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기씨 큰 문중(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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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행주기씨가 여러 큰 문중으로(대파로) 갈라지는 내용이다. 족보상으로 7세조 기현 할아버지에게는 아들이 5형제 있다. 순서는 기중평, 기중리, 기중민, 기중제, 기중수이다. 첫째 기중평 할아버지는 종7품 직장直長 벼슬을 지내셔서 직장공으로 불리시며 청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시고 후손이 기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둘째 기중리 할아버지는 자식이 없다고 하지만 벼슬이 사간司諫이라고 해서 앞서 고려사에서 확인되는 기숙륜의 벼슬 우사간右司諫인 것으로 보아 기중리가 기숙륜으로 판단을 했다. 자녀는 없다. 셋째 기중민 할아버지는 벼슬이 정6품의 낭장郎將을 지내셔서 낭장공으로 불리시며 후손은 황해도 지역에서 해서문중의 주류를 이룬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행주기씨 최초로 1664년에 족보를 발행한 곳이 해방전 일제시기까지 가장 큰 행주기씨 집성촌이 황해도 금천군 좌면 암사리에 있었고 그 외에도 많은 가구가 재령평야가 있는 재령군에 살며 가까운 신천군, 봉산군, 평산군, 서흥군, 해주, 연백군, 송화군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일부가 평안도로 넘어가 평양 옆의 평안남도 성천군 사가면에 살았다. 넷째 기중제 할아버지는 벼슬이 종6품의 규정糾正을 지내셔서 규정공으로 불리시며 후손도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 지역에 살며 해서문중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기중민 할아버지 후손에 비해서는 미약하다. 후손은 군수 현령 등의 벼슬을 지내고 있으며 현손녀 사위 2명에게 왕족이 있다. 큰사위는 검천부정劒川副正 이즙李楫이고 둘째사위가 사천부수泗川副守 이탑李榻으로 효령대군의 증손자이다. 조선초기까지는 왕족들과도 교류했음을 알수 있다. 다섯째 기중수 할아버지는 벼슬이 관리들을 감찰하는 종5품 지평持平을 지내셔서 지평공으로 불리신다. 지평공은 아들이 다섯이고 첫째 아들 기렴은 딸 하나만 두었고 둘째 아들 기임稔 할아버지의 후손은 경남 김해시에 산다. 셋째 아들 기책責 할아버지의 후손은 손자 기정지 할아버지가 파주 교하 송촌에 정착하여 산다. 넷째 기질質 할아버지는 벼슬이 강화부사와 부평부사를 거처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족보에 자녀는 아들이 하나 기시경 이라 나오지만 조선세조실록 1461년 7월 3일 기록은 선조와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대입 한다면 무슨 내용인지 이해 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기질 할아버지의 후손은 족보에 경남 의령군 부림면에 산다고 나온다. 실록의 기록은 이렇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부평부사富平府使 기질奇質의 첩妾의 아들 기중산奇仲山은 이미 속신贖身하여 양인良人이 되어 충찬위忠贊衛에 소속되었는데, 기질이 막내아들 기보奇寶를 종애鍾愛 하여 가계를 이어 제사를 받들게 시키려고 하고 도리어 기중산을 자기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천한 아내에게 장가들었으니 가계를 이어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은 도리에 마땅치 못하다고 하고, 혹은 말하기를, 충찬위에 입속入屬한 것은 나의 아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여, 여러 가지로 말을 얽어서 그 아들을 아들로 여기지 아니하여 장고狀告까지 하였으며, 큰아들을 폐하고 작은아들을 세우는 것을 그 마음대로 하니, 나라의 법을 허물어뜨리고 강상綱常을 어지럽게 하여 형상이 없음이 막심합니다. 만약 사유赦宥를 지난 까닭으로써 다스리지 아니하면 징계함이 없을 것이니, 청컨대 기중산으로 하여금 예전대로 가계를 이어 제사를 받들게 하고, 기질은 파직시키소서 하니, 명하여 기중산은 가계를 이어 제사를 받들게 시키고, 기질은 파직시키지 말게 하였다.
○司憲府啓: 富平府使奇質妾子仲山, 旣贖身爲良, 屬忠贊衛, 質鍾愛季子寶, 欲令承重, 反以仲山爲非己之子, 或言 娶賤妻, 義不當承重, 或言 入屬忠贊衛, 非吾所知, 多般構辭, 不子其子, 至於狀告, 廢立長少任其情私, 棄毁國典, 紊亂綱常, 無狀莫甚。 若以經赦不治, 無以懲戒, 請令仲山仍舊承重, 罷質職。 命仲山承重, 勿罷質職]
다섯째 아들 기분賁 할아버지는 벼슬이 공조참판工曹參判까지 지내셨고 아들 기자환 할아버지이다. 기분 할아버지의 현손자 기원길 할아버지와 큰아들 기복성 할아버지는 묘가 평산에 있다는 것으로 보아 개성 옆의 황해도 평산군에 사신 것으로 보인다. 기복성 할아버지의 아들 기윤전 할아버지는 묘가 한전에 있고 자손이 이어 내려오며 산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한전이 어디 인지는 옛지명이라 모르지만 그 아들 기준영 할아버지의 묘는 정족우산동이라는 것을 보아서는 황해도 재령군의 정족산부근으로 이주하여 후손이 사시는 것으로 보인다. 기원길 할아버지의 작은 아들 기복량 할아버지와 아들 기극창 할아버지는 묘가 구례인 것으로 보아 황해도 평산에서 전남 구례로 이주하셨고 다시 아들 기택룡 할아버지부터 묘가 전남 곡성군 죽곡면 반송리인 것으로 보아서 구례에서 다시 곡성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司憲府啓: 富平府使奇質妾子仲山, 旣贖身爲良, 屬忠贊衛, 質鍾愛季子寶, 欲令承重, 反以仲山爲非己之子, 或言 娶賤妻, 義不當承重, 或言 入屬忠贊衛, 非吾所知, 多般構辭, 不子其子, 至於狀告, 廢立長少任其情私, 棄毁國典, 紊亂綱常, 無狀莫甚。 若以經赦不治, 無以懲戒, 請令仲山仍舊承重, 罷質職。 命仲山承重, 勿罷質職]
다섯째 아들 기분賁 할아버지는 벼슬이 공조참판工曹參判까지 지내셨고 아들 기자환 할아버지이다. 기분 할아버지의 현손자 기원길 할아버지와 큰아들 기복성 할아버지는 묘가 평산에 있다는 것으로 보아 개성 옆의 황해도 평산군에 사신 것으로 보인다. 기복성 할아버지의 아들 기윤전 할아버지는 묘가 한전에 있고 자손이 이어 내려오며 산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한전이 어디 인지는 옛지명이라 모르지만 그 아들 기준영 할아버지의 묘는 정족우산동이라는 것을 보아서는 황해도 재령군의 정족산부근으로 이주하여 후손이 사시는 것으로 보인다. 기원길 할아버지의 작은 아들 기복량 할아버지와 아들 기극창 할아버지는 묘가 구례인 것으로 보아 황해도 평산에서 전남 구례로 이주하셨고 다시 아들 기택룡 할아버지부터 묘가 전남 곡성군 죽곡면 반송리인 것으로 보아서 구례에서 다시 곡성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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