〇 기언奇彦 : (936쯤) 삼국사기에는 기언奇彦이고 고려사에는 기언奇言이라 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삼국통일전쟁 마지막전투인 일리천一利川에서 견훤甄萱의 아들 견신검甄神劒과 대진對陣할 때 원윤元尹으로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좌익左翼을 맡았다[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936년 09월 08일(음) 기사]
〇 기오奇悟 : (944년쯤) 원윤元尹 [영월寧越 흥녕사지興寧寺址 징효대사탑비澄曉大師塔碑]
〇 기달奇達 : (944년쯤) 원윤元尹 [영월寧越 흥녕사지興寧寺址 징효대사탑비澄曉大師塔碑]
〇 기정업奇貞業 : (998쯤) 고려高麗 목종穆宗 때에 왕의 주치의인 태의太醫로서 나라가 불안정해지자 근위세력들과 함께 목종을 위해 궁궐에서 교대로 숙직을 했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〇 기순우奇純祐 : (1123쯤)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朝에 사신분, 문림랑文林郞를 지내고 이후 아들 기수전奇守全이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가 되면서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추증, 행주기씨幸洲奇氏 중시조中始祖
〇 기탁성奇卓誠 : (?~1179) 고려高麗의 무신武臣. 용모容貌가 단아端雅하고 궁마술弓馬術을 잘하였다. 교위校尉로 의종毅宗에게 뽑혀 견룡牽龍(어가견룡御駕牽引:왕의 가마를 호위)이 되어 시위侍衛하였고 위장군衛將軍이 되었으며, 무신정변이후인 명종明宗 초初에 거듭 승진陞進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1174년에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의 란亂에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서경西京을 평정하여 판병부사判兵部事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다. 1179년 죽으니 란亂을 평정한 공功으로 추충협모좌리동덕공신推忠協謀佐理同德功臣이 되어 각상閣上에 초상화가 그려져 모셔졌으며, 수태사守太師 문하시중門下侍中이 추증追贈되었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〇 기수전奇守全 : (1160쯤) 금자광록대부수태사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金紫光祿大夫守太師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영안왕 행장]
〇 기세준奇世俊 : 고려高麗의 무신武臣. 1178년(명종8년) 장군으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遣將軍如金[고려사]
〇 기세정奇世貞 : 고려高麗의 무신武臣. 1179년(명종9년) 중랑장中郞將으로 죽임을 당함[고려사]
〇 기홍수奇洪壽 : (1148:의종2~1209:희종5) 고려高麗의 무신武臣. 자字는 태고太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짖고 글씨를 잘 써서 명성名聲이 있었으나 무인武人이 되었다. 1194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197년 참지정사參知政事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감수국사監修國史 판병부사判兵部事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1199년에 수태위守太尉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1200년 수태위守太師 주국柱國, 1201년 문하시랑門下侍郎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1203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문하시랑門下侍郎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로 물러났다. 1199년 5월에 대관전무일편大觀殿無逸篇을 고쳐 쓰니 이는 고려시대高麗時代 최고最高의 서예작품書藝作品으로 평가平價되었다. 1204년 1월에 최충헌崔忠獻 등과 더불어 신종神宗의 희종熙宗에게로의 선위禪位를 논의論議하였고, 희종熙宗 때에 이부吏部에서 전선銓選을 맡았으나, 최충헌에게 사양辭讓하고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행주산성 안의 행주기씨유허비 자리의 집에 살며 음악音樂과 서예書藝를 즐겼다. 시호諡號는 경의景懿이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〇 기윤위奇允偉 : 고려高麗의 무신武臣. 1217년(高宗4년) 거란 침입에 상장군上將軍으로 개성시가開京市街에 군사軍士를 배치配置하여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고 대장군大將軍으로 가발병마사加發兵馬使가 되어 고주高州(고원高原), 화주和州(영흥永興)에서 거란의 침입을 막았다. 또한 이장대李將大, 이당필李唐必 등의 란亂을 평정하였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병감東國兵鑑]
〇 기윤숙奇允肅 : (?~1257) 고려高麗의 무신武臣. 원나라元 순제順帝의 정황후正皇后 기황후奇皇后의 고조부高祖이다. 수태부시랑守太傅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상주국上柱國 판이부사判吏部事 상장군上將軍으로 의종毅․ 명종明․ 신종神宗 3대三代에 40년 사이의 영상領相을 지냈으며 권신權臣 정중부鄭仲夫가 왕王을 마음대로 폐립廢位하고 중신重臣들을 함부로 주륙誅戮하자 이들을 설득說得하여 왕정王政을 복귀復歸시킨 공功이 크다. 시호諡는 강정康靖이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무선東文選, 가정집稼亭集]
〇 기필선奇弼善 : (1230쯤) 고려 고종高宗 때에 상장군上將軍[경남 고성군 옥천사玉泉寺 대한민국 보물 495호 쇠북]
〇 기존정奇存靖 : 고려의 무신武臣. 1216년(고종 3년) 영덕성寧德城(영변寧邊)에 침입한 거란을 격퇴하고 연주延州의 개평역開平驛․ 원림역原林驛에 주둔하였다. 이에 고려高麗의 3군三軍이 합세合勢함에도 거란의 위세氣勢에 진격進擊하지 못하니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 김취려金就礪와 군사軍士를 이끌고 포위包圍를 돌파突破하니 거란군이 크게 무너지고 크게 이겼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〇 기인보奇仁甫 : (?~1219) 고려 고종高宗 때의 무인武人, 랑장郞將으로 원수元帥 조충趙冲과 병마사兵馬使 김취려金就礪를 따라 거란契丹의 침입을 여러 차례 물리쳤다. 또한 최충헌崔忠獻이 정권政權을 잡고 횡포를 부리고 그를 비난하는 백여명百餘名을 무단살육無端殺戮함으로 이에 분격憤激하여 최충헌崔忠獻을 죽이려 하다 실패하여 피살被殺 되었다[고려사高麗史]
〇 기저奇泞 : 고려 1227년(고종高宗14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고려사高麗史]
〇 기홍영奇洪穎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은청광록대부상서우복야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에 이름. 증손녀曾孫女가 원나라元 순제順宗의 정황후正皇后가 되면서 왕王으로 추봉追封되었으나 왕호王號는 모른다. [가정집稼亭集]
〇 기홍석奇洪碩 : 고려高麗의 무신武臣. 최씨문신정권崔氏武人政權 말기末期인 고종高宗 때 지유指諭를 지냈으나 최우崔瑀에 밉보여 유배流配되었다. 그러나 1258년 최씨무인정권崔氏武人政權이 몰락沒落함에 유배流配가 풀려 1275년(忠烈王1) 군부판서軍簿判書 응양군鷹揚軍 상장군上將軍에 제수除授되었고 1278년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르고 다시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감찰제헌監察提憲으로 국가기무國家機務에 참여參與하였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〇 기온奇蘊 : 고려 고종高宗의 부마駙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동지추밀사同知樞密使로 호부상서戶部尙書 대장군大將軍.[고려사高麗史]
〇 기관奇琯 : 처음이름初名 장璋.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사우사三司右使 응양군鷹陽軍 상호군上護軍 손녀孫女가 기황후奇皇后로 원나라元朝에서 왕王으로 추봉追封되었으나 왕호王號는 모른다[고려사高麗史]
〇 기절奇節 :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판각문하사判閣門下事
〇 기자오奇子敖 : (1266~1328) 자字는 자오子敖 원나라元 순제順帝의 정왕후正皇后인 기황후奇皇后의 아버지父.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을 거쳐 총부산랑摠府散郞을 지냈다.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정승판전리사사僉議政丞判典理司事를 추증贈하였고 시호諡號는 장헌莊獻이다. 원나라元에서는 병덕승화육경공신秉德承和毓慶功臣에 영안왕榮安王으로 봉封하였다가 다시 경왕敬王으로 올려 추봉追封하고 묘비墓碑는 원나라元의 한림학사翰林學士 구양현歐陽玄이 쓰도록 하였다. 1290년(경인년庚寅年)에 원元나라에서 반도叛徒 내안乃顔의 당黨인 합단哈丹의 침입侵入으로 충렬왕忠烈王이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할 때 중군中軍 편장偏將으로 이를 퇴치退治하였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원사元史, 가정집稼亭集]
〇 기철奇轍 : (?~1356) 기자오奇子敖의 2째 아들이다. 몽골蒙古 이름은 빠엔부카伯顔不花. 누이동생이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정황후正皇后가 되자 고려高麗에서는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사도守司徒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封하였고 원나라元朝에서는 정동행성征東行省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하고 다시 용양성평장사遼陽省平章事에 임명된 후 대사도大司徒에 이르렀다. 1356년 공민왕恭愍王의 친명반원정책親明反元政策에 의해 주살誅殺되었다.[고려사高麗史, 원사元史]
〇 기원奇轅 : (?~1352) 기자오奇子敖의 3째 아들이다. 누이동생이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정황후正皇后가 되자 고려高麗에서는 덕양군德陽君에 봉封하였고 원나라元朝에서는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임명하였다. 1352년 9월 조일신趙日新이 일으킨 란亂에 시해殺害되었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〇 기주奇輈 : 총부산랑摠部散郎 기자오奇子敖의 4째 아들이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원윤元尹
