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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기씨역사

7세 황후기씨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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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5-11-30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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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윤숙의 장남 기홍영은 황후 기씨의 증조부라서 왕으로 추증이 되었지만 무슨 왕이었는지 왕이름은 모르고 있다. 2004년판 족보편집을 한창하고 있던 2000년쯤에 원당의 도선산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기홍영洪頴의 왕이름을 인왕이라고 한 것을 보고 왕이름은 모른다고 알려졌는데 갑자기 어떻게 알았지 하고 있는데 옆에 계시던 기길수 아저씨께서 족보의 지장록에서 찾았다고 하였다. 1982년판 족보의 지장록에서 이규보가 지은 영안왕 행장의 내용 가운데 仁王妃任氏를 보고 기홍영의 부인이 임씨라서 기홍영의 왕이름을 仁王으로 오해한 것이었다. 그런데 영안왕 행장은 잘 알려진 기록인데 왜 사학계는 모르고 있을까 하면서 이름 찾아 다행이다하였다. 그러나 영안왕 행장을 자세히 다시 읽어보니 해답은 뒤에 있었다. 仁王妃任氏生毅明神三王號恭睿王太后而公之祖母實后弟平章 諱濡之孫는 기홍영의 부인 임씨에 대한 것은 맞지만 내용은 인왕비 임씨는 의,명,신 3왕을 낳은 공예왕태후의 친동생 임유任濡의 손녀라고 해석해야 맞는 것이었다. 여기서 인왕이란 인종을 말하는 것으로 원나라에 눌려 지내던 시기에 황제들이 쓰는 조祖나 종宗을 붙이지 못하고 왕王으로 붙인 듯하다. 그러나 고치지를 못하고 2004년판 족보는 그후에 기홍영의 왕이름은 인왕이라고 인쇄되어 나왔다. 기홍영洪頴의 큰아들 기온薀은 고종의 서녀 그러니까 조선시대면 옹주가 부인이며 1274년에 원나라에 파견되어 원종의 서거를 알리고 원나라에 있던 충렬왕과 왕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왕비로 맞아오게 하였다. 기온의 손녀사위는 이중육이고 이중육의 사위는 김지복이고 김지복의 사위는 기중평 할아버지로 청파 기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이다. 그렇게 또 우리 기씨는 개성왕씨와 유전자가 연결이 된다. 무신난 이후에 떠오른 기씨들이 최충헌 집권과 함께 더 권력층이 되고 최충헌의 묘지명을 쓴 조충의 아들 조계순이 기윤숙의 사위이고 조계순의 사위가 최씨무신정권의 3권째 집권자 최항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씨들과 초충헌의 후손들이 후계구도에서 서로 엮여 고위직에 오르거나 때로는 귀양을 가능 등등 하다가 고려가 몽골에 굴복하여 강화도에서 나오면서 무신정권도 끝나고 같이 권력에서 멀어진다. 이 때에 역사책엔 보이지만 족보엔 안나오던 기씨들을 언급하면 1216년에 기존정奇存靖이 거란과의 전쟁에 참전했고 1219년엔 낭장 기인보奇仁甫가 최충헌崔忠獻을 죽이려다 오히려 살해당했다하고 1228년엔 기저奇泞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가 1229년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1279년엔 기홍석奇洪碩이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감찰제헌監察提憲이 되는 등의 기록이 보인다.

기윤숙의 큰사위가 족보엔 조순趙珣이라 나오지만 조계순趙季珣(https://ko.wikipedia.org/wiki/조계순)이다.
이번엔 황후와 그 가족에 대하여 정리한다.

황후의 가족관계에 대하여 말하자면 공녀로 몽골에간 기자오의 딸이 원나라의 황후가 되자 황후의 아버지 기자오 할아버지 기관 증조부 기홍영은 왕으로 추증이 된다.
영안왕 기자오의 행장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지었는데 이곡의 문집인 가정집에 실려 전하고 우리의 대동보 지장록에도 그대로 옮겨져 있다. 이 기록이 중요한 것은 우리 행주기씨 상계의 조상이 수록되어있기 때문이다.
