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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공 첨파 할아버지의 증손자 5형제 문중과 기묘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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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5-12-01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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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찬奇襸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 책받침 부수 돌림의 다섯 할아버지의 후손이 지금의 행주기씨 대종중의 5대 문중이고 이분들 가운데 막내 기준奇遵 할아버지가 가장 역사에 남아 있다. 호는 복재 혹은 덕양이시고 남기신 문집은 유고로 덕양문집이 있다. 기씨가 당한 3번째 화禍로 위의 2번은 참화이고 이번엔 사화 곧 기묘사화를 당하신다.
연려실기술에서 기묘사화의 문민공 기준奇遵 할아버지 부분을 추려서 옮겨왔다.
기묘사화(己卯士禍)
○ 임금이 언문으로 쓴 밀지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경연에서 기준奇遵이 말하기를, 조광조 같은 자는 정승 자리에 합당하다. 하였으니, 벼슬을 명하는 것이 모두 이 무리들에게서 나오는 터이니 나를 반드시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요, 한갓 그 이름만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내가 이름은 임금이나 실상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옛날에 유용근이 거만하게 나를 보았으니 반드시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경들은 먼저 그를 없앤 뒤에 보고하라.] 하였다.
○ 기묘년 11월 15일 밤에 밀교(密敎)를 내려 신무문을 열고 여러 정승들을 들어오게 하였다.
○ 근정전勤政殿 서쪽 뜰에는 군사들이 죽 둘러서 있었다. 승지 성운成雲이 나와 소매에서 쪽지를 꺼내어 말하기를 [이것은 어필御筆이다. 이 사람들을 즉시 금부에 내리라.] 하였다. 그들은 바로 윤자임,공서린,안정,이구李構 및 응교 기준奇遵과 수찬 심달원沈達源 등이었다. 모두 입직해 있었다. 이에 궐문이 열리고 조금 있다가 대사헌 조광조, 우참찬 이자李耔, 형조판서 김정金淨, 도승지 류인숙柳仁淑, 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 박훈朴薰, 부제학 김구金絿, 대사성 김식金湜 등이 함께 대궐 뜰로 붙들려 왔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이날 초저녁에 기준奇遵이 윤자임,안정,이구 등과 함께 천문天文을 관측하기 위해 간의대簡儀臺로 갔는데, 이윽고 정원 사령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몇 정승이 서문으로 입궐을 했고, 또 근정전 가운데에 불빛이 있는데 군사가 호위해 서 있다 운운.] 하니, 서로 말하기를, [어째서 정원에서 모르는 일이 있단 말이냐.] 하고, 곧 내려왔다. 조금 있다가 입번 승지 두 사람 윤자임과 공서린과 홍문관 두 사람 기준奇遵과 심달원과 한림 이구, 주서 안정 등을 의금부에 내리라고 명하니, 이경二更에 이미 옥에 가두었다. 조금 있다가 이자,김정,조광조,김식,김구,유인숙,박세희,홍언필,박훈 등을 잡아 가두었다. 조금 뒤에 유인숙,공서린,홍언필 세 사람을 놓아주라고 명하고, 또 심달원,안정,이구 세 사람을 놓아주라고 명하고, 또 이자를 놓아주라고 명하였다. 덕양일기德陽日記
○ 임금이 남곤에게 명하여 조광조 등의 죄안罪案을 초草하게 하였다. 남곤이 쓰기를 마치고 임금 앞에 올리니, 임금이 이를 보고 전교하기를, [죄안이 이미 성립되었으니, 다만 조광조 등 8명만 가두고 나머지는 모두 방면하라.] 하였다. 그 죄안에,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이 서로 붕당을 지어 자기들과 뜻을 같이하는 자는 진출시키고 자기들과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서로 의지하고 중요한 자리에 들어앉아 후진들을 꾀어 궤격(詭激)이 습성이 되게 하여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이 날로 글러지게 하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윤자임,기준奇遵,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 등은 조광조의 무리의 궤격한 버릇에 부화뇌동하였다.] 하였다.
○ 16일 아침 의금 부사 김전金詮,이장곤李長坤,홍숙洪淑 등이 좌기坐起하여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이 사사로이 붕당을 지었다는 것과 윤자임,박세희,박훈,기준奇遵 등이 조광조에게 부화뇌동한 일들을 국문하였다.