〇 기륜奇輪 : (?~1356) 총부산랑摠部散郎 기자오奇子敖의 5째 아들이다. 1352년(공민왕1) 조일신趙日新의 란亂에 암살위기暗殺危機를 넘기고 란亂이 평정되자 1354년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제수除授되고 덕산부원군德山府院君에 책봉冊封되었다. 1356년 공민왕恭愍王에 의해 형兄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 기철奇轍과 함께 참살斬殺되었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〇 기황후奇皇后숙량태肅良台 완자홀도完者忽都 :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皇后. 몽골蒙古 이름은 완췌후두完者忽都 기자오子敖의 딸, 기철轍의 누이동생이며 북원北元 소종昭宗의 생모生母이기도 하다. 1333년(忠肅王 2)에 원元나라의 휘정원徽政院 궁녀宮女가 되어 순제順帝의 총애寵愛를 받게 되자 정후正后인 다나시리答納失里로부터 학대虐待를 받았다. 1335년에 다나시리의 일족一族이 퇴출逐出되자 황실皇室에서 황후皇后로 책봉冊封하려 했으나 바엔伯顔 등의 반대反對로 실현實現되지 못했다. 1339년 황자皇子 아이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를 낳았으며, 1340년 2월에 바엔 세력勢力이 물러나게 되자 4월에 드디어 제2황후第二皇后로 책봉冊封되었다. 황후皇后에 오른 후 반대세력反對勢力을 몰아내고 휘정원徽政院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하여 원나라元의 실권자實權者가 되었다. 이를 배경背景으로 고려高麗에 막대莫大한 영향력影響力을 행사하였는데 기씨奇氏의 정권장악政權掌握도 있었지만 고려高麗의 원나라元에 대한 공녀제도貢女制度를 폐지廢止하고, 고려高麗의 원나라元에 합병合倂을 막았으며, 제주도濟州道에 목마장牧馬場을 도입導入하고, 금강산金剛山 장안사長安寺를 중건重建하는 등等의 업적業績도 많았다. 1365년에는 전례前例를 깨고 정황후正皇后가 되었으나, 1366년 연경燕京이 주원장朱元璋에게 함락陷落되자 몽골 내륙內陸으로 쫓겨나고, 1368년 원나라元가 멸망滅亡한 후後의 자세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고려사高麗史, 원사元史, 신원사新元史]
〇 기인걸奇仁傑 : 공민왕恭愍王 때朝에 개성판윤開城府尹
〇 기사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 : 기철轍의 아들子. 몽골蒙古 이름名은 새인티무르賽因帖木兒다. 일찍이 원나라로 들어가 평장平章원나라元의 중서성中書省의 고위직高位職에 올랐으며 1356년에 공민왕恭愍王이 친원세력親元勢力을 숙청할 때 원나라元에 있었으므로 생명生命을 보전保全하였으며 1367년 원나라元가 멸망滅亡하자, 요양遼陽․ 심양瀋陽의 유민遺民들을 모아 동녕부東寧府를 근거지根據地로 하여 가문家門의 복수復讐를 위해 고려高麗의 북변北邊을 위협威脅하다가 1370년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 이성계李成桂와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 지용수池龍壽 등이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자 패주敗走하였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〇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 : 기원奇轅의 아들.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소감少監 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고려사高麗史]
〇 기전룡奇田龍 : 공민왕恭愍王 때朝에 승지承旨, 원나라元에서는 한림翰林, 원나라元에 망명亡命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강원江原 이천군伊川郡에 기전룡奇田龍 처妻 손씨孫氏가 나이 21세歲에 남편이 원나라元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으나 시어머니 봉양奉養에만 근심할 뿐 마음을 달리하지 않으므로 조정에서 연려비旌閭碑를 세웠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〇 기현奇顯 : (1303~1371-07-06음)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신돈辛旽의 당여黨與로 그를 집에 거처시키며 봉선사奉先寺를 거쳐 왕궁王宮에 출입出入하게 하였다.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도첨의정승領都僉議政丞에 이르렀으나 신돈이 제거되며 최사원崔思遠․ 정구한鄭龜漢․ 진윤검陳允儉․ 기중수奇仲脩 등과 함께 참화를 입었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〇 기중평奇仲平 : (? ~ 1371-07-26음) 공민왕恭愍王 때朝에 중직대부中直大夫 직장直長[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〇 기중리奇仲理 : (? ~ 1371-08-11음) 고려사엔 기숙윤奇叔倫. 벼슬은 사간司諫[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〇 기중민奇仲敏 : 공민왕恭愍王 때朝에 랑장郎將[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〇 기중제奇仲齊 : (? ~ 1371-08-11음) 공민왕恭愍王 때朝에 규정糾正[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〇 기중수奇仲修 : (? ~ 1371-07-06음) 공민왕恭愍王 때朝에 지평持平[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〇 기면奇勉 : 조선朝鮮에 처음 들어와 벼슬官은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이다, 아들 기건奇虔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면서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되시다.
〇 기질奇質 :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朝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문종文宗 때朝 강화부사江華府使를 거쳐 세조世祖 때朝에 부평부사富平府使,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를 역임歷任하고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다.[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〇 기분奇賁 : 조선朝鮮 단종端宗 때朝의 판관判官을 거쳐 부사府使와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냈다.[세조실록世祖實錄]
〇 기건奇虔 : (?~1460) 조선朝鮮 초初 문신文臣. 호號는 현암眩庵 또는 청파靑坡. 세종世宗 때朝 포의布衣로 발탁擢拜되어 지평持平에 제수除授되었다. 그 뒤 연안군수延安郡守로 군민郡民이 진상進上하는 붕어잡이의 고충을 생각하고 부임赴任 3년 동안 한번도 먹지 않았고,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나가서 주민이 전복따기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전복을 먹지 않았으며, 제주濟州의 풍속風俗을 교화敎化시켜 관곽棺槨 예장禮葬을 지도 하였다. 내직內職으로 옮겨 집의執義․ 형조참판刑曹參議․ 이조참판吏曹參議를 역임歷任하고, 1448년 전라도全羅道 도관찰사都觀察使 겸兼 전주부윤全州府尹에 부임赴任,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449년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승진陞進하고, 세종世宗이 돌아가시자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가 단종端宗이 즉위卽位하자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승정원承政院과 도승지都承旨 감맹경姜孟卿의 탐학貪虐을 탄핵彈劾하였으며, 공론公論의 보장保障을 요구要求하였고 이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의 횡포橫暴를 논박論駁하였다. 인순부윤仁順府尹을 거쳐서 편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를 역임歷任하고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자 관직官職을 버리고 사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세조世祖가 다섯 번이나 찾아 출사를 청했지만 거짓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다(假託靑盲)하고 절개節槪를 버리지 않았다. 장성長城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諡號는 정무貞武다.[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〇 기축奇軸 : (1418~1464) 자字는 당지當之이며 단종端宗 때에 주부主簿를 거쳐 세조世祖 때朝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했으며 아들子 기찬奇襸이 귀貴하여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 추증追贈되었고 다시 증손자曾孫 기대항奇大恒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면서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로 추증追贈되었다.[세조실록世祖實錄]
〇 기찬奇襸 : (1443~1492) 자字는 사빈士贇, 호諡는 정렬貞烈이다. 1474년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주부注書,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으며 예문관禮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 경연시독관經筵侍講官을 역임歷任했으며 외직外職으로는 영광군수靈光郡守를 역임했다. 손자 기대항奇大恒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면서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단종실록成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〇 기저奇褚 : 자字는 수량遂良, 1483년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1490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한림翰林에 선택選擇되고 연산군燕山君 때朝에 예문관禮文館 봉교奉敎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내고 첨정僉正으로서 함경도咸鏡道 채은경차관採銀敬差官으로 함경도咸鏡道 은광銀鑛 개발開發 상황狀況을 실지實地로 답사踏査했다. 중종中宗 때朝 부평부사富平府使에 이르렀다.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재직在職 때에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編纂에 참여參與하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〇 기형奇逈 : 자字는 자고子高. 1501년 사마양시司馬兩試, 1516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정자正字, 주서注書, 무장현감茂長縣監, 정랑正郞을 거쳐 시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이를렀다. 손자孫 양호관찰사兩湖觀察使 기령奇苓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等에 록훈錄勳되면서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겸兼 참찬관參贊官 예문관禮文館 직제학直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〇 기원奇遠 : (1481~1522) 자字는 자허子虛, 충순위忠順衛 돈용교위敦勇校尉로 손자孫 기효근孝謹의 선무훈宣武勳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동지경연同知經筵 춘추관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官 제학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장성읍지長城邑誌]
〇 기괄奇适 : 자字는 자용子容, 별좌別坐를 지냈으나 아우 복재服齋 기준遵이 기묘피화己卯被禍에 은덕불사隱德不仕하였다.
