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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기씨족사幸州奇氏族史
시조는 기우성(奇友誠). 백제 온조왕(溫祚王)때 시중(侍中)을 지내고 지금의 경기도 고양군 행주(幸州)에 세거, 행주로 관향을 삼았다.
기(奇)씨는 행주(幸州) 단일본으로 3천여 년의 긴 역사를 내세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다.
기원전 1120년경 은(殷)나라의 종친(宗親)인 자서여(子胥餘)는 기국(箕國)의 자작(子爵)으로 있으면서 기자(箕子)라 불리었으며 미자(微子), 비간(比干)과 함께 은나라 말기(末期)의 세명의 어진 사람이었다.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방탕한 생활로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 기자(箕子)는 간곡히 말렸으나 주왕은 듣지 않았고 기자는 머리를 풀고 미친척하고 돌아다니다 주왕에 의하여 감옥에 갇히었다.
새로 일어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패권(覇權)을 잡은 후에 감옥에 있는 기자를 풀어주자 기자는 은나라의 종친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적군에게 구원된 것이 부끄러워 따르는 무리 오천여명과 함께 조선으로 왔다. 이때 따라온 사람들은 100가지 기술을 가진 기술자와 학자들이었다. 처음 조선에 들어와 길쌈, 누에치기등의 문명과 학문을 가르쳤고 8조의 금법(禁法)을 시행하였다.
기자가 조선으로 간 사실을 전해들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기자를 조선에 봉(封)하였고 봉함을 받은 기자는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기 위하여 조관(朝觀)을 왔고 이때 무왕에게 홍범(鴻範)을 설명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은나라의 옛 궁궐터를 지나며 잡초만 무성한 것을 보고 맥수가(麥秀歌)를 지어 불렀다.
세월이 흘러 주나라가 쇠퇴하고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여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燕)나라 제후(諸候)가 기원전 323년에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고 이웃에 있는 기자조선을 침략하려하자 조선후(朝鮮候)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고 연나라를 마주 공격하여 주나라를 도우려 하였으나 대부(大夫) 예(禮)가 간곡히 만류하므로 예(禮)를 연나라에 보내 협상하여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였다.
차츰 기자조선왕이 중화 나라에 맞설만큼 당당하고 강성하여 졌다, 연나라가 가장 전성기인 기원전 311년에서 279년 사이의 소왕(昭王) 때에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서쪽 변두리의 땅 2천여리를 빼앗기고는 마침내 약화되었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통일하고 서기전 214년에 요동까지 만리장성이 연결될 때는 기자의 40세손 기부왕(箕否王) 시대로 강성한 진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겉으로는 복속(服屬)하는 척하고 실제로는 조회(朝會)하지 않았다.
기부왕(箕否王)이 죽고 41세손 기준왕(箕準王)이 즉위하여 20여년이 흘러 진나라가 망하고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제후국 연(燕), 제(齊), 조(趙)나라의 많은 주민들이 기자조선으로 넘어와 망명하였다.
유방의 한(漢)나라가 항우를 물리치고 황제가 된 후에 한나라의 노관(盧綰)이 제후국 연나라의 왕으로 있다가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여 흉노(匈奴)로 달아났다.
이러한 혼란기인 서기전 195년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호복(胡服)을 입고 조선의 패수를 건너와 기준왕(箕準王)에게 투항하고 살 곳을 요청했다. 기준왕은 박사(博士) 벼슬과 제사의식 때 쓰는 규(圭)를 하사하였고 서쪽 땅 일백리(一百里)를 주어 서쪽 국경을 지키며 살도록 하였다.
위만은 기존에 피난 와서 살고있는 연, 제, 조나라 출신의 주민과 한나라에서 계속 망명해오는 주민을 꾀어서 세력을 키운 후, 서기전 194년경에 기준왕에게 한(漢)나라 군사들이 열갈래로 나누어 침략해오니 도성(都城)에 들어가 왕을 보호하겠다 거짓보고하고 군사를 몰아 기준왕을 공격하였다.
기습으로 위만에게 패한 기준왕은 좌우의 궁인(宮人)들과 바다로 피신하여 마한(馬韓) 땅에 도착하여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기준왕(箕準王)을 무강왕(武康王)이라 한다.
위지(魏志) 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무강왕, 기준(箕準)의 8세손 마한(馬韓) 원왕(元王) 기훈(箕勳)에 이르러 세 아들이 있으니 우평(友平)은 용강(龍岡)으로 돌아가서 북원(北原) 선우(鮮于)씨가 되었고 우량(友諒)은 마한(馬韓)의 옛 제도에 따라 상당(上黨 ; 청주) 한(韓)씨가 되었고 우성(友誠)은 평강(平江)으로 돌아가서 덕양(德陽 ; 행주) 기(奇)씨가 되었다. 기자로부터는 49세손이다.
이 때문에 세 성씨는 서로 한 핏줄, 종씨(宗氏)라 여겨 지금까지도 통혼을 하지 않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溫祚王) 기록에는 우리 기(奇)씨의 선조인 마한의 유민(遺民)이 온조왕에 의하여 한산(漢山 ; 서울)의 북(北), 즉 행주(幸州)로 옮겨진 기록이 있다. 인용하면 온조왕 26년, AD 8년, 겨울 10월, (온조)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겉으로는 사냥한다 핑계 대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 금현(錦峴) 두 성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二十六年冬十月王出師陽言田獵潛襲馬韓遂幷其國邑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온조왕 27년, AD 9년, 여름 4월, 원산, 금현 두 성이 항복하므로 그 백성을 한산(漢山)의 북(北)으로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망하였다.(二十七年夏四月二城降移其民於漢山之北馬韓遂滅)
여기에서 한산의 북은 당연히 우리 기씨의 본관 행주이다. 그러나 행주(幸州)로 옮겨진 후 백제시대부터 고려 초까지의 기(奇)씨의 행적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않다. 다만, 경기도(京畿道)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행주동(幸州洞)의 행주산성(幸州山城) 안에는 우리 기씨의 조상들이 태어났다는 전설(傳說)이 깃든 기가(奇哥)바위, 사시면서 달게 맛있게 드셨다는 기감천(奇甘泉)이 있어 기록을 대신한다.
