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의 이른바 기황후능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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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황후 능(陵)의 연천 소재설에 대한 역사적 검증 및 반박
### 1. 개요
최근 경기도 연천군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기황후의 능이 존재한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를 관광 자원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원사(元史)』, 『고려사(高麗史)』 등의 정사(正史) 기록과 당시의 국제 정세, 문헌의 정확한 해석을 종합해 볼 때 **기황후의 능이 연천을 포함한 한반도 내에 존재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이는 후대에 형성된 전설과 잘못된 문헌 해석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 2. 역사적·정치적 상황에 따른 불가론(不可論)
**① 사망 시기와 장소의 문제**
『원사』 기록에 따르면, 1368년 주원장의 명나라 군대가 대도(북경)를 공격하자 원나라 혜종(순제)과 기황후는 내몽골 자치구에 위치한 응창부(應昌府)로 천도하였다. 이후 1370년 혜종이 사망하고 아들 아유르시리다르(소종)가 북원 황위를 계승하였으며, 1378년 소종이 사망하였다. 기황후의 사망 시기는 이 응창으로 물러난 1368년에서 소종이 사망한 1378년 사이로 추정된다. 당시 명나라와 원나라(북원)가 치열하게 대립하던 전쟁 상황에서, 몽골 초원 깊숙한 응창에서 사망한 황후의 시신을 적국인 명나라 영토를 뚫고 고려까지 운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② 고려 내부의 정치적 상황 (이장 주체의 부재)**
설령 시신을 운구하려 했다 해도, 고려 내에서 이를 실행할 정치적 세력이 전무했다.
* **1356년 (병진참화):**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으로 기철을 비롯한 기황후의 친정 가족이 이미 몰살당했다.
* **1364년:** 기황후가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우려 군대를 보냈으나 최영, 이성계 등에게 대패하였다.
* **1370년:** 기황후의 조카 기새인첩목아가 동녕부에서 고려를 공격했으나 역시 패퇴했다.
* **1371년 (신해참화):** 신돈과 연루된 기현(할아버지) 및 아들 5형제가 처형당했다.
즉, 기황후가 사망할 무렵 고려 조정은 기씨 일족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축출한 상태였으며, 남아있는 일족 또한 멸문지화를 당해 능을 조성하거나 이장을 주도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국가적 사업으로 진행되었다면 『고려사』에 기록이 남았겠지만, 그러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 3. 문헌 기록의 오독과 와전
**① 『동국여지지』의 오역과 진실**
연천에 기황후 능이 있다는 주장의 주요 근거로 『동국여지지』나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들고 있다. 연천 동북쪽 15리에 '기후묘(奇后墓)'가 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편찬자가 전설을 채록한 것에 불과하며, 편찬자조차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며 사실이 아님을 암시했다.
> *"按史記, 奇皇后無東還以葬之事, 其或后母國大夫人之葬歟?"*
> *(역사 기록을 살펴보건대, 기황후가 동쪽(고려)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낸 사실이 없으니, 혹시 황후의 어머니인 국대부인(삼한국대부인 장씨)의 장례를 치른 곳이 아닌가?)*
즉, 해당 기록은 기황후의 묘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기황후는 고려로 돌아온 적이 없으니, 전해지는 무덤은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 묘일 것이다"**라고 추측한 내용이다. 이를 기황후 묘의 실재 증거로 삼는 것은 명백한 오역이자 견강부회다.
**② 읍지(邑誌) 기록의 한계**
조선 후기 『연천현읍지』 등에 기황후가 죽어서 고려에 묻해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사건 발생 수백 년 뒤인 조선 말기에 민간에 떠돌던 전설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여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 4. 전국적인 '기황후 전설'의 실체
기황후의 능이나 출생지에 대한 전설은 연천뿐만 아니라 전국 여러 곳에 분포한다. 이는 공녀 출신에서 원나라 황후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신데렐라 스토리)에 대한 민중의 동경이 만들어낸 허구적 설화들이다.
* **남한 내 기황후 능 전설지:** 연천군 외에도 충북 진천, 전남 보성(모후산), 화순 등 약 6곳에 달한다.
* **진천군 설화의 허구성:** 충북 진천군 이월면의 경우, 원나라 쿠빌라이 칸(홀필렬)이 기황후를 데려갔다고 전해지나, 기황후는 쿠빌라이 사후 한참 뒤인 혜종의 황후이므로 이는 명백한 역사적 오류다.
이처럼 각 지역의 기황후 관련 설화는 역사적 사실(Fact)이 아닌 민간 전승(Folklore)일 뿐이다.
### 5. 결론 및 제언
역사적 사료와 당시 정황을 종합할 때, **기황후는 몽골 초원(북원)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묻힌 것이 명백하다.** 연천에 있다는 묘소는 기황후의 어머니인 이씨(혹은 장씨)의 묘소일 가능성은 있으나, 기황후 본인의 능일 수는 없다.
연천군 등 지자체에서 관광 자원 개발을 목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기황후 능' 홍보를 진행하는 것은 '승자의 기록'이나 '역사의 대승적 해석'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역사 왜곡이다.
따라서 행주 기씨 대종중 및 종원들은 다음의 사항을 유념해야 한다.
1. 근거 없는 전설을 기반으로 한 지자체의 관광 사업 홍보에 동원되거나 동조하지 않는다.