〇 기진奇進 : (1487~1555) 자字는 자순子順, 호號는 문재勿齋. 1522년에 진사進士에 입격入格, 1527년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아들子 기대승奇大升의 종계변무宗系辨誣 광국훈光國勳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겸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고 덕성군德成君으로 봉封 해졌다.[광주읍지光州邑誌]
〇 기준奇遵 : (1492~1521) 자字는 자경子敬, 호號는 복재服齋 또는 덕양德陽.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 1513년 사마양시司馬兩試, 151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사관史官을 거쳐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로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으며, 저작박사著作博士를 지낸 뒤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기묘사림己卯士林의 개혁정치改革政治를 가장 강력强力히 추진推進했으며 사경司經으로 있을 때에는 임금에게 효재孝悌의 도리를 다할 것을 건의하였다. 1516년 저작著作으로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을 겸兼하였으며, 검토관檢討官․ 수찬修撰․ 검상檢詳․ 장령掌令․ 시강관侍講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훈구세력勳舊勢力 이성언李誠彦이 임금을 속이고 부정不正을 저질렀음을 탄핵彈劾함과 아울러 대각臺閣이 묵인黙認함을 논박論駁하여 훈구파勳舊派인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으로부터 질시嫉視의 대상對象이 되었다. 1519년 응교應敎로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하여 조광조를 위시하여 김식金湜․ 김정金淨 등과 함께 하옥下獄되고, 이어 아산牙山으로 정배定配되었다가 온성穩城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521년 송사련宋祀連의 무고誣告로 신시무옥辛巳誣獄에 유배지流配地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시詩도 잘하여 해동시선海東詩選․ 대동군부운옥大東韻府群玉 등에 시詩가 수록收錄되어 있다. 온성穩城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아산牙山의 아산서원牙山書院, 고양高陽의 문봉서원文峯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著書로 복재집服齋集 2권卷․ 무인기문戊寅紀聞․ 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분으로 1545년(인종仁宗1) 신원伸寃되었다. 아들 기대항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면서 이조판서吏曹判書 양관대제학兩舘大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중종실록中宗實錄, 해동시선海東詩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퇴계집退溪集]
〇 기대익奇大益 : 자字는 원길元吉. 진용교위進勇校尉
〇 기대유奇大有 : 자字는 덕우德優, 진용교위進勇校尉 용양위부시과龍驤衛副司果이며 아들子 기효근孝謹의 선무공宣武功으로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호조판서戶曹判書 겸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고 고흥군高興君으로 봉封 해졌다.[장성읍지長城邑誌]
〇 기대이奇大頤 : 자字는 덕양德養, 어모장군禦侮將軍
〇 기대정奇大鼎 : 자字는 사수士受. 1573년(선조6) 강능참봉康陵參奉으로 있을 때 유일문사遺逸文士로 천거薦擧되어 6품직品職으로 승진陞進되었고 1579년에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1583년에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태조太祖의 정비正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태묘太廟 배향配享에 대한 논란論難이 있었을 때, 양사兩司는 마땅히 부묘祔廟를 청하여야 되는데 제각을 세우고 제사(建閣致祭)만을 청한 점을 논박하자 정연한 이론 앞에 양사兩司는 일괄사표一括辭表를 제출提出하였다. 타인他人의 이목耳目이나 사사私事로운 사정私情을 전혀 개의하지 않고 오직 대의명분大義名分에 따라 모든 일을 시행試行해나가려고 힘썼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석담일기石潭日記, 행주기씨보첩幸州奇氏譜牒]
〇 기대항奇大恒 : (1519~1564) 자字는 가구可久. 1540년 사마시司馬試에, 1546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청환직淸宦職을 두루 역임歷任하고, 1551년 평안도암행어사平安道暗行御史로 나가 민폐民弊를 살폈다. 1552년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553년 헌납獻納이 되었다. 1554년 사간司諫이 되고 이어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1556년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거쳐, 1561년 대사간大司諫으로서 재변소災變疏 6조목條目을 올려, 경천敬天․ 법조法祖․ 무학務學․ 납간納諫․ 임현任賢․ 애민愛民에 힘쓸 것을 건의하였다. 1563년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는데, 당시 권신權臣 이량李樑이 사화士禍를 일으켜 사류士類들을 숙청하려 하자, 심의겸沈義謙 등과 함께 이량의 죄상과 임무任務에 소홀하여 방조하는 사헌부司憲府의 죄상罪狀도 함께 탄핵彈劾하여 훈구세력을 축출하고 사림士林을 옹호擁護하였다.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1564년 공조참판工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발탁擢拔되었다. 손자孫 기자헌自獻이 영의정이 되면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시호는 정견貞堅이다.[명종실록明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〇 기대림奇大臨 : (1526~1565) 자字는 돈언惇彦. 동부참봉東部參奉을 지냈다. 동생 기대승의 광국원종훈光國原從勳으로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로 추증贈 되었다.[광주읍지光州邑誌]
〇 기대승奇大升 : (1527~1572) 성리학자性理學者. 호號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며, 종계변무광국훈宗系辨誣光國勳으로 덕원군德原君으로 봉封 해졌다. 1549년 사마양시司馬兩試에, 1558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뒤 부정자副正字와 검열檢閱 겸兼 기사관記事官을 거쳐 1563년 주서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량李樑의 시기로 식직削職되었다. 그러나 4촌현從兄 기개항大恒의 상소上疏로 복귀復歸하여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1564년 검토관檢討官으로 언로활성화言路活性化를 역설力說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兵曹佐郞․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566년 지평持平․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헌납獻納․ 검상檢詳․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집의執義가 되었으며,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追贈을 건의하였다. 1568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兼職하였고, 1570년 대사성大司成으로 있다 영의정領議政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不和로 해직解職되었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겸兼 경연수찬관經筵修撰官․ 예문과제학禮文館直提學으로 임명任命되었으나 불부不赴하였다. 1572년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진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大司諫․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12년에 걸쳐 서한書翰을 교환하였는데, 그 가운데 8년 동안1559~1566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조선朝鮮 성리학性理學의 이기설理氣說이 중국中國을 뛰어넘는 계기가 되었다. 고봉은 퇴계退溪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다 정情이다 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하였으며,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퇴계의 주리설主理說과 쌍립하였다. 또한 선생은 정치인으로서 기묘사림己卯士林의 개혁정치改革政治를 계승繼承하여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실천實踐하였으니 논사록論思錄에 상세하다.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나주羅州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지文集으로 고봉집高峯集 15책이 있는데 여기에는 논사록論思錄 왕복서往復書 이기왕복서理氣往復書 주자문록朱子文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고봉집高峯集]
〇 기의奇薿 : 자字는 경수景遂. 음보蔭補로 단양丹陽․ 안악군수安岳郡守를 지냈다. 손자孫 기협恊이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순절殉節하여 정려旌閭가 내려지니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〇 기령奇苓 : (1527~1594) 자字는 경연景延, 1565년 생원生員에, 1568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다. 홍문록弘文錄에 들었으며 1581년(선조14) 선천군수宣川郡守로 재직시在職時에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선조宣祖가 표리表裡 1벌을 하사下賜하였다. 승지承旨를 역임歷任하고 1589년에는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明에 다녀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으며 1592년에는 형조참의刑曹參議 겸兼 강원도순찰사江原道巡察使를 1593년에는 병조참지兵曹參知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等에 록훈錄勳되었다. 관직官職은 양호관찰사兩湖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에 이르렀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〇 기훈奇薰 : (1545 ~ ?) 자字는 경방景芳,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부평부사富平府使, 삼수군수三水郡守, 안성군수安城郡守, 서산군수瑞山郡守, 훈련원정訓練院正, 인산첨사麟山僉使를 거쳐 충청수사忠淸水使를 지냈다.[선조실록宣祖實錄]
