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승지공 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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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기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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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임진전쟁 전후의 기씨 역사를 청파 할아버지 후손 5형제의 문중별 역사이다.
기형奇逈 할아버지의 아들 기대복 할아버지와 이량의 딸 전주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기령 할아버지는 1568년 대과에 급제하여 선천군수와 승지를 지내고 1589년에는 사신으로 명에 다녀와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임진전쟁이 나던 1592년에는 형조참의로 있으면서 전시에 강원도의 군사를 맞은 강원도순찰사를 지내고 1594년 돌아가신다. 임진전쟁이 끝나고 큰 공을 세운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원균元均 1등공신 3명과 2등공신 5명, 3등공신 10명 등 모두 18명의 무신武臣에게 녹훈한 것이 선무공신宣武功臣이고, 이에 들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에 9,060명을 1. 2. 3등으로 나뉘어 녹훈한 것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며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錄勳되었으며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그러면서 아버지 기대복 할아버지는 이조참판으로 할아버지이신 기형奇逈 할아버지는 도승지로 추증이 되시어 도승지공 문중을 이룬다. 증조부 기찬奇襸 할아버지는 앞서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가 한성판윤이 되면서 추증받은 종2품 이조참판보다 더 높지 못해 추가 추증은 없었다. 아들 기홍헌 할아버지의 큰아들 기혼 할아버지 집에 장성문중에서 복제공 문중으로 양자로 간 분의 후손이신 기성휘 할아버지가 또 도승지공 문중으로 양자가서 춘천에 정착한다. 둘째 기심의 후손집으로는 별좌공 문중에서 양자오고 또한 직계손과도 함께 김포로 이주한다. 기령 할아버지의 다른 아들인 기수 할아버지는 나주에 정착한다. 기령 할아버지의 동생 기훈 할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여 부평부사富平府使, 삼수, 안성, 서산군수를 지내고, 훈련원정, 인산첨사를 거쳐 충청수사를 지냈고 후손은 수원에 정착한다. 기대복 할아버지의 막내아들 기란 할아버지의 아들 기만헌 할아버지는 1628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 사간을 거쳐 벼슬은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함경남도 단천에 공덕비가 있다. 족보엔 이 공덕비문을 인용한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비의 겉면에 정녀 관비 일선은 곧 공의 아들 진사 인의 사랑하는 여인이다.(碑傍有旌女官婢日仙卽公之子進士寅所眄也. 所眄;좋아지내는 여인)라는 기록으로보아 뭔가 전설이 있는 듯하지만 자세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그 후손은 부단으로 나와 절손 된 것으로 보인다. 기대복 할아버지의 큰아들 의 혹은 억으로 읽는 기의 할아버지의 후손은 아들 기성헌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신 기협 할아버지가 문과 급제하고 선천부사로 있을 때 청나라가 처들어온 병자호란이 일어나 능한산성에서 전사하면서 덕풍군에 봉해지고 아버지 기성헌 할아버지는 호조참판으로 추증되고 할아버지 기의 할아버지는 좌승지로 추증되지만 증조부 기대복 할아버지는 둘째 아들이신 기영 할아버지가 선무원종공신이 되면서 이조참판으로 추증 되었기 때문에 더 추증은 없었다. 기협 할아버지의 아들인 기진흥은 1644년에 문과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651년(孝宗2년) 경기도 교동수사에 이르렀으나 이해에 김자점의 숙청 사건이 일어나 같이 죽었다. 김자점은 능양군이 광해를 몰아내는 구테타에 가담하여 권신이 된 후에 병자년 청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엔 임경업 장군을 죽게하는 등 친청파가 되었으나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친청파를 숙청하면서 홍천에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 청나라에 새 왕이 옛 신하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내어 청나라가 조사단을 파견하게 하였으나 여러 신하가 간신히 무마시키고 그 죄로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에 손자 며느리 효명옹주의 저주 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김익金釴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해 