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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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선생이 19살에 자기 생을 뒤돌아보며 지은글
자경설自警說
고인古人들은 모두가 과거의 허물을 자책하여 스스로 경계하였으니, 이는 과거의 실수를 마음 아프게 여기고 앞으로 잘하겠다는 생각을 일으키려고 해서이다. 이는 모두 성인聖人과 현사賢士들이 뜻을 붙여 공부하던 것인데, 나만 어찌 유독 그러하지 않겠는가. 가영歌詠하던 나머지 아득히 19년 전의 일을 멀리 생각해 본다.
나는 가정嘉靖 정해년(1527, 중종22)에 태어났으니, 곧 대행왕大行王(중종)22년이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할머니를 여의고 이갈이를 할 무렵에 어머니를 여의고서 오직 아버지만을 의지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고생하시면서 나를 길러 주셨는데, 나는 어려서부터 질병이 많아 죽다가 살아나곤 하였다. 이제 와서 아련히 그때 일을 생각하니, 비통함이 하늘에 사무친다. 아,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가끔 소싯적 일을 생각해 보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한두 가지 생각나는 것도 있다.
계사년(1533)에 비로소 가정에서 수학하였다. 이듬해인 갑오년(1534) 초가을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이로 인해 결연히 학업을 내팽개치고 더 이상 학문을 일삼지 않았으며, 아버지께서도 막 상喪을 당한 터라 가르치지 않으셨다.
을미년(1535)에 효경孝經을 읽고 글씨를 배웠으며, 또 소학小學을 외우기도 하여 거의 자포자기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고 귀신 역시 무정하여 병신년(1536) 겨울에 작은누이가 역질로 죽었다. 아버지께서는 환난과 재앙이 거듭 미침으로 인해 산의 절로 피해 가 계셨으므로 나 또한 따라가서 글을 읽고 글씨도 익혀 자못 학업이 진전될 가망이 있었다.
병신년 겨울부터 정유년(1537) 가을까지 아버지께서 절에 계시다가 늦가을에 서울에 가실 일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서울에 가신 뒤 나는 집에 있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10월 초에 스스로 분발하여 서당에 가서 대학을 다 배우고 이어 한서漢書와 한유韓愈의 문장을 읽으니, 그해가 벌써 저물었다. 따라서 집에 내려와 근친覲親한 다음 다시 올라가서 맹자와 중용을 읽었으며, 늘 동료들과 더불어 연구聯句를 짓거나 문장을 짓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공부에 소질이 있다고 하였다. 고문진보 전집前集을 읽고 또 고부古賦를 읽고는 끊이지 않고 줄줄 외웠는데, 그때가 무술년(1538, 중종33)이었다.
이 당시 내 외조부(강영수)의 첩인 외조모께서 가문의 어른으로서 항상 여러 손자들을 어여삐 돌보셨다. 나의 어머니께서 어릴 적에 일찍이 그 집에서 자랐고 나의 형(기대림)도 그 집에서 자랐는데, 우리들이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매우 극진하게 돌보아 주셨다. 연세가 팔순이 넘었는데도 청력이나 시력이 조금도 감퇴하지 않았다. 항상 나를 어루만지며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이니 열심히 글을 읽으라!] 하셨는데, 그해 봄에 별세하였다. 집안에 화(家禍)가 갑자기 닥치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고문진보 후집을 수백 번 읽고 나니 때는 7월이었다. 그대로 이듬해 10월까지 읽어 마치고 나니, 기해년(1539)이었다.
이때 선배들이 감시監試를 보기 위해 서당에 모여 글을 읽고 문장을 짓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나도 따라 배웠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가송歌誦은 시속을 따르지 않았고 시부詩賦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 비록 법도에 맞지는 않았지만, 더러 글을 잘 짓는다고 칭찬한 사람도 있었다. 10월 그믐께 아버지께 사략史略을 배우기 시작하여 3개월에 걸쳐 끝내고 나니, 해는 경자년(1540)이요 달은 1월이었다.
그 후 차츰차츰 우매함이 트이고 학업이 진전되었다. 이어서 논어論語를 수학하여 가을에 끝마쳤다. 이해 봄에 외숙부께서 문과에 급제하여 가을에 성묘를 하러 이곳에 오셔서는 내가 닦은 학업을 살피시고 당시 배우고 있던 것을 강론하시면서 나에게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고 면려하셨다. 그러자 서울의 친척들이 내가 장차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내가 저술한 글들을 요구하였으므로 나는 즉시 글을 다 모아서 친척들에게 부쳐 주었다. 이 때문에 나의 상자 속에는 그전에 지었던 초고草稿가 없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는 서전書傳을 읽어 모두 외웠다.
이듬해 가을에는 시전詩傳을 읽고 이어 주역周易을 읽었다. 경자년(1540, 중종35)부터 신축년(1541)까지 8개월 동안과 신축년부터 임인년(1542) 봄까지 10개월 동안을 합해서 계산하면 달로는 18개월이요, 햇수로는 1년 반쯤 되는데, 그동안 뜻이 해이해지고 성질이 나태해져서 입으로 읊지도 않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않은 시간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비록 가끔씩 분발하려는 기분을 가져 보기도 했지만 상황이 도와주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아버지께서 내가 조금 아는 것이 있다고 하여 항상 수강授講을 엄하게 하지 않으시고 훈계하고 권장하는 일도 소홀히 하셨으며, 때로 방탕하게 노는 일이 있어도 심히 책망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내 안일하게 지낼 수 있다고 여겨, 그 결과 나이가 들수록 학문은 더욱 떨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뜻은 더욱 해이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소득이 없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신축년(1541) 봄에는 외종조모外從祖母를 곡哭하였다. 외종조모께서는 항상 우리 어머니를 양녀로 삼아 오시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우리를 자식처럼 여겨서, 추울까 염려하여 옷을 입히시고 주릴까 염려하여 밥을 먹여 주셨다. 어린 내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오직 외종조모가 내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때 이르러 별세하여 영원히 이 세상을 하직하셨으니, 이 원통함이 어찌 다하겠는가. 하늘이여, 귀신이여! 몇 해 전에는 우리 어머니를 빼앗아 가고 이제는 또 우리 외종조모를 빼앗아 가니, 하늘이여, 귀신이여! 한결같이 어쩌면 나에게 이처럼 모진 고초를 내린단 말인가! 아버지를 수발하여 봉양하는 일로부터 많은 식구들과 어머니 여읜 우리 두 형제에 이르기까지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옷이 해지거나 하면 어디서 도움 받아 구할 것이며, 제쳐 두고 거행하지 않은 뒷일은 누구에게 고할 것이며, 어리석고 용렬한 노비들은 누구에게 명령을 받아 일을 한단 말인가! 밤낮으로 묻고 배우며 출세하기를 바라던 것도 이제는 영화롭게 봉양하는 데 쓸모가 없게 되고 말았으니,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이해 늦봄에 모두 130구句가 되는 서경부西京賦를 지었다. 용산龍山(정즐鄭騭)이 평론하기를 [그 글을 읽어 보면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있으니, 그 명성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퍼지겠다. 생각이 심원하고 기상이 장대하며, 어조가 고상하고 문장이 통창하다. 비록 간간이 서투르고 껄끄러운 데가 있기는 하나 단지 이것은 조그마한 흠일 뿐이다. 조금만 더 진취하면 곧 옛 작자作者의 경지에 이를 것인데, 더구나 그 밖의 과문科文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축하할 뿐이다.] 하였다. 여름에는 서정부西征賦를 차운次韻했는데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이듬해 봄에는 가을에 과거를 보리란 기대를 갖고 시험 삼아 시부를 지어 보았다. 그러나 학문을 한 것이 보잘것없고 생각이 꽉 막혀서 끝내 편篇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슬퍼하기를 [나는 다행히 세상에 태어나 두 가지 낙樂을 얻었으니, 질병과 가난에 대한 걱정도 없고 농사짓는 수고로움도 없다. 그런데도 포기한 채 학문을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일삼을 것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개탄스러워 말을 하지 못했다. 며칠 뒤 선배들이 서당에 모였다는 말을 듣고 나도 가서 어울렸지만, 거기서도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다. 한번은 조정몽주부吊鄭夢周賦를 지어 보았는데 이때는 붓끝이 저절로 막힘이 없었으니, 끝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5월에는 제생諸生들이 모두 돌아갔으므로 나 또한 집에 내려와 매일 부지런히 하여 날마다 한 번 읊을 때마다 고부古賦 10여 수를 온습溫習하고는 시험 삼아 의정부부議政府賦와 고소대부姑蘇臺賦 총 100여 구를 지어 보았는데, 그제야 비로소 옛날에 배웠던 것을 회복하여 거의 학업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기대하게 되었다.