행장의 재목부터 첨의정승僉議政丞이라는 직함이 나온다. 아직 영안왕으로 봉해지기 전의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계를 요점만 보면 증조曾祖는 이름諱이 윤숙允肅, 할아버지祖는 이름諱이 홍영洪穎, 아버지考는 이름諱이 관琯, 공公의 이름諱은 자오子敖다. 부인夫人은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이씨李氏다. 할아버지 기홍영의 부인이신 할머니 임씨에 대하여는 인왕비仁王妃(고려 인종의 왕비) 임씨任氏가 의명신毅,明,神三王 3명의 왕을 生낳았으니 호號는 공예왕태후恭睿王太后라 하며 공의而公之 할머니祖母가 (공예왕태후의) 친동생實后弟 평장平章 임유濡의 손녀다 했다. 기황후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가 왕으로 추증이 되었지만 아버지가 영안왕이라는 것은 알아도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왕이름(왕호)는 기록이 없다. 요즘謹按 살펴보니 기씨奇氏는 우리나라自國初(고려) 초기에 무예 혹은 무공以武材稱으로 재능이 알려져 세상에 그 공적 혹은 노력世著其勞을 알렸다. 그러나 족보에는 영안왕행장에 나온다는 중시조 기순우 할아버지는 나오지 않고 2세 기수전 할아버지만 공公의 내외內外가 모두皆 명문가문名家이다. 즉由 고조부高祖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이름諱 수전守全 이하以下로 장군으로 나아가 상국이 되어 혹은 장군과 상국을 배출出入將相하여 공을 백성에게 배풀었다功施于民고만 하였다. 영안왕에 대한 다른 기록으로 원나라 구양현이 묘비문을 지었는데 아직 확인을 못해보았지만 그 내용 속에 중시조의 기록이 있는듯 하다. 왜냐하면 이곳엔 기록이 없는데 족보는 확실히 중시조의 이름을 기록했고 또한 2세 기수전할아버지의 부인이신 홍주송씨 할머니에 대한 기록이 이곳에는 없기 때문이다. 혹시나 그곳에도 기순우할아버지가 언급이 없다면 이는 전부터 전해오던 가승에 근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녀에 대하여 生낳으니 5남 3녀五男 三女로 나누어진分 황후皇后는 그 막네其季이다. 장남長男 식軾은 공보다 먼저先公 죽었다歿. 다음次 철轍은 첨의정승으로서以僉議政丞 지금今 덕성부원군으로 봉해졌다. 次다음 轅원은 以僉議贊成事첨의찬성사로서 今지금 封德陽君덕양군으로 봉했다. 次다음 輈주는 大匡元尹대광원윤封德城府院君이다. 다음次 윤輪은 우상시右常侍이다. 장녀長女는 適商議評理상의평리 조희충趙希忠을 맞아들였다. 다음次 둘째사위는 전의령適典儀令 염돈소廉敦紹를 맞아들였다. 손자孫男는 모두凡 11十一명이다. 큰손자長 천린天麟은 원나라이름小字으로 완택보화完澤普化이며 판도총랑으로서以版圖摠郞 련곡으로 들어와入侍輦轂 지금今은 직성사인을 하고爲直省舍人 있다. 다음次 인걸仁傑은 몽고이름小字이 첩목이단화帖睦邇漙化이며 군부총랑으로以軍簿摠郞 궁궐을 지키고 있다宿衞闕庭. 다음次 천기天驥, 유걸有傑, 전룡田龍은 모두皆 낭장郞將이고 나머지餘는 아직 벼슬이 없다未仕. 손녀孫女는 七7명으로 큰 손녀長는 홍복도감판관適弘福都監判官 홍보환洪寶環을 맞아했고 나머지餘는 모두皆 어리다幼.
