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기씨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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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기준 할아버지는 아들이 한 분 있다. 한성판윤 기대항 할아버지다. 기대항 할아버지는 아들이 2분인데 적자는 기응세 할아버지이고 서자로 기직남이 있다. 기응세 할아버지는 효행으로 삼강록 속편에 기록이 있다하여 삼강공이라 불린다. 만전당 기자헌 할아버지는 기응세 할아버지의 큰아들로 문과급제하였고 영의정까지 올라 행주기씨 가운데 최고위 관직을 역임한다. 부인은 선조의 형 하원군의 딸 전주이씨다. 영의정이 되면서 덕평부원군에 봉해지고 아버지 기응세 할아버지는 같은 품계의 영의정 덕창부원군으로 추증되고 할아버지 기대항 할아버지는 종1품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증조부 기준 할아버지는 정2품 판서로 추증되어야 하지만 아들 기대항 할아버지가 정2품 한성판윤이 되면서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기 때문에 더 추증은 없었다. 영의정까지 올랐기 때문에 당색도 알아야 돌아가는 사항을 참고 할 수 있다. 만전상공의 처음 당색은 동인이고 정철의 처벌을 놓고 당이 나뉠 때는 강경론을 지지하여 북인(北人)이 되었고, 북인이 다시 홍여순의 대사헌 천거를 지지하는 대북과 반대하는 소북으로 나뉠 때는 대북(大北)에 가담했다. 대북은 폐모론이 불거지는 과정에서 또 다시 영창대군만 죽여야 한다는 계통의 골북(骨北), 인목왕후도 죽여야 한다는 이이첨, 허균 계통의 육북(肉北),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사형을 모두 반대하는 소수의 중북(中北, 기자헌, 유몽인)으로 나뉘었다. 1605년 죄의정(左議政) 일 때 선조가 광해군을 왕세자(王世子)에서 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세자(王世子)로 삼으려 하자 이를 끝까지 반대하여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1614년 영의정이 되었고 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않된다고 끝까지 알리다가 문외출송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홍원(洪原)에 유배되었다가 함경북도 길주(吉州)로 옮겨 유배되었다. 이때 아들 기준격은 글 잘하기로 소문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에게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기준격은 허균의 언행을 보았기 때문에 허균의 위험한 사상과 행보를 알게 되었다. 기준격이 이 아버지를 유배보낸 것을 허균의 짓으로 보고 그를 공격하여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허균이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보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서 허균이 체포되었다. 허균은 1589년 같이 생원시에 합격한 이이첨과 합류해서 대북에서 인목대비를 폐모하는 주장의 선봉장이 되었다. 대북의 영수 이이첨은 허균을 신뢰했고 허균이 인목왕후를 몇 차례에 걸쳐 암살을 기도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암살을 기도하는 과정에서 하인준 등 사람을 시켜 도성 내외에 유구국인들이 쳐들어온다는 내용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당시 소외되어 있던 불교계를 끌어들여 봉기 계획을 진행하면서 이이첨과 관계가 틀어졌다. 이후 허균의 일당 하나가 불심 검문으로 붙잡혀 계획이 탄로났다. 이후 능지처참 되었다. 1623년 능양군과 서인이 구테타를 모의할 때 김유와 이귀 등이 의사를 타진해 오자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하여 거절하였다. 구테타 성공 후에 남인 이원익 등의 추천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광해군을 모셨던 사람으로서 옛 주인을 배신할 수 없다며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는 만전 상공이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고 의심하고 혐의를 입증할 만한 물증도 없이 의금부 감옥에 가두었다. 1624년 1월 25일 이괄의 난이 일어나 한성이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집권 서인에 의해 다른 반대파들과 죽었다. 당시 좌찬성 이귀(李貴)는 죄가 있다면 국문해서 죄를 밝히고 유배 보내거나 사형시키자고 했으나, 판의금 김류(金瑬)는 내통의 우려가 있으니 죽이자고 청하였다. 그밖에 김자점 등도 이들의 처형을 상주하였다. 사형된 이들 중에는 그 외에도 아들 기준격과 기순격(奇順格)이 있다. 이때 일족들 역시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그 뒤 동생 기윤헌 등도 투옥되었고, 기윤헌은 혐의를 승복하지 않다가 형장을 맞다가 죽었고 기윤헌의 아들 기수발도 죽었다. 이후에 이원익, 이귀 등의 상소로 신원, 복구되었다. 이렇게까지 내통을 걱정한 이유는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의 서자 기직남의 아들 기익헌이 반란군 이괄의 부하로 있었기 때문이다. 기익헌은 얼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고위직으로 진급할 수 없었으나 무과에 급제하고 왕족이었던 이문빈(李文賓)의 사위가 되었다. 이후 궁궐 재건과 조선(造船) 등에 공을 세워, 광해군의 특명으로 고원군수(현 함경남도 고원군)에까지 오른다. 아마 광해군의 총신이었던 점이 이괄에게 동조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괄이 패주하여 도망가는 도중에 이수백(李守白)과 함께 이괄을 배신하여 이괄과 한명련(韓明璉)의 목을 베어 바쳤고, 반란의 주동자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사형당해야 하지만 인조와 이귀의 두둔으로 진도로 유배를 갔다가 7년 후 풀려났다. 정작 반란에 가담한 자신은 멀쩡히 살아남고 무고한 친척들만 죽게 된 경우다. 기익헌은 출신이나 관직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붕당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배경이 없어서 오히려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수백은 유배를 갔다가 풀려난 지 몇 해 안 있어, 관군출신으로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이중로(李重老), 박영신(朴榮臣)의 아들들인 이문웅(李文雄), 이문위(李文偉), 박지병(朴之屛), 박지원(朴之垣), 박지번(朴之藩)에게 대낮에 살해당한다. 그러나 기익헌은 도성에서 살아갔다. 기준격의 후손은 무주 풍동면에 옭겨 숨어살다가 전남 순천과 경남 함양군 안의면 상비리에 옮겨산다. 기순격 후손은 전남 무안 함평에 산다. 기신격은 옛족보엔 자식없다고 했는데 요즘 족보엔 후손이 잠시 귀양갔던 길주와 명천지역에 산다고 한다. 민격의 후손은 충남 서산, 태안에 산다고 한다. 기윤헌의 아들 기수발은 이괄의 난 때 죽고 양자가 장성 참판공 문중에서 왔는데 전남 무안 지역에 산다. 여기에서 기성휘 할아버지가 도승지공문중으로 양자가서 춘천문중이 된다. 기수실의 후손이 나주 무안 영광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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