면서 내가 정리한 기자조선과 기씨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1120년경 은(殷)나라의 종친(宗親)인 자서여(子胥餘)는 기국(箕國)의 자작(子爵)으로 있으면서 기자(箕子)라 불리었으며 미자(微子), 비간(比干)과 함께 은나라 말기(末期)의 세명의 어진 사람이었다.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방탕한 생활로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 기자(箕子)는 간곡히 말렸으나 주왕은 듣지 않았고 기자는 머리를 풀고 미친척하고 돌아다니다 주왕에 의하여 감옥에 갇히었다. 새로 일어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패권(覇權)을 잡은 후에 감옥에 있는 기자를 풀어주자 기자는 은나라의 종친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적군에게 구원된 것이 부끄러워 따르는 무리 오천여명과 함께 조선으로 왔다. 이때 따라온 사람들은 100가지 기술을 가진 기술자와 학자들이었다. 처음 조선에 들어와 길쌈, 누에치기 등의 문명과 학문을 가르쳤고 8조의 금법(禁法)을 시행하였다. 기자가 조선으로 간 사실을 전해들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기자를 조선에 봉(封)하였고 봉함을 받은 기자는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기 위하여 조관(朝觀)을 왔고 이때 무왕에게 홍범(鴻範)을 설명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은나라의 옛 궁궐터를 지나며 잡초만 무성한 것을 보고 맥수가(麥秀歌)를 지어 불렀다. 또 다른 기록으로는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홍범을 설명하고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조선으로 왔다고도 한다 세월이 흘러 주나라가 쇠퇴하고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여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燕)나라 제후(諸候)가 기원전 323년에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고 이웃에 있는 기자조선을 침략하려하자 조선후(朝鮮候)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고 연나라를 마주 공격하여 주나라를 도우려 하였으나 대부(大夫) 예(禮)가 간곡히 만류하므로 예(禮)를 연나라에 보내 협상하여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였다. 차츰 기자조선왕이 중화 나라에 맞설만큼 당당하고 강성하여 졌다, 연나라가 가장 전성기인 기원전 311년에서 279년 사이의 소왕(昭王) 때에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서쪽 변두리의 땅 2천여리를 빼앗기고는 마침내 약화되었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통일하고 서기전 214년에는 기자의 40세손 기부왕(箕否王) 시대로 강성한 진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겉으로는 복속(服屬)하는 척하고 실제로는 조회(朝會)하지 않았다. 기부왕(箕否王)이 죽고 41세손 기준왕(箕準王)이 즉위하여 20여년이 흘러 진나라가 망하고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제후국 연(燕), 제(齊), 조(趙)나라의 많은 주민들이 기자조선으로 넘어와 망명하였다. 유방의 한(漢)나라가 항우를 물리치고 황제가 된 후에 한나라의 노관(盧綰)이 제후국 연나라의 왕으로 있다가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여 흉노(匈奴)로 달아났다. 이러한 혼란기인 서기전 195년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호복(胡服)을 입고 조선의 패수를 건너와 기준왕(箕準王)에게 투항하고 살 곳을 요청했다. 기준왕은 박사(博士) 벼슬과 제사의식 때 쓰는 규(圭)를 하사하였고 서쪽 땅 일백리(一百里)를 주어 서쪽 국경을 지키며 살도록 하였다. 위만은 기존에 피난 와서 살고있는 연, 제, 조나라 출신의 주민과 한나라에서 계속 망명해오는 주민을 꾀어서 세력을 키운 후, 서기전 194년경에 기준왕에게 한(漢)나라 군사들이 열갈래로 나누어 침략해오니 도성(都城)에 들어가 왕을 보호하겠다 거짓보고하고 군사를 몰아 기준왕을 공격하였다. 기습으로 위만에게 패한 기준왕은 좌우의 궁인(宮人)들과 바다로 피신하여 마한(馬韓) 땅에 도착하여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기준왕(箕準王)을 무강왕(武康王)이라 한다. 위지(魏志) 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무강왕, 기준(箕準)의 8세손 마한(馬韓) 원왕(元王) 기훈(箕勳)에 이르러 세 아들이 있으니 우평(友平)은 용강(龍岡)으로 돌아가서 북원(北原) 선우(鮮于)씨가 되었고 우량(友諒)은 마한(馬韓)의 옛 제도에 따라 상당(上黨 ; 청주) 한(韓)씨가 되었고 우성(友誠)은 평강(平江)으로 돌아가서 덕양(德陽 ; 행주) 기(奇)씨가 되었다. 기자로부터는 49세손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溫祚王) 기록에는 우리 기(奇)씨의 선조인 마한의 유민(遺民)이 온조왕에 의하여 한산(漢山 ; 서울)의 북(北), 즉 행주(幸州)로 옮겨진 기록이 있다. 인용하면 온조왕 26년, AD 8년, 겨울 10월, (온조)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겉으로는 사냥한다 핑계 대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 금현(錦峴) 두 성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二十六年冬十月王出師陽言田獵潛襲馬韓遂幷其國邑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온조왕 27년, AD 9년, 여름 4월, 원산, 금현 두 성이 항복하므로 그 백성을 한산(漢山)의 북(北)으로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망하였다.(二十七年夏四月二城降移其民於漢山之北馬韓遂滅) 여기에서 한산의 북은 당연히 우리 기씨의 본관 행주이다. 그러나 행주(幸州)로 옮겨진 후 백제시대부터 고려 초까지의 기(奇)씨의 행적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않다. 다만, 경기도(京畿道)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행주동(幸州洞)의 행주산성(幸州山城) 안에는 우리 기씨의 조상들이 태어났다는 전설(傳說)이 깃든 기가(奇哥)바위, 사시면서 달게 맛있게 드셨다는 기감천(奇甘泉)이 있어 기록을 대신한다.

까페에 다음과 같은 토론이 있었다.

기우범 ; (기자의) 41세손 기준(箕準)이 연인(燕人) 위만(衛滿)의 침입으로 남천(南遷), 전북 금마군(金馬郡, 현 익산군)으로 옮기고, 다시 그의 8세손(마한 원왕) 기훈(箕勳)에 이르러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우성(友誠)은 덕양(德陽 : 행주)기씨, 우량(友諒)은 상당(上黨 : 청주)한씨, 우평(友平)은 북원(北原 : 평양)선우씨의 시조가 됐다. 한씨와 선우씨가 우리와 같은 시조라는 것을 알겠는데 그 형제 중 첫째가 누군가요?

기회근; 누가 큰아들인지 명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위지의 기록은 魏誌曰 箕子 子姓 其後 有曰 友平 友諒 友成 友平 因 襲 鮮于氏 歸 北原, 友諒 襲 馬韓 仍爲 上黨 韓氏, 友誠 歸 德陽 爲 奇氏, 즉 위지(魏志 : 위나라 기록)에 이르기를 기자(箕子)의 후손 중에 우평(友平)과 우량(友諒)과 우성(友誠)이 있었는데 우평(友平)은 북원(北原)에 들어가서 선우씨(鮮于氏)라 칭(稱)하고 우량(友諒)은 그대로 마한 구제(馬韓 舊制)에 따른 상당 한씨(上黨 韓氏)라 칭(稱)하고 우성(友誠)은 평강(平江)으로 들어가 덕양 기씨(德陽 奇氏)라 칭(稱)하였다고 전(傳)한다 라고해서 선우,한,기의 순서로 나옵니다. 청주한씨의 홈에 가보아도 그렇게 나오고요. 이것이 형제간의 순서라면 선우씨가 큰형, 한씨가 중간, 기씨가 막네라 할 수 있습니다.

기옥도; 내가 보유한 자료에는 元王有子三人曰長子友平,次子友誠,三子友諒,馬韓滅友平奔高句麗琉璃王朝爲北原鮮于氏,友誠降于百濟溫祚王朝爲德陽奇氏,友諒亡歸新羅上黨韓氏........ 로 되어 있는바 장자는 우평(선우씨), 둘째는 우성(기씨), 셋째는 우량(한씨)가 맞는 것 아닌가요?

기호철; 길게 이야기 하지는 않겠습니다. 누가 형이고 아우고도 없습니다. 기록마다 모두 틀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들도 신빙성을 검증하기에는 어렵구요 기자의 후손으로 기한선우 삼성을 전하는 기록은 놀랍게도 거의 없습니다.

기자의 후손에 대한 가장 믿을 수 있는 기록은 중국 진(晋)나라의 진수(陳壽:232~265)가 사찬(私撰)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 조에 보이는 것인데 (朝鮮)侯 準이 僭濫되이 王이라 일컫다가 燕나라에서 亡命한 衛滿의 攻擊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 (準王은) 그의 近臣과 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韓의 땅에 거주하며 스스로 韓王이라 稱하였다. 『魏略』에 일컫기를 ‘準의 아들과 親戚으로서 그대로 나라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그로 인하여 韓氏라는 姓을 詐稱하였다. 準이 海外의 나라에서 王이 되었으나 朝鮮과는 서로 往來하지 않았다.’ 그 뒤 (準의) 후손은 절멸하였으나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祭祀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朝鮮)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는 것이 그것입니다. 거기에서 삼국지를 지은 진수는 어권이라는 사람이 지었던 『위략』이라는 책을 인용하였는데 여기에 기자 후손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기자 후손에 대한 기록은 동서양을 모두 합하여 위략의 이 기사가 유일한 것입니다만 불행하게도 위략은 삼국지가 지어진 이후 전하지 않아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책을 간행할 때 번각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활자로 하지 않고 인쇄된 책을 나무에 붙이고 그대로 조각하여 간행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삼국지의 번각본에는 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가 魏略曰 其子友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로 잘못되어 있었고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소개된 삼국지에는 모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자의 후손 기준의 아들은 우친이라는 없던 이름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잘못은 기자를 모시는 숭인전(평양에 있음) 비문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숭인전 비문에 의하면 [만력 신해(1611, 광해군 3)년에 본도(平安道)의 사인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이 서로 잇달아 상소하여 말하기를 “역사에서 일컫기를 기자의 후손으로 41세를 전하여 준에 이르러 위만에게 축출 당하여 마한말 후손 3인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친인데 그 후에 한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평인데 기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량인데 용강 오석산(오늘날 남포직할시 용강군)에 들어갔는데 선우씨의 세계에 전합니다” (崇仁殿碑文 萬曆辛亥 本道士人 曺三省 楊德祿 鄭旻等 相繼抗疏言 史稱箕子之後 傳四十一而至準 爲衛滿所逐 馬韓末 有孱孫三人 曰親其後爲韓氏 曰平爲奇氏 曰諒入龍岡烏石山 以傳鮮于世系) ]

사실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마저도 조선으로 하였던 조선왕조는 개국초부터 기자와 기자 후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왔습니다. 변계량에 의해 기자비문을 쓰게 했다거나 성종조 왕명으로 기자 후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명종 때에 이르러 중국 원나라 시인 선우추가 쓴 시에서 “선우씨는 털이 많으니 기자의 후손이 분명하다”는 기록을 통해 국가적으로 선우씨에 대해 기자의 후손에 준하는 특혜를 부여하였는데 각종 조용조의 면제와 아울러 선우씨에 대한 특별 채용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선조 연간에는 기자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활성화되어 율곡 이이나 윤두수 등에 의해 기자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가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연구에서 기자의 후손은 언급되지 아니하였고 선우씨에 대한 기자 후손으로의 국가적 공인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선조는 여러 신하들을 인견한 자리에서 기자의 후손이 조선에 있는가를 물었고 이에 윤두수는 선우씨 한씨 기씨가 그 후손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있으나 선우씨는 중국에서 기자의 후손이 선우씨라는 전설이 있고 원나라때 시인 선우추가 쓴 시에 그런 내용이 있으나 조선의 선우씨가 그것이라고 확증할 수 없으며 한씨는 준왕이 한왕이 되었다는 이유에서 함부로 칭한 것이며 기씨는 箕와 奇가 음이 같기 때문에 나온 주장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조삼성 등의 상소 이후 기자 후손이 조선에 실재하며 그것은 기 한 선우 삼성이라는 주장은 더욱 전파되고 광해군 연간에는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공인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후 청주한씨는 최초로 만들어진 그들의 족보(석탄(石灘) 한효중(韓孝仲 : 1559 명종14-1628 인조6에 의해 편찬되었다)에서 다음의 기사를 통해 더욱 공고화 하였습니다.

箕子의 子姓은 其後에 有曰友平이요 曰友諒이요 曰友誠이니 友平은 仍襲鮮于氏하여 歸北原하고 友諒은 襲馬韓하여 仍爲上黨韓氏하고 友誠은 歸平江하여 仍襲德陽奇氏하니라.(魏誌);

箕準의 七世인 元王 箕勳에 至하여 有子三人이 各其姓을 得하니 友誠은 德陽奇氏가되고 友諒은 上黨韓氏가 되고 友平은 北原鮮于氏가 되었었다.(魏誌);

淸州韓氏의 由來는 後朝鮮인 箕子朝鮮에서 起源한다. 馬韓 元王(필자주:箕準의 7世 箕勳)의 아들 3인이 있어 友平, 友諒, 友誠이니, 나라가 衰하자 우평은 高句麗에 入仕하여 北元鮮于氏가 되고, 우량은 新羅에 입사하여 上黨韓氏 즉 청주한씨가 되었고, 우성은 百濟에 입사하여 德陽奇氏가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한씨는 모두 箕子의 後裔가 되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야기하여 한씨 족보에서 인용한 위지는 역사서가 아닙니다. 魏志라면 삼국지의 위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위의 인용대로 한다면 단순히 ‘위나라 기록에 의하면’이라는 막연한 이야기에 불과하여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해군 연간에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당시 영의정이던 만전 기자헌의 영향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통해 자세한 사항들은 추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후 숙종대에 이르러 기문의 고세계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추론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단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의 기자에 대한 기록만 검색해보아도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지영; 이덕일이라는 우리 나라 역사학자가 쓴 책에는 행주 기가, 청주 한가, 선우가가 중국인이 되고 싶어 기자라는 인물을 만들어 냈고, 우리 가문상의 시조도 기자라고 하더군요. 우리 가문의 시조는 행주 기가 우자 성자 되시는 분 아닙니까? 역사학자 조차 저런 얘기를... 또 행주 기가와 기자의 기가와는 무슨 관계인지... 단일본의 확실하고 정확한 정의를 알고 싶습니다. 우리 가문이 어떠 어떠한 상황에 부합되기에 단일본이다 하는 것을 알고 싶습니다.

기호철; 질문하신 내용은 가문의 연원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영님게서는 크게 세가지를 물으셨다고 파악합니다. 첫째 우리 기문은 중시조 기순우 할아버지를 1세로 하는데 기자와는 어떤 관련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둘째는 기자의 기(箕)씨와 우리 기(奇)씨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기자의 후손을 칭하는 기, 한, 선우씨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입니다.

첫째에 족보 체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첩되는 세계는 노사 기정진선생님께서 이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족보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구요. 둘째와 셋째에 대한 대답은 기,한,선우 가운데 누가 형이냐는 질문에 제가 답변한 내용에 있습니다. 노사 기정진 선생께서 득성조부터 65세까지를 고세계로 하고 다시 중시조 기순우 할아버지를 1세로 계보를 정리하신 뜻은 두가지 입니다. 첫째 기자의 후손이라는 설은 전해졌으나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는데 불현듯 고세계가 나타났으나 사실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는 부분과 믿기 어려운 부분을 구분한 것이 그 까닭이었습니다. 둘째는 고세계도 가문의 전승이므로 이를 후대에 전하여야 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기자의 후손인가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기자의 후손을 국가적으로 찾아 왔지만 그러지 못하다 중국 원나라 선우추의 시 구절에 '기자의 후손은 털이 많으니 선우추 그대는 기자의 후손이로다'라는 추상적인 표현을 통해 국가적인 은전을 베풀었고 실제적으로 국가로 부터 공인된 기자의 후손은 선우씨 였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한씨, 기씨, 공(孔)씨, 인(印)씨 등이 서로 기자 후손을 자처하였지만 근거는 없는 것이었으나 광해군대에 청주한씨가 족보를 처음으로 만들면서 석탄 한효중이라는 사람에 의해 기자의 후손은 기 한 선우라는 위지의 기록이 위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자의 후손이라는 전승 자체가 위조된 기록에 의존한다고 해서 모조리 무시할 것은 없습니다. 그 자체가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세계와 중시조 이하의 실제 계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은 이미 노사선생께서 확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사실보다는 기자의 후손이 역사인데 우리나라 역사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단히 상식을 벗어난 일입니다. 기자의 후손이라하며 기, 한, 선우씨가 종씨라는 전승이 있으나 상세한 것은 알기 어렵습니다. 상세하고 믿을 수 있는 세계는 고려 인종대 문하평장사를 지내신 기순우 할아버지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회근: 위조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석탄 한효중이 청주한씨 족보를 최초로 편찬한 것은 1617년입니다. 한효중의 발문을 읽어보면 족보를 편찬하면서 청주한씨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모아서 정리한 것으로 나옵니다. 청주한씨 발문을 인용하면

[을사년(1605년)에 내가 성환 독우로 있을때 마침 한백겸이 청주목사로 와서 먼저 시조 태위공의 유기를 찾아 단을 쌓고 비를 세워 후손들의 의모할 장소를 마련하는 일에 나도 참여하여 조력한바 있었다. 10년후에 다시 내가 청주읍의 성주로 금의환향하게 되어 다시 단을 개수하고 상구를 장만하여 전인이 미처 못한 것을 구비하여 놓았다. 하루는 참봉 한혁과 함께 담화하던 중 "우리 한씨가 대성으로서 세세로 명성을 떨친 것은 태위공의 덕을 쌓은 음덕인데 자손된 우리들이 지금까지 이런 생각조차도 없이 집안의 계통에 어둡고 조상의 근본까지 잊어 버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종중에 규율이 없고 가문에 족보가 없는 까닭인지라 오늘날 할 일이 이보다 더 절박한 것이 없다, 그런데 제단이나 꾸미고 선조 유업이나 추모하는 정도로 지나고 말 것인가? 여러 종인들과 더불어 광범위하게 자료를 찾아 모으고 계대의 상하 종지를 분명히 밝혀서 우리가 한 핏줄에서 태어난 한 할아버지의 자손임을 알도록 하자고 생각합니다. 여러 일가 어른들은 이 일을 같이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제안 하였더니 한혁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나 역시 여기에 뜻한 바가 있어 자료를 수집한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같이 손잡고 일할 사람이 없어서 한이었습니다. 이제 성주의 말씀이 이렇게 간곡 하시니 진실로 우리 문중의 큰 행운인지라 막중한 이 일이 우연히 되는 것도 아니고 시기도 또한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하고 즉시 서울에 가서 각 종문을 순방하면서 가첩을 수집하였다. 정승 한효순은 소장하였던 초고를 내주고 또 수록한 참고자료 한권까지도 제공하여 주었으며 나는 또 호서의 일가집 가보를 수집하여서 그 다른점 같은 점을 대조하여 바르고 틀린 점을 여러 차례 수정하였다. 자손들만 기록하고 외손까지 넣지 못한 것은 편찬이 평이하고 보기가 간명하도록 하고자 함이요, 본손만을 중히 여기고 외손을 경시한 것은 아니다. 간명하게 일부를 편찬하여 영구히 전하려고 인쇄하게 되었는데 충청도 종인 중에 가세에 따라 비용을 마련해서 조력한 분이 많았다. 창졸간에 수집한 것이라 필연코 소루하고 미비한 것이 많을 것이다. 후인들이 잘 고증하여 증보하고 삭제하기 바란다. 만력(명나라 신종의 연호)정사(서기1617년 광해군9년)이른 봄, 후손 통훈대부 행 서원현감 한효중 삼가씀]

또한 월사 이정구가 시조의 이름만 틀리고 선우한기가 기자의 후손이라는 같은 내용의 숭인전 비문을 지은 것은 1613년으로 한효중이 최초의 청주한씨 족보를 편찬하면서 위조했다는 1617년보다 4년이 빠릅니다. 한효중이 족보를 만들기 4년전에 위조한 내용을 이정구에게 주어 비문위조에 공범이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말이 않됩니다. 결론적으로 한효중은 한씨집안에 전해오는 여러 자료에 있는 이 내용을 정리하여 족보에서 공식화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정구도 시조이름이 다른 것으로 보아 한효중과는 다른 여러 전하는 자료를 참고했을 것으로 봅니다.

기호철; 한효중에 의해 위조되었다는 부분은 대단히 민감한 내용입니다. 또한 월사 이정구의 비문과의 상이성과 연대의 착오 또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먼저 구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월사 이정구가 비문에서 말한 것은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비문에는 [만력 신해(1611, 광해군 3)년에 본도(平安道)의 사인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이 서로 잇달아 상소하여 말하기를 “역사에서 일컫기를 기자의 후손으로 41세를 전하여 준에 이르러 위만에게 축출 당하여 마한말 후손 3인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친인데 그 후에 한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평인데 기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량인데 용강 오석산(오늘날 남포직할시 용강군)에 들어갔는데 선우씨의 세계에 전합니다” (崇仁殿碑文 萬曆辛亥 本道士人 曺三省 楊德祿 鄭旻等 相繼抗疏言 史稱箕子之後 傳四十一而至準 爲衛滿所逐 馬韓末 有孱孫三人 曰親其後爲韓氏 曰平爲奇氏 曰諒入龍岡烏石山 以傳鮮于世系) ]라는 부분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은 대학자 이정구가 쓴 것이니 믿을 만 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정구가 비문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로 평안도의 사인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이 계속 상소한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왕조실록에서도 이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평안도 유생 정건(鄭虔)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개는 기자(箕子)의 후예를 습봉(襲封)하도록 청하는 내용이었다.(『광해군일기)43, 3년 7월 3일] ]가 그것입니다. 실록의 정건은 정민의 착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숭인전 비문에 이정구가 인용한 상소가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의 상소 가운데 어떤 것인지는 명확치 않습니다만 그들의 상소 내용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조삼성은 윤두수가 기자지(箕子志)와 평양지를 편찬하는데 이미 참여한 경력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조선시대 기자에 대한 종합적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은 선조대였는데 윤두수의 『기자지(箕子志)』, 이이(李珥)의 『기자실기(箕子實記)』, 한백겸의 『기자유제설』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연구에서 기자의 후손이 기, 한, 선우라고 언급되지는 않았으며 또한 한씨족보에 인용된 위지의 기록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한효중 역시 언급한바와 같이 족보를 편찬하며 이미 한백겸을 만난 적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명확히 해둘 것은 최소한 광해군이 즉위하기까지 기자의 후손이 기, 한, 선우 삼성이라는 설은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대학자 고봉 기대승 선생의 손서는 청주한씨 한이겸입니다. 한이겸의 아버지는 한효중이 언급한 한효순이니 함재 기효증공의 사돈입니다. 이 한효순은 만전공 기자헌과 대립하여 이이첨과 함께 만전공을 축출하는데 중심에 섰던 인물입니다. 그럼 경연에서 선조 임금께 기자에 대한 기록의 진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던 고봉선생의 아드님깨서 청주한씨 혼인을 했다는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물론 제가 한효중이라고 했던 것은 그 편찬에 직접 책임이 있는 사람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문의 무술보가 죽림헌 등이 실제로 작업했다고 죽림헌의 족보라고 하지 않고 송암공의 족보라고 지칭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흘렀습니다만 숭인전 비문의 기, 한, 선우씨의 기자 후손설은 이정구의 학설이 아니라 이정구가 숭인전 비문을 건립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며 그런 상소까지도 있었다는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정구는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삼가 사전(祀典)에 대한 일로 아룁니다. 평양(平壤)의 기자사(箕子祠)를 숭인전(崇仁殿)으로 고치고 그의 후손을 세워 제사를 주관하게 하라고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 즉위하신 뒤로 덕을 높이고 어진이를 숭상하는 데 관계되는 법전을 수행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후손을 세우는 한 가지 일은 이제 비로소 명을 내리셨으니, 실로 2백년 동안 있지 않았던 성대한 거조입니다. …… 옛날에는 기자전(箕子殿)에 참봉이 있었는데 이제 전감(殿監)을 두었으니, 참봉은 혁파해야 될 것 같습니다. 선우씨(鮮于氏)를 이미 기자의 후예로 정하였으니,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고을에 있는 사람들을 군적(軍籍)에 편입시키지 말고 사당 아래 모여 살면서 제사를 받들게 하소서.”하니, 따랐다. (『광해군일기) 52, 4년 4월 27일] ]고 하여 기, 한, 선우 삼성 가운데 선우씨의 기자 후손설만이 받아들여진 당시의 상황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선우식, 선우협 등이 대대로 기자의 후손으로 국가의 은전을 받아왔습니다.

그럼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의 상소에 있는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조삼성은 이미 윤두수의 기자지 편찬에 참여한 인물이었음을 지적한바 있었습니다. 윤두수의 기자지에는 기자 후손이 기한선우 삼성이며 위지에 그런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거나 알았다하더라도 애써 무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위의 상소에서 그 내용이 선우씨의 세계에 의존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만 저는 아직 이것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종때에는 기자의 세계가 40대였고, 선조 무렵에는 41대로 영조대에는 42대로 변화하며 그 내용도 차츰 달라지고 더욱 정확해졌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와 윤두수 역시 기자 41대 928년을 공통적으로 논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는 이것이 주된 학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부정확한 당시의 연구에 불과합니다. 기자의 성을 자(子)씨로 고증한 것이 그것입니다. 당시 조선에 소개되지 않았던 중국측의 자료와 목간 등을 통해 기자의 성이 희(姬)씨라는 사실이 추후 밝혀졌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확증하기는 어려우나 조삼성은 광해군 7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만전정승의 과거 영향력 행사로 부정의 논란이 있었다는 점도 주지해 볼 사실입니다. 또한 양덕록 역시 음직을 얻었던 것도 전혀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까운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봉 선생의 후손과 만전정승 일가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음은 선후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외적으로 선후 관계는 그렇습니다만 한효중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청주한씨족보는 1605년(을사:선조3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한효순의 초고는 최소한 1615년 이전에 편찬되었습니다. 그것은 한효순이 이때 죽었기 때문입니다. 편찬이 완료된 시점이 1617년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서적의 편찬은 수십년을 두고 여러 사람이 서로 살피며 출판하게 됩니다. 미암 유희춘 역시 그의 서적을 출간하기 위해 고봉선생께도 두 차례, 율곡선생께도 한 차례 이를 보내 교감을 받았던 것이 미암일기에 상세한 것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위조의 진위 여부는 평가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모두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적하신 바와같이 그런 기록이 있었고 이것이 취합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십년만에 느닷없이 풍성한 기록이 홍수처럼 쏟아졌던 것은 당시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기회근 한효중의 조작이라기 보다는 정리라고 해야 옳타고 봅니다.

기호철 출처를 제대로 밝혔다면 정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위지라고 한 것은 그것을 믿도록 호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조작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미처 기입하지 못하였지만 조작의 증거는 더 있습니다. 이는 선조께도 누가 되므로 여기서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기회근 글의 뜻은 기자헌과 한효중 혹은 한효순이 정치적으로 정적관계지만 합심하여 시조를 조작했다는 것이군요. 기자헌이 조삼성을 사주하는 것을 본 것처럼..

기호철 기자의 후손에 대한 설은 이미 있었습니다만 신빙성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없는 기록인 위지 등을 통해 사실처럼 호도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라는 이야기 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다름 아닌 군역의 문제입니다. 이를 논하다 보면 집안의 숨겨진 것을 모두 밝혀야 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군역은 양반이면 당연히 부담하지 않아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언급하면 족보에 숨겨진 것까지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전정승께서는 김시양에게 가계 기록의 문제점을 스스로 고백한 일이 있었고 이는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기회근; 해서문중에 대하여는 족보와 다음 기록으로 알 수 있습니다.

崇仁殿碑銘

古 4657-28 편자미상, 18세기 이후. 1책(17장), 필사본, 36 x 23.5 cm. 淸州 韓氏 집안에서 자신들의 系譜에 타인이 끼어든 것을 증빙하기 위하여 편찬한 책. 崇仁殿은 箕子의 位牌를 모신 전각으로서 고려 때인 1325년(충숙왕 12)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平壤에 있다. 崇仁殿碑는 1613년(광해군 5)에 세운 것으로서 비문은 李廷龜(1564-1635)가 撰하였다. 그러나 정작 비가 세워진 것은 24년 뒤인 1637년(인조 15)의 일이다. 본서는 서두에 崇仁殿碑를 전재하고, 이어서 2 건의 문서를 수록하였다. 하나는 萬曆 45년(1617:광해군 9)에 평안도 지역의 청주 한씨들이 자신들 역시 기자의 후예이므로 鮮于氏의 예에 의거하여 軍役을 면하여 줄 것을 청하여 허락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康熙 3년(1664:현종 5)에 幸州 奇氏들이 역시 기자의 후예임을 내세워 군역의 면제를 청하여 허락 받은 것이다. 이어서 수록된 淸州韓氏前代事蹟은 韓德龍이 찬한 것으로서 청주 한씨를 기자의 계보와 연결시킨 것이다. 먼저 중국의 黃帝에서 殷王 成湯을 거쳐 朝鮮, 馬韓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정리하였다. 여기서 馬韓의 元王의 아들인 友諒이 新羅로 망명하였고 脫解王이 그를 淸州에 分封하여 이로부터 청주 한씨가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현재 자신의 집안까지 이어져 왔음을 서술하였다. 이어서 한덕룡이 쓴 서문을 수록하였는데, 그 내용은 족보를 간행할 때 友三.仲三이라는 자가 6대조인 璡의 아래에 자기들의 祖父를 삽입하였으므로 이를 수소문하였으나 찾지 못하였고, 이에 지난 辛巳年(연기미상)에 法에 陳告하여 營題(감사의 확인서)를 받아 두었으며, 이번에 碑銘을 重修할 때 前冊에 의거하여 踏印해 둠으로써 다음번 族譜를 重修할 때 증빙으로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청주 한씨의 시조인 韓蘭으로부터 이어지는 계보를 정리하였다. 서문을 제외한 내용은 원래 受敎하여 全義에 거주하는 韓德一집안에 있던 것을 傳書해 온 것으로 되어 있으며, 계보의 말미에는 牧使의 확인내용이 적혀 있다. 결국 이 책은 한덕룡이 家系에 混入이 생긴 것을 계기로 자신의 계보를 증빙받기 위하여 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문을 작성하여 목사의 확인을 받은 것은 癸未年으로 되어 있어서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족보의 混入이 崇禎 再甲申年(1704:숙종 30)의 族譜 重刊 후 다시 중간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므로 18세기 이후인 것은 분명하다. 한편 현재 규장각에는 崇仁殿碑의 탁본이 2종 있다. 숭인전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崇仁殿碑銘≫<奎 10284> 및 ≪崇仁殿碑≫<奎 12605>의 해제 참조〔≪奎章閣韓國本圖書解題≫ 史部 4 pp.573∼574〕. (윤경진)

기호철; 이 해제만이 아니라 청주한씨족보 해제와 함께 보아야 합니다. 여기 소개한 비문은 여러 곳에 게재된 비문 가운데 청주 한씨들이 그들의 목적을 위해 등사한 판본 가운데 하나입니다. 비문의 내용은 달라질 것이 없고 그들의 목적을 위해 추가로 다른 것들을 실은 것입니다. 기자실기가 이이의 기자실기, 윤두수의 기자지를 게재하고 자신들이 목적하는 다른 기록을 넣어 광해군 초에 평안도에서 간행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기자실기는 기한선우 삼성 기자 후손설을 게재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번안한 것이지요.

기회근 나도 위지라고 해서 진수의 삼국지위지동위전을 다 찾아도 없더군요. 다른 위지라면 위략밖에는 없는데, 이 어환의 위략에 전하는 내용을 누군가 필사했고 이것이 한효중이 모아서 족보편찬에 참고한 청주한씨들의 가첩에 인용되어 전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호철 그 것 때문에 위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삼국지가 편찬된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를 모두 뒤져 위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배송지의 주에 게재된 위략의 기사를 따로 취합해 책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위략집본입니다. 필사본이 전해질 가능성도 거의 전무하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삼국지에서 기자의 후손은 절멸하였고 한지의 사람들이 기자의 제사를 모신다는 것이 위략의 기사를 인용한 것입니다. 위략에 동일한 사실을 한쪽에서는 후손이 절멸하였다고 쓰고 다른 부분에는 후손에 기한선우씨가 있다고 기록했을까요?

기회근 準後絶滅을 많은 책들은 준의 후손은 끈어졌다고 하는데 저는 다르게 봅니다. 저는 준왕의 후왕은 끈어졌다. 즉 후손은 있는데 마한이 온조왕에게 망하면서 준왕의 후손으로는 더 이상 마한 왕이 없다라고 봅니다. 제사를 받든 사람들은 당연히 우리 조상님들입니다.

기호철 準後絶滅만으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 뒷부분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를 보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요, 해석하면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祭祀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猶자를 기재하여 아직 또는 오히려의 뜻으로 후손이 절멸하였다가 옳은 해석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猶는 한자의 어휘에서 역접어입니다. 즉 반대의 경우라는 뜻입니다. 제사를 받들지 않아야할 사람이 오히려 지금까지 제사를 지낸다는 뜻입니다. 논어 학이편의 [學如不及 猶恐失之]가 대표적인데 이를 해석하면 학문이란 미침(끝)이 없는 것 같다. (할수록)오히려 이것(공부한 것)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 두렵다.입니다.

기회근 그런 뜻이라면 우리조상님이 주체가 아니라 백제왕이 주제하는 제사에 객으로 참석했나 보군요. 결국 위략이라는 책이 나타나야 대조하여 진위를 확인 할 수 있겠습니다.

기호철; 질문하신 내용 가운데 단일본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도 있었습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성이 있고 그에 따른 본관이 있습니다. 그럼 성은 무엇이고 본관은 무엇인가? 성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본관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본관의 형성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본관은 고려시대 호적제도의 잔존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날에도 본적이 있습니다. 서울에 살지만 본적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오룡동인 사람도 있고 강원도에 살지만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인 사람도 있습니다. 본적이 주소지인 사람은 대종가 몇 집을 빼고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 호적제도에 의한 결과입니다. 그 당시에는 본적지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고려시대의 본관(本貫)도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관이란 행정관할 구역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고려시대 전기에 호적이 만들어지면서 당시 호적을 관할한 지방관서를 의미합니다. 행주기씨 혹은 덕양기씨라 함은 고려시대 호적이 만들어질때 행주나 덕양에 우리 조상께서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덕양은 행주현의 또다른 별칭입니다. 행주산성안에 있는 정자가 덕양정인 까닭은 그것입니다. 오늘날의 고양시는 고봉현과 덕양(즉 행주)현을 조선 태종때 합하며 한 글자씩 딴 이름입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 기씨는 몇 사람 되지 아니한 까닭에 다른 지역에 거주한 사람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까닭에 본관이 하나입니다. 그런데 당시 번성한 성은 여러 지역에 거주하다 보니 여러개의 본관이 만들어 졌습니다. 김씨의 경우는 김해, 광산, 안동, 의성 등 200여개 본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답습되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지역의 토성(土姓), 내성(來姓), 망성(亡姓)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행주현을 예로 들면 토성은 김(金), 기(奇) 은(殷), 전(田), 내성은 이(李), 망성은 최(崔), 강(康) 부(夫), 즉(則), 고(高), 나(那), 차(車)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토성은 고려시대 행주에 호적을 둔 성씨로 세종대에도 살고 있는 집안 입니다. 이 집안은 행주가 본관입니다. 내성인 이씨는 조선 시대에 새로이 호적을 옮겨온 집안을 말합니다. 이 경우 새로이 본관을 칭하는 경우도 있고 기존의 본관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양 이씨나, 행주 이씨, 또는 덕양 이씨가 있다면 바꾼 경우이고 없다면 후손이 절멸했거나 기존의 본관을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망성은 사라진 성씨입니다.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거나 후손이 절멸한 경우입니다. 즉씨나 나씨는 사라졌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살아 있다면 본관은 내성인 이씨와 유사할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도 본관은 만들어 졌습니다. 충청도에 사는 김씨 가운데 본관이 전중(田中)인 사람들이 몇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속된 말로 다나까(田中) 김씨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시조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투항하여 살았고 성을 김씨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한말에 캐나다 출신 미국 선교사 게일 (Gale, James Scarth) [1863~1937.1.31.]은 우리나라에서 기일(奇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귀화했다면 미국 기씨 또는 토론토 기씨가 되었을 것이니 기씨도 본관이 더 늘어 단일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기자의 箕씨와 우리 奇씨는 단일본으로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것인데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시대 그리고 오늘날가지 호적법상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단지 전승으로 후손이라는 것은 있을 뿐입니다.

기호철 기자의 후손으로 기한선우 삼성을 전하는 기록은 놀랍게도 거의 없습니다.

기자의 후손에 대한 가장 믿을 수 있는 기록은 중국 진(晋)나라의 진수(陳壽:232~265)가 사찬(私撰)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 조에 보이는 것인데 (朝鮮)侯 準이 僭濫되이 王이라 일컫다가 燕나라에서 亡命한 衛滿의 攻擊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 (準王은) 그의 近臣과 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韓의 땅에 거주하며 스스로 韓王이라 稱하였다. 『魏略』에 일컫기를 ‘準의 아들과 親戚으로서 그대로 나라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그로 인하여 韓氏라는 姓을 詐稱하였다. 準이 海外의 나라에서 王이 되었으나 朝鮮과는 서로 往來하지 않았다.’ 그 뒤 (準의) 후손은 절멸하였으나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祭祀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朝鮮)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는 것이 그것입니다. 거기에서 삼국지를 지은 진수는 어권이라는 사람이 지었던 『위략』이라는 책을 인용하였는데 여기에 기자 후손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기자 후손에 대한 기록은 동서양을 모두 합하여 위략의 이 기사가 유일한 것입니다만 불행하게도 위략은 삼국지가 지어진 이후 전하지 않아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책을 간행할 때 번각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활자로 하지 않고 인쇄된 책을 나무에 붙이고 그대로 조각하여 간행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삼국지의 번각본에는 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가 魏略曰 其子友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로 잘못되어 있었고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소개된 삼국지에는 모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자의 후손 기준의 아들은 우친이라는 없던 이름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잘못은 기자를 모시는 숭인전(평양에 있음) 비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숭인전 비문에 의하면

만력 신해(1611, 광해군 3)년에 본도(平安道)의 사인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이 서로 잇달아 상소하여 말하기를 “역사에서 일컫기를 기자의 후손으로 41세를 전하여 준에 이르러 위만에게 축출 당하여 마한말 후손 3인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친인데 그 후에 한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평인데 기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량인데 용강 오석산(오늘날 남포직할시 용강군)에 들어갔는데 선우씨의 세계에 전합니다” (崇仁殿碑文 萬曆辛亥 本道士人 曺三省 楊德祿 鄭旻等 相繼抗疏言 史稱箕子之後 傳四十一而至準 爲衛滿所逐 馬韓末有孱孫三人 曰親其後爲韓氏 曰平爲奇氏 曰諒入龍岡烏石山 以傳鮮于世系)

사실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마저도 조선으로 하였던 조선왕조는 개국초부터 기자와 기자 후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왔다. 변계량에 의해 기자비문을 쓰게 했다거나 성종조 왕명으로 기자 후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명종때에 이르러 중국 원나라 시인 선우추가 쓴 시에서 “선우씨는 털이 많으니 기자의 후손이 분명하다”는 기록을 통해 국가적으로 선우씨에 대해 기자의 후손에 준하는 특혜를 부여하였는데 각종 조용조의 면제와 아울러 선우씨에 대한 특별 채용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선조 연간에는 기자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활성화되어 율곡 이이나 윤두수 등에 의해 기자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연구에서 기자의 후손은 언급되지 아니하였고 선우씨에 대한 기자 후손으로의 국가적 공인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선조는 여러 신하들을 인견한 자리에서 기자의 후손이 조선에 있는가를 물었고 이에 윤두수는 선우씨 한씨 기씨가 그 후손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있으나 선우씨는 중국에서 기자의 후손이 선우씨라는 전설이 있고 원나라때 시인 선우추가 쓴 시에 그런 내용이 있으나 조선의 선우씨가 그것이라고 확증할 수 없으며 한시는 준왕이 한왕이 되었다는 이유에서 함부러 칭한 것이며 기씨는 箕와 奇가 음이 같기 때문에 나온 주장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조삼성 등의 상소 이후 기자 후손이 조선에 실재하며 그것은 기 한 선우 삼성이라는 주장은 더욱 전파되고 광해군 연간에는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공인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그후 청주한씨는 최초로 만들어진 그들의 족보(석탄(石灘) 한효중(韓孝仲 : 1559명종14-1628인조6에 의해 편찬되었다)에서 다음의 기사를 통해 더욱 공고화하였다.

箕子의 子姓은 其後에 有曰友平이요 曰友諒이요 曰友誠이니 友平은 仍襲鮮于氏하여 歸北原하고 友諒은 襲馬韓하여 仍爲上黨韓氏하고 友誠은 歸平江하여 仍襲德陽奇氏하니라.[魏誌]

箕準의 七世인 元王 箕勳에 至하여 有子三人이 各其姓을 得하니 友誠은 德陽奇氏가되고 友諒은 上黨韓氏가 되고 友平은 北原鮮于氏가 되었었다.[魏誌]

淸州韓氏의 由來는 後朝鮮인 箕子朝鮮에서 起源한다. 馬韓 元王(필자주:箕準의 7世 箕勳)의 아들 3인이 있어 友平, 友諒, 友誠이니, 나라가 衰하자 우평은 高句麗에 入仕하여 北元鮮于氏가 되고, 우량은 新羅에 입사하여 上黨韓氏 즉 청주한씨가 되었고, 우성은 百濟에 입사하여 德陽奇氏가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한씨는 모두 箕子의 後裔가 되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야기하여 한씨 족보에서 인용한 위지는 역사서가 아니다. 魏志라면 삼국지의 위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위의 인용대로 한다면 단순히 ‘위나라 기록에 의하면’이라는 막연한 이야기에 불과하여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해군 연간에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당시 영의정이던 만전 기자헌의(좌의정 한효순(한효순[ 韓孝純 ] ) 영향을 무시하기 어렵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통해 자세한 사항들은 추론해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그 후 숙종대에 이르러 기문의 고세계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추론하는데 도움이 된다. 단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의 기자에 대한 기록만 검색해보아도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두번째는 당성8학사설이다. 즉 당나라에서 우리나라로온 8명의 학자들의 후예라는 설이다.

행주은씨(殷氏) 신라(新羅) 문성왕(文聖王)(46대 839~857) 때 곧 당나라 15대 무종(840~846)연대에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악으로써 신라를 교화시킬 수 있는 문학 지사를 신라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 결과 은(殷), 홍(洪), 기(奇), 길(吉), 방(房), 위(魏), 목(睦), 봉(奉)씨 등 8학사가 래조하여 오늘날 한국 은씨의 조상이 됬다.

남양홍씨(南陽洪氏)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 영류왕 때 당나라에서 건너온 홍천하(洪天河)이다. 시조 천하(天河)는 고구려 영류왕(618~642) 때 중국 당나라에서 문화사절인 팔학사의 일원으로 건너와 유학을 가르치는 등 문화 활동을 펴다가 연개소문의 난으로 인하여 신라로 피신하였다.

남원방씨(南原房氏) 당나라의 명상(名相) 방현령(房玄齡)의 후손이라 한다

장흥위씨(長興魏氏) 시조(始祖) 회주군(懷州君)은 대당관서(大唐關西) 홍농인(弘農人)으로 이름이 경(鏡)이니 신라(新羅) 27대 선덕여왕 7년 무술(戊戌) 서기(西紀) 638년 신라왕(新羅王)의 요청에 의하여 당(唐) 태종(太宗)이 8인의 도예사(道藝士)를 파견(派遣)함으로써 동래(東來)하였다. 방(房), 홍(洪), 목(睦), 기(奇), 은(殷), 길(吉), 봉(奉)씨와 더불어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화성군(華城郡) 서신면(西新面) 상안리(尙安里) 고당성(古唐城)·익주(益州)·남양(南陽)에 입국(入國)하니 세상에서는 이분들을 팔학사(八學士)라고 한다. 광복후(光復後) 서기(西紀) 1972년에 팔학사의 입국(入國) 상륙지(上陸地)인 당성(唐城)을 지방문화사적(史蹟) 217호로 지정(指定)됨으로써 팔면시비(八面詩碑)를 세우는 한편 팔학사 사우(祠宇)를 건립(建立)하여 매년(每年) 제향(祭享)키로 한 바 있다.

사천육씨(泗川陸氏) 시조(始祖) 육보(陸普)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서기 927년(경순왕 원년, 고려 태조 10) 당(唐)나라 명종(明宗)이 문학전례지신(文學典禮之臣)을 뽑아 신라에 선교사(宣敎師)로 보낼 때 홍은열(洪殷說) 등과 함께 8학사의 한 사람으로 동래(東來)하여 뛰어난 공적을 쌓아 경순왕(敬順王)의 부마(駙馬)가 되었다.

길씨(吉氏) 시조는 중국 당나라에서 귀화해 온 8학사(學士)의 한 명인 길당(吉唐)이다. 《해평길씨세보(海平吉氏世譜)》에 의하면, 길당은 고려 문종조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참지정당문학(參知政堂文學)에 오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져서 해평(海平)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화봉씨(江華奉氏) 시조는 미상으로 시조를 상고할 수 없다

위에서 찾아본 당성8학사는 씨족마다 전승이 일관적이지 않지만 당나라에서 고구려 혹은 신라로 문화를 전파하기위해온 8명의 당나라 학사의 후예라는 것이다. 우리족보는 9차보 지장록(정편) 1280 페이지에서 1281 페이지에 남양방씨보를 인용하여 각 씨족의 사운(四韻)과 8학사는 고구려의 예악을 가르쳤다(八學士敎高句麗禮樂)라는 글로 8학사설을 언급은 했지만 자세한 설명은 없다. 우리 대종중은 공식적으로 기자후손설을 따르기 때문에 8학사설은 설명없이 무시하면서도 언급은 했다.

우리가 기자나 다른 8학사의 후손이라면 치나에 어떤 기씨가 있나 찾아보았다.