세계상(世系上)의 1세조는 고려(高麗) 인종조(仁宗朝)에 사시고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추증되신 순우(純祐) 할아버지이다. 선대(先代)를 제쳐놓고 순우(純祐)를 1세로 치는 이유는 한때 선대의 세계를 잃었기 때문이다. 1688년 숙종 14년에 무진보(戊辰譜)를 수보할 때 선대(先代)를 정확히 계대할 수 있는 기록으로 순우(純祐)를 1세조로 하여 기록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세계(世系) 시조인 기순우(奇純祐)의 아들인 수전(守全)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사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太師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다.
고려 개국과 함께 언(彦)은 고려태조 왕건이 삼군을 거느리고 일리천에서 견훤의 아들 신검과 대진할 때 군사 삼만을 거느리고 좌익을 맡았으며, 오(悟)와 달(達)이 고려태조시대에 원윤을 지냈고, 정업(貞業)은 고려 목종 때 명의로 전의가 되어 목종이 아플 때 왕사(王師)인 승려 2명과 주야로 간호 시약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자세한 계대는 못하고 있다.
행주기씨(幸州奇氏)가 가문을 단단히 하고 크게 융성을 누린 것은 고려 중엽 이후 약 2백여년간이다.
탁성(卓誠)은 의종 때의 무신으로 모습이 단아하고 궁술과 마술(馬術)을 잘하였다. 교위(校尉)가 되었을 때, 말달리기와 격구(擊毬)를 즐겨하는 의종에게 뽑혀 견룡(牽龍: 御駕牽引)이 되어 왕의 곁에 있게 되었고, 곧 장군이 되었으며,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가담, 명종 즉위와 함께 어사대사(御史臺事), 참지정사가 되었다. 1174년에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을 치려고 군사를 일으켰을 때 절령(慈悲嶺) 이북 40여성이 이에 호응하자, 윤인첨(尹鱗瞻)이 원수가 되고 그는 부원수가 되어 서경을 평정시키고 돌아오자 벼슬이 판병부사(判兵部事)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다. 광평궁(廣平宮)이 오래 비어 있을 때, 왕에게 청하여 거기에 거처하려 하였는데 부인이 이를 반대하였으나 듣지 않고 궁에 살기 수개월 만에 죽었다. 죽은 후 조위총의 난을 평정시킨 공으로 추충협모좌리동덕공신(推忠協謀佐理同德功臣)이 되어 각상(閣上)에 형상이 그려졌으며, 수태사(守太師)·문하시중이 증직되었다.
존정(存靖)은 1216년(고려 고종 3년)에 거란이 고려의 국경선을 침범하여 영덕성(寧德城:평안북도 영변)을 넘어 연주(延州)의 개평역(開平驛), 원림역(原林驛)에 주둔할 때, 고려의 삼군(三軍)도 이곳에 이르렀으나 거란의 기세에 눌려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지만 이때 장군으로서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 김취려(金就礪)와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포위를 돌파하여 거란군을 크게 무너뜨렸다. 이 기세로 적을 물리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인보(仁甫)는 고려 고종 때의 무인이며, 랑장으로서 원사 조충, 병마사 김취려를 따라 거란의 침입을 여러 차례 막았으며 최충헌이 정권을 잡고 반대파 백여명을 살해하자 분격하여 최충헌을 죽이려하다가 발각되어 도리어 피살된 기록 등이 보이지만 탁성, 존정, 인보의 자세한 계대는 알 수 없다.
홍수(洪壽)는 1148(의종 2)년에 태어나1209(희종 5)년 돌아가셨으며. 자는 태고(太古)이며 어려서는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하여 권홍(權弘)의 필결(筆訣)에 글씨 평론(評論)이 보이지만, 장년이 되어서 무인이 되었다. 1194년(명종 24)12월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197년 9월에 참지정사 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 같은해 11월에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감수국사 판병부사 태자태부(守司徒中書侍郎平章事監修國史判兵部事太子太傅)가 되었다. 1199년(신종 2) 12월에 수태위 문하시랑 평장사(守太尉門下侍郎平章事), 1200년 12월에 수태사 주국(守太師柱國), 1201년 12월에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1203년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로 물러났다. 1199년 5월에 대관전무일편 大觀殿無逸篇)을 고쳐 썼으며, 1204년 정월에 최충헌(崔忠獻) 등과 더불어 신종의 희종에게의 선위(禪位)를 논의하였고, 희종 때에 이부(吏部)에서 전선(銓選)을 맡았으나, 최충헌에게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음악과 글씨를 즐겼다. 시호는 경의(景懿)이다.
