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기씨대종중

행주기씨역사

조선 태종의 기자재竒自在 대고모의 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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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5-11-30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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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년 신해참화가 일어나고 19년후 1392년 고려는 망하고 조선이 된다. 조선개국후 17년후이고 신해참화후 38년후인 1409년 4둴 7일의 조선 태종실록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임금(태종)이 문소전文昭殿(태조太祖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를 모신 사당)에 직접 제사하고, 드디어 인덕궁仁德宮(경기도 개풍군開豊郡 흥교興敎面 흥교리興敎里에 있던 정종定宗이 퇴위退位한 뒤에 살던 궁)에 가서 문병하고 돌아왔다. 상왕上王(정종)의 궁인宮人 가운데 이름이 자재自在라는 사람이 있는데, 공안부恭安府(정종이 태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자, 태종이 정종의 남은 삶을 돌보기 위해 설치한 기관) 여종이었다. 상왕이 불쌍히 여겨 임금에게 부탁하여 왕패王牌(임금이 서명하고 대보大寶를 찍어서 면역시킬 때 내려 주던 서류)를 주어 영구히 양인良人으로 방면放免하도록 하였다. 대개 상왕에게 총애를 받아 자녀 여덟을 낳았는데, 이군생李群生이 그 맏이다.
○己卯/上親祭于文昭殿, 遂詣仁德宮, 問疾而還。 上王宮人名自在者, 恭安府婢也。 上王憐之, 囑于上, 令給王牌, 永放爲良。 蓋寵於上王, 生子女八, 羣生, 其長也。]
여기서 관노비로있던 자재自在는 큰아들 이름 이군생으로 알 수 있는데 8세손 기중평 할아버지의 손녀이고 9세손 기면 할아버지의 따님이고 10세손 정무공 청파 기건 할아버지의 누이이다. 조선시대 여자이름으로 온전하게 전하는 분이 별로 없는데 조선실록에 정확히 기자재自在라고 기록이 남은 특이한 경우이다.
1428년 세종대왕이 선물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41권, 세종 10년 8월 28일
순평군順平君의 어머니에게 관곽과 쌀 콩 아울러 20석과 종이 70권을 내려 주었다.
○賜順平君母棺槨及米豆幷二十石、紙七十卷。]
48년후인 1457년 세조실록 세조 3년 6월 13일엔 돌아가신 기록도 있다.
[○정석정貞石正 이융생李隆生의 어머니가 졸卒하니, 부의賻儀로 쌀 콩 아울러 20석과 종이 70권卷과 관곽棺槨을 하사下賜하였다.
○貞石正 隆生母卒, 賜賻米豆幷二十石、紙七十卷、棺槨。]
1371년 신돈의 숙청과 그래서 돌아가신 7세손 기현 할아버지 그리고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신 8세손 기중평 할아버지이후 9세손 기면 할아버지와 그 자녀분들은 죽음은 면했지만 관노비가 되었다가 1409년 태종이 정종을 문병간 자리에서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의 누이 기자재 대고모를 사면 요청하고 태종이 받아들여서 관노비에서 풀려나고 종2품 내명부의 숙의가 되는 이 과정에서 살아계셨다면 할머니 강능김씨, 아버지 기면 할아버지, 남매사이인 청파 할아버지, 자매 사이인 남원윤씨 윤지득의 부인과 진주류씨 류양식의 부인도 노비 신분에서 양인으로 돌아왔을 것으로 보이다. 이후 벼슬이 없다는 뜻의 베로 만든 옷(布衣:포의)으로 계시던 청파 할아버지가 왕가의 인척이 되어 세종시대에 음서로 벼슬을 시작하며 기탁성이후 다시 기씨의 중흥조가 되신다.
9세 기면 할아버지가 공조전서를 지냈다고 하지만 기자재 대고모가 종2품 숙의가 되면서 아버지에게 내린 벼슬이나 추증으로 본다.
기자재 대고모가 기씨를 구했다면 원당 정무공 도선산에 있는 남원윤씨 윤지득의 부인이신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의 누이에게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원당 도선산은 9세 기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를 쓰려고 했는데 첫째딸 윤지득의 부인이 아버지 묘자리가 탐나서 자기 남편 윤지득의 묘자리로 쓰고자 밤새워 파놓은 묘자리에 물을 날라 부어 놓았고 묘자리에서 물이 나온다고 판단한 청파 할아버지는 묘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 명당 자리는 윤지득이 차지하여 남원윤씨의 묘가 우리 도선산에 있는 연유이다. 옮겨간 묘소는 족보의 설명대로 행주기씨 대종중의 진짜 도선산인 지금은 남의 땅이 된 천보산으로 보이다.