치나 기(奇)씨의 연원은 황제헌원씨에서 소호금천씨의 아들중 은이 윤성에 봉하여 윤씨성이 발생되어 그 후손중에 주나라 선왕때 윤길보가 대신으로 있었고 윤길보의 장자 백기에서 자손들이 기성으로 했다. 주나라의 제후국 노나라 노소공 희조(姬稠)의 5번째 아들 이름이 기(奇)라서 기(奇)씨로 하였다. 북위 선비족 중에 기근씨에서 기성으로 개성 하였다. 자손들은 낙양에 많이 살고 있다. 기씨도 3가지라 이중에서 어느 기씨인지는 알길이 없다.

세번째는 호족출신일 가능성이다.

물론 기자의 후손이나 8학사의 후손이 호족세력으로 남아있었를 수도있고 선비족 기근씨의 후손이라면 흉노후손인 신라김씨왕가와 연결된 후예일수도 있다 역사책에 보이는 가장 오래된 기씨(奇氏)기록은 삼국사기 권제50 열전 10 견훤의 멸망에 나오는 기언(奇彦) 기록이다. [대상(大相) 견권(堅權), 술희(述希), 금산(金山), 장군 용길(龍吉), 기언(奇彦) 등으로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좌익(左翼)으로 진을 치게 하였다.(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같은 사건을 기록한 고려사절요/1권/태조신성대왕/병신 19년(936)秋九月(가을 9월) : 가을 9월 기록엔 기언(奇言)으로 나온다 지천군(支天軍) 대장군(大將軍) 원윤 능달(元尹能達) 기언(奇言) 한순명(韓順明) 흔악(昕岳)과 정조 영직(正朝英直) 광세(廣世) 등으로 보군 10,000을 거느리게 하여 좌강(左綱)을 삼았다.[支天軍 大將軍 元尹 能達 奇言 韓順明 昕岳 正朝英直 廣世 等 領 步軍一萬 爲左綱) 언(彦)과 언(言)은 소리와 뜻은 같지만 모양은 틀린 글자이다.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와 조선초기 고려실록을 보고 요약한 고려사절요의 글자가 다르지만 대종중은 오래된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다.(彦一作言) 기언(奇言)의 직위가 무엇인지는 그앞에 나오는 원윤 능달(元尹能達) 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원윤(元尹)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분의 출신이나 나이 등등 다른 정보는 전혀없다. 그러나 이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금석문이 호철님이 찾아준 영월 흥령사 징효대사 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에 있다. 다음은 호철님의 글을 인용한다.

이것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흥령사 옛터인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신라말의 선사 징효대사 절중(澄曉大師 折中:헌덕왕 18, 826~ 효공왕 4, 900)의 비로 보물 6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이 해서로 썻으며, 최환규(崔奐規)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44년 후인 944년(고려 혜종 원)에 세웠다. 900년에 입적하여 906년에 시호를 내리고 박인범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어 924년에야 비문을 지었으며 다시 비의 건립은 ‘온 나라의 먼지가 멈춘’ 944년에 이루어졌다. 후삼국 시기의 혼란기에 선사들을 우대하는 비의 건립이 지연되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비문은 전면은 36행에 1행 81자, 음기는 29행으로 이루어진 구성이다. 비문의 내용은 징효대사가 탄생하여 오관산으로 출가한 후 화엄을 배우다 도윤(道允)과 자인(慈忍) 등 선사를 만나 수학하고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수행한 이력과 헌강왕 정강왕 등의 우대를 받고 진성여왕이 국사의 예를 표하였으나 사양한 등의 생애를 기술하였다. 흥령선원을 중사성에 예속시킨다거나 명주 승정을 파견하여 일을 처리하는 등 중요한 사료가 들어 있다. 이 비에는 징효대사의 승속(僧俗) 제자들이 음기(陰記)에 기록되어 있다. 각 사주(寺主)를 필두로 정종(定宗)과 광종(光宗)이 되는 왕자와 고위 관료 수십 인과 명주(溟州) 등 각 연고 지역의 세력가와 확대된 삼강직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 확인 할 수 있는 인물도 있지만 여타의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물들이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고려초 원윤(元尹)벼슬을 하고 있는 기오(奇悟) 기달(奇達) 두 사람이 나란히 나타나고 있다. 원윤(元尹)은 936년(태조 19)에 제정하였는데 왕건이 태봉(泰封)의 위계(位階)를 본떠서 정한 것으로, 왕건의 직속 부하를 중심으로 하여 고려 왕권에 복속한 친고려적 정치집단인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960년(광종 11)에 제정된 4색공복 규정에 의하면 원윤 이상의 관료, 호족은 자삼(紫衫)으로 정하였으며 976년(경종 1)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의 실시로 원윤 이상은 18품으로 나뉘어 전시를 지급받았다. 또한 성종 때에는 원윤 이상에게 말을 하사하고, 문무관을 구분하여 정계(正階)를 주었다. 이렇게 볼 때 자삼은 관직을 가진 관료층을 포함하면서 원윤 이상의 관계만을 가진 호족층을 포함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광종 때 중국식 문산계(文散階)가 들어와 관계와 같이 사용되다가 995년(성종 14)에 중앙관인의 관계가 전적으로 문산계를 사용하면서 기존의 관계는 향직(鄕職)체제로 존속하였다. 기오(奇悟) 기달(奇達) 양인(兩人)이 제자들을 열거한 음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징효대사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지녔던 인물들임에 틀림이 없으며 기오 바로 다음에 기달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부자(父子), 형제(兄弟) 혹은 밀접한 친척(親戚)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모두 원윤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형제 혹은 종형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진다. 이 비에 나타나는 인물들 가운데 고려사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고려의 건국공신들이며 대부분 명주, 죽주, 청주, 음성 일대의 호족들로 혜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정종과 광종을 옹립한 세력들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기오 기달 2인은 기씨 족보에 나타나지 않으며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도 확인하기 어려우나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타나는 장군 기언(奇彦)과 무관하지 않은 인물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기씨의 선대를 유추한다면 신라말 고려초 지방(아무래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기도 일대의)호족으로 대체로 육두품 세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징효대사와 직간접으로 제자였다는 사실은 최소한 육두품세력 이상이었을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강성한 호족세력은 아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태조는 강력한 호족들은 혼인을 통해 회유했는데 이 대상은 아니었고 또한 비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18품계 가운데 6품에 속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금석문에는 기씨 족보에 나타나지 않는 인물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를 통해 기씨 족보의 보완이 가능하다. 이러한 금석문을 조선시대 족보를 간행하며 확인하지 못하였던 것이 주된 까닭이었을 것이다.(기호철 글)

그러나 이 기언과 지금 현재 우리 기씨와 어떻게 세계가 연결이 되는지는 알수가 없다.

인종 때에 사신 기순우 할아버지와 기언과의 사이에 역사에 기록된 다른 기씨는 고려사절요/제2권/목종선양대왕(穆宗宣讓大王)/기유(己酉) 12년(서기 1009년)에 나오는 대의 기정업이다. 왕이 전우(殿宇)와 부고(府庫)가 탄 것을 보고는[王見殿宇府庫煨燼(왕견전우부고외신)] 슬퍼하고 탄식하다가 병환이 나서[悲嘆成疾(비탄성질)] 정사를 보살피지 못하였다.[不聽政(불청정)]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두 중과[王國師二僧(왕국사이승)] 태의(太醫) 기정업(奇貞業)[太醫奇貞業(태의기정업)] 태복(太卜) 진함조(晉含祚)[太卜晉含祚(태복진함조)] 태사(太史) 반희악(潘希渥)[太史潘希渥(태사반희악)] 재신 이부상서[宰臣吏部尙書(재신리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유진(劉瑨)[參知政事劉瑨(참지정사류진)] 이부시랑 중추원사(吏部侍郞中樞院使) 최항(崔沆)[吏部侍郞(리부시랑) 中樞院使崔沆(중추원사최항)] 급사중 중추원부사(給事中中樞院副使) 채충순(蔡忠順) 등은[給事中(급사중) 中樞院副使蔡忠順等(중추원부사채충순등)] 은대(銀臺 승정원)에서 숙직하다.[直宿銀臺(직숙은대)]

이 기정업도 현재의 우리와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계대를 못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분인 기언을 우리의 직계라고 가정을 하여 세계상의 시조 기순우와의 계대를 유추해 본다. 1세 기순우에 대하여 족보는 인종 때의 사람으로 평장사라고 하였다. 고려 인종은 서기 1123년에서 1146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기순우 할아버지가 인종 때 사람이라는 것이 이 23년간에 벼슬을 했다는 것인지 태어났다는 것인지 애매한 면이 있다. 그런데 셋째손자 필선의 부인 진원군부인 오씨 할머니가 경남 고성군 옥천사(玉泉寺)에 소장된 옥천사임자명반자(玉泉寺壬子銘飯子)의 제작비용을 시주했는데 그 시주기록이 남아있다.

기호철님이 찾아준 글을 인용한다.

옥천사임자명반자(玉泉寺壬子銘飯子) 고려 23대왕(고려 고종)의 환갑(環甲)이 되는 해인 임자년(고종 39, 1252) 4월 12일 개경[京師]에 있는 공인(工人)의 집에서 지리산(智異山) 안양사(安養社)의 반자(飯子)를 주조하여 만드니, 무게가 60여 근이었다. 함께 발원한 시주(施主)는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손정렬(孫挺烈), 상서(尙書) 황보기(皇甫琦), 검교상서(檢校尙書) 유승석(兪承錫), 화엄종(華嚴宗) 삼중대사(三重大師) 승수(勝壽), 대선(大選) 경흥(景興), 지식(知識), 정지(正之), 돌아가신 상장군(上將軍) 기필선(奇弼宣)의 처인 진원군부인(珍原郡夫人) 오씨(吳氏), 낭장(郎將) 김백용(金伯龍)의 처인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최씨(崔氏), 동문원녹사(同文院錄事) 정상(鄭常)의 처인 해양군군(海陽郡君) 김씨(金氏), 학록(學錄) 주선의 처인 김씨, 비구니(比丘尼) 청혜(淸惠) 등입니다. 이들 근간(根幹) 외에 약간 시주한 사람도 매우 많기 때문에 모두 기록하지 않습니다. 공인(工人)은 별장동정(別將同正) 한중서(韓仲叙)이며, 동량(棟樑)은 도인(道人) 종일(宗一)이고, 책임자[負擔人]는 상좌(上座) 보심(普心)이니, 오래도록 사용하십시오. 高麗二十三王環甲之年壬子四月十二日在於京師工人家中鑄成智異山安養社之飯子入重六十餘斤 同願施主者樞密院右副承宣孫挺烈尙書皇甫琦檢校尙書兪承錫華嚴業三重勝壽大選景興知識正之故上將軍奇弼宣之嘉偶珍原郡夫人吳氏」郞將金伯龍之嘉偶樂浪郡夫人崔氏同丈院錄事鄭常之嘉偶海陽郡君金氏學錄朱䙋之嘉偶金氏比丘尼淸惠等此根幹外錙銖之單甚多故不具錄工人別將同正韓仲叙棟梁道人宗一負擔人上座普心使用長存」〔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下(1984)〕

고종 39년 서기로 1252년에 제작된 이 철북의 제작시기에 기필선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진원군부인 오씨 할머니가 시주를 했는데 할머니 나이를 70세 정도로 본다면 필선할아버지도 대략 1190년경에 태어났다고 가정을 할수가 있다. 그러면 아버지 수전 할아버지는 셋째 필선 할아버지를 대략 35세에 낳았다고 하더라도 1155년 정도에 태어나셔야 한다. 그러면 수전할아버지의 아버지 순우할아버지는 대략 1130년경 태어나시었다고 보아서 고려 인종 때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물론 추정이고 2세 수전할아버지가 윤위 윤숙 필선 필준 으로 4형제를 두었지만 앞의 두형제와 뒤의 두형제 돌림자가 다르다. 이는 어쩌면 어머니가 달라서 그런것 아닌가 추측도 해본다. 그래도 태어난 년도의 추정은 비슷하다.

기언이 후백제 통일전쟁에 참여한 년도가 서기로 936년이고 나이를 대략 30대 중반으로 본다면 900년경에 태어나신 것이 된다. 순우할아버지와는 대략 230년의 시간차이가 나고 한세대를 30년으로 치면 7-8세대의 차이가 난다. 그 중간의 6-7분의 선대 할아버지 기록을 찾는다면 고려 중기에 시작되는 족보의 기록을 앞당길수 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있다.

가능성은 조상들의 지석을 찾는 것인데 유력한 인물은 기탁성이다. 기탁성(奇卓誠)은 의종을 호위하는 장교로 있다가 정중부의 구테타에 가담하여 세력가가 되고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하여 벼슬이 판병부사(判兵部事)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다. 이때 최충헌을 조위총의 반란을 진압 할 때 발탁하였다. 20여년후 최충헌집권 후에는 그 보답으로 추충협모좌리동덕공신 수태사 문하시중(推忠協謀佐理同德功臣守太師門下侍中)에 추증되고 탁상에 초상화를 그린 액자를 놓고 제사를 지냈다.

태어난 년도의 기록은 없지만 죽은 년도는 1179년이다. 대락 60세 까지 살았다고 하면 1120년경에 태어난 것이 되어 순우 할아버지와 비슷한 시기에 사신분이다.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위직에 올랐기 때문에 묘에는 지석을 같이 묻었을 것이다. 고려사에는 아버지나 할아버지 기록이 없지만 지석에는 대략 증조부까지 기록하기 때문에 아마도 잊어버린 6-7세의 조상과 연결할수있는 단서를 찾을 수있지 않를까 한다. 더불어 혹시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의 이름이 겹치는 기록이 나오는 순우 할아바지와 연결 할수있는 기록이 나온다면 하는 희망을 생각한다. 다른 분으로 2세 수전 할아버이다. 순우할아버지를 대동보는 이곡이 지은 영안왕 기자오의 행장에 근거하여 기록했다. 그러나 이곡의 영안왕 행장에는 수전할아버지가지는 보여도 순우할아버니는 없다. 다른 기록으로 기원의 아들 기완자불화가 기자오를 영안왕에서 경왕으로 추봉하는 칙서와 함께 가져온 구양현이 지은 비문이있는데 여기에 기록됬을 수는 있다.. 그러나 아직 확인은 못했다. 하여간 수전할아버지의 문하평장사의 관직은 추증이 아니라 실직이기 때문에 지석이 있었을 것이다. 찾는다면 기탁성의 지석과 비교하여 세계를 찾을수있을 것이다.

추측이지만 무신난에 가담한 기탁성과 순우할아버지가 같은 시대에 사셨고 기탁성이 최충헌을 발탁했으며 최충헌과 수전할아버지는 송청의 딸들을 부인으로 맞이한 동서지간이고 최충헌은 윤위 윤숙을 부하로 거느리면서도 기홍수를 중용한 것으로보아 순우할아버지와 기탁성은 가까운 형제 4촌 아니면 6촌 사이처럼 가까운사이이고 기홍수는 기탁성의 동생이나 아들뻘이 되지 않을 까한다.

여기에서 고세계가 있지 않냐 하는 의문이 들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이것을 믿었지만 지금은 믿지 않는다. 노사선생이 언급하신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다른 역사책에도 나와야 할텐데 오직 우리 족보에 갑자기 나왔다는 것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백제와 신라 고려를 거쳐 왕들의 집권기간이 1년에서 몇십년까지 차이가 나는데도 그 자세한 집권기간은 무시하고 각시대의 왕들에 맞추어 대략 한명씩 인물을 배당하다보니 순우할아버지 앞으로 65세가 있다. 내가 순우할아버지로 부터 28세이고 최대로 32세까지 손자가 이어진 것에 비하여 1100년과 900년의 비례로 보아 두배의 세수는 믿을수가 없다. 그냥 그런 기록도 있다 무시해도 된다.

선조실록 165권, 선조 36년 8월 13일 병신 1번째기사 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상(선조)이 이르기를, "기자의 자손은 후세에 아는 자가 없으니 매우 서운하다. 기자가 주(周)나라에 조회하였다는 것은 기자가 아니라 미자일 것이다. 기자는 무왕(武王)만이 함께 도(道)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홍범(洪範)으로 그 도를 전하였을 뿐이고, 주(周)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은(殷)나라의 유민(遺民)을 거느리고 동으로 향하여 여기까지 왔으니, 실로 무왕이 봉(封)한 것도 아니고 주나라에 조회했을 리도 없다. (-중략-) 하였다. (윤)근수가 아뢰기를,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청주 한씨(淸州韓氏)가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하니, 상(선조)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인가?" 하자, (류)영경이 아뢰기를,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이 삼한(三韓)이 국호이었으므로, 한(韓)씨를 가리켜 기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하고, (윤)근수는 아뢰기를, "공가(孔哥)·인가(印哥)·선우가(鮮于哥)도 다 기자의 후손입니다. 대개 기자의 작은 아들이 우(于)에 봉해졌으므로, 선우라 합니다. 고시(古詩)에 ‘기자의 후손에는 털북숭이가 많다. [箕子枝裔多髯翁]’ 하였는데, 대개 선우추(鮮于樞)를 가리킨 것입니다." 하고, 윤휘는 아뢰기를, "평안도에서는 선우가가 대대로 기자전(箕子殿)의 참봉(參奉)이 된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느 중국 사신이 기자묘를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역장(逆葬)이니, 너희 나라에는 반드시 기자의 자손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하자, 영경이 아뢰기를, "그것은 풍수설(風水說)입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95책 165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24책 518면 上曰: "箕子之子孫, 後世無知者, 殊可欠也。 箕子朝周云者, 非箕子也, 乃微子也。 箕子以爲, 唯武王可與語道, 故只以《洪範》傳其道, 而不欲居中國, 率殷遺民, 東來于此。 實非武王之所封, 亦無朝周之理。 承訛襲謬, 遂傳後世, 作史不可不愼也。 (중략) 根壽曰: "世傳淸州 韓氏, 乃箕子之後也。" 上曰: "何故?" 永慶曰: "有馬韓、辰韓、弁韓, 爲三韓國號, 故指韓爲箕子之後。" 根壽曰: "孔哥、印哥、鮮于哥, 皆是箕子之後。 蓋箕子之少子, 封於于, 故謂之鮮于。 古詩有云: ‘箕子枝裔多髯翁。 蓋指單于樞也。" 暉曰: "平安道 鮮于哥, 相傳爲箕子殿參奉云。" 上曰: "有一天使, 見箕子墓曰: ‘此逆葬也。 汝國必無箕子子孫矣。" 永慶曰: "此則風水之說也。"

기자가 상서, 주역, 논어 등에서 현인으로 나오는데, 그 기자가 조선에서 왕을 했다는 것은 유학에서 이상세계로 보는 상나라와 주나라 시대의 문명이 조선에 이식되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기자는 상나라와 주나라 시대의 전설적인 통치법인 홍범구주를 주나라 무왕에게 교시한 사람이었다. 즉 상나라와 주나라 시대의 '아름다운 정치'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위대한 성현이 문명을 가져왔다는 것은, 한국의 문명이 상•주 교체기까지 올라갈 정도로 유구하다는 자부심의 근거로도 사용된 것이다.

기호철

승정원일기 영조 19년(1743년) 8월 9일 (기미) 우리 가문에 대한 조정의 논의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검토와 주석이 필요하고 다 번역하면 30쪽 정도나 될 듯합니다.