중시조의 손자 3세 윤위(允偉), 윤숙(允肅), 필선(弼善), 필준(弼俊)이 상장군(上將軍)이다. 윤위는 고려 중기의 무신이며 1211년(희종 7) 희종이 왕준명 우승경 등과 더불어 최충헌을 죽이려 할 때 당시 지유로서 신선주 등과 더불어 최충헌을 구출하여 크게 신임을 얻었다. 1217년(고종 4)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였을 때 장군으로 개경시가에 군사를 배치하여 적의 침략에 대비하였으며 이어 대장군으로 가발병마사가 되어 고주(함남 고원) 화주(함남 영흥)에서 거란의 침입을 막았다. 윤숙은 1252(고종 44)년에 돌아가시었고. 무신이며 원나라 순제(順帝)의 제2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의 고조이다. 최충헌의 당으로 상장군이 되었으며, 양성(兩省)의 관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강정(康靖)이다. 거란(契丹)의 침입을 막는 등 무공을 세워 이름을 떨쳤다.
윤숙의 아들 홍영은 고려 후기에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 保承郎將)을 지내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었다.
윤숙의 셋째 아들 홍석은 최씨정권의 말기인 고종 때 무관직인 지유(指諭)로 있으면서 장군 유정, 지유 민경함 등과 최우의 사위인 김약선이 죽자 무신정권의 집권자인 최우(崔瑀)에게, 최우의 외손자이고 김약선의 아들인 김미(金미)를 최우의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건의하였으나 거부되었다. 그 뒤 김미가 최우의 친아들인 최항(崔沆)과 권력다툼 끝에 최항을 살해하려한 음모가 발각되자, 그의 일파로 지목되어 최항에 의해 유배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자는 대부분 처형되었으나 그는 구명되어, 1258년(고종 45) 최씨정권의 붕괴와 함께 풀려났다. 1275년(충렬왕 1) 군부판서(軍簿判書) 응양상장군(鷹揚上將軍)에 제수되고, 3년 뒤에는 정동도원수 홍다구의 추천으로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를 거쳐 밀직사동지사(同知事)에 감찰제헌(監察提憲)에 올라 국가기무에 참여하였다.
홍영의 아들 5세 온(蘊)은 고려 고종의 부마(사위)이다.
이렇듯 융성가도를 달리던 기씨 문중은 기황후(奇皇后)가 등장하면서 그 영화가 절정에 달했다. 기황후(奇皇后)는 6세 자오(子敖)의 막내딸로 천자(天姿)가 우아하고 품위가 고상하여 16세 때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궁녀로 들어가 22세 때 태자(太子)를 낳고 제 2황후로 책봉됐다(1340년). 그가 낳은 태자는 후일의 소제(昭帝)로 원(元)의 황통(皇統)을 이었다. 이로 인해 기황후(奇皇后)의 아버지 6세 자오(子敖)는 영안왕(榮安王)으로 다시 경왕(敬王)에 봉해지고 황후의 조부 관(琯), 증조 홍영(洪穎)도 왕으로 추증되었다. 기황후의 오빠인 7세 철(轍)은 원나라(元朝)에서 정동성참지정사(征東城參知政事)와 요양성평장사(遼陽省平章事), 고려(麗朝)에서는 벽상삼한삼중대광수사주도첨의사사(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徒都僉議使司)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으로 봉해졌다. 기(奇)씨 일문은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세도가가 됐고 가히 기(奇)씨 천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元)이 쇠퇴하고 고려에선 1351년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면서 기(奇)씨 일문은 한동안 침체기를 맞는다. 공민왕(恭愍王)은 주원장(朱元璋)이 명(明)나라를 일으키면서 대륙을 원(元)으로부터 수복하는 기회를 잡아 1백년에 걸친 원(元)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이 원(元), 명(明) 교체기에 원(元)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기(奇)씨 일문은 큰 수난을 당했다. 친원외척(親元外戚)으로 지목된 기(奇)씨 일가는 제거 대상이 되고, 드디어 기황후(奇皇后)의 오빠로 권력의 정상에 있던 기철(奇轍)이 1356년(공민왕 5년) 숙청되고 황후의 형제와 조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원나라로 망명하였다. 기황후의 긍정적인 면은 자신이 피해를 본 공녀의 제도를 없앴으며 원나라에서 논의하던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한 지방의 성으로 만들자는 논의를 없었던 일로 만들어 부마국으로나마 고려의 이름과 국가를 보존 시킨 것이다.
