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에 나오는 기씨의 시작
페이지 정보

본문
역사책에 보이는 가장 오래된 기씨奇氏기록은 삼국사기 권제50/열전10/서기936년09월08일(음) 견훤의 멸망에 나오는 기언奇彦 기록이다.
[대상大相 견권堅權, 술희述希, 금산金山, 장군將軍 용길龍吉, 기언奇彦 등으로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왼쪽(左翼)을 맡게 하였다.(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領步騎三萬爲左翼)]
같은 사건을 기록한 고려사절요1권/태조신성대왕/병신19년(936년)가을9월(秋九月) 기록엔 기언奇言으로 나온다.
[지천군대장군支天軍大將軍이며 원윤元尹인 능달能達 기언奇言 한순명韓順明 흔악昕岳과 정조正朝인 영직英直 광세廣世 등으로 보군 10,000을 거느리게 하여 왼쪽(左綱)을 맡게 하였다.(支天軍大將軍元尹能達奇言韓順明昕岳正朝英直廣世等領步軍一萬爲左綱)]
언彦과 언言은 소리는 [언]이고 뜻은 [말]로 같지만 꼴은 다른 글자이다. 고려중기 편찬된 삼국사기와 조선초기 고려실록을 보고 요약한 고려사절요의 글자가 다르지만 우리 족보는 오래된 삼국사기의 彦을 따른다.(彦一作言)
기언奇言의 직위가 무엇인지는 그 앞에 나오는 장군將軍 용길龍吉과 원윤元尹 능달能達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지천군대장군支天軍大將軍이면서 원윤元尹 이다. 그러나 이분의 출신이나 나이 등등 다른 정보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금석문이 영월寧越 흥령사징효대사탑비興寧寺澄曉大師塔碑에 있다. 다음은 기호철님의 해설글을 따온다.
[이것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흥령사 옛터인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신라말의 선사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826년~900년)의 비이며 보물 612호이다.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이 해서로 썼으며, 최환규崔奐規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44년 후인 944년(고려 혜종 원년)에 세웠다. 900년에 입적하여 906년에 시호를 내리고 비의 건립은 온 나라의 먼지가 멈춘 944년에 이루어졌다. 비문의 전면(앞면)은 36행(줄)에 1행(줄) 81자, 음기(陰記:뒷면)는 29행(줄)으로 이루어졌다. 이 비에는 징효대사의 제자들이 뒷면에 기록되어 있다. 각 절의 주지寺主부터 뒷날에 고려 정종定宗과 광종光宗이 되는 왕자와 고위 관료 수십 사람과 명주溟州 등 각 연고 지역의 세력가 등등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인물도 있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고려초 원윤元尹벼슬을 하고 있는 기오奇悟와 기달奇達 두 사람이 나란히 나타난다. 원윤元尹은 936년(태조 19년)에 제정하였는데 왕건이 태봉泰封의 위계位階를 본떠서 정한 것으로, 왕건의 직속 부하를 중심으로 하여 고려 왕권에 복속한 친고려적 정치집단인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960년(광종 11년)에 제정된 사색공복 규정에 따르면 원윤 이상의 관료, 호족은 자삼紫衫(붉은 보라색)으로 정하였으며 976년(경종 1년)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의 실시로 원윤 이상은 18품으로 나뉘어 전시를 받았다. 또한 성종 때에는 원윤 이상에게 말을 하사하고, 문무관을 구분하여 정계正階를 주었다. 이렇게 볼 때 자삼은 관직을 가진 관료층을 포함하면서 원윤 이상의 관계만을 가진 호족층을 포함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광종 때 지나의 문산계文散階와 함께 관계官階에 같이 쓰다가 995년(성종 14년)에 중앙관리의 관계가 모두 문산계를 쓰면서 원윤 등은 향직鄕職체제로 존속하였다.