승정원일기 52책 (탈초본 962책) 영조 19년 8월 9일 기미 12/12 기사 1743년 乾隆(淸/高宗) 8년

初九日辰時, 上御養正閤, 親政。王世子陪座入侍時, 同副承旨李普昱, 記事官任師夏, 記事官吳彦儒, 吏曹判書鄭羽良, 參判元景夏, 參議任珽, 正郞尹得載·李彝章, 佐郞南泰耆·李永福, 列于東, 右副承旨鄭翬良, 假注書李聖運, 記事官鄭元淳, 兵曹判書徐宗玉, 參判魚有龍, 參議李鼎輔, 參知李命坤, 正郞李燮元, 佐郞韓光肇·趙台祥·趙明鼎, 列于西, 諸臣進伏訖。羽良曰, 今此都政, 各岐仕滿禁府都事·掌隷院·刑曹郞官, 各司久任相避竝擬, 何如? 上曰, 依爲之。羽良曰, 守令多窠, 今當差出, 而擬望之人乏少, 未準朔人, 竝擬, 何如? 上曰, 依爲之。羽良曰, 邊邑或災邑守令差出之際, 不可不擇差, 而在職中擬望之人乏少。他道未準朔有聲績人, 別擇備擬, 何如? 上曰, 依爲之。宗玉曰, 滿浦僉使, 今當差出, 而江邊重鎭, 不可不另擇, 堂下三品中竝擬, 何如? 上曰, 依爲之。宗玉曰, 今番兵批陞六者數多, 訓鍊主簿武兼, 當出二十三窠, 而見窠僅可爲二十, 其外三窠, 則當付司果矣。上曰, 鄕人多年積仕而無勢者, 若付司果, 則誠爲可矜。此則陞付實職, 宣傳官中三人, 司果出六, 宜矣。宗玉曰, 吏批雖出守令窠, 而次次遷轉之際, 將致夜深矣。上曰, 然矣。上曰, 虞人期獵, 猶不可失信, 況親政乎? 頃日大射禮時, 執事官承傳, 今番都政, 盡爲擧行, 可也。羽良曰, 當依下敎擧行矣。羽良曰, 四守令遷動, 固爲重難, 而四品人絶少, 郡守望, 無在職者, 難以備擬矣。上曰, 復職似好耶。羽良曰, 復職則難矣, 不得已以他守令備擬矣。上曰, 今番吏曹郞廳皆可合, 而漸似擇差, 恐有又弊, 不必甚擇好矣。羽良曰, 兩司望中, 自可擬差矣。上曰, 然而亦當稍別於兵曹郞官也。宗玉曰, 然矣。騎郞則可以東可以西者, 皆爲之矣。景夏曰, 騎郞則未通淸者皆爲之, 翰林出身亦爲之, 而吏郞則以有聖敎, 不敢擬望。吏郞今爲兩司通差之窠, 翰林獨未得擬差, 似爲班駁, 今後竝令通擬,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羽良曰, 蔭官參下, 大典以三十朔出六, 而皆計日出六, 自是三百年不刊之法, 而中間有計朔之謬例, 至於禁府都事, 自辛酉年, 又有計朔之規, 躁進之習, 誠可慨然。今後則參下蔭官, 毋論桂坊·禁都。又申計日出六之令, 永爲定式,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羽良曰, 繕工監役, 卽蔭仕出六之捷徑, 近年以來, 橫出之路太闊, 除拜數朔, 或半年圖差別工作, 輒爲陞六, 聞工判申思喆所言, 曾在先朝, 設都監外小小工作, 無得陞六事, 有所定式云。大抵都監則事體重大, 宜許陞六, 而恩典亦不可太濫, 躁進之路, 不可不塞。此後更爲定式, 設都監外, 他餘工作之陞敍出六, 一切勿許, 恐爲得宜, 故敢達。上曰, 所達誠是, 依爲之。都監外設或忘置定規, 而有所下敎, 政院據例達之, 可也。出擧條景夏曰, 臣則以舊制變通爲難矣。羽良曰, 此卽復古, 非變通也。上曰, 郞廳四人, 出草正書, 則似易矣。翬良曰, 然矣。上曰, 承旨書之。傳曰, 十考十上, 五考五上, 純褒抄啓守令·邊將調用事, 每都目申飭, 而作爲文具, 況親政乎? 另飭兩銓。傳曰, 居官淸潔人之孫, 臨戰效忠人之孫, 錄用之命, 都政例也, 而亦作文具, 另飭兩銓。傳曰, 調用舊功, 而後可勸將來, 軍功調用, 都目每下, 而迄過十年, 人心狃解, 頃者相箚, 可以推知, 爲國效力, 文具調用, 更不檢擬, 人孰爲國樹力? 另飭兩銓。傳曰, 西北人·松都人調用事, 每都目申飭, 而作爲文具, 況親政乎? 另飭兩銓。翬良書畢。上曰, 高麗子孫調用事, 前旣下敎, 而三國子孫, 亦有之耶? 羽良等曰, 三國子孫, 多有之矣。上曰, 朱蒙子孫, 亦有之耶? 宗玉曰, 此則代遠, 未知其必有矣。有龍曰, 應有之, 而似或改姓矣。上曰, 箕子子孫, 改姓爲鮮于與韓哥矣。景夏曰, 韓哥則卽今京中大族, 皆其子孫也。奇哥亦有之, 而此亦兩班也。上曰, 嚴瑀, 頃以金枝玉葉, 謂之來歷不明, 而奇哥若是兩班, 則何不收用耶? 吏參當初除拜時, 有濟牧除授之敎, 而旣知有奇氏後孫, 不爲收用, 吏參推考。抄出擧條景夏曰, 臣爲湖南御史時, 薦奇珽龍, 而銓曹不用, 其後臣待罪銓官, 而其人已故, 不能收用, 心甚惜之矣。上曰, 李彝章, 亦曾經湖南御史, 奇哥之可合錄用者見之乎? 彝章曰, 湖南多奇姓人, 而可合錄用者, 未之見也。且箕子至箕準國絶, 而箕之改姓爲奇者, 臣亦不能的知矣。宗玉曰, 元景夏, 只經吏參, 收用儒生, 非其職也。上曰, 吏參異於兵參, 猶有收用之路矣。上曰, 朱蒙子孫, 果無耶? 卽今朱哥, 是其子孫耶? 羽良曰, 朱蒙子孫, 安知其尙爲朱哥乎? 上, 笑曰, 旣是朱蒙之後, 則寧有非朱哥之理? 景夏曰, 朱蒙之朱, 非姓而卽名百濟始祖溫祚, 卽朱蒙之子也。上, 笑曰, 豈其然乎? 仍命注書, 持入東國歷代摠目。聖運承命持入。上曰, 承旨披閱考達。普昱曰, 溫祚果是朱蒙之子也。上曰, 予未及知之, 元景夏之言, 是矣。上曰, 領相, 頃以撫安大君事陳達。撫安夫人, 卽王氏也, 當時歸義二字之稱, 及令王氏侍衛, 聖意有在矣。三韓古矣, 而我朝以三恪之義, 今猶致祭, 此王者大道理也。宗玉曰, 此實我朝盛德事也。上曰, 中夜思之, 不覺興感。士大夫子孫, 雖革世而依舊, 王者子孫, 便作庶人, 寧不惻然? 上曰, 兵批久勤中, 兩班或有遷轉之路, 而如訓鍊習讀禁軍之類, 最爲可矜。卿若抑禁軍而右軍門執事, 則此豈公耶? 過政後謗言多從此輩出, 予縱媿漢昭之明, 豈因渠輩之謗, 而疑卿等乎? 宗玉曰, 臣豈動於此輩謗言, 而有所低揚乎? 故判書臣尹趾仁, 爲兵判時, 禁軍差僉萬戶, 而敎鍊官久勤, 差別將, 則其兄故相臣趾完責之曰, 敎鍊官, 將校也。禁軍, 行伍也。雖其處地不相遠, 而差任之際, 宜有區別云, 此言是矣。上曰, 此則卿只取故相之事, 而不識故相之心也。故相無心而責其弟, 卿則有意而欲爲之矣。頃者以承傳, 見差漢江別將, 此則兵曹非矣。宗玉曰, 別將, 亦多好窠, 而禁軍輩願之矣。上曰, 今番都政, 若以禁軍差送別將, 則予將推考而責卿矣。上曰, 今日親政, 意有所在。令元良侍坐, 亦有深意, 吏批三堂均入矣。吏判陞擢時, 敎以剛方正直, 佐貳特除之日, 亦有下敎, 此與嘉奬吳光運之意, 同矣。羽良曰, 聖敎及此, 臣敢不惕念, 仰體聖意乎? 景夏曰, 臣頂踵, 無非聖上洪造。且臣彼此, 本無適莫, 敢不盡心仰體乎? 珽曰, 臣百無肖似, 再辱除命, 豈不欲竭心奉職? 而才識魯莽, 況且已試僨敗之地, 深恐無以稱塞矣。上曰, 往者特除, 旣諭予意, 無謂之斥, 不必追嫌, 往事勿說。今番則以舊擬爲之, 三堂皆入, 一心爲公, 是予之望也。景夏曰, 奇氏多在湖南, 而京則無兩班奇氏矣。奇自獻, 甲子被死, 其子姪, 皆以大北正法, 故在京奇氏, 因此而絶矣。奇氏不但以箕子後裔當錄用, 奇虔·奇遵·奇大升皆名臣, 其子孫固可錄用矣。上曰, 吏參復以大北之說, 陳達筵席, 誠非矣。推考, 可也。出擧條景夏曰, 臣極知惶恐, 而大北罪惡, 不可不嚴斥, 且大北色目, 今則無之矣。上曰, 趙尙絅, 頃日以爲大北, 渠則固有罪, 而其子孫, 有何罪乎云, 此言是矣。子孫果何罪之有? 大北之說, 尤不宜使聞於元良, 此予所以推考者也。大北子孫, 猶且如此, 況他人乎? 羽良曰, 臣等不知則已, 若有所知, 則豈敢欺心? 當十分惕念爲之矣。上曰, 軍功傳敎, 兵判見之乎? 近日事, 首揆頃有所達, 予聞之, 有若傷弓之鳥, 實有懍然之心, 調用舊功, 可勸將來之敎有意矣。卿卽戊申玉堂, 吏判亦其時玉堂, 戊申事何由而出耶? 特以枳塞之故, 渠輩誘引之致, 固本之敎, 頃語首揆, 本固然後, 人心可定。聞閭巷間騷屑紛紜, 進宴得請然後, 始爲止息云。今日親政, 卽用一人而聳百人之意, 卿等知此爲之。宗玉曰, 西北人, 臣於近日政, 連爲收檢, 而東銓不可不一體爲之, 雖未得職, 只入望, 亦多聳動矣。上曰, 入望有何味而如是喜之耶? 其亦可哀也已。珽曰, 入望則還歸鄕里, 輒爲夸耀之資矣。上曰, 渠輩一番入望, 視若官敎, 其情戚矣。西北人外松都人, 亦可收用矣。予則一見松都, 尙今不忘, 況吏判, 曾經留守, 不爲檢擧耶? 頃者松都人謁聖登科者, 盡爲召見, 則爲人皆凜峻, 而右相則曾謂之氣膄矣, 如此人物, 不見收用, 至入於商賈, 是豈王者一視之道耶? 宗玉曰, 前日之使爲商賈, 今日之使爲兩班, 亦天地造化之機也。上曰, 朴奎晃, 頃年松都駐蹕時, 仍留守所達, 召見除職矣。其後作散而去, 誠可怪矣。此等人, 爲先收用, 可也。羽良曰, 奎晃是力士, 而身手甚健矣。宗玉曰, 卽今無相當窠矣。上曰, 宣傳官一窠, 又付司果而差除, 可也。普昱曰, 親政, 事體至重, 而該房承旨, 皆不入來, 臣與鄭翬良, 俱以代房入侍, 卽今廳中一空, 出納無人, 敢達。上曰, 何故也? 普昱曰, 日昨持平洪正輔疏, 有侵斥之語, 故俱爲引嫌。都承旨陳疏入啓, 左承旨姑未出牌, 右承旨闕外陳疏, 臣則昨日再次違牌, 極知惶悚, 而旣有嚴敎, 故承牌入侍矣。上曰, 洪正輔疏, 承旨能誦達否? 普昱, 口達侵斥本院數句語。上曰, 佯若不知四字, 渠方以此勉君, 而反以此非斥政院耶? 仍命普昱, 書都承旨兪健基批答。又傳曰, 莫重親政, 該房不可不備員, 都承旨批下, 卽爲牌招入侍, 左承旨亦爲牌招。上曰, 都承旨批答, 注書先爲出給。羽良曰, 吏曹本來淸寒, 故都政時, 有各司古風之例, 一自銓郞變通之後, 有古風革罷之敎, 此似爲先生古風, 而至於本曹古風, 則何以爲之? 上曰, 其所變通者, 特除先生古風而已。廳古風則守而勿失, 可也。出擧條 上曰, 李尙彦誰也? 景夏曰, 故相臣李俊慶之奉祀孫也。上曰, 宋后相誰也? 景夏曰, 先正臣宋時烈之曾孫也。上曰, 閔百能誰也? 羽良曰, 故相臣閔鼎重之曾孫也。上曰, 尹光蘊誰也? 羽良曰, 故承旨臣尹東洙之子也。上曰, 此非抄選耶? 羽良曰, 非抄選故擬入監役望矣。上曰, 十考十上後陞遷, 可也, 而十考前遷轉, 非矣。羽良曰, 大政時則不得不然矣。上曰, 神光僉使, 久勤之窠耶。宗玉曰, 都摠經歷, 訓鍊僉正爲之, 而僉使瓜滿, 則一入一出矣。上曰, 昌洲僉使, 非久勤之窠耶。宗玉曰, 此亦履歷之窠也。上曰, 趙東晉誰也? 宗玉曰, 別軍職東恒之弟也。上曰, 趙家諸人皆可用矣。上曰, 崔台耉如何耶? 宗玉曰, 安興姑無大段可爲之事, 而台耉最久勤, 故欲爲疏滯而擬望矣。上曰, 吉禹揆誰也? 宗玉曰, 此關西人也。故名臣吉再之後。而其父別薦南行, 入於戶佐望, 禹揆亦出身, 曾經僉使, 頗習兵法云, 故首擬以入矣。景夏曰, 臣頃以申維翰, 使之太常志撰成事, 有所陳稟矣。維翰, 今以瓜滿遞職。此是鄕人, 無職名則難於留京, 其所撰成, 將半途而廢, 宜有變通內遷, 而本寺亦當有窠闕矣。上曰, 雖經奉常正, 亦爲其司之官乎? 景夏曰, 維翰, 只經奉常僉正, 而復職則雖判官·主簿, 亦可爲矣。上曰, 奉常寺有窠則除拜, 可也。羽良曰, 今則解由拘礙, 出解由然後, 可以除拜矣。上曰, 然矣。出擧條羽良曰, 近來玉堂苟簡, 無以備擬, 新錄一時爲急, 而副學在外, 交龜上來, 遲速難期, 誠可悶矣。上曰, 新伯李德重, 何時當下去耶? 景夏曰, 德重新遭其子慘喪, 聞過葬後將下去云矣。上曰, 將欲下敎矣。副學遞差, 其代差出新錄, 斯速擧行, 可也。抄出擧條 上曰, 承旨書之。傳曰, 追惟前朝, 王者之道也。王氏孫調用事, 曾有飭勵, 而其作文具, 申飭兩銓, 而三國之祖, 建祠致祭, 蓋所以追惟舊王之意, 而三國遺裔中, 昔氏·高氏, 尙莫知其誰。高氏則旣有其氏, 令該曹, 尋問其歷調用, 昔氏則今之石哥, 疑或其氏, 亦令該曹, 廣考文獻, 尋問其歷, 登對時稟而調用。翬良書畢。景夏曰, 傳敎如此, 而昔氏之爲石氏, 旣無可據之文, 今雖頒布, 何以搜得乎? 絲綸似宜審愼矣。翬良曰, 此傳敎勿出朝報, 兩銓只奉承傳, 而訪問則似好矣。上曰, 雖出朝紙, 訪問而無則置之。若或有之, 則雖至於上言, 自現之境, 當有的然可據之文, 然後處之, 何難之有? 羽良曰, 聖敎至當, 謹堂奉行矣。上曰, 具宅奎纔經嶺東守令, 又何更除乎? 羽良曰, 淮陽洊經慘凶, 而前官邊聖佑, 淹病廢務云, 是事可悶, 其代宜擇差, 故果擬入矣。上曰, 金弘澤誰也? 羽良曰, 先正臣金長生後孫, 而別薦之人也。景夏曰, 此人曾經桂坊, 卽金鎭玉之從姪也。上曰, 李彦綵無乃宗室子孫, 而李彦熽之行列耶。宗玉曰, 未有聞矣。上曰, 朴載洙何擬此官乎? 宗玉曰, 載洙仕滿而在喪, 故今借此窠, 卽當出六矣。普昱曰, 吏批望筒入啓之際, 一望單子, 有疊入事, 難免不察, 吏曹堂上, 竝推考,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上曰, 承旨書之。傳曰, 親政時入侍注書·尙瑞院官員, 依例陞六。翬良書畢。羽良曰, 命下矣。其中尙瑞副直長李道普, 今番六品講不通, 雖有承傳, 臣曹則據例陳達矣。上曰, 所達是矣。而旣有前例出六, 可也。上曰, 其講何以不通耶? 鼎輔曰, 道普非不通於此講者, 而大抵能文之士, 間或有不通之事矣。兪健基承牌入侍, 翬良曰, 吏房承旨旣已入侍, 代房承旨出去守廳之意, 敢達。上曰, 知道。上曰, 陰城何如是? 羽良曰, 此是薄縣, 而收拾爲難, 故擇差矣。上曰, 李瑗誰也? 羽良曰, 故判書李瑜之從弟也。上曰, 李箕重誰也? 羽良曰, 李台重之兄也。上曰, 李景祚誰也? 羽良曰, 安東府使李普赫之子, 而曾經砥平縣監矣。上曰, 李樟誰也? 景夏曰, 故完豐君李曙奉祀孫, 而衿川縣監遞歸, 幾二十餘年矣。上曰, 三者誰優? 羽良曰, 李箕重, 大典講時見之, 頗純實, 李景祚, 必善治之人, 李樟, 柔善矣。景夏曰, 李箕重牢實, 而李樟則判書之言, 過矣。上曰, 載寧何如是? 羽良曰, 載寧, 今年凶荒特甚, 方伯以擇送爲請矣。上曰, 兪彦徽何如人? 羽良曰, 彦徽, 以善治有聲矣。景夏曰, 彦徽有揮廓之才, 可以善治弊邑者, 此是頃年親鞫時黑面都事也。上曰, 然乎? 其時以罪人趁速拿來, 有所下敎而嘉之矣。上曰, 李顯行何如人? 羽良曰, 李顯行十考十上矣。上曰, 少退, 有頃還入。景夏·命坤等曰, 昇平府院君金瑬奉祀孫百鍊, 南昌君洪振文孫舜元, 皆未收用, 而功臣親孫生存者, 只有舜元一人而已。上曰, 然乎? 癸亥勳臣子孫錄用事, 命下之後, 不卽擧行, 事甚未安, 前後銓官竝推考。出擧條 上曰, 金重萬事, 下敎矣。更思之, 前則雖未經營將, 猶爲內禁將矣。宗玉曰, 豐陵時重營將, 故更爲定式矣。上曰, 經營將然後爲閫帥, 此重營將之意耶? 翬良曰, 此是防內禁將堂上, 而開營將堂上之意也。上曰, 承旨之言, 果是矣。金重萬, 旣是帶礪勳臣, 且經守令·僉使, 異於空堂上矣。宗玉曰, 經營將然後, 始爲內將, 臣固守此法, 而至於功臣, 則何可拘此例乎? 上曰, 然矣。擢其人, 所以重其事也。大訓後, 宜重戊申事故諭之矣。健基曰, 尙瑞院官員安寶時, 承旨一員, 例爲入參, 今番則何以爲之乎? 上曰, 熙政堂則於楹外安寶故, 他承旨入參, 而今番則坐近, 他承旨不必入矣, 置之。翬良, 以淸城僉使文起英病重, 改差草記入啓。上曰, 淸城僉使, 何故卽遞耶? 宗玉曰, 北邊之人, 不樂赴西邊, 渠欲呈遞云矣。戊申春塘臺三中四分之人, 只得承傳, 而尙未見差, 故欲以此代之矣。上曰, 戊申承傳, 尙今不用, 前後銓官竝推考。淸城之旣差還遞, 亦非慰遠人之道, 兵判亦爲推考, 可也。出擧條 上曰, 太學公薦來乎? 羽良曰, 不來矣。上曰, 其何故也? 翬良曰, 頃年尹淳爲吏判時, 太學以不用公薦事, 捲堂承嚴敎, 故似以此不爲之矣。上曰, 豈可仍此而廢古規乎? 在太學之道, 當爲之矣。上曰, 金致謙年幾何? 景夏曰, 雖未的知, 似爲六十五六歲矣。翬良曰, 江華經歷, 卽閑官故, 年老之人, 例爲之矣。上曰, 李孟休, 有相當窠調用, 可也。羽良曰, 時無當窠矣。卽今注書及尙瑞官, 當陞付, 而極爲苟簡矣。上曰, 李海賓誰也? 羽良曰, 故判書李善溥之從孫云, 而臣未及見矣。景夏曰, 此是可用之人, 臣亦未見, 而其儕友皆稱之矣。判書於來見者, 以爲來見, 政官不可用, 於未見者, 以爲未見其人, 亦不可用。且霎時之見, 何以識其人乎? 聖人云, 以貌取人, 失之子羽。臣則以爲取其履歷, 取其久勤, 取其物望, 可也。羽良曰, 近來誰有有物望者乎? 只爲儕流中人而用之, 則豈銓衡之公道乎? 景夏曰, 判書此言, 誠沓沓矣。雖其儕流, 可用則用之, 曲避其嫌, 是亦私也。上曰, 卿則能不爲乎? 景夏曰, 臣於前日待罪本職也, 連有所遭, 獨政之時無多, 而實無互對之事矣。臣墻壁枵然, 無所係着。日昨十一窠, 出於臣手, 而武弁則臣實不知, 故問於兵判而擬望矣。判書互對之規模, 誠狹矣。羽良曰, 其望筒, 金柱星則臣以秋曹郞官使之, 故知其可合, 而李海賓則臣固未審矣。景夏曰, 俄者以黨字陳達, 至被推考, 而臣之規模, 與判書不同矣。判書則必欲互對, 此便是私意, 不能粹然一出於公也。臣意勿論彼此, 惟才是用, 判書互對, 臣實悶之。上曰, 德川何如邑? 宗玉曰, 德川, 僻邑而素饒, 且是兼營將也。羽良曰, 金光國, 爲人勁悍, 曾爲結城縣監, 能祛積年弊瘼, 故首擬以入矣。上曰, 其望中李仁好·朴璲皆何如? 羽良曰, 李仁好差緩, 而朴璲, 近柔, 皆不及於光國也。恂恂長者, 非不好矣, 而於治郡則末也。上曰, 金箕錫曾有長子之稱矣。光國似不足於此郡矣。羽良曰, 此是膽大之人也。上曰, 如李彝章者, 可謂膽大。頃年親鞫時, 任使頗久, 其爲人誠難矣。羽良曰, 如李彝章者, 豈其易乎? 景夏曰, 責人何必盡如此乎? 光國雖不及於彝章, 而足可爲之矣。上曰, 金光國, 頃日入侍時見之, 貌似介精, 而予終不大見之矣。以南延年立節觀之, 人固未易知, 然德川要衝之地云, 故以是爲難矣。光國, 雖爲黨用人, 則各有其路矣。景夏曰, 聖意如以爲不足, 則改擬, 似好矣。上曰, 唯。上曰, 朴時佐前日見之, 其人頗可矣。宗玉曰, 此是趙尙絅從姪, 而臣之軍門幕下也。方任城役, 而失之可惜, 時佐短小精悍, 足可堪任矣。上曰, 李會昌, 軍功乎? 宗玉曰, 雖非軍功, 而曾經府使內外將矣。上曰, 安允文何如人? 宗玉曰, 此亦曾經府使, 膽大可用之人矣。羽良曰, 初則欲授朔州矣, 先聲喧藉, 故過甚而擬此望矣。景夏曰, 判書所達, 心則可尙, 而其言亦沓沓矣。傳言浮過, 未必盡信, 此不承權輿之道也。上曰, 權瀞徵誰也。羽良曰, 故判書權以鎭之子也。上曰, 權以鎭, 曾在忠淸道, 而純實可任之人也。羽良曰, 權以鎭爲戶判時, 因事往其家, 見其諸子, 瀞徵誠可合用, 而且聞以鎭, 亦倚仗此子云矣。上曰, 許砥誰也? 羽良曰, 故相臣許穆之孫也。上曰, 然乎? 許穆有仙風道骨之稱, 且善書, 而眉毛甚長云矣。景夏曰, 眉長故稱以眉叟, 以老職堂上, 超遷至右相矣。上曰, 以此望見之, 吏判之政, 果出於公道, 誠貴矣。已爲落點於副望矣。假監役復有窠乎? 羽良曰, 有之矣。景夏曰, 聖意若欲收用許砥, 則使之改擬, 何妨之有? 上曰, 然則許砥, 更爲擬望, 可也。上曰, 許砥方在何處? 羽良曰, 只聞其名, 而不識其所在處矣。翬良曰, 許砥, 未知方在何處, 而許穆則曾在漣·朔之間矣。上曰, 其末望李道翼誰也? 羽良曰, 故高城郡守李湜之子也。湜, 曾經桂坊, 似或記有之矣。上曰, 然乎? 上曰, 頃日領相所達, 承旨聞知乎? 翬良曰, 臣略聞之矣。宗玉曰, 領相所達, 臣亦聞之。俄承下敎, 未詳委折, 出而聞之, 此恐浮言也。臣家在南山下, 若果有之, 則臣豈有不聞之理? 臣雖不聞, 一洞人, 豈不聞之? 今番北聲之後, 自有騷屑, 而近來則漸熄, 東人好騷屑, 卽俗諺也。乾隆還後, 自可永熄, 此不必致煩聖慮矣。上曰, 設有南北之虞, 予豈動心? 而昔年海浪賊騷屑, 一時盛行而旋止, 今聞卿言, 予心亦然矣。李邦綏所傳, 卿亦聞之耶。地利不如人和, 乾隆事如此, 誠可怪矣。宗玉曰, 臣亦聞邦綏所傳矣。太白晝見, 而雲臺官奏之, 則乾隆拘囚其人, 再次杖打云。人主惡聞天災, 而政不荒者, 未之有也。卽此一事, 其他可知。上曰, 乾隆擧措, 大不及於康熙矣。其中金山寺事, 蹈轍隋煬, 且又色荒特甚云。諺曰, 官無事村無事, 雖無南山事, 而此固不宜放心矣。宗玉曰, 平兵尙不發送, 殊非變通差出之意。臺體今無更發之理, 催促下送, 似好矣。上曰, 蔡膺福事可笑, 武弁色目之說, 尤可異也。宗玉曰, 臺官不救大臣, 況此武臣乎? 上曰, 李邦綏, 予使之訪見備堂矣。卿見之乎? 宗玉曰, 一見之後, 連有公故, 更不得招見矣。上曰, 李邦綏如入直, 使之來待事, 分付。聖運出宣上敎, 李邦綏入侍。上曰, 頃日爾所未盡達之言達之。邦綏曰, 臣之所聞無他。太白晝見之啓, 不言某方, 只言方書, 以爲大動盜兵之應云爾, 則皇帝以爲妖言, 決杖三十度, 其後二日, 又杖二十度, 方在死境云矣。上曰, 皇帝幾日離發耶? 邦綏曰, 聞八月十九日起身, 九月二十日入來, 而其間若或不寒, 則九月二十五六日間入來之意, 分付瀋陽將軍云矣。今見狀啓, 則日字差進, 此則臣所不知矣。上曰, 居庸, 關內地名耶? 邦綏曰, 居庸, 是關外也。熱河, 距北京七日程, 而卽其行宮也。臣路程記, 熱河以前, 不書地名, 自口外以下, 始書地名矣。上曰, 度其行, 卽今當抵何界耶? 邦綏曰, 卽今則未知的到何界, 而九月念間, 當到瀋陽矣。其時聞太后皇后行, 何可倍站云矣, 今見狀啓如此, 無乃倍站而然耶? 上曰, 倍站而行, 則軍民何以支堪耶? 邦綏曰, 以每日六十里一站計之, 則九月二十五六日間當抵矣。上曰, 口外是何界耶? 邦綏曰, 口外, 卽蒙古地方, 距瀋陽未的其爲幾里, 而自北京距瀋陽二千餘里。以此計之, 則口外距瀋陽, 當爲七八百里矣。北京, 以冬至爲大名日, 皇帝親自行祭, 故必趁此入去云矣。上曰, 灣尹狀啓, 承旨讀之。翬良讀畢。上曰, 雖以此狀啓觀之, 此只是行獵, 初無謁陵之事矣。翬良曰, 然矣。上曰, 其地人心, 何如? 邦綏曰, 沿路訪問, 則民間頗安頓, 只聞有皇帝之行而已。其道路廣, 可用五馬隊, 而高則過腰, 別爲修治道路。蓋其土品湫濕, 小雨輒泥濘, 牛馬陷則不能拔出, 故如是高築, 而彼國無加乃, 只是鍤鋤而已。以此治道之役, 頗難云矣。上曰, 然則軍民呼冤矣。軍士則一軍長立耶。抑替番而來耶。邦綏曰, 無替番事, 一軍長立, 而精抄二萬, 大臣以下家丁, 竝十萬云矣。路費各給銀子六十兩, 而此非白給也。以一年朔料計給, 仍充來年朔料之數, 而所費則此外又將倍入, 故渠輩以此呼冤矣。上曰, 退去。路程記來納政院, 可也。邦綏退出。上曰, 訓鍊副正, 亦有擬望之次耶? 宗玉曰, 首望則舊望, 而副末則新通矣。上曰, 沈運熙誰也? 羽良曰, 運熙今始陞六, 臣未及見, 而聞靑平尉族屬云矣。上曰, 肅川何如邑也? 景夏曰, 西關路邊之邑也。上曰, 柳世德, 是柳濬之子耶? 羽良曰, 然矣。此是年少武弁, 而可用之人矣。上曰, 平壤庶尹何故, 以歙谷縣監擬入耶? 羽良曰, 平壤, 營下劇邑, 所當擇差, 而趙鎭泰, 臣不識面, 閔應洙爲嶺伯時, 鎭泰爲玄風, 第一治, 歙谷之治, 亦如玄風。平壤膏腴之邑, 求者甚多, 鎭泰卽無勢之人, 故擬入矣。上曰, 此則吏判之心, 果公矣。景夏曰, 其望三望皆好, 鎭泰歙谷, 卽臣所差遣者也。副望安錞, 曾經金堤倅, 而頗精詳矣。上曰, 李堣誰也? 羽良曰, 故大諫李嵇之孫也。上曰, 趙鎭泰, 其中最微者耶? 景夏曰, 坐地孤單, 而無勢則一也。上曰, 李邦綏路程記之在備局者, 注書持來。聖運, 承命持入。上, 令承旨, 見其題目。翬良曰, 杭城洋壩頭絳雪齋監製十字書之矣。上曰, 此是印本耶? 彼人凡事皆如是矣。上曰, 此路程記, 注書還爲出付, 使之留置備局, 可也。景夏曰, 古人有擧其親族之事, 鄭益良旣經訓正, 此是當次之人, 豈可以親嫌, 不爲擬望乎? 上曰, 與吏判爲幾寸乎? 羽良曰, 與臣爲六寸親矣。上曰, 郡守望則左遷, 而其年幾何? 景夏曰, 其年似過三十矣。羽良曰, 謂之擧親, 雖至親之人擬望, 而無所留難, 則其流之弊, 將不可勝言矣。上曰, 此則吏判之言是矣。景夏曰, 判書必欲互對, 故分排五色, 臣實不取矣。羽良曰, 擺脫規模, 則亦無以界限矣。景夏曰, 五色之人, 分排互對, 非自然之道, 國家用人, 毋論東西南北, 唯其才望是擇, 宜矣。上曰, 地有五方, 文有五彩, 此則不可無, 而人之五色, 不可有矣。吏參又以五色之說陳達, 推考, 可也。出擧條 上曰, 洪泰培誰也? 宗玉曰, 泰培, 卽安東府使李普赫妻娚也。膂力過人, 而屢次靳點, 尙未經摠府矣。上曰, 然乎? 予非靳點也。不識何狀, 故以常調知之矣。上命翬良, 書持平洪正輔, 判義禁鄭錫五等疏批, 又命書嶺儒成憲柱等疏批。上曰, 於渠家安坐讀書, 可也。胡爲乎遠來投章耶? 頃日有以李縡事陳達者, 此蓋舊套也。如此浮夸之習, 可痛故不爲敍召耳。李縡若死, 則亦將請文廟配享耶。良可駭也。上, 又命書司直閔應洙, 修撰金時粲, 承旨韓師得, 正言趙炳彬疏批。上曰, 趙炳彬, 曾經注書乎? 翬良曰, 經注書者, 卽趙漢彬也。上曰, 炳彬誰也? 翬良曰, 故相臣趙泰億之子也。上曰, 何時出六乎? 翬良曰, 年前被翰薦而敗薦, 頃者始出六矣。上曰, 炳彬疏中尹得和事, 何事耶? 翬良曰, 炳彬翰薦時, 得和敗薦, 故其疏有所云云矣。上曰, 少退, 有頃還入。健基曰, 今此親政, 雖有一日內畢之之敎, 而將致夜深, 聖體必有傷損之節, 今則姑罷, 似爲得宜矣。上曰, 旣令今日內畢政, 雖至夜深, 何傷之有? 羽良曰, 庇仁縣監李夏祥, 擬望受點矣。聞如本道水使相避云, 在法當遞。李夏祥改差, 何如? 上曰, 依爲之。宗玉曰, 吏批政李義豐, 除拜谷山府使矣。義豐方帶禁軍別將, 當此陵幸迫近之日, 不可出送, 而近來禁軍馬政極疎, 頃者臺諫, 以馬兵事爲言, 而禁軍之馬, 甚於禁軍矣。義豐精悍安詳, 故委以軍政, 頗有成效。且今各軍門亞將乏人, 尤不可不念。義豐別將之任, 仍任, 何如? 上曰, 依爲之。宗玉曰, 崔後泰, 俄者首擬訓判, 未得受點, 連次首擬未安, 而後泰之子嵒, 以宣傳官出六, 已爲訓鍊主簿, 故不得已更爲擬入矣。上曰, 然乎? 都摠都事如有闕, 則更擬以入, 可也。羽良曰, 崔後泰卽嶺人, 臣曹欲除守令, 而未及爲之矣。景夏曰, 親政, 不但下情之上達, 實盛擧也。上曰, 然矣。上下之情, 果然流通矣。宗玉曰, 親政如常參, 人君所當行之事也。上曰, 吏議事慨然矣。終日點點, 曾無一言, 何也? 珽曰, 臣坐處稍間, 各有所掌, 自然如此矣。景夏曰, 參議雖黽勉參政, 而自謂情勢難安, 凡於政注, 一不可否, 臣實慨然也。上曰, 李壽頤誰也? 羽良曰, 此是頃日左相所薦著述尊周錄之人也。上曰, 白尙賢誰也? 宗玉曰, 故參贊臣白仁傑之孫也。上曰, 李翼鎭誰也? 宗玉曰, 判書李箕鎭之弟也。上曰, 李希魯誰也? 宗玉曰, 故巡邊使李鎰之後孫也。李鎰, 嘗爲宣傳官, 作爲大椎, 至今尙在, 稱之曰李鎰椎云矣。上曰, 姜師運誰也? 宗玉曰, 嶺南人, 而人物極可用矣。上曰, 鄭來觀誰也? 宗玉曰, 此是京人也。上曰, 徐必修誰也? 宗玉曰, 臣之十寸孫, 而將鬼薦, 六兩居首, 故不暇顧親嫌而擬入矣。景夏曰, 同姓十寸, 便是至親, 兵判之擧擬, 臣未敢謂出於公道矣。宗玉曰, 吏參之言, 臣實愧之, 而俄者吏參, 以吏判之不擧六寸鄭益良爲非, 今則責臣以十寸之副擬, 何其前後之言矛盾也? 景夏曰, 鄭益良, 以訓正備擬郡守, 此是階梯職, 而徐必修則初入仕也。臣言豈有矛盾乎? 上曰, 金德觀誰也? 宗玉曰, 此北道人也。上曰, 鄭恒齡誰也? 羽良曰, 恒齡, 眞文章之士也。景夏曰, 未必其爲能文章, 而文名則有之矣。上曰, 尹熙復誰也? 景夏曰, 故吏議尹星駿之子也。上曰, 然則於尹德駿爲誰乎? 羽良曰, 卽德駿之從姪也。上曰, 金由行何人也? 景夏曰, 故相臣金昌集之從孫也。上曰, 李復祥誰也? 景夏曰, 故相臣李健命之孫也。羽良曰, 崇陵參奉, 姑未作闕, 而望筒預書之故, 徑先入啓, 惶恐矣。上曰, 柳聖躋誰也? 羽良曰, 京畿監司柳儼之子也。上曰, 朴好源誰也? 羽良曰, 前承旨朴師昌之子也。上曰, 任得中誰也? 羽良曰, 判書鄭錫五之甥姪, 而學問之士也。上曰, 禮賓參奉望, 是何人也? 羽良曰, 此頃日變通作中庶之窠者也。上曰, 李學中誰也? 羽良曰, 故參議李元祿之孫也。上曰, 權噵誰也? 羽良曰, 故判書權之子也。上曰, 李在誰也? 羽良曰, 西川君之子, 而前日別薦者也。上曰, 李明吾誰也? 羽良曰, 參判李重庚之子也。上曰, 田光國誰也? 宗玉曰, 長湍府使田雲祥之子也。上曰柳光宅誰也? 宗玉曰, 京人, 而其祖爲蔭官云矣。宣傳官不但近侍也。來頭閫望·將望, 皆自此出, 故臣各別愼擇。今此擬望中勿論高下, 皆是可用之人, 將來必做者也。上曰, 黃㯙誰也? 宗玉曰, 黃梓之姓族, 而在任在喪, 故其下亦以在任在喪, 前銜擬望矣。上曰, 李燦誰也? 宗玉曰, 此是宗室子孫, 而將鬼薦最久遠者也。上曰, 柳夏徵何人也? 宗玉曰, 禁衛哨官也。部將守門將望, 皆以柳葉箭三巡, 兵書一冊, 別試才取其優等, 以次擬望矣。上曰, 洪侃誰也? 羽良曰, 故忠臣洪翼漢奉祀孫也。上曰, 李喜觀誰也? 羽良曰, 庶孽而有文名, 三望皆然矣。上曰, 宋淳明誰也? 羽良曰, 故大諫宋敎明之弟也。上曰, 韓處相誰也? 景夏曰, 西平府院君韓浚謙奉祀孫云矣。上曰, 與韓德良爲幾寸乎? 羽良曰, 與德良, 寸數遠矣。上曰, 趙國觀誰也? 羽良曰, 此鄕人也。景夏曰, 此是故儒臣趙昱之後孫也。上曰, 鄭運維誰也? 羽良曰, 承旨鄭必寧之子也。師夏以旣陞典籍, 將爲退去之意酬酢。翬良曰, 筵席事體至嚴, 而注書任師夏, 私語酬酢, 殊甚猥屑, 推考,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吏兵批畢。宗玉曰, 大政過後, 便是銓官瓜限。臣方在應遞之科, 而陵幸時有預先定奪者, 敢達。自前遠陵行幸時, 太僕馬及軍兵馬草, 例自各邑進排, 而近陵則無此前例, 畿伯論報備局, 備局亦許之矣。槪以事體言之, 陵所凡百, 地方官所當進排, 而以其有弊, 故朝家一切省減, 而至於馬草之當辦者, 何可不進排乎? 伊日回鑾, 若値日暮, 則各軍門許多軍馬, 必致飢困, 亦無自備喂養之道。臣意則一如遠陵例, 太僕及各軍門馬草, 令各邑進排, 宜矣。上曰, 雖無前例, 事體則然, 依所達爲之。出擧條 上曰, 擧條紙二丈入之, 聖運持入。上, 親製心字詩一句, 親寫二紙, 分下吏兵批承旨。仍敎曰, 入侍諸臣, 各製聯句一隻以進, 羽良·宗玉等, 雙擎奉玩。宗玉曰, 今下寶什, 仍有賡進之命, 臣等實爲感幸。賡載之歌, 始自唐·虞, 此固尙矣。降而至漢, 亦有柏梁聯句, 雖不足法於聖代, 而各以職掌述懷, 朝儀又可見矣。景夏曰, 臣於宸章中, 幾年固志四字之意, 未能諦得, 臣請詳承聖意所在然後, 始可製進矣。上曰, 予之固志, 凡幾年矣。俄者雖以卿言之, 五色之說, 陳於前席, 豈可謂予志之遂耶? 此所以有唯待元良遂予心之句矣。諸臣齊聲對曰, 聖意甚盛, 臣等謹當賡進矣。宗玉曰, 今若各以一句和進, 而職次排句則好矣。上曰, 所達好矣。依爲之。宗玉曰, 諸臣各自構思, 則簾必未叶, 韻且易疊, 景夏以詞臣入侍, 使之拈韻, 分排製進, 亦好矣。上曰, 然矣。而各於當句, 叶簾可矣。景夏, 請入韻冊。上曰, 唯。聖運, 持入韻冊, 景夏各拈一韻, 書塡諸臣名下。健基曰, 吏參用私, 自取好韻字, 而分難韻字於臣等矣。上, 笑曰, 豈於此用私乎? 景夏曰, 臣旣分韻, 人情豈不欲自取好韻字? 而倉卒分韻, 臣亦未暇擇其好字矣。上, 命宣醞, 諸臣皆以無酒量爲辭, 或傾或否, 酒三行, 上曰, 吏議加賜二酌, 吏議酒量, 與尹光毅何如耶? 珽曰, 臣少時, 酒戶未必多讓於尹光毅, 而自有痰病, 久已廢飮矣。景夏曰, 任珽過飮生酒病, 更勿賜酒, 何如? 上曰, 吏議所噉甚少, 此必酒害也。有痰者, 素不能善飮食矣。上曰, 郞官中有善飮者乎? 得載曰, 臣等俱無善飮者矣。上曰, 李彝章飮酒乎? 彝章曰, 臣只飮一盃矣。仍撤盤。上曰, 翰注隨其製進, 推移記事, 可也。諸臣先後製進。上, 以宗玉製進詩, 下示景夏。景夏曰, 下則進砭箴之言, 而自上虛襟容受爲好矣。上顧宗玉曰, 吏參所對, 與予下問之意, 異矣。宗玉曰, 未識臣詩意而然也。景夏曰, 臣今始覺得, 俄者臣言, 不過一時相規之意, 而兵判至發於詩, 似有芥滯矣。宗玉曰, 臣雖無虛受之量, 吏參之言, 何可芥滯乎? 上, 以摠戎使具聖任疏, 下示諸臣, 命各陳所見。羽良曰, 倉卒承敎, 不能仰對。臣當於退出後, 詳見原疏, 後日登對時, 仰陳所懷矣。宗玉曰, 凡守城之法, 必有雉城, 而城外五里許, 淸野然後, 方可議保守之道, 而都城制度, 恐不可輕議於此等事矣。景夏曰, 臣未及詳見其疏, 而其能深識利害, 則臣未知也。大凡論事, 曰可曰否固好, 而各立己見, 必欲角勝, 實有弊矣。臣於江都築城, 竊有深悶, 日昨辭疏, 尾陳屈贏之意矣。臣嘗問左相曰, 我國雖偏邦, 亦堂堂千乘之國, 以宗社百官, 入於一片海島, 決非萬全之道。昔宋太祖欲取幽州, 趙普曰, 陛下將使何人取之乎? 太祖曰, 欲使曹翰取之。普曰, 將使何人守之乎? 太祖曰, 欲使曹翰守之。普曰, 曹翰死, 更使何人代之乎? 太祖遂不取幽州。今江都, 固金湯, 而萬一失險, 將往何處? 四面滄海, 不過航海而已。左相亦不能答矣。目前固無變亂, 決不可輕發去邠之論, 而使敵人, 過靑石洞, 渡臨津江, 則都城亦難守矣。連歲凶荒, 生民倒懸, 此時築城耗財, 豈曰得計乎? 上曰, 領相所達, 兵判則未聞云矣。景夏曰, 兵判, 將臣, 故爲此鎭定之言也。上曰, 吏議亦有所見於築城事乎? 珽曰, 此是國家大事, 固不敢輕議, 而第天險之地, 無踰都城, 堅守之道, 當以都城爲主, 故曾在戊申賊變時, 或不無去邠之議。臣於其時, 至欲獨疏, 爲死守之計, 今豈有他意乎? 上曰, 予意亦以城守爲是, 若以修築江都之物力, 修補都城則好矣。江都予亦見之, 此非可棄之地, 亦有可用之時矣。但非卽今緊務, 左相聞之, 似以爲如何, 而摠戎使則予以爲臆見之智矣。予本有守都城之心, 而築城江都, 實有兩般心矣。以私家言之, 京鄕兩家, 必有分置之心矣。景夏曰, 聖敎至當, 而今時非其時也。左相之言雖如此, 不宜汲汲築之矣。上曰, 原疏留中矣, 出給之。卿等持去備局, 更爲詳見, 講確於大臣而陳達, 可也。景夏曰, 天將向曙, 臣等退去, 姑俟後日大臣入侍, 更陳所懷矣。上曰, 諸臣製進時, 注書出去, 以職次, 正書二件, 一則內入, 一則入于東宮, 可也。諸臣以次退出。東方明矣。吏批, 以李尙彦·尹光蘊爲繕工假監役, 沈鑰爲安陰縣監, 朴弼濂爲鎭岑縣監, 李普萬爲漣川縣監, 尹堣爲尙衣別提, 沈運熙爲氷庫別提, 尹德春爲司饔主簿, 韓命德爲漢城參軍, 崔齊恒爲良才察訪, 鄭東潤爲延曙察訪, 睦宗夏爲銀溪察訪, 朴道郁爲金郊察訪, 李瑞彪爲長水察訪, 吳遂采爲副提學, 朴鳳漢爲繕工主簿, 兪肅基爲刑曹正郞, 李廷煜爲東部奉事, 李鎭儀·閔鎭龍爲典籍, 李世瑍爲松羅察訪, 鄭來僑爲利仁察訪, 金世選爲安奇察訪, 金弘澤爲金溝縣監, 洪尙輔爲韓山郡守, 鄭來周爲南陽府使, 金致謙爲江華經歷, 金遇喆爲平山府使, 具宅奎爲淮陽府使, 兪彦徽爲載寧郡守, 李仁濟爲司圃直長, 金孝大爲司䆃直長, 兪迪基爲尙衣直長, 申㬇爲繕工奉事, 李德寅爲陰城縣監, 吳光運爲弘文提學, 李瑗爲和順縣監, 尹鵬擧爲泰川縣監, 蔡膺一爲丹城縣監, 李震炳爲眞寶縣監, 李樟爲靑陽縣監, 徐有常爲安峽縣監, 具熺爲掌苑別提, 趙宗裕爲司畜別提, 朴垂裕爲省峴察訪, 元弼揆爲宣川府使, 李命峻爲長興府使, 盧啓楨爲昌城府使, 李彦燮爲朔州府使, 具善復爲順川郡守, 安允文爲慶源府使, 朴時佐爲通津府使, 尹益東爲慶山縣令, 金柱星爲積城縣監, 宋翼運爲司評, 李景祚爲刑曹佐郞, 徐宗遜爲工曹正郞, 安商楫爲禁府都事, 沈錪爲內贍主簿, 崔景興爲南部都事, 李麟祥爲引儀, 李義豐爲谷山府使, 金德厚爲興海郡守, 徐進修爲禁府都事, 鄭錫台爲宣陵直長, 申泓爲順陵直長, 洪啓鉉爲司宰直長, 金行一爲興德縣監, 趙東濟爲德川郡守, 呂攀爲郭山郡守, 權瀞徵爲繕工假監役, 李廷瑗爲義盈直長, 金始㷜爲同義禁, 金敬一爲泗川縣監, 丁喜愼爲沃溝縣監, 李夏祥爲庇仁縣監, 朴龍秀爲延安府使, 盧脩爲監察, 趙明奎爲司宰僉正, 李彦衡爲楊口縣監, 沈運熙爲監察, 呂榮祖爲保安察訪, 沈潤海爲祥雲察訪, 李始充爲靑丹察訪, 趙鎭泰爲平壤庶尹, 柳世德爲肅川府使, 李尙彦爲繕工監役, 許砥爲假監役, 金錫基爲長淵府使, 鄭敞選爲奉常僉正, 洪泰培爲昆陽郡守, 李邦綏爲博川郡守, 金宅壽爲引儀, 朴良藎爲舒川郡守, 洪正度爲繕工奉事, 趙㷜爲平市直長, 李蓍泰爲氷庫別提, 尹暻爲瓦署別提, 尹堣爲戶曹佐郞, 閔百亨爲掌樂主簿, 兪彦民爲刑曹佐郞, 金是最爲開城留守, 金景汝爲黃山察訪, 朴善源爲長興奉事, 朴晉揆爲內資奉事, 朴時晉爲內瞻奉事[內贍奉事], 南泰觀爲司饔奉事, 洪益大爲禮賓奉事, 宋思欽爲氷庫別檢, 李復齡爲西部奉事, 鄭再河爲北部奉事, 趙漢弼爲中部奉事, 柳逅爲南部奉事, 尹尙靖爲尙衣別提, 李仁好爲司藝, 南泰湜爲谷山府使, 韓命夔爲贊儀, 李壽根爲校檢, 安錞爲司饔僉正, 趙明鼎爲兵曹正郞, 李弘佐爲司䆃僉正, 金益魯爲東部都事, 文天擎爲庇仁縣監, 權世隆爲歙谷縣監, 尹之彦爲北部都事, 金孝大爲掌樂主簿, 李壽頤爲長興主簿, 申思彦爲端川府使, 尹光蘊爲繕工監役, 安正仁爲咸安郡守, 朴鍵爲雲峯縣監, 崔慶老爲海美縣監, 閔宇采爲司儀, 李孟休爲禮曹佐郞, 申光著·柳顯章爲典籍, 李毅中爲待敎, 崔齊泰·康德衢爲成均博士, 楊夢寅爲學正, 尹心衡爲執義, 李夏宗爲獻納, 安德亨爲昌陵令, 尹澤休爲相禮, 兪彦宗爲司䆃直長, 李宇濟爲社稷直長, 尹暻爲司僕主簿, 任師夏·李聖運爲典籍, 金允升爲西部都事, 李道普爲敦寧主簿, 尹熙復爲繕工假監役, 金由行·鄭恒齡·羅蔘爲童蒙敎官, 金致溫爲禧陵參奉, 李復祥爲長陵參奉, 柳聖躋爲貞陵參奉, 朴好源爲章陵參奉, 任得中爲思陵參奉, 李學中爲英陵參奉, 朴聖俊爲厚陵參奉, 李明吾爲長寧殿參奉, 李喜觀爲典獄參奉, 洪侃爲恭陵參奉, 李在爲順陵參奉, 權噵爲昌陵參奉, 桂德海爲禮賓參奉, 李煦爲典獄參奉, 趙重鼎爲司圃別提, 具世溫·康聖路爲引儀, 李景祚爲刑曹正郞, 韓宗協爲活人別提, 任瑜爲典獄主簿, 任安世爲儀賓都事, 尹光纘·金善行爲兵曹佐郞, 李九成爲奉常主簿, 鄭運維爲崇陵參奉, 趙國觀爲莊陵參奉, 鄭衡周爲司宰奉事, 朴師建爲掌苑奉事, 韓光肇爲兵曹正郞, 朱炯正爲繕工副奉事朴師羽爲濟用副奉事, 李廷鎭爲尙瑞副直長, 尹寏爲瓦署別提, 尹琰爲尙瑞直長, 韓處相爲敦寧參奉, 韓翼謩爲漢學敎授, 李希送爲司評, 宋龜明爲刑曹佐郞, 吳泂爲造紙別提, 金垕重爲司饔主簿, 權琦·林梓·慶晩爲假引儀, 前僉知韓囿彦, 今加嘉善, 玉果縣監鄭東良, 今加通政事承傳, 吏批畢。兵批, 以趙東晉爲滿浦僉使, 崔台耉爲安興僉使, 朴嗜覃爲蝟島僉使, 李德耉爲阿耳僉使, 吉朝揆爲昌洲僉使, 許鉍爲神光僉使, 趙衍福爲忠原營將, 元重會爲洪州營將, 李鎭衡爲順天營將, 韓佾·具偀爲訓鍊僉正, 黃寀爲都摠都事, 朴載洙爲部將, 李世茂爲登山串僉使, 李東春爲兔城僉使, 李世燁爲車嶺僉使, 李必潝爲月串僉使, 李玄年爲古群山僉使, 崔日徽爲古今島僉使, 曺熙泰爲平薪僉使, 李廷碩爲龍媒僉使, 劉光世爲恃寨僉使, 具學萬爲訓鍊判官, 李衡佐爲同知, 李挺宇爲僉知, 李彦綵爲訓鍊判官, 李章吾爲都摠經歷, 文起英爲淸城僉使, 彭龜陽爲天磨僉使, 李弘祥爲舒川浦萬戶, 韓弼良爲位羅萬戶, 尹勉亨爲宣傳官, 韓佾爲慶尙右兵虞侯, 趙台壽爲幕嶺萬戶, 文時郁爲知世浦萬戶, 鄭益良爲訓鍊正, 崔致雲爲梨洞萬戶, 張載漢爲植松萬戶, 李萬齡爲唐浦萬戶, 洪太寅爲長峯萬戶, 金萬麟爲甘浦萬戶, 尹世平爲山羊會萬戶, 洪萬澤爲靑水萬戶, 韓泰彬爲森森浦萬戶, 韓聖緖爲玉江萬戶, 金萬柱爲馬島萬戶, 安東一爲全羅左水虞侯, 李儀鳳爲木浦萬戶, 金俊起爲阿吾地萬戶, 鄭尙和爲平山萬戶, 金翊漢爲豪打萬戶, 金萬剛爲南桃萬戶, 朴世禧爲豐浦萬戶, 崔洽爲古突山別將, 金世彧爲長木浦別將, 金萬鎰爲舊所非別將, 鄭大鎭爲大峴山城別將, 安萬碩爲首陽山城別將, 張世和爲禿用山城別將, 金天倫爲長壽山城別將, 梁世俊爲豐山萬戶, 高徽泰爲方山萬戶, 韓興弼爲慈母山城別將, 柳懋爲訓鍊副正, 盧處仁爲訓鍊判官, 具宗煥·崔嵒·李重澤·朴台炡爲訓鍊主簿, 成碩禧爲都摠都事, 崔世輔爲都摠經歷, 朴尙觀爲淸城僉使, 金瀁爲彌串僉使, 金有漢爲保山萬戶, 李國亮爲同知, 李章吾爲訓鍊副正, 金兌興爲忠壯將, 鄭寅吉爲忠翊將, 李伸爲五衛將, 皮世麟爲僉知, 金有岡爲造山萬戶, 吳盛載爲蝟島僉使, 金尙秋爲露梁別將, 李夏鼎·姜行健爲訓鍊主簿, 朴聖錫·金光胤·沈佖爲五衛將, 沈義希·李顯升·鄭運喆爲都摠經歷, 具德勳·姜啓國·崔復泰爲都摠都事, 黃寀爲宣傳官, 崔吉祚爲中樞都事, 鄭基慶爲訓鍊僉正, 李眞協爲雲寵萬戶, 李璜爲魚面萬戶, 金用九·李師德·李翰台·申泰河·申晣·金台柱·鄭㙉爲武兼, 崔嵒爲鎭同萬戶, 尹景淵爲訓鍊主簿, 沈尙晉爲武兼, 崔漢標爲訓鍊主簿, 金好謙·河大淵·李興遠·李一范·柳夏徵·曺夏升·朴奎晃爲部將, 白尙賢·李翼鎭爲四山監役, 金處恒·金德觀爲守門將, 金重萬爲兼司僕將, 李希魯·李明運·姜師運·鄭來觀·田光國·南益祥·李長㷜·安龍一·黃㯙·李世祐·李燦爲宣傳官, 蔡挺夏爲武兼。權管秩, 舊乫波知韓命仁, 牛作仇非黃錠, 雙靑金德龜, 西水羅李世徵, 小吉號里李泰鼎, 廟坡權管安益煥, 江口柳聖協, 同仁洪廷翼, 小農堡鄭翊臣, 兵批畢。

승정원일기 영조 19년 8월 9일 (기미) 우리 가문에 대한 조정의 논의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검토와 주석이 필요하고 다 번역하면 30쪽 정도나 될 듯합니다.

1743년 8월9일 8시에(初九日辰時), 왕이 정합에 납시어上御養正閤, 친정했다 親政。왕세자가 입시시에 옆에 앉아 시중들고 王世子陪座入侍時, 동부승지 이보욱 同副承旨李普昱, 서기관 임사하 記事官任師夏, 서기관 오언유 記事官吳彦儒, 이조판서 정우량 吏曹判書鄭羽良, 참판 원경하 參判元景夏, 참의 임정 參議任珽, 정랑 윤득재, 이이장 正郞尹得載·李彝章, 좌랑 남태기, 이영복 佐郞南泰耆·李永福, 이 동쪽에 도열하고 列于東, 우부승지 정휘량 右副承旨鄭翬良, 가주서 이성운 假注書李聖運, 서기관 정원순 記事官鄭元淳, 병조판서 서종옥 兵曹判書徐宗玉, 참판 어유룡 參判魚有龍, 참의 이정보 參議李鼎輔, 참지 이명곤 參知李命坤, 정랑 이섭원 正郞李燮元, 좌랑 한광조, 조태상, 조명정 佐郞韓光肇·趙台祥·趙明鼎, 이 서쪽에 도열하여 列于西, 여러 신하들이 나아가 엎드렸다 諸臣進伏訖。

(정)우량이 아뢰었다 羽良曰, 지금 이 도정은 今此都政, 각기 금부도사, 장예원, 형조랑관으로 꽉차있습니다 各岐仕滿禁府都事·掌隷院·刑曹郞官, 각 관리들은 서로 맡기를 피하고 미루고 있습니다 各司久任相避竝擬, 어찌 해야 합니까 何如? 왕이 말하길 上曰, 서로 도와서 하라 했다 依爲之。