이후에 나타나는 것이 신돈의 측근으로 일한 7세 현(顯)이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자신이 판사(判事)에 취임, 문란한 토지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여, 농민의 권익 옹호와 국가 재정의 충실을 꾀하였다. 이러한 급진적 개혁은 상층계급의 반감을 사고 기득권층과 마찰을 빚었다. 땅이 모든 재화의 원천이고, 땅을 경작하는 노비 소유의 비례에 따라 경제적 지위가 결정되던 사회에서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를 농민에게 돌려 놓는 개혁사업은 귀족들의 사회적 기반부터 뒤흔들어 놓는 일이라 극심한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신돈의 개혁의지에 겁먹은 권문세족들은 빼앗은 토지를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땅을 되찾은 농민이나 억울하게 노비가 되었다가 풀려난 농민 등 권문세족의 횡포에 눈물 흘리던 백성들은 신돈의 과감한 개혁에 감격했다. 백성들이 그를 성인(聖人)이라 추앙할 정도로 그의 개혁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신돈이 권문세족들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서울을 개경에서 평양으로 옮기려고 하자 드디어 권문세족들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왔다. 시중 벼슬에 있던 권문세족 경천흥과 오인택은 신돈을 살해하려 시도하기도 했고 또한 여론을 이용해 신돈을 제거하려고 신돈이 양가 아녀자를 겁탈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실제로 신돈에 대한 기득권층의 비판은 뇌물과 아첨, 여자를 밝히고 호화주택을 소유했다는 데 초점을 맞추었지만 개혁의 과정에서 토지나 노비를 부정축재 했다는 자료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뇌물과 아첨이야 남들이 안보는 데서 일어나는 일이니 말을 만들기 나름이다. 신돈이 왕의 비호말고는 아무런 배경 세력 없이 활동했던 것은 아니다. 새롭게 등장한 신진관료들, 곧 이색 정도전 정몽주 같은 사람들을 개혁의 배후세력으로 삼으려 했다. 이들은 공민왕과 신돈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귀족세력에 대항해 개혁을 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도 불교를 배척한 성리학자인 만큼 승려인 신돈에게 반드시 호의적인 것은 아니어서 신돈을 비호해 줄 이유가 없었다. 신돈이 중영한 성균관을 통하여 배출 된 신진사대부 등의 성리학자들이 세운 나라인 조선에서 만든 역사서 고려사(高麗史)가 32, 33대 임금인 우왕과 창왕을 신우(辛禑), 신창(辛昌)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두 임금이 고려의 왕성(王姓)인 왕씨가 아니라 신씨 성을 가진 신돈의 자식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는 신돈이 지닌 개혁성과 신흥사대부들의 개혁성이 중첩되어 조선왕조 성립의 명분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한 조선개국세력들의 의도적 폄하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역성혁명론을 높이 주장하기위해 신돈을 낮추어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신돈은 불교계에서도 사원이 가진 땅이나 노비가 많아 개혁의 대상으로 피해를 보아서 신돈에게 원한이 있었다. 결국 신돈은 처음 농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자신의 정치세력 형성에 실패한 탓에 요승으로 낙인 찍히고 말았다. 1370년 노국공주의 죽음으로 슬픔에 모든 정사를 신돈에게 맡겨놓았던 공민왕은 힘없는 백성들에게만 성인으로 추앙받고 여러 다른 정치세력으로부터는 비난 받는 사면초가의 신세가 된 너무 커진 신돈에게 자신의 지위에 위기를 느끼고 있다가 어느 정도 개혁의 성공으로 신돈 등용의 목적을 이룬 후에 신돈을 반역의 혐의로 처형하였다. 토사구팽 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신돈의 핵심 측근이었던 7세 현(顯)은 신돈이 숙청될 때인 1371년 아들들과 함께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다. 큰아들 8세 중평(仲平)의 후손은 주로 이남에 살고 셋째 중민(仲敏), 넷째 중제(仲齊)와 다섯째 중수(仲修)의 후손은 일부는 이남에 살지만 주로 황해도 지역에 살며 해서문중(海西門中)을 이룬다.
고려말(高麗末)에 수난을 겪은 기(奇)씨 문중을 다시 살려서 명문으로 일으킨 중흥조(中興祖)가 7세 현의 증손자 10세 건(虔, 1390~1460년) 이다. 이후 조선조 5백년간 문중에서는 청백리(淸白吏) 3인, 성리학자 3인, 영상(領相) 1인, 호당(湖堂) 3인, 문시(文諡) 3인, 공신(功臣) 5인, 봉군(封君) 13인, 대과급제(大科及第) 22인을 배출했다. 건(虔)은 호(號)가 현암(眩庵)이며 처음 호는 청파로써 서울 청파동은 공이 사시던 동네라는 데서 연유한다. 공은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정고(貞苦)하여 작은 행실도 조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깊었으며 효도와 청렴으로 일세를 살았다. 공은 원래 세종(世宗)때 초야에 묻힌 선비였다. 세종은 공의 학덕을 듣고 발탁해 지평(持平)에 임명했다. 연안(延安) 군수가 되었을 때 군민들이 붕어를 바치는 것 때문에 그물질하여 붕어 잡기에 피곤해 하니 3년 동안 먹지 않고 또 술도 마시지 않았다. 체임(遞任)하여 돌아올 때에 부로(父老)들이 전송하니, 공(公)이 종일토록 마시어도 취하지 않았다. 부로들이 탄식하기를 '이제서야 우리 백성을 위하여 마시지 않은 것을 알겠다' 하였다. 또 제주(濟州)를 안무(安撫)하는데 백성들이 전복을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니 역시 3년 동안 먹지 않았으며 부모가 죽으면 구덩이나 언덕에 버리는 제주의 풍속을 교화시켜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이어서 내직으로 옮겨 집의·형조참의·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448년(세종 30)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에 부임,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세종이 승하하자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개성부유수가 되었다가 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당시 국왕이 유약함을 기화로 권력을 농단하고 있던 여러 신하들을 탄핵하였다. 먼저 승정원승지들의 권력 농단, 특히 도승지 강맹경(姜孟卿)의 탐학을 탄핵하였으며, 공론의 보장을 요구하였고 이어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의 횡포를 논박하였다. 그 뒤 평안도관찰사, 한성판윤를 역임하고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당시 수양대군이 궁중에 무상 출입하며 정치에 간여하자 이는 정사를 어지럽히는 일이니 종실의 궁내 출입을 통제해야 한다는 상소(금분경안)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분출하였다. 수양(首陽)이 등극하여 세조(世祖)가 되자 그의 인품과 명망을 아껴 다섯번이나 그를 찾았지만, 늙어 눈이 보이지 않는다(청맹; 靑盲)는 핑계로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세조(世祖)는 눈이 멀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바늘로 그의 눈을 찌르려는 체 했으며, 그래도 꼼짝하지 않아 끝내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 이때부터 호가 현암이 되었다. 뒤에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공주 동학사 숙모전 및 전라남도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 고양의 덕의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정무공의 윗대 선조의 묘소는 모두 실전되어 모른다. 1714년 갑오보를 인용한 기록에는 경기도 포천 서면 천보산 회암아래 신기촌 대로변 위에 7~8기의 큰 묘가 있는데 동네 사람들은 기정승댁 산소라고 한다, 묘 아래의 논밭은 이 묘들의 관리비용을 위한 위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 동네 사람들이 묘지 등을 훼손하고 땅을 차지하였다. 그 후에 해서종인(海西宗人)들이 묘지석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다 한다. 2000년에 대종중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성사리, 현제의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에 있는 정무공의 묘소 일대에 선세 9위의 추모제단을 세우고 기씨 도선산(都先山)이라 하여 유허지(遺墟址)로 삼고 음력 10월 1일에 시제를 올린다.
