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조 4형제와 3세조모 진원군부인 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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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에는 2세조 기수전 할아버지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다. 이 3세조 4분은 기윤위奇允偉, 기윤숙奇允肅, 기필선奇弼宣, 기필준奇弼俊이다. 같은 아버지 밑의 4형제인데 돌림자를 윤允과 필弼로 2가지를 썼다. 족보를 읽다보면 형제를 넘어 4촌, 6촌, 8촌 등이 같은 글자를 돌림으로 쓰고 양자도 나타나는 경우는 고봉 할아버지 이후쯤이 되고 그전에는 형제사이에서 같은 글자를 돌림으로 쓰더라도 4촌만 되어도 돌림자가 다르다. 여기에선 형제 사이에도 2가지 돌림자를 쓰는 것을 보아서 아마도 기윤위, 기윤숙의 윤允자 돌림 쓰는 형제와 기필선, 기필준의 필弼자 돌림 쓰는 형제는 어머니가 다른 배다른 형제들로 보인다. 기윤위와 기윤숙은 역사책에 기록이 보이지만 기필선 할아버지와 기필준은 보이지 않는다. 큰아들 기윤위는 아들이 없어 사위 손정렬이 가문을 이었다하고 둘째 기윤숙은 황후기씨의 고조부이다. 단지 고려사엔 기윤숙을 싫어해서 그런가 길 비키라고 소리지르며 기생집 출입했다고 비웃는 기록이 있다, 기윤숙의 손녀사위가 송염이고 송염의 외손의 외손이 태종의 비 원경황후 민씨로 양령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도 기윤숙의 유전자가 통하는데 너무 박하게 기록했다고 생각한다. 셋째 기필선 할아버지의 후손이 현재 살아있는 모든 기씨들의 직계 할아버지이고 넷쩨 기필준의 자식은 없다. 기필선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역사책에서는 볼수 없지만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옥천사에 있는 옥천사玉泉寺 청동금고靑銅金鼓에 남아 있다. 이 절에서 쓰는 꾕과리 같은 종류의 쇠북을 만들면서 제작비의 찬조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이 쇠북에 기록되어 있는데 기윤위의 사위 손정렬과 기필선 할아버지의 부인이신 진원군부인 진원오씨 할머니 기록이 나온다.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3408 에서 판독문을 인용하면 [高麗二十三王環甲之年壬子四月十二日在於京師工人家中鑄成智異山安養社之飯子入重六十餘斤同願施主者 樞密院右副承宣孫挺烈 尙書皇甫琦檢校尙書兪承錫華嚴業三重勝壽大選景興知識正之 故上將軍奇弼宣之嘉偶珍原郡夫人吳氏 이하 생략.
번역문은 고려 23대왕(고려 고종)의 환갑環甲이 되는 해인 임자년(고종39, 1252년) 4월 12일 개경[京師]에 있는 공인工人의 집에서 지리산智異山 안양사安養社의 반자飯子(쇠북)를 주조하여 만드니, 무게가 60여 근이었다. 함께 발원한 시주施主는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손정열孫挺烈, 상서尙書 황보기皇甫琦, 검교상서檢校尙書 유승석兪承錫, 화엄종華嚴宗 삼중대사三重大師 승수勝壽, 대선大選 경흥景興, 지식知識, 정지正之, 돌아가신 상장군上將軍 기필선奇弼宣의 아름다운 배우자 진원군부인珍原郡夫人 오씨吳氏 이하생략]
여기서 기필선 할아버지를 奇弼宣이라 했고 족보엔 弼善으로 宣을 善으로 썼지만 선宣은 선善과 하나의 짝을 이룬다(善一作宣)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이것이 같은 분이라는 것은 명백하지만 공식적으로 사용한 글자가 善이 아니라 宣으로 사용이 되었다고 이렇게 문헌과 금석문이 다를 경우 금석문의 기록이 우선하기 때문에 善을 宣으로 바꾸어 기록하는 것이 좋겠다. 족보에 기필선奇弼宣 할아버지 부인 기록은 없는데 여기에 진원군부인오씨라고 기록되어서 진원오씨라는 것이 확인된다. 행주기씨대동보 갑신보(2004년판)와 같이 배부한 별집의 92페이지 아래부분 추원단축을 보면 1세조모에 대하여 모르니까 군부인 O씨, 2세조모에 대하여는 군부인 송씨이고 3세조에서는 갑자기 군부인에서 숙부인 O씨로 나온다. 이것도 군부인 오씨로 축문을 바로 잡아야겠다.