기오奇悟와 기달奇達 두 사람이 징효대사의 제자들을 열거한 비석의 뒷면에 기록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징효대사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지녔던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으며 기오 바로 다음에 기달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부자父子, 형제兄弟 혹은 가까운 친척親戚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모두 원윤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형제 혹은 4촌형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 비에 나타나는 사람들 가운데 고려사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고려의 건국공신들이며 대부분 명주, 죽주, 청주, 음성 일대의 호족들로 혜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정종과 광종을 옹립한 세력들이었다. 기오 기달 두 사람은 우리 족보에 나타나지 않으며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없지만,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타나는 장군 기언奇彦과 관련 있는 사람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기씨의 선대를 유추한다면 신라말 고려초 지방(아무래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넓게 보아 경기도 일대)호족으로 대체로 육두품 세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징효대사와 직간접으로 제자였다는 사실은 최소한 육두품세력 이상이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강성한 호족세력은 아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태조는 강력한 호족들은 혼인을 통해 회유했는데 이 대상은 아니었고 또한 비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18품계 가운데 6품에 속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언, 기오 그리고 기달과 지금 현재 우리 기씨와 어떻게 세계가 연결이 되는 지는 알 수가 없다.
[인용]
https://db.history.go.kr/KOREA/item/gskoDetail.do?levelId=gsko_001_0640
판독문 뒷면
[01-01] 謹錄賢哲僧俗弟子尊位排在於後
[01-02] 能善寺主 乘全寺主 聡 校勘 月寺主 崔虛大德
[01-03] 弘琳大德 契貞大統 慶甫大統 性言大德
[01-04] 王堯君
[01-05] 王照 校勘 君
[01-06] ▨▨大王 弼榮大王 英章正匡 王景大承
[01-07] 淸端宮 校勘 主 金鎰蘇判 兢達蘇判 王規佐承
[01-08] 權悅佐承 王詢佐承 王廉佐承 誠俊元甫
[01-09] ▨▨▨▨ 校勘 金奐阿飡 金休長史 鎰休郎
[01-10] ▨順元甫 希悅助 兢悅助 式榮韓飡
[01-11] 寬質韓飡 兢鎰海飡 賢逢元甫 官憲元甫
[01-12] 廉相海飡 允逢元甫 憲邕元尹 師尹一哲飡
[01-13] 侃榮阿飡 章劍史上 弼邢大監 姚謙郎
[01-14] 崔芳元尹 奇悟元尹 奇達元尹 知連正衛
[01-15] 與一正朝 平直阿干溟州
[01-16] 剋奇溟州 金芮卿溟州 連世大監溟州
[01-17] 王侃原州 德榮沙干竹州 弟宗沙干竹州
[01-18] 宋嵒史上公州 平直村主堤州 貴平一吉干堤州
[01-19] 堅必村主冷井 堅奐沙干新知縣 越志山人新知縣
[01-20] 哀信沙干又谷郡 能愛沙干又谷郡 世達村主奈生郡
[01-21] 式元大監冷水縣 明奐村主酒淵縣 康宣助別斤縣
[01-22] 金立房所郎 吉舍村主丹越驛
[01-23] 崔山㭆 校勘
[02-01] 當時三綱典名位列
[02-02] 院主希朗長老
[02-03] 典座昕曉上座
[02-04] 史道澄禪師
[02-05] 直歲朗然禪師
[02-06] 檢 校勘 校維那良善長老 校勘
[02-07] 堂維那契融上座
[02-08] 持客契廉禪師
에서 [01-14] 줄의 崔芳元尹 奇悟元尹 奇達元尹 知連正衛
https://ko.wikipedia.org/wiki/영월_흥녕사지_징효대사탑비
왕건의 통일전쟁에 나오는 기언奇彦에 대한 기록 이후에 고려사에 등장하는 기씨 기록은 73년후인 1009년 01월 16일(음) 목종12년에 왕의 주치의였던 태의太醫 기정업奇貞業이다. 그러나 이분도 목종이 아파서 밤새워 자리를 지켰다(直宿)는 것이지 나이나 가족관계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기정업의 기록 24년 후인 1033년에 발해사람 기질화奇叱火 등 11명이 투항해와서 남쪽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보인다[渤海奇叱火等十一人來投處之南地]
기언 기오 기달 기정업 기질화 가운데 현재우리의 직계 조상으로 연결이 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발해사람으로도 기씨가 있었고 발해는 고구려와 연결되며 행주가 옛 고구려의 땅이였다는 점에서 기씨가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것은 알수있다.