○ 기준奇遵이 공술하기를, [신은 어려서부터 옛사람의 글을 읽어 자못 향방을 알아서 집에 있으면 효도와 우애를 다하고, 나라에 있어서는 충의를 다할 것을 생각하였고, 뜻을 같이하는 선비와 더불어 옛 도리를 강마하여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세도世道가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게 하려고 작은 정성을 다하였다. 또 남이 착한 것은 착하다 하고 착하지 않은 것은 착하지 않다고 하였는데, 어찌 감히 사사로이 부화뇌동하였겠습니까. 조광조 등과는 뜻이 같고 도가 합하였기 때문에 서로 사귀어 좋아했을 뿐, 궤격한 줄은 몰랐다.]고 하였다. -덕양일기
○ 의금부에서 형신刑訊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조율하라고 명하였다. 추관推官 김전金詮 등이 마땅히 간당奸黨 죄에 해당되는 율을 써서 마땅히 베야 하고 그 집을 몰수하고 처자를 노비로 삼아야한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조정은 이것으로 죄를 결정한다.] 하고, 이에 하교하기를,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네 사람은 사사賜死하고, 나머지는 귀양보내라.] 하였다. 이때 날이 이미 저물었다. -석담일기
○ 날이 저물고 또 모두 늦은 저녁 무렵까지 앉아 있었다.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명에게는 사형을 결정하고 나머지 4명은 곤장 일백대에 유배 삼천리三千里로 아뢰니, 임금이 승지 김근사金謹思를 불러 탑전에서 판부判付를 쓰게 하기를, [조광조와 김정은 사사하고 김식과 김구는 곤장 일백 대를 때려 먼 곳에 안치하고, 윤자임,기준奇遵,박세희,박훈은 먼 곳으로 부처하라.] 하였다. 김근사가 명을 받고 머뭇거리니 사관 채세영蔡世英이 아뢰기를, [대신에게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과연 다시 의논하는 게 옳겠다.] 하였다. 정광필 등이 빈청에 있는데 김근사가 나와 임금의 뜻을 전했다. 그 때 날이 저물어 촛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정광필이 하교를 듣고 촛불을 만지다가 놀라 좌우를 돌아보고 곧장 입대를 청하여 아뢰기를, [소신이 이 직에 있은 지 또한 오래되었으나, 오늘같은 일이 생길 줄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단지 어리석어서 사리를 알지 못하고 이같이 되었으니, 중죄라면 신들이 어찌 청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힘써 사형에서 감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말을 따라 눈물이 떨어졌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과연 중대한 일이다. 마땅히 다시 생각해서 해야겠다.] 하고, 승지 성운成雲을 불러 하교하기를, [조광조 등 4명은 장을 쳐 먼 곳에 안치하고, 윤자임 등 4명은 먼 곳에 부처하라.] 하였다. 성운이 판부를 쓰고 물러나자 정광필이 빈청으로 물러나 안당安瑭과 함께 또 아뢰기를, [이 사람들이 죽음을 면한 것은 하늘과 땅 같은 어짐 덕분이다. 그러나 다만 모두 병약하여 만일 장을 맞고 멀리 가면 중도에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조정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얻게 되고 사형을 감해준 실재가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7번이나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동각잡기
○ 16일 밤 삼경에 모두 풀어주자 집으로 와서 조금 자게 하고, 17일 이른 아침에 동소문東小門 밖 민가로 나가 있게 하였다. 또 모두 금부에 모이라고 명하니 승지 성운成雲이 와서 전교하기를, [근래에 너희들이 조정 일을 처치한 것이 지극히 그릇되어 인심을 불평하게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죄주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사사로운 마음이 없이 나라를 위했기 때문에 형벌을 가볍게 하여 죄주는 것이니, 너희들도 알고 가라.] 하였다. 이날 밤은 동소문 밖 민가에서 잤다. -덕양일기
○ 드디어 조광조를 능주綾州로, 김정을 금산錦山으로, 김구를 개녕開寧으로, 김식을 선산善山으로, 박세희를 상주尙州로, 박훈을 성주星州로, 윤자임을 온양溫陽으로, 기준奇遵을 아산牙山으로 귀양보냈다.