3세조 4명가운데 큰아들인 기윤위는 아들이 없어 사위가 대를 이었다 했는데 여기에도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손정열孫挺烈이라고 이름이 나온다.
고려 고종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강화도로 서울을 옮기고 능도 강화도 있다. 이 시대를 같이 사신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3세 기필선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도 강화도에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역사 옛사람들이 그물코처럼 엮인 가운데 막연히 조상이라고 했지만 기록으로 찾을 수 있는 성씨는 다르지만 우리에게 유전자가 전달 되었다는 증명이 되는 조상 가운데 고려 고종도 있다. 둘째 기윤숙의 손자 기온薀은 고려 고종의 사위이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시대였으면 옹주였을 고종의 서녀이고 고려 원종의 배다른 동생이 기온의 부인이다. 기온의 사위는 김지복金之福이고 김지복의 사위는 기중평奇仲平 할아버지이시며 이분은 청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시다.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3408 에서 판독문을 인용하면 [高麗二十三王環甲之年壬子四月十二日在於京師工人家中鑄成智異山安養社之飯子入重六十餘斤同願施主者 樞密院右副承宣孫挺烈 尙書皇甫琦檢校尙書兪承錫華嚴業三重勝壽大選景興知識正之 故上將軍奇弼宣之嘉偶珍原郡夫人吳氏 이하 생략.
번역문은 고려 23대왕(고려 고종)의 환갑環甲이 되는 해인 임자년(고종39, 1252년) 4월 12일 개경[京師]에 있는 공인工人의 집에서 지리산智異山 안양사安養社의 반자飯子(쇠북)를 주조하여 만드니, 무게가 60여 근이었다. 함께 발원한 시주施主는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손정열孫挺烈, 상서尙書 황보기皇甫琦, 검교상서檢校尙書 유승석兪承錫, 화엄종華嚴宗 삼중대사三重大師 승수勝壽, 대선大選 경흥景興, 지식知識, 정지正之, 돌아가신 상장군上將軍 기필선奇弼宣의 아름다운 배우자 진원군부인珍原郡夫人 오씨吳氏 이하생략]
여기서 기필선 할아버지를 奇弼宣이라 했고 족보엔 弼善으로 宣을 善으로 썼지만 선宣은 선善과 하나의 짝을 이룬다(善一作宣)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이것이 같은 분이라는 것은 명백하지만 공식적으로 사용한 글자가 善이 아니라 宣으로 사용이 되었다고 이렇게 문헌과 금석문이 다를 경우 금석문의 기록이 우선하기 때문에 善을 宣으로 바꾸어 기록하는 것이 좋겠다. 족보에 기필선奇弼宣 할아버지 부인 기록은 없는데 여기에 진원군부인오씨라고 기록되어서 진원오씨라는 것이 확인된다. 행주기씨대동보 갑신보(2004년판)와 같이 배부한 별집의 92페이지 아래부분 추원단축을 보면 1세조모에 대하여 모르니까 군부인 O씨, 2세조모에 대하여는 군부인 송씨이고 3세조에서는 갑자기 군부인에서 숙부인 O씨로 나온다. 이것도 군부인 오씨로 축문을 바로 잡아야겠다.
3세조 4명가운데 큰아들인 기윤위는 아들이 없어 사위가 대를 이었다 했는데 여기에도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손정열孫挺烈이라고 이름이 나온다.
고려 고종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강화도로 서울을 옮기고 능도 강화도 있다. 이 시대를 같이 사신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3세 기필선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도 강화도에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역사 옛사람들이 그물코처럼 엮인 가운데 막연히 조상이라고 했지만 기록으로 찾을 수 있는 성씨는 다르지만 우리에게 유전자가 전달 되었다는 증명이 되는 조상 가운데 고려 고종도 있다. 둘째 기윤숙의 손자 기온薀은 고려 고종의 사위이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시대였으면 옹주였을 고종의 서녀이고 고려 원종의 배다른 동생이 기온의 부인이다. 기온의 사위는 김지복金之福이고 김지복의 사위는 기중평奇仲平 할아버지이시며 이분은 청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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