2. 명확한 가짜(Fake) 역사에 문중의 예산이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3. 개인적 차원의 참여는 자유이나, 대종중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참여하여 역사적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연천의 기황후 능은 역사적 실체가 없는 허구이며, 이에 대한 맹목적인 동조는 지양해야 한다.**
### 1. 개요
최근 경기도 연천군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기황후의 능이 존재한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를 관광 자원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원사(元史)』, 『고려사(高麗史)』 등의 정사(正史) 기록과 당시의 국제 정세, 문헌의 정확한 해석을 종합해 볼 때 **기황후의 능이 연천을 포함한 한반도 내에 존재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이는 후대에 형성된 전설과 잘못된 문헌 해석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 2. 역사적·정치적 상황에 따른 불가론(不可論)
**① 사망 시기와 장소의 문제**
『원사』 기록에 따르면, 1368년 주원장의 명나라 군대가 대도(북경)를 공격하자 원나라 혜종(순제)과 기황후는 내몽골 자치구에 위치한 응창부(應昌府)로 천도하였다. 이후 1370년 혜종이 사망하고 아들 아유르시리다르(소종)가 북원 황위를 계승하였으며, 1378년 소종이 사망하였다. 기황후의 사망 시기는 이 응창으로 물러난 1368년에서 소종이 사망한 1378년 사이로 추정된다. 당시 명나라와 원나라(북원)가 치열하게 대립하던 전쟁 상황에서, 몽골 초원 깊숙한 응창에서 사망한 황후의 시신을 적국인 명나라 영토를 뚫고 고려까지 운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② 고려 내부의 정치적 상황 (이장 주체의 부재)**
설령 시신을 운구하려 했다 해도, 고려 내에서 이를 실행할 정치적 세력이 전무했다.
* **1356년 (병진참화):**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으로 기철을 비롯한 기황후의 친정 가족이 이미 몰살당했다.
* **1364년:** 기황후가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우려 군대를 보냈으나 최영, 이성계 등에게 대패하였다.
* **1370년:** 기황후의 조카 기새인첩목아가 동녕부에서 고려를 공격했으나 역시 패퇴했다.
* **1371년 (신해참화):** 신돈과 연루된 기현(할아버지) 및 아들 5형제가 처형당했다.
즉, 기황후가 사망할 무렵 고려 조정은 기씨 일족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축출한 상태였으며, 남아있는 일족 또한 멸문지화를 당해 능을 조성하거나 이장을 주도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국가적 사업으로 진행되었다면 『고려사』에 기록이 남았겠지만, 그러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 3. 문헌 기록의 오독과 와전
**① 『동국여지지』의 오역과 진실**
연천에 기황후 능이 있다는 주장의 주요 근거로 『동국여지지』나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들고 있다. 연천 동북쪽 15리에 '기후묘(奇后墓)'가 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편찬자가 전설을 채록한 것에 불과하며, 편찬자조차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며 사실이 아님을 암시했다.
> *"按史記, 奇皇后無東還以葬之事, 其或后母國大夫人之葬歟?"*
> *(역사 기록을 살펴보건대, 기황후가 동쪽(고려)으로 돌아와 장사를 지낸 사실이 없으니, 혹시 황후의 어머니인 국대부인(삼한국대부인 장씨)의 장례를 치른 곳이 아닌가?)*
즉, 해당 기록은 기황후의 묘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기황후는 고려로 돌아온 적이 없으니, 전해지는 무덤은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 묘일 것이다"**라고 추측한 내용이다. 이를 기황후 묘의 실재 증거로 삼는 것은 명백한 오역이자 견강부회다.
**② 읍지(邑誌) 기록의 한계**
조선 후기 『연천현읍지』 등에 기황후가 죽어서 고려에 묻해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사건 발생 수백 년 뒤인 조선 말기에 민간에 떠돌던 전설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여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 4. 전국적인 '기황후 전설'의 실체
기황후의 능이나 출생지에 대한 전설은 연천뿐만 아니라 전국 여러 곳에 분포한다. 이는 공녀 출신에서 원나라 황후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신데렐라 스토리)에 대한 민중의 동경이 만들어낸 허구적 설화들이다.
* **남한 내 기황후 능 전설지:** 연천군 외에도 충북 진천, 전남 보성(모후산), 화순 등 약 6곳에 달한다.
* **진천군 설화의 허구성:** 충북 진천군 이월면의 경우, 원나라 쿠빌라이 칸(홀필렬)이 기황후를 데려갔다고 전해지나, 기황후는 쿠빌라이 사후 한참 뒤인 혜종의 황후이므로 이는 명백한 역사적 오류다.
이처럼 각 지역의 기황후 관련 설화는 역사적 사실(Fact)이 아닌 민간 전승(Folklore)일 뿐이다.
### 5. 결론 및 제언
역사적 사료와 당시 정황을 종합할 때, **기황후는 몽골 초원(북원)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묻힌 것이 명백하다.** 연천에 있다는 묘소는 기황후의 어머니인 이씨(혹은 장씨)의 묘소일 가능성은 있으나, 기황후 본인의 능일 수는 없다.
연천군 등 지자체에서 관광 자원 개발을 목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기황후 능' 홍보를 진행하는 것은 '승자의 기록'이나 '역사의 대승적 해석'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역사 왜곡이다.
따라서 행주 기씨 대종중 및 종원들은 다음의 사항을 유념해야 한다.
1. 근거 없는 전설을 기반으로 한 지자체의 관광 사업 홍보에 동원되거나 동조하지 않는다.
2. 명확한 가짜(Fake) 역사에 문중의 예산이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3. 개인적 차원의 참여는 자유이나, 대종중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참여하여 역사적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연천의 기황후 능은 역사적 실체가 없는 허구이며, 이에 대한 맹목적인 동조는 지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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