(정)우량이 아뢰었다 羽良曰, 守令多窠, 今當差出, 而擬望之人乏少, 未準朔人, 竝擬, 何如? 上曰, 依爲之。

羽良曰, 邊邑或災邑守令差出之際, 不可不擇差, 而在職中擬望之人乏少。 他道未準朔有聲績人, 別擇備擬, 何如? 上曰, 依爲之。 宗玉曰, 滿浦僉使, 今當差出, 而江邊重鎭, 不可不另擇, 堂下三品中竝擬, 何如? 上曰, 依爲之。 宗玉曰, 今番兵批陞六者數多, 訓鍊主簿武兼, 當出二十三窠, 而見窠僅可爲二十, 其外三窠, 則當付司果矣。 上曰, 鄕人多年積仕而無勢者, 若付司果, 則誠爲可矜。 此則陞付實職, 宣傳官中三人, 司果出六, 宜矣。 宗玉曰, 吏批雖出守令窠, 而次次遷轉之際, 將致夜深矣。 上曰, 然矣。 上曰, 虞人期獵, 猶不可失信, 況親政乎? 頃日大射禮時, 執事官承傳, 今番都政, 盡爲擧行, 可也。 羽良曰, 當依下敎擧行矣。 羽良曰, 四守令遷動, 固爲重難, 而四品人絶少, 郡守望, 無在職者, 難以備擬矣。 上曰, 復職似好耶。 羽良曰, 復職則難矣, 不得已以他守令備擬矣。 上曰, 今番吏曹郞廳皆可合, 而漸似擇差, 恐有又弊, 不必甚擇好矣。 羽良曰, 兩司望中, 自可擬差矣。上曰, 然而亦當稍別於兵曹郞官也。 宗玉曰, 然矣。 騎郞則可以東可以西者, 皆爲之矣。 景夏曰, 騎郞則未通淸者皆爲之, 翰林出身亦爲之, 而吏郞則以有聖敎, 不敢擬望。 吏郞今爲兩司通差之窠, 翰林獨未得擬差, 似爲班駁, 今後竝令通擬, 何如? 上曰, 依爲之。 出擧條羽良曰, 蔭官參下, 大典以三十朔出六, 而皆計日出六, 自是三百年不刊之法, 而中間有計朔之謬例, 至於禁府都事, 自辛酉年, 又有計朔之規, 躁進之習, 誠可慨然。今後則參下蔭官, 毋論桂坊·禁都。 又申計日出六之令, 永爲定式, 何如? 上曰, 依爲之。 出擧條羽良曰, 繕工監役, 卽蔭仕出六之捷徑, 近年以來, 橫出之路太闊, 除拜數朔, 或半年圖差別工作, 輒爲陞六, 聞工判申思喆所言, 曾在先朝, 設都監外小小工作, 無得陞六事, 有所定式云。 大抵都監則事體重大, 宜許陞六, 而恩典亦不可太濫, 躁進之路, 不可不塞。此後更爲定式, 設都監外, 他餘工作之陞敍出六, 一切勿許, 恐爲得宜, 故敢達。 上曰, 所達誠是, 依爲之。 都監外設或忘置定規, 而有所下敎, 政院據例達之, 可也。 出擧條景夏曰, 臣則以舊制變通爲難矣。 羽良曰, 此卽復古, 非變通也。 上曰, 郞廳四人, 出草正書, 則似易矣。 翬良曰, 然矣。 上曰, 承旨書之。 傳曰, 十考十上, 五考五上, 純褒抄啓守令·邊將調用事, 每都目申飭, 而作爲文具, 況親政乎? 另飭兩銓。 傳曰, 居官淸潔人之孫, 臨戰效忠人之孫, 錄用之命, 都政例也, 而亦作文具, 另飭兩銓。 傳曰, 調用舊功, 而後可勸將來, 軍功調用, 都目每下, 而迄過十年, 人心狃解, 頃者相箚, 可以推知, 爲國效力, 文具調用, 更不檢擬, 人孰爲國樹力? 另飭兩銓。 傳曰, 西北人·松都人調用事, 每都目申飭, 而作爲文具, 況親政乎? 另飭兩銓。翬良書畢。 上曰, 高麗子孫調用事, 前旣下敎, 而三國子孫, 亦有之耶? 羽良等曰, 三國子孫, 多有之矣。 上曰, 朱蒙子孫, 亦有之耶? 宗玉曰, 此則代遠, 未知其必有矣。 有龍曰, 應有之, 而似或改姓矣。 上曰, 箕子子孫, 改姓爲鮮于與韓哥矣。 景夏曰, 韓哥則卽今京中大族, 皆其子孫也。 奇哥亦有之, 而此亦兩班也。 上曰, 嚴瑀, 頃以金枝玉葉, 謂之來歷不明, 而奇哥若是兩班, 則何不收用耶? 吏參當初除拜時, 有濟牧除授之敎, 而旣知有奇氏後孫, 不爲收用, 吏參推考。 抄出擧條景夏曰, 臣爲湖南御史時, 薦奇珽龍, 而銓曹不用, 其後臣待罪銓官, 而其人已故, 不能收用, 心甚惜之矣。 上曰, 李彝章, 亦曾經湖南御史, 奇哥之可合錄用者見之乎? 彝章曰, 湖南多奇姓人, 而可合錄用者, 未之見也。 且箕子至箕準國絶, 而箕之改姓爲奇者, 臣亦不能的知矣。宗玉曰, 元景夏, 只經吏參, 收用儒生, 非其職也。 上曰, 吏參異於兵參, 猶有收用之路矣。 上曰, 朱蒙子孫, 果無耶? 卽今朱哥, 是其子孫耶? 羽良曰, 朱蒙子孫, 安知其尙爲朱哥乎? 上, 笑曰, 旣是朱蒙之後, 則寧有非朱哥之理? 景夏曰, 朱蒙之朱, 非姓而卽名百濟始祖溫祚, 卽朱蒙之子也。 上, 笑曰, 豈其然乎? 仍命注書, 持入東國歷代摠目。 聖運承命持入。 上曰, 承旨披閱考達。 普昱曰, 溫祚果是朱蒙之子也。 上曰, 予未及知之, 元景夏之言, 是矣。 上曰, 領相, 頃以撫安大君事陳達。 撫安夫人, 卽王氏也, 當時歸義二字之稱, 及令王氏侍衛, 聖意有在矣。 三韓古矣, 而我朝以三恪之義, 今猶致祭, 此王者大道理也。 宗玉曰, 此實我朝盛德事也。上曰, 中夜思之, 不覺興感。 士大夫子孫, 雖革世而依舊, 王者子孫, 便作庶人, 寧不惻然? 上曰, 兵批久勤中, 兩班或有遷轉之路, 而如訓鍊習讀禁軍之類, 最爲可矜。 卿若抑禁軍而右軍門執事, 則此豈公耶? 過政後謗言多從此輩出, 予縱媿漢昭之明, 豈因渠輩之謗, 而疑卿等乎? 宗玉曰, 臣豈動於此輩謗言, 而有所低揚乎? 故判書臣尹趾仁, 爲兵判時, 禁軍差僉萬戶, 而敎鍊官久勤, 差別將, 則其兄故相臣趾完責之曰, 敎鍊官, 將校也。 禁軍, 行伍也。雖其處地不相遠, 而差任之際, 宜有區別云, 此言是矣。 上曰, 此則卿只取故相之事, 而不識故相之心也。 故相無心而責其弟, 卿則有意而欲爲之矣。頃者以承傳, 見差漢江別將, 此則兵曹非矣。 宗玉曰, 別將, 亦多好窠, 而禁軍輩願之矣。 上曰, 今番都政, 若以禁軍差送別將, 則予將推考而責卿矣。 上曰, 今日親政, 意有所在。 令元良侍坐, 亦有深意, 吏批三堂均入矣。 吏判陞擢時, 敎以剛方正直, 佐貳特除之日, 亦有下敎, 此與嘉奬吳光運之意, 同矣。 羽良曰, 聖敎及此, 臣敢不惕念, 仰體聖意乎? 景夏曰, 臣頂踵, 無非聖上洪造。 且臣彼此, 本無適莫, 敢不盡心仰體乎? 珽曰, 臣百無肖似, 再辱除命, 豈不欲竭心奉職? 而才識魯莽, 況且已試僨敗之地, 深恐無以稱塞矣。 上曰, 往者特除, 旣諭予意, 無謂之斥, 不必追嫌, 往事勿說。 今番則以舊擬爲之, 三堂皆入, 一心爲公, 是予之望也。 景夏曰, 奇氏多在湖南, 而京則無兩班奇氏矣。 奇自獻, 甲子被死, 其子姪, 皆以大北正法, 故在京奇氏, 因此而絶矣。 奇氏不但以箕子後裔當錄用, 奇䖍·奇遵·奇大升皆名臣, 其子孫固可錄用矣。 上曰, 吏參復以大北之說, 陳達筵席, 誠非矣。 推考, 可也。出擧條景夏曰, 臣極知惶恐, 而大北罪惡, 不可不嚴斥, 且大北色目, 今則無之矣。 上曰, 趙尙絅, 頃日以爲大北, 渠則固有罪, 而其子孫, 有何罪乎云, 此言是矣。子孫果何罪之有? 大北之說, 尤不宜使聞於元良, 此予所以推考者也。 大北子孫, 猶且如此, 況他人乎? 羽良曰, 臣等不知則已, 若有所知, 則豈敢欺心? 當十分惕念爲之矣。 上曰, 軍功傳敎, 兵判見之乎? 近日事, 首揆頃有所達, 予聞之, 有若傷弓之鳥, 實有懍然之心, 調用舊功, 可勸將來之敎有意矣。 卿卽戊申玉堂, 吏判亦其時玉堂, 戊申事何由而出耶? 特以枳塞之故, 渠輩誘引之致, 固本之敎, 頃語首揆, 本固然後, 人心可定。 聞閭巷間騷屑紛紜, 進宴得請然後, 始爲止息云。 今日親政, 卽用一人而聳百人之意, 卿等知此爲之。 宗玉曰, 西北人, 臣於近日政, 連爲收檢, 而東銓不可不一體爲之, 雖未得職, 只入望, 亦多聳動矣。 上曰, 入望有何味而如是喜之耶? 其亦可哀也已。 珽曰, 入望則還歸鄕里, 輒爲夸耀之資矣。 上曰, 渠輩一番入望, 視若官敎, 其情戚矣。 西北人外松都人, 亦可收用矣。 予則一見松都, 尙今不忘, 況吏判, 曾經留守, 不爲檢擧耶? 頃者松都人謁聖登科者, 盡爲召見, 則爲人皆凜峻, 而右相則曾謂之氣膄矣, 如此人物, 不見收用, 至入於商賈, 是豈王者一視之道耶? 宗玉曰, 前日之使爲商賈, 今日之使爲兩班, 亦天地造化之機也。 上曰, 朴奎晃, 頃年松都駐蹕時, 仍留守所達, 召見除職矣。其後作散而去, 誠可怪矣。 此等人, 爲先收用, 可也。羽良曰, 奎晃是力士, 而身手甚健矣。 宗玉曰, 卽今無相當窠矣。 上曰, 宣傳官一窠, 又付司果而差除, 可也。 普昱曰, 親政, 事體至重, 而該房承旨, 皆不入來, 臣與鄭翬良, 俱以代房入侍, 卽今廳中一空, 出納無人, 敢達。 上曰, 何故也? 普昱曰, 日昨持平洪正輔疏, 有侵斥之語, 故俱爲引嫌。 都承旨陳疏入啓, 左承旨姑未出牌, 右承旨闕外陳疏, 臣則昨日再次違牌, 極知惶悚, 而旣有嚴敎, 故承牌入侍矣。 上曰, 洪正輔疏, 承旨能誦達否? 普昱, 口達侵斥本院數句語。 上曰, 佯若不知四字, 渠方以此勉君, 而反以此非斥政院耶? 仍命普昱, 書都承旨兪健基批答。 又傳曰, 莫重親政, 該房不可不備員, 都承旨批下, 卽爲牌招入侍, 左承旨亦爲牌招。 上曰, 都承旨批答, 注書先爲出給。羽良曰, 吏曹本來淸寒, 故都政時, 有各司古風之例, 一自銓郞變通之後, 有古風革罷之敎, 此似爲先生古風, 而至於本曹古風, 則何以爲之? 上曰, 其所變通者, 特除先生古風而已。 廳古風則守而勿失, 可也。出擧條 上曰, 李尙彦誰也? 景夏曰, 故相臣李俊慶之奉祀孫也。 上曰, 宋后相誰也? 景夏曰, 先正臣宋時烈之曾孫也。 上曰, 閔百能誰也? 羽良曰, 故相臣閔鼎重之曾孫也。 上曰, 尹光蘊誰也? 羽良曰, 故承旨臣尹東洙之子也。 上曰, 此非抄選耶? 羽良曰, 非抄選故擬入監役望矣。 上曰, 十考十上後陞遷, 可也, 而十考前遷轉, 非矣。羽良曰, 大政時則不得不然矣。上曰, 神光僉使, 久勤之窠耶。 宗玉曰, 都摠經歷, 訓鍊僉正爲之, 而僉使瓜滿, 則一入一出矣。 上曰, 昌洲僉使, 非久勤之窠耶。 宗玉曰, 此亦履歷之窠也。 上曰, 趙東晉誰也? 宗玉曰, 別軍職東恒之弟也。 上曰, 趙家諸人皆可用矣。 上曰, 崔台耉如何耶? 宗玉曰, 安興姑無大段可爲之事, 而台耉最久勤, 故欲爲疏滯而擬望矣。 上曰, 吉禹揆誰也? 宗玉曰, 此關西人也。 故名臣吉再之後。 而其父別薦南行, 入於戶佐望, 禹揆亦出身, 曾經僉使, 頗習兵法云, 故首擬以入矣。 景夏曰, 臣頃以申維翰, 使之太常志撰成事, 有所陳稟矣。維翰, 今以瓜滿遞職。 此是鄕人, 無職名則難於留京, 其所撰成, 將半途而廢, 宜有變通內遷, 而本寺亦當有窠闕矣。 上曰, 雖經奉常正, 亦爲其司之官乎? 景夏曰, 維翰, 只經奉常僉正, 而復職則雖判官·主簿, 亦可爲矣。 上曰, 奉常寺有窠則除拜, 可也。 羽良曰, 今則解由拘礙, 出解由然後, 可以除拜矣。上曰, 然矣。 出擧條羽良曰, 近來玉堂苟簡, 無以備擬, 新錄一時爲急, 而副學在外, 交龜上來, 遲速難期, 誠可悶矣。 上曰, 新伯李德重, 何時當下去耶? 景夏曰, 德重新遭其子慘喪, 聞過葬後將下去云矣。 上曰, 將欲下敎矣。副學遞差, 其代差出新錄, 斯速擧行, 可也。 抄出擧條 上曰, 承旨書之。傳曰, 追惟前朝, 王者之道也。 王氏孫調用事, 曾有飭勵, 而其作文具, 申飭兩銓, 而三國之祖, 建祠致祭, 蓋所以追惟舊王之意, 而三國遺裔中, 昔氏·高氏, 尙莫知其誰。 高氏則旣有其氏, 令該曹, 尋問其歷調用, 昔氏則今之石哥, 疑或其氏, 亦令該曹, 廣考文獻, 尋問其歷, 登對時稟而調用。 翬良書畢。 景夏曰, 傳敎如此, 而昔氏之爲石氏, 旣無可據之文, 今雖頒布, 何以搜得乎? 絲綸似宜審愼矣。 翬良曰, 此傳敎勿出朝報, 兩銓只奉承傳, 而訪問則似好矣。 上曰, 雖出朝紙, 訪問而無則置之。 若或有之, 則雖至於上言, 自現之境, 當有的然可據之文, 然後處之, 何難之有? 羽良曰, 聖敎至當, 謹堂奉行矣。 上曰, 具宅奎纔經嶺東守令, 又何更除乎? 羽良曰, 淮陽洊經慘凶, 而前官邊聖佑, 淹病廢務云, 是事可悶, 其代宜擇差, 故果擬入矣。 上曰, 金弘澤誰也? 羽良曰, 先正臣金長生後孫, 而別薦之人也。 景夏曰, 此人曾經桂坊, 卽金鎭玉之從姪也。 上曰, 李彦綵無乃宗室子孫, 而李彦熽之行列耶。 宗玉曰, 未有聞矣。 上曰, 朴載洙何擬此官乎? 宗玉曰, 載洙仕滿而在喪, 故今借此窠, 卽當出六矣。 普昱曰, 吏批望筒入啓之際, 一望單子, 有疊入事, 難免不察, 吏曹堂上, 竝推考, 何如? 上曰, 依爲之。 出擧條 上曰, 承旨書之。 傳曰, 親政時入侍注書·尙瑞院官員, 依例陞六。 翬良書畢。 羽良曰, 命下矣。 其中尙瑞副直長李道普, 今番六品講不通, 雖有承傳, 臣曹則據例陳達矣。 上曰, 所達是矣。 而旣有前例出六, 可也。 上曰, 其講何以不通耶? 鼎輔曰, 道普非不通於此講者, 而大抵能文之士, 間或有不通之事矣。 兪健基承牌入侍, 翬良曰, 吏房承旨旣已入侍, 代房承旨出去守廳之意, 敢達。上曰, 知道。 上曰, 陰城何如是? 羽良曰, 此是薄縣, 而收拾爲難, 故擇差矣。 上曰, 李瑗誰也? 羽良曰, 故判書李瑜之從弟也。 上曰, 李箕重誰也? 羽良曰, 李台重之兄也。 上曰, 李景祚誰也? 羽良曰, 安東府使李普赫之子, 而曾經砥平縣監矣。 上曰, 李樟誰也? 景夏曰, 故完豐君李曙奉祀孫, 而衿川縣監遞歸, 幾二十餘年矣。 上曰, 三者誰優? 羽良曰, 李箕重, 大典講時見之, 頗純實, 李景祚, 必善治之人, 李樟, 柔善矣。景夏曰, 李箕重牢實, 而李樟則判書之言, 過矣。 上曰, 載寧何如是? 羽良曰, 載寧, 今年凶荒特甚, 方伯以擇送爲請矣。 上曰, 兪彦徽何如人? 羽良曰, 彦徽, 以善治有聲矣。 景夏曰, 彦徽有揮廓之才, 可以善治弊邑者, 此是頃年親鞫時黑面都事也。 上曰, 然乎? 其時以罪人趁速拿來, 有所下敎而嘉之矣。 上曰, 李顯行何如人? 羽良曰, 李顯行十考十上矣。上曰, 少退, 有頃還入。 景夏·命坤等曰, 昇平府院君金瑬奉祀孫百鍊, 南昌君洪振文孫舜元, 皆未收用, 而功臣親孫生存者, 只有舜元一人而已。 上曰, 然乎? 癸亥勳臣子孫錄用事, 命下之後, 不卽擧行, 事甚未安, 前後銓官竝推考。 出擧條 上曰, 金重萬事, 下敎矣。 更思之, 前則雖未經營將, 猶爲內禁將矣。宗玉曰, 豐陵時重營將, 故更爲定式矣。 上曰, 經營將然後爲閫帥, 此重營將之意耶? 翬良曰, 此是防內禁將堂上, 而開營將堂上之意也。 上曰, 承旨之言, 果是矣。金重萬, 旣是帶礪勳臣, 且經守令·僉使, 異於空堂上矣。 宗玉曰, 經營將然後, 始爲內將, 臣固守此法, 而至於功臣, 則何可拘此例乎? 上曰, 然矣。 擢其人, 所以重其事也。大訓後, 宜重戊申事故諭之矣。 健基曰, 尙瑞院官員安寶時, 承旨一員, 例爲入參, 今番則何以爲之乎? 上曰, 熙政堂則於楹外安寶故, 他承旨入參, 而今番則坐近, 他承旨不必入矣, 置之。 翬良, 以淸城僉使文起英病重, 改差草記入啓。 上曰, 淸城僉使, 何故卽遞耶? 宗玉曰, 北邊之人, 不樂赴西邊, 渠欲呈遞云矣。 戊申春塘臺三中四分之人, 只得承傳, 而尙未見差, 故欲以此代之矣。 上曰, 戊申承傳, 尙今不用, 前後銓官竝推考。淸城之旣差還遞, 亦非慰遠人之道, 兵判亦爲推考, 可也。 出擧條 上曰, 太學公薦來乎? 羽良曰, 不來矣。 上曰, 其何故也? 翬良曰, 頃年尹淳爲吏判時, 太學以不用公薦事, 捲堂承嚴敎, 故似以此不爲之矣。 上曰, 豈可仍此而廢古規乎? 在太學之道, 當爲之矣。 上曰, 金致謙年幾何? 景夏曰, 雖未的知, 似爲六十五六歲矣。 翬良曰, 江華經歷, 卽閑官故, 年老之人, 例爲之矣。 上曰, 李孟休, 有相當窠調用, 可也。 羽良曰, 時無當窠矣。卽今注書及尙瑞官, 當陞付, 而極爲苟簡矣。 上曰, 李海賓誰也? 羽良曰, 故判書李善溥之從孫云, 而臣未及見矣。 景夏曰, 此是可用之人, 臣亦未見, 而其儕友皆稱之矣。 判書於來見者, 以爲來見, 政官不可用, 於未見者, 以爲未見其人, 亦不可用。 且霎時之見, 何以識其人乎? 聖人云, 以貌取人, 失之子羽。 臣則以爲取其履歷, 取其久勤, 取其物望, 可也。 羽良曰, 近來誰有有物望者乎? 只爲儕流中人而用之, 則豈銓衡之公道乎? 景夏曰, 判書此言, 誠沓沓矣。 雖其儕流, 可用則用之, 曲避其嫌, 是亦私也。 上曰, 卿則能不爲乎? 景夏曰, 臣於前日待罪本職也, 連有所遭, 獨政之時無多, 而實無互對之事矣。 臣墻壁枵然, 無所係着。 日昨十一窠, 出於臣手, 而武弁則臣實不知, 故問於兵判而擬望矣。 判書互對之規模, 誠狹矣。 羽良曰, 其望筒, 金柱星則臣以秋曹郞官使之, 故知其可合, 而李海賓則臣固未審矣。 景夏曰, 俄者以黨字陳達, 至被推考, 而臣之規模, 與判書不同矣。 判書則必欲互對, 此便是私意, 不能粹然一出於公也。臣意勿論彼此, 惟才是用, 判書互對, 臣實悶之。 上曰, 德川何如邑? 宗玉曰, 德川, 僻邑而素饒, 且是兼營將也。 羽良曰, 金光國, 爲人勁悍, 曾爲結城縣監, 能祛積年弊瘼, 故首擬以入矣。 上曰, 其望中李仁好·朴璲皆何如? 羽良曰, 李仁好差緩, 而朴璲, 近柔, 皆不及於光國也。 恂恂長者, 非不好矣, 而於治郡則末也。 上曰, 金箕錫曾有長子之稱矣。 光國似不足於此郡矣。羽良曰, 此是膽大之人也。 上曰, 如李彝章者, 可謂膽大。頃年親鞫時, 任使頗久, 其爲人誠難矣。 羽良曰, 如李彝章者, 豈其易乎? 景夏曰, 責人何必盡如此乎? 光國雖不及於彝章, 而足可爲之矣。 上曰, 金光國, 頃日入侍時見之, 貌似介精, 而予終不大見之矣。 以南延年立節觀之, 人固未易知, 然德川要衝之地云, 故以是爲難矣。 光國, 雖爲黨用人, 則各有其路矣。景夏曰, 聖意如以爲不足, 則改擬, 似好矣。上曰, 唯。 上曰, 朴時佐前日見之, 其人頗可矣。 宗玉曰, 此是趙尙絅從姪, 而臣之軍門幕下也。 方任城役, 而失之可惜, 時佐短小精悍, 足可堪任矣。 上曰, 李會昌, 軍功乎? 宗玉曰, 雖非軍功, 而曾經府使內外將矣。 上曰, 安允文何如人? 宗玉曰, 此亦曾經府使, 膽大可用之人矣。羽良曰, 初則欲授朔州矣, 先聲喧藉, 故過甚而擬此望矣。 景夏曰, 判書所達, 心則可尙, 而其言亦沓沓矣。 傳言浮過, 未必盡信, 此不承權輿之道也。 上曰, 權瀞徵誰也。羽良曰, 故判書權以鎭之子也。 上曰, 權以鎭, 曾在忠淸道, 而純實可任之人也。 羽良曰, 權以鎭爲戶判時, 因事往其家, 見其諸子, 瀞徵誠可合用, 而且聞以鎭, 亦倚仗此子云矣。 上曰, 許砥誰也? 羽良曰, 故相臣許穆之孫也。 上曰, 然乎? 許穆有仙風道骨之稱, 且善書, 而眉毛甚長云矣。景夏曰, 眉長故稱以眉叟, 以老職堂上, 超遷至右相矣。 上曰, 以此望見之, 吏判之政, 果出於公道, 誠貴矣。 已爲落點於副望矣。假監役復有窠乎? 羽良曰, 有之矣。 景夏曰, 聖意若欲收用許砥, 則使之改擬, 何妨之有? 上曰, 然則許砥, 更爲擬望, 可也。 上曰, 許砥方在何處? 羽良曰, 只聞其名, 而不識其所在處矣。 翬良曰, 許砥, 未知方在何處, 而許穆則曾在漣·朔之間矣。 上曰, 其末望李道翼誰也? 羽良曰, 故高城郡守李湜之子也。湜, 曾經桂坊, 似或記有之矣。 上曰, 然乎? 上曰, 頃日領相所達, 承旨聞知乎? 翬良曰, 臣略聞之矣。宗玉曰, 領相所達, 臣亦聞之。 俄承下敎, 未詳委折, 出而聞之, 此恐浮言也。 臣家在南山下, 若果有之, 則臣豈有不聞之理? 臣雖不聞, 一洞人, 豈不聞之? 今番北聲之後, 自有騷屑, 而近來則漸熄, 東人好騷屑, 卽俗諺也。 乾隆還後, 自可永熄, 此不必致煩聖慮矣。 上曰, 設有南北之虞, 予豈動心? 而昔年海浪賊騷屑, 一時盛行而旋止, 今聞卿言, 予心亦然矣。 李邦綏所傳, 卿亦聞之耶。 地利不如人和, 乾隆事如此, 誠可怪矣。 宗玉曰, 臣亦聞邦綏所傳矣。 太白晝見, 而雲臺官奏之, 則乾隆拘囚其人, 再次杖打云。 人主惡聞天災, 而政不荒者, 未之有也。 卽此一事, 其他可知。 上曰, 乾隆擧措, 大不及於康熙矣。 其中金山寺事, 蹈轍隋煬, 且又色荒特甚云。 諺曰, 官無事村無事, 雖無南山事, 而此固不宜放心矣。 宗玉曰, 平兵尙不發送, 殊非變通差出之意。 臺體今無更發之理, 催促下送, 似好矣。 上曰, 蔡膺福事可笑, 武弁色目之說, 尤可異也。宗玉曰, 臺官不救大臣, 況此武臣乎? 上曰, 李邦綏, 予使之訪見備堂矣。卿見之乎? 宗玉曰, 一見之後, 連有公故, 更不得招見矣。 上曰, 李邦綏如入直, 使之來待事, 分付。聖運出宣上敎, 李邦綏入侍。 上曰, 頃日爾所未盡達之言達之。 邦綏曰, 臣之所聞無他。太白晝見之啓, 不言某方, 只言方書, 以爲大動盜兵之應云爾, 則皇帝以爲妖言, 決杖三十度, 其後二日, 又杖二十度, 方在死境云矣。 上曰, 皇帝幾日離發耶? 邦綏曰, 聞八月十九日起身, 九月二十日入來, 而其間若或不寒, 則九月二十五六日間入來之意, 分付瀋陽將軍云矣。今見狀啓, 則日字差進, 此則臣所不知矣。 上曰, 居庸, 關內地名耶? 邦綏曰, 居庸, 是關外也。 熱河, 距北京七日程, 而卽其行宮也。 臣路程記, 熱河以前, 不書地名, 自口外以下, 始書地名矣。 上曰, 度其行, 卽今當抵何界耶? 邦綏曰, 卽今則未知的到何界, 而九月念間, 當到瀋陽矣。 其時聞太后皇后行, 何可倍站云矣, 今見狀啓如此, 無乃倍站而然耶? 上曰, 倍站而行, 則軍民何以支堪耶? 邦綏曰, 以每日六十里一站計之, 則九月二十五六日間當抵矣。 上曰, 口外是何界耶? 邦綏曰, 口外, 卽蒙古地方, 距瀋陽未的其爲幾里, 而自北京距瀋陽二千餘里。 以此計之, 則口外距瀋陽, 當爲七八百里矣。 北京, 以冬至爲大名日, 皇帝親自行祭, 故必趁此入去云矣。 上曰, 灣尹狀啓, 承旨讀之。翬良讀畢。 上曰, 雖以此狀啓觀之, 此只是行獵, 初無謁陵之事矣。翬良曰, 然矣。 上曰, 其地人心, 何如? 邦綏曰, 沿路訪問, 則民間頗安頓, 只聞有皇帝之行而已。 其道路廣, 可用五馬隊, 而高則過腰, 別爲修治道路。 蓋其土品湫濕, 小雨輒泥濘, 牛馬陷則不能拔出, 故如是高築, 而彼國無加乃, 只是鍤鋤而已。 以此治道之役, 頗難云矣。 上曰, 然則軍民呼冤矣。 軍士則一軍長立耶。抑替番而來耶。 邦綏曰, 無替番事, 一軍長立, 而精抄二萬, 大臣以下家丁, 竝十萬云矣。 路費各給銀子六十兩, 而此非白給也。 以一年朔料計給, 仍充來年朔料之數, 而所費則此外又將倍入, 故渠輩以此呼冤矣。 上曰, 退去。路程記來納政院, 可也。邦綏退出。 上曰, 訓鍊副正, 亦有擬望之次耶? 宗玉曰, 首望則舊望, 而副末則新通矣。 上曰, 沈運熙誰也? 羽良曰, 運熙今始陞六, 臣未及見, 而聞靑平尉族屬云矣。 上曰, 肅川何如邑也? 景夏曰, 西關路邊之邑也。 上曰, 柳世德, 是柳濬之子耶? 羽良曰, 然矣。此是年少武弁, 而可用之人矣。 上曰, 平壤庶尹何故, 以歙谷縣監擬入耶? 羽良曰, 平壤, 營下劇邑, 所當擇差, 而趙鎭泰, 臣不識面, 閔應洙爲嶺伯時, 鎭泰爲玄風, 第一治, 歙谷之治, 亦如玄風。 平壤膏腴之邑, 求者甚多, 鎭泰卽無勢之人, 故擬入矣。 上曰, 此則吏判之心, 果公矣。 景夏曰, 其望三望皆好, 鎭泰歙谷, 卽臣所差遣者也。 副望安錞, 曾經金堤倅, 而頗精詳矣。 上曰, 李堣誰也? 羽良曰, 故大諫李嵇之孫也。 上曰, 趙鎭泰, 其中最微者耶? 景夏曰, 坐地孤單, 而無勢則一也。 上曰, 李邦綏路程記之在備局者, 注書持來。聖運, 承命持入。 上, 令承旨, 見其題目。 翬良曰, 杭城洋壩頭絳雪齋監製十字書之矣。 上曰, 此是印本耶? 彼人凡事皆如是矣。 上曰, 此路程記, 注書還爲出付, 使之留置備局, 可也。 景夏曰, 古人有擧其親族之事, 鄭益良旣經訓正, 此是當次之人, 豈可以親嫌, 不爲擬望乎? 上曰, 與吏判爲幾寸乎? 羽良曰, 與臣爲六寸親矣。 上曰, 郡守望則左遷, 而其年幾何? 景夏曰, 其年似過三十矣。 羽良曰, 謂之擧親, 雖至親之人擬望, 而無所留難, 則其流之弊, 將不可勝言矣。 上曰, 此則吏判之言是矣。 景夏曰, 判書必欲互對, 故分排五色, 臣實不取矣。羽良曰, 擺脫規模, 則亦無以界限矣。 景夏曰, 五色之人, 分排互對, 非自然之道, 國家用人, 毋論東西南北, 唯其才望是擇, 宜矣。 上曰, 地有五方, 文有五彩, 此則不可無, 而人之五色, 不可有矣。吏參又以五色之說陳達, 推考, 可也。 出擧條 上曰, 洪泰培誰也? 宗玉曰, 泰培, 卽安東府使李普赫妻娚也。 膂力過人, 而屢次靳點, 尙未經摠府矣。 上曰, 然乎? 予非靳點也。不識何狀, 故以常調知之矣。 上命翬良, 書持平洪正輔, 判義禁鄭錫五等疏批, 又命書嶺儒成憲柱等疏批。 上曰, 於渠家安坐讀書, 可也。 胡爲乎遠來投章耶? 頃日有以李縡事陳達者, 此蓋舊套也。 如此浮夸之習, 可痛故不爲敍召耳。 李縡若死, 則亦將請文廟配享耶。 良可駭也。 上, 又命書司直閔應洙, 修撰金時粲, 承旨韓師得, 正言趙炳彬疏批。 上曰, 趙炳彬, 曾經注書乎? 翬良曰, 經注書者, 卽趙漢彬也。 上曰, 炳彬誰也? 翬良曰, 故相臣趙泰億之子也。 上曰, 何時出六乎? 翬良曰, 年前被翰薦而敗薦, 頃者始出六矣。 上曰, 炳彬疏中尹得和事, 何事耶? 翬良曰, 炳彬翰薦時, 得和敗薦, 故其疏有所云云矣。上曰, 少退, 有頃還入。 健基曰, 今此親政, 雖有一日內畢之之敎, 而將致夜深, 聖體必有傷損之節, 今則姑罷, 似爲得宜矣。 上曰, 旣令今日內畢政, 雖至夜深, 何傷之有? 羽良曰, 庇仁縣監李夏祥, 擬望受點矣。 聞如本道水使相避云, 在法當遞。 李夏祥改差, 何如? 上曰, 依爲之。 宗玉曰, 吏批政李義豐, 除拜谷山府使矣。義豐方帶禁軍別將, 當此陵幸迫近之日, 不可出送, 而近來禁軍馬政極疎, 頃者臺諫, 以馬兵事爲言, 而禁軍之馬, 甚於禁軍矣。 義豐精悍安詳, 故委以軍政, 頗有成效。 且今各軍門亞將乏人, 尤不可不念。義豐別將之任, 仍任, 何如? 上曰, 依爲之。 宗玉曰, 崔後泰, 俄者首擬訓判, 未得受點, 連次首擬未安, 而後泰之子嵒, 以宣傳官出六, 已爲訓鍊主簿, 故不得已更爲擬入矣。 上曰, 然乎? 都摠都事如有闕, 則更擬以入, 可也。 羽良曰, 崔後泰卽嶺人, 臣曹欲除守令, 而未及爲之矣。 景夏曰, 親政, 不但下情之上達, 實盛擧也。 上曰, 然矣。上下之情, 果然流通矣。 宗玉曰, 親政如常參, 人君所當行之事也。 上曰, 吏議事慨然矣。 終日點點, 曾無一言, 何也? 珽曰, 臣坐處稍間, 各有所掌, 自然如此矣。 景夏曰, 參議雖黽勉參政, 而自謂情勢難安, 凡於政注, 一不可否, 臣實慨然也。 上曰, 李壽頤誰也? 羽良曰, 此是頃日左相所薦著述尊周錄之人也。 上曰, 白尙賢誰也? 宗玉曰, 故參贊臣白仁傑之孫也。 上曰, 李翼鎭誰也? 宗玉曰, 判書李箕鎭之弟也。 上曰, 李希魯誰也? 宗玉曰, 故巡邊使李鎰之後孫也。 李鎰, 嘗爲宣傳官, 作爲大椎, 至今尙在, 稱之曰李鎰椎云矣。 上曰, 姜師運誰也? 宗玉曰, 嶺南人, 而人物極可用矣。 上曰, 鄭來觀誰也? 宗玉曰, 此是京人也。 上曰, 徐必修誰也? 宗玉曰, 臣之十寸孫, 而將鬼薦, 六兩居首, 故不暇顧親嫌而擬入矣。 景夏曰, 同姓十寸, 便是至親, 兵判之擧擬, 臣未敢謂出於公道矣。 宗玉曰, 吏參之言, 臣實愧之, 而俄者吏參, 以吏判之不擧六寸鄭益良爲非, 今則責臣以十寸之副擬, 何其前後之言矛盾也? 景夏曰, 鄭益良, 以訓正備擬郡守, 此是階梯職, 而徐必修則初入仕也。 臣言豈有矛盾乎? 上曰, 金德觀誰也? 宗玉曰, 此北道人也。 上曰, 鄭恒齡誰也? 羽良曰, 恒齡, 眞文章之士也。 景夏曰, 未必其爲能文章, 而文名則有之矣。 上曰, 尹熙復誰也? 景夏曰, 故吏議尹星駿之子也。 上曰, 然則於尹德駿爲誰乎? 羽良曰, 卽德駿之從姪也。 上曰, 金由行何人也? 景夏曰, 故相臣金昌集之從孫也。 上曰, 李復祥誰也? 景夏曰, 故相臣李健命之孫也。 羽良曰, 崇陵參奉, 姑未作闕, 而望筒預書之故, 徑先入啓, 惶恐矣。 上曰, 柳聖躋誰也? 羽良曰, 京畿監司柳儼之子也。 上曰, 朴好源誰也? 羽良曰, 前承旨朴師昌之子也。 上曰, 任得中誰也? 羽良曰, 判書鄭錫五之甥姪, 而學問之士也。 上曰, 禮賓參奉望, 是何人也? 羽良曰, 此頃日變通作中庶之窠者也。 上曰, 李學中誰也? 羽良曰, 故參議李元祿之孫也。 上曰, 權噵誰也? 羽良曰, 故判書權之子也。 上曰, 李在誰也? 羽良曰, 西川君之子, 而前日別薦者也。 上曰, 李明吾誰也? 羽良曰, 參判李重庚之子也。 上曰, 田光國誰也? 宗玉曰, 長湍府使田雲祥之子也。 上曰柳光宅誰也? 宗玉曰, 京人, 而其祖爲蔭官云矣。 宣傳官不但近侍也。來頭閫望·將望, 皆自此出, 故臣各別愼擇。 今此擬望中勿論高下, 皆是可用之人, 將來必做者也。 上曰, 黃㯙誰也? 宗玉曰, 黃梓之姓族, 而在任在喪, 故其下亦以在任在喪, 前銜擬望矣。 上曰, 李燦誰也? 宗玉曰, 此是宗室子孫, 而將鬼薦最久遠者也。 上曰, 柳夏徵何人也? 宗玉曰, 禁衛哨官也。 部將守門將望, 皆以柳葉箭三巡, 兵書一冊, 別試才取其優等, 以次擬望矣。 上曰, 洪侃誰也? 羽良曰, 故忠臣洪翼漢奉祀孫也。 上曰, 李喜觀誰也? 羽良曰, 庶孽而有文名, 三望皆然矣。 上曰, 宋淳明誰也? 羽良曰, 故大諫宋敎明之弟也。 上曰, 韓處相誰也? 景夏曰, 西平府院君韓浚謙奉祀孫云矣。 上曰, 與韓德良爲幾寸乎? 羽良曰, 與德良, 寸數遠矣。上曰, 趙國觀誰也? 羽良曰, 此鄕人也。 景夏曰, 此是故儒臣趙昱之後孫也。 上曰, 鄭運維誰也? 羽良曰, 承旨鄭必寧之子也。 師夏以旣陞典籍, 將爲退去之意酬酢。翬良曰, 筵席事體至嚴, 而注書任師夏, 私語酬酢, 殊甚猥屑, 推考,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 吏兵批畢。宗玉曰, 大政過後, 便是銓官瓜限。 臣方在應遞之科, 而陵幸時有預先定奪者, 敢達。 自前遠陵行幸時, 太僕馬及軍兵馬草, 例自各邑進排, 而近陵則無此前例, 畿伯論報備局, 備局亦許之矣。 槪以事體言之, 陵所凡百, 地方官所當進排, 而以其有弊, 故朝家一切省減, 而至於馬草之當辦者, 何可不進排乎? 伊日回鑾, 若値日暮, 則各軍門許多軍馬, 必致飢困, 亦無自備喂養之道。 臣意則一如遠陵例, 太僕及各軍門馬草, 令各邑進排, 宜矣。 上曰, 雖無前例, 事體則然, 依所達爲之。 出擧條 上曰, 擧條紙二丈入之, 聖運持入。 上, 親製心字詩一句, 親寫二紙, 分下吏兵批承旨。 仍敎曰, 入侍諸臣, 各製聯句一隻以進, 羽良·宗玉等, 雙擎奉玩。 宗玉曰, 今下寶什, 仍有賡進之命, 臣等實爲感幸。賡載之歌, 始自唐·虞, 此固尙矣。 降而至漢, 亦有柏梁聯句, 雖不足法於聖代, 而各以職掌述懷, 朝儀又可見矣。 景夏曰, 臣於宸章中, 幾年固志四字之意, 未能諦得, 臣請詳承聖意所在然後, 始可製進矣。 上曰, 予之固志, 凡幾年矣。俄者雖以卿言之, 五色之說, 陳於前席, 豈可謂予志之遂耶? 此所以有唯待元良遂予心之句矣。 諸臣齊聲對曰, 聖意甚盛, 臣等謹當賡進矣。 宗玉曰, 今若各以一句和進, 而職次排句則好矣。 上曰, 所達好矣。依爲之。 宗玉曰, 諸臣各自構思, 則簾必未叶, 韻且易疊, 景夏以詞臣入侍, 使之拈韻, 分排製進, 亦好矣。 上曰, 然矣。而各於當句, 叶簾可矣。景夏, 請入韻冊。上曰, 唯。 聖運, 持入韻冊, 景夏各拈一韻, 書塡諸臣名下。 健基曰, 吏參用私, 自取好韻字, 而分難韻字於臣等矣。 上, 笑曰, 豈於此用私乎? 景夏曰, 臣旣分韻, 人情豈不欲自取好韻字? 而倉卒分韻, 臣亦未暇擇其好字矣。 上, 命宣醞, 諸臣皆以無酒量爲辭, 或傾或否, 酒三行, 上曰, 吏議加賜二酌, 吏議酒量, 與尹光毅何如耶? 珽曰, 臣少時, 酒戶未必多讓於尹光毅, 而自有痰病, 久已廢飮矣。 景夏曰, 任珽過飮生酒病, 更勿賜酒, 何如? 上曰, 吏議所噉甚少, 此必酒害也。有痰者, 素不能善飮食矣。 上曰, 郞官中有善飮者乎? 得載曰, 臣等俱無善飮者矣。 上曰, 李彝章飮酒乎? 彝章曰, 臣只飮一盃矣。 仍撤盤。上曰, 翰注隨其製進, 推移記事, 可也。諸臣先後製進。 上, 以宗玉製進詩, 下示景夏。 景夏曰, 下則進砭箴之言, 而自上虛襟容受爲好矣。 上顧宗玉曰, 吏參所對, 與予下問之意, 異矣。宗玉曰, 未識臣詩意而然也。 景夏曰, 臣今始覺得, 俄者臣言, 不過一時相規之意, 而兵判至發於詩, 似有芥滯矣。宗玉曰, 臣雖無虛受之量, 吏參之言, 何可芥滯乎? 上, 以摠戎使具聖任疏, 下示諸臣, 命各陳所見。羽良曰, 倉卒承敎, 不能仰對。臣當於退出後, 詳見原疏, 後日登對時, 仰陳所懷矣。 宗玉曰, 凡守城之法, 必有雉城, 而城外五里許, 淸野然後, 方可議保守之道, 而都城制度, 恐不可輕議於此等事矣。 景夏曰, 臣未及詳見其疏, 而其能深識利害, 則臣未知也。 大凡論事, 曰可曰否固好, 而各立己見, 必欲角勝, 實有弊矣。 臣於江都築城, 竊有深悶, 日昨辭疏, 尾陳屈贏之意矣。 臣嘗問左相曰, 我國雖偏邦, 亦堂堂千乘之國, 以宗社百官, 入於一片海島, 決非萬全之道。昔宋太祖欲取幽州, 趙普曰, 陛下將使何人取之乎? 太祖曰, 欲使曹翰取之。 普曰, 將使何人守之乎? 太祖曰, 欲使曹翰守之。 普曰, 曹翰死, 更使何人代之乎? 太祖遂不取幽州。 今江都, 固金湯, 而萬一失險, 將往何處? 四面滄海, 不過航海而已。左相亦不能答矣。目前固無變亂, 決不可輕發去邠之論, 而使敵人, 過靑石洞, 渡臨津江, 則都城亦難守矣。 連歲凶荒, 生民倒懸, 此時築城耗財, 豈曰得計乎? 上曰, 領相所達, 兵判則未聞云矣。景夏曰, 兵判, 將臣, 故爲此鎭定之言也。 上曰, 吏議亦有所見於築城事乎? 珽曰, 此是國家大事, 固不敢輕議, 而第天險之地, 無踰都城, 堅守之道, 當以都城爲主, 故曾在戊申賊變時, 或不無去邠之議。臣於其時, 至欲獨疏, 爲死守之計, 今豈有他意乎? 上曰, 予意亦以城守爲是, 若以修築江都之物力, 修補都城則好矣。 江都予亦見之, 此非可棄之地, 亦有可用之時矣。 但非卽今緊務, 左相聞之, 似以爲如何, 而摠戎使則予以爲臆見之智矣。 予本有守都城之心, 而築城江都, 實有兩般心矣。以私家言之, 京鄕兩家, 必有分置之心矣。 景夏曰, 聖敎至當, 而今時非其時也。左相之言雖如此, 不宜汲汲築之矣。上曰, 原疏留中矣, 出給之。卿等持去備局, 更爲詳見, 講確於大臣而陳達, 可也。 景夏曰, 天將向曙, 臣等退去, 姑俟後日大臣入侍, 更陳所懷矣。上曰, 諸臣製進時, 注書出去, 以職次, 正書二件, 一則內入, 一則入于東宮, 可也。諸臣以次退出。 東方明矣。吏批, 以李尙彦·尹光蘊爲繕工假監役, 沈鑰爲安陰縣監, 朴弼濂爲鎭岑縣監, 李普萬爲漣川縣監, 尹堣爲尙衣別提, 沈運熙爲氷庫別提, 尹德春爲司饔主簿, 韓命德爲漢城參軍, 崔齊恒爲良才察訪, 鄭東潤爲延曙察訪, 睦宗夏爲銀溪察訪, 朴道郁爲金郊察訪, 李瑞彪爲長水察訪, 吳遂采爲副提學, 朴鳳漢爲繕工主簿, 兪肅基爲刑曹正郞, 李廷煜爲東部奉事, 李鎭儀·閔鎭龍爲典籍, 李世瑍爲松羅察訪, 鄭來僑爲利仁察訪, 金世選爲安奇察訪, 金弘澤爲金溝縣監, 洪尙輔爲韓山郡守, 鄭來周爲南陽府使, 金致謙爲江華經歷, 金遇喆爲平山府使, 具宅奎爲淮陽府使, 兪彦徽爲載寧郡守, 李仁濟爲司圃直長, 金孝大爲司䆃直長, 兪迪基爲尙衣直長, 申㬇爲繕工奉事, 李德寅爲陰城縣監, 吳光運爲弘文提學, 李瑗爲和順縣監, 尹鵬擧爲泰川縣監, 蔡膺一爲丹城縣監, 李震炳爲眞寶縣監, 李樟爲靑陽縣監, 徐有常爲安峽縣監, 具熺爲掌苑別提, 趙宗裕爲司畜別提, 朴垂裕爲省峴察訪, 元弼揆爲宣川府使, 李命峻爲長興府使, 盧啓楨爲昌城府使, 李彦燮爲朔州府使, 具善復爲順川郡守, 安允文爲慶源府使, 朴時佐爲通津府使, 尹益東爲慶山縣令, 金柱星爲積城縣監, 宋翼運爲司評, 李景祚爲刑曹佐郞, 徐宗遜爲工曹正郞, 安商楫爲禁府都事, 沈錪爲內贍主簿, 崔景興爲南部都事, 李麟祥爲引儀, 李義豐爲谷山府使, 金德厚爲興海郡守, 徐進修爲禁府都事, 鄭錫台爲宣陵直長, 申泓爲順陵直長, 洪啓鉉爲司宰直長, 金行一爲興德縣監, 趙東濟爲德川郡守, 呂攀爲郭山郡守, 權瀞徵爲繕工假監役, 李廷瑗爲義盈直長, 金始㷜爲同義禁, 金敬一爲泗川縣監, 丁喜愼爲沃溝縣監, 李夏祥爲庇仁縣監, 朴龍秀爲延安府使, 盧脩爲監察, 趙明奎爲司宰僉正, 李彦衡爲楊口縣監, 沈運熙爲監察, 呂榮祖爲保安察訪, 沈潤海爲祥雲察訪, 李始充爲靑丹察訪, 趙鎭泰爲平壤庶尹, 柳世德爲肅川府使, 李尙彦爲繕工監役, 許砥爲假監役, 金錫基爲長淵府使, 鄭敞選爲奉常僉正, 洪泰培爲昆陽郡守, 李邦綏爲博川郡守, 金宅壽爲引儀, 朴良藎爲舒川郡守, 洪正度爲繕工奉事, 趙㷜爲平市直長, 李蓍泰爲氷庫別提, 尹暻爲瓦署別提, 尹堣爲戶曹佐郞, 閔百亨爲掌樂主簿, 兪彦民爲刑曹佐郞, 金是最爲開城留守, 金景汝爲黃山察訪, 朴善源爲長興奉事, 朴晉揆爲內資奉事, 朴時晉爲內瞻奉事[內贍奉事], 南泰觀爲司饔奉事, 洪益大爲禮賓奉事, 宋思欽爲氷庫別檢, 李復齡爲西部奉事, 鄭再河爲北部奉事, 趙漢弼爲中部奉事, 柳逅爲南部奉事, 尹尙靖爲尙衣別提, 李仁好爲司藝, 南泰湜爲谷山府使, 韓命夔爲贊儀, 李壽根爲校檢, 安錞爲司饔僉正, 趙明鼎爲兵曹正郞, 李弘佐爲司䆃僉正, 金益魯爲東部都事, 文天擎爲庇仁縣監, 權世隆爲歙谷縣監, 尹之彦爲北部都事, 金孝大爲掌樂主簿, 李壽頤爲長興主簿, 申思彦爲端川府使, 尹光蘊爲繕工監役, 安正仁爲咸安郡守, 朴鍵爲雲峯縣監, 崔慶老爲海美縣監, 閔宇采爲司儀, 李孟休爲禮曹佐郞, 申光著·柳顯章爲典籍, 李毅中爲待敎, 崔齊泰·康德衢爲成均博士, 楊夢寅爲學正, 尹心衡爲執義, 李夏宗爲獻納, 安德亨爲昌陵令, 尹澤休爲相禮, 兪彦宗爲司䆃直長, 李宇濟爲社稷直長, 尹暻爲司僕主簿, 任師夏·李聖運爲典籍, 金允升爲西部都事, 李道普爲敦寧主簿, 尹熙復爲繕工假監役, 金由行·鄭恒齡·羅蔘爲童蒙敎官, 金致溫爲禧陵參奉, 李復祥爲長陵參奉, 柳聖躋爲貞陵參奉, 朴好源爲章陵參奉, 任得中爲思陵參奉, 李學中爲英陵參奉, 朴聖俊爲厚陵參奉, 李明吾爲長寧殿參奉, 李喜觀爲典獄參奉, 洪侃爲恭陵參奉, 李在爲順陵參奉, 權噵爲昌陵參奉, 桂德海爲禮賓參奉, 李煦爲典獄參奉, 趙重鼎爲司圃別提, 具世溫·康聖路爲引儀, 李景祚爲刑曹正郞, 韓宗協爲活人別提, 任瑜爲典獄主簿, 任安世爲儀賓都事, 尹光纘·金善行爲兵曹佐郞, 李九成爲奉常主簿, 鄭運維爲崇陵參奉, 趙國觀爲莊陵參奉, 鄭衡周爲司宰奉事, 朴師建爲掌苑奉事, 韓光肇爲兵曹正郞, 朱炯正爲繕工副奉事朴師羽爲濟用副奉事, 李廷鎭爲尙瑞副直長, 尹寏爲瓦署別提, 尹琰爲尙瑞直長, 韓處相爲敦寧參奉, 韓翼謩爲漢學敎授, 李希送爲司評, 宋龜明爲刑曹佐郞, 吳泂爲造紙別提, 金垕重爲司饔主簿, 權琦·林梓·慶晩爲假引儀, 前僉知韓囿彦, 今加嘉善, 玉果縣監鄭東良, 今加通政事承傳, 吏批畢。 兵批, 以趙東晉爲滿浦僉使, 崔台耉爲安興僉使, 朴嗜覃爲蝟島僉使, 李德耉爲阿耳僉使, 吉朝揆爲昌洲僉使, 許鉍爲神光僉使, 趙衍福爲忠原營將, 元重會爲洪州營將, 李鎭衡爲順天營將, 韓佾·具偀爲訓鍊僉正, 黃寀爲都摠都事, 朴載洙爲部將, 李世茂爲登山串僉使, 李東春爲兔城僉使, 李世燁爲車嶺僉使, 李必潝爲月串僉使, 李玄年爲古群山僉使, 崔日徽爲古今島僉使, 曺熙泰爲平薪僉使, 李廷碩爲龍媒僉使, 劉光世爲恃寨僉使, 具學萬爲訓鍊判官, 李衡佐爲同知, 李挺宇爲僉知, 李彦綵爲訓鍊判官, 李章吾爲都摠經歷, 文起英爲淸城僉使, 彭龜陽爲天磨僉使, 李弘祥爲舒川浦萬戶, 韓弼良爲位羅萬戶, 尹勉亨爲宣傳官, 韓佾爲慶尙右兵虞侯, 趙台壽爲幕嶺萬戶, 文時郁爲知世浦萬戶, 鄭益良爲訓鍊正, 崔致雲爲梨洞萬戶, 張載漢爲植松萬戶, 李萬齡爲唐浦萬戶, 洪太寅爲長峯萬戶, 金萬麟爲甘浦萬戶, 尹世平爲山羊會萬戶, 洪萬澤爲靑水萬戶, 韓泰彬爲森森浦萬戶, 韓聖緖爲玉江萬戶, 金萬柱爲馬島萬戶, 安東一爲全羅左水虞侯, 李儀鳳爲木浦萬戶, 金俊起爲阿吾地萬戶, 鄭尙和爲平山萬戶, 金翊漢爲豪打萬戶, 金萬剛爲南桃萬戶, 朴世禧爲豐浦萬戶, 崔洽爲古突山別將, 金世彧爲長木浦別將, 金萬鎰爲舊所非別將, 鄭大鎭爲大峴山城別將, 安萬碩爲首陽山城別將, 張世和爲禿用山城別將, 金天倫爲長壽山城別將, 梁世俊爲豐山萬戶, 高徽泰爲方山萬戶, 韓興弼爲慈母山城別將, 柳懋爲訓鍊副正, 盧處仁爲訓鍊判官, 具宗煥·崔嵒·李重澤·朴台炡爲訓鍊主簿, 成碩禧爲都摠都事, 崔世輔爲都摠經歷, 朴尙觀爲淸城僉使, 金瀁爲彌串僉使, 金有漢爲保山萬戶, 李國亮爲同知, 李章吾爲訓鍊副正, 金兌興爲忠壯將, 鄭寅吉爲忠翊將, 李伸爲五衛將, 皮世麟爲僉知, 金有岡爲造山萬戶, 吳盛載爲蝟島僉使, 金尙秋爲露梁別將, 李夏鼎·姜行健爲訓鍊主簿, 朴聖錫·金光胤·沈佖爲五衛將, 沈義希·李顯升·鄭運喆爲都摠經歷, 具德勳·姜啓國·崔復泰爲都摠都事, 黃寀爲宣傳官, 崔吉祚爲中樞都事, 鄭基慶爲訓鍊僉正, 李眞協爲雲寵萬戶, 李璜爲魚面萬戶, 金用九·李師德·李翰台·申泰河·申晣·金台柱·鄭㙉爲武兼, 崔嵒爲鎭同萬戶, 尹景淵爲訓鍊主簿, 沈尙晉爲武兼, 崔漢標爲訓鍊主簿, 金好謙·河大淵·李興遠·李一范·柳夏徵·曺夏升·朴奎晃爲部將, 白尙賢·李翼鎭爲四山監役, 金處恒·金德觀爲守門將, 金重萬爲兼司僕將, 李希魯·李明運·姜師運·鄭來觀·田光國·南益祥·李長㷜·安龍一·黃㯙·李世祐·李燦爲宣傳官, 蔡挺夏爲武兼。 權管秩, 舊乫波知韓命仁, 牛作仇非黃錠, 雙靑金德龜, 西水羅李世徵, 小吉號里李泰鼎, 廟坡權管安益煥, 江口柳聖協, 同仁洪廷翼, 小農堡鄭翊臣, 兵批畢。

족보(族譜)

우리나라의 족보는 가정(嘉靖) 연간에 문화(文化) 유씨(柳氏)의 족보가 가장 먼저 창시되었는데, 미세한 데까지 두루 미쳐서 외가도 자세하게 기재하였다. 때문에 뒤에 족보를 꾸미는 집에서 그 족보를 고정(考訂)하였다. 《여술보(藜述補)》

○ 숙종 을축년에 지평 최규서(崔奎瑞)가 소를 올려 간사한 사람이 족보를 위조하여 종파(宗派)를 옮겨 바꾼 것에 대한 죄를 논하였더니, 윤허를 받아 법대로 다스렸다. 그때에 무뢰배들이 남의 집 족보를 많이 모아두고 만약 선대에 공음(功蔭)이 있으면 그 끝에다가 이름을 거짓으로 기록하고 활자(活字)로 박아내어서 군역(軍役)을 모면하는 계책으로 삼았다. 의금부의 하리(下吏)를 시켜서 수탐하여 들이니 몇몇 집의 족보가 모였는데, 해주(海州) 최씨(崔氏)의 족보도 그 중에 있었으며, 규서(奎瑞)의 여러 종파의 이름 아래에도 역시 6, 7대나 기록되어 있었다. 《간재만록》

○ 근래에 간사한 자가 금성(錦城) 임모(林某)라고 사칭하면서 위조 족보를 영남에서 간행하였는데, 금성 임씨와 평택(平澤) 임씨(林氏)의 족보를 합치면서, “본래는 같은 선조였으나 형제가 분봉(分封)이 되어 마침내 본관이 다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서울에 있는 현족(顯族) 및 집을 집어넣어 파종(派宗)을 뒤바꾸고 대수(代數)를 바꿔 고쳐서 선조의 세계(世系)를 어긋나게 하여 인륜의 서차(序次)를 문란케 한 것이 매우 많았다. 또한 여러 도에 두루 다니면서 임가 성을 가진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족보책을 팔아 생계로 삼는 것이었다.서울에 있던 여러 임씨들이 발견하여 관에 고발하였으므로 그 사람을 조사하여 잡아 가두었다가 귀양보냈고,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거짓 족보를 거두어 모아 불살랐는데 근래의 족보의 폐단이 매우 크다. 사람들이 모두 족보가 없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며, 시골 천한 사람으로서 군역을 면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뇌물을 주고 거짓으로 이름을 넣었으니, 보첩(譜牒)의 잡되고 어지러움이 갈수록 더욱 심하였다. 근래에 항간(巷間)에 어떤 사람이 여러 집안의 족보를 모아서 집에 은밀히 감추었다가, 자기 조상의 계보를 알지 못하여 어떤 일가 집에 붙으려 하는 자가 많은 뇌물을 들고 오면 자손이 없거나 자손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자를 골라서 이름자를 바꾸고 세대를 적당히 조절하여 주었다.여러 집안의 족보 중에서 구보(舊譜)에는 후손이 없다고 되었는데 자손이 아무 지방에 산다면서 단자(單子)를 만들어 왔다고 하는 것은 모두 이런 유이다. 이 때문에 성과 관이 알려지지 않았던 자가 점차로 높은 문벌과 영예로운 관향(貫鄕)으로 옮겨 붙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세상 도의에 하나의 큰 변고가 아니랴. 인륜을 문란하게 하고 세상을 속임은 왕법(王法)으로 반드시 죽여야 하는데 엄벌하지 않아도 괴상하게 여기지 않음은 무엇 때문일까. 《여술보》

○ 새로 간행한 행주(幸州) 기씨(奇氏) 족보는 기자(箕子) 이후의 세대를 41대까지 기록하였다. 대개 주(周) 나라 무왕(武王) 기묘년에 기자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한(漢) 나라 혜제(惠帝) 정미년에 기준(箕準)이 마한(馬韓)이라고 하였으니, 합하여 9백 29년이 된다. 그런데 지금 이 보첩에 기록된 41대는 1천 36년이 되니 의심스러운 것의 첫째이다. 또 41대 중에 《동사(東史)》에는 기부(箕否)ㆍ기준(箕準)이 있는데, 여기에는 기부(箕否)조차 없으니 의심스러운 것의 둘째이다. 또 삼국 시대 중엽 이후에 비로소 시호(諡號)를 내리는 법이 있었는데, 지금 여기에 기록된 것은 모두 시호인 듯하니 의심스러운 것의 셋째이다. 이것은 반드시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자가 전거(典據)가 확실치 못한 것을 꾸며내어서 세상을 속인 것인데, 간행(刊行)하는 보첩(譜牒)에 기재하였으니 괴이하다. 《기년아람(紀年兒覽)》

기년아람[紀年兒覽]이란책은 이만운(李萬運)이 영조 말년에 편찬한 8권 4책. 필사본을 1777년(정조 1)에 이덕무(李德懋)가 수정, 보완했고, 1778년(정조 2)에 이만운이 다시 손질한 후 서문을 붙여서 완성시켰다. 뒤에 고종이 이 책을 열람한 뒤 “이 책은 어린아이들만 볼 책이 아니다”라고 하여 기년편람 [紀年便覽 ]이라는 서명(書名)을 내렸다.