건(虔)은 아들 11세 축(軸)과 손자 5형제를 두었고, 이 가운데 둘째 12세 찬(襸)이 다시 형(逈), 원(遠), 괄(适), 진(進), 준(遵)등 5형제를 두었다.
큰아들 13세 형(逈)의 처음 이름은 매(邁), 자는 자고(子高)이다. 1501년 사마양시(司馬兩試)에, 1516년(중종1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냈으며, 도승지(都承旨) 겸 직제학(直提學)에 추증되었다. 막네 기준(奇遵)은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또는 덕양(德陽)이다. 1513년(중종 8)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151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거쳐 홍문관정자로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으며, 박사를 역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사경(司經)으로 있을 때에는 임금에게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할 것을 건의하였다. 1516년 저작(著作)으로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을 겸하였으며, 검토관(檢討官), 수찬(修撰), 검상(檢詳), 장령(掌令), 시강관(侍講官)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이성언(李誠彦)이 임금을 속이고 부정을 저질렀다 하여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당시 대각(臺閣)이 이를 묵인하였음을 논박하여 훈구파(勳舊派)인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으로부터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1519년 응교가 되어 마침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를 위시하여 김식(金湜)·김정(金淨) 등과 함께 하옥되고, 이어 아산으로 정배되었다가 이듬해 죄가 가중되어 다시 온성으로 이배되었다. 어머니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갔다가 1521년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신사무옥(辛巳誣獄)이 터져 다시 유배지에 가서 교살되었다. 시도 잘하여 해동시선,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등에 시가 수록되어 있다.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아산의 아산서원(牙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복재집, 무인기문(戊寅紀聞), 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1545년(인종 1)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고려말 멸문을 피해 흩어졌던 기(奇)씨들은 이 무렵 둘째 원(遠)과 넷째 진(進)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해 또 다시 멀리 남도(南道)로 내려가 장성문중과 광주문중을 이루며 그 후엔 호남 일대가 본고장이 되어 버렸다. 형(逈)의 큰아들 14세 대복(大復)의 둘째 아들 령(령)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양호감찰사(兩湖監察司)를 역임하고, 사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됐다. 형(逈)의 현손 17세 협(協)은 1572(선조 5)에 태어나 1627(인조 5) 순사했다. 자는 여인(汝寅). 아버지는 도사 성헌(誠獻)이다. 1601년(선조 3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04년 검열이 된 뒤 설서, 홍문관정자, 홍문관박사, 부수찬, 전적, 병조좌랑, 수찬, 부교리, 장성현감을 거쳐 1609년(광해군 1)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을 역임하였다. 1612년 교리를 거쳐 이듬해 강화부사가 되었는데, 이때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대하였다하여 파직, 하옥되었다. 1617년에 풀려나 1620년에 다시 기용되어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1626년(인조 4)에 선천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 의주가 함락되고 적이 곽산의 능한산성(陵漢山城)에 이르자 수성장(守城將)으로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다시 선천에 돌아와 적과 항전하였다. 이때 적은 ‘항복하라’는 글을 보내왔으나 이를 불태우고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인조가 치제(致祭)하고 정려(旌閭)하여 포상하여 덕풍군(德豊君)으로 봉해졌다.
13세 원(遠)의 둘째 아들로 호조판서에 추증된 고흥군(高興君) 대유(大有)의 장자인 15세 효간(孝諫)은 1530(중종 25)에 태어나 1593(선조 26)사망했으며. 자는 백고(伯顧), 호는 금강(錦江) 혹은 ·인재(忍齋)이다, 어머니는 함양오씨(咸陽吳氏)이고 효근(孝謹)의 형이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수제자이며 이항(李恒) , 고봉선생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김인후가 그에게 지어준 “우주의 중간에 두 분이 있는데, 공자는 원기(元氣)이고, 주자는 참(眞)이다.”라는 시는 도를 전해 받은 시로 알려졌다. 일생 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후진양성에 주력하여 호남의 은덕군자(隱德君子)로 불리었다. 동문인 김천일(金千鎰), 정철(鄭澈), 변이중(邊以中)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오희길(吳希吉)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스승 김인후가 죽은 뒤에 서태수(徐台壽), 변이중, 변성온(卞成溫), 변성진(卞成振) 등과 사우를 짓는 일에 참여하여 제자의 직분을 다하였다. 임란(壬亂)때에는 호남(湖南)의 거유(巨儒)로 호남 각지에 격문을 보내 창의를 호소했다. 특히 장성남문창의(長城南門倡義)는 유명하다. 돌아가신 뒤 호조참의에 추증되었고,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제향되었다. 15세 효근(孝謹)은 고흥군(高興君) 대유(大有)의 셋째 아들로 1542(중종 37) 태어나 1597(선조 30) 돌아가셨으며 자는 숙흠(叔欽) 이다. 어려서 예문(藝文)을 배우고 서법을 잘했으나 성격이 호방하여 무과를 택하였다. 1579년(선조 12)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당시 오랫동안 평화가 계속되자 군비가 소홀하였으므로 왕의 명을 받고 주와 군의 군비를 두루 점검하였다. 1590년 해남현령으로 부임하여 전선(戰艦)과 병기를 수리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元均)의 휘하로 사천(泗川)에서 왜군과 싸워 대첩(大捷)을 거두는 등 여러 차례 해전에 참가하였다. 그때마다 선봉이 되어 큰 공을 세웠으므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병으로 현령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적병을 만나 어머니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1604년 임진 18공신의 한분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추록되고 병조판서(兵曹判書) 개백군(皆伯君)에 추봉되으며 불천위(不遷位)이다. 효근의 아들 16세 종헌(宗獻)은 1575년(선조8년)에 태어나 1643년(인조21년)돌아가셨다. 초명은 여헌(汝獻), 자는 경헌(景獻), 호는 수허(守虛) 또는 거악(擧岳)이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 효근을 따라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으로 행원군(幸原君)에 습봉되었다. 1636년(인조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파주(坡州)목사(牧使)로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쳐들어 오는 호군(호軍)을 협공한 공으로 충청도(忠淸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승진되었다.