〇 기효간奇孝諫 : (1530~1593) 자字는 백고伯顧, 호號는 금강錦江․ 인재忍齋. 김인후金麟厚․ 이항李恒의 문인門人이며, 당숙堂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선생께도 수학修學하였다. 출사出仕하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전념專念하였으며 후진양성後進養成에 주력하여 호남湖南의 은덕군자隱德君子로 불리었다. 특히, 김인후가 지어준 [우주宇宙의 중간中間에 두 분이 있는데, 공자孔子는 원기元氣이고, 주자朱子는 참됨眞이다.]라는 시詩는 도통道通을 전수傳受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동문同門인 김천일金千鎰․ 정철鄭澈․ 변이중邊以中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문하門下에서 오희길吳希吉 등의 학자學者가 배출輩出되었다. 스승 김인후가 죽은 뒤에 서태수徐台壽․ 변이중邊以中․ 변성온卞成溫 등과 사우祠宇를 짓는 일을 주도主導하여 제자弟子의 직분職分을 다하였으니 이 사우가 필암서원筆巖書院이다. 임란壬亂에 장성長城 남문南門에서 창의倡義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고, 장성長城 추산서원秋山書院과 오산사鰲山祠에 제향祭享되었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 대산집臺山集, 미암일기眉巖日記, 노사집盧沙集, 전고문헌典考文獻]
〇 기응세奇應世 : (1539~1585) 자字는 경우景遇, 아들 기자헌이 영의정이 되면서 보조공신補祚功臣으로 대광보국숭정대부大匡輔國崇政大夫 영의정領議政을 추증贈받고 덕창부원군德昌府院君에 봉封 해졌다. 선조宣祖 때朝에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를 명命 받다. 묘비명墓碑銘이 명明나라 대사大使요 명필名筆인 주지번朱之蕃과 조선朝鮮의 명필名筆인 한석봉韓石峰이 써 서지학자書誌學子들에게 귀貴한 자료資料로 많이 참고參考 되고 있다.
〇 기효근奇孝謹 : (1542~1597) 자字는 숙흠叔欽. 어려서 예문藝文을 배우고 서법書法을 잘했으나 성품이 호방豪放하여 1579년(선조12)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당시 오랫동안 평화가 계속되자 군비가 소홀하였으므로 왕의 명을 받들어 주군州郡의 군비軍備를 두루 점검하였다. 1590년 남해현령南海縣令으로 부임하여 전함戰艦과 병기兵器를 수리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慶尙右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원균元均의 막하麾下에서 6년간年間 사천해전泗川海戰 등 여러 차례 전투戰鬪에 참가하였다. 그때마다 선봉先鋒이 되어 큰 공功을 세웠으므로 가자加資되었으며,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호조판서戶曹判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봉追贈되고 개백군皆伯君에 추봉追封하였으며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묘비墓碑, 신도비神道碑와 석물石物 등等을 하사下賜하고 부조위不祧位를 명命하였다. 공公의 사위女인 이문룡李文龍의 처妻 또한 외적倭賊에 맞서 자결自決한 열녀烈女로 왕명王命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서귀유고西歸遺稿.]
〇 기란奇蘭 : (1548~1630) 자字는 경형景馨, 음보蔭補로 장수현감長水縣監을 지냈으며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에 가자加資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〇 기효분奇孝芬 : 자字는 백형伯馨,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부사과龍驤尉副司果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〇 기효근奇孝曾 : (1550~1616) 자字는 백로伯魯, 호는 함재涵齋.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고 출사出仕를 사양辭讓하고 향리鄕里에서 학문연구學問硏究에 힘썼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김덕령金德齡이 담양潭陽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킬 때 도유사都有司로 격문檄文을 짓고 군사軍士를 모집하였다. 그 결과 의병義兵 1천인千人과 군량미軍糧米 3천여석千餘石을 확보하여 전라도 각지에서 왜군을 물리쳤고 의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용만龍灣 의주義州에 이르러 왕王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시위侍衛하니 선조가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과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제수除授 하였으나 상소사퇴上疏辭退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며 근왕록勤王錄 1권卷이 있다.[광주읍지光州邑誌, 고봉집高峯集, 대동야승大東野乘]
〇 기봉년奇鳳年 : 아들子 기효복孝福이 호성3등공신扈聖三等功臣에 록훈錄勳되므로 판서判書에 추증追贈되고 고성군高城君에 봉封 해졌다.
〇 기효뵥奇孝福 : 처음이름은 경복景福. 무과武科에 급제及第 구성부사龜城府使, 동래부사東來府使, 순천부사順天府使, 충청수사忠淸水使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역임歷任했다. 임란壬亂에 선조宣祖의 어가御駕를 의주義州까지 호위扈衛한 공功으로 1606년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3등에 책록冊錄되고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추증追贈받았으며 고흥군高興君에 봉封 해졌다.[선조실록宣祖實錄]
〇 기자헌奇自獻 : 1562~1624 처음이름初名은 자정自靖, 자字는 사정士靖, 호號는 만전晩全. 21세에 사마양시司馬兩試로, 29세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호당湖堂에 들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검열檢閱이 되어 1592년 봉교奉敎, 병조兵․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정언正言, 집의執義, 부교리副校理, 보턱輔德, 사간司諫, 사인舍人, 동부同副․ 우부右副․ 좌승지左承旨등 청요직을 거쳤다. 1597년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1600년 부제학副提學․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1601년 정여립모반사건鄭汝立謀逆事件에 연루連累된 최영경崔永慶을 신원伸寃하고, 서인西人을 탄핵彈劾하였다. 1602년 왕세자王世子광해군光海君 우부빈객右副賓客, 병조兵曹․ 예조판서禮曹判書,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604년 우의정右議政, 1605년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이때 세자世子를 폐廢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사後嗣로 삼으려 하자 이를 적극 반대反對하였다. 1606년 좌의정左議政을 12번이나 사임한 끝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608년 류영경柳永慶 등의 소북小北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자, 이를 탄핵彈劾하고 광해군光海君을 즉위卽位시키는 데 공헌貢獻했다. 1613년 영창대군 피살被殺의 부탕不當함을 주장하던 정온鄭蘊의 형극極刑을 강력반대强力反對하여 감형減刑케 하여 유배流配에 그치게 하였다. 1614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1617년 폐모廢母를 만류하다 문외출송門外黜送되어 홍원洪原에 유배流配되고 길주吉州로 이배移配되었으며, 강릉江陵에 방귀放歸되어 은거隱居하였다. 1620년 광해군光海君의 특지特旨로 덕평부원군德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사직辭職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김류金瑬․ 이귀李貴 등이 가담을 요청하니 신하臣下로서 왕王을 폐廢할 수 없다하여 거절拒絶하였으며, 반정反正 뒤 인조仁祖가 불렀으나 가지 않고 이해 7월月 역모죄逆謀罪로 중도부처中道付處 되었다가 1624년 이괄李适의 란亂에 내응內應을 우려憂慮하여 처형處刑되었다. 1627년 복관復官되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인조실록仁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행주기씨보幸州奇氏譜]
〇 기협奇恊 : (1572~1627) 자字는 여인汝寅, 1601년(선조3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하였으며, 1604년 검열檢閱이 된 뒤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 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 병조좌랑兵曹佐郞․ 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 장성부사長城府使를 거쳐 1609년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을 역임하였다. 1612년 교리校理를 거쳐 1613년 강화부사江華府使가 되었는데, 이때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대厚待하였다 하여 파직罷職, 하옥下獄되었다. 1620년에 다시 기용起用되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고, 1626년(인조4)에 선천부사宣川府使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의주義州가 함락되고 적이 곽산郭山의 능한산성陵漢山城에 이르자 수성장守城將으로 싸우다가 성城이 함락陷落되자 다시 선천宣川에서 항전抗戰하다 전사戰死하였다. 인조仁祖가 치죄致祭하고 정려포상旌閭襃賞하고 좌찬성左贊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追贈하고 덕풍군德豊君에 봉封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〇 기윤헌奇允獻 : (1573~1624) 처음이름初名은 충헌忠獻, 또는 내헌乃獻, 자字는 경이敬而 또는 사집士執, 현감縣監으로 있다가 1605년(선조38)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及第하여 1608년에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가 되고, 광해군光海君 때는 공조좌랑工曹佐郞․ 군기시정軍器寺正․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장령掌令․ 안악군수安岳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에 형兄 영의정領議政 기자헌自獻이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廢妃에 반대反對하여 유배流配될 때 함께 관직官職을 삭탈削奪당하고 유배流配되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廢妃(西宮廢黜)에 반대했다하여 수차數次 국문鞠問을 받고 방면放免되었다. 그러나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以後에는 오히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제거除去할 때 동조同調했다는 죄목罪目으로 국문鞠問을 받았고,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란亂이 일어나자 란도亂徒와 내응內應했다는 혐의嫌疑로 추국推鞫을 받아 불북不服하다가 매맞아 죽었다(杖殺)[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행주기씨대동보幸州奇氏大同譜]
〇 기홍헌奇弘獻 :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자字는 군가君可, 순천군수順天郡守를 지냄.