가을에 시험에 응시했으나 끝내 이룬 것이 없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지기志氣가 쇠퇴하여 끝내 개연히 분발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대학 한 책만 끼고 어영부영 한 해를 마쳤다. 그 후 파방罷榜되었다는 기별을 듣고는 열흘 동안 산사에서 원부元賦 가운데 초抄한 것을 외웠다. 그러나 하해河海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한갓 근원 없이 두절된 연못가에서 머뭇거리며 큰 바다에 나아가지 못하여 소견이 커지지 못했으니, 아무리 속을 태우고 오래 생각을 해 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떤 직무에 종사도 해봤지만 역시 남에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의의疑義를 지은 것이 매우 좋아 사람들이 모두 허여하였으므로 일득一得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끝내 얻지 못했으니,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책을 싸 들고 산재山齋로 갔으니, 때는 벌써 초여름이었다. 목사牧使 이공 홍간李公弘幹이 제생들을 불러 모아 학교에서 강의를 하였으므로 나도 찾아가서 함께 어울리며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는 6월 그믐에 파접罷接하고 돌아왔다. 그 후 8월 초하루에는 목사가 다시 생도 10여 명을 모아 놓고 소학을 강의하였으므로 나도 거기에 끼었다. 그로 인하여 교적校籍에 이름을 올리고 분주히 맡은 직분을 수행하였는데, 길이 또 매우 멀고 험해 한 번 출입할 때마다 4, 5일씩 쉬는 바람에 학업이 폐해지고 뜻이 해이해졌으니, 그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오가는 가운데 홀연히 세모歲暮를 만났으니, [세월은 말 위에서 다 보내고, 시서는 상자 속에 쟁여 두었다[日月馬上過 詩書篋中藏]]고 한 옛사람의 말이 꼭 맞는 말이라 하겠다.
다음 해 갑진년(1544)에 목사 송공순宋公純이 유생 가운데 더 배우기를 청한 자들을 선발하여 글을 강송講誦하도록 하고, 반드시 그 강송하기 시작한 때를 기록하여 기간이 오래되었으면 곧 학업이 얼마나 성취되었는지 심사하곤 하였다. 나는 이로 인해 맹자를 읽어 3월 그믐에 끝내고 한유韓愈의 글을 읽었다. 4월 보름에는 용산龍山 선생을 찾아뵈었다. 5월에 장차 도회都會에 가려고 선생을 뵈었더니, 선생께서 민암부民嵒賦를 지으라고 명하셨다. 부를 다 짓자 선생께서는 자주 칭찬하셨다. 한유의 글은 제문祭文까지 읽고 돌아왔는데, 5월도 이미 그믐이 되었다. 6월에 도회에 갔다가 그믐에 집으로 돌아왔다. 초가을에는 재차 용산 선생께 가서 또 한유의 글을 읽다가 보름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달부터 8월 말까지는 더위에 지친 나머지 마냥 누워 책상만 마주하였을 뿐이다. 9월 초에는 용산 선생께 가서 문선文選을 강습하다가 열흘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10월 초하루에 또 용산 선생께 가서 상서商書의 대문大文을 읽다가 1, 2권도 못다 읽고 돌아오니 그때가 이미 16일이었다. 세월이 하도 빨리 흘러 또 세모를 만났다. 머리 돌려 천지를 바라보매 해는 곧 지려고 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처음에는 수년 이래로 게으르고 방탕함이 고질이 되어 학업은 진취되지 못하고 나이만 많아진다고 여겨 매우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겨울철이나마 학업을 부지런히 닦으려니 하였으나 입지立志가 견고하지 못하고 습관을 제거하지 못하여 헛되이 세월만 보냈을 뿐이다.
아, 내가 태어난 해의 1월 1일이 기묘일이었는데 지금 벌써 110번째의 기묘일을 맞게 되었다. 유학儒學을 공부한 날도 꽤 오래되었고 세상에 태어난 지도 적지 않은 햇수가 되었건만 포기해 버리고는 성립할 것을 미처 꾀하지 못했으니 심하다, 나의 무지함이여! 역시 좋은 쪽으로 변화하지 못한 것이로다. 돌이켜 생각하니 참으로 분하고 가슴 아프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 슬프고 괴로운 나머지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때를 헤아리고 자신을 헤아려 보니, 슬픔이 가슴에 가득하여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지나간 일들을 편차編次하여 행해 온 일들이 어떠했는가를 추적해서 한편으로는 경계를 하고 한편으로는 권면을 하고, 또 스스로 좋지 않은 때에 내가 태어났음을 슬퍼하는 바이다.
아마도 이 말들은 모두가 지난날의 사소한 일로서 과실을 경계하고 공부에 진취하지 못했던 일에 관한 것이니, 대체로 기억하여 잊지 않으면 되지 언외言外의 의미는 논할 바가 아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를 항상 나의 이목耳目에 접하게 하여 옛날의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고 지금의 성취 없음을 돌아보면서 개연히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감발하고 격려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밖의 일의 내용에 대해서는 생각은 빤하지만 글로 옮기기는 참으로 쉽지 않아 마침내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고봉 선생의 행장과 시장을 합친 전기
선생의 이름은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 성은 기씨奇氏, 관향은 행주幸州이다. 행주에 고봉속현高峯屬縣이 있어서 이 때문에 자호를 고봉高峯이라 하였다.
기씨는 고려조에 무예武藝로 입신하여 장상將相을 지낸 이가 퍽 많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이름 면勉이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이분이 이름 건虔을 낳았는데 세종조에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고, 문종 말년에 연세 50세가 채 안 되어 벼슬에서 물러나셨다. 세조가 즉위한 뒤 권람權擥을 시켜 다시 나오도록 강요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고 돌아가셨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이분이 선생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이름 축軸은 풍저창부사豐儲倉副使를 지내고 승정원좌승지丞政院左丞旨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이름 찬襸은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이름 진進은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아우가 죄를 입은 뒤부터 세상일에 마음을 끊고 광주光州의 고룡향古龍鄕에 은거하였다. 대신大臣의 천거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감사함을 인사하고 취임은 하지 않았다. 뒤에 선생이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면서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덕성군德城君에 봉해졌다. 부인 진주강씨晉州姜氏는 사과司果 이름 영수永壽의 따님이요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증손녀인데, 가정嘉靖 정해년(1527, 중종22) 11월 18일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겨우 이를 갈 나이가 지나자 성인처럼 의젓하였다. 7세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는데,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서 쉬지 않고 글을 읽었다. 누가 혹 위로 삼아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저는 스스로 이것을 즐깁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사람들이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애통하게 울었다.