이 비판은 1774년 3차 갑오보(甲午譜 ; 영조英祖 50)를 비판한 듯 하다

둘째 아들 기대정 할아버지가 기대정奇大鼎이 피신해 형성된 마을이라 한다. 권세를 부리던 이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권세 권權', '벼슬 관官'자를 써서 권관리權官里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변경하면서 주관할 관管으로 바뀌어 京畿道 平澤市 玄德面 權管里었다고 합니다. 선무공신(宣武功臣)이란 선조 37년(1604)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원균(元均)이상 1등공신 3명과 2등공신 5명, 3등공신 10명 등 모두 18명의 무신(武臣)에게 녹훈한 것이 선무공신(宣武功臣)이고, 이 훈호(勳號)에 들지 못한 사람들 중 선조 38년(1605)에 9,060명을 1. 2. 3등으로 나뉘어 녹훈한 것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다.

윤원형의 세력에 붙은 사람들

임백령(林百齡)은, 자는 인순(仁順)이며, 본관은 선산이다. 중종 기묘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을사년에 녹훈(錄勳 숭선군(嵩善君))되어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어머니 현씨(玄氏)는 성품이 엄하고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백령은 박상(朴祥)에게 수업하였다. 박상이 백령에게 《논어》를 가르치며, “너는 관각(館閣) 문자를 잘하리라.” 하였다. 백령은 단정하고 자상하여 잡된 일이 없으므로 그 어머니가 몹시 사랑하며, 자리에 눕고 일어날 때에 백령을 시켜 부축하도록 하였는데 모든 일을 다 마음에 맞게 하였다. 《기재잡기》 ○ 임백령이 젊어서 과거 공부만 하고 경학(經學)을 공부하지 않더니, 식년초시(式年初試)에 합격한 뒤에 경전을 읽으려 하여도,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몰라 쩔쩔매었다. 어느 날 밤에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한 노인이 와서, “너는 한 세상의 위인이 될 것이니,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라.” 하여 대답하기를, “제가 경학을 잘 모르니, 어찌합니까?” 하니, “네 이름을 괴마(槐馬)로 고치고, 또 강경할 때에 경서 중에서 어느 장(章)이 출제될 것이니, 그 장을 많이 읽어 익히고, 다른 데 정신을 낭비하지 말라.” 하였다. 꿈을 깬 뒤에도 역력히 기억할 수 있었으므로, 곧 불을 켜고 그 장을 뽑아 별도로 책자를 만들어 베꼈다. 괴마(槐馬)로 개명하려 하였으나, 그것이 이름으로는 무리하므로 별호를 괴마라 하고, 마침내 베낀 경서의 장구를 읽어 하나하나 완전히 이해하였다. 시강(試講)하는 날 강석에 들어가 앉으니 문제를 장(帳) 밑으로 내보내는데 먼저 익힌 것과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강이 끝나자 시관들이 모두 경학에 정미함을 탄복하였다. 시관 한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이 유생이 반드시 괴마일 것이다.” 하므로, 백령이 깜짝 놀라 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더니, 그 시관이 말하기를, “내가 어제 패(牌)를 받고 시장(試場)에 들어와서 밤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머리가 허연 노인이 ‘이번 방에는 괴마라는 사람이 한 세상의 위인이 될 것이요, 또 경학에 정통함도 비길 데 없으리라.’ 하더니, 이번 과거 보는 유생 중에 이만한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괴마가 아닌가.” 하고, 또 묻기를 “자네가 반드시 괴마일걸세.” 하였다. 백령이 자기의 호가 괴마라고 대답하니 시관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출세하여서는 행동이 나쁘기가 저와 같았으니, 소인이 세상에 나는 것도 모두 시운과 관계가 있음을 알겠다. 《기재잡기》ㆍ《축수편》 ○ 인종이 승하하자 유관(柳灌)이 빈청(賓廳)에서 울며, “신민이 복이 없어 이런 불세출의 임금을 잃었으니, 나라 일을 장차 어떻게 하랴.” 하는데, 임백령이 옆에 있다가, 유관의 띠 고리[帶鉤]를 잡으면서, “대감께서 은밀히 의논하시는 일에 소생도 참여하고자 합니다.” 하니, 유관이 놀라 눈물을 거두며, “새로 성군을 잃었으니, 종사의 불행이 되므로 한 말일 뿐인데, 공의 말은 무슨 말인가.” 하였다. 백령이 물러나며 소리를 높여, “선왕의 한 아드님이 계신데, 국사를 근심할 게 무엇이오.” 하고, 나와서 떠들기를, “유관의 뜻이 반드시 있는 데가 있다.” 하고, 마침내 이기 등과 더불어 불측한 말을 조작하여 모함하니, 유관이 죽은 데는 백령의 중상한 힘이 많았다. 《축수록》 ○ 병오년에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우의정을 차함(借啣 실직(實職)을 행하는 것은 아니고 벼슬의 명칭만 빌리는 것)하고, 북경에 가서 병이 나니, 백령이, “내가 일어나지 못하는가 보다. 의정 차함을 하고 또 오년(午年)을 만났으니, 신인이 말하던 괴마가 이를 이름이 아니겠는가.”하더니, 영평부(永平府)에 와서 죽었다. 《패관잡기》 ○ 이전에 임백령의 시호를 소이(昭夷)라 의논하여 아뢰었다. 시법(諡法)에 용모가 단아함이 소(昭)요 행동거지가 편안하고 자상함이 이(夷)라 하였는데, 문정왕후가 알맞는 시호가 못된다고 매우 화내서 응교 박순(朴淳) 등을 파직시키고 마침내 시호를 고치라 하여 봉상시(奉常寺)에서 다시 의논하는데, 참봉 장응정(張應禎)이, “이 시호는 어려울 게 없다.” 하니, 여러 사람이, “왜 그러냐?”고 묻자, “내 생각에는 문정공(文正公)이 가장 합당하다.”라 하니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문충(文忠)으로 고쳤다. 《기재잡기》

[주-D001] 관각(館閣) 문자 : 상소나 교서 등을 말하는 것으로 옥당ㆍ대간ㆍ예문관에서 짓는 문장들을 말한다.

[주-D002] 신인이 …… 아니겠는가 : 괴(槐)는 정승의 고사(故事)에 관계 있는 나무이며, 오(午)는 말에 속하므로 괴마(槐馬)를 이렇게 풀이한 것이다.

[주-D003] 주운(朱雲) : 한 나라 성제(成帝) 때에 주운이 임금에게, “참마검(斬馬劍)을 빌려 주시면 아첨한 신하인 장우(張禹)의 목을 베겠습니다.” 하였다.

[주-D004] 권점(圈點) : 대제학ㆍ부제학을 선출할 때에 후보자의 성명에 동그라미를 찍는 것인데, 지금의 무기명 비밀투표와 비슷한 것이다.

[주-D005] 그침은 …… 못하였다 : 《대학(大學)》에 있는 말인데, 지(止)와 정(定)을 수양하는 데 있어 한 단계로 말하였다.

김자점(金自點)은 1623년 3월(광해군 재위 15년)에 이괄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 6품직에 오른다.(나중에 다시 승정원동부승지로 특별승진) 후일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도원수가 되어 토산 전투에서 대패하자 삭탈관직 당하고(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함) 호란이 끝난 뒤 조야의 처벌 요구로 유배당한다. 그러나 김자점은 1639년(인조 17년) 사면되고 1640년(인조 18년) 복직된다. 하지만 효종 때 산당 세력에게 탄핵당해 1650년 파직되고 강원도 홍천으로 유배당한다. 이에 앙심을 품고 청나라한테 효종이 청나라를 적대시하는 북벌론을 지지하고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한다며 밀고하여 나라에 큰 혼란을 불러오게되는데, 다행히도 이경석, 이시백 등의 활약으로 청나라 군대를 돌려보낸다. 이후 김자점은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당하지만 그 후에도 손자며느리인 효명옹주 저주사건, 아들과 손자들의 군사반란이 발각되면서 아들, 손자들과 함께 역모로 몰려 사형당하고 가문은 몰락한다(...)

이량(李樑)이 귀양 가다 갑자년(1564)

○ 이량은, 자는 공거(公擧)이며, 효녕대군(孝寧大君) 보(補)의 5대 손이요, 국구(國舅) 심강(沈鋼)의 처남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이다. 임자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위인이 어리석으면서 기개가 많아 친구들이 모두 우습게 보았다. 임금이 갑자기 총애하고 발탁하여, 몇 년 안 되어 낮은 벼슬로부터 판서에 올렸으니, 윤원형이 임금의 권력을 침해하므로, 임금이 속으로 두려워하여 이량을 내세워 원형과 대항하게 하려 함이었다. 《동각잡기》 ○ 이량이 그 세력을 믿고 이조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이조 낭관 홍천민(洪天民)이 좇지 않았다. 이조 당상 중에 이량을 돕는 이가 있었으나 홍천민이 번번이 다른 사람을 천거하였다. 임금이 이조의 추천을 받은 이는 다 물리치니, 마음이 이량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박호원(朴好元)이 새로 전적에 승진되었는데, 천민이 호원을 이조 낭관에 추천하니, 임금이 평안도에 흉년이 심하여 훌륭한 인재가 필요하다는 핑계로 호원을 용강 현령(龍岡縣令)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역시 천민이 이량이 이조에 들어오는 것을 즐기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의정부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박대립(朴大立)이 사인(舍人)으로 있으면서 매우 힘껏 거절하니, 임금이 응교로 승진하였다가, 곧 뽑아서 승지로 삼았다. 《동포휘언(東圃彙言)》

○ 이량이 임금의 총애를 믿고 교만ㆍ방자하여 세력이 불길 같으므로 이욕을 즐기는 무리가 일시에 다 휩쓸려 추종하였으니, 이감(李戡)ㆍ권신(權信)ㆍ고맹영(高孟英)ㆍ김백균(金百鈞)ㆍ이영(李翎) 등이 그의 심복이 되고, 김명윤(金明胤)ㆍ정사룡(鄭士龍)ㆍ원계검(元繼儉) 등은 종1품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로서 아첨하고 사귀어 뻔뻔스럽게 부끄럼이 없었으며, 신사헌(愼思獻)은 본래 간사한 사람으로 정사룡에게 뇌물을 주고 시제(試題)를 사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공론에 의하여 삭과(削科)되었다가 이량에게 빌어서 복과(復科) 되었으므로 섬기기를 종처럼 하고, 윤백원(尹百源)은 원로(元老)의 아들로, 그 아비가 원형에게 죽었음을 원망하여, 또한 이량에게 붙었다. 이량의 아들 정빈(廷賓)은 어리석고 배우지 못하였는데, 계해년 알성친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니, 사람들이 모두 술책을 써서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 달이 채 못되어 전랑에 추천되었으나, 곧 이량이 판서가 되었으므로 상피(相避)하여 갈리자, 정빈이 동료들에게 부탁하여 유영길(柳永吉)을 자기 후임으로 추천하려 하였으니, 그와 가까운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정랑 박소립(朴素立)과 좌랑 윤두수(尹斗壽)가 청론을 주장하여 그 말을 좇지 않으니, 정빈이 원망하였으며 이문형(李文馨)ㆍ허엽은 이량에게 붙으려 하지 않았고, 기대승(奇大升)ㆍ윤근수(尹根壽)는 후진으로서 사류의 칭찬을 받으니, 이량의 무리가 꺼려하였다. 이에 이감(李戡)이 대사헌이 되어, 이문형ㆍ허엽ㆍ박소립ㆍ윤두수ㆍ윤근수ㆍ기대승 등이 경박하여 서로 선동한다고 탄핵하여, 삭직되어 외임으로 쫓겨 나갔다. 《동각잡기》

○ 임금이 일찍이 야대(夜對)에 나오니, 승지 허엽이 아뢰기를, “조광조(趙光祖)는 바른 선비인데 소인에게 모함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그 당시 그가 시가를 지나갈 때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는데, 인심을 얻은 것으로 죄를 삼았습니다. 옛날 송 나라 사마광(司馬光)은 낙양에서 조정에 들어오면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들이 모두 이마에 손을 얹었으니, 이는 다 존경해서 그러한 것인데, 어찌 조광조에게 이것으로써 죄를 삼겠습니까. 전하께서 마땅히 그 무고함을 살피셔야 하옵니다. 또 구수담(具壽聃)은 본래 곧기로 이름이 있어서, 전하께서도 곧고 성실한 사람이라 말씀하였는데, 한때의 의논으로 인하여 중죄를 입었으니, 또한 불쌍합니다.” 하였다. 경연관 윤근수도 따라서 나아가 허엽의 말과 같이 아뢰었으나 임금이 모두 대답이 없었다. 이때에 이량과 이감 등이 바야흐로 국론을 잡고 있는데, 이린(李遴)이 허엽 등과 함께 입시하였다가 그날로 말을 누설시켜, 이튿날 양사에서 “허엽이 의논을 내기를 좋아하여 시비를 어지럽힌다.”고 탄핵하여 승지에서 갈리고, 윤근수 또한 과천 현감(果川縣監)으로 쫓겨났다. 《동각잡기》

○ 기대승ㆍ이문형ㆍ허엽은 사림이 허여하는 바요, 윤두수ㆍ박소립은 전랑이 되었을 때 이량에게 미움을 받았고, 윤근수 또한 의논이 명백하므로 다 이량에게 꺼림을 당하였다. 양사에서 아뢸 때에 이감 등이 이 몇 사람들을 을사의 여당이라고 하려 하였는데, 정언 이언이(李彦怡)가 불가하다 하면서, “죄가 있으면 마땅히 죄대로 죄를 줄 일이지, 어찌 없는 말을 지어내려는가.” 하여,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언이는 이량에게 붙었으나 그 말이 이와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석담일기》

○ 심의겸(沈義謙)은 이량의 생질이다. 처음 벼슬길에 나와 선비들과 교유할 때에 이량의 하는 일에 반대하려 하였다. 이때에 기대항(奇大恒)이 부제학이 되니, 또한 이량의 무리였다. 이량이 이문형 등을 몰아 내쫓은 뒤에 세상의 인심이 크게 놀랐으므로 심의겸이 이량을 제거하려 하여 기대항에게 왕래하며 모의하니, 기대항은 심강(沈鋼)의 척당이라, 심강이 이미 그의 딸인 왕비에게 연락하여 묵인 받은 것을 알고, 마침내 동료를 거느리고 차자를 올려 이량의 죄악을 탄핵하고, 또 양사가 침묵을 지켜 말하지 않음을 탄핵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곧 이문형 등을 다시 불러 쓰고 얼마 안 있어, 이량ㆍ이감ㆍ권신ㆍ사헌ㆍ이영ㆍ백원 등에게 죄를 주어 멀리 귀양 보내고 맹영ㆍ백균은 중도부처하고, 사룡(士龍)ㆍ계검(繼儉)ㆍ정빈(廷賓)ㆍ이언충(李彦忠)ㆍ이중경(李重慶)ㆍ황삼성(黃三省)ㆍ조덕원(趙德源)ㆍ고경명(高敬命)ㆍ이성헌(李成憲)ㆍ강극성(姜克誠)ㆍ윤인함(尹仁涵) 등은 삭출 혹은 파직하였다. 《동각잡기》

○ 이량이 권력을 탐하고 일을 꾸미기를 좋아하여, 오로지 아첨으로 임금의 비위를 영합하려 하여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라도 완상할 만한 것은 다 구하여 궁중에 바쳐서, 안으로 임금의 환심을 사고 밖으로 도당을 모아 세력이 성하여, 사람들이 감히 바로 보지 못하였다. 《동각잡기》에, “이량이 처음은 외척으로 사랑을 받았다가 세력이 성한 뒤에도 내시와 결탁하여 임금의 동정을 가만히 엿보아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비부(鄙夫)가 세력 잃을 것을 걱정하여 못하는 짓이 없으니, 그 두려워할 만한 것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사림의 청의(淸議)가 없어지지 않음을 꺼려서, 이감 등을 사주하여 사림에게 화를 끼치려 하니, 사람들이 모두 불안하여 아침저녁으로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 심강이 매우 불평하여 기대항을 불러 이량의 허물을 말하니, 기대항이 처음은 이량에게 붙었다가 이 때에 이르러 깨닫고서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 이량 등의 죄를 논하였다. 왕비는 본래 이량을 좋게 여기지 않아 자못 임금에게 쓰지 말 것을 간하였었다. 임금이 크게 깨달아서 이량 등을 모두 궁궐 밖으로 내쫓고, 언관을 모두 갈아 기대항으로 대사헌을 삼으니, 이에 양사가 궁궐 문 밖에 엎드려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청하므로, 드디어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그때 사람들이 기대항을 가리켜 서림(徐霖)이라 하였으니, 아마 서림이 본래 강도 임꺽정의 당이었는데 관에 자수하여 죄를 면하고, 관군을 인도하여 임꺽정을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석담일기》

○ 일찍이 이량의 사람됨이 집정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으나, 왕비 친정인 심씨 집안에서 권력을 쓸 이가 없어서 비록 이량이 이와 같음을 알았지만, 기대항으로 하여금 돕게 하면 일이 될 것이라 하여 시험삼아 썼더니, 며칠 사이에 당파를 조정에 가득 채워 권세가 윤원형을 압도하므로, 윤원형이 또한 두려워하였다. 수년 후에 심의겸이 과거에 급제하여 권세가 저절로 나누어지자, 이량이 이를 싫어하여 하루는 그 무리를 모아 사림에 화를 일으키려고 문을 닫고 의논하는 차에 심의겸이 그 집에 왔다. 문 지키는 자가 주인이 외출하였다 하였으나, 심의겸이 문을 박차고 바로 들어가 병풍 뒤에서 몰래 들으니, “누구는 무슨 죄가 있으니 내쫓아야 되고, 누구는 무슨 죄가 있으니 삭탈해야 한다.” 하면서 차례로 죄를 논하는데, 의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의겸이 갑자기 병풍 밖으로 나오니,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얼굴빛이 변했다. 이튿날 그들이 먼저 허엽과 박소립 등을 죄주니, 모두 일세의 명사들이라 조정과 민간에서 두려워하였다. 심의겸이 곧 비밀히 이량의 어지럽히는 죄상을 왕비에게 아뢰니, 답하기를 “이미 외숙의 어리석음을 알고 조정의 일을 맡겼음은 누구의 과실인가. 대전에서도 아신다.” 하였다. 이에 심의겸이 곧 기대항을 불러 의논하기를, “일이 장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부제학은 이를 탄핵하라.” 하니, 기대항이 두려워하여 대답을 못하였다. 심의겸이, “벌써 왕비의 명을 받들었다.” 하고 내어 보이니, 기대항이 뛸 듯이 좋아하며 흔쾌히 수락하고 갔다. 이튿날 동료들과 중학(中學)에서 모임을 가진 뒤에 기대항이 이량의 집에 들러 조용히 이야기하고 남은 밥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믿음을 보이고 돌아갔다. 조금 후에 대사헌 이감이 이량에게 편지를 보내어 “뜻밖에 옥당에서 중학에 모인 것이 매우 염려되니, 이 무슨 일이요.” 하니, 이량이 답하기를, “부제학이 지금 나를 보고 갔는데, 무슨 일이 있겠소. 책을 교정하는 데 지나지 않았을 것이오.” 하였다. 조금 뒤에 이량의 무리 수십 명을 탄핵하여 죄를 정하니, 이량은 강계(江界)로 귀양 가서 죽고 이감은 경원으로 귀양가 죽었으며, 칠간(七奸)인 백균ㆍ삼성ㆍ이영 등은 모두 귀양 가고 삭탈되었다. 이로부터 선비들의 기세가 조금 진작되어, 오래된 병이 소생되는 것 같았으니, 이것이 곧 갑자년이었다. 《괘일록》

○ 이량이 정권을 함부로 휘두를 때에 임금이 벌써 제어하기 어려움을 걱정하여, 친책(親策 임금이 친히 책제(策題)를 내어 선비를 시험하는 것)으로 선비를 뽑을 때에 ‘어진 이를 나오게 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친다.’는 것으로 출제하니, 기대항이 임금의 뜻을 짐작해 알았고 심의겸이 또한 비밀 명을 받들어서 일시에 일을 일으켰으니,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축수편》

○ 한창 이량이 권력을 부릴 때에 유홍(兪泓)이 동료 황삼성(黃三省)에게 말하기를, “이량이 해괴하고 망녕되니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에 붙었던 무리는 가을 파리가 양지에 모이는 것과 같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하였더니, 황삼성이 그 말을 누설하여 유홍이 장차 큰 화를 당할 뻔하였다가 이량이 패하여 무사하였다. 《계곡집(谿谷集)》

○ 일찍이 박점(朴漸)이 사림에 화가 있을 것을 알고, 심의겸에게 권하여 그 아버지와 의논하고 이량을 쫓게 하였다. 이량이 귀양 간 뒤에 박점이 감추지 못하고 스스로 그 공을 말하여 명예가 매우 성하니, 사귀는 이가 모두 명사로 문정이 시끄러웠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성혼(成渾)과 함께 참봉이 되고 선조 때에 과거에 올라 정언이 되니, 이준경(李浚慶)이 그의 행실이 없음을 미워하여 대사간 김난상(金鸞祥)으로 하여금 이를 탄핵하게 하였는데, 박점이 병으로 사양하였다. 《석담일기》

이괄(李适)의 변(變)

이괄은 참판 이육(李陸)의 후손으로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글을 잘하고 글씨를 잘 써서 명성이 있었다. 계해년(1623)에 북병사(北兵使)로 임명되어 부임하기 전에 김류(金瑬)ㆍ이귀(李貴) 등이 이괄이 재주와 지혜가 많다 하여 그에게 반정의 비밀 계획을 말하였더니, 이괄이 강개하여 따랐다. 반정하던 날 부서를 나누는 등 모든 계획을 이괄이 하였으나, 공훈의 등급을 논할 때에 반정에 늦게 참여하였다 하여 2등으로 낮추었으므로 이괄이 매우 불평하였고, 공론 역시, “박원종(朴元宗) 등이 반정(중종반정)을 할 때에 유자광(柳子光)은 처음 계획에 참여하지 않은 자였으나, 반정하던 날에 그의 계책을 썼으므로 일등 공신이 되었다. 오늘날 이괄의 한 일이 자광과 같은데 공을 책정하는데는 그보다 오히려 낮았다.” 하며 자못 억울하게 여겼다. 이해 여름에 평안도에 오랑캐의 침입이 우려되어 괄을 평안병사(平安兵使) 겸 부원수(副元帥)로 삼았더니, 이괄이 크게 노하여 마침내 속으로 딴 마음을 품었다. 《하담록》

○ 반정 이튿날 반정에 참여하였던 여러 장수가 어전에서 일을 의논할 때에 이귀가 아뢰기를, “어제의 공적은 이괄의 힘이 많았으니 마땅히 그를 병조 판서로 삼아야 합니다.” 하였으나 이괄이 자리를 피하면서, “신에게 무슨 공적이 있으리오. 다만 일에 임하여 회피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제 대장인 김류가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아서 이귀가 신에게 그를 대신케 하였는데 김류가 늦게 왔으므로 그를 베고자 하였으나, 이귀가 극력 말려서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더니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이 실색하였다. 이에 김류가 말하기를, “이경(二更)으로 시간을 정하였으니 병법으로 논한다면 미리 온 자가 마땅히 참형을 당하여야 한다.” 하니, 한교(韓嶠)가, “병법에는 그런 말이 없다.” 하자, 김류가, “《오자》(吳子 전국 시대의 명장 오기(吳起)가 지은 병서(兵書))에 있다.” 하였다. 그러자 이귀가, “《오자》에는 병졸이 장수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돌진하여 명령을 어기면 참(斬)한다는 말은 있으나 미리 도착한 자를 참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또한 그때 임금이 쇠고기와 술을 많이 준비하여, 반정에 참여하였던 장수와 병졸을 모화관(慕華館)에서 대접하였는데, 좌석의 서열을 정하는 데 있어 이귀는 호위대장(扈衛大將)으로 북쪽에 앉았고, 김류는 거의대장(擧義大將)으로 이귀의 위쪽에 앉았으며, 이괄 이하의 모든 장수들은 동서로 나누어 앉게 되었는데, 이괄은 자기 자리가 김류의 아래인 것에 분노하여 물러나 흘겨보았다. 이에 이귀가 좋은 말로 화해시켰더니, 이괄이 분노를 참고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뒤에도 이괄은 일마다 김류와 서로 맞섰고, 또 이괄의 아들이 반정에 참여하였는데도 등용되지 않았으며, 그 아우 이수(邃)는 문과에 합격하였는데도 벼슬 자리를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훈이 도리어 김류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의 아래였는데다 이괄이 또한 평안 병사로 서쪽 변방에 나가게 되니, 앙앙거리며 분노를 품고 갑자년의 변을 일으켰다. 《연평수록(延平手錄)》

○ 그때 이수일(李守一)은 내응한 공적이 많다 해서 곧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이괄은 늦게 반정에 참여하였다 하여 수일보다 낮은 판윤(判尹)에 임명되니 공론이 억울하게 여겼다.

○ 5월에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이괄을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삼고, 임금이 친히 모화관에서 전송하면서 손수 어도(御刀)를 내리고 수레바퀴를 밀어 보냈다. 이때 이괄의 기색에 화난 기색이 역력하므로 신경진이 손을 잡으며 송별하면서, “영감이 이번에 가게 된 길은 우리들도 모두 한 번씩은 거쳐야 할 것이니, 영감이 체직되어 오면 내가 대신 가겠소.” 하자 이괄이 벌컥 성을 내며, “나를 내쫓아 보내는 것이오. 영감은 속이지 마시오.” 하였다. 《일월록》

○ 그때 원수(元帥)는 평양에서, 부원수는 영변(寧邊)에서 각각 개부(開府)하였다. 이괄은 평소부터 군사를 잘 다룬다고 일컬어졌고, 정병 수만 명과 항왜(降倭)와 검사(劍士)가 모두 그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 갑자년(1624) 1월 《일월록》에는 14일이라고 하였다.문회(文晦)ㆍ이우(李佑)ㆍ김광숙(金光熽)김광숙은 《승평시장(昇平諡狀)》에 기록되어 있다. 등이 기자헌(奇自獻)ㆍ현집(玄楫)ㆍ이괄과 그의 아들 전(旃)ㆍ한명련(韓明璉)과 그의 아들 난윤(瀾潤) 등이 반란을 음모한다고 고발하였다. 그때 원훈(元勳)들은 처음으로 특별한 공훈을 세웠으므로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복종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염려하여, 널리 기찰하려고 밀고할 수 있는 길을 크게 넓혔다. 이때에 문회 등이 고변하였으므로 임금이 대신 및 원훈을 불러 의논케 하였던바 김류는 이괄이 반역하지 않을 것이라 하고, 이귀와 최명길 등은 반드시 반역하리라 하여 어전에서 서로 다투었는데 이귀가 노하여, “김류는 틀림없이 이괄과 공모하였으므로 이괄이 원통하다고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만 이괄의 아들 이전과 기자헌 등만을 체포하도록 하였는데 이날은 17일이였다. 이귀가 또 말하기를, “만약 이괄이 반역 음모가 없으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인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지방에 있는데 그 아들만을 체포하면 그가 어찌 기꺼이 공손하게 명을 듣겠는가. 부자를 함께 체포하느니만 못하다. 만약 그 일이 억울한 것이라면 그를 도로 부임지에 돌아가게 한들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찬성하지 않았다. 《연평행장(延平行狀)》 《하담록(荷潭錄)》

○ 기자헌ㆍ이시언(李時言)ㆍ한여길(韓汝吉)ㆍ유공량(柳公亮)ㆍ이성(李𢜫)ㆍ김원량(金元亮)ㆍ전유형(全有亨)ㆍ윤수겸(尹守謙)ㆍ현집 등 40여 명을 하옥하였다. 《일월록》

○ 17일 선전관(宣傳官) 김지수(金智秀)ㆍ의금부 가도사(假都事) 심대림(沈大臨)ㆍ고덕창(高德昌) 등을 보내어 이전(李旃)과 한명련 등을 잡게 하였다.

○ 심대림은 심대(沈岱)의 아들로 이 때 그의 나이는 자기 아버지가 왜란에 죽던 때의 나이와 같았고, 또한 집에 재변이 있어서 가도사로 떠나면서 심히 걱정하고 두려워하더니 마침내 역적의 손에 죽었다. 《일월록》

○ 일찍이 윤의립(尹義立)의 서조카 인발(仁發) 등이 과거 공부를 빙자하고 인성군(仁城君)의 집 근처에 모여 살면서 이괄과 서로 통하였는데, 이우(李佑)와 문회가 그 음모를 알고 고변하려 하였다. 이에 인발이 그 일이 이미 누설되었음을 알고 사람의 시체를 구하여 그 낯가죽을 벗겨서 이부 고개[利夫峴]에 버리어 자기가 죽은 것처럼 해놓고 영변으로 가서 종적을 감추었다. 이 때 문회 등이 음모 사실을 여러 공신들에서 알렸으나 모든 공신들은 발설하여 고변하기를 어렵게 여기는데 이귀가, “신하된 자로서 화가 종사에 절박하게 닥쳤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차라리 고변하였다는 비방을 들을망정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덮어둘 수 없다.” 하였다. 이어 문회 등을 붙잡아 두고, 우선 군관(軍官)을 보내어 고발 관련된 정찬(鄭澯)ㆍ정방열(鄭邦說)ㆍ한흔(韓訢)ㆍ한준철(韓浚哲) 등을 체포하도록 하는 한편 그날 밤에 이귀의 집으로 여러 공신을 초대하여 놓고는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을 청하였으나 그는 병으로 오지 못하고, 다만 그 아들 회일(會一)만을 보냈다. 이에 같이 문회 등의 말을 듣고 그들로 하여금 고변하도록 하는 한편, 여러 대장과 함께 각각 군관을 거느리고 대궐을 호위하였다. 그때 연일 국문하였는데 고발에 관련된 사람들이 곤장을 맞으면서도 자인(自認)하지 아니하자, 추관(推官)이 그 고발이 무고(誣告)라 하여 고변한 한흔을 죽였고, 또 장차 문회와 이우를 아울러 죽여 옥사를 번복할 계책을 세우니 이귀가 어전에서 “옥사를 다스리는 초기에 고변한 자를 먼저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고 극력 다투어 죽이지 않게 되었다. 옥사가 점차 만연되어 기자헌 등 30여 명이 잡히게 되었고, 이괄 부자의 이름 역시 뚜렷이 국청의 명부에 있는데 국청에서 다만 그의 아들 이전(李旃)만을 체포하도록 청하므로 이귀가 그 불가함을 극력 진술하며 소리를 높여 다투기까지에 이르니, 임금이 “이귀를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묵재일기(默齋日記)》

○ 김원량은 본래 이괄과 서로 친하였으므로 여러 공신들에게 힘써 이괄을 구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이귀에게 편지를 써서 이괄의 사실을 변명하면서 당초에 인성군(仁城君)을 세우자고 의논하던 일까지 들어서 증거를 대고, 또 이괄의 아들의 재주와 행실을 크게 칭찬하는 동시에, 그 원통한 실상을 역력히 진술하며 앞으로 그와 생사를 같이 하고자 한다는 말까지 하였으나 이귀는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아니하였다. 《일월록》

○ 그때 정용영(鄭龍榮)과 그의 아들 정찬(鄭澯) 역시 심문을 받았는데, 용영이 곤장을 맞게 되자 정찬이 나아가 말하기를, “만약 아버지의 곤장을 면해 준다면 내가 그 실상대로 고하겠습니다.” 하니 추관(推官)이 앞으로 나가 묻고 문사랑(問事郞) 김시양(金時讓)이 그 공술을 받았는데 정찬이 말하기를, “이괄이 반역하려는 실상을 토로한 자가 있습니까?” 하므로, “없다.” 하니 정찬이, “이괄이 이달 그믐께 군사를 일으켜 반란하여 개천(价川)ㆍ순천(順川)ㆍ곡산(谷山)ㆍ수안(遂安)의 길을 따라 올라오기로 약속하였는데, 문회가 이미 고발하였으니 이괄이 반드시 금부도사와 선전관의 목을 베고 이미 군사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우리 형은 한명련의 사위로서 이괄의 행동을 탐지하여 고발하려고 명련의 처소에 가 있는데 금명간에 반드시 올라올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면 “명련이 공모하였는가?” 하자 정찬이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그러나 협박을 받아 반란에 가담하였을런지는 나도 알 수 없습니다.” 하니, “기자헌도 역모에 참여하였는가?” 하니 정찬이 대답하기를,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것은 들었으나 그들이 서로 통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또, “너의 아버지도 아는가?” 하였더니, “아들이 하는 바를 아버지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였다. 추관 김류 등 이괄이 반역할 사람이 아니라고 하던 이들이 모두들 크게 놀라 용영을 불러 물었더니 용영이 대답하기를 “윤인발(尹仁發)이 죽은 것처럼 꾸미고 남 몰래 이괄에게 가서 그의 술책가(術策家)가 되어 있습니다.” 하였더니 추관이 모두, “윤인발이 살아 있다니 이 사람의 말은 모두가 믿을 수 없다.” 하고 끌어내려 곤장을 쳤는데 이는 지난해 10월에 인발이 이부 고개에서 도적을 만나 살해되어 그 낯가죽이 벗겨지고 거세된 채 내버려진 것을 그의 집에서 장사지냈다고 소문난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하담록》

○ 인발은 고 승지 경립(敬立)의 첩자(妾子)로 이괄의 아들 이전과 함께 음모하여 내응키로 약속하였는데 이우 등에게 고발당하자 죽은 것처럼 꾸미고 영변으로 들어갔다. 《일월록》에, “묘당통유(廟堂通諭)에 있다.” 하였으니 참조하시오.

○ 21일에 금오랑과 선전관이 이괄의 병영에 갔더니, 그때 이괄의 직속 군사이며 정예병이라 일컫는 1만 2천여 명과 항왜(降倭) 1백 3십 명이 삼동(三冬 음력 12월)인데도 연습하고 있었다. 의금부 도사가 다다르자 이괄은 고의로 늦게 문을 열어주고, 한편 그의 부하 이수백(李守白)ㆍ기익헌(奇益獻)ㆍ최덕문(崔德雯)ㆍ이정배(李廷培) 등을 데리고 꾀하기를, “나에게는 오직 아들 한 명밖에 없는데 그 애가 잡혀가서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니 어찌 아비가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일이 이미 급해졌으니 남아가 죽지 않는다면 몰라도 잡혀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니, 어찌 능히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받겠는가.” 하니 익헌 등이 이구동성으로 “거사하려면 내려온 사자(使者)를 죽여서 군중(軍中)을 위협시켜 다른 의논이 없도록 하시오.” 하였다. 이에 이괄이 일을 의논하려고 여러 장수를 부르니 중군(中軍) 이윤서(李胤緖)ㆍ별장 유순무(柳舜懋)ㆍ이타(李𤣯)ㆍ우후(虞侯)ㆍ이신(李愼)이 모두 왔으므로 이괄이 그 계책을 말하고 칼자루를 어루만지면서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며, “감히 어기는 자 있으면 죽이리라.” 하니 좌우가 두려워하며 모두 “예, 예.” 하였다. 이에 성 안에 군사를 포진시키고 문을 열어 도사를 들어오게 하여 미처 뜰에 이르기도 전에 군교(軍校)에게 명하여 베니 온 군중이 두려워 떨었다. 곧 군중에 명을 내려 22일에 거사할 것을 약속하고 또 근방의 병영과 수령에게 명을 전달하기를, “시급한 군무(軍務)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밤낮을 가리지 말고 급히 오라.” 하였는데 이때는 21일 해시(亥時)였다. 김기종(金起宗)의 《서정록(西征錄)》

○ 이괄이 반란할 때 직속 부하 중의 날쌘 자를 나눠 보내어 여러 장수를 부르면서, “서울에 변이 생겼으니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구원하여야겠다.” 하였는데, 정주(定州) 목사 정호서(丁好恕)는 그 말의 사실 여부를 의심하고 이괄의 사자를 베어 죽이고 군사를 이끌어 장만(張晩)에게로 나아갔다.

○ 그때 도원수(都元帥) 장만은 평양에 개부(開府)하고 있었다. 중군(中軍) 남이흥(南以興)의 부하 남두방(南斗傍)이 때마침 사사로운 일로 영변에 갔다가 잡혔는데 이괄이 놓아 보내면서 그의 편에 남이흥에게 편지를 부쳤다. 다음날 편지가 평양에 이르니 이흥은 이괄이 이간시키고자 함을 미리 알고서 뜯어 보지도 않고 원수부(元帥府)에 바쳤다. 원수가 뜯어 보았더니 글 가운데 이흥과 유효걸(柳孝傑)ㆍ박진영(朴震英) 등의 자(字)가 쓰여 있었고 그 줄거리는, “밝은 임금이 위에 계신데 흉악한 무리가 조정에 가득 찼으니 임금님 옆의 악한 무리를 숙청 아니할 수 있는가. ……” 하였다. 장만이 곧 이를 올려 아뢰었다. 《일월록》

○ 그때 장만은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역적이 부원수의 칭호를 가지고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려 바로 올라오니, 그 예봉(銳鋒)을 경솔히 범할 수 없다. 내 비록 명칭은 원수이나 거느린 군사는 수천 명도 되지 않으니 힘으로는 싸우기가 어렵다.” 하고 여러 고을에 전령(傳令)하여 군사를 재촉하여 평양에 들어와 고수할 계획을 하였다.

○ 남북의 감사와 병사에게 전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라 하고 군관 강용(姜涌)을 수안(遂安)의 임시 수령으로 삼는 한편, 이정(李靖)에게 포수병(砲手兵) 1초(哨)를 주면서 수안과 서흥(瑞興)의 두 읍 군사를 모아 미리 새원(塞垣)을 막아 적의 길을 끊게 하였다. 《일월록》

○ 22일에 적이 영변을 출발하여 개천(价川)을 향해서 사잇길로 빨리 달렸는데 대체로 장만과의 교전을 피하려는 것이였다. 또한 군사가 기율이 있고 부서가 정제(整齊)되어 있었다. 안주(安州) 방어사 정충신(鄭忠信)이 숙천(肅川) 부사 정문익(鄭文翼)을 시켜 안주를 지키게 하고, 자기는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원수부로 떠나 저녁 때 장만의 원수부에 도착하였더니, 장만이 곧 잡아들여 죄를 주려 하므로 충신이, “적의 계획은 빨리 서울로 진군하려는 것이므로 반드시 안주는 거치지 않을 것이고, 설사 거친다 해도 세력이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므로 외딴 성을 고수하고 있는 것보다는 원수부에 와서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였더니 장만이 옳게 여기고 정예한 기병 100여 명을 주어 군관 조시준(趙時俊)과 함께 안주에 가서 성을 지키게 하였다. 충신이 안주로 가다가 중도에서 적이 이미 개천으로 향하였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보고하기를, “안주가 이미 적의 후방에 있으니, 빈 성만 앉아서 지키다 임금에게 적병보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일월록》

○ 이괄은 정충신이 원수를 따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꺼리는 기색이 있었는데 관군의 여러 장수의 능력을 헤아려 보고 모두 가볍게 여기면서도 충신에 대해서는 “이 사람은 가볍게 볼 수 없다.”고 하였다.

○ 장만이 충신에게 묻기를, “지금 역적의 계획이 어떠할까?” 하니 충신이, “상ㆍ중ㆍ하의 세 가지 계책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적들이 처음 일어나던 날쌘 기세로 곧장 한강을 건너 임금의 행차에 가까이 오면 성패를 미리 알 수 없을 것이니 이는 상책이요, 평안도와 황해도에 걸쳐 모문룡(毛文龍)과 세력을 연결하면 조정에서 쉽사리 제압할 수 없을 것이니 이는 중책이요, 사잇길로 빨리 서울로 달려가 빈 성만 지키고 앉아 있으면 소용이 없을 터이니 이는 하책입니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그대의 생각으로는 이괄이 어떤 계책을 쓸 것 같은가?” 하니, 충신이, “괄은 날래나 꾀가 없으니 반드시 하책을 쓸 것입니다.” 하였다.

○ 한명련(韓明璉) 또한 도사(都事)를 죽이고 먼저 30여 기병을 이끌고 이괄에게 가면서 중군 김효신(金孝信)과 별장 강작(康綽)에게 그 군사 1200명을 거느리고 뒤따라 출발하게 하였다. 혹은, “명련이 처음에는 반역한 사실이 없이 잡혀가게 되었는데 이괄이 그 사실을 추측하여 알고 항왜(降倭)를 시켜 중도에 숨었다가, 도사를 베어 죽이고 명련을 잡아다 군중에 가서 풀어놓고 달래었더니 명련이 드디어 따랐다.” 하였다.효신 등은 개천에 가서야 명련이 반역한 것을 알아차리고, 강작을 베어 죽이고 귀순하였다. 《일월록》과 《하담록》에는 이와 다르다. 다음에 나온다.

○ 24일에 장만의 장계(狀啓)가 들어오니 도성 안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 이수일(李守一)을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삼았다. 《일월록》

○ 이원익(李元翼)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이시발(李時發)을 부도체찰사(副都體察使)로 삼아 이중로(李重老)를 거느리고 평안도로 내려가게 하는 동시에, 경기 감사 이서(李曙)를 시켜 개성부(開城府)에 주둔하여 적이 내려오는 길을 막게 하였다. 《일월록》

○ 변흡(邊潝)을 황해 병사로, 이경직(李景稷)을 전라 병사로 삼았는데, 그때 이미 남으로 파천할 행차가 있을 것을 생각한 것이였다.

○ 그때 원익이 몸소 출전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이니 원로(元老)는 멀리 가서는 안 되오.” 하고 시발을 시켜 수일 등을 인솔하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 선전관을 각 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급히 보내어 도내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오도록 명하니, 중화(中和) 부사 유대년(柳大年)은 군사 1천 여명을 거느리고 올라오고 황주(黃州) 포수 1천 명도 왔고, 성천(成川) 부사 정두원(鄭斗源)은 백여 명을 거느리고 왔으며 겸하여 군량을 관리하였고, 자산(慈山) 군수 안몽윤(安夢尹)ㆍ삼화(三和) 현령 유대일(兪大逸)ㆍ강동(江東) 현감 최응일(崔應一)ㆍ상원(祥原) 군수 이숙(李琡)ㆍ용강(龍岡) 현령 신유(申曘)ㆍ강서(江西) 현령 황익(黃瀷)ㆍ증산(甑山) 현령 장돈(張暾)ㆍ광량(廣梁) 첨사(僉使) 장훈(張曛)이 잇달아 달려왔으며 본도 도사(都事) 김진(金搢)도 지방에 나가 순시하다가 돌아왔다.

○ 본도 감사 이상길(李尙吉)이 철산(鐵山)에서 달려 왔고 용천(龍川) 부사 이희건(李希建)ㆍ곽산(郭山) 군수 민여검(閔汝儉)ㆍ선천(宣川) 부사 김경운(金慶雲)ㆍ정주(定州) 목사 정호서(丁好恕)ㆍ선사포(宣沙浦) 첨사 이택(李澤)ㆍ복수장(復讐將) 김양언(金良彦)ㆍ삭주(朔州) 부사 민인길(閔仁佶)ㆍ영원(寧遠) 군수 안준(安俊)이 모두 잇달아 왔으며, 덕천(德川) 군수 이후여(李厚輿)는 변을 듣고서 군(郡)을 버리고 곧 서울로 달려왔다.