[대상大相 견권堅權, 술희述希, 금산金山, 장군將軍 용길龍吉, 기언奇彦 등으로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왼쪽(左翼)을 맡게 하였다.(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領步騎三萬爲左翼)]
같은 사건을 기록한 고려사절요1권/태조신성대왕/병신19년(936년)가을9월(秋九月) 기록엔 기언奇言으로 나온다.
[지천군대장군支天軍大將軍이며 원윤元尹인 능달能達 기언奇言 한순명韓順明 흔악昕岳과 정조正朝인 영직英直 광세廣世 등으로 보군 10,000을 거느리게 하여 왼쪽(左綱)을 맡게 하였다.(支天軍大將軍元尹能達奇言韓順明昕岳正朝英直廣世等領步軍一萬爲左綱)]
언彦과 언言은 소리는 [언]이고 뜻은 [말]로 같지만 꼴은 다른 글자이다. 고려중기 편찬된 삼국사기와 조선초기 고려실록을 보고 요약한 고려사절요의 글자가 다르지만 우리 족보는 오래된 삼국사기의 彦을 따른다.(彦一作言)
기언奇言의 직위가 무엇인지는 그 앞에 나오는 장군將軍 용길龍吉과 원윤元尹 능달能達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지천군대장군支天軍大將軍이면서 원윤元尹 이다. 그러나 이분의 출신이나 나이 등등 다른 정보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금석문이 영월寧越 흥령사징효대사탑비興寧寺澄曉大師塔碑에 있다. 다음은 기호철님의 해설글을 따온다.
[이것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흥령사 옛터인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신라말의 선사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826년~900년)의 비이며 보물 612호이다.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이 해서로 썼으며, 최환규崔奐規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44년 후인 944년(고려 혜종 원년)에 세웠다. 900년에 입적하여 906년에 시호를 내리고 비의 건립은 온 나라의 먼지가 멈춘 944년에 이루어졌다. 비문의 전면(앞면)은 36행(줄)에 1행(줄) 81자, 음기(陰記:뒷면)는 29행(줄)으로 이루어졌다. 이 비에는 징효대사의 제자들이 뒷면에 기록되어 있다. 각 절의 주지寺主부터 뒷날에 고려 정종定宗과 광종光宗이 되는 왕자와 고위 관료 수십 사람과 명주溟州 등 각 연고 지역의 세력가 등등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인물도 있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고려초 원윤元尹벼슬을 하고 있는 기오奇悟와 기달奇達 두 사람이 나란히 나타난다. 원윤元尹은 936년(태조 19년)에 제정하였는데 왕건이 태봉泰封의 위계位階를 본떠서 정한 것으로, 왕건의 직속 부하를 중심으로 하여 고려 왕권에 복속한 친고려적 정치집단인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960년(광종 11년)에 제정된 사색공복 규정에 따르면 원윤 이상의 관료, 호족은 자삼紫衫(붉은 보라색)으로 정하였으며 976년(경종 1년)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의 실시로 원윤 이상은 18품으로 나뉘어 전시를 받았다. 또한 성종 때에는 원윤 이상에게 말을 하사하고, 문무관을 구분하여 정계正階를 주었다. 이렇게 볼 때 자삼은 관직을 가진 관료층을 포함하면서 원윤 이상의 관계만을 가진 호족층을 포함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광종 때 지나의 문산계文散階와 함께 관계官階에 같이 쓰다가 995년(성종 14년)에 중앙관리의 관계가 모두 문산계를 쓰면서 원윤 등은 향직鄕職체제로 존속하였다.