○ 21일에 전교하기를 [저번에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윤자암, 기준奇遵, 박세희, 박훈이 모두 시종侍從에 있어서 성리학性理學으로 밤낮 강론하므로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사람됨이 더불어 나의 정치를 도와서 이룩하겠기에 좋은 벼슬을 주고 대우하였다. 그런데 조광조가 서로 결탁하여 자기들에게 붙는 자는 올려 쓰고 자기들과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해서 세력으로 서로 의지하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심지어 일을 의논할 적에 조금만 의견이 다르면 반드시 극력 배척하고 막아서 기어이 꺾어놓고야 마니, 국가의 의논이 거꾸로 되고 조정이 날로 잘못되어도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들이 한 바를 살펴보니, 정치를 어지럽히는 데로 귀결되었다. 이 어찌 내가 그만둘 수 있는 일이겠느냐. 오직 너희 의정부는 안팎에 포고해서 다 같이 내 뜻을 알게 하라.] 하였는데, 이 글은 남곤이 초한 것이다. -동각잡기
○ 이날 어필로 남곤과 이유청을 제수하여 좌상과 우상으로 삼고, 김전을 올려서 영상으로 삼아 즉시 비현각丕顯閣에서 소대하여 조광조 등에게 죄 줄 뜻을 하교하고, 또 금부 당상 심정沈貞, 손주孫澍 등을 불러서 조광조,김정,김식,김구를 사사賜死하고, 윤자임, 기준奇遵, 박세희朴世熹, 박훈朴薰을 절도絶島에 안치하라고 하교하였다.-동각잡기
○ 김식金湜은 절도로 이배되자 망명하다가 자살했다. 김구金絿는 남해南海로 옮겼다가 신사년에 다시 임피臨陂로 양이量移 되고, 계사년에 풀린 뒤에 죽었으며, 김정金淨은 진도珍島로 옮겼다가 경진년에 잡혀서 국문을 당한 뒤에 제주濟州에 위리안치되었다. 윤자임尹自任은 북청北靑으로, 박세희朴世熹는 강계江界로, 박훈朴薰은 의주義州로, 기준奇遵은 온성穩城으로 옮겼다가 경진년에 잡혀서 국문을 당한 뒤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도로 귀양갔다.
○ 세상에서 영의정 정광필, 우의정 안당, 병조판서 이장곤, 형조판서 김정, 대사헌 조광조, 대사성 김식, 응교 기준奇遵, 유생 신명인申命仁을 팔현八賢이라고 한다.
○ 처음에 기준奇遵이 홍문관 직소直所에 있다가 옥에 갇히고 매질당하여 아산牙山으로 귀양 갔다. 아산으로 귀양가있을 때 그의 형인 기형奇逈이 무장 현감이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임지로 갈 때 직산稷山을 지나게 되었는데, 아산과의 거리가 50리 밖에 되지 않았다. 기준奇遵이 그 현감 배철중에게 간청하여 중도에 그 어머니를 보고 하룻밤 자고 돌아왔다. 그 뒤에 그 사실이 발각되어 아산 현감 배철중裵鐵重과 함께 옥에 갇혔다. 배철중이 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기준奇遵이 도망치다가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기준奇遵이 옥중에서 옷자락을 찢어서 상서했는데, 그 대략에, [신은 태어난 지 1개월이 지나서 부친을 잃고 오직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처음 신이 죄를 입었을 때 어머니가 무장에 있어서 신이 귀양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 없이 울면서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비록 가서 뵙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는데 마침내 온성으로 옮기게 되자 철없는 생각에 북쪽 하늘과 남쪽 땅이 서로 먼데 한번 북방으로 가면 다시 볼 길이 없고 생사도 모르고 소식조차 서로 통할 길이 없을 것 같아서 한번 얼굴이나 보고 서로 영원히 이별하려고 생각하니, 슬픈 심정을 다시 스스로 그치지 못하고 사세가 급박하여 갑자기 경망히 뛰어나갔으나, 나가서 다시 생각하니 뒷일이 난처하므로 뉘우치고 유배 장소로 돌아왔던 것이다. 도망한 죄를 스스로 변명하기 어려우나, 단 하루 사이의 일이요 다른 뜻이 없었으며, 신이 비록 사람답지 못하지만 일찍이 사대의 반열에 있던 터인데, 어찌 끝내 망명한 사람이 되어 밝은 태양 아래에서 구차히 살려고 했겠습니까. 진정 모자지간에 참지 못하여 이에 이르렀다. 신이 마땅히 그 죄를 받아야 할 것이나, 효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전하께서 이 하찮은 심정을 살피신다면 또한 거의 만물을 기르시는 덕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장을 때리고 배소로 돌려보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논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묘록
○ 기준奇遵의 자는 경중敬仲, 또는 자경子敬이며, 호는 복재服齋요,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판중추 기건奇虔의 증손이고, 응교 기찬奇襸의 아들이다. 판서 윤금손尹金孫의 사위이다. 계유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갑술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년에 아산牙山으로 귀양 갔다가 온성穩城으로 옮겼다. 다시 올려 국문하고서 배소로 돌려 보내어 위리 안치하였다가 신사년에 사사하였다. 인종이 복직을 명하였다. 아들 기대항奇大恒은 벼슬이 판윤에 이르렀다.
