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기씨대종중

기씨역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기대항(奇大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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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기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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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필선 할아버지의 사위 김기손의 외손의 외손들 중에서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가 있고 그 남자 형제들의 후손인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 윤원형이 대윤 소윤하면서 싸워 윤형원이  이기고 외척으로 권세를 부리자 왕이 윤원형을 견재 제거하기위해 효령대군의 5세손 이량을 중용하여 이량이 정권을 잡는다. 기형 할아버지의 아들 기대복 할아버지의 부인은 2분이신데 모두 전주이씨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시간이 흘러 왕과는 10촌이상이 되는 사람들이 많아져 왕족을 벋어난 전주이씨라고만 나오지만 역시나 유력 가문들이다. 2번째 부인이신 전주이씨 할머니의 아버지가 위에 언급한 이량이다. 서울살던 정무공의 후손들도 이량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량은 사림을 싫어하여 기대승 할아버지 등 사림을 배척하다가 기준 할아버지의 아드님이시고 이량과 가까운 사이이던 기대항 할아버지가 왕에게 차자를 올려 숙청시킨다. 이후에 기대항 할아버지는 기묘8현이신 아버지 기준 할아버지의 후광도 더해져 승승장구하여 정2품 판서급의 한성판윤이 된지 10여일만에 종기가 퍼져서 돌아가신다. 몇일의 서울시장기간이었지만 정2품의 품계를 받자 아버지 기준 할아버지는 같은 품계의 정2품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할아버지이신 기찬 할아버지는 한등급아래의 종2품 이조참판겸 홍문관대제학으로 증조부인 기축 할아버지는 다시 한등급아래 정3품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이 되신다. 고봉집에는 4촌형인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와 작은 어머니이신 파평윤씨 할머니에 대한 글들이 많이 나온다. 판윤공 제문을 보면 1564년 여름에 판윤공 어미니가 병환이 나시자 판윤공이 극진히 보살폈고 그러다 판윤공 몸에 종기가 나서 요즘 같으면 항생연고 바르면 금방 고칠 것을 당시엔 종기가 몸에 퍼져 돌아가시고 파령윤씨 할머니도 병환 가운데 아들이 죽자 상심하여 그 한달 후에 돌아가신 것으로 나온다. 4촌형 한성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의 행장과 작은 어머니 파평윤씨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고봉 할아버지가 지으신 만장시가 있어 올린다.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기공(奇公) 행장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이름은 대항(大恒)이요, 자는 가구(可久)이며, 성은 기씨이니, 그 선대는 행주인(幸州人)이다. 증조의 이름은 축(軸)인데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로 여러 번 추증되어 승정원 좌승지에 이르렀으며, 증조모는 해주 정씨(海州鄭氏)로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찬(襸)인데 홍문관 부응교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할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와 안동 김씨(安東金氏)인데,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준(遵)인데 홍문관 응교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는 윤씨(尹氏)로 파성군(坡城君) 이름 금손(金孫)의 따님인데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 공이 높은 벼슬에 올라가면서 3대를 추증한 것이다.
기씨는 고려 초기로부터 무재(武才)로 일컬어져 대대로 공로를 드러냈다. 먼 할아버지이신 이름 수전(守全)은 지위가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는데,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공로가 백성들에게 베풀어졌으며, 그 후 자손들이 높은 벼슬을 지낸 이가 많아 집안이 크게 번성했는데, 그 후 다소 침체되었다. 이름 면(勉)은 조선조에 벼슬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가 되었는바 이분이 휘 건(虔)을 낳았는데, 청렴하고 지조가 있어 세종조에 유명하였다. 벼슬은 정헌대부 판중추부원사를 지냈으며, 별세하자 정무(貞武)로 시호하였으니, 바로 공의 고조이다.
공의 증조이신 승지공께서는 화를 만나 벼슬하지 못하고 집에서 있었으며, 할아버지인 참판공이 비로소 문장으로 이름났으나, 모두 장수하지 못하였다. 아버지인 판서공께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질로 성리학을 탐구하였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있어 일찍 큰 명망을 지니고 있었다. 중종께서 정치를 힘쓰던 때를 당하여 한두 명의 신하들과 함께 특히 신임을 받고 세속을 크게 변혁하려는 뜻을 두었다. 그리하여 경연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아는 것을 모두 말하여 국가를 위해 순고(淳古)한 정치를 다시 회복하려고 했었는데, 불행히도 죄를 입고 온성(穩城)으로 유배되었다가 마침내 옥리(獄吏)의 논죄를 받아 나이 30세에 별세하니, 말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애석히 여긴다.