○ 그때 이괄이 반란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니 조야가 흉흉하였다. 임금이 이귀를 불러 보고 이르기를, “내가 경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음을 후회하오. 경의 추측에는 지금 적세가 어떠하겠소.” 하니, 이귀가, “신이 듣건대 원수의 군사가 이미 황주(黃州)에서 패하였다 하옵니다. 평안도 병력이 적을 토멸하지 못하였으니 황해도 병력은 더욱 막아낼 수 없을 것이고, 황해도가 패하게 되면 경기에서는 막아내기가 실로 어려울 것이며 도성 안에도 내응하는 자가 많을 것이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일의 계책으로는 우선 종묘의 신주와 대비를 받들어 강화도로 옮기도록 하시고, 사대부의 가족이 피난하는 것도 금하지 말 것이며, 전하께서는 친히 전군(全軍)을 독려하여 기회를 보아 적을 토멸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으나, 이 의견은 일부 사람들에게 저지되어 행해지지 않았다. 《연평일기(延平日記)》

○ 그때에도 김원량(金元亮)은 이괄이 반란하지 않았을 것이라 하며, 자신이 가서 달래겠다고 청하였다. 《연평일기》

○ 그때 장만이 남이흥에게 묻기를, “적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적은데 어떻게 하면 이기겠는가?” 하니, 이흥이, “적의 장수 유순무(柳舜懋)ㆍ이신(李愼)ㆍ이윤서(李胤緖)는 비록 적중에 있으나 적과 마음이 일치하는 자들은 아니니 편지를 보내어 유혹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염헌집(恬軒集)》

○ 이에 장만이 윤서의 종 효생(孝生)을 불러 음식을 잘 대접하고 재물까지 후히 주며 약속하기를, “윤서에게 편지를 전하고 그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귀순하게 하면 너에게 꼭 상으로 천금을 주겠다.” 하였더니 효생이 재물을 사양하며 말하기를, “이 글을 전함으로써 주인을 죽음에서 벗어나서 살게 하는 것만도 이 종으로서는 다행한 일입니다. 제가 어찌 이로 말미암아 재물을 받고자 하겠습니까.” 하므로 보는 이들이 모두, “의롭다.” 하였다. 윤서는 장만의 편지를 받아보고 귀순을 결심하여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장관(將官)과 밀약하고 밤중쯤 되어 포를 쏘며 군문(軍門)에 나가서 크게 외치기를, “우리들은 의(義)로써 귀순하러 간다. 병사들은 역적을 따르지 말라.” 하였다. 그 다음날 이윤서ㆍ유순무ㆍ이신ㆍ이타 등 4명이 원수부에 나아가 통곡하자 장만이 병상에서 내려와 손을 잡아 위로하고 곧 순무를 중군으로 삼았는데, 이날 밤 적 진영에서 탈출한 자는 3천여 명이나 되었고, 윤서를 따른 자는 6백 명이 되었다. 장만이 문득 원수부 서문 밖에 흰 깃발을 꽂아놓고 항복할 자를 불러오게 하여,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말하기를, “능히 나를 찌를 수 있거든 찌르라. 그렇지 않은 자는 내가 시키는 대로 들으라.” 하니 사람들이 그의 도량에 감복하여 울면서 죽기를 맹세하였다. 윤서는 당초에 죽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며 마음의 병이 되어 칼에 엎어져 죽었다. 한편 이괄은 결사병(決死兵) 8명을 모집하여 그들을 시켜 장만과 감사를 찔러 죽이게 하였던바 한 명이 나졸에게 붙들렸다. 이에 장만이 이괄의 결사병에게 술까지 먹여서 풀어놓아 가게 하였는데 이는 적들로 하여금 평양에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였다. 장만이 또 김기종(金起宗)을 시켜 격문 2백 통을 쓰게 하였는데, 그 중 반은 언문으로 써서 길 옆에 붙이게 하였더니 적의 선봉이 이 격문을 보고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전에 들으니 원수도 역시 반란에 참여하였다고 하더니, 이제 격문을 보니 이괄이 우리를 속였구나.” 하였다. 《일월록》

○ 윤서가 귀순한 후로 이괄은 매우 두려워하여 감히 관부(官府)에 들어가 자지 못하고 하룻밤 사이에도 여러 번 자리를 옮겼는데, 이는 군사들이 저를 죽일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였다. 《하담록》

○ 28일에 장만이, 적이 평양을 거치지 않을 것을 알고 출병하기를 의논하는데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이날은 직성(直星)이 7살(七殺)이니 병가(兵家)에서는 꺼립니다.” 하였더니 정충신이, “어찌 객지에서 부모의 병환 소식을 듣고 날을 택하여 가는 자가 있으리오. 그리고 군사는 의(義)가 힘인데 어찌 음양의 날짜나 방위에 구애되리오.” 하니 뭇사람들이 굴복하였다. 이에 충신을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박영서(朴永緖)를 전봉장으로, 유효걸(柳孝傑)ㆍ장돈(張暾)을 좌우협장(左右協將)으로, 남이흥을 계원장(繼援將)으로, 조시원(趙時瑗)을 돌격장(突擊將)으로, 평양 판관 진성일(陳誠一)을 전후장(殿後將)으로, 안몽윤(安夢尹)을 관향관(管餉官)으로, 최응일(崔應一)을 향도장(嚮導將)으로, 정주 천총(定州千摠) 홍침(洪沈)을 척후장(斥侯將)으로, 박진영(朴震英)을 별장(別將)으로 삼고 1천8백여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날 늦게 군사를 출발시켰는데 해가 이미 저물어서야 겨우 대동강을 건넜다. 《일월록》

○ 독전어사(督戰御史) 최현(崔晛)이 평산(平山)에 이르러 원수부에 통첩을 보내어 군사를 재촉하여 나아가 싸우게 하였다.

○ 적을 쫓아가 황주(黃州) 서쪽의 신교(薪橋)에서 만나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적의 장관(將官) 안륵(安玏)과 허전(許銓) 등이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장만에게 투항하였다. 《하담록》

○ 황주(黃州) 마장(馬場)에 이르러, 들판을 사이에 두고 진을 치고서 안륵을 석방하여 선봉에 속하게 하여 적을 쳐서 속죄하게 하였다.

○ 2월 2일 묘시에 관군이 진을 정렬하기도 전에 적이 진영에서 거짓으로 포를 쏘더니, 허전(許銓)ㆍ송립(宋岦)이 기병을 이끌고 관군에 투항하러 오는데, 관군은 적병이 공격하여 오는 줄로 알고 놀라 무너졌다. 별장(別將) 안륵과 척후장(斥侯將) 오섬(吳暹)은 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고, 선봉(先鋒) 박영서는 적중에 함몰되자, 말을 버리고 단정히 앉아 꾸짖기를, “네, 부원수 겸 부원군(府院君)으로서 무엇이 부족하여 감히 하늘에다 활을 쏘아 반역을 하였느냐.” 하였더니, 적이 영서를 마구 찍어 죽였다. 《일월록》

○ 그때 유효걸(柳孝傑)도 역시 포위되었었는데, 그의 종 산수(山水)와 함께 곤봉을 가지고 휘둘러 치며 싸우다가 산수는 죽고, 효걸은 겨우 죽음을 면하여 편장(偏將) 강열(姜說) 등과 함께 돌아왔다. 이 싸움에서 관군으로 적에게 잡힌 자가 30여 명이였고, 전사자 또한 30여 명이였다. 적병으로 내항(來降)한 자는 1천8백 명에 달하였다.

○ 이괄이 수안(遂安)에 와서 관군이 새원(塞垣)을 지키고 있음을 알고, 돌아서 기린(麒麟)으로 가는 길을 향하였다. 장만은 패한 군사를 수습 정비하여 그 뒤를 추적하다가 서흥(瑞興)에서 부원수 이수일을 만나 함께 평산(平山)에 이르렀다. 그때 부찰사(副察使) 이시발ㆍ독전어사(督戰御史) 최현ㆍ황해 감사 임서(林㥠)가 평산 산성에 있으면서 진군할 것을 의논할 때 남병사(南兵使) 신경원(申景瑗)이 또한 군사 8백 명을 거느리고 왔다. 6일에 이괄이 저탄(猪灘)에 이르렀으므로 방어사(防禦使) 이중로(李重老)ㆍ이덕부(李德符)가 풍천(豐川) 부사(府使) 박영신(朴榮臣)ㆍ평산(平山) 부사 이확(李廓)ㆍ연안(延安) 부사 이인경(李寅慶)ㆍ옹진(瓮津) 현감 윤정준(尹廷俊) 등을 거느리고 여울목을 지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적이 별안간 낮은 여울을 건너 육박하여 관군을 대파하였다. 이에 중로ㆍ덕부 등은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한편 정충신은 포성을 듣고 군사를 재촉하여 구원하러 왔었으나 이중로 등이 이미 패한 뒤였다. 충신이 강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 진을 치니 한참 만에 말 한 필에다 중로 등 일곱 장수의 머리를 실어 보냈는데 얼굴 모습이 생생하고 분명하므로 온 군중의 기운이 꺾였다. 그러나 남이흥(南以興)이 짐짓 말하기를, “잡혀간 우리 장수는 나와 잘 아는 자들이다. 이 얼굴들을 보니 모두 장수가 아니다. 틀림없이 군졸들의 머리인데 적이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다.” 하였더니 군사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하담록》 《염헌집》

○ 그때 이확은 쌓인 시체 더미 속에 들어가 죽음을 면하였다.

○ 윤정준과 박영신(풍천(豐川) 부사)이 포로가 되어 적진에 가니 이괄과 한명련이 호상(胡床)에 앉아서 말하기를, “내 너희들의 생명을 구하여 줄 터이니 나를 따르지 않겠는가.” 하자 정준과 영신이 크게 소리지르기를, “우리는 너를 따르지 못하겠다. 빨리 죽여라. 군사가 많은 자는 반역을 하고, 힘이 약한 자는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이냐. 너는 무인으로서 나라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받았고 또 부원수ㆍ부원군이 너에게 부족한가. 무슨 까닭으로 반역하느냐.” 하였다. 이에 명련이 소리를 지르며, “네 몸이 이미 포로가 되어 있는데 어찌 감히 이렇듯 당돌하냐.” 하니, 정준이 “명련아, 너는 문화(文化)현 수군(水軍)에서 벼슬이 순변(巡邊)에 이르렀으니 너에게는 더할 수 없는데 어찌 감히 나라를 등지는가. 나는 대대로 관록있는 신하인데 어찌 역적들에게 절을 할까보냐.” 하였다. 적이 오른쪽 팔을 자르니 영신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역적 괄아, 국은을 이미 저버리고 또 의로운 사람을 죽이느냐.” 하자, 이괄은 심히 성내지 않았으나 익헌과 명련이 죽이기를 굳이 청하였다. 정준 역시 죽음을 당할 때까지 꾸짖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포저집(浦渚集)》 윤정준의 비문

○ 저탄(猪灘)에서 패하고 장만과 이시발이 여러 장수를 불러 일을 의논할 때 모두 걱정된다고 하는데 김시양(金時讓)은 홀로 말하기를, “이괄의 턱 아래에 군살이 달려 있는데 이는 곧낭(狼)이 제 턱살을 밟게 되는 형상[狠跋其胡]이니 마침내 반드시 낭패하여 죽게 될 것이다.” 하니, 장만이 심히 기뻐하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괄의 턱에 달린 살은제비 턱과 호랑이 머리로 봉후(封侯)의 형상이라 하더니 이제 공의 말을 들으니, 과연 낭(狼)의 턱살이구나.” 하고,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보내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하담록》

○ 7일에 기자헌(奇自獻) 등 49명을 죽이였다. 《연평일기(延平日記)》에는 38명이라 하였다. 그때 조정에서 매우 놀랐다. 김류가 심히 두려워하여 체포된 기자헌ㆍ김원량ㆍ윤수겸ㆍ이시언ㆍ현집 등을 빨리 죽임으로써 역적과 내통하여 내응할 염려를 없앨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좇았다. 이에 이귀가 극력 다투기를, “체포된 사람 중에는 높은 재신(宰臣)이 많으니, 반드시 모두 이괄과 함께 반역할 리가 없을 것이오. 나라 일이 비록 위급하다 할지라도 어찌 옥사의 체통을 돌아다 보지 않으리오. 또 한 사람이라도 죄없이 죽이는 것은 왕도에서 삼가는 일인데 이제 심문하지도 않고 죽인다면 뒷날 후회가 될까 염려됩니다. 자헌의 경우는 대론(大論 폐모론(廢母論))을 당하여서 절의를 세웠다가 귀양간 자이니, 어찌 분별하여 밝히지 않고 한결같이 모두 죽이리오.” 하므로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었으나 김류가 다시 입대(入對)하여 자헌 등 40여 명을 모두 죽이기를 청하였다. 이에 이귀가 다시 아뢰기를, “자헌은 혼조(昏朝 광해조(光海朝))에서 절의를 세운 사람인데 이제 여러 사람 속에 섞이어 죽음을 받게 되었으니, 원컨대 자헌에게 ‘변이 갑자기 일어나,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므로 부득이해서 너를 죽이는 것이지 반드시 네가 흉모에 참여하였다 해서 죽이는 것이 아니다.’는 말로써 조정의 뜻을 알게 하고 죽이기를 바랍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 좇지 않으니 이귀가 다시 아뢰기를, “대신을 의심스럽다는 것만으로 곧바로 참형을 가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나, 결국 목을 베어 죽였다. 연평행장(延平行狀) 《하담록(荷潭錄)》

○ 그때 일이 창황하여 매질로 심문할 겨를이 없어 옥석(玉石)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으니 이는 천고에 없는 변이였다. 이에 재신(宰臣) 권첩(權怗)이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관옥(冠玉 김류의 자)은 자손이 끊어질 것이고 옥녀(玉女 이귀의 자)는 자손이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 하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 전에 이원익이 아뢰기를, “기자헌은 반역에 가담한 죄상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비를 폐할 때에 극력 다투다가 멀리 귀양갔으니 가히 자손 10대까지 죄를 용서해줄 만합니다.” 하였으나 이괄이 반역하였다는 소식이 이르자 공신들이 입대하여 체포된 자를 모두 죽이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다음날 아침 원익이 이 말을 듣고 놀라면서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 의논에 참여치 못하였으니, 이제 나는 늙어 폐물이 되었구나.” 하고 항상 혀를 찼다. 그 후에 자헌 등의 관작을 도로 주었다.

○ 그때 체포된 사람들을 의금부 문 밖에서 죽였다. 김극전(金克銓)ㆍ극명(克銘)ㆍ이욱(李煜) 등 8, 9명과 역적 이제(李瑅)의 집 종은 옥문을 때려 부수고 크게 소리지르면서 나왔는데 도사(都事) 윤유길(尹有吉)은 겨우 몸을 피하여 살았다. 이욱은 이시언의 아들인데 말을 검게 염색하여 타고 적을 맞이하였다. 승평시장(昇平諡狀)

○ 오직 이서(李曙)는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청석동(靑石洞)에 주둔하였고, 이흥립(李興立)은 수원의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임진강 상류를 지키니 임금이 이귀에게 명하여 강 여울목을 순찰하고 오게 하였다. 《연평일기》

○ 8일에 호남ㆍ호서의 군사가 한강을 건너와 남대문숭례문(崇禮門) 밖에 진을 쳤다.

○ 적의 군사가 날로 가까이 오므로 조정에서는 드디어 남으로 파천할 것을 결정하는 동시에 전라 감사 이명(李溟)에게 교지를 내리기를, “생각하니 호남의 땅은 실로 진양(晉陽)으로 돌아감에 비길 만하다. 경은 친히 경계에까지 나와 공급하는 데 소홀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이에 이명은 은진(恩津)에서 전주로 달려 돌아가 주선하였다. 《일월록》

○ 적이 이서가 청석동을 지킨다는 말을 듣고 항왜(降倭) 수십 명을 시켜 밤에 이서의 군대를 교란시키게 하는 한편 그 길을 거치지 않고 산예(狻猊)의 소로로 개성을 지나 곧장 임진강으로 향하였다. 그때 이귀는 임진강을 지키고 파주 목사 박효립은 여울목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이 큰 길을 따라 오지 않고 예상과는 달리 여울을 따라 건너오자 효립이 달아나니 이귀가 또한 소문을 듣고 서울에 급히 돌아와 출성(出城)하고 피할 것을 굳이 청하였다.

○ 장만(張晩) 등의 군사가 급히 쫓아 나룻가에 거의 이르렀을 때 적은 이미 강을 건넜었다. 이에 장사(壯士)들은 분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혹은 칼을 빼어 나무를 찍었다. 《일월록》

○ 그때 이귀가 파주(坡州)에 가서 개성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편 최명길(崔鳴吉)은 총독부사(總督副使)로 전에 개성에 가 있었는데 적이 닥쳐오자 겨우 몸만 빠져 나와 밤중에 파주로 돌아와서 이귀에게 말하기를, “군사가 없는 두 장수가 함께 한 곳에 머물러도 성패에는 소용이 없으니, 종사관(從事官) 이식(李植)을 남겨두어 나와 함께 일하게 하고, 공은 직위가 어영대장(御營大將)이니 속히 돌아가 호위하시오.” 하니, 이귀가 자기 아들 시방(時昉)을 보내어 빨리 파천할 계책을 정할 것을 청하게 하고, 한편으로 부하 한교(韓嶠)ㆍ최무(崔茂) 등을 이흥립ㆍ박효립의 진에 나눠 보냈다. 이에 효립이 사람을 시켜 강 여울을 지키던 군사가 이미 무너졌음을 보고하였더니 이귀가 한 필의 말을 달려 대궐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다. 이귀가 아뢰기를, “일이 급해졌으니 반드시 오늘 저녁에 한강을 건너 적의 칼날을 피하소서.” 하였다. 《연평일기》

○ 8일에 적병이 벽제(碧蹄)에 이르렀으므로 임금이 창졸히 남으로 파천하기 위해 남대문을 지나 한강에 당도하니 날이 조금 어두워졌다. 나룻사람이 모두 달아나 버렸으므로 백관은 발을 동동 굴렀다. 배는 모두 강 가운데 떠 있으면서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니 선전관 우상중(禹尙重)이 죽음을 무릅쓰고 헤엄쳐 강 가운데 뱃사람을 쳐서 넘어뜨리고 5, 6척의 작은 배를 구하여 밤새도록 건넜다. 9일에는 임금의 행차가 사평원(沙平院)에 머물렀는데 해가 저물 때까지 먹을 것을 얻지 못하였다. 남원 부사 신준(申埈)이 율무죽과 곶감을 올렸다. 이내 수원에 도달하였다. 《일월록》

○ 그때 임금은 장차 남쪽으로 파천하고 대비는 신흠으로 하여금 호위케 하여 따로 강화도로 들어가게 하려 하였다. 출발하려 할 때 신흠이 입대(入對)를 청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대비와 따로 갈려서는 안 됩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그렇겠다고 하여 드디어 일행이 되었다. 상촌시장(象村諡狀)

○ 임금이 서울을 떠날 때에 이정귀(李廷龜)에게 명하여 대비ㆍ왕비ㆍ세자를 호위하고 강화로 가게 하니 정귀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재주와 꾀는 없사오나 대가(大駕)를 따라 가서 책응(策應)하고 호위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대사헌 정엽(鄭曄)이 아뢰기를, “신은 늙은 어머니가 있으니, 원컨대 대비와 중전을 따라 먼저 강화로 가고, 이정귀는 재주와 역량이 있으니 대가 곁을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비의 행차에 대신ㆍ중신(重臣)이 없을 수 없고, 원자(元子)를 보좌함도 역시 중한 것이니 예조 판서(이정귀)는 마땅히 강화로 가야 하오.” 하였다.

○ 처음에 의논하기는 대비는 따로 강화로 가기로 하였었는데 행차가 이미 떠난 뒤에 다시 임금의 행차와 같이 가기로 정하여 정귀와 우의정 신흠이 뒤쫓아가 양화(楊花) 나루터에 이르러 모시고 돌아왔다. 《월사집(月沙集)》

○ 그때 임금 행차가 먼저 떠나고 대비가 이어서 출발하였다. 남문 밖에 도달하여 대비가 행차를 돌려 시위하는 자들에게 급히 잠두강(蠶頭江) 윗길로 향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다 뒤처져 남았는데 오직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만이 모시고 갔다. 임금이 동작(銅雀)에 도달하여서야 비로소 그 보고를 받고는 놀라고 황급하여 안심이 되지 않아 급히 정귀와 신익성(申翊聖)에게 명하여 대비의 행차를 맞이하여 오게 하였는데, 이것은 정귀가 대비의 사위 주원의 외조부였고 익성(신흠의 아들)은 바로 부마였으므로 그들을 시킨 것이다. 그들이 잠두(蠶頭)로 달려갔더니 대비는 이미 촌가에 들어갔는데 오직 주원만이 혼자 모시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앞에 엎드려 행차를 돌리자고 극력 아뢰었으나 대비는 돌릴 뜻이 없었다. 이에 익성이 주원을 불러내어 큰 소리로 꾸짖기를, “금일 나라의 일이 위태로운데 대비께서 여기에 오신 것은 뜻밖의 일이니 만약 곧 행차를 돌리지 않으시면 영감이 마땅히 제일 먼저 처단을 받을 것이니 스스로 생각하라.” 하였더니, 주원은 나이가 어려서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목소리가 대비에게 들렸으므로 한참 만에 대비가 비로소 행차를 돌려 임금의 행차를 따르게 하였다. 이날 저녁 임금이 수원에 도달하여서는 기진맥진하였으므로 훈척의 여러 신하들이 둘러앉아 구호하더니 이 보고가 이른 후에야 조금 나아졌다. 《남계집(南溪集)》

○ 임금의 행차가 수원에 도달하였을 때 여러 사람이 의논하기를, “부산에 거류하는 왜인을 청하여서 적을 치자.” 하였다. 임금이, 전 병사 이경직(李景稷)은 예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왜인들이 신복하였던 사람이라 하여 부산에 갈 것을 특명하였다. 이경직은 왜인들이 틀림없이 저희 나라에 알리고 출병할 것이니 사세가 오래 걸릴 것이라 하여 난처한 점 대여섯 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아뢰니 대신 이원익이 수긍하였다. 임금이 그 아뢴 바를 보고 드디어 갈 것을 중지시켰다.

○ 그때 영광(靈光) 군수 원두표(元斗杓)ㆍ금구(金溝) 현령 이각(李恪) 등이 각각 자기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들어왔으므로 임금이 도감군(都監軍) 및 원(元)ㆍ이(李)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할 계획을 정하였다. 《연평일기》

○ 임금의 행차가 공주에 이르러 머물렀다. 중도에서 고생한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광정참(廣亭站)에 도착했을 때 충청도 노인들이 음식을 가지고 나와 곡하면서 맞이하였다. 임금이 충청ㆍ전라 군사로 하여금 산성(山城)과 금강을 나눠 지키게 하고 심기원(沈器遠)을 한남원수(漢南元帥)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신경진(申景禛)은 도감병(都監兵)을 이끌고 뒤를 막게 하였다. 《연평일기》

○ 그때 전라 감사 이명(李溟)이 길 왼쪽에서 맞았는데 군대의 질서가 정연하였다. 임금의 특명으로 그를 가선(嘉善)에 가자(加資)하였다. 이명이 군사를 나눠 차령(車嶺)의 험준한 곳에서 막기를 청하였으나 김류가 군사를 한데 모아 기다리자고 아뢰어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염헌집(恬軒集)》

○ 9일 오후에 적의 군사 30여 기병이 먼저 서울에 도달하여 외치기를, “도성 안의 사람들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 새 임금이 즉위하였다. ……” 하였다. 10일에 이괄이 한명련과 함께 말을 나란히 하여 도성에 들어올 때 이괄의 아우 수(邃)는 이충길(李忠吉)과 이시언(李時言)의 아들 이욱(李煜) 등을 데리고 모집한 군사 수천여명을 거느리고 무악(毋岳)의 북쪽에서 적을 영접하여 길을 인도하였고, 또 각 관청의 서리와 하인들이 의관을 갖추고 나와서 맞이하였으며 백성들은 길을 닦고 황토를 깔고 맞이하였다. 이괄이 서울에 들어와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였다.

○ 이때에 왕자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가 임금을 따라 한강을 건너다가 중도에서 도망쳐 이괄에게로 오니 이괄이 속으로는 그 사람됨이 시원치 않다고 여기었으나 당분간 세워서 임금을 삼았다. 경기 방어사(防禦使) 이흥립이 이괄에게 통하여 항복하니 이괄이 대장을 삼아 이제를 호위하게 하였다. 이제가 술과 고기로 군사들을 먹였다. 도성 백성들이 말하기를, “이괄이 추대한 것이 이제이고 보니 사세가 오래 못 가겠구나.” 하였다. 《일월록》 ○ 첨재(僉載)에는 “괄이 예전에 이제와 더불어 추대하겠다는 약속이 되어 있었으므로 이제가 임금을 따르지 않았다.” 하였다.

○ 괄이 이충길(李忠吉)을 대장으로 삼아 호위하게 하고 방을 붙여, “도성 백성들은 각각 자기 본업에 충실하라.”고 고시하였다. 한편 친구로서 도성 안에 남아 있는 자를 불러 관에 배치하고 조정을 구성하였다. 세력을 잃었던 사람과 무뢰배가 계속 항복해 오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 장만이 파주에 도착하여 임금이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종사관 이민구(李敏求)를 보내어 급히 가서 문안드리게 하고 10일 새벽에 혜음령(惠陰嶺)에 이르러 여러 장수를 모아 길에다 풀을 깔고 앉아서 일을 의논하였는데 갖가지 의논이 많았다. 장만이 말하기를, “금일의 계책으로는 두 가지가 있으니 지금 반드시 도성 백성들이 모두 적을 따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간혹 성패를 관망하는 자가 있을 것인데 만약 하루 이틀 더 지체하면 사람들이 모두 적에게 붙을 것이므로 의향이 굳어진 후에는 공격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지금 이때에 결사적으로 싸우는 것이 그 첫째 계책이고, 이서(李曙)의 군사를 재촉하여 동쪽 길을 지키게 하고 신경진의 군사는 남쪽 길을 지키게 하여 사방의 길을 장악하고 차단시킴으로써 그 군량 보급로를 끊어놓고 여러 도의 군사가 도착함을 기다려서 힘을 합쳐 치는 것이 또한 안전할 것이니 이것이 둘째 계책이다. 두 가지 계책 중에서 어느 것을 채택할까?” 하였다. 이에 충신이 크게 말하기를, “이미 죽도록 힘을 다하고도 적을 격파하지 못하여 임금께서 파천하셨으니 우리들의 죄는 만 번 죽음을 받아도 합당한데 사세가 이미 다급한데도 적을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승패를 탈 것 없이 일전을 어찌 아니하리오. 또한 북쪽 산을 먼저 점령하는 편이 이긴다는 옛날 장수의 사적(史蹟)도 있으니 무악재를 점거하여 진을 치면 도성을 내려다 보고 누를 것이니 적이 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싸우게 되면 적은 올려다 보고 공격하게 되고 우리는 높은 곳을 이용하여 편리한 지점에서 적을 쳐부술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자 남이흥(南以興) 등이 극력 그 계책을 찬성하므로 만이 그 의견이 따랐다. 충신이 드디어 말을 타고 먼저 나가고 모든 군사가 뒤따라 나가니 장만이, “천천히 몰아 형편을 살피라.” 하였다. 충신이 도리어 군사들에게 외치기를 원수께서 빨리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고는 채찍을 들어 질풍처럼 달려 나갔다. 충신이 연서(延曙 지금의 은평구 연신내)에 도착하여 김양언(金良言)으로 하여금 2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가만히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봉졸(烽卒)을 잡아 전일처럼 봉화를 올리라 하였다. 대군이 정토사(淨土寺)를 거쳐 진군하여 진을 치니 날이 이미 어두웠다. 정충신ㆍ유효걸(柳孝傑)별장(別將) ㆍ이희건(李希建)용천(龍川) ㆍ김경운(金慶雲)해중(海中) ㆍ조시준(趙時俊)ㆍ최응일(崔應一)ㆍ신경원(申景瑗) 등이 고개 위에 먼저 도달하여 진을 쳤고, 남이흥(南以興)ㆍ변흡(邊潝) 이하의 여러 장수가 잇달아 진군하고 이수일(李守一)은 뒤를 엄호하였다.

○ 박상(朴瑺)ㆍ이휴복(李休復)ㆍ성대훈(成大勳)ㆍ이희건(李希建)ㆍ김경운을 두국(頭局)으로 삼았는데 모두 다 정충신이 거느린 사람들이였고 남이흥(南以興)ㆍ변흡(邊潝)은 고개 안을 지키게 하고 김완(金院)은 고개의 서쪽을, 신경원ㆍ이정(李靖)은 고개 북쪽을 지키게 하고 황익(黃瀷)ㆍ안몽윤(安夢尹)ㆍ최응일ㆍ이경정(李慶禎)을 중견사(中堅使)로 삼았다. 이확(李廓)은 포수 백 명을 거느리고 치마바위 골짜기에 잠복하여 창의문(彰義門)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 부서(部署) 배치를 끝내고, 밤에 모든 군사가 왔는데, 사람과 말 소리가 시끄러웠으나, 그날 밤 동풍이 심하게 불었기 때문에 성 중에서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이에 이시발이 미리 공명첩(空名帖) 수천 장을 만들어 성 안에 몰래 보내어 성 안의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내응하여 적병이 돌아갈 길을 막게 하였다. 《일월록》

○ 그때 장만이 이서와 임서황해감사 의 군사를 재촉하여 낙산(駱山)을 점거하고 의각지세(掎角之勢)를 삼으려 하니, 이서가 만에게 편지를 보내어, “적이 이미 도성을 점거하였으니 격파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공은 서쪽에서 나는 동쪽에서 서로 적의 군량 보급로를 끊으면 적이 군색하게 될 것이니 남방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려 협력하여 치면 반드시 만전할 것입니다.” 하니, 여러 사람이 옳다고 하였으나, 이시백협수사(協守使) 은 홀로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적이 성 안에 하루라도 더 머물러 있으면 그만큼 모이는 사람이 늘어날 뿐이니, 날을 끌지 말고 마땅히 적의 기세가 안정되기 전에 날쌘 기세로 치자.” 하니 장만이 찬성하여 말하기를, “이제 충신(忠信)에게 전령(傳令)해야겠는데 무어라고 지시할까?” 하자 시백이 “내 충신의 사람됨을 알고 있다. 그는 틀림없이 벌써 무악재에 올랐을 것이다.” 하더니 조금 후에 전군(前軍)이 이미 무악재에 도착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장만이 놀라며 말하기를, “용감하도다. 충신이여, 충신이여.” 하고, “그대(시백)가 과연 잘 알아맞혔다.” 하였다.

○ 11일에야 적은 비로소 관군이 이미 무악재에 올랐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어느 사람이 이괄을 달래기를 다른 데는 이괄의 말이라 하였다. “정예병은 모두 선봉에 속해 있고 원수(元帥 장만)는 고립된 군사를 거느리고 뒤에 있으니, 일부 군사와 항복한 왜군을 이끌고 창의문에서 삥 둘러 나가면 북을 한 번 쳐서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원수가 잡히면 모든 군사가 전의를 상실할 것이니 단번에 전승(全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괄이 전군(前軍)이 적은 것을 바라다 보고 말하기를 다른 데에는 명련(明璉)의 답이라 한다. “멸하기 쉽겠구나. 여러 말을 할 것 없다.” 하였다. 명련이 말하기를, “고개 위의 군사는 내 이미 알고 있다. 백성들을 몰아내어 성 위에 올라가 싸움을 구경하게 하고 한길로 진군하여 힘을 다해 공격하면 멀리서 온 오합지졸은 바라만 보고도 반드시 무너질 것이니 백성의 인심을 가라앉혀 복종하게 할 수 있다.” 하였다. 이어서 군사들에게 명하기를, “이것들을 격파하고 나서 밥을 먹자.” 하고 성문을 열고 군사를 두 길로 나누어서 산을 포위하고 오르게 하였고 구경하는 백성들이 곡성(曲城)에서 남산까지 성채를 가득 메웠는데 명련이 항복한 왜군들을 데리고 선봉이 되어 전영(前營)에 육박하였고 이괄은 중군(中軍)에서 싸움을 감독하였다. 그때 동풍이 몹시 휘몰아치는데 적이 바람을 타고 급하게 공격하니 화살과 탄환이 비오듯 하였으나 우리편 군사는 이미 산꼭대기에 있었으므로 모두 죽도록 싸우다가 잠시 수십 보를 물러났다. 남이흥(南以興)ㆍ변흡(邊潝)이 다같이 칼을 뽑아 들고 싸움을 독려하였고, 김경운(金慶雲)ㆍ이희건(李希建)은 앞에 나서서 적진에 충돌하다가 경운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싸움이 한창 무르익어 갈 때 문득 바람의 방향이 변하여 서북풍이 심하게 불어 적이 바람머리에 위치하게 되었으므로 모래먼지가 적병의 얼굴에 휘몰아쳤다. 그러자 관군의 용기가 더욱 떨쳐 묘시부터 사시까지 크게 싸웠는데 적의 장수 이양(李壤)이 탄환을 맞아 떨어져 죽고 명련은 화살을 맞고 물러섰다. 때마침 이괄이 자리를 바꾸려고 하는데 기가 움직여지자 남이흥이 바라다 보고 크게 외치기를, “이괄이 패하였다.” 하였다. 이에 적의 군사들이 급히 달아나느라고 서로 짓밟아 골짜기 개울에 떨어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들 관군이 이긴 기세를 타고 소리지르며 추격하니 한 명이 열 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자가 없었는데, 적의 군사는 죽음을 면하기에 급급하여 민가에 달아나 숨기도 하고 혹은 길을 나누어 흩어져 달아나고, 혹은 마포나 서강으로 달아나 물가에 다다라 죽는 자도 있었다. 백성들이 또한 돈의문(敦義門)과 서소문의 두 문을 닫고 막자 적이 들어가지 못하고 곧 숭례문(崇禮門)으로 향하였는데, 충신이 그를 추격하려 하자 이흥이 말리기를 “금일의 승리는 하늘 덕분이다. 며칠 안 되어 적의 괴수 두 명의 머리가 올 것인데 무엇 때문에 끝까지 추격하리오. 도성 안에는 좁은 골목이 많으니 만약 적의 복병이 있어 득실이 있게 되면 어찌하리오.” 하니 충신이 말하기를, “빠른 우레엔 귀를 막을 겨를도 없듯이 적이 이미 넋을 잃었으니 어느 겨를에 꾀를 쓰리오. 급히 추격하면 광통교(廣通橋) 못 미쳐서 사로잡을 것이다.” 하였으나 이흥이 적극 말렸다. 드디어 박진영(朴震英)을 보내어 동쪽 교외에 숨었다가 적을 맞아 치게 하였다.

○ 그때 충신이 시백에게 이괄을 추격하여 잡을 것을 청하니 시백이 말하기를, “역적이 오래지 않아 사로잡힐 것인데 우리가 어찌 감히 남의 공을 빼앗을 것인가.” 하였다. 이에 충신이 탄복하여,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할 바이다.” 하였다.

○ 이수일(李守一)ㆍ김기종(金起宗) 등이 잠깐 산등성이 위에 마주 앉아 있는 사이에 적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때 한 사람이 중의 머리 하나를 바쳤는데, 그 얼굴 모습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를 본 사람들이 윤인발의 머리라 하였다. 처음에 이괄이 곡산(谷山)에 이르렀을 때에 그의 부하 최덕문(崔德雯)이 장만에게 귀순하여 말하기를, “윤경립(尹敬立)의 아들로 중이 된 자가 이괄의 모사가 되어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가장 친밀하게 지냈는데, ……” 하였는데 윤인발이 이때에 수일의 군사에게 잡혀 죽었다. 지난 겨울에 이부(利夫) 고개에서 죽은 자는 곧 인발이 종실인 연성도정(連城都正)의 종을 죽여 놓고 자기의 시체라 사칭한 것이였는데 낯가죽을 벗기고 거세한 것은 자기 아내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일월록》과 《하담록》에 기록되었다.

○ 이욱(李煜)을 사로잡아서 바치는 자가 있었는데 김시양이 말하기를, “교외에 나가 적을 맞았고 또 말에 먹칠을 하였으니 적을 따른 형적이 명백하다.” 하고 드디어 죽이게 하였다. 이욱이 형벌을 받음에 임하여 외치기를 “안망구(安望久)가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하였는데, 안망구는 적의 진중에서 이욱을 불러간 자이다. 《일월록》

○ 밤 이경(二更)에 이괄과 한명련이 수백 명 다른 데는 오륙십이라 하였다. 기병으로 수구문(水口門)을 몰래 빠져나와 12일 삼전도(三田渡)를 거쳐서 광주(廣州)를 지날 때 목사 임회(林檜)를 죽이고 이북(利北) 고개를 넘었으므로 충신이 유효걸(柳孝傑) 등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경안(慶安)역에 다다랐는데, 기병 27명을 거느렸을 뿐이였으나, 적은 배후의 군사가 있는가 의심하여 멀리서 보고 무너졌다. 이날 밤 적이 이천(利川) 묵방리(墨坊里)에 이르자 이괄의 부하 익헌(益獻)ㆍ수백(守白) 등이 이괄ㆍ이수ㆍ이전ㆍ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가지고 급히 달려와서 바치니 수백 등이 곧 편지를 써서 임대곤(林大坤)을 시켜 원수부에 전하였다.

○ 임회가 적을 경안역 앞에서 만났는데 이괄이 항왜(降倭)를 시켜, 임회를 붙잡아 놓고 위협으로 굴복시키려 하니 임회가 분노하여 꾸짖기를, “국가에서 너를 공신에 녹훈하였고 너의 작위를 높여 주었는데, 네가 어찌 감히 반역하였느냐. 내 너를 만 번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어찌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느냐.” 하자 이괄이 크게 노하여 칼을 뽑아 제 손으로 임회를 찔러 온 몸에 성한 곳이 없는데도 오히려 꾸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괄이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너도 글을 읽은 선비인데 안고경(顔杲卿)의 죽음을 듣지 못하였는가.” 하고 곧 혀를 잘라 죽였다.

○ 이제(李瑅)가 인경궁(仁慶宮)에서 곡성(曲城)에 올라가 싸움하는 것을 바라보니, 군사가 패하여 좌우가 모두 흩어지므로 달아나 광주(廣州) 소천(昭川)에 가서 원수의 군관이라 사칭하였다. 이를 안사함(安士諴)전(前) 현감 ㆍ한교 등이 잡아서 원수부에 바치니 장만이 가두어 놓고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는데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 심기원(沈器遠)ㆍ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禛) 등이 “이제가 이미 호(號)를 참칭하였으니 누구든지 잡아 죽일 수 있다.” 하고 돈화문 앞에서 목매어 죽었다. 그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조정에서 기원과 경진을 의금부에 투옥시켰다가 며칠 후에 내놓았다. 《일월록》 《하담록》

○ 이제가 온 가족을 데리고 달아나자 한교가 잡아서 포박하여 원수부에 바치니 기원과 경진이 군사에게 위엄을 보여 주노라고 죽였다. 《연평일기》

○ 명련의 아들 윤(潤)과 조카 한 사람이 도망갔다.

○ 정배(廷培)도 잡혀서 죽음을 당했고, 흥립은 투옥되어 자살하였다.

○ 양사에서 심기원ㆍ신경진이 자기들 마음대로 왕자를 죽였다 하여 그들을 잡아 국문하기를 청하니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천하에 반역보다 더 악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역적은 누구나 잡아 죽일 수 있는데도 한교는 군신의 대의를 몰라서 이제를 체포하고도 며칠이 지난 뒤에 안사함과 함께 원수부에 묶어 보냈으니 그 사이에 혹시 뜻밖의 변이 있었더라면, 비록 한교에게 죄를 주어도 족히 그 분함을 씻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한남원수(漢南元帥)가 의(義)로써 화근을 제거하였는데, 삼사에서는 당초에 죽이지 못한 신하(한교)를 죄주어야 한다고 청하지 않고, 도리어 기원 등을 잡아 국문하기를 청하니, 신하가 역적을 토벌하는 의가 아닙니다. ……” 하였다. 《연평일기》

○ 그때 대사헌 정엽(鄭曄) 등이 “이귀ㆍ한교ㆍ박효립이 모두 싸우지 않고 달아나 무너졌으니 그들의 직을 파면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전쟁을 피해 달아남으로써 군사를 무너지게 한 장수를 어찌 파면시킴에 그치리오. 오늘날 일을 논하는 것이 실로 구차스럽다.” 하였다.

○ 대사간 장유(張維) 등이 아뢰어 이귀를 백의호가(白衣扈駕 면직하여 관복을 벗고 백의로 임금을 모시고 가는 것)시키기를 청하였더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에 홍문관의 윤황(尹煌)ㆍ이목(李楘) 등이 차자를 올려 임진강 여울에서 군사가 달아나 무너진 것은 이귀에게 죄가 있으니 그를 한교ㆍ박효립과 함께 법에 따라 처리하기를 청하고, 또한 양사에서 주장하는 논의가 약하다는 것에도 언급하였다. 이에 양사에서 피혐하니 답하기를, “옥당에서 훈신(勳臣)을 모함한 말을 어찌 족히 따지리오.” 하였다. 《연평일기》

○ 15일에 적의 머리가 도착하니 임금이 친히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정시(庭試)를 베풀었으며 박효립을 목베어 돌렸다. 이어서 여러 도의 군사를 해산시키고, 윤방(尹昉)을 보내어 먼저 서울에 들어가 진정하고 무마하게 하니, 윤방은 서울에 들어가 백성이 적과 내통한 문서를 거두어 모두 불살랐다. 임금은 19일에 공주(公州)를 떠나 22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친히 종묘와 사직에 고하였다.

○ 이원익이 종묘와 사직에 고하기를, “영의정 겸 도체찰사(都體察使)신(臣)이원익은 삼가 아룁니다. 역신 이괄ㆍ한명련 등이 서부 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곧 조정에 덤벼들어 도성을 침략하여 차지하고, 궁궐을 불태우며, 백성을 살해하고 약탈하였습니다. 다행히 천지신명의 도움에 힘입어 도원수 장만ㆍ부원수 이수일 등이 관군을 지휘 감독하여 용맹을 떨쳐 무찔러서 무악재에서 크게 이겼습니다. 이에 적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밤에 달아나므로 온 군사가 추격하니 광주(廣州)에 가까워지자 적의 무리가 모두 흩어졌는데, 이달 12일 밤에 역적의 수하인 이수백ㆍ기익헌(奇益獻)ㆍ이선철(李先哲)에게 목을 잘렸습니다. 이에 역적 이괄과 그 아들 이전(李旃)과 그 아우 이수(李邃)와 역적 한명련과 그 조카 모(某)와 그 무리 원종경(元宗慶)의 머리 여섯 개가 행재소에 바쳐졌으니 이는 종사와 신민의 경사이옵고 신들은 기쁨을 이길 수 없어 삼가 노포(露布)로 아룁니다.” 하였다. 이어서 군대의 의식을 성대히 베풀었는데 백관(百官)ㆍ관찰사ㆍ수령이 모두 융복 차림으로 칼을 차고 유생들은 안과 밖에 나뉘어 차례로 섰는데, 임금이 융복 차림으로 정전(正殿)으로 나오자 군악을 울리니, 도체찰사가 노포를 받들어 올리고, 적의 머리를 바치는 자가 적의 머리를 선전관과 의금부 당상에게 전해 주었다. 이에 선전관이 머리를 섬돌 위에 벌여놓자 병조 판서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역적의 괴수가 틀림없음을 고하니 임금이 안으로 들어갔다.