○ 공이 일찍이 정암 조광조에게 편지하기를, [벼슬을 버리고 산림 속에 몸을 감추고 싶을 뿐 세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하니, 정암이 말하기를, [나도 그렇다.]고 하였다. -정암집
○ 기준奇遵이 하루는 궐내에서 숙직하다가 관외關外를 여행하는 꿈을 꾸었는데,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등 기구한 노정을 전전하면서 여행 길에서 근체율시近體律詩 한 수首를 읊기를,
낯선 땅 강과 산은 고향과도 같은데 / 異域江山故國同
하늘 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높은 봉우리에 기대었네 / 天涯垂淚倚高峰
아득한 검은 구름에 딴 본에는 호수 소리 적막하다로 되어있다. 강가 관문이 닫기고 / 頑雲漠漠河關閉
고목 나뭇잎 지는 소리에 (다른 기록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쓸쓸하다로 되어있다.) 빈 성곽이 쓸쓸하다 / 古木簫簫城郭空
들 길은 가을 풀 밖으로 가늘게 뻗치었고 / 野路細分秋草外
인가는 멀리 석양 속에 있구나 / 人家遙住夕陽中
가는 배 만리에 돌아오는 돛대 없으니 / 征帆萬里無回棹
망망한 푸른 바다에 소식 통하지 못하네 / 碧海茫茫信不通
하였다. 홀연히 깨어나 꿈을 기억하며 관의 벽에다 시를 썼다. 얼마 되지 않아서 기묘 당적에 연좌되어 충청도로 귀양갔다가 얼마 안 되어 또 온성으로 옮겼는데, 도중에 보이는 것이 모두 시에 읊은 경치 그대로였다. 말을 멈추고 꿈 속의 시를 읊으면서 처량하게 흐느끼니 따라온 자들도 모두 눈물을 뿌렸다. 온성에 이르러 조금 있다가 사사되니, 사람의 일이 미리 정해진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림들이 그 시를 전하여 외면서 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재척언
○ 덕양유고德陽遺藁에는 깬 뒤에 꿈속에서 본 바를 기억하여 지은 것으로 되어있다.

기묘사화로 문민공 기준奇遵 할아버지가 죽임을 당하자 큰형 도승지공 기형奇逈 할아버지는 무장현감으로 있다가 함경도 온성으로 천리먼길에서 막내동생의 시신을 운구하여 원당 도선산에 장사지내고 더 이상의 벼슬을 그만둔다. 둘째 참판공 기원奇遠 할아버지와 넷째 기진奇進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장성으로 내려온다.