공은 정덕(正德) 기묘년(1519, 중종14) 6월 17일에 태어났다. 태어나서 겨우 3세에 부친을 잃었는데, 어려서부터 빼어난 자질이 있었다. 차츰 장성하자 외가에서 공부하였는데, 영특하고 총명함이 뛰어나 하루에도 100여 자를 기억하였다. 외조이신 파성군은 공을 사랑하면서도 가엾게 여겨, 매양 억제하기를 “나는 온갖 세상의 화를 겪었으니, 자손 중에 뛰어난 재주가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였다. 공은 이로 말미암아 학문하는 데 느슨하여 재질을 다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약관 시절에는 우뚝이 두각을 나타내어 이미 명사들과 사귀었다.
가정(嘉靖) 경자년(1540) 봄에 사마시에 참여하여 반궁(泮宮 성균관 )에서 유학하니, 명성이 더욱 드러났으며 교유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병오년(1546, 명종1) 가을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정미년(1547) 8월에 추천되어 예문관 검열로 있다가 얼마 후 주서에 임명되었는데, 잘못한 일로 말미암아 체직되었다가 다시 검열이 되고 봉교로 전직되었다. 무신년(1548) 7월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고 저작과 박사를 지냈으며, 기유년(1549) 가을에는 부수찬으로 승진되고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부수찬이 되었다. 경술년(1550) 1월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체직되고 전적에 제수되었으며, 예조 좌랑으로 전직되었다가 다시 부수찬이 되고 수찬으로 승진되었다. 7월에 이조 좌랑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자년(1552) 9월에는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나갔다. 10월에는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는데, 계축년(1553) 봄에 대관(臺官)이 전조(銓曹)에서 인물을 잘못 주의(注擬)하였다고 탄핵하여 장관인 판서와 차관인 참판이 함께 파직되었다. 공 역시 색랑(色郞)으로 파직되었는데, 얼마 안 있어 다시 서용되어 헌납에 임용되고 부교리가 되었다가 지평과 교리를 지냈으며, 또다시 헌납이 되었다가 체직되고 직강(直講)에 임명되었으며 병조 정랑이 되었다.
갑인년(1554, 명종9) 1월에 다시 이조 정랑이 되었으며, 2월에는 검상(檢詳)으로 전직되었다. 6월에 함경도 감군어사(咸慶道監軍御史)로 나가라는 명령이 내리자, 의정부에서는 전직에 유임할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체직하여 직강으로 삼아 군기시 첨정으로 옮겨졌다. 12월에 감군의 6개월간 임기가 차서 조정으로 돌아올 때 도중에서 사간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인 을묘년(1555) 6월에 다시 검상이 되었으며, 8월에는 전한에 임명되고 11월에는 다시 검상이 되었다가 얼마 후 사인(舍人)으로 전직되었으며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병진년(1556) 5월에 통정대부로 특진되어 병조 참지가 되었는데, 전 참지가 그 임무를 그대로 수행하게 되어 공은 서반직(西班職)으로 옮겨져 호군 겸 오위장(護軍兼五衛將)에 보직되었다. 12월에는 황해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정사년(1557) 2월에 병으로 체직되어 조정으로 돌아오고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공이 서해(西海 황해도)에 부임해 있을 때에 간사한 사람 중에 자기를 추천해 주지 않는다고 공을 원망하는 자가 있어 비방하는 말을 퍼뜨려 공을 축출하려고 하였다. 이에 김홍도(金弘度) 등은 공을 헐뜯었는데, 이때까지도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공은 대부인이 당(堂)에 계심으로 인하여 외직으로 나가 봉양하기에 편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무오년(1558) 봄에 춘천 부사로 나갔는데, 관직에 있은 지 3년 동안 관리와 백성들이 크게 편안하였다. 경신년(1560) 7월 임기가 만료되어 예조 참의로 들어왔고, 호조 참의로 옮겨졌다가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우부승지로 옮겨졌다가 체직되고 부호군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예조 참의가 되었다. 신유년(1561, 명종16) 2월에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글을 올려 과실을 규탄해서 조정에 도움이 매우 많았다. 이보다 먼저 시종관(侍從官)이 시호를 정하는 일로 유언비어를 당하여 화가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은 주선하여 힘을 다해서 이 화를 막으려고 노력하였는데, 마침 대관(臺官)이 다시 한두 명이 시세(時勢)를 좇아 이랬다저랬다 하는 모습을 논박해서 그 사이를 싸움 붙이려고 하였다. 이때 공은 건의하여 이것을 배척해서 이 사건이 마침내 가라앉게 되었다. 6월에 대사헌으로 특별히 제수되니, 품계는 가선대부였다. 공은 기강을 바로잡고 힘써 충성을 다하였다. 임술년(1562) 1월에 병으로 체직되고 4월에는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에 제수되었다.