조금 장성하여 선생은 집에서 공부를 하면 방해되는 점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마침내 향숙鄕塾에 나아가 글을 읽되 날마다 과정課程을 두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또 한가한 날에는 육갑六甲이 쇠락하고 왕성해지는 이치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대략 통달하였다. 한번은 어떤 손님이 연구聯句를 가지고 선생을 시험하려고 식食 자를 들어 시제詩題를 냈다. 이에 선생이 즉시 응수하여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食無求飽君子道)] 라고 읊었다. 그러자 손님은 한참이나 칭찬하다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너의 작은 아버지 덕양공德陽公(기준奇遵)이 도덕과 문장으로 사림士林의 영수였는데, 그 가업을 이을 사람이 바로 너로구나.]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아버지께서 훈계한 말들을 손수 기록하여 조그만 책자로 만들고 스스로 펼쳐 보면서, [내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훈계를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꽤 진취된 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질이 평범하여 여전히 거치니, 이 일을 생각하면 늘 스스로 송구스러워진다. 일찍이 듣건대 옛사람에게는 문견록聞見錄이 있었다 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때에 따라 기록하는 책을 두어 잊어버릴 것에 대비해야 한다.] 하였다. 이로부터 자신을 수양하는 위기爲己의 학문에만 전념하여 세속에서 익히는 과거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엔 마음을 두지 않았다.
갑진년(1544)에 중종中宗이 승하하자 공은 벼슬도 아직 없고 관례도 올리지 않은 몸으로 곡림哭臨하고 소식素食하였으며, 졸곡卒哭에 이르러서야 그만두었다. 인종仁宗의 초상 때도 이렇게 하였다.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사림의 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물리치고 문을 굳게 닫은 채 밖에 나오지 않았다.
기유년(1549)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 두 시험에 모두 입격해 약관의 나이에 벌써 이름이 사림에 드러났다. 문장文章이 과거장을 휩쓸었기에 윤원형尹元衡이 공을 꺼리던 중에 공의 시권試卷이 높은 등급에 들어갈 것을 알고 고의로 떨어뜨려 버렸다. 그러나 공 또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을묘년(1555)에 아버지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이 무렵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와 배우는 이가 매우 많았다.
무오년(1558)에 여묘살이 3년을 마치고 32세에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문과文科의 을과乙科 제1명第一名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마침 퇴계 선생이 소명을 받고 서울에 와 계시던 때라 선생에게 나아가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한 논변이 있었다. 뒷날 퇴계가 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오년에 서울에 들어간 것은 매우 낭패스러운 길이었지만, 오히려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우리 명언明彦(기대승)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신유년(1561) 여름, 천거로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대교待敎를 거쳐 봉교奉敎에 올랐다. 이때 휴가를 얻어 남중南中에 내려와 있었는데, 빨리 서울로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교지가 있었다.
계해년(1563)에 승정원주서丞政院注書에 제수되었다. 잠시 후 병으로 그만두고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겨 호당湖堂(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문吏文에 대한 고과가 중中을 맞았다는 이유로 다시 그만두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이에 앞서 윤원형이 국정을 도맡아 하면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명종 말기에 그 세력을 꺾기 위해 이량李樑을 등용하여 견제하였다. 그러나 이량이 다시 인척姻戚 관계를 믿고 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공은 당대의 명류名流인 윤두수尹斗壽 형제,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 등과 더불어 올바른 논의를 주장하는 인물들을 극력 끌어들였다. 그러자 이량이 자기와 뜻을 달리하여 선생이 한 번도 사적으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생을 미워한 나머지 붕당朋黨으로 지목하여 사헌부를 사주해서 [사론을 가탁하여 조정을 비난한다.(假托士論 謗訕朝政)]고 지목하여 선생을 논핵하게 하고 관직을 삭탈하여 밖으로 축출했다. 사림의 화가 막 일어나려 하매 온 나라가 크게 경악하였는데, 수일 후에 옥당玉堂의 4촌형 기대항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자 명종이 크게 깨달아 이량 등을 찬출竄黜하고 공을 다시 서용하여 사관으로 삼았다. 공은 이어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승진되어 선생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국가의 안위는 재상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책임은 경연에 있으니, 경연의 소중함이 재상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임금의 덕이 성취된 다음에야 훌륭한 재상의 그릇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서 임용할 수 있을 터이니, 그렇다면 경연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지금 전하의 성덕聖德이 일찍 성취되시어 성리학에 마음을 두고 계신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경연에 나오신다면 나날이 진보하고 성취하실 것이니, 어찌 크나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아뢰었다. 또 언로言路를 개방하고 충직한 간언을 잘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반복하여 진술하였다,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로부터 사림이 공을 존숭하였고 명종과 선조 연간에 조정이 다시 바르게 되었다.
갑자년(1564, 명종19)에 병 때문에 홍문관의 직책을 그만두었다. 성균관 전적과 병조좌랑에 제수되었고, 병조를 거쳐 이조정랑에 옮겨졌으나 휴가를 요청하여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예조 정랑에 옮겨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며 취임하지 않으니, 계속해서 교리校理와 헌납獻納을 제수하며 조정으로 불렀다. 선생은 본디 한가히 지내면서 학문에 모든 힘을 쏟으려 하였으나, 병인년(1566) 10월 한 달 동안 은혜로운 명이 여러차례 내렸기 때문에 애써 일어나 나아갔다. 올라가는 도중에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에 제수되고 이어 관례대로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다.
정묘년(1567)에 장령掌令으로 옮겨졌다가 곧 사예司藝로 그만두었으며, 다시 사인과 장령에 제수되었다.
명종明宗이 승하하고 선조宣祖가 즉위한 후 정묘년 5월에 명에서 조사詔使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선생은 홍문관 응교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관서關西에 갔다. 이때 두 조사는 모두 지나의 이름있는 유학자로 가끔 어려운 질문을 하였는데, 원접사가 일체 선생에게 대답하도록 맡겨버리므로 선생은 답을 모두 타당하게 해냈다. 조정에 돌아오자 집의執義에 제수되었다. 조강朝講을 인하여 진계進啓하기를 천하의 일에는 반드시 시비가 있는 것이니, 시비가 밝지 못하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아 정사政事가 전도되는 것입니다. 과거 중종 초기에 조광조趙光祖가 끊어진 도학을 제창하여 밝혀서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 시대처럼 만드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었는데 불행하게 간악한 소인들의 모함을 입고 귀양가서 죽기까지 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사림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광조의 학문은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전해받았고, 굉필은 김종직(金宗直)에게서 전해받았으며, 종직은 정몽주(鄭夢周)를 사법(師法)으로 삼았으니, 그 연원(淵源)의 유래한 바가 바르고 순수하여 하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언적(李彦迪)은 한때의 명유(名儒)로 억울하게 죄를 입어 멀리 서쪽 변방에 귀양가서 죽었습니다. 이상의 두 선비는 이름이 죄적(罪籍)에 들어 있는 채 오래도록 신설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명(聖明)께서 즉위하시어 그 사정을 밝게 아셨을 터이니, 의당 먼저 그들을 표창하여 존숭하소서. 그렇게 하면 국시(國是)가 정해지고 인심이 복종할 것이니, 선조(先祖) 때 있었던 일이라 핑계대고 유난(留難)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여기에 대한 사실은 논사록(論思錄) 가운데 자세히 실려 있다. 이날 전한 겸 예문관응교에 제수되었다. 이때 대신이 대원군(大院君)의 사묘(私廟)에 치제(致祭)할 것을 헌의하였으므로,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상께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셨으니, 대통은 중하고 사친(私親)은 경하므로, 예에 있어 의당 압존(壓尊)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를 초월해서 치제하는 것은 극히 온당치 않으니, 의당 예관을 시켜 십분 예를 강구해서 반드시 예에 부합되어 조금의 부족함도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무진년에 직제학 겸 교서관판교(直提學兼校書館判校)에 제소되었고, 이윽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승정원에 들어가서 동부승지를 거쳐 우승지에 이르러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다시 대사성과 대사간을 각각 두 번씩 제수받았다. 경오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남쪽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소명(召命)이 이른 것을 인하여 수백 언(數百言)의 상소를 올려, 고질 때문에 벼슬할 수 없다는 뜻을 진술하였다. 