○ 그때 장만이 서부 변경에서 온 여러 장수들을 신칙하여 임금의 행차가 서울에 돌아오기를 기다려 한강 가에서 맞아 절하게 하였는데, 오직 충신만은 안주(安州)로 돌아가며 말하기를, “내 서방에서 군사를 거느리는 신하로서 역적을 빨리 목베지 못하여 임금의 행차가 파천하게 되었으니, 죄가 적지 않은데 어찌 감히 공이 있는 사람처럼 강가에서 임금의 수레를 맞으리오. 오히려 임지에 돌아가 마땅히 조정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하니 임금이 그에게 역마(驛馬)를 타고 오게 하여 불러 보고 금을 내려주며 공신에 녹훈하고 발탁하여 평안 병사에 임명하였다. 《하담록》

○ 24일에 양사에서 아뢰기를, “2월 14일까지 행재소에 달려오지 않은 자는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실로 늙고 병든 사람 이외에는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일찍이 이괄이 반역했다는 보고를 듣고, 교리 오숙(吳䎘)이 초씨(焦氏)의《역림》(易林 책이름)으로 점을 치니 건(蹇)괘가 진(晉)괘로 가는 점괘가 나왔는데, 이는 곧 “흉함을 피하여 동으로 달아나다가 도리어 화에 빠져 부하에게 제지되어 뼈가 재와 흙이 된다.”는 것이였다. 그 후 이괄이 패하여 동으로 달아나다가 이천에 도착하여 자기 부하에게 죽음을 당했으니 과연 들어맞았다. 《우복집(愚伏集)》

○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예조 정랑 송상인(宋象仁)에게 명하여 평안도를 선유(宣諭)하게 하였더니 능히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상인은 송상현(宋象賢)의 아우로서 광해군 때 제주도에 위리 안치되었다. 《계곡집》

○ 김효신(金孝信)이 강작(康綽)을 이끌고 역시 이괄의 명령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숙천(肅川) 땅에 이르렀을 때 강작이 칼을 빼어 효신을 찌르다가 효신의 부하에게 살해되니 장만이, “강작이 이괄을 위해 효신을 죽이려고 하다가 효신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하며 효신의 공을 높이고 그를 발탁해서 충청 수사(忠淸水使)에 임명하였다. 이에 김시양이 그 사실을 충신에게 물으니 충신이 말하기를, “강작이 여러 번 효신을 달래어 이괄에게서 달아나 귀순하자고 하였으나, 효신이 듣지 않았다. 강작이 효신을 찌르면서 외치기를, ‘내 이 역적 때문에 의롭지 못하게 죽는다.’ 하였다. 효신이 이미 강작을 죽였는데 이괄의 군사는 벌써 멀리 떨어져 있어 쫓아갈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하여 원수에게 나아가서 그 말을 뒤집어 강작에게 허물을 덮어씌웠다. 따라서 효신은 충절 있는 이들을 해치고도 오히려 그 공을 누리니 심히 통분하고 놀라운 일이다.” 하였다. 시양이 뒷날 이 말을 장만에게 하니 장만이 빙긋이 웃으며 말하기를, “일이 이미 끝났는데 정충신이 이런 말을 반드시 할 필요가 있을까.” 하였다. 《하담록》

○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린 것으로서, 하지 않아도 되어지는 것이 있다. 이민구(李敏求)는 도원수의 종사(從事)로서 평안도에 있을 때, 정주(定州)의 한 기생을 매우 사랑하였는데, 장차 여러 인근 읍을 순회하고 병영에서 군대를 사열할 예정이였으므로, 그 기생과 어느 날 병영에서 만날 것을 언약하고 구성(龜城)에 도달하니, 그 기생이 길을 질러 가서 가산(嘉山)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정을 이기지 못하여 갑자기 가산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는데, 5리도 채 못 갔을 때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재빠른 기병을 보내어 구성 부사 한명련(韓明璉)을 위협하여 반란에 가담하게 하고, 명련을 잡으러 온 금오랑과 선전관을 죽였다. 만약 민구가 곧은 길로 갔든지 밥먹을 정도의 시간만이라도 머뭇거렸더라면 반드시 이괄에게 잡혀 죽었을 것이다. 문회(文晦)가 변을 고할 때 정호선(丁好善)감사 이 안변(安邊) 부사로 있었는데 그 이름이 고발장에 올랐으므로 잡혀서 김화(金化)에 왔는데 금오랑이 별안간 급한 병이 나서 한나절을 머물렀었다. 그런 까닭에 서울에 다다르기 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이르러서, 체포되어 투옥된 자는 모두 마구 처형되었다. 그 다음날 호선이 도착하여 옥에 갇히었으나 그 아우 호서(好恕)가 정주 목사로서 이괄의 사신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근왕(勤王)하였으므로 이로써 오직 호서만이 용서되었다. 《하담록》

○ 심광세(沈光世)가 막료로서 이괄을 따랐는데, 이괄에게 속았다. 예전에 서로 사이가 매우 좋았는데 광세가 서울로 돌아오자 이귀가 평안도 일을 물으니 광세가 말하기를, “이괄이 그러는데 한명련이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 하였다. 이귀가 말하기를, “나는 이괄이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하였다. 광세가 이 말을 이괄에게 곧 알리니, 이괄이 병을 핑계하고 사직하는 소를 올리면서 병기를 수리 정비하고 군사를 훈련시켜서 오랑캐가 쳐들어 와도 막을 수 있다는 상태를 크게 과장하고 소의 맨 끝에 쓰기를, “몸에 병이 이러해서 끝까지 힘을 바쳐 성은(聖恩)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니 여기에 이미 그 신하 노릇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나타내었으나 조정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광세는 영남에 있으면서 그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 자기가 재빨리 이괄에게 알렸다는 죄로 논할까 두려워하여 등창이 나서 길을 가다가 죽었는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경계가 될 것이다. 《하담록》

○ 이욱(李煜)의 아우 이환(李煥)이 욱과 함께 반역하였다가 도망하였다. 이환은 국구(國舅) 한준겸(韓浚謙)의 서(庶)사위이다. 김시양이 원수와 여러 공들에게 말하기를, “이환이 권세에 의지하여 면죄되면 왕법(王法)이 폐하여져서 나라의 체모가 말할 수 없이 될 것입니다.” 하니 모두, “그렇다.” 하고 장차 추적하여 체포하려 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환도하던 날 시양이 주막에 숙박하고 있는데, 한회일(韓會一)이 찾아와 준겸의 말을 전하기를, “이환이 김확(金矱) 일가와 함께 수원 땅에서 피란하였는데, 이환이 적에게 붙었다고 공이 그가 적에게 투항한 것으로 잘못 듣고 장차 그를 처벌하고자 한다 하니, 만약 공이 믿지 못하겠거든 이확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내 어찌 일개 서녀로서 감히 나라의 역적을 놓아 주리오 하였다.” 하니, 이환은 드디어 면죄되어 수년 후에 병으로 죽었다. 《하담록》

○ 무인 전 군수 아무개는 이괄에게 붙었는데, 그는 구천군(龜川君) 수(晬)의 서매부였으므로 김시양(金時讓)이 수에게 묻기를, “사람들의 말에 아무개가 적을 따랐다 하는데, 적을 따랐는데도 요행히 죄를 면한다면 국법이 장차 폐하여질 터이니 공은 종실의 중신으로서 어찌 한 명 누이를 위하여 나라의 역적을 놓아줄 수 있습니까. 공의 말씀을 듣고 처리하겠습니다.” 하였던바 수의 얼굴빛이 변하더니 한참 만에 천천히 말하기를, “공이 종사의 일로서 나에게 물으니 내 어찌 감히 숨기리오. 아무개는 사실 이괄을 따랐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베었다. 《하담록》

○ 김원량(金元亮)은 어려서부터 명예를 좋아하고 조행(操行)이 있어 친구들 사이에 그 이름이 드러났었다. 정경세(鄭經世)가 영남 유림의 우두머리였으므로 책 상자를 짊어지고 가서 그 문하에 유학(遊學)하였다. 반정의 모의에 참여하였으므로 발탁되어 6품에 올랐다. 김시양이 경세에게 묻기를, “원량이 유생으로서 반정의 공훈에 참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경세가 말하기를, “그가 김자점(金自點)ㆍ이시백(李時白) 등과 서로 친하였으므로 비록 함께 모의한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참여한 일은 없었다.” 하였다. 공훈을 책정할 때 원량이 3등으로 되자 그 잘못된 것을 분하게 여겨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시양이 경세ㆍ임숙영(任叔英)과 홍문관에 모였을 때 시양이 말하기를, “원량 자신이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하더니 3등 공신으로 녹훈되자 그 잘못된 것을 분하게 여기니 어찌된 것인가.” 하였더니 경세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자, 숙영이 말하기를, “내가 원량과 매우 친하였는데, 원량이 어느 날 찾아와서 반정의 모의를 말하기에 내가, ‘녹을 먹고 나라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종사를 위하여 이러한 거사를 하려는 것은 진실로 옳은 일이나, 그대는 유생으로서 위로 홀로 된 부모를 모시고 있는데 일이 만약 실패하면 화가 부모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충성과 효도를 모두 잃어버리겠소.’ 하였더니 원량은 얼굴빛이 변하여 가버렸다. 원량과 이괄은 6촌간으로서 이괄이 반정에 참여하게 된 것도 원량을 통한 것이다.” 하였더니 경세가 웃으며 믿지 않았다. 그해 겨울, 문회가 고변하자, 원량이 자기가 영변 판관으로 가서 이괄을 정탐하겠다고 청하였는데 여러 공신이 크게 의심하여 허락하지 않았다가 이괄이 반란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원량을 심문하고자 청하여 마침내 베었다.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인발이 죽은 체하고 이괄에게 항복한 것도 원량 때문이다.” 하였는데 그의 친구 나만갑(羅萬甲)ㆍ조직(趙溭) 같은 무리들은 모두 지금까지도 원량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한다. 《하담록》

○ 원량은 이괄의 부자를 깊이 믿었으므로, 이괄이 고발당하자 자기의 전 가족이 이괄을 보장하겠다고 하였는데, 이괄이 반란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승지 김자점이 아뢰어 그를 가두게 하였더니, 원량이 옷을 찢어서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로 소를 썼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여 역적을 충성스럽다고 인정하여 감히 다른 뜻이 없다고 보장하였다가 드디어 임금을 속인 것이 되었으나, 신의 본 마음은 하늘의 해가 증명할 것입니다. 대개 이괄은 곧 신의 타성(他姓)의 근친으로 평소에 논하는 바나 몸가짐이 한결같이 사대부 같았고, 그 아들 이전(李旃)은 어려서부터 신의 집에 드나들며 소학(小學)ㆍ가례(家禮) 등의 책을 배웠고, 또 한때의 선생과 점잖은 분을 스승으로 모시었고, 나이가 적고 배움이 없다 하며 벼슬 받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신이 이 때문에 그를 허여하였습니다. 속임수를 쓴 것이 이에 이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정찬(鄭澯)이 고발하였을 때에 신의 생각으로는 정찬이 폐위된 광해군 때의 훈척(勳戚) 집안의 신하이므로 이괄이 그와 함께 모의하였다 함은 사실에 가까운 것 같지 않아서 끝내 의심하지 않았다가 이제 반역한 신하의 인척으로 전하의 의혹을 사게 되었으니 신은 땅에 들어가도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 하였었는데, 그 소는 끝내 올려지지 못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남으로 떠나려 할 때, 판의금 김류(金瑬)에게 묻기를, “가두어 놓은 여러 죄수들을 모두 죽일 것인가, 김원량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니, 김류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자점이 재빠르게 말하기를, “남겨 두었다가 적에게 넘겨 주어서 적이 이용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드디어 자점의 친한 사람을 보내어 옥중에서 목을 베게 하니 이경생(李更生)이 자점에게 말하기를, “김아무개는 어진 선비인데 죽였으니 사람들이 장차 공을 어떻게 생각하겠소.” 하니, 자점이 크게 말하기를, “선비를 죽였다는 비난은 내 자신이 감당하겠소.” 하였다. 김장생(金長生)이 예전에 말하기를, “김원량은 진실로 죽음을 취할 만한 점이 있었으나 그 마음이야 어찌 의심하리오.” 하고, 또 자점에게 말하기를, “네가 원량이 예전에 관서(이괄이 부원수로 있었던 영변)의 수령을 원하였다는 것으로 의심의 단서를 삼으니, 그렇다면 내가 예전에 무주(茂朱) 현감을 구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의심할 수 있는가.” 하였다. 김원량의 묘표(墓表) ○ 원량이 사람들이 서변 임명은 싫어 피하는 것을 보고서 분개하여 영변의 수령이 되기를 청하였다.

○ 3월에 장만(張晩)ㆍ정충신(鄭忠信) 등 29명을 진무(振武)공신으로 녹공(錄功)하였다. 이시발(李時發)ㆍ최현(崔晛) 등은 공이 있었으나 함께 녹훈할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장만이 여러 번 소를 올려 아뢰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월록》

○ 예전에 이시발이 명을 받고 적을 방어하러 나가 평산(平山)에 주둔하였는데 이서(李曙)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어서 왔다. 시발이 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때마다 곧 이서에게 전령(傳令)하여 이에 응하게 하였는데, 하루에도 서너 차례나 되었다. 정보의 말이 같지 않았고 전령 역시 따라 변하였다. 이서가 반정의 원훈(元勳)으로서 권세가 바야흐로 성하므로 김시양(金時讓)이 시발에게 말하기를, “금일 일의 형세를 보건대 한 조각 종이의 전령으로서는 완풍(完豐) 부원군이서 을 제압할 수 없으니 그로 하여금 상황에 따라 작전을 바꾸게 하고 자주 전령함을 그만두는 것이 어떤가.” 하였으나, 시발이 따르지 않았다. 이괄이 이미 토벌된 후 이서가 이귀(李貴)와 함께 방어하지 못하였다 하여 죄를 받게 되자 이서가 보관해 두었던 그때의 전령 문서를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호령이 이처럼 자주 변하여 동서로 달려 왔다갔다 하기에도 겨를이 없었는데 어떻게 적을 맞아 싸울 수 있었겠소. 이것이 과연 나의 죄인가.” 하였다. 장만이 진무공(振武功)을 감정(勘定)할 때 임금이 명하기를, “문관은 기록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이시발(李時發)ㆍ김기종(金起宗)ㆍ남이웅(南以雄)ㆍ최현(崔晛)ㆍ김시양(金時讓)이 모두 삭제되었다. 연말에 장만이 시양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진무공신에 문신을 녹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이 판서(시발)가 반정의 원훈들에게 거슬렸기 때문이라 하니 만약 나를 따르던 문신만을 녹훈하기를 청하면 반드시 허락받을 것이다. 문신을 녹훈하지 못하게 한 일이 부득이해서 그렇게 되었으니 이번 회맹(會盟)이 행하여지기 전에 다시 청하겠다.” 하였다. 며칠 후에 기종(起宗)ㆍ이웅(以雄)만을 녹훈할 것을 청하였더니 과연 허락하였다. 《하담록》

○ 안륵(安玏)ㆍ황익(黃瀷)ㆍ이원로(李元老)ㆍ안철(安澈) 등 70여 명을 아울러 가자(加資)하고 상직(賞職 명예직)에 임명하였다.

○ 그때 임금의 행차가 남으로 파천하여 중앙과 지방의 인심이 흉흉하였는데 이이첨(李爾瞻)의 잔당이 많이 내응하려 하였고 권진(權縉)이 양산(梁山)에 귀양가 있었는데, 그가 무사 및 항왜(降倭)와 결탁하여 수상한 형적이 있었으므로 민성휘(閔聖徽)가 먼저 베고 난 뒤에 보고했다. 그의 계획은 간흉한 싹을 미리 잘라 버리려는데서 나왔으나, 적이 토평된 후 마음대로 죽였다 하여 파면되었다. 《명신록》

○ 계해년(1623) 초에 권진이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신하라는 이유로 양산(梁山)으로 귀양갔었는데 이괄의 변이 일어나자 통제사 구인후(具仁垕)ㆍ우병사(右兵使) 신경유(申景裕)가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달려가면서 권진이 이괄에게 응할까 염려하여 감사 민성휘에게 비밀히 말하여 권진을 죽이게 하니, 성휘가 감히 어기지 못하고 청도(淸道) 군수 정경업(鄭慶業)을 보내어 권진을 목베게 하였다. 권진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조정의 명령이 아닐 것이다. 내가 죽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나, 일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쩔 수 없구나.” 하였다. 이괄이 이미 토평된 뒤에 조정에서 민성휘를 투옥시켜 재신을 마음대로 죽인 죄를 추궁할 때 공신들이 모두 힘써 구원하였고 임금 역시 일은 비록 망동(妄動)했으나 의도는 나라를 위한 것이라 하여 벼슬만 삭탈하라 하였다. 몇 달이 지난 뒤 함경 감사 권반(權昐)이 교체되자 공신들이 재주가 성휘와 같은 이가 아니면 북방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그로써 권반을 대신하게 하고자 하였다. 신흠(申欽)이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굳건하지 못하여 장래에 변란이 없을지 모르겠다. 북방은 사대부가 귀양가는 땅이니 불행히도 난이 생겼을 경우 성휘가 감사가 되어 권진을 죽이듯이 마음대로 죽이면 나라의 체모가 없다.” 하여 드디어 공신의 의논이 중지되었다. 《하담록》

○ 권진이 과거에 올라 벼슬에 나아가는 데 급급하여 이산해(李山海) 편에 붙어서 높은 벼슬에 올랐는데, 홍여순(洪汝諄)의 권세가 산해보다 중한 것을 보고는 드디어 여순에게 가까이 하였다. 여순이 패하자 또 유영경(柳永慶)에게 가까이하여 청관(淸官 홍문관의 벼슬아치)을 지냈으나, 그 욕심을 다 채우지 못하자 또 목장흠(睦長欽) 등과 함께 서로 관계를 맺어 스스로 사류(士類)라 칭하였다. 광해군 때 임자년 옥사가 일어나자, 권진이 형방승지로서 옥사를 다스릴 때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드디어 광해군으로부터 총애를 받아서, 몇 년 동안에 벼슬이 올라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반정을 하던 날 화가 미칠까 크게 두려워하여 참판 박정길(朴鼎吉)을 죽이고자 청함으로써 공신에게 아첨하여 붙으려고 꾀하였다. 정길의 죄는 비록 죽어서 마땅하지마는 사람들이 모두 다 권진의 반복(反覆)을 미워하였으니 민성휘에게 살해된 것도 역시 자초한 것이였다. 《하담록》

○ 이수백(李守白)ㆍ기익헌(奇益獻)이 이괄ㆍ한명련(韓明璉)을 목 베어와서 항복하였으므로 그 죽음을 특별히 면하고 나누어 귀양보내었다가 수년 후에 대사령(大赦令)으로 사면하여 편의대로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중로(李重老)의 아들 문웅(文雄)ㆍ박영신(朴榮臣)의 아들 지병(之屛) 등이, 수백(守白)이 이괄의 무리였다고 해서 복수한다고 명분삼고 대낮에 서울 거리에서 수백을 목베고 소를 올려 살인한 죄를 처벌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김시양(金時讓)이 아뢰기를, “문웅 등이 비록 복수라고 하였지마는, 제 마음대로 인명을 살해하였으니 그 죄는 사형에 해당됩니다. 이를 사형시키지 않으면 이 뒤로부터 복수라 칭하고 마음대로 살인하는 자가 잇달아 나올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의금부에 명하여 심문하게 하고 심문한 글이 올려지자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김류(金瑬) 등이 그 효성을 여러 번 칭찬하고 용서하여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문웅 등이 반드시 사형받을 줄을 각오하고 죽였다면 효가 되겠지마는 지금 조정의 공론이 반드시 이와 같을 줄 알고서 수백을 죽였을 것이니 죄를 주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 역시 이중로가 반정 공신이라 하며 마침내 그 사형을 면하여 주었다. 《하담록》

○ 이중로(李重老)의 처 정(鄭)씨는 고(故) 재상 정언신(鄭彦信)의 딸이였다. 반정 초에 중로가 이천(伊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의거에 나가려 할 때 정씨가 경계하기를, “신중히 하시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이를 비명으로 죽게 하는 것은 오늘 거사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였으며, 이번 이괄의 난에 중로가 죽자 몸소 싸움터를 돌아다니며 그의 시체를 거두어 돌아왔고, 복기(服期)가 끝났어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이때 두 아들 문웅(文雄)ㆍ문위(文偉)가 수백(守白)을 목베니 정씨가 듣고서 곡하며 말하기를, “아이들이 능히 이 일을 하였는가.” 하였다. 그 머리를 가져다 중로의 영전에 고하고서야 고기를 먹고 소복을 벗었다. 무릇 11년 만에 벗었다. 사람들이 비로소 놀라 탄복하였다. 84세에 죽었다.《강화지(江華志)》

○ 윤인발(尹仁發)은 곧 판서 의립(毅立)의 서조카이다. 인발이 법으로 처단된 후에, 임금이 의립의 평소의 행동과 몸가짐으로써 그의 마음가짐을 살펴 연좌형을 적용하지 않아 관직과 작위가 전과 같았다. 《공사견문》

○ 3월 8일 호종공(扈從功)을 녹훈하고 문관 42명에게 가자(加資)하였다. 《우곡일기(愚谷日記)》

○ 3월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정경세(鄭經世) 이하 박사 이소한(李昭漢)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안눌(李安訥)ㆍ황치경(黃致敬)은 몸이 재상의 반열에 처해 있으면서 사람을 대하여 공공연히 패역한 말을 함부로 하니 듣는 이의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그 살을 찢어주고 싶을 정도인데, 이목의 관직인 양사에서는 규탄하여 죄를 논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 언관(言官)의 체신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청컨대 양사를 갈아 바꾸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사람들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으리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 예전에, 이괄의 목을 베어 오는 자에게는 부원군(府院君)에 봉하고 천금을 내려 주겠다고 현상에 부쳤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간이 익헌(益獻)ㆍ수백(守白) 등의 예전의 죄를 들어 죽이기를 청하자, 이귀(李貴)가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는 뜻으로 어전에서 힘써 다투어 부원군으로 봉하고 금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익헌이 이괄의 목을 바친 것은 이미 패한 뒤였다 하여 죽음만 면제해 주게 하였다. 그 후에 또 익헌의 이름이 고변장에 올려져서 멀리 귀양보내었다. 나중에 이우(李佑)ㆍ문회(文晦)ㆍ김광숙(金光熽) 등이 진무(振武) 공신에 들었으나 익헌 등이 들지 못하자 이귀가 또 아뢰기를, “선왕 때 서림(徐霖)이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비록 공훈은 삭탈당하였으나, 특명으로 동지(同知)에 임명되어 녹을 받은 사실이 있었으니 이제 이러한 전례에 따라 익헌 등의 죽음을 용서하여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 하였다. 《연평일기》

○ 가을 7월에 이홍주(李弘冑)를 도원수(都元帥)로 삼았다.

○ 전교하기를, “전 원수 장만(張晩)이 출사(出師)하는 날에 내가 수레바퀴를 밀어서 전송하였으니 대접이 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데, 적을 섬멸한 공적은 종묘와 사직(여기서는 서울)이 함락된 뒤에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출전한 장수와 군사가 용렬한 것이 장만의 복이였다. 원수의 자리는 관계되는 바가 대단히 중하므로 교체하지 않았는데 장만이 받은 병부(兵符)를 거만하게도 군관을 시켜 올려 보내었고, 군무를 의논하고자 하여 유지(諭旨)를 내려 불렀는데 또 병을 핑계하고 올라오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고. 내 심히 놀랍고 괴이히 여기니 중하게 추고(推考)하여, 거만하게 조정을 멸시한 죄를 징계하라.” 하였다.

○ 공조 참의(工曹參議) 김덕함(金德諴)이 사직하는 소에, “신이 이안눌(李安訥)과 선후해서 가도(椵島 원문에는 단도(椴島)라 하였는데, 가도의 오식이다.)에 들어와서 황주(黃州) 이어연(鯉魚淵)의 관군이 불리하다는 기별을 들었고, 저탄(猪灘)에서 군사가 패한 후에 궁궐에 침범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었으므로 신이 말하기를, ‘섬(가도)에 있는 사신들은 의당 일제히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에게 알려 군사를 청해야 할 터인데, 어찌 역적 이괄이 칼을 들어 대궐에 범하려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고 한 가지 계책도 쓰지 않으리오. ……’ 하였더니, 윤의립(尹義立)과 철산(鐵山) 부사 안경심(安景深)은 다 같이 신의 말이 옳다고 하였으나 오직 안눌만이 이괄에게 세 가지 책략이 있으니 잘 알아본 후에 대책을 세우자 하고 며칠이나 섬에 머물면서 시종 우리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섬에서 철산으로 나왔을 때에 본도의 순찰사(巡察使) 이상길(李尙吉)의 편지를 받아 보았더니, “모문룡에게 군사를 청하러 가도로 향한다. ……” 하였습니다. 또 와전된 말이 있어, ‘역적 이괄이 남대문 밖 촌가에서 대비를 받들고 한 왕자를 추대하였으며 임금의 행차는 저자도(楮子島)로 피하였다. ……’ 하였습니다. 그때 안눌이 말하기를, ‘군사를 청하여 토적하는 것과 근왕(勤王)하는 것 중 어느 편이 옳을꼬.’ 하고, 계속하여 말하기를, ‘이제(李瑅)가 대비를 모셨다 하니 이도 또한 우리 임금(선조)의 아들이다.’ ‘인조가 임금된 지도 1년이 넘지 않았다.’ ‘저자도에서 능히 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밖에 반정 초에 미진하였던 일, 공신들의 명이 짧다는 일, 역적 이괄이 정승 등을 세웠다는 일들을 함부로 지껄여 조리가 없으므로 윤의립이 말리며 말하기를, ‘역적 이괄이 새 조정을 포치(布置)한 것을 어찌 족히 말할 것이 되리오.’ 하였습니다. 신이 안눌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모문룡에게 청병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는 알기 어렵지 않다. 대비가 10년 동안 유폐되어 장차 불측한 변이 있을 뻔하였다. 그때에 왕자들이 모두 대비를 폐위하기를 청하였는데 지금 반정하여 대비가 복위된 때에 왕자가 이괄에게 추대되었다 하니, 비록 지금 대비를 빼앗아 받들었다 하더라도 나라를 다투는 역적임은 분명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안눌의 발언이 광패(狂悖)하고 처사가 어긋남을 보고 실성했나 의심하였습니다. 환도하여 서울에 들어온 후 한 집안 사람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들으니, 안눌이 옥당 관원에게 말하기를, ‘미유년(未踰年 인조가 임금된 지 일년이 넘지 않았다.) 세 글자가 신(김덕함)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고 또 안경심(安景深)에게 변명하기를 13개월이나 되니 이미 1년이 넘었다고 말했다.’ 하니 이는 천지신명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하였다. 전교하기를, “안눌이 말한바 이괄의 세 계책은 어떤 것인고. 승정원에서 김덕함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니 덕함이 글로서 아뢰기를, “안눌이 윤의립이 거처하는 방에서 먼저 말하였는데 신은 감히 다시 묻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윤의립과 안경심에게 물어보라.” 하였더니 두 사람이 함께 말하기를, “안눌이 말한 세 가지 계책은 임금의 행차가 있는 곳을 바로 치는 것이 상책이고, 대비를 받들고 왕자를 세우는 것이 중책이며, 서울에 머물러 이괄 자신이 임금이 되는 것이 하책이라.” 하였다. 양사에서 이안눌을 잡아 국문하여 법대로 처단하자고 아뢰어 멀리 경성(鏡城)으로 귀양보냈다. 《성옹집(醒翁集)》

[주-D001] 직성이 …… 꺼립니다 : 음양(陰陽) 중에, ‘천문학상으로 어느 날에는 어떤 별이 당직(當直)을 한다.’는 말이 있는데, 칠살(七殺)은 흉성(凶星)이므로 칠살이 직성(直星)인 날에 출병하면 불리하다는 것이다.

[주-D002] 낭(狼)이 …… 형상 : 이것은 《시경(詩經)》에 있는 말인데, 낭(狼)이라는 짐승은 턱살이 처져서 걸을 때에 턱살을 밟다가 꼬리를 밟다가 하는 짐승인데 여기서는 앞뒤로 곤란을 가져온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3] 제비 턱과 …… 봉후의 형상 : 상법(相法)에, ‘호두연함(虎頭燕頷)은 봉후(封侯)할 좋은 상이라.’ 하였다.

[주-D004] 진양(晉陽)으로 돌아감 : 춘추(春秋) 때에 조양자(趙襄子)가 난을 당하여 진양(晉陽)으로 피하여 갔다. 여기서는 전라도로 파천하자는 뜻이다.

[주-D005] 안고경(顔杲卿)의 죽음 : 당 나라의 안고경은 안녹산(安祿山)에게 잡혀 굴하지 않고 꾸짖다가 참혹하게 죽었다.

[주-D006] 서림(徐霖) : 명종조(明宗朝) 때에 강도 임꺽정[林巨正]의 첩주(諜主)로 관군에게 쫓기자 항복하여 임꺽정이 있는 곳을 알려 임꺽정을 잡히게 하고 죄를 면하여 공신이 되었다.

김자점(金自點)의 옥사

기축년(1649)에 인조가 승하하여, 김자점이 국정을 담당하자 집의 김홍욱(金弘郁)이 맨 먼저 공격하고자 하니, 지평 임중(任重)이 이에 응하여 마침내 함께 김자점이 탐하고 방종하여 나라를 좀먹는 죄를 탄핵하여 아뢰었다. 이때 김익희(金益熙)와 신면(申冕)은 서로 권력을 다투어 공격하였는데, 김익희가 산인(山人)을 끼고 신면이 자점의 당이란 것을 특히 논하고 아울러 황호(黃㦿)에까지 말이 미치니, 임중이 싫어하여 따르지 않으므로 임중을 시끄럽게 공격하는 이가 더욱 많았다. 《염헌집》. 임중(任重)은 상원(相元)의 아버지이다.

○ 조정의 신하간에 원당(原黨)과 낙당(洛黨)의 명목이 있었는데, 낙당은 바로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 김자점이요, 원당은 바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 원두표이다. 두 사람이 각각 당을 만들어 서로 헐뜯으니, 선비들 중에는 그 당에 물들지 않은 사람도 함께 지목을 받은 이가 있었다. 대사헌 조경이 심대부(沈大孚)ㆍ장응일(張應一) 등과 함께 자기네들과 다른 무리를 일망타진하고자 하니, 조복양(趙復陽)이 한 마디 말로 그 마음을 꺾어 그 계책을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조송곡(趙松谷) 행장〉

○ 기축년 8월에 양사에서 아뢴 대략에, “김자점이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조정을 그릇되게 해서 방금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의논하였는데, 거기에 붙고 좇은 무리들도 약간의 징계를 가하여 조정을 맑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라 감사 이시만(李時萬), 서산 군수 이이존(李以存), 부제학 신면, 호군 이지항(李之恒)ㆍ이해창(李海昌), 전 집의 엄정구(嚴鼎耈), 광주 부윤(廣州府尹) 황호 등은 혹은 아부하여 비밀히 결탁하고서 사람들의 갖은 비난을 꺼리지 않으며, 혹은 김자점의 농락을 받아 세력을 조성하니 청의(淸議)에서 버림을 받고, 사대부들에게 욕을 끼쳤으니, 함께 벼슬을 깎아 버리기를 명하옵소서.” 하였다. 《동춘집》

○ 또 아뢰기를, “사대부는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며 공신 재상과 명성이 높은 무리들은 길이 서로 다른 것인데, 예조 참의 이행진(李行進)과 승지 이시해(李時楷) 등은 원두표의 문하에 출입하며 압객(狎客 서로간에 예의도 차리지 않는 극히 친밀한 손님)이라는 칭호가 있어도 조금도 부끄러움을 모르니, 식자들이 침을 뱉고 더럽게 여기며 청의(淸議)에서 버림을 받았으니, 함께 파직하옵소서.” 하였다. 《동춘집》

○ 이전에 김자점이 궁중과 결탁하여 국권을 농락하고 조정을 어지럽힐 때, 몇몇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가까이 세력을 조성하니, 온 나라에서 분하다 하고 미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 대관들이 바야흐로 자점을 논핵함에 있어 형을 너무 가볍게 논하니, 대사간 김여경(金餘慶)ㆍ집의 송준길(宋浚吉)ㆍ장령 이상일(李尙逸) 등이 자점을 멀리 귀양 보내고 그 당류 7, 8명은 영영 벼슬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자점은 선조의 훈구지신이므로 비록 죄가 있어도 귀양 보낼 수 없다.”고 비답을 내렸는데, 매우 온당치 않으므로 여러 대관들이 피혐하여 아뢰기를, “간신(諫臣)의 말을 꺾는 것은 나라의 흥망에 관계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곧 뉘우치는 뜻을 보였다. 자점이 이로 인해서 정승에서 파면되니, 그의 무리들이 원망하였다. 이로써 자점이 불측한 음모를 하면서 몰래 청국 사람에게 모함하며 말하기를, “김상헌과 김집(金集)이 청국을 배척하는 괴수이다.”고 하였다.

○ 11월에 신면 등을 멀리 귀양 보낼 것을 특명하니, 장령 송시열이 귀양 보내는 것은 너무 중하다는 뜻으로써 명령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외인(外人)들이 이것을 과중하다고 불복한다 하니, 더욱 조정의 기강이 퇴폐함을 알겠다. 한심함을 금할 수 없다.” 하였는데, 뒤에 경연에서 말하는 이가 있어 신면에게 사형에서 한 등급 감하여 정배시켰다.

○ 경인년 2월에 대사헌 이후원ㆍ대사간 조석윤 등이 자점의 죄를 논하니, 임금이 부처(付處)하기를 명하였다. 자세한 것은 위에 나왔다.

○ 이후원이 또 자점에게 죄를 더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자점의 죄는 벌써 꿰미(貫)가 찼는데 부처에 그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의 전후에 범한 죄를 밝혀서 논의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그 뜻(청국에 거슬릴까 두려워하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3월에 비로소 광양(光陽)으로 귀양 보낼 것을 명하였다.

○ 신묘년 12월에 해원 영(海原令) 영(暎)ㆍ진사 신호(申壕) 등이 자점의 반역 음모를 고변하였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와서 친히 국문하니 역적 익((釴) 자점의 아들)이 자복하고 바로 공모한 무장(武將)을 끌어대어서 자점과 김익이 죽음을 당하였다. 《조야첨재》

○ 자점이 처음 귀양갈 때에 그 무리들 스스로가 서로 의구심을 품고 사류들을 제거할 계책으로, 김익이 부제학 신면에게 모의하니, 신면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오직 한 가지 계책이 있으니, 만약 친밀한 역관으로 하여금 정명수(鄭命壽)에게 통하여 산인(山人)을 제거하면 우리들은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김익이 그 말을 좇아 이형장을 시켜 청국에 참소를 행하여 드디어 청 나라 사신이 사문(査問)하게 되었던 것이었는데, 이에 이르러 흉악한 계책이 더욱 낭자하였다. 신면은 매맞아 죽고, 그때에 형장은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용만에 이르렀는데 금부 도사를 보내어 잡아다 국문하여 자복을 받고 수레에 찢어 죽였다. 《조야첨재》

○ 이전에, 임금이 자점의 적소(謫所)에 내시를 보내어 그 문서를 수색하여 오니, 조정 신하의 편지와 지방 장수 및 수령들의 편지가 많고, 또 원망하는 말과 흉한 형적이 드러난 것이 있었는데, 모두 안에다 머물러 두고 조정에 내리지 않았다. 뒤에 경연에서 이 말을 하니 임금이 “볼 것이 없어서 이미 불태웠다.”고 답하였는데, 이는 옥사가 너무 커질 것을 두려워함이었다. 대역을 다스린 뒤에는 의례 하의(賀儀)가 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원훈(元勳)으로서 반역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니, 하례할 것이 없다.” 하고, 마침내 하례를 받지 않았다. 《조야첨재》

○ 그때, 임금이 죄인을 친히 국문하였는데, 낙형(烙刑)을 시행할 자가 있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낙형은 주(紂)가 만든 혹형이므로 후세의 임금 중 이것을 사람에게 시행한 이가 없었고,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역적을 다스릴 때에 쓰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임금으로서 친히 보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얼굴빛이 변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피하였다. 《식암집(息庵集)》

○ 그때, 죄인을 국문하여 그 당류를 적발시켰는데, 국문을 맡은 한 사람이 문사랑(問事郞)을 시켜 죄수에게 타이르기를, “네가 관련된 자를 말한 것은 무관뿐이니 어찌해서 문신은 고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정태화가 나와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묻는 말은 틀렸소. 문무를 막론하고 같은 당류만을 묻는 것이 옳거늘, 어찌 죄수로 하여금 무관은 두고 문관을 고하라 할 것이오.” 하고, 다시 묻지 말기를 명하니, 당인(黨人) 가운데 의구하던 자가 비로소 안심하였었다. 《식암집》국문을 맡은 이는 바로 판의금 원두표였다.

○ 이전에 임금이 동궁에 있을 때에 궁중의 사람 중 자점에게 옛날 은혜를 입은 자가 있어, 자점에게 와서 말하기를, “대궐 안의 사람들이 은밀히 말하기를, ‘대감은 신하로서 동궁을 섬길 뜻이 없다.’ 하니, 상공이 이때에 권세를 떠나면 혹시 만에 하나 구제받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위태함이 금방 닥쳐올 것이오.” 하니, 자점의 집에서 이 말을 듣고 그 맏아들 김연(金鍊) 이외에는 놀라고 두려워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는데, 신묘년 옥사에 이르러 임금이 전교를 내리기를, “자점이 신하로서 나를 섬기지 아니하고자 한 것은 내가 알고 있은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하였으니, 이에 이르러 비로소 궁중 사람의 소문이 헛말이 아닌 것을 알았다. 《공사견문》

○ 자점이 부귀가 융성하여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서 시골 선비로서 글 잘하는 사람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그 아들 김익의 글을 대신 짓게 하여 과거에 뽑히게 하고, 또 그 손자 세룡(世龍)을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이기를 도모하여 점쟁이를 유인하고 협박하여 거짓으로 그의 사주가 좋다고 칭찬하도록 하여 임금을 속여 왕가와 혼인을 맺으니, 그 기세 앞에는 억누르면 꺾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임금이 동궁에 있을 때에도 그에게 거슬림을 당할까 두려워하였으나, 자점은 깨닫지 못하고 마침내 몸은 죽음을 당하고 집안에 종족이 남지 않게 되었다. 《공사견문》

○ 당초에 자점의 손자 세룡이 인조의 딸 효명옹주(孝明翁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옹주는 후궁 조씨(趙氏) 소생이다. 안팎으로 결탁하여 흉한 음모가 무성하여 저주하는 일이 궁중에서 일어나고 역모가 밖에서 싹텄으니, 임금은 일이 자의대비(慈懿大妃)에게 관계되므로 옹주의 어미 조씨만 죽였다. 삼사와 백관들이 세룡의 아내와 그의 동복(同腹)인 왕자 징(徵) 숭선군(崇善君) 과 숙(潚)낙선군(樂善君) 을 함께 처단할 것을 청하니, 진선(進善) 송시열이 아뢰기를, “조(趙)가 이미 죄를 받았고 그 아들은 그 흉모를 꼭 미리 알았는지도 모르는데, 선왕의 혈육을 죽게 함은 불가하다.” 하고, 한 문제(漢文帝)와 회남왕(准南王)의 일을 인용하며, 두 왕자를 보전하여 임금에게 형제를 죽였다고 비난하는 논의가 없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도 차마 벌을 시행하지 못하고 외딴섬에 안치시켰다. 《조야첨재》

○ 왕자 징의 어미 조씨가 김자점과 안팎이 되어 불측한 음모를 하였는데, 자점의 손부(孫婦)는 또 조씨가 낳았다. 낙성위(洛城尉) 세룡(世龍) 흉악한 음모가 더욱 드러났으나 임금의 지친(至親)인 까닭으로써 차마 한결같이 법대로 처단하지 못하였다. 이후원(李厚源)이 비록 옥사의 체모를 들고 굽히지 아니하였으나 임금의 전교가 간절함에 이르니, 이후원도 이에 순응하였다. 성왕(聖王)이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펴는 아름다운 뜻을 이룬 까닭에 조씨의 자녀는 지금까지 안전하다. 〈이완남(李完南) 시장(諡狀)〉. 낙성위(洛城尉) 옹주(翁主)를 처음에는 효명옹주(孝明翁主)로 봉하였다.

○ 송시열이 이후원에게 준 편지에, “세룡의 아내가 흉한 일을 행한 것이 회남(淮南)의 모반한 것과 같으며, 이선(二善) 숭선(崇善)ㆍ낙선(樂善) 과 흉모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봉(鳳)과 계(桂)의 무고함과 다름이 없는데, 주자(朱子)가 회남왕(淮南王)에 대하여서도 오히려 한 문제(漢文帝)가 그를 촉(蜀)으로 귀양 보내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을 비난하였으니, 통진(通津)과 촉이 비록 멀고 가까운 차이는 있으나 귀양가서 나쁜 풍토에 고생되기는 일반이니, 주자의 이론으로써 생각해 보면 세룡의 처도 오히려 귀양 보낼 수 없는데, 하물며 이선(二善)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다. 《우암집》

○ 신묘년에 조 귀인(趙貴人)인조의 후궁 의 옥사가 있었는데, 그때 귀인의 어미가 이미 죽었으나 추형(追刑)할 논의가 있으므로, 정태화가 당시 인조의 전교 인조 주륙흉당(誅戮凶黨)조에 기록되었다. 를 임금에게 아뢰어 일이 정지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대신(臺臣) 오정위(吳挺緯)의 아룀으로 인하여 드디어 육시(戮屍)하였다. 《공사견문》

○ 부원수 유비(柳斐)의 서녀가 김자점의 첩이 되었는데, 자점이 패한 뒤에 항상 말하기를, “자점의 며느리ㆍ손부(孫婦)ㆍ딸들이 의복과 거처를 반드시 효명옹주를 본받았다.” 하였다. 신하의 딸로서 왕녀를 본받고자 하였으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공사견문》

○ 대사헌 - 원문 빠짐 - 가 아뢰기를, “통제사 유정익(柳廷益)의 서매(庶妹)가 자점의 첩이 되어 자점과 가장 친밀하였으니, 통제사의 중한 자리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정익의 이름이 역적의 공초에 나오지 않았는데, 만약 의심스럽다 하여 정익을 체직하면 장차 사람마다 스스로 의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도다. 옛사람이 ‘나의 진심을 남의 뱃속에 넣어 주라.’ 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자점이 오랫동안 정승의 직에 있었으니 한때 문무관 중에 누가 그 집에 출입하지 아니하였으리까. 만약 평소에 서로 잘 아는 것으로써 모두 억지로 죄를 씌우면 아마 조정에 한 사람도 완전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인심을 진정시키는 계책은 전부 대신에게 있으며 나와 경이 벌써 굳게 정한 바가 있으니, 비록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감히 제 뜻대로 할 수 있으리오.” 하였다. 《식암집》

○ 이형장이 정명수를 빙자하여 그와 안팎이 되어 세력을 심히 펼쳤는데, 자점을 처형하면서 형장을 연루자로 처형시켰으니, 마땅히 청국에 알려야 할 것이므로 사신갈 사람을 택하였다. 수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조동립(趙東立)이 아니면 갈 사람이 없습니다.” 하여, 조동립을 보냈는데 연경에 이르자, 명수가 말하기를, “형장의 죽음은 반드시 나 때문일 것이다.” 하니, 동립이 말하기를, “형장의 다른 죄는 고사하고, 그대가 우리나라에 올 때에 조정에서 은화를 형장에게 주어서 그대에게 전하게 한 것이 다 밝은 표시가 있는데, 이번에 처형되고 재산을 몰수하면서 보니 그 은화가 많이 있었다. 그가 그대를 저버림이 이와 같았는데 다른 것이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니, 명수가 잠자코 다시 해독을 부리지 못하였다. 《통문관지》

○ 변사기(邊士紀)가 김자점의 심복으로서 수원 부사가 되자,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이 아뢰기를, “예전에 송 나라 적청(狄靑)이 추밀사로 조정에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일컫는데, 구양수(歐陽脩)가 파면시키기를 청하기를, ‘당 나라 주자(朱泚)는 본래 반역할 뜻이 없었으나 부하의 협박에 의하여 한 것이니, 예로부터 반란하는 자가 반드시 그 본심으로 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몸이 늙어 의혹이 심하여 지나친 염려가 없지 않아서, 아직 드러난 증거가 없는 일로 남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아뢰어 위로 전하의 총명을 모독하고 아래로 대신의 노여움을 촉발하게 되었으나, 어찌 반드시 지나친 염려는 깊은 계책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후일에 불행히 만일의 일이 있을 때에는 노신을 말하지 않았다고 이르지 마옵소서.” 하더니, 이때에 와서 자점의 역모한 일이 발각되자 변사기가 과연 역모에 참여한 것이 드러나니, 사람들이 비로소 홍무적의 선견지명을 탄복하였다. 〈홍무적의 비〉

○ 경기 감사 김광욱(金光煜)이 수원 부사 변사기를 파출시키자, 영의정 이경여가 변사기를 유임시키기를 아뢰어 청하니, 임금이 감사에게 추고하기를 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 또 감사가 변사기를 하고(下考)에 두었는데, 그때 자점이 사기와 연락하여 역모를 한다고 바깥 소문이 떠들썩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수원은 실로 서울 부근의 중요한 번진인데 감사가 변사기를 죄로 파출시킨 것은 그 뜻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대신이 유임시키기를 아뢰어 청하였고, 전하께서 또 추고하기를 명하셨는데, 얼마 안 되어 또 하고에 두어 마치 감사가 임금과 대신에게 서로 겨루듯이 하니, 감사의 사체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따라서 김광욱이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조정을 경멸하는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경기 감사 김광욱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아뢴 내용을 보니 늠연(凜然)하여 옛 대신의 풍도가 있으니, 김광욱은 파직시키고 변사기는 유임시켜서 국사에 마음을 다하게 하라.” 하였는데, 자점의 옥사가 일어나자 사기의 이름이 역적의 초사에 맨 먼저 나왔었다.자점의 아들 김연은 바로 시백의 사위로, 김연과 그 아들 세창(世昌)이 모두 바야흐로 국문을 받는데, 시백은 정승의 지위에 앉아서 대의로 사피하지 못하였더니, 판의금 원두표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역적을 옹호하는 대신이 어찌 감히 국문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내가 여기 있는데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하는고. 판의금은 속히 나가라.” 하였다. 경여와 시백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일어나 나가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벌써 생각하였으니 경들은 나가지 말라.” 하였다. 세창은 처형하였고, 김연도 곤장을 맞다가 죽었는데, 시백이 궐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니 임금의 사관을 보내서 효유하여 들어오게 하였다. 〈연양(延陽) 시장(諡狀)〉

○ 장령 이형(李逈)이 아뢰기를, “시백의 아들 이한(李憪)은 역적과 친하니, 청컨대 중도부처 하옵소서.” 하고, 대사간 이시해(李時楷)는 “시백의 동생 시방(時昉)이 역적에게 아부하였으니 청컨대 귀양 보내옵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오랫동안 윤허하지 아니하고, 좌의정 김육에게 묻기를, “내가 우의정(이시백)에게 간절히 효유하였으나 아직 조정에 나오지 않으니, 진실로 염려스럽도다.” 하니, 좌의정이 대답하기를, “대관이 지금 그 동생과 아들을 논하고 있는데, 우의정이 무슨 마음으로 나와 일을 볼 수 있겠습니까. 시해는 원두표의 지시를 받은 자이니 귀양 보내지 않을 수 없으며, 개성 유수의 자리가 지금 비어 있으니 원두표를 그 자리에 내어보내는 것이 또한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참으로 대신다운 말이로다.” 하고, 명하여 이시해는 중도부처시키고 원두표는 개성 유수로 내보냈더니, 시백은 감히 스스로 편하게 여기지 못하고 휴가를 내었다. 이에 임금이 답하기를, “역적이 가까운 친족 중에서 난 불행한 일은 액운에 부칠 일이지 경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하물며, 경은 선조(先朝)의 구훈(舊勳)이며, 나라의 기둥이니, 청백한 그 지조와 충성된 그 마음은 어찌 나라 사람들만이 알겠는가. 실로 천지신명이 증명할 것이다.” 하니, 시백이 마침내 부르는 명에 좇아서 나와 일을 보았다. 〈연양 시장〉

○ 이시해가 이시방에게 품은 감정을 풀려고 시방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니, 김육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시해는 정치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이니, 내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에 따랐다. 〈김육 묘지〉

○ 갑오년(1654) 6월에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임금이 전교를 내려 의견을 구하니, 부수찬 홍우원(洪宇遠)이 올린 소의 대략에, “어느 시대에 역란의 변고가 없었으리오마는 역적 조가(조 귀인(趙貴人))와 같은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왕의 능토(陵土)가 마르지도 않았는데 선왕이 총애하는 여자를 죽이고 사랑하는 아들을 귀양 보냈으니, 이 어찌 전하의 큰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역적 조가의 죄가 하늘에 통하였으니, 징(澂)ㆍ숙(潚)을 연좌하는 것은 마땅하나, 어린아이로 힘줄과 뼈가 굳지 못하고 혈기가 충실하지 못한데, 하루아침에 외딴섬에 위리안치되었으니 위태로운 약한 목숨이 어찌 죽음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그때를 당하여 전하께서 비록 슬퍼하며 후회하고 한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또한 한 문제가 회남왕이 죽은 뒤에 밥을 먹지 않고 슬피 울었을 뿐더러, 민간에서 풍자한 ‘척포두속(尺布斗粟)’의 노래에 문제가 종신토록 불쾌하였던 까닭입니다. 회남이 몸소 반역을 하였는데도 오히려 문제가 그 죽음을 애통해하였거늘, 하물며 지금 징과 숙은 그 어미의 죄로 연좌된 것이고, 당초에 흉모에 참여하지 않은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선왕께서 징과 숙을 염려한 것이 역시 지극하였으니, 궁실을 만들고 전토와 노비를 주었음은 어찌 길이 그 부귀를 누리어 명대로 한평생을 잘 살기를 바란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구속되고 갇혀서 고생되고 슬퍼하고 근심하며 두려워하여 죽을 날이 멀지 않으니, 하늘에 계시는 선왕의 영혼이 어찌 애통해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선왕의 영혼이 상제의 좌우에 있어 하늘과 일체이니, 지금 상서롭지 못한 재변이 내린 것도 반드시 이 까닭이 아니라고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불행히도 두 아이가 혹시 병에 걸려서 마침내 죽게 되면, 후세에 전하께서 끝내 동생을 죽였다는 허물을 면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돌아가신 부모 섬기기를 산 부모와 같이 하는 효도로써 태묘에 들어가서 선왕께 제사를 드릴 때에 어찌 부끄러운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또 소현(昭顯)의 세 아들 가운데 두 아들은 벌써 죽었고, 그 하나가 남아 있는데 역시 외딴섬에 구금되어 있으니, 만약 다시 요절한다면 소현의 후사가 끊어질 것입니다. 가령 소현이 당초에 아들이 없었더라도 전하께서 그 뒤를 세워서 제사를 받들게 해 주어야 마땅할 것인데, 어찌 차마 그 있는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무심히 보고 그 살길을 열어주지 않습니까.지난번에 전하께서 용서할 뜻이 있었는데 대신들이 뜻밖의 염려가 없지 않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습니다. 아아, 전하의 이 마음은 참으로 천지의 호생하는 덕이며, 성인의 측은한 어진 마음입니다. 대신된 자가 이미 그 아름다운 뜻을 순응하지 못하고 도리어 막아서 방해하니, 그들은 어질지 못하고 또 충성되지 못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선왕의 뜻을 계승하시어 은혜로운 명을 내리셔서 두 동생과 한 조카를 급히 소환하여, 그 속적을 돌려주고 그 관작을 회복시켜 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는 남이 말하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으니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진실로 가상하다.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노라.” 하니, 안팎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이행진(李行進)이 소를 올려 헐뜯기를, “우원은 다만 역적 조가를 번안하기 위하여 선왕을 훼손하고 임금을 속여서 스스로 곧은 이름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또 어전에서 아뢰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우원을 사랑하여도 그 악한 것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는 행진이 임금이 본래 우원을 어질게 여김을 알고 이때를 틈타서 중상하려는 것이었다. 이어서 대사헌 이시해가 일어나서 우원을 탄핵하여 멀리 귀양 보내기를 청하였고, 간원에서도 찬동하는 이가 있어서 삼사의 논의가 같지 않았는데, 공의(公議)를 잡고 이론(異論)을 세운 이(홍우원 옹호파)로서, 이상진(李尙眞)ㆍ이정영(李正英)ㆍ남중회(南重晦)ㆍ이만영(李晩榮)ㆍ정석(鄭晳) 등의 일곱 사람은, 외직으로 나가기도 하고 파직되기도 하였다. 임금이 경연에서 여러 번 불쾌한 전교를 내리니 사람들이 모두 우원을 위태롭게 여기고, 우원은 문 밖에서 명을 기다렸는데, 가을이 되자 대신 이시백이 아뢰어서 임금이 다만 우원의 체직을 명하였더니, 겨울에 이르러 사헌부의 탄핵이 비로소 그쳤고, 얼마 있지 않아서 두 왕자와 소현(昭顯)의 아들을 석방하기를 명하고 다 그 관작을 회복하였으니, 이는 우원의 말을 쓴 것이다.