여기에서 족보에는 없는 내용이 손자 천린天麟, 천기天驥, 홍복도감판관適弘福都監判官 홍보환洪寶環의 존재이다. 이들은 셋째 아들 원轅의 아들 딸로 보인다. 또 손자들은 어느 아들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족보 기록을 보면 돌림자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초의 찬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 형逈, 원遠, 괄适, 진進, 준遵 할아버지까지는 형제 사이에만 쓰였고 그 이후에나 큰대大자 항렬부터 4촌까지 쓴 것을 보면 당연히 당시는 형제 사이에만 쓴 것을 볼 수 있다. 홍보환洪寶環의 처는 씨족원류에 기원轅의 딸로 나온다. 천린天麟과 천기天驥는 하늘 천자를 돌림자로 쓰고 있다. 이는 형제간이고 큰 손자 천린은 소자小字가 완택보화完澤普化라하고 기원奇轅의 아들 가운데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라는 기록으로 보아서 천린은 완택보화이고 천기는 완자보화로 보인다. 연경에 들어가서 직성사인을 한다는 것으로 보아 연경의 황후에게로 가서 이 행장을 쓸 당시엔 직성사인을 하고 있었던 듯하고 1364년에 황후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으로 새로 고려왕을 봉하여 보낼 때 덕흥군의 원자로 삼아보낸 기삼보노가 이 천린이나 천기의 아들인 듯하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기록엔 영안왕의 손자들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있기는 하다. 즉 공민왕 1354년 2월에 기륜奇輪을 삼사좌사, 기원奇轅의 아들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를 판밀직부사로 삼았고, 1354년 4월에는 기윤을 찬성사 덕산부원군德山府院君, 기완자불화를 삼사좌사 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에 다시 임명 했다. 그런데 족보는 여기에 나오는 11명의 손자와 7명의 손녀가 다 기록되어 있지도 않다. 씨족원류에 손녀사위 適弘福都監判官홍복도감판관 洪寶環홍보환은 둘째 기원奇轅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공의公之 가문 선세家世의 공덕功德은 국사에 전재되어 있다載在國史 하는 것을 보면 고려실록에는 우리 기씨 선세의 기록이 있었던 듯 하지만 고려실록은 임진왜란 때에 타버려 없어졌고 지금 남아있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기황후가족을 깍아내리고 기철을 반역열전에 넣었으니 재대로 그 조상에 대한 기록을 할리는 없고 우리 선세기록을 잊어버렸으니 안타깝다. 공의公之 혁혁한 사업事業焯焯은 사람들의在人 이목耳目(눈과 귀)을 끌고 있으니。今지금 그 대강을 행장으로 정리할 때 掇其大槪爲行狀 채택될 준비를 한다以備釆擇焉.
1356년 양력 6월 7일엔 원에서 기원奇轅의 아들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기울제이부카)를 보내 영안왕榮安王을 경왕敬王으로 고쳐 책봉하고, 또 3대를 추봉追封하여 왕으로 삼았으며 기철에게 대사도大司徒를 제수하였다. 하고 하여 구양현에게 영안왕의 비문을 짖게 하여 보내왔다.
기자오가 영안왕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원나라에서는 공민왕과 영앙왕의 지위는 명목상 같았다. 원은 자주 사신을 보내 기황후의 어머니 삼한국대부인 이씨를 예우했는데, 공민왕 역시 대우를 극진히 했다. 공민왕은 특히 새해의 시작엔 이씨를 방문했으며, 원나라 사신[元使]들이 베푸는 잔치에도 빠지지 않았다. 기황후의 생일에는 예외 없이 사신을 원에 파견했다. 1355년 8월에 열린 잔치에서의 자리 배치를 보면, 공민왕과 이씨李氏는 모두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서 앉고 황후의 언니 조희충趙希忠의 처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앉고 기철과 원나라 사신元使은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재추宰樞는 계단위階上에 앉았다. 만만巒巒태자가 황태자에 책봉되어 고려를 방문하여 외할머니께 인사할 때 축하 잔치에서는 노국魯國공주와 황태자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고 공민왕은 서西쪽에 앉고 이씨李氏는 동東쪽에 앉았는데, 공민왕이 술을 부어 먼저 무릎을 꿇고 황태자에게 올리니 황태자가 서서 마시고 황태자가 술을 부어 외할머니 이씨李氏에게 드리고 다음에 공민왕과 노국공주에게 드렸다.