그리고는 청량봉(淸涼峯) 아래 나아가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귀전(歸全)’이라 호칭하고 거기서 여생을 마치기로 계획하였다. 그래서 그 후 누차 부제학ㆍ이조 참의ㆍ대사성 등의 관직으로 불렀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 후 조정이 마침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천조(天朝)에 주청(奏請)하고자 선생을 발탁하여 주청의 일을 맡기려고 하므로, 선생은 마지못하여 병을 무릅쓰고 명에 응해, 공조 참의와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봉직하지 못하고 남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였다. 선생이 남으로 향해 출발하던 날, 한때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한강(漢江)까지 나와 전송하였는데, 이때 배[舟] 안에 앉았던 한 객이 선생에게 묻기를 "사대부가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며 처신하는 데 있어 끝까지 가져 지켜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자, 선생이 답하기를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에 충분히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소." 하였으니, 그 뜻은 대체로 군자가 출처하는 데 있어서는 의당 먼저 그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그러지지 않게 해야 하고, 다시 시세(時勢)를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애야 하며, 마침내는 선도(善道)를 죽기로써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었는데, 들은 자들은 탄복하였다. 선생은 중도에서 병을 얻어 우선 며느리의 친정 아버지가 되는 고부(古阜) 김점(金坫)의 집에 들어갔는데,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곁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명이 길고 짧은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다만 학문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여 뜻만 가진 채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약을 드려도 먹지 않고 가사(家事)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은 채, 밤 4경(更)에 운명하니, 향년 46세였다. 상 께서는 선생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내의(內醫)를 보내 약을 가지고 가서 병을 보살피게 하였으나, 내의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태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상께서는 대단히 애도하고 별치부(別致賻)를 내렸다. 그리고 경중(京中)의 사서인(士庶人)들은 남산(南山) 밑 선생의 옛 우사(寓舍)에 모여 곡하고 모두 탄식하며 서로 위문하기를 "철인(哲人)이 죽었으니 국가가 누구를 의지할꼬." 하였다.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대사간 기대승(奇大升)은 젊어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식견이 고명하였으므로, 이황(李滉)과 더불어 의리(義理)를 논변(論辯)하는 데 있어 전인(前人)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많이 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악(經幄)에 입시하여 충정으로 진술해서 임금을 인도했던 것은 모두가 성명(聖明)한 제왕들의 도였으므로, 온 세상이 그를 추중하여 유종(儒宗)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죽었습니다. 그는 가세가 청빈하여 상(喪)을 치를 수가 없으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넉넉히 도와주도록 하여 국가에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만력(萬曆) 원년 2월 8일에 나주(羅州)의 소재지 북쪽 오산리(烏山里)에 있는 묘좌 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이는 선생이 평소에 직접 정해 놓은 자리였다. 이때 원근에서 장사를 지내기 위해 모인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선생은 천품이 뛰어나서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궁벽한 시골 구석에 있어 사사(師事)할 곳도 없었지만,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경적(經籍)에 마음을 깊이 쏟아 오묘한 뜻을 연구하여 찾되, 항상 거기에 급급하여 완전히 알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다. 고금의 일에 널리 통하였고 전고(典故)에도 매우 밝았다. 조정에 벼슬하여 임금을 섬길 때에는 매양 고인을 법으로 삼아 거취(去就)와 진퇴(進退)함에 있어 의리에 합당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였다. 그리고 경악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실 적에는 정성스럽게 임금을 정도(正道)로 가게끔 인도하고 도덕정치를 만회시키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다. 그래서 매양 입시할 때면 한갓 문의(文義)를 해석하고 의리를 강구하여 밝힐 뿐만 아니라, 치란(治亂)과 현사(賢邪)에 대한 변설까지 하였는데, 그 언론이 매우 자상하고 주도하여 충분히 임금을 감동시키고 뭇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는 바가 있었다. 또 제반 시설을 계획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선왕의 법을 준수하려 하고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의 처사가 세도(世道)의 장부(臧否)에 관계되는데 논의가 정해지지 않을 경우에는 그때마다 옛일을 인용하고 의리에 의거하여 분석함으로써 뭇사람의 의심을 깨버렸다. 당시의 재상 이준경(李浚慶)이 인종(仁宗)을 바로 체천(遞遷)하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자, 허엽(許曄)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의논에 쏠려 동조하였다. 그리하여 왕께 아뢰어 윤가를 얻기까지 하였는데, 선생은 당시 간장(諫長)으로서 매우 강력하게 논쟁하여 끝내 그 일이 바르게 처리되었다. 명종의 초상시에는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공의전(恭懿殿 공의는 인종비인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존호)이 대행왕(大行王 임금이 죽은 뒤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과 서로 수숙(嫂叔) 사이인데 옛날에는 수숙 사이에는 복(服)이 없었다." 고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형제간에 나라를 전하고 차서를 계승하는 데 있어 본디 군신과 부자의 의리가 있는 것인데, 어찌 복이 없을 리가 있단 말인가." 하고, 이에 형제가 서로 대통을 잇는 일과 복제례(服制禮)에 대한 의논을 만들어 밝혔다. 선생은 우리의 도를 존숭하여 믿는 것이 지성에서 나왔다. 그래서 이현(二賢 조광조와 이언적)의 억울함을 신설할 것을 청하여 사림(士林)의 뿌리를 부식하고 온 세상으로 하여금 삼가 본받을 바를 알게 하였다. 퇴계 선생(退溪先生)과 의리를 논변하는 데 있어서는 처음에는 서로 뜻이 잘 맞지 않았으나, 만년에는 퇴계가 선생의 말을 많이 따랐는데, 자세한 내용은 사칠왕복서(四七往復書) 가운데 있다. 어떤 이가 퇴계에게 묻기를 "고봉(高峯)은 행(行)이 지(知)에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자, 퇴계가 답하기를 "예로써 임금을 섬기고 의로써 진퇴하였는데, 어째서 지와 행이 차이가 있다고 이르는가." 하였다. 퇴계가 벼슬을 사퇴할 적에, 상이, 지금 학문을 한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고 묻자, 퇴계가 답하기를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지금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도 기대승은 널리 알고 조예가 깊어 그와 같은 사람을 보기가 드무니, 이 사람은 통유(通儒)라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평소 임금께 주대(奏對)했던 말들을 상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국사(國史)에서 조사, 초록(抄錄)해서 2권으로 만들게 하고 논사록(論思錄)이라 명명하였다. 선생이 저술한 시문(詩文) 약간 권 및 퇴계와 더불어 왕복했던 서한(書翰)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경인년에, 선생이 일찍이 변무주문(辨誣奏文)을 지어 녹훈된 것 때문에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의금부성균관춘추관사 덕원군(德原君)에 추증하고, 부인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에게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하였는데, 부인은 충순위(忠順衛) 보공장군(保功將軍) 휘 임(任)의 딸이다.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효증(孝曾), 차남은 효민(孝閔)ㆍ효맹(孝孟)이며, 딸은 사인(士人) 김남중(金南重)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아들 한 명과 딸 둘은 모두 요절했다. 효증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 김점(金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정헌(廷獻)은 현감(縣監)이고 장녀는 승지 조찬한(趙纘韓)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한이겸(韓履謙)에게 시집갔다. 효민은 참봉 양홍도(梁弘度)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두었고, 효맹은 승지 정엄(鄭淹)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정헌은 정즐(鄭騭)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고,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은 국주(國柱)이다. 정유왜란(丁酉倭亂) 때에 효민과 효맹은 중로에서 적을 만나 죽었고, 김씨에게서 낳은 딸과 양씨ㆍ정씨는 겁박을 당하자 굴하지 않고 모두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자경설自警說
고인古人들은 모두가 과거의 허물을 자책하여 스스로 경계하였으니, 이는 과거의 실수를 마음 아프게 여기고 앞으로 잘하겠다는 생각을 일으키려고 해서이다. 이는 모두 성인聖人과 현사賢士들이 뜻을 붙여 공부하던 것인데, 나만 어찌 유독 그러하지 않겠는가. 가영歌詠하던 나머지 아득히 19년 전의 일을 멀리 생각해 본다.