원두표, 김집, 송시열, 송준길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발각되어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교동수사로 있던 기진흥도 김자점과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로 가까운 사이라 역모 가담자가 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이후 도승지공의 후손은 과거 볼 자격이 박탈되어 신분사회인 조선에서 더 이상 양반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 청파 할아버지의 장손집으로 청파 할아버지의 불천위 혹은 부조명 제사도 끈기게 되는데 기대복 할아버지의 큰아들과 나머지 아들들은 어머니가 다르고 나이차이도 많이 나서 헌자 돌림에서 거의 막내인 기만헌 할아버지와 큰집에서 종손인 기진흥은 할아버지와 손자 항렬이지만 나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은 듯하다. 앞서 소개한 고봉 할아버지가 퇴계선생에게 질문한 것 가운데 4대 기제사가 마지막 남은 현손자가 죽으면 그만하고 신주는 매안 하는데 현손자는 죽었지만 현손자의 부인이 살아있으면 매인해야 하느냐를 묻는 대목이 있다. 그 당시는 청파 할아버지가 불천위는 아니고 기제사만 지냈는데 정자공 기침 할아버지가 지은 아버지 기은 기의헌 할아버지의 행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무자戊子(1648)년에 서울에 사는 대종大宗에서 정무공 제사를 폐하지 않는 사판(不祧祀板)을 함부로 묻어버렸다. 어버지께서는 종손宗孫 진흥震興과 8촌동생三從弟 전에 정언正言을 지낸 만헌晩獻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속히 다시 복구하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정언晩獻은 병으로 죽고, 진흥震興은 죄로 죽었다. 끝내 일을 이루지 못하여 종사宗祀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아버님은 항상 이를 통한痛恨으로 여겼다.(戊子年間, 京居大宗擅埋貞武公不祧祀板, 府君貽書宗孫震興及三從弟前正言晩獻, 令速改造, 未幾正言病卒, 震興罪死, 竟不就而宗祀遂絶, 府君尋常痛恨焉).]
이것을 보면 도승지공 후손들은 양반신분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고 불천위이던 청파 할아버지의 신주는 묻어버리고 도선산도 판 다음에 서울을 떠났다. 10여년전에 보면 지금 도승지공 기형奇逈 할아버지의 묘를 몰라서 대충 이 묘일 것이다 하고 있는 상태로 추정해 알고 있는 묘가 정확히 도승지공 묘인지 기대복 할아버지 묘에서 나온 묘지명처럼 혹시 묘지명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파보자고 하는 논의를 보았는데 그처럼 기형奇逈 할아버지 묘도 잊을 정도로 원당 도선산을 잊고 다 떠났다. 그 후에 실재로 파보았는지는 모르겠다. 더 이상 역사책에 보이는 도승지공 인물은 없다.
기형奇逈 할아버지의 아들 기대복 할아버지와 이량의 딸 전주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기령 할아버지는 1568년 대과에 급제하여 선천군수와 승지를 지내고 1589년에는 사신으로 명에 다녀와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임진전쟁이 나던 1592년에는 형조참의로 있으면서 전시에 강원도의 군사를 맞은 강원도순찰사를 지내고 1594년 돌아가신다. 임진전쟁이 끝나고 큰 공을 세운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원균元均 1등공신 3명과 2등공신 5명, 3등공신 10명 등 모두 18명의 무신武臣에게 녹훈한 것이 선무공신宣武功臣이고, 이에 들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에 9,060명을 1. 2. 3등으로 나뉘어 녹훈한 것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며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錄勳되었으며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그러면서 아버지 기대복 할아버지는 이조참판으로 할아버지이신 기형奇逈 할아버지는 도승지로 추증이 되시어 도승지공 문중을 이룬다. 증조부 기찬奇襸 할아버지는 앞서 판윤공 기대항 할아버지가 한성판윤이 되면서 추증받은 종2품 이조참판보다 더 높지 못해 추가 추증은 없었다. 아들 기홍헌 할아버지의 큰아들 기혼 할아버지 집에 장성문중에서 복제공 문중으로 양자로 간 분의 후손이신 기성휘 할아버지가 또 도승지공 문중으로 양자가서 춘천에 정착한다. 둘째 기심의 후손집으로는 별좌공 문중에서 양자오고 또한 직계손과도 함께 김포로 이주한다. 기령 할아버지의 다른 아들인 기수 할아버지는 나주에 정착한다. 기령 할아버지의 동생 기훈 할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여 부평부사富平府使, 삼수, 안성, 서산군수를 지내고, 훈련원정, 인산첨사를 거쳐 충청수사를 지냈고 후손은 수원에 정착한다. 기대복 할아버지의 막내아들 기란 할아버지의 아들 기만헌 할아버지는 1628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지평, 사간을 거쳐 벼슬은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함경남도 단천에 공덕비가 있다. 