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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기씨역사

7세 현 할아버지와 신해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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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5-11-30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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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기씨의 본류를 이루고 있는 3세 필선 할아버지의 후손 역사를 살펴보겠다.
3세 필선 할아버지의 사위 김기손에 대하여 족보는 먼 외손들 가운데 4명의 왕비를 배출한다. 족보를 인용해 본다.
[김기손金起孫, 경주김씨慶州金氏, 벼슬은 시중侍中, 아들은 시랑侍郞 신우信佑, 사위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천李仟, 이천의 큰 아들은 전한典翰 이자원李子蒝, 작은 아들은 정승政丞을 지낸 문장공文莊公 이혼李混, 이자원의 아들은 대제학大提學 이언충李彦冲 이언충의 아들은 판사判司 이광기李光起, 이광기의 사위는 본관이 파평坡平사람으로 영평군鈴平君 윤척尹陟, 윤척의 손자는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번尹番이며 세조世祖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를 낳았다, 윤번의 현손자는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 이광기의 동생은 부사副使 이광익李光翊, 이광익의 손자는 판사判司 이욱李勖, 이욱의 사위는 본관이 청주淸州로 판중추判中樞를 지낸 한창韓昌, 한창의 아들은 청주부원군淸州府院君 한백륜韓伯倫으로 예종睿宗비 안순왕후安順王后를 낳았다. 이광기의 넷째 아들은 이사안李思安, 이사안의 현손은 감사監司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이덕영李德榮, 사위는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지임尹之任으로 중종中宗왕비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낳았다.]

4세 기겸 할아버지에게는 아들이 3명이고 큰아들인 기강 후손은 절손되었고 둘째 아들 기유奇裕의 후손이 기씨의 대종손가이지만 번성하지 못했다. 이 집안은 묘의 위치들을 보면 안산의 사내곡과 용인 그리고 충북 옥천 등지에 거주해 왔다. 많은 집은 아니고 10가구 이내의 집안으로 보인다. 역사책에 나오는 기염奇廉의 문중분은 임진왜란에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경호하여 종전후에 호성공신이 된 12세손 기효복이 있다. 그 후엔 크게 이름이 오르신 분이 없다. 그리고 같은 시기의 만전상공이 16세손인 것을 보면 4세손이나 차이가 난다. 이에 대하여 족보엔 평을 하고 있다. 인용하면 [재신宰臣 기염奇廉의 아들 기삼동奇三同의 구보舊譜에 관한 내용은 이 기록이 전부이다. 그러나 지금今 그 세수를 고찰하는데考之其世數 있어서 항상 의문이 있다尙有可疑. 고려말 기염奇廉의 세수차이를 고찰하는데 기록상 현손 고흥군 기효복奇孝福이 있다其玄孫高興君孝福. 고려말 재신宰臣 기염奇廉 공公과 조선 선조 때 임진2등공신壬辰二等功臣 기효복奇孝福 공公과의 사이에 200년간은 맞지 않는다宣廟壬辰功臣則二百年間不應世數止. 즉 2~3세의 누락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지만此宰臣高興之間恐有二三世失漏 옛 기록이 부족하여 확실한 단정은 할 수 없고不能臆斷 이러한 내용을 여기에 기록하여 남긴다故姑錄於此.]

4세손 기겸 할아버지의 사위로 김지수라고 있다. 족보엔 화평김씨로 나오고 요즘 본관으로는 광산김씨이다. 그 손자 가운데에 김원명이 있는데 기철을 제거하는 데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된다. 이 김원명이 신돈을 공민왕에게 소개하여 신돈이 고려 정치에 등장한다. 기겸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신 5세손 기절 할아버지의 후손이 현재 남북 전체 기씨의 후손으로 공민왕시대에 사셨고 신돈이 숙청되면서 같이 죽임를 당하신 7세손 기현 할아버지가 있다. 기현 할아버지는 두번 결혼하신 족보기록이 있고 첫 번째 부인은 윤씨 할머니이고 두 번째 부인이 김황의 딸 김씨로 자식을 낳아 기른 적은 없다[無育]고 족보는 기록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황후 기씨의 할아버지이신 기관의 형이 기온 할아버지로 호부상서를 지내셨다, 그 둘째 아들이 진소 할아버지이시며 사위는 이중육이다. 이 이중육의 사위가 강능김씨 김지복으로 김황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기현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 강능김씨와 김지복은 남매사이가 되고 김지복의 사위는 기현 할아버지의 큰아들 8세손 기중평 할아버지이다. 기중평 할아버지의 부인이신 강능김씨와는 고모와 조카이면서 새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된다. 기중평 할아버지는 청파 정무공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이다. 이 기황의 딸 김씨와 신돈과의 인연으로 기현 할아버지와 연결이 되는 데 고려사의 지저분한 기록을 순화하여 풀어본다.