나는 가정嘉靖 정해년(1527, 중종22)에 태어났으니, 곧 대행왕大行王(중종)22년이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할머니를 여의고 이갈이를 할 무렵에 어머니를 여의고서 오직 아버지만을 의지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고생하시면서 나를 길러 주셨는데, 나는 어려서부터 질병이 많아 죽다가 살아나곤 하였다. 이제 와서 아련히 그때 일을 생각하니, 비통함이 하늘에 사무친다. 아,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가끔 소싯적 일을 생각해 보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한두 가지 생각나는 것도 있다.
계사년(1533)에 비로소 가정에서 수학하였다. 이듬해인 갑오년(1534) 초가을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이로 인해 결연히 학업을 내팽개치고 더 이상 학문을 일삼지 않았으며, 아버지께서도 막 상喪을 당한 터라 가르치지 않으셨다.
을미년(1535)에 효경孝經을 읽고 글씨를 배웠으며, 또 소학小學을 외우기도 하여 거의 자포자기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고 귀신 역시 무정하여 병신년(1536) 겨울에 작은누이가 역질로 죽었다. 아버지께서는 환난과 재앙이 거듭 미침으로 인해 산의 절로 피해 가 계셨으므로 나 또한 따라가서 글을 읽고 글씨도 익혀 자못 학업이 진전될 가망이 있었다.
병신년 겨울부터 정유년(1537) 가을까지 아버지께서 절에 계시다가 늦가을에 서울에 가실 일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서울에 가신 뒤 나는 집에 있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10월 초에 스스로 분발하여 서당에 가서 대학을 다 배우고 이어 한서漢書와 한유韓愈의 문장을 읽으니, 그해가 벌써 저물었다. 따라서 집에 내려와 근친覲親한 다음 다시 올라가서 맹자와 중용을 읽었으며, 늘 동료들과 더불어 연구聯句를 짓거나 문장을 짓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공부에 소질이 있다고 하였다. 고문진보 전집前集을 읽고 또 고부古賦를 읽고는 끊이지 않고 줄줄 외웠는데, 그때가 무술년(1538, 중종33)이었다.
이 당시 내 외조부(강영수)의 첩인 외조모께서 가문의 어른으로서 항상 여러 손자들을 어여삐 돌보셨다. 나의 어머니께서 어릴 적에 일찍이 그 집에서 자랐고 나의 형(기대림)도 그 집에서 자랐는데, 우리들이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매우 극진하게 돌보아 주셨다. 연세가 팔순이 넘었는데도 청력이나 시력이 조금도 감퇴하지 않았다. 항상 나를 어루만지며 [반드시 대인大人이 될 것이니 열심히 글을 읽으라!] 하셨는데, 그해 봄에 별세하였다. 집안에 화(家禍)가 갑자기 닥치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고문진보 후집을 수백 번 읽고 나니 때는 7월이었다. 그대로 이듬해 10월까지 읽어 마치고 나니, 기해년(1539)이었다.
이때 선배들이 감시監試를 보기 위해 서당에 모여 글을 읽고 문장을 짓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나도 따라 배웠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가송歌誦은 시속을 따르지 않았고 시부詩賦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 비록 법도에 맞지는 않았지만, 더러 글을 잘 짓는다고 칭찬한 사람도 있었다. 10월 그믐께 아버지께 사략史略을 배우기 시작하여 3개월에 걸쳐 끝내고 나니, 해는 경자년(1540)이요 달은 1월이었다.
그 후 차츰차츰 우매함이 트이고 학업이 진전되었다. 이어서 논어論語를 수학하여 가을에 끝마쳤다. 이해 봄에 외숙부께서 문과에 급제하여 가을에 성묘를 하러 이곳에 오셔서는 내가 닦은 학업을 살피시고 당시 배우고 있던 것을 강론하시면서 나에게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고 면려하셨다. 그러자 서울의 친척들이 내가 장차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내가 저술한 글들을 요구하였으므로 나는 즉시 글을 다 모아서 친척들에게 부쳐 주었다. 이 때문에 나의 상자 속에는 그전에 지었던 초고草稿가 없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는 서전書傳을 읽어 모두 외웠다.
이듬해 가을에는 시전詩傳을 읽고 이어 주역周易을 읽었다. 경자년(1540, 중종35)부터 신축년(1541)까지 8개월 동안과 신축년부터 임인년(1542) 봄까지 10개월 동안을 합해서 계산하면 달로는 18개월이요, 햇수로는 1년 반쯤 되는데, 그동안 뜻이 해이해지고 성질이 나태해져서 입으로 읊지도 않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않은 시간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비록 가끔씩 분발하려는 기분을 가져 보기도 했지만 상황이 도와주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아버지께서 내가 조금 아는 것이 있다고 하여 항상 수강授講을 엄하게 하지 않으시고 훈계하고 권장하는 일도 소홀히 하셨으며, 때로 방탕하게 노는 일이 있어도 심히 책망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내 안일하게 지낼 수 있다고 여겨, 그 결과 나이가 들수록 학문은 더욱 떨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뜻은 더욱 해이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소득이 없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신축년(1541) 봄에는 외종조모外從祖母를 곡哭하였다. 외종조모께서는 항상 우리 어머니를 양녀로 삼아 오시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우리를 자식처럼 여겨서, 추울까 염려하여 옷을 입히시고 주릴까 염려하여 밥을 먹여 주셨다. 어린 내가 무엇을 알았겠는가. 오직 외종조모가 내 어머니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때 이르러 별세하여 영원히 이 세상을 하직하셨으니, 이 원통함이 어찌 다하겠는가. 하늘이여, 귀신이여! 몇 해 전에는 우리 어머니를 빼앗아 가고 이제는 또 우리 외종조모를 빼앗아 가니, 하늘이여, 귀신이여! 한결같이 어쩌면 나에게 이처럼 모진 고초를 내린단 말인가! 아버지를 수발하여 봉양하는 일로부터 많은 식구들과 어머니 여읜 우리 두 형제에 이르기까지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옷이 해지거나 하면 어디서 도움 받아 구할 것이며, 제쳐 두고 거행하지 않은 뒷일은 누구에게 고할 것이며, 어리석고 용렬한 노비들은 누구에게 명령을 받아 일을 한단 말인가! 밤낮으로 묻고 배우며 출세하기를 바라던 것도 이제는 영화롭게 봉양하는 데 쓸모가 없게 되고 말았으니,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이해 늦봄에 모두 130구句가 되는 서경부西京賦를 지었다. 용산龍山(정즐鄭騭)이 평론하기를 [그 글을 읽어 보면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있으니, 그 명성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퍼지겠다. 생각이 심원하고 기상이 장대하며, 어조가 고상하고 문장이 통창하다. 비록 간간이 서투르고 껄끄러운 데가 있기는 하나 단지 이것은 조그마한 흠일 뿐이다. 조금만 더 진취하면 곧 옛 작자作者의 경지에 이를 것인데, 더구나 그 밖의 과문科文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축하할 뿐이다.] 하였다. 여름에는 서정부西征賦를 차운次韻했는데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이듬해 봄에는 가을에 과거를 보리란 기대를 갖고 시험 삼아 시부를 지어 보았다. 그러나 학문을 한 것이 보잘것없고 생각이 꽉 막혀서 끝내 편篇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슬퍼하기를 [나는 다행히 세상에 태어나 두 가지 낙樂을 얻었으니, 질병과 가난에 대한 걱정도 없고 농사짓는 수고로움도 없다. 그런데도 포기한 채 학문을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일삼을 것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개탄스러워 말을 하지 못했다. 며칠 뒤 선배들이 서당에 모였다는 말을 듣고 나도 가서 어울렸지만, 거기서도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다. 한번은 조정몽주부吊鄭夢周賦를 지어 보았는데 이때는 붓끝이 저절로 막힘이 없었으니, 끝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5월에는 제생諸生들이 모두 돌아갔으므로 나 또한 집에 내려와 매일 부지런히 하여 날마다 한 번 읊을 때마다 고부古賦 10여 수를 온습溫習하고는 시험 삼아 의정부부議政府賦와 고소대부姑蘇臺賦 총 100여 구를 지어 보았는데, 그제야 비로소 옛날에 배웠던 것을 회복하여 거의 학업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기대하게 되었다.