기오奇悟와 기달奇達 두 사람이 징효대사의 제자들을 열거한 비석의 뒷면에 기록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징효대사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지녔던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으며 기오 바로 다음에 기달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부자父子, 형제兄弟 혹은 가까운 친척親戚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모두 원윤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형제 혹은 4촌형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 비에 나타나는 사람들 가운데 고려사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고려의 건국공신들이며 대부분 명주, 죽주, 청주, 음성 일대의 호족들로 혜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정종과 광종을 옹립한 세력들이었다. 기오 기달 두 사람은 우리 족보에 나타나지 않으며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없지만,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타나는 장군 기언奇彦과 관련 있는 사람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기씨의 선대를 유추한다면 신라말 고려초 지방(아무래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넓게 보아 경기도 일대)호족으로 대체로 육두품 세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징효대사와 직간접으로 제자였다는 사실은 최소한 육두품세력 이상이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강성한 호족세력은 아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태조는 강력한 호족들은 혼인을 통해 회유했는데 이 대상은 아니었고 또한 비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18품계 가운데 6품에 속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언, 기오 그리고 기달과 지금 현재 우리 기씨와 어떻게 세계가 연결이 되는 지는 알 수가 없다.
[인용]
https://db.history.go.kr/KOREA/item/gskoDetail.do?levelId=gsko_001_0640
판독문 뒷면
[01-01] 謹錄賢哲僧俗弟子尊位排在於後
[01-02] 能善寺主 乘全寺主 聡 校勘 月寺主 崔虛大德
[01-03] 弘琳大德 契貞大統 慶甫大統 性言大德
[01-04] 王堯君
[01-05] 王照 校勘 君
[01-06] ▨▨大王 弼榮大王 英章正匡 王景大承
[01-07] 淸端宮 校勘 主 金鎰蘇判 兢達蘇判 王規佐承
[01-08] 權悅佐承 王詢佐承 王廉佐承 誠俊元甫
[01-09] ▨▨▨▨ 校勘 金奐阿飡 金休長史 鎰休郎
[01-10] ▨順元甫 希悅助 兢悅助 式榮韓飡
[01-11] 寬質韓飡 兢鎰海飡 賢逢元甫 官憲元甫
[01-12] 廉相海飡 允逢元甫 憲邕元尹 師尹一哲飡
[01-13] 侃榮阿飡 章劍史上 弼邢大監 姚謙郎
[01-14] 崔芳元尹 奇悟元尹 奇達元尹 知連正衛
[01-15] 與一正朝 平直阿干溟州
[01-16] 剋奇溟州 金芮卿溟州 連世大監溟州
[01-17] 王侃原州 德榮沙干竹州 弟宗沙干竹州
[01-18] 宋嵒史上公州 平直村主堤州 貴平一吉干堤州
[01-19] 堅必村主冷井 堅奐沙干新知縣 越志山人新知縣
[01-20] 哀信沙干又谷郡 能愛沙干又谷郡 世達村主奈生郡
[01-21] 式元大監冷水縣 明奐村主酒淵縣 康宣助別斤縣
[01-22] 金立房所郎 吉舍村主丹越驛
[01-23] 崔山㭆 校勘
[02-01] 當時三綱典名位列
[02-02] 院主希朗長老
[02-03] 典座昕曉上座
[02-04] 史道澄禪師
[02-05] 直歲朗然禪師
[02-06] 檢 校勘 校維那良善長老 校勘
[02-07] 堂維那契融上座
[02-08] 持客契廉禪師
에서 [01-14] 줄의 崔芳元尹 奇悟元尹 奇達元尹 知連正衛
https://ko.wikipedia.org/wiki/영월_흥녕사지_징효대사탑비
왕건의 통일전쟁에 나오는 기언奇彦에 대한 기록 이후에 고려사에 등장하는 기씨 기록은 73년후인 1009년 01월 16일(음) 목종12년에 왕의 주치의였던 태의太醫 기정업奇貞業이다. 그러나 이분도 목종이 아파서 밤새워 자리를 지켰다(直宿)는 것이지 나이나 가족관계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기정업의 기록 24년 후인 1033년에 발해사람 기질화奇叱火 등 11명이 투항해와서 남쪽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보인다[渤海奇叱火等十一人來投處之南地]
기언 기오 기달 기정업 기질화 가운데 현재우리의 직계 조상으로 연결이 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발해사람으로도 기씨가 있었고 발해는 고구려와 연결되며 행주가 옛 고구려의 땅이였다는 점에서 기씨가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것은 알수있다.
- 이전글고려시대 중기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기씨와 1세조 25.11.12
- 다음글차례 25.11.1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