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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기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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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기원奇遠 할아버지에 대한 자세한 사실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내가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1480년에 태어나시어 1521년 막내동생 기준奇遵 할아버지가 기묘사화 후에 유배지에서 돌아가시자 넷째 기진奇進 할아버지와 함께 장성 아치실로 내려오시어 1522년 42세로 돌아가시고 부인이신 안동김씨 할머니는 그 다음해인 1523년 돌아가신 것으로 족보에 나온다. 아드님이 3형제가 있으셨고 생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둘째 아들이신 기대유 할아버지의 부인 함양오씨 할머니가 1507년생인 것으로 추정은 할수 있다. 할아버지들이 대략 3세정도 어리긴 하지만 단정할 순 없어 기대유 할아버지도 할머니와 대략 동갑으로 가정하면 어머니이신 안동김씨 할머니가 돌아가신 1523년엔 16살 정도 되셨고 형인 기대익 할아버지는 2~3세 많은 18살이나 19살 동생이신 기대이 할아버지는 13살이나 14살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기준으론 모두 미성년으로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아마도 작은 아버지 기진奇進 할아버지의 돌봄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나이에 경제적으로 어떻게 사셨을까 걱정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웹페이지가 없어졌지만 고봉선생의 문헌공종중 홈페이지에 올라온 기진奇進 할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나누어준 유산분배 문서인 분배기에 보니까 재벌만 아니었지 엄청 부유했다. 고봉선생이 쓰신 아버지 기진奇進 할아버지 행장에 흉년이 들어 끼니가 없었다거나 고봉선생이 돌아가시자 가난하여 장례치르기 힘드니까 조정에서 보조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하여 허락 받은 건들은 그냥 청빈을 강조한 것일 뿐이고 꽃과 나무를 가꾸며 유유자적했다는 표현대로 먹고사시는 데는 아무 지장 없으셨던 분들이다. 물론 부인이신 강씨 할어니가 가져온 재산일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서울에서 내려가실 때 빈손으로 오셨을 리는 없어 보이고 기원奇遠 할아버지도 역시나 재산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물론 후대로 내려가면서 후손은 늘어나고 분배되면서 거의 없어졌겠지만 끼니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고 본다. 참판공 기원奇遠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 기대유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 기효근 할아버지가 임진전쟁에서 원균의 부하로 전공을 세운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기효근을 찾아보면 이렇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당시 왕의 명을 받아 주와 군의 군비를 두루 점검하였다. 1590년 남해현령南海縣令으로 부임하여 전선[戰艦]과 병기를 수리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元均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해전에 참가하였다. 그때마다 선봉이 되어 큰 공을 세웠으므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병으로 현령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적병을 만나 어머니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이 되어 개백군皆伯君에 추봉되고 정2품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때 아버지 기대유 할아버지는 같은 품계의 호조판서 고흥군으로 봉해지고 할아버지 기원奇遠 할아버지는 한등급아래 종2품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시어 참판공 문중으로 불리운다. 증조부 기찬奇襸 할아버지는 한등급아래 정3품으로 추증이 되어야겠지만 이미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 때 종2품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어 더 이상 추증은 없었다. 아들이신 기종헌 할아버지도 아버지를 따라 종군한 공으로 행원군에 봉해지고 충청도수군절도사까지 지낸다. 참판공 문중은 기효근 할아버지의 큰형이신 기효간 할아버지 후손이 금강공문중을 이루며 인원수로 보나 배출된 후손들을 보나 큰 줄기를 이룬다. 기효간奇孝諫(1530~1593) 할아버지는 문묘에 종사된 김인후金麟厚에게 배웠으며, 기정익奇挺翼(1627~1690) 할아버지는 송시열에게 배웠다. 참판공문중에서도 송암 기정익 할 아버지의 후손이 가장 번성한데 손자대에서  가까운 형제들에게 양자들을 가셔서 지안의 대를 이었고 후손가운데  4형제 기태온, 기태량, 기태공, 기태검의 후손들 가운데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이이李珥, 임성주任聖周,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히는 노사 기정진 선생이 가장 유명하다. 기정진 선생은 소과를 장원했지만 대과는 응시하지 않았고, 높은 명성 때문에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지만 아주 잠깐을 빼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1910년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 4형제의 후손들이 한말의 유명한 의병자이자 문장가인 기우만 선생은 손자이고 의병장 기삼연. 기재, 기산도 등등의 여러 분들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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