가을에 시험에 응시했으나 끝내 이룬 것이 없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지기志氣가 쇠퇴하여 끝내 개연히 분발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대학 한 책만 끼고 어영부영 한 해를 마쳤다. 그 후 파방罷榜되었다는 기별을 듣고는 열흘 동안 산사에서 원부元賦 가운데 초抄한 것을 외웠다. 그러나 하해河海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한갓 근원 없이 두절된 연못가에서 머뭇거리며 큰 바다에 나아가지 못하여 소견이 커지지 못했으니, 아무리 속을 태우고 오래 생각을 해 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떤 직무에 종사도 해봤지만 역시 남에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의의疑義를 지은 것이 매우 좋아 사람들이 모두 허여하였으므로 일득一得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끝내 얻지 못했으니, 운명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책을 싸 들고 산재山齋로 갔으니, 때는 벌써 초여름이었다. 목사牧使 이공 홍간李公弘幹이 제생들을 불러 모아 학교에서 강의를 하였으므로 나도 찾아가서 함께 어울리며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는 6월 그믐에 파접罷接하고 돌아왔다. 그 후 8월 초하루에는 목사가 다시 생도 10여 명을 모아 놓고 소학을 강의하였으므로 나도 거기에 끼었다. 그로 인하여 교적校籍에 이름을 올리고 분주히 맡은 직분을 수행하였는데, 길이 또 매우 멀고 험해 한 번 출입할 때마다 4, 5일씩 쉬는 바람에 학업이 폐해지고 뜻이 해이해졌으니, 그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오가는 가운데 홀연히 세모歲暮를 만났으니, [세월은 말 위에서 다 보내고, 시서는 상자 속에 쟁여 두었다[日月馬上過 詩書篋中藏]]고 한 옛사람의 말이 꼭 맞는 말이라 하겠다.
다음 해 갑진년(1544)에 목사 송공순宋公純이 유생 가운데 더 배우기를 청한 자들을 선발하여 글을 강송講誦하도록 하고, 반드시 그 강송하기 시작한 때를 기록하여 기간이 오래되었으면 곧 학업이 얼마나 성취되었는지 심사하곤 하였다. 나는 이로 인해 맹자를 읽어 3월 그믐에 끝내고 한유韓愈의 글을 읽었다. 4월 보름에는 용산龍山 선생을 찾아뵈었다. 5월에 장차 도회都會에 가려고 선생을 뵈었더니, 선생께서 민암부民嵒賦를 지으라고 명하셨다. 부를 다 짓자 선생께서는 자주 칭찬하셨다. 한유의 글은 제문祭文까지 읽고 돌아왔는데, 5월도 이미 그믐이 되었다. 6월에 도회에 갔다가 그믐에 집으로 돌아왔다. 초가을에는 재차 용산 선생께 가서 또 한유의 글을 읽다가 보름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달부터 8월 말까지는 더위에 지친 나머지 마냥 누워 책상만 마주하였을 뿐이다. 9월 초에는 용산 선생께 가서 문선文選을 강습하다가 열흘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10월 초하루에 또 용산 선생께 가서 상서商書의 대문大文을 읽다가 1, 2권도 못다 읽고 돌아오니 그때가 이미 16일이었다. 세월이 하도 빨리 흘러 또 세모를 만났다. 머리 돌려 천지를 바라보매 해는 곧 지려고 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처음에는 수년 이래로 게으르고 방탕함이 고질이 되어 학업은 진취되지 못하고 나이만 많아진다고 여겨 매우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겨울철이나마 학업을 부지런히 닦으려니 하였으나 입지立志가 견고하지 못하고 습관을 제거하지 못하여 헛되이 세월만 보냈을 뿐이다.
아, 내가 태어난 해의 1월 1일이 기묘일이었는데 지금 벌써 110번째의 기묘일을 맞게 되었다. 유학儒學을 공부한 날도 꽤 오래되었고 세상에 태어난 지도 적지 않은 햇수가 되었건만 포기해 버리고는 성립할 것을 미처 꾀하지 못했으니 심하다, 나의 무지함이여! 역시 좋은 쪽으로 변화하지 못한 것이로다. 돌이켜 생각하니 참으로 분하고 가슴 아프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 슬프고 괴로운 나머지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때를 헤아리고 자신을 헤아려 보니, 슬픔이 가슴에 가득하여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지나간 일들을 편차編次하여 행해 온 일들이 어떠했는가를 추적해서 한편으로는 경계를 하고 한편으로는 권면을 하고, 또 스스로 좋지 않은 때에 내가 태어났음을 슬퍼하는 바이다.
아마도 이 말들은 모두가 지난날의 사소한 일로서 과실을 경계하고 공부에 진취하지 못했던 일에 관한 것이니, 대체로 기억하여 잊지 않으면 되지 언외言外의 의미는 논할 바가 아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를 항상 나의 이목耳目에 접하게 하여 옛날의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고 지금의 성취 없음을 돌아보면서 개연히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감발하고 격려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밖의 일의 내용에 대해서는 생각은 빤하지만 글로 옮기기는 참으로 쉽지 않아 마침내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고봉 선생의 행장과 시장을 합친 전기
선생의 이름은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 성은 기씨奇氏, 관향은 행주幸州이다. 행주에 고봉속현高峯屬縣이 있어서 이 때문에 자호를 고봉高峯이라 하였다.
기씨는 고려조에 무예武藝로 입신하여 장상將相을 지낸 이가 퍽 많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이름 면勉이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이분이 이름 건虔을 낳았는데 세종조에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고, 문종 말년에 연세 50세가 채 안 되어 벼슬에서 물러나셨다. 세조가 즉위한 뒤 권람權擥을 시켜 다시 나오도록 강요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고 돌아가셨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이분이 선생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이름 축軸은 풍저창부사豐儲倉副使를 지내고 승정원좌승지丞政院左丞旨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이름 찬襸은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이름 진進은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아우가 죄를 입은 뒤부터 세상일에 마음을 끊고 광주光州의 고룡향古龍鄕에 은거하였다. 대신大臣의 천거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감사함을 인사하고 취임은 하지 않았다. 뒤에 선생이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면서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덕성군德城君에 봉해졌다. 부인 진주강씨晉州姜氏는 사과司果 이름 영수永壽의 따님이요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증손녀인데, 가정嘉靖 정해년(1527, 중종22) 11월 18일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겨우 이를 갈 나이가 지나자 성인처럼 의젓하였다. 7세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는데,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서 쉬지 않고 글을 읽었다. 누가 혹 위로 삼아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저는 스스로 이것을 즐깁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사람들이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애통하게 울었다.