5형제 후손은 첫째 도승지공 기형奇逈 할아버지 후손과 셋째 별좌공 기괄奇适 할아버지 후손이 친근하게 엮이고 둘째 참판공 기원奇遠 할아버지 후손과 넷째 덕성군 기진奇進 할아버지 후손이 친근하게 엮여 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족보 첫장의 맨위에 보면 느닷없이 태종원경왕후라고 나온다. 그 뒤로도 여러 왕비들이 나온다. 이게 무엇을 뜻하나? 조선의 왕비들을 적은 건가 하면서도 그럼 왜 1대 태조부터 죽 나와야지 3대 태종비부터인가 더구나 왕비순서도 뒤죽박죽으로 나오나? 답은 밑에 나오는 기록 가운데 이렇게 왕비를 기록해야 하면 존귀한 왕비를 밑에 적을 수 없어 책장의 맨위에 적고 그 왕비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는 oooooo 라고 빈자리로 남긴 것이다. 그러니까 기홍영 왕의 사위 가운데 송염이라고 있고 이 송염의 외손의 외손들 가운데 태종원경왕후가 있다는 뜻이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큰아들은 양령대군이고 양령대군이 왕이 되었다면 왕비가 되었을 광산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딸이 있다. 왕의 딸은 공주이지만 대군의 딸은 현주 품계를 주는 것인지 양령대군에서 검색해 보면 영평현주永平縣主라고 있다. 안동김씨 김철균金哲勻과 결혼하여 아들들 가운데 김수형과 김수인이 있다. 김수형의 따님은 정렬공 기찬奇襸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신 안동김씨 할머니이시며 별좌공 기괄奇适 할아버지 덕성군 기진奇進 할아버지 문민공 기준奇遵 할아버지를 낳았다. 김수인의 따님은 참판공 기원奇遠 할아버지의 부인이신 안동김씨이다. 김철균-김수형-김언묵-김석으로 이어지는 후손에서 그러니까 영평현주의 현손자 김석은 도승지공 기형奇逈 할아버지의 큰사위이고 김석의 손자는 임진전쟁 진주성 전투의 영웅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다. 다시 돌아와서 참판공 할아버지와 덕성군 할아버지는 친가로는 배다른 형제이지만 외가로는 4촌 이모부와 처조카 사이다. 덕성군 할아버지가 기묘사화 후에 참판공 할아버지와 형수이자 이모 그리고 3명의 조카와 함께 서울에서 장성으로 이주를 한다. 장성으로 내려간 이유는 정렬공 기찬奇襸 할아버지가 인근의 영광군수를 지내서 그렇다고 한다. 조선실록에서 기찬奇襸 할아버지를 조선실록에서 검색하면 할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영광의 수령시절엔 청파 할아버지의 청백리를 무색하게 탐관오리로 나온다. 믿었던 임금을 배신했다고도 나오고 어떤 산을 그린 그림을 보여주자 풀어 얘기하면 산이 옮길 수 없는 부동산이어서 망정이지 옮길 수 있는 동산이었다면 벌써 없어졌을거라는 조롱도 나온다. 양반이라 먹고살만한 장소로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1521년 막내 기준奇遵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첫째 기형奇逈 할아버지는 벼슬을 그만두었고 둘째 기원奇遠 할아버지는 장성으로 내려와 그 다음 해인 1522년 돌아가시고 부인이신 안동김씨 할머니는 1523년 돌아가신다. 정렬공 기찬奇襸 할아버지와 안동김씨 할어니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기괄奇适 할아버지는 서울에 사셨지만 다른 일이 없으셨고 넷째 기진奇進 할아버지는 1522년 생원, 진사 과거시험을 보고 1528년에 어머니 안동김씨가 돌아가시자 완전히 광주로 내려가신다. 기진奇進 할아버지는 처음 남양방씨와 결혼 하셨지만 자녀없이 돌아가셔서 청주 수신리에 묘가 있지만 잃어버렸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구테타를 일으키고 왕이 될 때 회군에 참가하여 회군공신이된 심덕부沈德符가 조선왕가와 인연을 맺어 심덕부의 5째 아들 심온沈溫의 큰딸이 충령대군의 부인이 되고 나중에 세종의 왕비가 되고 심온은 태종이 세종의 외척을 제거하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고 오다가 죽는다. 심온의 둘째 딸이 강석덕姜碩德과 결혼하여 큰아들 강희안의 훈민정음 책을 지은 8명의 유학자들 중의 한명이고 둘째가 강희맹姜希孟을 낳았다. 강희맹의 둘째 아들 강학손姜鶴孫이 훈민정음 책을 지은 8명의 유학자들 중의 한명인 신숙주의 둘째 아들 신면申㴐의 딸과 결혼하여 강영수姜永壽를 낳으니 이분이 기진奇進 할아버지의 두 번쩨 부인이신 긴주강씨 할머니의 아버님이시다. 고봉집에서 기진奇進 할아버지의 묘기와 진주강씨 할어니의 묘를 이장한 기록을 옮긴다.