기묘사화 직후에 기(奇)씨의 명성을 천하에 떨친 사람은 14세 대승(大升)이다. 건(虔)의 현손, 13세 진(進)의 둘째 아들이며 준(遵)의 조카인 대승(大升)은 1527(중종 22)에 태어나 1572(선조 5)에 죽었다.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이며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따님이시다.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되었다. 그러나 4촌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1564년 2월에 검토관으로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이해에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였고, 1570년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하였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사후에 이때의 공으로 광국훈(光國勳)으로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으며 광곡의 백우산일대의 땅을 하사받았다. 다시 대사간,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환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 고부(古阜)에서 돌아가셨다. 공의 관로생활에 변화가 많았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공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 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한 바 있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뒤 이황과 8년에 걸쳐 서한을 교환하였는데,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이른바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조선조 학술사의 빛나는 한 대목이며, 퇴계(退溪)는 고봉(高峰)의 탁견을 상당 부분 수용하기도 했다. 공은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여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하였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공의 인물됨은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였고,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 숭례론(崇禮論), 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으로 분류된다. 공은 학행(學行)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학문에 있어서는 공의 사칠이기설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 있어서는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진주(進奏)하였다. 공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慶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과 나주 경현서원에 제향되었고 불천위 이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문집으로 원집 3책, 속집 2책, 별집부록 1책, 논사록 1책, 왕복서 往復書 3책, 이기왕복서 1책, 주자문록(朱子文錄) 4책 등이 포함된 모두 15책의 고봉집이 있다. 자식들은 정유재란에 큰아들 외에는 모두 왜군에게 화를 당하였다.
고봉(高峰)의 큰아들인 15세 효증(孝曾)은 1550(명종 5)에 태어났으며 호는 함재(涵齋) 어머니는 충순위(忠順衛) 이임(李任)의 딸이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고, 현감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향리에서 학문연구에 힘썼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金德齡)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도유사(都有司)로 격문을 짓고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 결과 의병 1천인과 군량미 3천여석을 확보하여 전라도 각지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그뒤 휘하 의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용만(龍灣)에 이르러 왕의 행재소에 나아가 시위하였는데, 왕의 총애를 크게 받아 형조정랑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군기시첨정에 올랐다.
21세 언관(彦觀)은 1706년(숙종32년)에 태어나 1784년(정조8년)사망하였다. 자는 백첨(伯瞻), 호는 국천재(菊泉齋), 덕창군(德昌君) 정후(挺後)의 아들이다. 1744년(영조20년)알성문과에 급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호조(戶曹) 참의(參議)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장성(長城) 추산서원(秋山書院)에 향사(享祀)되었다. 공의 아우 언정은 1716(숙종 42)에 태어났으며 자는 중화(仲和), 호는 나와(懶窩)이다. 1763년(영조 39)10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랐는데 1771년에는 정언이 되었다. 고봉선생의 후광을 입어 1782년(정조 6)에는 당상관으로 특별히 초자(超資)되어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으며, 계속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성격이 청렴하고 강직해서 1786년 대사간에 발탁된 뒤, 세번이나 연달아 이를 역임하다가 1792년에는 대사헌에 취임하여 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진력했다. 1795년에는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에 심취하여 관계서적을 조석으로 암송했으며, 이런 자세는 고봉을 방불하게 하였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24세 문현(文絃)은 1811년(순조11년)에 태어나 1861년(철종12년)동아가셨다. 자는 우용(羽用), 호는 송대(松臺)이다. 1844년(헌종1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교리(敎理). 은산(殷山) 군수(郡守)를 거쳐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를 지냈다, 언관(彦觀)의 현손(玄孫)인 24세 우현(禹鉉)은 1814년(순조14년)에 태어나 1891년(고종28년)사망하였다. 자는 명로(鳴魯), 호는 수졸당(守拙堂), 정국(廷國)의 아들이다. 1850년(철종1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교리(敎理)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병조(兵曹)참판(參判),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13세 준(遵)의 아들인 14세 대항(大恒)은 1519(중종 14)에 태어나1564(명종 19)죽었다. 자(字)는 가구(可久) 이며1546년(명종 1)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청환직(淸宦職)을 두루 역임하고, 1551년 평안도암행어사로 나가 민폐를 살폈다. 1552년 이조정랑을 거쳐 1553년 헌납이 되었다. 1554년 사간이 되고 이어 전한·직제학이 되었다. 1556년에는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557년 용양위대호군에 임명되었다. 1561년 대사간으로서 재변소(災變疏) 6조목을 올려, 경천(敬天), 법조(法祖), 무학(務學), 납간(納諫), 임현(任賢), 애민(愛民)에 힘쓸 것을 건의하였다. 1563년 부제학이 되었는데, 당시 권신이던 이량(李樑)이 사화를 일으켜 사류들을 숙청하려 하자, 심의겸(沈義謙) 등과 함께 이량의 죄상을 폭로하였다. 이때 이량을 옹호하던 사헌부의 죄상도 함께 탄핵하여 이량을 강계로 귀양보내고 그 일파도 관직을 삭탈하는 한편, 새로 등용된 사림들을 옹호하였다. 이어 대사헌이 되고 이조참판을 거쳐, 1564년 공조참판, 한성부판윤에 발탁되었다. 시호는 정견(貞堅)이다. 대사헌(大司憲),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임명된지 3일만에 죽었다.