〇 기종헌奇宗獻 : (1575~1643) 처음이름은 여헌汝獻, 자字는 경헌景獻, 호號는 수허守虛 또는 거악擧岳. 아버지 개백군皆伯君 기효근奇孝謹을 따라 토왜討倭에 종군從軍하여 훈련원정訓練院正에 특제特除되었고 1594년 무과武科로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여러 군읍재郡邑宰를 역임歷任하고 1605년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으로 행원군幸原君에 봉해졌다. 1637년 충청수사忠淸水使를 지낼 때 인조仁祖는 수전水戰에 정통하니 사람을 제대로 얻었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파주목사坡州牧使로서 남한산성南漢山에 침략하는 호병胡兵을 협공한 공功으로 충청도忠淸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특수特授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〇 기의헌奇義獻 : (1587~1653) 자字는 사직士直 호號는 기은棄隱 또는 육오당六吾堂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 정묘丁卯․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거의擧義하였다. 저서著書로 기은유고棄隱遺稿 일권一卷이 있고 광주光州 용동사龍洞祠에 배향配享되었다.
〇 기만헌奇晩獻 : (1593~1651) 자字는 시가時可, 호號는 백봉伯峰. 1612년 생원生員에 입격入格하고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정언正言, 지평持平, 사간司諫을 거쳐 벼슬은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함경도咸鏡道 단천 端川에 거사비去思碑가 있다.[인조실록仁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〇 기신헌奇信獻 : 자字는 서언瑞彦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무안현감務安縣監을 지냄.
〇 기순헌奇舜獻 : 병절교위秉節校尉로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
〇 기계헌奇啓獻 : 자字는 사옥士沃,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으로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追贈.
〇 기익헌奇益獻 : 기자헌奇自獻의 서종제庶從弟로서 천얼賤孼이면서도 궁궐재건과 조선造船 등에 공을 세워, 광해군의 특명으로 고원군수에까지 올랐다. 왕족 이문빈李文賓의 사위가 되어 궁중에 친하여졌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반란 때 휘하장수로 가담하였으나, 관군에게 패하여 불리해지자 이수백李守白과 함께 이괄·한명련韓明璉의 목을 베어 바쳤다. 조정에서는 이괄을 죽이는 자를 포상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반란에 적극 참여했으므로 처형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지만 죽음을 면하였다. 1624년 고변에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되었으나, 1631년 이귀와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석방되어 원하는 곳에 거주하였다. 이괄李适의 반란에 가담하면서 영의정領議政 기자헌奇自獻 등 집안은 멸문의 화를 당하였다.
〇 기준격奇俊格 : (1594~1624) 처음이름은 수격秀格 자字는 봉만鵬萬. 1615년에 사마시司馬試, 1616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모두 장원壯元하였다. 1617년 정언正言․병조좌랑兵曹佐郞․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歷任하였으며 허균許筠의 역모逆謀를 알아 이를 상소上疏하여 난亂을 막았다. 1621년 설서設書를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겼다.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廢母에 찬성하지 않아 박해迫害받다가 1624년 이괄李适의 난亂에 내응할 우려憂慮가 있다하여 사사賜死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문과방목文科榜目, 청선고淸選考]
〇 기순격奇順格 : (? ~ 1624) 자字는 수립秀立이다. 1616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1619년 해남현감海南縣監 1620년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냈다. 전라병사全羅兵使를 역임歷任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내응할 우려憂慮가 있다 하여 사사賜死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〇 기효일奇孝一 : (1595 ~ 1636) 자字는 행원行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경성鏡城 방탄坊坦 만호萬戶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재령군수載寧郡守와 토산兎山에서 전사戰死. 이 전공戰功으로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을 추증贈.[재령읍지載寧邑誌]
〇 기수발奇秀發 : (1596 ~ 1624) 자字는 자산子山, 호號는 창랑정滄浪亭이다. 1612년에 진사進士, 1616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검열檢閱․봉교관奉敎官을 거쳐 1621년 예조좌랑禮曹佐郞, 1622년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괄李适의 난亂에 온 가족家族과 함께 사사賜死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〇 기진흥奇震興 : (1596~1651) 자字는 중립仲立 또는 원립元立. 1624년에 진사進士, 1644년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부사직副司直을 거쳐 비변사備邊司에 들었으며 1649년에는 지포紙砲를 제조한 공功으로 통정通政에 가자加資되었다. 1650년 광주부윤廣州府尹을 거쳐 1651년(孝宗2년) 경기수사京畿水使에 이르렀으나 이해 김자점金自點 일파의 모역사건謀逆事件에 김자점金自點의 인척姻戚인 까닭에 사형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〇 기진탁奇震鐸 : (1607 ~ 1653) 자字는 선명善鳴, 1624년 18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1646년(仁祖2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하였으나 전시殿試의 표론表論의 시제試題가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 죽음이 인조仁祖에 의해 저질러졌고 서인西人을 억압하기 위한 것임을 비꼬는 내용으로 인조가 격분激憤하여 파방罷榜되고 다른 문제로 전시를 치르도록 하자 성균관成均館의 사림士林으로서 의義를 굽힐 수 없다고 귀향歸鄕하고 과거科擧를 단념斷念하고 성리학性理學에 몰두沒頭하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 송암집松巖集]
〇 기침奇琛 : (1621 ~ 1654) 자字는 여보汝寶. 165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예승문원부정자隸承文院副正字를 지냈다. [문과방목文科榜目]
〇 기서익奇瑞益 : (1621 ~ 1720) 자字는 사징士徵, 1681년(숙종 정유丁酉)에 향년享年 100세로 노직老職으로 동지중추同知中樞에 받았고 숙종이 동추교문同樞敎文에 수즉다욕壽則多辱인데 차인此人은 수이강녕壽而康寧하고 다남자즉 다구多男子則 多懼인데 다남자多男子로되 무일요절無一夭折하니 차진희세此眞稀世의 복인福人장수하시나 강령하고 아들 많은 사람은 근심이 많은데 이 사람은 아들이 많으면서(9남2녀)도 한 사람도 요절하지 않았으니 이는 세상에 진실로 드문 일로 복인이라 할 것이다라하였다.
〇 기진갑奇震甲 : (1624 ~ 1669) 자字는 용경龍卿, 호號는 산은散隱. 천자天資가 웅위용감雄偉勇敢하고 문장필법文章筆法이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효종孝宗이 북벌北伐에 쓰일 인재人才를 널리 구하니 좌상左相 민정중閔鼎重이 공을 천거薦擧하므로 인견引見하여 궁검弓劒을 하사下賜하고 소촌도찰방召村道察訪에 특제特除하였다. 이어 별제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역임했으나 효종孝宗이 승하昇遐하시니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하였다.