[처음에 기현奇顯의 후처는 과부였을 때에 신돈과 승려로서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나중에 기현奇顯과 결혼했다. 신돈이 궁궐에서 나와서 기현奇顯의 집에 머물렀다. 모든 관리들이 모두 기현奇顯 집에 와서 일을 의논하니 기현奇顯의 처가 음식 시중을 주관하게 하였다. 신돈辛旽이 기현奇顯의 집에 살면서 개성 봉선사奉先寺 소나무 언덕을 지나 궁을 출입하였다. 봉선사가 있는 언덕 서남쪽에 약간 빈 땅이 있어 신돈이 이곳에 집을 지었다. 이 집을 기현奇顯의 처가 관리자가 되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거나 관직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처나 첩을 보내서 먼저 기현奇顯의 처에게 뇌물을 주고서야 들어가 신돈을 만날 수 있었다. 처첩들이 뇌물을 가지고 홀로 들어가 바라는 바를 전달하게 하였다. 신돈이 홀로 상대하니 추악한 소문이 돌았다. 기현奇顯과 그 처가 신돈을 모시면서 아침 저녁으로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으니, 늙은 노비 같았다.]
[공민왕恭愍王 20년(1371) 신돈辛旽의 잔치가 열렸는데, 왕이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니 시중侍中부터 그 이하 관작이 있는 자가 모두 참여하여 200여 명이나 되었다. (중략) 신돈이 은혜와 원한이 있으면 반드시 갚으니, 세가대족世家大族이 거의 다 죽임을 당하여 사람들이 (그를) 범이나 이리처럼 보았고, 심지어 벼슬아치를 밤에 자기 집에서 숙직시키기도 하였으며 자질을 따져 벼슬을 주기도 하니, 나가면 시중 이하가 앞뒤를 에워싸서 도로가 막힐 지경이어서 시장에서는 물건도 벌여놓지 않았다. 기현奇顯과 최사원崔思遠이 심복이 되고 이춘부李春富와 김란金蘭이 양팔이 되었으며 그 무리가 조정에 가득 차니, 왕도 스스로 불안한 뜻이 있어 영상領相이라고만 부르고 감히 관직명을 부르지 못하였다.]

신돈은 요승이다 개혁가다 등 평가가 여러 가지 이지만 공민왕이 세력이 커진 신돈에게 위협을 느껴 신돈을 숙청하면서 기현奇顯 할아버지와 연좌된 아들들 기중평 할아버지, 기중리, 기중제 할아버지, 기중수 할아버지가 다 죽임을 당하신다.
고려사를 인용하면
[1371년 7월 6일(음) 병진(丙辰) 1371년 8월 16일(양)
병진날에 선부의랑選部議郞 이인李韌이 익명서를 올려 신돈辛旽의 모역謀逆을 고발하였고, 그 일당 기현奇顯 최사원崔思遠 정구한鄭龜漢 진윤검陳允儉 기중수奇仲修 등을 국문하고 죽였다.
丙辰 選部議郞李韌上匿名書, 告辛旽謀逆, 鞫其黨奇顯崔思遠鄭龜漢陳允儉奇仲修等, 誅之.
1371년 7월 26일(음) 병자(丙子) 1371년 9월 5일(양)
병자날에 신돈辛旽의 무리 이춘부李春富 김란金蘭 이운목李云牧을 죽였고, 그 아들들을 유배 보냈다. 또한 신돈의 아들인 2세 아이와 기현奇顯의 아들 기중평奇仲平을 죽였고, 김진金縝 및 대호군大護軍 김정金鼎을 장형에 처하고 유배 보냈다.
丙子 誅辛旽黨李春富金蘭李云牧編配其子. 又斬旽子二歲兒及奇顯子仲平, 杖流金縝及大護軍金鼎.
1371년 8월 11일(음) 신묘(辛卯), 1371년 9월 20일(양)
신묘날에 신돈辛旽 같은 무리인 신돈辛純 신귀辛貴 임희재林熙載 기숙륜奇叔倫 기중제奇仲齊 최진崔津을 죽이고, 홍영통洪永通 김횡金鋐 허완許完 오중화吳仲華 성준덕成俊德 오일악吳一鶚, 그리고 이춘부李春富의 아우 이광부李光富 이원부李原富를 유배 보냈다.
辛卯 誅旽黨辛純辛貴林熙載奇叔倫奇仲齊崔津, 流洪永通金鋐許完吳仲華成俊德吳一鶚, 及李春富弟光富原富.]
[기현奇顯의 아들 기중제奇仲齊 기숙륜奇淑倫 기중평奇仲平
奇顯子仲齊淑倫仲平]
[기현의 아들 전 정랑正郞 기중수奇仲修
顯子前正郞仲修]
족보엔 기현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 가운데 기숙륜이 안나오고 기중리가 나오는데 벼슬이 사간이라고 하고 고려사엔 우사간右司諫 기숙륜奇叔倫이라는 기록으로 기숙륜이 기중리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기현 할아버지의 형 기자수의 사위인 오일악吳一鶚이나 기중제의 사위 고민高敏도 같은 무리로 유배를 당한다. 기현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 기중민 할아버지가 이때 연좌되어 죽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사건 이전에 죽은 듯하다. 기현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의 부인들과 자녀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을 것이다. 황후의 일족이 당한 것과 함께 공민왕에게 이때 다시 기씨들이 몰살당하는 처참한 기씨의 가장 침체기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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