대항의 손자인 26세 자헌(自獻)은 응세(應世)의 장자로 행주기씨 벼슬길에서 행주기씨를 대표하며 호(號)는 만전(晩全)이다. 명종(明宗) 17년(임술壬戌. 1567년)에 태어나 인조(仁祖) 2년(갑자甲子. 1624년)에 자결하시였다. 스물 한살에 성균관(成均館)에 입학(入學)하고 스물 아홉 살에 문과(文科)급제를 했으며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선조의 형, 하원군 이정의 사위로 왕실과 인척관계이다. 사람됨이 성실(誠實)하고 경륜(經綸)이 있어 환로(宦路)가 탄탄대로(坦坦大路)로 열렸다. 검열(檢閱) 수찬(修撰) 교리(校理) 응교(應敎) 정언(正言)등 청직(淸職)을 두루 거쳤고, 이례병(吏禮兵) 삼조(三曹)의 참판(參判)과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그리고 공병이례(工兵吏禮) 사조(四曹)의 판서(判書)를 역임(歷任)했다. 선조(宣祖) 34년(1601년) 정여립모반사건(鄭汝立謀叛事件)에 연루된 혐의로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崔永慶)을 신원(伸寃)하게 했고 당시 옥사(獄事)를 다스린 서인(西人)을 탄핵(彈劾)해 실각(失脚)시켰다. 1602년 왕세자(王世子. 光海君)의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맹자(孟子)를 강의했으며, 동절사(冬節使)로 명(明)나라를 다녀온 뒤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몸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탄생하자 평소에 세자(世子. 光海君)를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선조(宣祖)가 세자를 바꿀 생각으로 넌지시 묻자 공(公)은 "세자를 세운지 오래되어 인심이 이미 굳어버렸으니 움직이기 어렵다." 고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선조의 뜻이 이미 확고하고 이에 찬동하는 대신(大臣)도 있었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붕어(崩御)로 광해군이 즉위하기에 이르렀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영창대군을 강화(江華)에 유폐(幽閉)해 죽이자 정온이 상소역간(上疏力諫)을 했고, 광해군이 크게 화나서 죽이려 하자 공(公)이 강경하게 만류해 유배에 그쳤다.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나, 정치가 비틀거렸고 연일 큰 옥사(獄事)가 터지는 상황이었다. 옥사(獄事)를 너그럽고 공평하게 다스리려고 애썼으나 워낙 번다(煩多)해 뜻대로 될 수 없었다. 항상 말하기를 "필부(匹夫)의 사생(死生)도 또한 족히 국가(國家) 존망(存亡)의 대수(大數)가 된다." 고 했다. 아무리 하잘것없는 민초(民草)일지라도 한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한 나라가 일어서고 망하는 계기가 된다는 뜻이니, 얼마나 생명을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광해가 대비(大妃)를 폐위(廢位)하려고 하자 아첨배들이 다투어 "마땅히 폐(廢)해야 한다." 고 맞장구를 치고 나섰고, 찬성하는 상소를 올린 자도 수백명에 달했다. 광해가 이에 힘을 얻어 정부(政府)의 결정을 재촉했을 때 공(公)은 역사적 사실(史實)까지 낱낱이 들어가며 반대의견을 개진했다. 원로대신의 강경한 간언(諫言)과 들끓는 여론에 밀려 광해도 어쩔 수 없이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하는 것으로 끝냈지만, 공(公)은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고 홍원(洪原)에 유배되었다가 길주(吉州)로 이배(移配)되었다. 광해는 폐세자(廢世子) 직전에 간신히 위기를 모면해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을 늘 공(公)의 덕으로 여기는지라 이번에 비록 견책(譴責)은 했다 치더라도 오래 유배지(流配地)에 둘 수 없다 해서 곧 불러들여 예전과 같이 대우하려고 했으나 국가의 형세는 날로 기울고만 있었다. 광해에게서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공(公)은 덕평부원군(德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끝내 사퇴하고 멀리 바다가 있는 강릉(江陵)으로 방귀(放歸)되어 정치와는 완전히 단절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반정(反正)을 하려는 사람들이 한교(韓嶠)를 보내 공(公)의 의향을 타진했을 때, 공은 일부러 듣지 못한 체 헸고 두 번째도 역시 대답을 하지 않자 한교는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물러갔다. 신하로서 임금을 쫓아낼 수 없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禍根)이 되어 비운(悲運)을 맞게 되는 것이다. 능양군의 구테타 후에 민심수습을 위해 옛 대신(大臣)들을 불러 재기용(再起用)했는데 공(公)은 거절하고 나가지 아니 했다. 이에 반정공신들 사이에서 혐의(嫌疑)를 들고 나오는 자가 있어 결국 체포되어 서산(瑞山)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고 이때 이괄(李适)이 모반(謀叛)해 진격(進擊)해 온다는 급보(急報)가 날아오자 이괄의 부하중에 4촌 기익헌(益獻)이 있어 "반드시 내응(內應)할 것" 이란 의구심(疑懼心)으로 한양으로 압송하여 서소문(西小門)밖에서 자처(自處)토록 했고 일족도 몰살당했다. 난세(亂世)에 어이없게 당한 비극(悲劇)이었다. 잘못은 금방 깨우쳐졌다. 인조 5년(丁卯. 1627년)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왕에게 상소하여 "기자헌은 마땅히 신원되어야 하며, 그 후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신(一身)이 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친척도 모두 죽었으니 대단히 슬픈 일이옵니다." 했고, 이귀(李貴)도 또한 그 억울함을 아뢰는 상소를 해 신원이 되었다. 아들들도 죽거나 고창 함양 명천 등으로 낙향하였다.