계해년(1563) 2월에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5월에 병으로 체직되고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후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8월에 사헌부에서는 이량(李樑)의 사주를 받아 사림에게 화를 전가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은 동료들을 거느리고 차자(箚子)를 올려 이량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죄를 탄핵하고, 아울러 대간들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을 논박하였다. 차자를 올리자, 상께서는 크게 깨닫고 즉시 이량을 축출하도록 명하고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을 교체시켰다. 공은 이날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자 사간원과 함께 아뢰어 화근에 대해 극진히 말하고, 이량 및 그 무리들을 귀양 보낼 것을 청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차등을 두어 처벌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량은 외척을 이용하여 좋은 벼슬을 은밀히 차지하니, 청의(淸議)가 그를 비루하게 여겨 돌보아 주지 않았다. 이량은 이에 크게 분함을 머금고 밤낮으로 나쁜 사람들과 결탁한 다음, 총애를 믿고 권력을 남용하여 간계를 이루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몇 년 사이에 기세가 등등하여 흉계가 하늘을 찌르니, 사람들이 감히 어쩌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청의들이 자기들을 비난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이감(李戡)을 끌어들여 대사헌으로, 윤백원(尹百源)을 사간으로 삼고는 서로 음모하기를, 일시의 명유(名儒)로서 자기들과 이의(異議)하는 자들은 죄줄 만한 큰 잘못이 없으니 이들을 한 가지 죄목으로 지적하기가 어렵다고 하고는, 마침내 이들이 “선을 한다고 칭탁하고 청담(淸談)으로 정사를 비방한다.”고 모함하여 자기가 평소 미워하던 자들을 먼저 공격해서 그 솜씨를 시험해 본 다음, 장차 차례로 자기에게 붙지 않는 자들을 모두 제거하려고 하였다. 당시 국세가 매우 위태로웠으니, 만일 공께서 기미를 알고 임금에게 올바른 말을 아뢰어 상의 마음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사림은 거의 어육(魚肉)이 됨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에 사림들은 모두 공의 공로를 위대하게 여기고 공의 식견에 감복하였다.
이량이 권세를 부릴 때에는 조정에 있는 대소 관원들이 그의 앞에 달려 나가 아첨하였다. 그러나 그가 실패하자, 의논들이 과격해져서 모두 뿌리를 찾아내어 통렬히 단죄하려고 하였다. 공은 말씀하기를 “죄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많은 것은 조정의 좋은 일이 아니니 마땅히 공평하고 용서함을 힘쓸 것이요, 각박한 의논을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들에게 죄상을 논할 때에 너무 너그러운 결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크게 일어나 다투어 공을 비난하니, 공은 책임을 지고 면직되기를 요청하였다.
얼마 후 예조 참판으로 겸지성균(兼知成均)이 되었으며, 다시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으로 바뀌었다. 이때 권간(權奸)들을 새로 물리친 뒤라서 인재 등용을 매우 삼가고 있었는데, 공은 이조 참판이 되어 인물을 등용할 때에 선발을 잘하여 국가가 힘입은 바가 많았다. 당시 훈척대신(勳戚大臣)이 위엄과 권세를 농간하여 권력이 임금에 비견되니, 조야(朝野)에서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였다. 공은 마침내 왕실에 마음을 두고 끝내 화의 빌미가 될까 두려워하여 차츰 억제해서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형세상 어려움이 있어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갑자년(1564, 명종19) 5월에 대부인께서 종기를 앓아 매우 고생하니, 공은 정성을 다해 약을 쓰고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직하고 6월에 서반(西班)으로 옮겼다가 공조 참판으로 바뀌었다. 대부인의 증세는 조금 덜하였는데, 공이 또 어깨와 목 사이에 종기가 나 의원에게 치료를 받고 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어 날로 점점 위독하였다. 7월 갑진일에 특별히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니, 품계는 자헌대부였다. 공은 항상 지위가 높아짐을 두려워하였으므로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는 교서가 내리자, 아들과 조카들은 공이 놀라고 동요될까 염려하여 아뢰지 않았다. 그랬는데 9일이 지난 임자일에 병세가 더욱더 위중해져서 치료할 수가 없게 되자 마침내 이 사실을 아뢰었다. 공은 낙심하여 한동안 있다가 말씀하기를 “나의 병세는 이와 같은데 특별한 총애가 거듭 이르니, 나는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시고는 말씀을 거듭하셨으나 분명하지 않았고,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니 향년 46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께서는 크게 애통해하고 철조(輟朝)하였으며 부의와 구휼함을 특별히 더하였다.