〇 기정익奇挺翼 : (1627 ~ 1690) 자字는 자량子亮, 호號는 송암松巖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으로 경사자집經史子集과 천문天文․지리地理․의학醫學에 박학博學한 산림처사山林處士니 송시열宋時烈이 유일문사遺逸文士로 1681년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천거薦擧 제수除授되었으나 출사치出仕 않고 뒤이어 효릉孝陵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또한 출사치出仕 않았다. 필암서원筆巖書院을 옮겨짖고 제자弟子를 양성養成하였다. 추산서원秋山書院에 배향配享되셨다. 성리학性理學과 경세經世를 연구硏究한 송암집松巖集 4권卷 2책冊이 전한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장성읍지長城邑誌]
〇 기진열奇震說 : (1648 ~ 1703) 자字는 군필君弼. 손자孫 기언정奇彦鼎이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면서 호조참판戶曹參判 겸兼 의금부사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追贈되고 덕평군德平君에 봉封해졌다.
〇 기율奇慄 : (1656 ~ 1728) 자字는 관보寬甫, 호號는 운호雲湖.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고 1617년 명明나라 공성황후恭聖皇后로부터 관복冠服과 종계변무합경宗系辨誣合慶을 하사下賜받았다.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충무위忠武衛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아버지 행원군幸原君 기종헌奇宗獻을 따라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호가扈駕하여 사정司正이 되었다.
〇 기정룡奇挺龍 : (1670 ~ 1738) 자字는 견경見卿. 호號는 낙암樂庵이다. 학행學行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삼강록三綱錄에 사적事迹이 실렸다. 광주 용동사光州 龍洞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문집文集으로 낙암유고樂庵遺稿가 있다.
〇 기정후奇挺後 : (1676 ~ 1722) 자字는 계술繼述. 아들 기언정奇彦鼎이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면서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 겸兼 의금부사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追贈되고 덕창군德昌君에 봉封해졌다.
〇 기언관奇彦觀 : (1706 ~ 1784) 자字는 백첨伯瞻, 호號는 국천재菊泉齋. 1744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及第하였으나 소시召試 한권翰圈에 영조英祖가 고봉高峯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어필御筆로 한권翰圈 2점(二點)을 특별히 더하니 소시召試를 거부拒否하였다. 이에 왕은王恩을 거부拒否했다는 명목名目으로 종성鍾城에 3년간 유배流配된 후 헌납獻納, 사간司諫을 지낸 뒤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하였다. 1780년(정조4년正祖4年)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제수除授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學問에 매진邁進하였다. 국천유고菊泉遺稿 일권一卷이 있으며 추산서원秋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〇 기언정奇彦鼎 : (1716 ~ 1797) 자字는 국진國鎭, 호號는 나와懶窩 또는 양익제兩益齊, 1763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及第하여 1782년(정조 6년正祖 6年)에는 당상관堂上官으로 초자超資되어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으며 청렴하고 강직해서 1786년 대사간大司諫에 발탁拔擢된 뒤, 세 번이나 연임하다가 1792년에는 대사헌大司憲에 취임就任하여 관원官員들의 기강紀綱을 바로잡았다. 1795년에는 다시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성리학性理學에 심취深醉하여 서적書籍을 조석朝夕으로 암송暗誦했으며, 나와집懶窩集 4권이 있다. 시호諡號는 정간靖簡이다.[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광주읍지光州邑誌]
〇 기학경奇學敬 : (1741 ~ 1809) 자字는 중심仲心, 호號는 겸재謙齋. 1783년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797년 문학사文學史에 선정選任되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교정矯正하였다. 1801년 환갑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뒤 곧 정자正字를 거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任命되었다. 이때 국정國政에 관한 칠조소七條疏를 올렸으며, 무장현감茂長縣監을 거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에 이르렀다. 겸재집謙齋集 2권이 있다.[겸재집謙齋集, 호고號考, 문과방목文科榜目]
〇 기닙奇㵊 : (1756 ~ 1830) 자字는 약수若水, 호號는 죽림헌竹林軒이다.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향풍鄕風을 진작振作하고 학문에 정진精進하여 죽림처사竹林處士로 칭송稱頌되었다.[노사집蘆沙集, 장성읍지長城邑誌]
〇 기상익奇象益 : (1757 ~ 1820) 자字는 사겸士謙. 음보蔭補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연기현감燕岐縣監 겸兼 공주진관公州鎭管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지냄.
〇 기재선奇在善 : (1792 ~ 1837) 자字는 경지敬之 호號는 입재立齋. 1822년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으나 출사出仕를 단념斷念하고 성리학性理學에 매진邁進하였다. 노사蘆沙 선생先生의 학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노사선생蘆沙先生 또한 입재立齋 종숙從叔은 나의 스승이라고 하였다. 스승을 자처하지 않았으나 문하門下에 노사蘆沙를 비롯하여 조카侄 기윤진奇允鎭, 기익진奇益鎭, 기기진奇麒鎭, 아들 기봉진奇鳳鎭, 승지承旨 기문현奇文鉉 그리고 사위 민기혁閔麒爀, 김요겸金堯謙 등이 모두 문하에서 수학修學했으며 모두 문과文科 혹은 생원生員이다. 입재집立齋集 1권이 있다.[노사집蘆沙集, 장성읍지長城邑誌]
〇 기정진奇正鎭 : (1798 ~ 1879) 자字는 대중大中, 호號는 노사蘆沙, 시호諡는 문간文簡이다.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이름이 높았다. 독학獨學으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精通하여 조선조朝鮮朝 성리학 육대가六大家의 한 분이다. 1831년 사마양시司馬兩試에 장원壯元하고 강릉康陵·현릉참봉顯陵參奉 주부主簿 등에 유일문사遺逸文士로 임명任命되었으나 출사出仕치 않았다. 1842년 전설사典設司 별제別提에 임명되자 취임 6일 만에 사임辭任하였고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 무장현감茂長縣監,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집의執義, 동부승지同副承旨, 호조참의戶曹參議,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공조참판工曹參判,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모두 출사出仕치 않고 학문學問의 연구硏究에 매진邁進하였다. 선생先生은 퇴계와 율곡(退栗) 이후 근 300년간 계속된 이기理氣의 논쟁論爭을 극복하고 이일분수론理一分殊論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체계哲學體系를 수립하였다. 우주론宇宙論으로부터 인간 본질人間本質의 해명解明,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등 심성心性의 문제問題,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와 선악善惡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일관하여 이기理氣 이원관二元觀을 극복하고, 인간 심성心性과 도덕道德이 가치價値에 있어 우위에 있는 이理의 작용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학문은 현실에 그대로 실천되었으니 위정척사사상爲正斥邪思想이 그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부분의 문인들이 의병義兵과 독립운동獨立運動에 투신하였다. 선생께서는 현실정치現實政治에 참여치 않았으나 임술민란壬戌民亂이 일어나자, 임술의책壬戌擬策으로 삼정三政의 폐단弊端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을 방략方略을 제시하였다.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서양세력西洋勢力의 침투를 염려하여 민족주체성民族主體性 확립의 6대 방안方案을 제시한 병인소丙寅疏를 올렸고,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임명되자 그를 사양하는 두 번째의 병인소丙寅疏를 올렸다. 여기에서는 당시의 국가적國家的 폐습弊習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지도층인 사대부士大夫에게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기풍氣風이 없음을 우려하여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도록 강조하였다. 저서著書로는 노사집蘆沙集 22권과 답문류편答問類編 15권이 있으며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노사집蘆沙集, 노백헌문집老柏軒文集, 송사문집松沙文集,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
〇 기문현奇文鉉 : (1811 ~ 1861) 처음이름은 홍수弘秀, 자字는 우용羽用, 호號는 송대松臺. 노사蘆沙의 문인門人이다. 1844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及第, 기주관記注官, 휘릉별검徽陵別檢,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선전관겸금위영종사관宣傳官兼禁衛營從事官, 충청도사忠淸都事, 웅천현감熊川縣監,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1856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교리校理에 임명되었으며 185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고 은산현감殷山縣監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1860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문집文集으로 송대유고松臺遺稿가 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백석헌집柏石軒集]
〇 기우현奇禹鉉 : (1814 ~ 1891) 처음이름은 경현慶鉉 자字는 명로鳴魯, 방목과 실록에는 경현이며 고종高宗 초기 개명했다. 호號는 수졸당守拙堂. 1850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186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철종실록哲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문과방목文科榜目]
〇 기동교奇東敎 : (1825 ~ 1889) 자字는 자은子殷, 호號는 백남헌白南軒, 1859년에 생원生員, 1884년에 제동몽교관除童蒙敎官을 지냄.