[현고顯考 장사랑將仕郞 경기참봉慶基參奉 기부군奇府君에 대한 묘기墓記
아버지(선부군:先府君)의 이름은 진進이요, 자는 자순子順이며, 성은 기씨奇氏이니, 행주인幸州人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건虔인데 판중추부원사判中樞府院使로 시호는 정무공貞武公이며, 증조의 부인은 정경부인 홍씨洪氏이다. 조부의 이름은 축軸인데 행풍저창부사行豐儲倉副使로 사헌부 장령에 추증되었으며, 조부의 부인은 영인令人 정씨鄭氏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찬襸인데 홍문관 부응교이며, 어머니는 숙인淑人 김씨이다. 아버지께서는 성화成化 정미년(1487, 성종18) 12월 정해일에 출생하였는데, 6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성하자 높은 뜻이 있어 아우 준遵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하루에 수백 자를 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자에 힘을 써 경사經史를 통달하고 옛날과 지금의 일을 꿰뚫었다. 아버지께서ᄂᆖᆫ 널리 배우고 예禮로 몸을 단속하고자 하였고, 오로지 과거에 급제하여 녹을 먹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아우가 먼저 조정에 올라 이름을 드날렸는데 불행히도 견책받아 죽자 아버지께서ᄂᆖᆫ 이미 당세에 벼슬할 뜻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님인 숙인께서 살아 계셨으므로 남을 따라 과거에 응시하였다. 가정嘉靖 원년인 임오년(1522, 중종17)에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며, 그 후 5년에 재상의 천거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고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다음 해인 무자년(1528)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며, 초상을 마치자 벼슬을 하려 하지 않고 마침내 광주光州에 거주하였다. 집은 광주 읍내의 서북쪽 40리쯤 되는 곳에 있었으니, 지방 이름을 고룡古龍이라 하고 동네 이름을 금정金井이라 하였다. 아버지께서ᄂᆖᆫ 집에 있을 때에 쓸쓸하여 일이 없는 듯하였다. 꽃과 나무를 심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구경하였으며, 책을 읽고 얻는 것과 잊는 것을 따질 뿐이었다. 말년에 흉년을 만나 아침저녁의 끼니가 걱정인데도 태연히 지내셨다. 을묘년(1555, 명종10) 1월 신해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 69세였다.
아버지께서ᄂᆖᆫ 천품이 정직 성실하고 소탈하여 자기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엄하면서도 까다롭지 않고 검박하며 사치하지 않았다. 책을 볼 때에는 대의를 통달하기에 힘썼으며, 옛날부터 다른 사람의 글귀나 문장을 베끼려 하지는 않았다. 지은 시문이 수백 편이다.
첫 번째 부인은 남양방씨南陽房氏인데 일찍 별세하였고, 두 번째 부인은 유인孺人 강씨姜氏인데 관향이 진주晉州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영수永壽로 충좌위사과忠佐衛司果이며, 조부의 이름은 학손鶴孫으로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이며, 증조부의 이름은 희맹希孟으로 의정부 좌찬성을 지내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다. 유인은 단정하고 공손하며 은혜로워 아버지에게 배필할 만하였다. 5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대림大臨이요, 차남은 대승인데 생원이며, 막내는 대절大節이다.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다. 유인은 부군보다 22년 전에 별세하였는바 집 뒤 2리쯤 되는 갑좌경향甲坐庚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군이 별세하자, 그해 3월 경신일(1555년 음력3월25일-양력4월16일)에 유인의 무덤 남쪽에 장례하니 선산이기 때문이었다.
선비께서 별세할 때에 여러 아들들은 모두 10세가 넘지 못하였다. 부군께서는 홀아비로 살면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자식들을 부지런히 어루만지고 가르쳐 장성함에 이르렀는데, 모두들 미련하고 어질지 못해서 가정의 교훈을 만분의 일도 현양하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죄악이 쌓여 마침내 부군에게 화가 미쳐 별세하였으니, 슬피 울부짖으매 애통한 마음이 뼛속에 사무친다. 이에 감히 묘기를 이와 같이 짓는 것이다. 묘표에 글을 적는 일은 후일을 기다려 할 것이다. 슬픈 마음 하늘처럼 다함이 없으니, 아, 애통하다.

선비先妣 유인孺人 강씨姜氏를 이장한 묘기
아, 슬프다. 우리 선비께서 동원東原에 안장된 지 22년 만에 선부군께서 우리들을 버리고 별세하였다. 그리하여 장차 그해 3월 경신일에 장례하여 쌍분雙墳을 만들려고 했는데, 땅을 파자 물이 나와 마침내 유인의 묘 위 5, 6보 되는 곳으로 옮겨 묏자리를 잡고 장례를 마쳤다. 아들들은 선비를 모신 곳이 좋은 땅을 얻지 못함을 서글퍼하여 애통함이 뼛속에 사무쳤으므로 즉시 옮겨 모시기로 상의하였으나, 빈궁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마침내 금년 3월 경신일에 부군의 묘 옆에 옮겨 모셨다.
