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흥조 정무공貞武公 청파靑坡 기건奇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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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 도선산의 중심이신 정무공 청파 기건 할아버지이다.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기록은 조선실록에 기록이 있어 1460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언제 태어나셨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지은 고봉선생의 행장엔 고봉선생의 선조를 소개하면서 청파 할아버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 한 것이 있다.
[세종조世宗朝에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고, 문종文宗 말기에 나이 50세도 안 되어 벼슬을 그만두었다. 世宗朝官至判中樞院事。文宗末年。年未五十致仕。]
문종은 음력으로 1450년 2월 22일부터 1452년 5월 14일까지 2년 2개월까지 왕으로 있었다. 문종말기를 1452년으로 보고 50이 않되었다고 하면 49세에 은퇴한 것으로 가정하고 49년년전은 1403년쯤에 태어나신 것으로 추정된다. 누나인 기자재 대고모가 1409년 사면이 되었으므로 6살 무렵에 집안이 복권되고 집이 청파만리현靑坡萬里峴에 있었다 한다. 오늘날의 서울 용산구 청파동은 청파 할아버지가 사시던 동네라고 해서 그 동명이 생긴 유래가 되었다. 조선시대는 나라에서 받은 시호인 정무가 더 중요시해서 정무공으로 아직도 정무를 더 높게 불리지만 오늘날까지 할아버지의 호가 동이름 청파로 남아서 세상사람들에게 청파 할아버지는 몰라도 청파는 들어봤을 것이기에 정무공은 우리 후손들이 간직하고 청파 할아버지를 정무보다 더 부르는 것이 좋겠다 생각합니다. 옛날 분들 이름은 여러 가지이며 명名은 왕 혹은 족보나 정부같은 공식 문서에 기록하는 이름으로 함부로 부르지도 못하게 하였고 어른이 되며 자字를 만들어 불렀지만 이것도 명보다는 못해도 역시나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 호號를 만들어 함부로는 아니지만 후손들도 친근하게 불렀던 이름이라 이제부터 저는 정무공 청파 건 할아버지를 청파 할아버지라고만 하겠다. 청파만리현은 청파동에서 훈민정음 반대산소문을 대표로 올린 최만리가 살던 동네이름에서 유래한 만리동의 고개라고 하니까 지금 숙명여대가 있는 청파동에서 북쪽으로 배문중고등학교부근에 집이 있었던 듯하다. 조선시대 역원제가 있다. 용산구 청파동엔 공문서 전달, 사신 파견 등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말을 갈아타거나 빌릴 수 있도록 한 시설인 청파역이 아마도 이곳은 철도가 놓이면서 서울역이 되었을 것이고 인근엔 공무원이나 일반 여행객들이 여독을 풀고 쉬어갈 수 있도록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인 이태원이 있다.
청파역부근의 이 집은 용재총화를 지은 성현의 옆집이라하고 집이 크고 좋아서 명나라 사신이 와서 임시로 묵을 숙소 후보로 나라에서 살펴볼 정도 였다 한다. 청파 할아버지께서는 이 집에서 걸어서 혜화동의 성균관까지 등교하면서 반드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등의 경서經書를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세종 때에는 포의布衣(벼슬이 없음)로 발탁되어 집의執義를 시작으로 황해도 연안부사, 전라감사겸전주부윤, 제주목사, 호조참판, 중추원부사, 세종이 승하하자 명나라에 이를 알리는 고부사의 부사로 다녀오고 함길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개성부유수, 한성부윤, 사헌부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판한성부사, 중추원사가 되어 명나라에 2번째 다녀오고 행첨지중추원사,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옛날에 여자들이 집밖에 나올 때에는 머리덥개가 없었으므로 청파 할아버지가 새로이 남바우를 만들어서 임금에게 올렸는데 이것이 조선시대에 여자들이 뒤집어쓰고 다니는 머리덥개가 되었다 한다. 제주목사 시절에 제주의 풍속은 부모를 매장하지 않고 죽으면 구덩이에 버렸었지만 청파 할아버지가 부임하여 관을 마련하고 염을 하고서 매장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제주도에서는 어버이를 매장하는 방법이 청파 할아버지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청파 할아버지의 꿈에서 300여명이 뜰 아래서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며 그들이 말하기를 [공公의 혜택으로 우리들의 뼈가 땅에 묻히었으니 땅 위에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보은할 길이 없사오나 공公께서는 꼭 금년今年에는 현손賢孫을 보실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전에 公의 아들 세명이 모두 아들이 없었다가 과연 이해에 공公의 아들 장령공 기축軸이 아들을 낳았으니 정렬공 기찬奇襸이었다 합니다. 또, 황해도 연안부사로 있을 때에는 붕어가 나오는 큰 못이 있었는데 전임 부사가 붕어를 먹기 좋아하여 백성들이 붕어 잡느라 고생하여 사람들이 붕어무덤이라고 비웃었지만, 청파 할아버지가 부사로 부임하여 {어찌 입과 뱃속이 즐겁자고 청렴이 상하게 하겠는가?} 하고는 먹지 않았으며 손님을 대접하는 때가 아니면 붕어잡기위해 그물을 못하게 금지하였으므로 주민들은 크게 좋아하였다 한다. 단종 때부터는 벼슬을 끊고서 지낼 때인데 수양대군이 여러 번 찾았으나 눈은 뜨고 있으나 볼 수 없는 청맹과니인척하자 수양대군이 어느날 바늘로 찔러 시험해 보려 했지만 청파 할아버지는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바라보며 눈동자를 굴리거나 피하지 않았으므로 수양대군은 청파 할아버지를 기용하지 못하여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는 계유정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집안의 화도 면하였다 한다.