〇 기양연奇陽衍 : (1827 ~ 1896) 처음이름은 행연行衍, 자字는 자민子敏, 호號는 백석헌柏石軒. 재종숙再從叔 노사蘆沙의 문인門人으로 186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전적典籍․정언正言․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1868년에 지평持平, 1869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873년 사복시정司僕寺正, 1878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歷任했으며 이때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일본日本의 침탈侵奪이 강화되자, 삼정책三政策의 상소上疏를 올리고 사임辭任하였다. 이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내려졌으나 출사치出仕 않고 고향에 은거隱居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이 일본군日軍에 의해 좌절되고 일제日帝의 기세氣勢가 강성해지자, 식구들과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노사선생蘆沙先生과 문인들門人과의 문답을 기록한 답문류편答問類編을 간행刊行했으며 백석헌유집柏石軒遺集 2권이 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백석헌유집柏石軒遺集, 덕암유고德巖遺稿, 국조방명록國朝榜名錄]
〇 기홍연奇弘衍 : (1828 ~ 1898) 자字는 경도景道, 호號는 용산龍山, 노사蘆沙의 문인門人으로 경전經典의 훈고訓古와 표기標記에 뛰어났으며 후진 양성後進 養成에 힘썼다. 용산유고龍山遺稿 7권 3책이 있다.[용산유고龍山遺稿, 송사집松沙集]
〇 기기진奇騏鎭 : (1830 ~ 1903) 자字는 원서元瑞, 호號는 삼성三石. 1844년갑진甲辰에 15세의 나이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명필名筆로 이름이 높았다.[사마방목司馬榜目]
〇 기량연奇亮衍 : (1831 ~ 1911) 처음이름은 익연益衍, 자字는 덕수德水, 호號는 사상경수沙上耕叟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 1858년에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하여 1868년 대원군大院君에 의해 무사誣仕로 후릉침랑厚陵寢郞에 제수除授되고 1881년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882년 연풍현감延豊縣監, 정읍현감井邑縣監, 1885년에 통천군수通川郡守에 제수除授되었다가 노친봉양老親奉養을 위해 고향과 가까운 옥구현감沃溝縣監으로 옮겨 제수除授하였으며 겸兼 강릉진관병마절제사江陵鎭管兵馬節制使에 임명任命되었다. 옥구군沃溝에 선정비善政碑가 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〇 기관현奇觀鉉 : (1837 ~ 1914) 자字는 대현大現. 1870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1869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任命되어 사헌부정언司憲府正言을 역임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〇 기우만奇宇萬 : (1846 ~ 1916) 자字는 회일會一, 호號는 송사松沙. 1870년 진사進士로 익릉참봉翼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고(天資英秀)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글을 잘 써서(節義文章)으로 사림士林의 종장宗長이 되었다. 할아버지 노사蘆沙선생의 학통學統을 이었으며 위정척사사상爲正斥邪思想을 잘 받아드려서 이를 바탕으로 더욱 깊이 있게 발전(傳受深化)시켰다. 을미왜변乙未倭變에 기삼연奇參衍, 기동준奇東準, 고광욱高光昫 등과 더불어 토왜복수討倭復讐를 기치로 창의昌義하였다. 황제의 명皇命으로 해산解散하였다가 다시 거병擧兵한 후 왜군倭軍에 체포逮捕되어 1871년까지 옥고獄苦를 치렀다. 1907년 순천順天 조계산曹溪山에서 거병擧兵을 도모圖謀하던 중 고종황제高宗皇帝의 강제퇴위强制退位에 망북통곡望北痛哭 후 해산解散하고 은둔생활隱遁生活을 하였다.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이 추서追敍되었으며 유작遺著으로는 송사집松沙集 25권이 있다. 장성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송사집松沙集, 한국독립사金承學,1965,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動史資料集]
〇 기우승奇宇承 : (1858 ~ 1907) 자字는 효술孝述 호號는 보산普山. 노사蘆沙 문인門人이다. 외필猥筆로 기호사림畿湖士林이 분분紛紛하자 기우만奇宇萬, 기재奇宰 등과 외필변猥筆辯을 통해 이를 잠재웠다. 일본상인日本商人의 침탈侵奪에 항거抗拒하여 조선朝鮮 상인商人을 선동煽動하였다는 죄목罪目으로 일본군日本軍에 체포逮捕되어 투옥投獄되기도 하였다. 성리학性理學에 심오深奧하였으며 문집文集으로 보산유고普山遺稿 2권이 있다.[식재집植齋集, 보산유고普山遺稿, 장성읍지長城邑誌]
〇 기삼연奇參衍 : (1851 ~ 1908) 자字는 경로景魯, 호號는 성재省齋이며 백마장군白馬將軍으로 세상에서 불리어졌다. 초서草書를 잘 쓰는 명필名筆이다. 을미왜변乙未倭變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같이 광산光山에서 토왜복수의병討倭復讐義兵을 일으켜 투옥投獄되었다가 탈출脫出하였다. 군대해산軍隊解散 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됨에 장성長城 수련산隨緣山 석수암石水庵에서 창의唱義하여 호남湖南 전역全域에서 수만數萬의 의병義兵을 모아 호남창의영수湖南倡義領袖에 추대推戴되어 장성長城, 고창高敞, 영광靈光, 부안扶安, 정읍井邑, 함평咸平, 담양潭陽 등지等地에서 일본군日本軍을 격파擊破하여 큰 전과戰果를 올렸다. 1907년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패하여 부상負傷하고 순창군淳昌 복흥면福興에서 일본군日本軍에 체포逮捕되어 1908년 1월 2일 광주 서천교西川橋 백사장白沙場에서 순국殉國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이 추서追敍되었다. 공의 창의倡義에 대한 자료資料를 모은 창의록唱義錄 일권一卷이 있고 일부 유문遺文과 관련기록關聯記錄을 모은 호남창의영수湖南倡義領袖 성재기삼연선생전省齋奇參衍先生傳이 간행刊行되었다. 진안鎭安 이산사駬山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장성 長城 공원公園에 순국비殉國碑가 세워졌다. [호남의병장열전湖南義兵將列傳,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항일의병장열전抗日義兵將列傳]
〇 기재奇宰 : (1854 ~ 1921) 자字는 입부立夫, 호號는 식재植齊. 노사蘆沙선생의 문인門人으로 외필猥筆로 기호사림畿湖士林이 분분紛紛하자 족형族兄 기우승奇宇承, 기우만奇宇萬과 논변論辯하여 진정鎭靜시켰다. 1895년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의병義兵에 참여參與하였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당대當代 8대문장(8大文章)으로 일컬어졌다. 경세관經世觀이 투철하여 농병병행책農兵竝行策과 빈부격차貧富隔差의 완화緩和 등에 대한 많은 방안方案을 제시提示하였다. 식재집植齊集 6권 3책이 있다.[식재집植齊集]
〇 기동준奇東準 : (1860 ~ 1918) 자字는 평화平和, 호號는 춘담春潭. 1894년 진사進士에 입격入格. 학행學行이 세상에 알려졌고 을미토왜복수乙未討倭復讐 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같이 의거義擧하였다. 춘담문집春潭文集 10권 5책이 있다.
〇 기동연奇東衍 : (1863 ~ 1950) 자字는 지일之日, 호號는 소석小石. 법학法學에 정통精通하여 구한말舊韓末 법부주사法部主事로 판사判事, 검사檢事를 역임歷任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국무원령臨時政府國務院令 1호號로 공포된 연통제聯通制의 전라남도督辦全羅南道 독판督辦으로 임시정부臨時政府의 비밀행정조직秘密行政組織을 구축構築하고 독립자금獨立資金을 모집募集하였다. [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動史資料輯, 두산백과사전]
〇 기산도奇山度 : (1878~1926) 다른 이름은 경慶 또는 산도山濤, 자字는 자인子仁. 1905년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암살暗殺하려다 미수未遂에 그쳤고, 1906년 을사오적乙巳五賊 가운데 하나인 군부대신軍部大臣 이근택李根澤을 자저自邸에서 난자亂刺하여 민족民族의 의분義奮을 분출噴出한 후 옥고獄苦를 치르고 고문拷問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다. 1919년 삼일운동三一運動 뒤에는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군자금軍資金을 모금募金하여 납부納付하다 체포逮捕되어 또 옥고獄苦를 치른 뒤 유랑생활流浪生活을 하다 장흥長興에서 병사病歿하였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에 추서追書. 전남全南 장흥군高興郡 당오리堂烏里에 의사기념비義士紀念碑가 있다.[騎驢隨筆, 獨立運動史, 高等警察要史]
〇 기우증奇宇增 : (1885~1969) 자字는 원경元景. 교육감敎育監을 지냈다.