○ 숙종 을묘년에 신면의 아들 종화(宗華)가 참봉에 제수되었는데 소를 올려 자기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려고 하니, 임금이 소를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다. 윤5월에 한재로 인하여 죄인들 중 억울함이 있는가를 살펴서 처리할 때 종화가 또 소를 올렸는데, 대략에, “신의 아비 면(冕)은 고 판서 김익희(金益熙)와 이성 삼종(異姓三從)의 친척으로서 나이가 서로 같고 교분도 두터웠었는데, 불행히 을유년 사이에 익희가 친구를 고자질하여 아뢰어 마음 쓰는 것이 지극히 험함을 보고 면대해서 말하고 편지로 책망하였더니, 그는 친구간에 한때 책선하는 말을 가지고 드디어 종신토록 한을 품었습니다. 그때 재상들도 모두 익희의 그름을 배척하여, 익희가 외직으로 돌아다니게 되니 부끄럼과 분함이 더욱 쌓여서 기회를 타서 참소를 꾸며, 끝내는 산인(山人)을 협박하고 유인하여 공격하는 바탕을 삼았으니, 이것이 실로 기축년에 사헌부의 탄핵이 일어난 이유입니다. 신의 아비가 죄를 입었다가 곧 풀렸고, 신묘년 겨울에 마침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고 상신(相臣) 원두표가 새로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자 신의 아비가 말하기를, ‘두표는 일찍이 병자년 남한산성이 포위당하였던 날에, 군사들을 시켜 소란을 일으켜서 협박한 죄가 있고, 또 갑신년 역적을 다스린 뒤에 거짓 전령을 만들어서 연성군(延城君) 이시방의 형제를 죽이려고 하였으니, 비록 재능과 지력이 일세를 제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조정에서 점잖게 일하는 데는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고 아뢰어 체직하기를 청하였더니, 한 달이 못 되어 역옥(逆獄)이 갑자기 일어났는데, 두표가 판의금이 되어 중상하고 협박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였습니다. 세룡이 신의 아비를 연루로 끌어들일 때의 입증은 곧 안철(安澈)이었는데, 그때에 금부에서 수색한 정안(政案)과 조보(朝報)를 얻어 보고 세룡의 말한 바를 상고하니, 신의 아비와 안철이 서로 만났다는 때가 바로 안철이 병사(兵使)에서 갈리지 아니하고 아직 안주(安州)에 있을 때였습니다.그 말이 헛되므로 상신(相臣) 이경여ㆍ정태화ㆍ김육 등 여러 사람이 모두 억울하다고 주장하여 전하께 면대를 청하기까지 하여, 처음에는 정형(停刑)을 허락했었는데, 역적 익(釴)이 자복한 뒤에 이르러 두표가 말하기를, ‘네가 지금 끌어댄 것이 모두 무사(武士)이니, 이 밖에 어찌 문관 명사(文官名士)를 끌어댈 이가 없겠느냐?’ 하니, 익이 바로 신의 아비를 끌어서 대답하였으며 그 인증은 전부 역적 형장(馨長)에게로 돌렸었는데, 이듬해 봄에 형장이 환국하여 엄하게 국문하던 날, 효종께서 특별히 명하여 신의 아비가 그 일에 참여하여 아는가를 캐어물으니 형장이 두세 번 부르짖으며 ‘내 이미 역모를 한 것으로 형을 당할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것이 있으리오마는, 신면에 대해서는 심히 억울하고 억울합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원두표의 아들 만춘(萬春)이 그때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소를 올려 절절(節節)이 신변(伸卞)하였다. 〈술이(述而)〉

○ 판의금 민희(閔熙)가 임금의 물음에 답하여 아뢰기를, “추안(推案)에 기재된 바를 취하여 상고하니, 세룡의 공초에 말하기를, ‘신면이 변사기ㆍ안철과 함께 한때에 그 아비(자점)의 집에 이르니, 그 아비가 나라를 원망하며 역모할 뜻을 세 사람에게 말하였습니다.’ 하였고, 익의 공초에는, ‘역모할 일은 상의하지 않았고 신면이 나에게 권하여 이형장으로 하여금 청국과 통하여 군사를 청하였다가 의주(義州)에 머물게 하고 산인(山人)을 잡아가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했습니다. 신면의 죽음은 대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그 뒤에 형장이 청국으로부터 돌아오니 중도에서 잡아다가 문목(問目) 외에 별도로 비밀히 묻기를, ‘기축년 청국 칙사가 올 때에 네가 서도(西道)에 있었는데 그때 김익과 신면이 너에게 통지한 일이 없었느냐.’ 하자, 형장의 대답이, ‘신면은 본래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데 무슨 통지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신면은 죄를 범한 일이 없으나, 오직 자점의 집에서 수색해 온 문서 가운데, ‘신면이 대사간이 되니 마땅히 나를 탄핵하는 의논을 정지시키겠지.’ 하는 말이 있어, 마침 송준길(宋浚吉)이 신면을 낙당(洛黨)이라고 공격하는 말과 부합되었으며, 또 신면의 위인이 기세를 부리고 권세를 좋아해서 동류에게 미움을 받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나, 그 아들(종회)이 아비를 위해서 호소하는 것을 인정의 도리로 막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술이〉

○ 을묘년 7월에 큰 한재(旱災)로 인하여 억울한 죄인들을 살펴서 풀어준 때에 우의정 허목(許穆)의 아룀에 전교하기를, “이 한재를 걱정하여 죄수를 살펴서 풀어주는 날을 당하여 보통 죄인은 모두 은혜로운 사면을 받았는데 세룡(世龍)의 처만은 오랫동안 구금되어 있으니, 제가 비록 반역을 범하였으나 효종께서 처음에 이미 죽이지 않기로 하였고, 선왕(현종)께서도 석방시키고자 하였으나 단행하지 못하였었는데, 지금은 또 병들어 망가진 사람이 되었으니 특별히 석방시키라.” 하였다. 〈술이〉

○ 이해 10월에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신은 신묘년의 역옥을 다스릴 때에 판의금으로 있었으므로 당시 옥사의 정상을 잘 압니다. 신면과 안철이 공모하였다는 말은 처음에 세룡의 초사에서 나왔는데 초사 중의 날짜와 서로 어긋나므로 대신이 아뢰어 다시 익에게 물으니, 익의 초사 가운데, ‘신면과 같이 의논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그가 역모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며, 그 뒤에 형장의 초사에 신면의 죄없는 실상을 간곡히 말하여 효종께서도 그 억울함을 알았으니, 어찌 선조(先朝)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하여 억울함을 씻어 주지 않을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약 역모를 범하지 않았으면 그 관작을 회복시키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술이〉

[주-D001] 산인(山人) : 김집(金集)ㆍ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 등 연산(連山)과 회덕(懷德)의 산림학자(山林學者)들을 말한다.

[주-D002] 죄는 …… 찼는데 : 옛말에 ‘죄악관영(罪惡貫盈)’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죄악이 찰 대로 가득 차서 마치 돈이 꿰미의 마지막까지 가득 찬 것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3] 봉(鳳)과 계(桂) : 명종(明宗) 때에 무고한데 원통히 죽은 왕자 봉성군(鳳城君)과 계림군(桂林君)을 말한 것이다.

[주-D004] 호생(好生)하는 덕(德) : 경전(經傳)에 “천지의 덕은 만물을 낳고 기르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주-D005] 속적(屬籍) : 속적(屬籍)은 왕실의 족보(族譜)에 든다는 말인데, 죄가 있으면 속적에서 삭제한다.

[주-D006] 책선(責善) : 친구간에 서로 선(善)하기를 충고하고 책망한다는 뜻이다.

저는 족보상으로는 28세이고 제게 21대조부님은 현 할아버지입니다. 현할아버지는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의 측근으로 공민왕이 1371년 7월 정치적으로 너무 커진 신돈을 제거하면서 다섯째 아들 중수 할아버지와 함께 바로 죽었습니다. 현할아버지의 큰아들 제게는 20대조부님이신 중평 할아버지는 얼마후에 연좌되어 죽고 한달 후인 8월 나머지 아들들도 죽임을 당합니다. 현할아버지와 아들 5명, 6부자가 한달사이에 다 죽은 신해년에 일어나 신해참화입니다. 죽음은 피했지만 살아남은 현할아버지의 손자들 9명중에 장손자 면할아버지는 셋째 딸을 이성계의 둘째아들 이방과와 인연을 맺으며 이성계의 집안과 가깝게 지내고 마침내 이성계가 조선의 왕이 되자 공조전서가 되십니다. 공조전서는 정3품의 벼슬로 공조의 장관이기는 해도 왕과 함께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2품이상의 대신직위가 아니기 때문에 어전회의에서 왕과 대신이 결정한 정책을 집행하는 집행관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각부에 소속된 외청장 즉 조달청장 병무청장 처럼 국무위원인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결정한 정책을 집행하는 기능만 있던 때에 공조의 장관이셨습니다. 태종 때에 각부의 장관을 정2품 판서로 품계를 올리면서 국가정책을 결정하는데 참여하고 집행하는 권한이 생겼지만 당시엔 그렇게 힘있던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족보에는 가선대부 공조전서 라고 하는 것을 보아 종2품으로 정3품의 전서벼슬을 하신 듯합니다. 그래도 대신이지만 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한 추증 기록은 없습니다. 현할아버지와 중평할아버지는 사면 복권이 되지 않아서 그렇겠지요. 다섯째 중수할아버지의 셋째아들 질 할아버지는 태종 때에 호조참판을 지냅니다. 종2품인데도 역시나 아버지 중수할아버지 할아버지 현할아버지에 대한 추증의 기록은 없습니다. 여기에서 침최된 우리 기씨를 다시 중흥시키신 분이 9세 면할아버지의 아들 건 할아버지입니다. 각종기록에는 벼슬이 없는 관복을 입지않은 베옷 즉 포의布衣 입은 선비에서 능력이 뛰어난 소문을 듣고 세종이 발탁拔擢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성계집안과 연이 되었던 셋째 누나 기자재의 남편 이방과가 조선 두번째 왕 정종이 되면서 내명부 종2품 숙의가 되고 그 동생인 건 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준 것입니다. 건 할아버지는 종1품 판중추원사까지 오르고 시호가 정무이며 청백리로 선정이 되십니다. 조선시대에 후손이 잘되면 조상은 추증을 받고 조상이 잘되면 후손은 음직을 받습니다. 추증은 2품이상의 공직에 오르신 분의 아버지는 같은 품계, 할아버지는 한등급아래 증조부는 두등급아래 벼슬로 추증합니다. 면할아버지는 종2품 가선대부로 벼슬을 하셨고 정2품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추증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중평할아버지와 현할아버지는 추증이 없습니다 . 사면 과 복권이 않되어 있으니까요. 현할아버지는 영도첨의 정승을 지냈다니 추증이 필요없었겠지만요. 이때부터 정무공의 후손은 중앙정치계의 유력가문이 됩니다. 예를 들어 정무공의 아들이신 11세 축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음덕으로 과거없이 종4품 조봉대부를 지내셨고요. 장인이신 정충경의 아버지는 정역인데 태종과 과거동기이고 왕자의 난에 태종을 도와 왕실과 인연을 이어가 정충경의 누이는 효령대군의 부인이되고 정충경의 다른 딸은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永應大君)의 부인이되고 (그러니까 축할아버지의 동서) 며느리는 문종의 딸이며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敬惠公主)입니다(그러니까 축할아버지의 처남택은 공주) 등등등 후손들 혼맥은 왕가와 이리저리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청백리의 후손이라 적손들은 16세손 헌獻자 돌림까지는 자력으로 문과나 무과 급제하여 고위직에 오른 찬, 형, 준, 대항, 대승, 령, 효근, 자헌 등등을 제외 하면 현령이나 군수 혹은 최소한 명예직인 진용교위 부사과 벼슬은 받아서 최소한의 양반신분은 유지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족보에 헌獻자 돌림까지 문무과 급제 기록도 없고 음직도 기록이 없다면 서손이라는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정무공이시니 불천위(다른 말로 부조명)인 것은 당연했겠지요. 족보에 정무공에 대하여 부조명 이란 기록은 없고 다른 분으로는 고봉 기대승과 계백군 기효근이 부조명이라고 기록되있습니다. 그런데 정무공이 불천위라는 것은 기은 의헌 할아버지의 행장에서 알수가 있습니다. 의헌할아버지의 아들 침할아버지가 지으신 행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무자(戊子:1648)년에 서울에 사는 대종(大宗)에서 정무공 제사를 폐하지 않는 사판(不祧祀板)을 함부로 묻어버렸다. 어버지께서는 종손(宗孫) 진흥(震興)과 삼종제(三從弟) 전정언(前正言) 만헌(晩獻)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속히 다시 만들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정언(晩獻)은 병으로 죽고, 진흥(震興)은 죄로 죽었다. 끝내 일을 이루지 못하여 종사(宗祀)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아버님은 항상 이를 통한(痛恨)으로 여겼다. 戊子年間(무자년간), 京居大宗擅埋貞武公不祧祀板(경거대종천매정무공부조사판), 府君貽書宗孫震興及三從弟前正言晩獻(부군이서종손진흥급삼종제전정언만헌), 令速改造(령속개조), 未幾正言病卒(미기정언병졸), 震興罪死(진흥죄사), 竟不就而宗祀遂絶(경부취이종사수절), 府君尋常痛恨焉(부군심상통한언).

조선조 경국대전에서는 3품관 이상은 고조부까지 4대 봉사 6품관 이상은 증조부까지 3대 봉사 7품관 이하 선비들은 조부모까지 2대 봉사를 하고 기타 서민들은 부모만 제사지내라고 했다 합니다, 그런데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제도가 붕괴되면서 모두가 고조부모까지 4대 봉사를 하게 되었다 하고요. 4대봉사라면 현손까지는 기제사를 지내고 그다음 대에서는 위패(位牌)를 땅에 묻고 시제를 지냅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현손까지 가려면 100년정도가 흐른 시간이고 장손 집안에서는 현손이 죽어서 위패를 묘소에 묻는 제례상의 절차인 매안(埋安)을 해야 할때 작은 작은 집에서는 아직 살아있는 증손이나 현손 등의 후손이 있다면 이분들에게는 아직 매안해야하는 대상이 아닌 증조부이거나 고조부 이시기 때문에 위패를 그 후손의 집으로 옮겨 계속 기제사를 지내야하고 마지막 현손이 죽으면 매안하고 시제로 넘긴다는 것입니다. 정무공의 현손은 대大자 항렬로 정상적인 기제사라면 대복 할아버지에서 시작하여 대승할아버지에서 마치고 매안해야 했을 겁니다. 이것에 대하여 고봉선생이 퇴계선생에게 문의한 내용이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517페이지에 체천(제사를 옭기는 일)의 예에 대하여 라는 글로 확인할수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현손뿐만이 아니라 현손의 부인이 살아있다면 제사를 옮기는 문제까지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무공의 위패는 대복 할아버지의 현손 기진흥대에서 더이상 부조묘를 안하겠다고 매안해 버리자 기은 할아버지가 그 당시의 서울 대종가 형 할아버지 후손집 기진흥 그리고 16세손으로 살아있는 마지막 분으로 만헌 할아버지에게 부조묘를 회복하려 했는데 모두 죽으면서 대종가의 정무공 종사가 끈어졌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기진흥이 역모혐의로 죽으면서 도승지공문중 후손은 더이상 과거볼 자격이 영구박탈되어 양반신분을 유지할수가 없게 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진흥에 대한 글에서 혼맥을 살펴보았는데요. 그러한 고관을 지낸 분들이 서울에서 갑자기 평민이 되어 살수는 없었겠지요. 그래서 농사짖고 살자고 김포로 춘천으로 이주를 한듯합니다. 그러면서 대종가로 관리하던 원당의 선산도 처분하게 되겠지요. 여기서 생각해야하는 것이 당시는 신분제가 엄연한 조선 중기입니다. 아직 양자제도도 잘 정립되지않은 때입니다. 그 무렵에 고봉선생의 증손자대에서 적자가 없자 의헌할아버지가 병약하여 돌봐준 큰형의 막내 아들 원할아버지가 고봉할아버지 증손자로 양자가면서 양자제도가 시작이 됩니다. 그 이전엔 양자가 않보입니다. 호철의 집안에 전해오는 편지들에 정무공의 사손이 되는 내용이 있다 하는데 그 편지도 못보았지만 보았다고 해도 제가 해독을 할수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추측이 가능한 것이 정무공은 도승지공문중만의 현조가 아니라 참판공이나 별좌공 덕성군 복제공 후손 모두의 현조이십니다. 제사가 끈긴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서울사는 정무공의 후손들은 이괄의 난과 김자점의 숙청의 영향으로 더이상 양반의 신분을 유지할수가 없었으며 있다해도 위에서 본 것처럼 위패를 묻어버리고 단절했습니다. 남은 집안이 낙향한 그래서 중앙정계의 큰 정치사건에 휘말리지 않아 집안을 보전하고있던 참판공과 덕성군후손입니다. 호철의 집 긍강공문중은 참판공 원할아버지 아들 3형제중에 둘째아들의 종가입니다. 참판공문중에서도 대종가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사손 즉 제사를 받드는 종가가된 것은 참판공의 큰집이나 작은 집도 제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진흥의 위패 매안과 같은 상황으로 보면 됩니다. 그래서 금강공문중이 대표되어 참판공과 덕성군문중이 격년제로 제수비용을 대면서 제사를 이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대종중을 창립하고 총무이사를 지내신 기성도 아저씨의 할아버지 되시는 기양연 할아버지가 재산이 있으셨던 듯 흥선대원군과 가깝게 지냈고 그러면서 옥구 군수도 지냈고 도선산 다시 사들이는 비용도 대고 실무는 기윤진 할아버지가 실제로 일을 보면서 팔려 나갔던 도선산과 위전답을 사들입니다. 그러면서 각종 원당토지매매문서들을 확보하게 됩니다.

금강공문중의 집에 전해 내려오는 고문서들중에서 추려진 문서정보는 아래에 있습니다.

http://203.254.129.108/service/main/mainfamily.jsp

당연히 원당 선영의 매매 문서들도 보입니다.

창진관련자료

http://203.254.129.108/service/data/dataDetail.jsp?data_group=12787

거기에 보면 매매문서중에 일부이지만 창운이 원당 논을 몇십냥에 판 문서가 보입니다. 몇십냥이 그렇게 큰 돈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창운의 아버지는 주택柱宅이라 나옵니다(2004년판 86페이지) 그런데 양자입니다. 생부는 기록이 없습니다. 추측컨에 이분은 별좌공문중에서 양자온 듯합니다. 주柱자는 도승지공문중에서 사용하는 항렬자는 아닙니다. 별좌공문중에서 양자 온 서규할아버지(94페이지)는 열할아버지(140페이지)의 둘째 아들에서 양자왔고 그아래 항렬들에서는 주柱자 항렬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택은 없습니다. 이 것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 후손은 아시겠지요.

만전정승이 월사 이정구에게서 받아논 글을 바탕으로 정무공의 신도비를 세우면서 금강공문중의 기윤진 할아버지 6촌 노사 기정진 선생이 말미에 적은 내용이 압축된 도선산의 회복에 대한 감회입니다. 신도비 세우면서 회복 기념식을 한셈입니다. 양연 할아버지의 손자 성도아저씨가 그렇게 평생 종중을 위해 일한 것은 그러한 할아버지를 보고 들은 때문이겠지요.

지금 정무공의 제사는 불천위 제사가 아니라 시제입니다. 모두다 정무공 후손으로 신분제도 붕괴된 지금엔 시제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이 정무공의 정통을 따지는 것보다 중요하다 봅니다.

이번엔 원당의 정무공후손의 도선산이 아니라 기씨 전체의 도선산을 알아보겠습니다. 전서공 기면 할아버지가 원당 도선산에 묻히실 것인데 남원윤씨 집으로 시집간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의 누이이신 대고모가 묘자리에 물을 날라다 부어놓아 물나오는 묘자리로 만들어 가로채고는 아직도 남원뮨씨의 묘로 쓰고 있고 전서공은 다른 곳에 묻히셨지요. 그 다른 곳에 대하여 족보는 추가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다시 불러오겠습니다. [이상의 묘소는 모두 모른다. 혹은 포천抱川 서면西面 천보산天寶山 회암檜岩 아래 신기촌新基村 큰 길가위에 경좌庚坐(2시30분방향)로 7~8개의 묘와 비가 연이어 있는데 사람들이 기정승댁奇政丞宅 산소라 하고 그 아래의 논과 밭이 모두 이 묘들을 위한 위전位田이라 한다. 그래서 계묘년癸卯年(1663) 개량改量할 때에 기가의 종(아마도 묘지기)으로 이름을 올려 기록했다. 그런데 근래에 거주민들이 묘비를 뽑아 버렸다 한다. 이상의 내용은 갑오보甲午譜 (1714년판) 기록을 그대로 옮긴다. 그 후에 해서문중海西門中 사람들이 묘지석墓誌石을 찾기 위해 묘를 파고 찾았으나 얻지 못하였다. 以上墓所失傳未詳或言抱川西面天寶山檜岩下新基村上大路邊庚坐長穴連有七八墳碑碣俱存人稱奇政丞宅山所其下洞口內田畓皆位田故癸卯改量時量任以奇僕作名懸主而近來居民拔去碑碣云右甲午譜所錄如是故依錄焉其後海西宗人開墳以求誌石而不能得] 지금으로는 이 천보산으로 동쪽은 포천이고 서쪽은 양주입니다만 당시의 포천에 있는 천보산의 서쪽면에 회암사란 절이 있는데 그아래 신기촌 길가위에 우리 조상님들의 묘소가 있다는 기록입니다. 별좌공 기괄 할아버지도 묘가 포천에 있다하고 그 아드님이신 기대관 할아버지도 포천의 아버지 묘와 같은 곳에 있다고 했고 이괄의 난 때 곤장 맞으면서도 이괄의 부하인 4촌 기익헌과 내통사실을 부인하다 곤장맞다 죽은 기윤헌 할아버지나 그아들 기수발은 회암사 길 건너 태봉산台峰山에 묘가 있었다는 기록과 결정적으로 만전상공 기자헌 할아버지 묘가 옛 기록에는 포천에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에서 포천 기자헌 등으로 검색하면 포천군의 구천군지에 해당하는 견성지를 인용하여 석문령 일대가 우리 집안의 선산으로 나옵니다.

http://pocheon.grandculture.net/pocheon/toc/GC05000974

또한 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실린 만전상공 묘소기록도 있습니다.

[성해응(成海應)의 硏經齋全集卷之十四

奇相國遺墟記

抱川香積山之陰。有奇相國遺墟。公名自獻字士靖。德陽人。宣廟朝柄用大臣。至光海時。凶徒讎視君母。彜倫斁壞。光海入其議。公諫不聽。遂招文武諸臣雜議。欲以衆議動之。卒未有明言不可者。公遂出國門。竟竄吉州府。然光海終畏難之。閉西宮。莫敢顯言廢之者。公之力也。已而見釋。公遂遊東海上。不立昏亂之朝。及仁廟御極。朝著一新。公反中流言。及适兵薄都。公死獄中。余甞歎當時大臣苟能一操公爰辭决之。公其不死矣。公旣不事昏朝。棲遑不返。則已心絶之矣。當其自絶于天也。寧復嚮之。公之不歸心於光海者明甚。方賊适之稱亂也。不但逆順之辨易見。狂悖如此。其敗可立而待。而謂公之智而遙相和應哉。此不待明者而知之。且公之庶從弟益獻雖從适。公旣不顧一身之禍。而樹大義於昏朝者如此。豈爲益獻而撓其節哉。時雖當危疑之際。何其不辨而徑殺之也。子孫宗族皆被夷㓕。其先世墳墓在石門山下。爲土人所攘奪。余甞登其墟而望之。其東白沙李文忠衣冠之葬也。又其東忠簡金公之所居也。二公皆抗議於昏朝。與公同時被竄。至今爲朝野之所誦慕。公則不然。公在昏朝時。雖有招權之誚。豈以是掩其大節哉。余甞怪事之當然而不然。謂之有幸有不幸。未知主張是者誰歟。謂之天歟。天之祐善。豈有彼此。而顧二公之義如彼其顯。謂之人歟。人之公議。久則能必伸。而公之節。久而益晦。幸不幸固不足道。而恐其大節之遂不傳也。爲鄕人道之如此云。

번역을 보면

포천 향적산의 그늘진 곳에(抱川香積山之陰。) 기상국의 유허가 있다(有奇相國遺墟。) 공의 이름은 자헌이고 자는 사정이다(公名自獻字士靖。) 덕양사람이다(德陽人。) 선조임금 때에 대신을 지냈다(宣廟朝柄用大臣。) 광해군 때에 이르러(至光海時。) 흉도들이 임금의 어머니를 원수로 여겼다(凶徒讎視君母。) 이는 인륜이 무너지는 일이다(彜倫斁壞。) 광해임금이 그 의논을 받아들이자(光海入其議。) 공이 듣지 말라고 만류했다(公諫不聽。) 문무의 모든 신하들을 불러들여 여러 가지로 의논하게 하여(遂招文武諸臣雜議。) 많은 사람의 뜻으로 밀어붙이려했다(欲以衆議動之。) 모인 사람들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숨기지 않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했다(卒未有明言不可者。) 공이 마침내 나라 문밖으로 쫓겨나(公遂出國門。) 길주부 끝에 숨었다(竟竄吉州府。) 그리하여 광해임금은 마침내 외난을 일으켜(然光海終畏難之。) 서궁을 닫았다(閉西宮。) 감히 현언을 그만두는 자가 없는 것은(莫敢顯言廢之者。) 공의 노력이다(公之力也。) 이윽고 오해가 풀어짐을 보게된다(已而見釋。) 공이 동해상에 이르러 유람할 때(公遂遊東海上。) 혼란의 조정을 세우지 못하고(不立昏亂之朝。) 인조가 왕이 되자(及仁廟御極。) 조정은 새롭게 나타나니(朝著一新。) 공은 터무니없는 말에 치우치지 않았다(公反中流言。) 이괄이 도성에 다가오자(及适兵薄都。) 공은 옥중에서 죽었다(公死獄中。) 남은 사람들이 탄식하고 당시 대신이 도와주는 말로 일조를 했더라면(余甞歎當時大臣苟能一操公爰辭决之。) 공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公其不死矣。) 공은 이미 혼조를 따르지 않으니(公旣不事昏朝。) 반대편에서 살지 않았을 것이다(棲遑不返。) 즉 이미 마음이 단절된 것이다(則已心絶之矣。) 당연히 그 스스로 하늘의 이치를 끈은 것이다(當其自絶于天也。) 또다시 이를 향할 것인가(寧復嚮之。) 공의 돌아오지 않는 마음을 광해의 추종자들은 명심하다(公之不歸心於光海者明甚。) 사방의 적들이 괄의 난이라 한다(方賊适之稱亂也。) 부단히 역순의 분별을 쉽게 본다(不但逆順之辨易見。) 미치광이처럼 어지러짐이다(狂悖如此。) 그 세우고 기다림의 무너짐이다(其敗可立而待。) 공의 지혜이고 아득히 멀리 서로 재앙을 받아들인다 함은(而謂公之智而遙相和應哉。) 이를 기다리지 않는 밝고 아는 것이다(此不待明者而知之。) 이는 공의 서4촌동생 익헌이 비록 이괄을 따랐고(且公之庶從弟益獻雖從适。) 공은 이미 한몸의 재난도 원하지 않았지만(公旣不顧一身之禍。) 재앙(樹)의 큰 뜻은 혼조(광해)를 따르는 자들과 같이 보았다(而樹大義於昏朝者如此。) 어찌 익헌이 그 재앙(哉)의 마디를 구부릴 수 있었겠는가?(豈爲益獻而撓其節哉。) 때에 비록 의심을 사는 것은 당연하지만(時雖當危疑之際。) 어찌 그것이 변명도 못하고 죽어야 했나?(何其不辨而徑殺之也。) 자손과 종족 모두 피살되어 없어졌다(子孫宗族皆被夷㓕。) 그 선세의 분묘는 석문산 아래에 있는데(其先世墳墓在石門山下。) 토인들이 빼앗아 파헤쳤다(爲土人所攘奪。) 나는 그 옛터에 올라 바라보며 감상하니(余甞登其墟而望之。) 그 동쪽으로 백사 이문충공이 의관을 갖추고 장례지내진 곳이요(其東白沙李文忠衣冠之葬也。) 또한 그 동쪽으로 충간김공이 사는 곳이다(又其東忠簡金公之所居也。) 두분이 모두 혼조(광해)에게 항의 한분들이니(二公皆抗議於昏朝。) 공과 함께 동시에 피해 숨어있다(與公同時被竄。) 지금에 이르러 조야가 그리움을 암송하니(至今爲朝野之所誦慕。) 공은 즉 당연한 것 아닌가?(公則不然。) 공이 혼조와 있을 때에(公在昏朝時。) 비록 대소를 분별하여 책망하였지만(雖有招權之誚。) 어찌 이것으로써 그 큰 재앙을 막을 수 있겠는가?(豈以是掩其大節哉。) 나는 괴이한 사건의 당연과 부당연함을 생각한다(余甞怪事之當然而不然。) 행과 불행이 있다지만(謂之有幸有不幸。) 잘 알지 못하는 이 것을 누구에게 묻겠는가?(未知主張是者誰歟。) 하늘의 이치가 있다지만(謂之天歟。) 하늘이 돕는 정당함을(天之祐善。) 어찌 이렇다 저렇다하랴?(豈有彼此。) 그러나 돌아보면 두분의 정의는 그 사람의 표현되어 나타남과 같다(而顧二公之義如彼其顯。) 사람들이 말하길(謂之人歟。) 사람들이 공의 뜻을(人之公議。) 오래도록 즉 반드시 펼쳐 놓을 것이다(久則能必伸。) 그리고 공의 절의는 (而公之節。) 오래도록 그믐을 더할 것이다(久而益晦。) 행과 불행은 이치가 부족라게 단단하다(幸不幸固不足道。) 그러나 공포스런 그 재앙의 끝은 전하지 않는다(而恐其大節之遂不傳也。) 시골사람의 이치는 이것과 같다한다(爲鄕人道之如此云。)

포천군(抱川郡) 소흘면(蘇屹面) 고모리(古毛里) 향적산(香積山) 변동(邊洞)

위의 기록처럼 돌보는 후손이 없어 그 지방사람들이 묘비를 뽑아버리고 배앗겨 잊혀진 행주기씨의 도선산이 안타깝습니다.

족보의 지장록에는 초대 충무이사이셨던 기성도 아저씨의 형님이신 기형도 아저씨가 만전상공의 묘를 안성에서 찾은 경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晩全相公墓所에 關한 通告文

夫慕先은 子孫之孝思요, 敦睦은 宗族之彛倫인바 冠儒冠하고 衣儒衣하시니, 이는 想皆有此倫情이올시다. 大抵 吾顯祖晩全相公의 盡忠西宮하사 炳若日月하신 勳職與世德은 京鄕間 雖異姓에 在하시니, 儒林으로도 尊慕할 事이거든 況吾宗族으로는 本孫與傍孫이 永世追慕之地에 子孫이 微弱하야 散在各處하므로 因하야 墓所失傳하와 未尊者至今數百年이온則 爲其靈仍者丨晝宵慨歎이옵더니, 何幸京畿安城郡孔道面文基里에 居한 尹英模氏가 相公의 墓所를 發現하야 通知于長成奇門中 奇宇增 故로 奇衡度가 聞하고 發奮하야 遂前往安成하야 訪尹氏問之하고 共至墓所하와 看審하온즉 墓前에 體石面刻字는 雖剝落이나 後面字畫이 完著하고 望柱石人與床石은 皆自在 故로 遂製祭文하며 具祭需하야 獻亨而來이오니 墓所은 雖廘門山而顯世이니 基禁養地八反九畝는 今爲吳鶴泳의 占有則若欲還退이면 現時價 每坪當 拾錢式 假量이라 하오나 此도 難戡이롭고 無多殘裔가 事巨力錦하와 辨備키 不能한 故로 如斯한 事實을 敬告하오니 伏惟我 各門及 僉宗英各位게서 特加感想아서 一以敦擁睦之誼하시고 一以篤慕先之秉彛하시와 本孫與傍孫임을 勿拘하고 或以各門之誠으로나 或以一人之特誠으로 하야 金錢을 醵集하와 以返墓有地하오며 且奉香火케하와 永久守護할 道理를 竣了케 하심을 千萬伏祝

右敬告于

各門中門長

僉宗英 各位

丙子三月 日

都有司 奇奭鎭 奇琮燮

副有司 奇東衍 奇東謙

掌財 奇衡度 奇世震

別有司 奇宇貞 奇永度

贊成長 奇儀鎭 奇普衍 奇昌燮 奇宇增 奇成度 奇宇洪 奇世伯 奇世哲 奇堯錫 奇老善

이 묘가 포천과 양주의 경계인 천보산줄기 향적산 석문이 고개근처에서 언제 이곳으로 이장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누가 왜 했는지가 전혀 알려진 것이 없어 궁금한 것이지요. 그러나 미 묘소는 발견 당시인 1936년엔 사들이지 못하고 31년이 지난 1967년에야 대종중에서 사들입니다. 행주기씨대관엔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성만전공산지매수(安城晩全公山地買收)

만전상공(晩全相公)은 선조 광해 양조의 영의정으로 원로대신이다. 1623년 능양군과 서인일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으로 세우고 집권하였다. 1624년 불평파 이괄의 반란으로 서인일파는 공주로 피난 가면서 반대파를 모조리 학살할 때에 공은 서소문 자저에서 자결하였다. 공의 묘소는 안성군 대덕면 내리 왕상골 산47번지에 예장을 하였는데 서인이 300년간 집권한 탓인지 그 자손들은 오랜 기간 초야에 묻혀있었고 따라서 남이 모시지 못한 조상의 산소까지 방치하여 고총을 만들었었다. 만전상공은 우리기성을 빛낸 선세인데 분묘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1936년 3월에 기규재(奇圭齋), 기형도(奇衡度)께서 묘소를 찾은 후 술한잔씩을 올려오다가 1967년 7월 7일에 산지2670평을 매수하여 대종중명의로 이전 등기하고 여러 차례 미송을 식부했다. 제수비용은 원당 도선산에서 윤씨 제각 터세 쌀 한 가마니씩을 받아서 매년 11월 12일에 시향을 받들게 하였다. 공의 묘비, 상주, 인관석 등은 하세후 60년 후에야 세워졌다. 그리고 묘막으로 스레트 지붕 토막 4간과 제(祭)기 일시벌을 준비하였다. 개간지 약500평.]

전 기성도 총무이사는 1936년에 만전상공 묘소 발견과 관련된 찬성장 임무를 하면서 기씨를 대표한 할아버지 기양연 할아버지가 환매 완료한 정무공 이하 여러 묘소와 시제를 관리할 구심점인 대종중의 설립 필요성을 느끼신 듯 합니다. 그래서 1942년에 대종중을 창립합니다. 행주기씨대관엔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奇)씨를 중흥하신 정무공(貞武公)의 산소가 있는 원당(元堂)의 도선산(都先山)은 명현의 산소로 600여년간 수호하여 왔었고 그 후로 후손들도 번영하여 왔었다. 그런데 1830년에 전래의 묘위토를 묘아래에 거주하는 불량자손이 팔아 없애어 향화가 어렵게 됨에 따라 장성(長城)과 광주(光州) 두 문중은 산직이 표씨(表氏)가 배추씨를 팔러 다닐 때에 격년윤번제로 집집마다 수렴하여 향화를 49년간 근근히 계속하여 오다가 1879년 기묘에 경수공(耕叟公) 기양연(奇亮衍)께서 7차나 전매되어 어느 세도 재상가에 있던 것을 그러니까 지금의 묘위토 전부를 환매하여 제향을 받들게 했고 신도비를 세우고 분묘를 사초하여 사대부의 선산 품위를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자손들이 멀리 살므로 자기 사문선산(私門先山)에는 극진히 하되 도선산에는 무관심하여 봉분은 퇴락하고 금양내(禁養內), 임목(林木)은 누가 어쨋는지 없어져 버리고 묘막은 신도비 아래 겨우 기어들고 날 정도이고 제향은 극히 소박하고 참석인원은 인근자손 10명 내외였고 성묘 오는 자손도 드물고 제향날자는 전래의 날자를 아무 통고 없이 바꾸는 등 침체문란 하였었다. 그리고 일본 식민정책은 민족정기와 가족윤리를 말살시키려고 소위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조상을 잊고 일가를 잊게 하는 흉악무도한 정책이었다. 우리는 이대로 말살되고 말 수는 없는 것이다.

1942년 11월 8 일 시제 때에 선세산소를 수호하고 제향을 받들고 일가간에 친목을 도모하여 민족주체성을 지키려고 행주기씨대종중(幸州奇氏大宗中)을 창립하여 규약을 제정하고 선대산소에 고유하고 각문중에 통고하여 종중기강을 혁신하였다.]

제가 보기에 대종중 창립후에 이룬 가장 큰 기성도 전총무이사의 업적은 행주산성내에 행주기씨유허비를 4년여의 노력으로 건립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일을 해내신 그 기록이 족보의 지장록에 없어서 2004년 9차 대동보 수보 때에 지장록에 수록해 주시도록 족보편수위원회에 제가 건의를 드렸습니다. 1973년에 발간한 행주기씨대관에 그 내용이 상세 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당시 기광서 총무이사님께서는 기성도씨가 자기 자랑만 잔뜩 해놓은 기록이라고 부정적으로 보는 당시의 분위기를 말씀 하셨습니다. 평생을 대종중창립과 가장 위대한 유허비 건립을 이루신 업적이 끝무렵에 않좋게 마치신 아타까움이 교차하는데 다행히도 족보에 유허비 건립과 행주유허의 정화기를 올려주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나 지장록 정편에 실릴줄 알았으나 완성된 족보를 받아보니 정편이 아니라 행주기씨대동보 갑신보 별집에 실렸고 편집착오인지 글 가운데에 뭉텅이로 빠진 부분이 있어 글을 읽다가 보면은 앞뒤 연결이 않되는 부분이 있어 아쉬었습니다. 그나마 실어주신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전문은 대종중홈페이지에 올려 놓았습니다. http://hjkee.com/m/m_keeB.php 이곳에서 전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1973년에 발간한 행주기씨대관을 저는 아버지의 4촌형님이신 당숙댁에서 어릴적 보아서 그 내용을 알고는 있었지만 책을 가지진 못했습니다. 족보편수 기간으로 기억하는데 어쩌다 기세홍 아저씨와 원당에서 얘기할 기회가 있어서 그 얘기를 했더니 아저씨가 우연히 대종중에 왔을 때 마침 책을 나누어 주고 있어서 가지고 있다 하시며 전페를 복사해 주셔서 중간의 족보부분은 빼고 스캔하여 pdf로 만든 파일을 올립니다.

종친의 날의 유래

매년 5월 두 번째 열리는 종친의 날을 시제일로 아시는 분들이 있어 몇자 적습니다. 종친의 날은 유허비 건립을 위하여 유허비 자리를 차지하고 부모 묘자리로 쓰고 있던 서정범이란 사람이 그렇게 중요한 자리면 왜 방치했느냐 기씨 코빼기도 못보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으신 기성도 전 총무이사님이 1966년 5월14일에 건립한 유허비 건립일에 맞추어 가족들이 다 모일 수 있는 5월 두 번째 일요일에 모여서 행주산성을 둘러보며 행주산성에 온 다른 성씨들에게 기씨들 여기 있소하고 알리는 날입니다. 행주산성순례를 위해 원당 도선산 제각에 모인 기씨들이 도선산에 모신 선조의 묘에 인사는 드려야 하니까 제사를 드리고 순례 출발한 것인데 지금은 제사만 드리고 행주산성순례는 빠지시는 분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유허비를 몇 번식 보셔서 신비롭거나 궁금하지 않으셔도 시제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기씨를 보여주는 행사니까 같이 순례를 해주시기를 저는 부탁을 드립니다.

기성도 전총무이사님의 종친의 날 순례를 해줄 것을 당부하는 글입니다.

행주 고기 안내

행주(幸州 덕양산;德陽山)는 우리 기성(奇姓)의 발상(發祥)의 성지(聖地)임으로 선세(先世)부터 행주(幸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왔었고 지금 우리는 이를 기념하는 큰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선세(先世)의 찬란(燦爛)한 업적(業績)을 널리 알리고 추모(追慕)하여 오고 있다. 우리 선세(先世)는 이곳에서 세거(世居)하여 오면서 장상(將相)이 배출하고 혈류(血流)가 계승(繼承)하여 국가(國家)에 공훈(功勳)과 사회(社會)의 교화(敎化)가 많았으며 대원제국(大元帝國)의 기황후(奇皇后)가 출생(出生)하여 그 부조3대(父祖三代)를 왕(王)으로 추봉(追奉)하였었고 후원(後元)의 왕공자질(王公子姪)도 다 행주(幸州) 기씨(奇氏)의 후손(後孫)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선세(先世)에 공헌(貢獻)이 많은 분을 국가에서 부원군(府院君)이나 군(君)을 봉(奉)할 때에는 반드시 이땅에 관련이 있는 옛 지명(地名)으로 덕양(德陽), 덕성(德城), 덕산(德山), 덕평(德平), 덕원(德原), 덕창(德昌), 덕풍(德豊), 개백(皆伯), 고흥(高興), 행원(幸原)등으로 봉(奉)하여 왔었고 우리 선세의 명현(名賢)들도 호(號)를 덕양(德陽) 고봉(高峰)이라 불러왔었고 이 지방에서는 이곳 바위를 기기(奇哥)바위, 우물을 기가(奇哥)우물이라 기념(記念)하여 왔었다. 조상(祖上)을 추모(追慕)하고 고향을 그리워함은 인간 본능의 감정이므로 우리는 이 땅을 본관으로 삼아 살아서는 문벌(門閥)을 표시하고 죽어서는 남자는 행주기공(幸州奇公)아무, 여자는 행주기씨(幸州奇氏)라 하여 선세(先世)로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기념하여 오고 후세(後世)에까지 이렇게 기념하여 갈 성지(聖地)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귀중한 땅을 기념할 만한 아무 흔적 하나를 남겨놓지 못하였음으로 六·二五의 혼란기(混亂期)에 이곳 권력배(權力輩)가 저의 가족묘지로 오손(汚損)하였던 것을 우리는 이를 정화(淨化)키 위하여 四년간의 피어린 투쟁으로 여러 관서(官署)를 교섭하였으되 도리어 문교부장관은 행주기씨 기념비는 세우지 못한다고 통고를 四차나 하여 왔었다. 최후 국회에 청원하여 문공위원회의 四차의 심의를 거칠 때에 여야간의 찬부(贊否)는 격론(激論) 노호(怒號)로 험악한 장면을 비쳐 유회(流會) 사태까지 이르렀으나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一九六五년 八월三일 제五二회 국회에서 우리 청원대로 의결을 얻어 이 땅을 국유화시켜 영구 보존시키고 횡포(橫暴)를 부리든 권력배(權力輩)의 가족묘 三기는 자진 발굴 화장하여 이를 정화하고 문교부장관의 거부통고(拒否通告)를 번안(飜案)시키고 당당한 허가를 얻어 유사이래의 큰 유허비(遺墟碑)를 세웠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로 천만뜻밖에 안성(安城) 모씨란 무지배(無知輩)들이 작란(作亂)하여 아무 증거 없는 무명고총(無名古塚)을 저의네 六백년전 선대분묘(先代墳墓)라 망단하여 봉분을 조성하고 상석까지 가설하여 우리 유허비를 침해하였으니 우리 수만 씨족이 건재하면서 이런 모욕을 그대로 당하며 유산으로 후세에까지 줄 수도 없는 것이다. 하잘 것없는 이것도 권력 대상이라 五년간의 비상한 노력으로 거년 一二월二八일에 강제 철거 시켰는 바 돌이켜 보건데 여금세태에 한미한 우리 처지에는 기적인 것이나 이는 모두 다 여러 종친들의 협력과 선세의 여음인 것이다.

우리는 선세의 훌륭한 핏줄을 받어온 씨족이다. 또다시 이런 모욕을 당할 리는 없으려니와 만일의 후환(後患)을 방지키 위하여 유허비 계하(階下)를 깨끗이 정리하고 나무를 심으며 통로를 내고 사적 안내관을 세워 내외관광객의 관광여건을 조성하여야 할 것이며 매년 봄에는 많은 자손들이 반드시 순례식을 거행하여야 할 것이다.

서기 1972년 5월 14일

행주기씨대종중

총무이사 기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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