세조실록 22권, 1460년 세조 6년 12월 29일 신축에 청파 할아버지 돌아가신 기록이 있다. [중추원사中樞院使 기건奇虔이 졸卒하였다. 기건은 기현奇顯의 후손인데,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정고貞苦하여 작은 행실도 반드시 조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연안延安 군수가 되었는데, 군민郡民들이 붕어[鯽魚]를 바치는 것 때문에 그물질하여 잡기에 피곤해 하니 3년 동안 먹지 않고 또 술도 마시지 않았다. 체임遞任하여 돌아올 때에 백성(父老)들이 전송하니, 기건이 종일토록 마시어도 취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탄식하기를, 이제서야 우리 백성을 위하여 마시지 않은 것을 알겠다. 하였다. 또 제주濟州를 안무安撫하는데, 백성들이 전복[鰒魚]을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니, 역시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두어 도의 관찰사觀察使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歷任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시호諡號를 정무貞武라 하니, 청렴하고 결백하여 절개를 지키는 것이 정貞이요, 백성에게 모범되게 하여 복종시키는 것이 무武이다. ○辛丑/中樞院使奇虔卒。 虔, 奇顯之後, 性淸簡貞苦, 細行必謹, 好讀書。 嘗守延安, 以郡民進鯽魚, 困於捕網, 三年不食, 又不飮酒。 及遞還, 父老餞之, 虔終日飮不醉。 父老歎曰, 今乃知爲吾民不飮耳。 又按撫濟州, 民病所貢鰒魚, 亦三年不食鰒。 歷數道觀察使、大司憲, 所至有名。 諡貞武, 淸白守節 貞, 刑民克服 武。]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기록은 조선실록에 기록이 있어 1460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언제 태어나셨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지은 고봉선생의 행장엔 고봉선생의 선조를 소개하면서 청파 할아버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 한 것이 있다.
[세종조世宗朝에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고, 문종文宗 말기에 나이 50세도 안 되어 벼슬을 그만두었다. 世宗朝官至判中樞院事。文宗末年。年未五十致仕。]
문종은 음력으로 1450년 2월 22일부터 1452년 5월 14일까지 2년 2개월까지 왕으로 있었다. 문종말기를 1452년으로 보고 50이 않되었다고 하면 49세에 은퇴한 것으로 가정하고 49년년전은 1403년쯤에 태어나신 것으로 추정된다. 누나인 기자재 대고모가 1409년 사면이 되었으므로 6살 무렵에 집안이 복권되고 집이 청파만리현靑坡萬里峴에 있었다 한다. 오늘날의 서울 용산구 청파동은 청파 할아버지가 사시던 동네라고 해서 그 동명이 생긴 유래가 되었다. 조선시대는 나라에서 받은 시호인 정무가 더 중요시해서 정무공으로 아직도 정무를 더 높게 불리지만 오늘날까지 할아버지의 호가 동이름 청파로 남아서 세상사람들에게 청파 할아버지는 몰라도 청파는 들어봤을 것이기에 정무공은 우리 후손들이 간직하고 청파 할아버지를 정무보다 더 부르는 것이 좋겠다 생각합니다. 옛날 분들 이름은 여러 가지이며 명名은 왕 혹은 족보나 정부같은 공식 문서에 기록하는 이름으로 함부로 부르지도 못하게 하였고 어른이 되며 자字를 만들어 불렀지만 이것도 명보다는 못해도 역시나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 호號를 만들어 함부로는 아니지만 후손들도 친근하게 불렀던 이름이라 이제부터 저는 정무공 청파 건 할아버지를 청파 할아버지라고만 하겠다. 청파만리현은 청파동에서 훈민정음 반대산소문을 대표로 올린 최만리가 살던 동네이름에서 유래한 만리동의 고개라고 하니까 지금 숙명여대가 있는 청파동에서 북쪽으로 배문중고등학교부근에 집이 있었던 듯하다. 조선시대 역원제가 있다. 용산구 청파동엔 공문서 전달, 사신 파견 등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말을 갈아타거나 빌릴 수 있도록 한 시설인 청파역이 아마도 이곳은 철도가 놓이면서 서울역이 되었을 것이고 인근엔 공무원이나 일반 여행객들이 여독을 풀고 쉬어갈 수 있도록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인 이태원이 있다.