기원奇轅이 공민왕과 말을 타고 나란히 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 황후의 형제들이 공민왕과 같은 지위를 가진 것으로 과시하려 하고, 황후의 친척 동생 기삼만은 남의 땅을 함부로 빼앗다가 1347년 감옥에 갇혀 옥사하는 등의 여러 문제를 일으키자 원 황실과 연결된 기씨들은 존재만으로도 공민왕에게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이에 1356년에 공민왕은 원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서 기철 등을 제거하자 일부는 원으로 도망갔다. 기철 등의 제거는 고려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황후는 가만히 있지 않고 공민왕을 폐하고 중이 되어 원에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하고 중이어서 결혼하진 않아 아들이 없던 덕흥군의 원자로 기씨를 삼아 1만의 군사를 주어 고려로 보냈다. 덕흥군 이후의 고려는 왕씨의 고려가 아니라 기씨의 고려로 만들려고 했지만,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지고 물러난다. 원으로 도망가거나 원에 있던 기철의 아들 기세인첩목아 등은 이성계의 요동 공격으로 물러나 이후엔 역사책에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 후손들이 끈어지지 않았고 성씨도 기씨를 계속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고려에 남은 기철의 아들들은 머리 깎고 숨은 아이도 찾아내어 다 죽였지만 딸과 손자는 죽이지 않았나 보다.
기철의 사위 왕중귀의 먼 외손의 외손 가운데에서 3명의 왕비가 나온다. 이에 대하여는 족보를 인용한다.
왕중귀王重貴 안동사람安東人이다. 본성本姓은 권씨權氏. 벼슬은 동지밀직同知密. 아버지는 정승政丞 정헌공正獻公 왕후王煦. 아들들이 권씨權氏로 다시 돌아갔다. 큰아들 소윤少尹 권숙權肅, 둘째 집의執義 권엄權嚴, 셋째 사직司直 권도權道, 큰사위 박중의朴仲宜는 본本이 죽산竹山. 둘째사위 순성군順城君 왕정王侹. 셋째사위는 이판吏判에 추증된 본本이 양천陽川인 허기許愭. 허기의 아들은 허비許扉, 허비의 큰아들은 영상領相에 추증된 허손許蓀. 둘째는 군수郡守 허훈許薰, 셋째는 군수郡守 허지許芝. 넷째는 주부主簿 허형許蘅. 허손의 사위는 감찰監察 신영석申永錫, 첨지僉知 박임종朴林宗은 본本이 나주羅州. 신영석의 사위는 사인舍人으로 영상에 추증된 심순문沈順門으로 본本이 청송靑松. 심순문의 아들은 영상 심연원沈連源, 심연원의 아들은 청능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綱으로 명종明宗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를 낳았다. 박임종의 아들은 정랑正郎 박조년朴兆年, 박조년의 아들은 사련司諫 박소朴紹, 박소의 아들은 번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으로 선조宣祖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를 낳았다, 허형의 아들은 부정副正 허감許瑊, 허감의 아들은 찬성贊成에 추증된 허초許礎, 허초의 아들은 지사知事 허잠許潜, 허잠의 사위는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 이광정의 사위는 본이 여흥인 민광훈(閔光勳), 민광훈의 아들은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으로 숙종肅宗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낳았다.
족보에 나오는 명종明宗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선조宣祖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숙종肅宗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 3명의 왕비 말고ᄃᆂ 민유중維重의 후손인 민치록致祿의 딸은 고종高宗비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기철이 없었다면 이 4분의 왕비들은 탄생 할 수가 없는 분들이다. 그러나 4분 모두 후손이 왕이 되고 이어진 왕이 없다.

또한 기철-기인걸-기신-기석손-기채로 이어지던 기철의 후손은 현손자 기채가 아들이 없어 딸이 경주정씨 제난공 정효상에게 시집가서 황후집안에 내려오던 모든 재산은 경주정씨 문헌공파 제안공종중으로 넘어갔다. 이 들이 기철의 기계 후손인 것이다. 경기도 파주시 금릉동의 파주시청에서 봉일천 방향으로 나가면 파주시에서 건설한 파주스타디움이 있고 그 위가 기철의 선산(경기도 파주시 학령로 41-16)이다. 그러나 묘를 소개하는 경주정씨의 홈에는 기철의 손자 기신, 기석손, 기채의 묘는 소개하는 것이 없다. 재산 가운데 가장 값있는 종산은 가져 갔지만 묘는 관리하지 않은 듯하다.
황후기씨의 묘가 연천에 있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고 굳이 있다면 이곳 파주 금촌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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