가문과 품행에 대해서는 남편의 묘기에 이미 간략히 적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쓰지 않는다. 어머니는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7)에 태어나서 향년 34세에 별세하였으며, 5남 1녀를 낳았는데 생존한 자는 세 사람이다.
거듭 생각건대 어머니께서는 부도婦道를 닦아 아버님과 짝하였는데, 아버님은 은둔하여 덕을 쌓고 드러내지 않았으며, 후손들에게 법을 남겼으나 여러 아들들은 어질지 못하여 만분의 일도 현양하지 못하니, 사무쳐 울부짖으니 하늘도 다함이 없다. 이에 감히 그 일을 이처럼 기록하는 것이다. 훌륭한 작자作者에게 묘문을 청하여 덕행의 대략을 자세히 드러내어 묘에 표하는 것으로 말하면 장차 기다림이 있는 것이지, 감히 뒤늦게 하려고 해서가 아니다. 아, 애통하다. 아들 대승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기록한다.

고봉 기대승奇大升 할아버지가 고봉집에 올려진 아버지 덕성군 기진奇進 할아버지의 훈육 내용을 기록한 글을 고봉집에서 찾아 올린다.

과정기훈過庭記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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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때부터 부친의 훈육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이룬 것이 있는 듯 하다. 그런데도 기질이 낮고 용렬하여 어리석기가 처음과 같으니 생각하면 슬프기 그지없다. 지나간 일은 지금 어찌할 수 없지만 앞으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소씨邵氏에게도 문견록聞見錄이 있었다. 학자들은 모름지기 듣고 보는 대로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 하셨다. 이에 들은 것을 기록하여 조석으로 완미하려 한다.
선친께서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문을 하는 데는 모름지기 부지런해야 하고 또 반드시 외워야 하며 슬쩍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된다. 읽으며 생각하고 생각하며 짓곤 하되 모두 부지런히 해야 하며 또 그중에 한 가지도 폐해서는 안 된다.
내가 너희들에게 학문에 힘쓰게 하고자 한 것이 어찌 작록爵祿을 바라서이겠느냐. 바로 너희들로 하여금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다행히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게 하고자 함일 뿐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과 행동을 너무 달리해서는 안 된다. 다만 모쪼록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다. 요컨대 순수한 태고太古로 마음가짐을 하고 자연스러움으로 몸가짐을 하는 것이 매우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연못에 가서 고기 낚고 산에 가서 땔나무 하고 거친 밭을 김매고 가꾸어 어버이를 섬기게 하려고 한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내가 어렸을 적에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께서 몹시 고생하시면서 나를 길러 주셨다. 그래서 매양 어서 입신출세하여 이 망극한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그 뜻을 이루기도 전에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이것이 나의 영원한 슬픔이 되어 버렸다. 너희들은 오늘날 잘 먹고 잘 입고 살면서 왜 공부를 하지 않느냐? 내가 자경子敬(동생 기준奇遵)과 가장 우애로워 항상 한이불을 같이 덮고 누워서 우리 형제가 모름지기 한 모퉁이를 담당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항상 천문도天文圖를 모사模寫하고 또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베끼고 기예技藝에도 두루 알기를 기약하여, 한 가지라도 터득한 것이 있게 하고자 했다.
나더러 우리가 뜻을 얻으면 의당 다른 궁핍한 이들을 구휼할 것이고 만일 뜻을 얻지 못하더라도 남의 구휼을 받지는 않겠다. 하였다. 불행하게 자경子敬은 죄를 얻어 유배되었고 나 또한 떠돌아다니느라 한 번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한탄을 금할 수 없다. 너희들은 이 뜻을 알아야 한다.
지금 세상에는 학문을 강구하지 않아 한때는 서로 좋게 지내다가도 뒤에는 도리어 곤욕을 보이곤 하니, 말을 하자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부디 함부로 친구를 사귀지 말라. 요컨대 친구가 없을 수는 없지만 또한 사귐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벼슬길의 풍파는 매우 두려운 것이다. 자기의 뜻을 행하기도 전에 재앙이 이미 따르게 되니 다만 잘 헤아려서 가고 오고 하는 것이 좋으나, 그것도 은거하는 것만은 못하다.
주자朱子는 벼슬한 날짜가 겨우 40여 일밖에 되지 않았으니, 학자들은 또한 이 뜻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진실로 자기의 뜻을 행하려면 일개 현縣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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