족보엔 이 공덕비문을 인용한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비의 겉면에 정녀 관비 일선은 곧 공의 아들 진사 인의 사랑하는 여인이다.(碑傍有旌女官婢日仙卽公之子進士寅所眄也. 所眄;좋아지내는 여인)라는 기록으로보아 뭔가 전설이 있는 듯하지만 자세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그 후손은 부단으로 나와 절손 된 것으로 보인다. 기대복 할아버지의 큰아들 의 혹은 억으로 읽는 기의 할아버지의 후손은 아들 기성헌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신 기협 할아버지가 문과 급제하고 선천부사로 있을 때 청나라가 처들어온 병자호란이 일어나 능한산성에서 전사하면서 덕풍군에 봉해지고 아버지 기성헌 할아버지는 호조참판으로 추증되고 할아버지 기의 할아버지는 좌승지로 추증되지만 증조부 기대복 할아버지는 둘째 아들이신 기영 할아버지가 선무원종공신이 되면서 이조참판으로 추증 되었기 때문에 더 추증은 없었다. 기협 할아버지의 아들인 기진흥은 1644년에 문과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651년(孝宗2년) 경기도 교동수사에 이르렀으나 이해에 김자점의 숙청 사건이 일어나 같이 죽었다. 김자점은 능양군이 광해를 몰아내는 구테타에 가담하여 권신이 된 후에 병자년 청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엔 임경업 장군을 죽게하는 등 친청파가 되었으나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친청파를 숙청하면서 홍천에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 청나라에 새 왕이 옛 신하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내어 청나라가 조사단을 파견하게 하였으나 여러 신하가 간신히 무마시키고 그 죄로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에 손자 며느리 효명옹주의 저주 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김익金釴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해 원두표, 김집, 송시열, 송준길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발각되어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교동수사로 있던 기진흥도 김자점과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로 가까운 사이라 역모 가담자가 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이후 도승지공의 후손은 과거 볼 자격이 박탈되어 신분사회인 조선에서 더 이상 양반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 청파 할아버지의 장손집으로 청파 할아버지의 불천위 혹은 부조명 제사도 끈기게 되는데 기대복 할아버지의 큰아들과 나머지 아들들은 어머니가 다르고 나이차이도 많이 나서 헌자 돌림에서 거의 막내인 기만헌 할아버지와 큰집에서 종손인 기진흥은 할아버지와 손자 항렬이지만 나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은 듯하다. 앞서 소개한 고봉 할아버지가 퇴계선생에게 질문한 것 가운데 4대 기제사가 마지막 남은 현손자가 죽으면 그만하고 신주는 매안 하는데 현손자는 죽었지만 현손자의 부인이 살아있으면 매인해야 하느냐를 묻는 대목이 있다. 그 당시는 청파 할아버지가 불천위는 아니고 기제사만 지냈는데 정자공 기침 할아버지가 지은 아버지 기은 기의헌 할아버지의 행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무자戊子(1648)년에 서울에 사는 대종大宗에서 정무공 제사를 폐하지 않는 사판(不祧祀板)을 함부로 묻어버렸다. 어버지께서는 종손宗孫 진흥震興과 8촌동생三從弟 전에 정언正言을 지낸 만헌晩獻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속히 다시 복구하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정언晩獻은 병으로 죽고, 진흥震興은 죄로 죽었다. 끝내 일을 이루지 못하여 종사宗祀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아버님은 항상 이를 통한痛恨으로 여겼다.(戊子年間, 京居大宗擅埋貞武公不祧祀板, 府君貽書宗孫震興及三從弟前正言晩獻, 令速改造, 未幾正言病卒, 震興罪死, 竟不就而宗祀遂絶, 府君尋常痛恨焉).]
이것을 보면 도승지공 후손들은 양반신분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고 불천위이던 청파 할아버지의 신주는 묻어버리고 도선산도 판 다음에 서울을 떠났다. 10여년전에 보면 지금 도승지공 기형奇逈 할아버지의 묘를 몰라서 대충 이 묘일 것이다 하고 있는 상태로 추정해 알고 있는 묘가 정확히 도승지공 묘인지 기대복 할아버지 묘에서 나온 묘지명처럼 혹시 묘지명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파보자고 하는 논의를 보았는데 그처럼 기형奇逈 할아버지 묘도 잊을 정도로 원당 도선산을 잊고 다 떠났다. 그 후에 실재로 파보았는지는 모르겠다. 더 이상 역사책에 보이는 도승지공 인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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