조선에 처음 시작하신 분은 9세손 전서공 기면 할아버지이다. 전서공 할아버지는 1남3녀를 두셨고 족보상 첫째는 도선산에 전서공 묘자리를 차지한 윤지득의 처이다.
족보내용 [남원윤씨南原尹氏 벼슬은 선공봉사繕工奉事. 아버지는 감사監事 윤임尹臨. 아들은 판관判官 윤은尹訔. 윤은尹訔의 5세손은 문부사文府使 윤형갑尹衡甲. 윤형갑의 큰아들은 벼슬이 응교應敎를 지내고 절의로 죽은 윤계尹棨. 작은 아들은 척화파斥和派로 병자호란 때 심양瀋陽에 끌려가 죽은 윤집尹集. 윤은尹訔의 외증손은 병랑兵郞을 지낸 이진충李藎忠. 이진충의 사위는 문지사文知事 조존성趙存性. 조존성趙存性의 아들은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으로 인조仁祖왕비 장렬왕후莊烈王后를 낳았다.]
두 번째는 정종의 후궁으로 숙의를 지내신 기자재 대고모로 족보상 외후손으로는 효종비 인선왕후, 그리고 세도정치를 대표하는 안동김씨가 후손으로 순조비 순원왕후, 헌종비 효현왕후, 철종비 철인왕후, 직계후손으로 유명한 사람은 청장관전서를 지은 이덕무와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이규경이 있다.
족보내용[조선 2대왕 정종定宗의 후궁后宮, 내명부內命婦 정2품 숙의淑儀. 큰아들은 순평군順平君 이군생李群生(?~1456), 둘째는 원윤元尹 이의생李義生(?~1435), 후에 금평군錦平君으로 추증. 셋째는 정석도정貞石都正 이융생李隆生(1418~1474), 후에 정석군貞石君으로 추증. 넷째는 무림군茂林君 이선생李善生(1419~1475). 큰딸은 숙신옹주淑愼翁主로 경주김씨 판돈령判敦寧 양평공良平公 김세민金世敏에게 시집갔다下嫁. 작은 딸은 상원옹주祥原翁主로 평양조씨 행사직行司直 조효산趙孝山에게 시집갔다. 순평군의 사위는 벼슬이 부사府使이고 본이 연안延安인 김후金煦, 김후의 사위는 동지同知 허확許確, 허확의 아들은 판서判書 허흡許洽, 허흡의 외증손은 벼슬이 판서判書이고 본이 덕수德水인 장운익張雲翼, 장운익의 아들은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신張維新으로 효종孝宗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를 낳았다. 정석군의 손녀사위는 감사監司 원계채元繼蔡, 원계채의 사위는 본이 동래東萊인 정유길鄭維吉, 정유길의 아들은 정창연鄭昌衍, 정창연의 손자는 정태화鄭太和, 정치화鄭致和, 정유길의 외손은 안동김씨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으로 모두 재상宰相이 되었다. 후손後孫 김조순金祖淳은 순조순원왕후純祖純元王后를 낳고 김조근金祖根은 헌종효현왕후憲宗孝顯王后를 낳고 김문근金汶根은 철종철인왕후哲宗哲仁王后를 낳다. 정석군의 외현손外玄孫은 참판參判 박숭원朴崇元이고 박숭원의 사위는 장운익張雲翼이다.

셋째는 류양식 처이다. 외후손으로는 숙종비 인현왕후와 인원왕후 그리고 고종비 명성황후가 있다.

족보 기록 [진주류씨晉州柳氏, 벼슬은 참판參判. 아버지는 순문사巡問使 류의柳依이다. 큰아들은 문장사인文壯舍人 류자빈柳自濱, 둘째는 문사인文舍人 류자분柳自汾, 셋째는 생장生壯 류자한柳自漢. 류자빈의 큰사위는 광산김씨光山金氏 김겸광金謙光, 둘째 사위는 영월신씨寧越辛氏 문사인文舍人 신중거辛仲琚, 신중거의 딸은 연안이씨延安李氏 직제학直提學 이채李埰의 후실後室로 시집갔다. 이채의 아들은 군수를 지낸 이경종李慶宗, 이경종의 증손녀사위는 감사監司 민광훈閔光勳, 민광훈의 아들은 민유중閔維重이다.(민유중閔維重은 숙종肅宗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낳았다. 민유중의 5대손 민치록은 고종비 명성황후를 낳았다) 이채의 사위는 안동권씨安東權氏 부사府使를 지낸 권용權鎔, 권용의 사위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인 이연화李延華, 이연화의 아들은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이귀의 아들은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이시백의 사위는 풍양조씨豐壤趙氏인 진사進士 조래양趙來陽, 조래양의 사위는 경주김씨慶州金氏 김일진金一振, 김일진의 아들은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으로 숙종肅宗왕비 인원왕후仁元王后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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