공은 덕성이 심후(深厚)하여 외모 꾸미기를 일삼지 않았으며, 마음을 두고 행신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집에서 어버이를 받들 때에는 그 정성을 지극히 하였으며, 규문(閨門) 안에서는 매우 화락하였다. 벼슬을 담당하여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너그러움과 용서를 근본으로 삼고 세세히 살피는 것을 현명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사람을 널리 사랑하고 용납하여 신분의 귀천과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다 기뻐하였다. 손님과 벗이 항상 자리에 가득하여 하루 종일 담소하면서 게으른 빛이 없었다. 흉금이 화평하고 도량이 넓어 흔들리지 않았다. 혹자는 청탁이 서로 뒤섞여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마음은 경위(涇渭)가 매우 분명하였다.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을 즐거워함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와 남들이 기예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좋게 여겼으며, 기상이 후중하여 바라보면 매우 의젓하였다. 겉으로는 심히 가타부타하는 것이 없는 듯이 보였으나, 중심은 참으로 밝고 결단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큰 의심스러운 일을 결단함에 있어서는 크게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간사한 사람들을 제거할 때에 공이 힘을 가장 많이 썼으므로 중망이 더욱 공에게 돌아갔다. 공 역시 세상을 바로잡는 것으로 자임하여 선한 사람들을 북돋아 주고 심어 줘서 국운을 붙들고자 하여 비호하고 장려 선발하기를 항상 미치지 못할 듯이 하니, 사림에서는 공을 의지하기를 마치 제방이 홍수를 막아 주듯이 여겨 두려움이 없어졌으며, 간사한 무리들은 공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쁜 마음을 내지 못하였다.
공이 별세하자,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아래로는 마을에 있는 선비에 이르기까지 공을 아는 자들은 놀라 부르짖고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모두들 말하기를 “공의 존망에 국운이 달려 있는데 하늘이 갑자기 공을 빼앗아 갔으니, 하늘은 참으로 알 수 없다.” 했으며, 명종께서 어제(御題)로 독서당(讀書堂)에 내린 글에 맨 먼저 말씀하기를 “기 판윤(奇判尹)을 애도하노라.”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상이 친필로 쓰신 것이다. 공의 사망에 대해 애통해한 것은 비단 아랫사람들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성상께서도 그러했던 것이다. 대부인께서는 애통해한 나머지 옛날의 병이 다시 도져서 1개월 후에 또다시 별세하였으니, 하늘의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이 이러하단 말인가.
이해 10월 1일 경오에 고양군 원당리(元堂里)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안장하니, 참판 부군의 묘 아래에 있었으며 판서 부군의 묘와는 서로 바라보이는 수백 보 사이에 있었다. 공이 처음 별세하자 친구들과 관리들이 애통하고 실성통곡하여 친척을 잃은 듯이 슬퍼하였는데, 장례 때에도 이와 같이 해서 더욱 지극히 하였으니, 여기에서도 공의 덕이 인심에 사무쳤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공은 양주 조씨(楊州趙氏)에게 장가드니, 성균관 사성 조방종(趙邦宗)의 따님이다. 아들은 한 사람인데, 응세(應世)로 부원군 임백령(林百齡)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으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직남(直男)인데 어리다.
공은 큰 재주와 훌륭한 그릇으로 마땅히 크게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수(壽)가 덕에 차지 못하여 중도에 탈락되었고 학문 또한 세상에 크게 드러나지 못했으니, 이는 슬퍼할 만하다. 감히 역임했던 관직과 행적의 대강을 상고하여 위와 같이 기록해서 작자에게 묘지(墓誌)를 청하여 불후(不朽)를 도모하려고 하는 바이다. 삼가 행장을 짓는다.

고봉 할아버지께서 숙모가 돌아가시자 숙모에 대한 만장〔挽叔母 : 판윤공(判尹公)의 모부인(母夫人)〕을 지었는데 같이 올린다.

이위를 슬퍼하는 외로운 인생 / 孤露悲伊蔚
오히려 숙모님을 의존하였네 / 猶依叔母存
말씀을 받든 지 얼마였던고 / 幾多親警欬
돌이켜 혼정신성하는 것 같았네 / 還似奉晨昏
이다지도 갑자기 돌아가시니 / 奄忽今何遽
쓸쓸함은 차마 말할 수 없네 / 凋零不忍言
거친 산 상여끈을 자르는 곳에 / 荒山斬紼處
통곡의 눈물 물동이 기울인 듯 쏟아지네 / 摧痛淚傾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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