조금 장성하여 선생은 집에서 공부를 하면 방해되는 점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마침내 향숙鄕塾에 나아가 글을 읽되 날마다 과정課程을 두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또 한가한 날에는 육갑六甲이 쇠락하고 왕성해지는 이치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대략 통달하였다. 한번은 어떤 손님이 연구聯句를 가지고 선생을 시험하려고 식食 자를 들어 시제詩題를 냈다. 이에 선생이 즉시 응수하여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食無求飽君子道)] 라고 읊었다. 그러자 손님은 한참이나 칭찬하다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너의 작은 아버지 덕양공德陽公(기준奇遵)이 도덕과 문장으로 사림士林의 영수였는데, 그 가업을 이을 사람이 바로 너로구나.]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아버지께서 훈계한 말들을 손수 기록하여 조그만 책자로 만들고 스스로 펼쳐 보면서, [내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훈계를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꽤 진취된 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질이 평범하여 여전히 거치니, 이 일을 생각하면 늘 스스로 송구스러워진다. 일찍이 듣건대 옛사람에게는 문견록聞見錄이 있었다 하니, 배우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때에 따라 기록하는 책을 두어 잊어버릴 것에 대비해야 한다.] 하였다. 이로부터 자신을 수양하는 위기爲己의 학문에만 전념하여 세속에서 익히는 과거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엔 마음을 두지 않았다.
갑진년(1544)에 중종中宗이 승하하자 공은 벼슬도 아직 없고 관례도 올리지 않은 몸으로 곡림哭臨하고 소식素食하였으며, 졸곡卒哭에 이르러서야 그만두었다. 인종仁宗의 초상 때도 이렇게 하였다.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사림의 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물리치고 문을 굳게 닫은 채 밖에 나오지 않았다.
기유년(1549)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 두 시험에 모두 입격해 약관의 나이에 벌써 이름이 사림에 드러났다. 문장文章이 과거장을 휩쓸었기에 윤원형尹元衡이 공을 꺼리던 중에 공의 시권試卷이 높은 등급에 들어갈 것을 알고 고의로 떨어뜨려 버렸다. 그러나 공 또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을묘년(1555)에 아버지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이 무렵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와 배우는 이가 매우 많았다.
무오년(1558)에 여묘살이 3년을 마치고 32세에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문과文科의 을과乙科 제1명第一名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마침 퇴계 선생이 소명을 받고 서울에 와 계시던 때라 선생에게 나아가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한 논변이 있었다. 뒷날 퇴계가 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오년에 서울에 들어간 것은 매우 낭패스러운 길이었지만, 오히려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우리 명언明彦(기대승)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신유년(1561) 여름, 천거로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대교待敎를 거쳐 봉교奉敎에 올랐다. 이때 휴가를 얻어 남중南中에 내려와 있었는데, 빨리 서울로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교지가 있었다.
계해년(1563)에 승정원주서丞政院注書에 제수되었다. 잠시 후 병으로 그만두고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겨 호당湖堂(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문吏文에 대한 고과가 중中을 맞았다는 이유로 다시 그만두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이에 앞서 윤원형이 국정을 도맡아 하면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명종 말기에 그 세력을 꺾기 위해 이량李樑을 등용하여 견제하였다. 그러나 이량이 다시 인척姻戚 관계를 믿고 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공은 당대의 명류名流인 윤두수尹斗壽 형제,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 등과 더불어 올바른 논의를 주장하는 인물들을 극력 끌어들였다. 그러자 이량이 자기와 뜻을 달리하여 선생이 한 번도 사적으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생을 미워한 나머지 붕당朋黨으로 지목하여 사헌부를 사주해서 [사론을 가탁하여 조정을 비난한다.(假托士論 謗訕朝政)]고 지목하여 선생을 논핵하게 하고 관직을 삭탈하여 밖으로 축출했다. 사림의 화가 막 일어나려 하매 온 나라가 크게 경악하였는데, 수일 후에 옥당玉堂의 4촌형 기대항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자 명종이 크게 깨달아 이량 등을 찬출竄黜하고 공을 다시 서용하여 사관으로 삼았다. 공은 이어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승진되어 선생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국가의 안위는 재상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책임은 경연에 있으니, 경연의 소중함이 재상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임금의 덕이 성취된 다음에야 훌륭한 재상의 그릇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서 임용할 수 있을 터이니, 그렇다면 경연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지금 전하의 성덕聖德이 일찍 성취되시어 성리학에 마음을 두고 계신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경연에 나오신다면 나날이 진보하고 성취하실 것이니, 어찌 크나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아뢰었다. 또 언로言路를 개방하고 충직한 간언을 잘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반복하여 진술하였다,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로부터 사림이 공을 존숭하였고 명종과 선조 연간에 조정이 다시 바르게 되었다.
갑자년(1564, 명종19)에 병 때문에 홍문관의 직책을 그만두었다. 성균관 전적과 병조좌랑에 제수되었고, 병조를 거쳐 이조정랑에 옮겨졌으나 휴가를 요청하여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예조 정랑에 옮겨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양하며 취임하지 않으니, 계속해서 교리校理와 헌납獻納을 제수하며 조정으로 불렀다. 선생은 본디 한가히 지내면서 학문에 모든 힘을 쏟으려 하였으나, 병인년(1566) 10월 한 달 동안 은혜로운 명이 여러차례 내렸기 때문에 애써 일어나 나아갔다. 올라가는 도중에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에 제수되고 이어 관례대로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다.
정묘년(1567)에 장령掌令으로 옮겨졌다가 곧 사예司藝로 그만두었으며, 다시 사인과 장령에 제수되었다.
명종明宗이 승하하고 선조宣祖가 즉위한 후 정묘년 5월에 명에서 조사詔使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선생은 홍문관 응교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관서關西에 갔다. 이때 두 조사는 모두 지나의 이름있는 유학자로 가끔 어려운 질문을 하였는데, 원접사가 일체 선생에게 대답하도록 맡겨버리므로 선생은 답을 모두 타당하게 해냈다. 조정에 돌아오자 집의執義에 제수되었다. 조강朝講을 인하여 진계進啓하기를 천하의 일에는 반드시 시비가 있는 것이니, 시비가 밝지 못하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아 정사政事가 전도되는 것입니다. 과거 중종 초기에 조광조趙光祖가 끊어진 도학을 제창하여 밝혀서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 시대처럼 만드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었는데 불행하게 간악한 소인들의 모함을 입고 귀양가서 죽기까지 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사림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광조의 학문은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전해받았고, 굉필은 김종직(金宗直)에게서 전해받았으며, 종직은 정몽주(鄭夢周)를 사법(師法)으로 삼았으니, 그 연원(淵源)의 유래한 바가 바르고 순수하여 하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언적(李彦迪)은 한때의 명유(名儒)로 억울하게 죄를 입어 멀리 서쪽 변방에 귀양가서 죽었습니다. 이상의 두 선비는 이름이 죄적(罪籍)에 들어 있는 채 오래도록 신설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명(聖明)께서 즉위하시어 그 사정을 밝게 아셨을 터이니, 의당 먼저 그들을 표창하여 존숭하소서. 그렇게 하면 국시(國是)가 정해지고 인심이 복종할 것이니, 선조(先祖) 때 있었던 일이라 핑계대고 유난(留難)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여기에 대한 사실은 논사록(論思錄) 가운데 자세히 실려 있다. 이날 전한 겸 예문관응교에 제수되었다. 이때 대신이 대원군(大院君)의 사묘(私廟)에 치제(致祭)할 것을 헌의하였으므로,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상께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셨으니, 대통은 중하고 사친(私親)은 경하므로, 예에 있어 의당 압존(壓尊)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를 초월해서 치제하는 것은 극히 온당치 않으니, 의당 예관을 시켜 십분 예를 강구해서 반드시 예에 부합되어 조금의 부족함도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무진년에 직제학 겸 교서관판교(直提學兼校書館判校)에 제소되었고, 이윽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승정원에 들어가서 동부승지를 거쳐 우승지에 이르러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다시 대사성과 대사간을 각각 두 번씩 제수받았다. 