청파역부근의 이 집은 용재총화를 지은 성현의 옆집이라하고 집이 크고 좋아서 명나라 사신이 와서 임시로 묵을 숙소 후보로 나라에서 살펴볼 정도 였다 한다. 청파 할아버지께서는 이 집에서 걸어서 혜화동의 성균관까지 등교하면서 반드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등의 경서經書를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세종 때에는 포의布衣(벼슬이 없음)로 발탁되어 집의執義를 시작으로 황해도 연안부사, 전라감사겸전주부윤, 제주목사, 호조참판, 중추원부사, 세종이 승하하자 명나라에 이를 알리는 고부사의 부사로 다녀오고 함길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개성부유수, 한성부윤, 사헌부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판한성부사, 중추원사가 되어 명나라에 2번째 다녀오고 행첨지중추원사,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옛날에 여자들이 집밖에 나올 때에는 머리덥개가 없었으므로 청파 할아버지가 새로이 남바우를 만들어서 임금에게 올렸는데 이것이 조선시대에 여자들이 뒤집어쓰고 다니는 머리덥개가 되었다 한다. 제주목사 시절에 제주의 풍속은 부모를 매장하지 않고 죽으면 구덩이에 버렸었지만 청파 할아버지가 부임하여 관을 마련하고 염을 하고서 매장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제주도에서는 어버이를 매장하는 방법이 청파 할아버지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청파 할아버지의 꿈에서 300여명이 뜰 아래서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며 그들이 말하기를 [공公의 혜택으로 우리들의 뼈가 땅에 묻히었으니 땅 위에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보은할 길이 없사오나 공公께서는 꼭 금년今年에는 현손賢孫을 보실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전에 公의 아들 세명이 모두 아들이 없었다가 과연 이해에 공公의 아들 장령공 기축軸이 아들을 낳았으니 정렬공 기찬奇襸이었다 합니다. 또, 황해도 연안부사로 있을 때에는 붕어가 나오는 큰 못이 있었는데 전임 부사가 붕어를 먹기 좋아하여 백성들이 붕어 잡느라 고생하여 사람들이 붕어무덤이라고 비웃었지만, 청파 할아버지가 부사로 부임하여 {어찌 입과 뱃속이 즐겁자고 청렴이 상하게 하겠는가?} 하고는 먹지 않았으며 손님을 대접하는 때가 아니면 붕어잡기위해 그물을 못하게 금지하였으므로 주민들은 크게 좋아하였다 한다. 단종 때부터는 벼슬을 끊고서 지낼 때인데 수양대군이 여러 번 찾았으나 눈은 뜨고 있으나 볼 수 없는 청맹과니인척하자 수양대군이 어느날 바늘로 찔러 시험해 보려 했지만 청파 할아버지는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바라보며 눈동자를 굴리거나 피하지 않았으므로 수양대군은 청파 할아버지를 기용하지 못하여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는 계유정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집안의 화도 면하였다 한다.
세조실록 22권, 1460년 세조 6년 12월 29일 신축에 청파 할아버지 돌아가신 기록이 있다. [중추원사中樞院使 기건奇虔이 졸卒하였다. 기건은 기현奇顯의 후손인데,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정고貞苦하여 작은 행실도 반드시 조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연안延安 군수가 되었는데, 군민郡民들이 붕어[鯽魚]를 바치는 것 때문에 그물질하여 잡기에 피곤해 하니 3년 동안 먹지 않고 또 술도 마시지 않았다. 체임遞任하여 돌아올 때에 백성(父老)들이 전송하니, 기건이 종일토록 마시어도 취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탄식하기를, 이제서야 우리 백성을 위하여 마시지 않은 것을 알겠다. 하였다. 또 제주濟州를 안무安撫하는데, 백성들이 전복[鰒魚]을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니, 역시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두어 도의 관찰사觀察使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歷任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시호諡號를 정무貞武라 하니, 청렴하고 결백하여 절개를 지키는 것이 정貞이요, 백성에게 모범되게 하여 복종시키는 것이 무武이다. ○辛丑/中樞院使奇虔卒。 虔, 奇顯之後, 性淸簡貞苦, 細行必謹, 好讀書。 嘗守延安, 以郡民進鯽魚, 困於捕網, 三年不食, 又不飮酒。 及遞還, 父老餞之, 虔終日飮不醉。 父老歎曰, 今乃知爲吾民不飮耳。 又按撫濟州, 民病所貢鰒魚, 亦三年不食鰒。 歷數道觀察使、大司憲, 所至有名。 諡貞武, 淸白守節 貞, 刑民克服 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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