〇 기성도奇成度 : (1896~?) 1942년 행주기씨대종중 창립하고 일생을 대종중총무이사로 봉사하며 원당 도선산의 정무공 산소와 후손의 묘를 정화했다. 1966년 해주산성내에 행주기씨유허비를 건립하였다.
〇 기우홍奇宇洪 : (1904~1969) 경성법전京城法專을 수료修了. 서울중앙우체국장中央郵遞局長과 광주체신청장光州遞信廳長을지냄. 록조근정훈장綠條勤政勳章을 받음
〇 기용숙奇龍肅 : (1905~1974) 의학박사. 황해도 송화군에서 출생. 1925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미생물학 교수로 재임 중 면역학분야 발전에 끼친 공로로 1968년 대한민국학술원상과 1970년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받았다.
〇 기석복奇石福 : 1913년 11월 3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다. 1941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종합대학 어문학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사마르칸트주 빼쓰트 다르곰쓰크 구역 고중 교장에 임명되어 1945년 8월까지 근무했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다음에는 1945년 12월, 허가이, 방학세, 박의완, 강상호, 김열, 김승화, 김찬 등과 함께 북한으로 파견, 조선인민군의 창건에 참여했다. 1947년, 소장 계급으로 군사정치학교 교장에 임명되어 1948년 1월까지 근무했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고 로동신문과 근로자 책임주필에 임명되었다. 1950년 11월, 문화선전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외무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1955년 4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육군중장으로 승진, 부교장에 임명되었다. 1956년 1월 18일,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박창옥, 박영빈, 정률, 전동혁 등과 함께 숙청되어 문화선전부상에서 해임되는 한편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었다. 또한, 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도 쫓겨났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 탈락했다. 이후 공화국 도서출판사 사장으로 좌천됐으나 공포에 질려서 도무지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8월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에게 찍힌 사람들이 참혹하게 죽는 것을 보고 모든 희망을 버리고 아들들을 데리고 1957년 11월에 북한을 떠났다. 이후 우즈베키스탄공산당으로 파견되어 타슈켄트에 있는 중앙당학교에서 4년간 공부하였다. 이후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의 타슈켄트 주재 기자부 부장으로 배치되었다. 1959년 3월에 사마르칸트대학 동창인 샤로프 라시도프가 우즈베키스탄공산당 제1서기가 되면서 이후에는 말년에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으며 공훈문화일군 칭호도 받았다. 이후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의 삶을 적극 취재하면서 그 유명한 김병화를 알린 것도 그였다. 이후 1979년 10월에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김규범 2019. 1956년 [8월전원회의 사건]재론 : 김일성의 인사정책과 ‘이이제이’식 용인술. 현대북한연구, 223.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서울: 경인문화사, 2006. 조수룡 2017. 전후 북한에서의 소련계 숙청과 국적 문제1954~1958. 동북아역사논총 56.]
〇 기세훈奇世勳 : (1914년 ~ 2015-2월-22) 일본 와세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42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49년 광주지검 차장검사로 재직하다가 서울지방법원, 광주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를 했다. 1954년부터 10여년간 역임한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서울가정법원장, 청주지방법원장, 법원 인사위원장을 지내고 광주고등법원장에 재직 중이던 1969년 9월 2일 서울고등법원장에 임명되어 1971년 신설되는 사법연수원장을 겸직하여 1973년까지 재직했다. 서울고등법원장에 재직할 때 정권에 밉보인 소속 판사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후 전국 153명의 판사가 집단사표를 내는 사법파동이 있었다. 민복기 대법원장에게 비장한 각오로 사법파동 해결 대책을 마련하라고 말하면서 서울고등법원 전체 법관 명의로 사법권수호 결의문을 전달했다가 1973년 법관 발령에서 대법원 판사 8명과 함께 의원면직됐다. 서울고등법원장을 마치고 1973년 서울동부합동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 개업하였다. 서울가정법원장으로 재직하던 1966년 6월 2일에 7세의 소녀를 죽인 12세의 소녀가 아동보호소에 보호 조치되었다가 탈출하여 사회문제가 되자 현행법상으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제일 좋은 방법은 부모가 책임지고 선도해야 할 것이다고 했다. 1968년 2월 24일에는 대법원에 의해 주재황 대법원 판사, 강안희 서울형사지방법원장과 함께 법원측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에 지명됐다. 재경 전남향우회 회장과 고봉학원 이사장을 맡았으며 고봉의 문집과 번역이라는 4권짜리 성리학 이론서를 펴내고 선조 때부터 내려온 광주시 소재 고택 애일당愛日堂에 학술원을 열고 학술지인 [전통과 현실]을 펴내며 고봉의 학문에 대해 연구했다. 특히 고봉 기대승 문집 11책 1질을 다른 후손들과 함께 1971년 1월에 발간하였다. 1968년 5월 24일에 한국부인회가 보건사회부 후원으로 여성회관 강당에서 개최한 관혼상제 개선방안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혼인에 대한 개선 방안을 주제로 강연하면서 혼수 준비나 결혼식에는 최소한의 비용만 들이고 나머지 돈으로 신혼 부부가 살면서 고난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예금, 적금 통장이나 주권 등을 선물하는 실질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서울고등법원장에 재직하던 1971년 7월 24일에 산악 전문지 산 독자들로 구성된 울릉도 성인봉 등반대회에 참가했으며 1972년 2월 3일에 KBS 신혼 만세라는 프로그램에 배우자와 함께 출연하여 약혼 시절의 재미있는 경험을 털어놨다. 인촌기념사업회가 1989년 12월 27일에 이희승 후임 이사장에 선출했으며 대한변호사협회가 개최한 제7회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대회가 열린 1995년 8월 11일에 국선변호를 통한 형사 피고인의 인권 옹호에 앞장서고 무료변론, 무료법률상담 등 서민의 권리구제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제7회 한국법률문화상을 받았으며 법조인은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구도자라면서 권력이나 어떤 물질적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하면서 법조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행합일이라며 후배들도 인권수호와 정의구현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전남대학교는 1997년 2월에 초대 법대학장을 지내며 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변호사 개업 후에는 무료변론과 장학사업을 하는 등 사회에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〇 기창덕奇昌德 : (1924~2000) 황해도에서 태어나 1948년 서울대 치대를 졸업하고 1960년대 가톨릭의대 치과학과장을 지낸 뒤 1967년부터 종로구 필운동에서 기치과의원을 운영했다. 엘마 베스트 상, 국민훈장 모란장1995년, 자랑스런 서울대인1998년 등을 수상했다. 저서는 [한국근대의학교육사1995년]
〇 기형도奇亨度 : (1960 ~1989) 황해도에서 월남한 집안에서 경기도 옹진군에서 출생하였다, 1985년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기자를 지내며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대학생 때 이미 연세춘추가 제정한 윤동주문학상과 박영준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라는 시로 당선되어 공식으로 시인이 되었다. 80년대 후반 참여시가 주류를 이루던 때임에도 내면적이고 비의적이며 우화적인 시를 발표하였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첫 번째 시집을 준비하던 중 서울 종로의 파고다 극장에서 숨진채 발견되었다. 죽은 원인은 뇌졸중으로 추정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첫 번째 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은 마지막이자 유고시집이 되고었다. 산문집으로 [짧은 여행의 기록.1990]이 있고, 미발표 시 16편과 동료문인들의 소설과 시, 그리고 평론을 담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1995]가 간행되었고, 시인10주기를 맞아 시인의 작품을 모두 모아 1999년에 [기형도전집;문학과 지성사]이 간행되었다. 시들은 유년시절의 가난, 사랑의 상실, 부조리한 현실의 폭력,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物化된 인간의 모습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대체로 절망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1990년대의 가장 영향력이 큰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평가는 찬사가 더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