경오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남쪽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소명(召命)이 이른 것을 인하여 수백 언(數百言)의 상소를 올려, 고질 때문에 벼슬할 수 없다는 뜻을 진술하였다. 그리고는 청량봉(淸涼峯) 아래 나아가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귀전(歸全)’이라 호칭하고 거기서 여생을 마치기로 계획하였다. 그래서 그 후 누차 부제학ㆍ이조 참의ㆍ대사성 등의 관직으로 불렀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 후 조정이 마침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천조(天朝)에 주청(奏請)하고자 선생을 발탁하여 주청의 일을 맡기려고 하므로, 선생은 마지못하여 병을 무릅쓰고 명에 응해, 공조 참의와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봉직하지 못하고 남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였다. 선생이 남으로 향해 출발하던 날, 한때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한강(漢江)까지 나와 전송하였는데, 이때 배[舟] 안에 앉았던 한 객이 선생에게 묻기를 "사대부가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며 처신하는 데 있어 끝까지 가져 지켜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자, 선생이 답하기를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에 충분히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소." 하였으니, 그 뜻은 대체로 군자가 출처하는 데 있어서는 의당 먼저 그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그러지지 않게 해야 하고, 다시 시세(時勢)를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애야 하며, 마침내는 선도(善道)를 죽기로써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었는데, 들은 자들은 탄복하였다. 선생은 중도에서 병을 얻어 우선 며느리의 친정 아버지가 되는 고부(古阜) 김점(金坫)의 집에 들어갔는데,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곁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명이 길고 짧은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다만 학문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여 뜻만 가진 채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약을 드려도 먹지 않고 가사(家事)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은 채, 밤 4경(更)에 운명하니, 향년 46세였다. 상 께서는 선생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내의(內醫)를 보내 약을 가지고 가서 병을 보살피게 하였으나, 내의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태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상께서는 대단히 애도하고 별치부(別致賻)를 내렸다. 그리고 경중(京中)의 사서인(士庶人)들은 남산(南山) 밑 선생의 옛 우사(寓舍)에 모여 곡하고 모두 탄식하며 서로 위문하기를 "철인(哲人)이 죽었으니 국가가 누구를 의지할꼬." 하였다.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대사간 기대승(奇大升)은 젊어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식견이 고명하였으므로, 이황(李滉)과 더불어 의리(義理)를 논변(論辯)하는 데 있어 전인(前人)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많이 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악(經幄)에 입시하여 충정으로 진술해서 임금을 인도했던 것은 모두가 성명(聖明)한 제왕들의 도였으므로, 온 세상이 그를 추중하여 유종(儒宗)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죽었습니다. 그는 가세가 청빈하여 상(喪)을 치를 수가 없으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넉넉히 도와주도록 하여 국가에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만력(萬曆) 원년 2월 8일에 나주(羅州)의 소재지 북쪽 오산리(烏山里)에 있는 묘좌 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이는 선생이 평소에 직접 정해 놓은 자리였다. 이때 원근에서 장사를 지내기 위해 모인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선생은 천품이 뛰어나서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궁벽한 시골 구석에 있어 사사(師事)할 곳도 없었지만,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경적(經籍)에 마음을 깊이 쏟아 오묘한 뜻을 연구하여 찾되, 항상 거기에 급급하여 완전히 알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다. 고금의 일에 널리 통하였고 전고(典故)에도 매우 밝았다. 조정에 벼슬하여 임금을 섬길 때에는 매양 고인을 법으로 삼아 거취(去就)와 진퇴(進退)함에 있어 의리에 합당하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였다. 그리고 경악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실 적에는 정성스럽게 임금을 정도(正道)로 가게끔 인도하고 도덕정치를 만회시키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다. 그래서 매양 입시할 때면 한갓 문의(文義)를 해석하고 의리를 강구하여 밝힐 뿐만 아니라, 치란(治亂)과 현사(賢邪)에 대한 변설까지 하였는데, 그 언론이 매우 자상하고 주도하여 충분히 임금을 감동시키고 뭇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는 바가 있었다. 또 제반 시설을 계획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선왕의 법을 준수하려 하고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의 처사가 세도(世道)의 장부(臧否)에 관계되는데 논의가 정해지지 않을 경우에는 그때마다 옛일을 인용하고 의리에 의거하여 분석함으로써 뭇사람의 의심을 깨버렸다. 당시의 재상 이준경(李浚慶)이 인종(仁宗)을 바로 체천(遞遷)하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자, 허엽(許曄) 등 여러 사람이 모두 그 의논에 쏠려 동조하였다. 그리하여 왕께 아뢰어 윤가를 얻기까지 하였는데, 선생은 당시 간장(諫長)으로서 매우 강력하게 논쟁하여 끝내 그 일이 바르게 처리되었다. 명종의 초상시에는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공의전(恭懿殿 공의는 인종비인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존호)이 대행왕(大行王 임금이 죽은 뒤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과 서로 수숙(嫂叔) 사이인데 옛날에는 수숙 사이에는 복(服)이 없었다." 고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형제간에 나라를 전하고 차서를 계승하는 데 있어 본디 군신과 부자의 의리가 있는 것인데, 어찌 복이 없을 리가 있단 말인가." 하고, 이에 형제가 서로 대통을 잇는 일과 복제례(服制禮)에 대한 의논을 만들어 밝혔다. 선생은 우리의 도를 존숭하여 믿는 것이 지성에서 나왔다. 그래서 이현(二賢 조광조와 이언적)의 억울함을 신설할 것을 청하여 사림(士林)의 뿌리를 부식하고 온 세상으로 하여금 삼가 본받을 바를 알게 하였다. 퇴계 선생(退溪先生)과 의리를 논변하는 데 있어서는 처음에는 서로 뜻이 잘 맞지 않았으나, 만년에는 퇴계가 선생의 말을 많이 따랐는데, 자세한 내용은 사칠왕복서(四七往復書) 가운데 있다. 어떤 이가 퇴계에게 묻기를 "고봉(高峯)은 행(行)이 지(知)에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자, 퇴계가 답하기를 "예로써 임금을 섬기고 의로써 진퇴하였는데, 어째서 지와 행이 차이가 있다고 이르는가." 하였다. 퇴계가 벼슬을 사퇴할 적에, 상이, 지금 학문을 한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고 묻자, 퇴계가 답하기를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지금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도 기대승은 널리 알고 조예가 깊어 그와 같은 사람을 보기가 드무니, 이 사람은 통유(通儒)라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평소 임금께 주대(奏對)했던 말들을 상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국사(國史)에서 조사, 초록(抄錄)해서 2권으로 만들게 하고 논사록(論思錄)이라 명명하였다. 선생이 저술한 시문(詩文) 약간 권 및 퇴계와 더불어 왕복했던 서한(書翰)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경인년에, 선생이 일찍이 변무주문(辨誣奏文)을 지어 녹훈된 것 때문에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의금부성균관춘추관사 덕원군(德原君)에 추증하고, 부인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에게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하였는데, 부인은 충순위(忠順衛) 보공장군(保功將軍) 휘 임(任)의 딸이다.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효증(孝曾), 차남은 효민(孝閔)ㆍ효맹(孝孟)이며, 딸은 사인(士人) 김남중(金南重)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아들 한 명과 딸 둘은 모두 요절했다. 효증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 김점(金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정헌(廷獻)은 현감(縣監)이고 장녀는 승지 조찬한(趙纘韓)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한이겸(韓履謙)에게 시집갔다. 효민은 참봉 양홍도(梁弘度)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두었고, 효맹은 승지 정엄(鄭淹)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정헌은 정즐(鄭騭)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고,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은 국주(國柱)이다. 정유왜란(丁酉倭亂) 때에 효민과 효맹은 중로에서 적을 만나 죽었고, 김씨에게서 낳은 딸과 양씨ㆍ정씨는 겁박을 당하자 굴하지 않고 모두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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