동생 윤헌(允獻)은 1575(선조 8)태어나 1624(인조 2)사망했으며, 처음 이름은 충헌(忠獻) 또는 내헌(乃獻)이다. 현감으로 있다가 1605년(선조 38)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8년에 승문원박사가 되고, 광해군 때는 공조좌랑, 군기시정, 세자시강원문학, 장령, 안악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 형인 영의정 자헌이 광해군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반대하여 유배될 때 형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그 뒤 진사 이건원(李乾元)이 서궁폐출(西宮廢黜)에 반대한 이각(李覺)과 함께 처형하자고 주장하여 수차에 걸쳐 국문을 받았으나 뚜렷한 실증이 없어 방면되었다. 그러나 구테타이후 오히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제거할 때 동조했다는 죄목으로 국문을 받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난군과 내응했다는 혐의로 온 집안이 추국을 받아 끝까지 불복하다가 형이 먼저 죽고, 그 뒤 임강(林강)과 더불어 장살되었다,
윤헌(允獻)의 장자 17세 수발(秀發)은 정언(正言), 둘째 아들(秀實)은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지냈다. 아들들도 이괄의 난 때 죽거나 남해로 낙향하였다. 자헌(自獻)의 아버지 응세(應世)의 묘비는 앞면은 명(明)나라 명필 주지번(朱之蕃)이, 뒷면은 조선조의 명필 한석봉(韓石峰)이 쓴 것으로 근래 문화재로 지정됐다.(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소재.)
고려시대 재상을 지낸 8세 염(廉)의 후손 효복(孝福)은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忠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위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형조(刑曹) 판서(判書)에 추증 되었으며, 고흥군(高興君)에 추봉되었다. 8세 중민(仲敏)의 후손 16세 효일(孝一)은 1595년(선조28년)에 태어나 1636년(인조14년) 순절했다. 자는 행원(行源), 무과에 급제하여 병자호란 때 만호(萬戶)로 사촌동생 등과 함께 병대를 이르켜 싸우다 토산(兎山)에서 전사하였다. 그 후 전공으로 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에 추증되었다.
중민(仲敏)의 후손으로 해서문중의 18세 명혁(命赫)은 1627년 17세 여강(汝剛)의 큰아들로 태어나 1718년 돌아가셨으며 1664년 최초의 족보 갑진보(甲辰譜)를 발간하였다.
13세 원(遠)의 후손 19세 정익(挺翼)은 자는 자량(子亮), 호는 송암(松巖)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으로 효성이 지극했고 성리학(性理學), 경학(經學)에 정통한 학자로 후에 추산서원(秋山書院)에 배향됐다.
고봉(高峰)을 배출하여 조선조(朝鮮朝) 성리학(性理學)의 한 맥을 형성한 기문(奇門)은 조선조 말기 다시 거유(巨儒) 24세 정진(正鎭)을 냈다. 정진(正鎭)은 1798(정조 22)에 태어나 1879(고종 16)에 사망했으며 처음 이름은 금사(金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이다. 전라북도 순창출신으로 판중추부사 10세 건(虔), 13세 원(遠)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재우(在祐),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덕언(德彦)의 딸이다. 7세에 이미 성리철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쳤고, 10세에는 경서·사서 등을 통독하였다. 1815년에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장성 하남(河南)으로 이사하여 장성에서 몇 차례 집을 옮기며 살았다. 1828년 향시에 응시하고, 1831년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를 계기로 명성이 조정에 알려져 183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이 주어졌고, 1835년에는 다시 현릉참봉(顯陵參奉)이 주어졌으며, 1837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의를 표하였다. 1842년에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로 임명되자 취임 6일 만에 칭병으로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얼마 뒤 다시 평안도도사, 1857년에 무장현감, 1861년에 사헌부장령, 1864년 사헌부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써서 삼정(三政)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을 방략을 제시하려 했다. 그러나 이 소장을 조정에 제출하려던 중 말미에 이름을 쓰고 과거시험의 답안지처럼 봉하라는 조정의 지시에 상소할 것을 포기하였다.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세력의 침투를 염려한 끝에 그 해 7월 흔히 육조소(六條疏)라 불리는 첫번째 병인소(丙寅疏)를 썼다. 이는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하여 당시의 쇄국정책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 나타나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은 이 소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 소는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정에서 식견이 높이 평가되어 그해 6월 사헌부집의, 7월 동부승지, 8월 호조참의, 10월 가선대부의 품계와 함께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등이 주어졌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자 그를 사양하는 소장으로 두번째의 병인소를 올렸다. 여기에서는 당시의 국가적 폐습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지도층인 사대부에게 청렴결백한 기풍이 없음을 우려하여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도록 강조하였다. 이어 공조참판·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에 위촉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877년 우로전(優老典)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주어졌다. 그 해에 장성 하리 월송(月松: 지금의 高山里)으로 이사하여 다음해 그곳에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를 짓고 많은 문인과 함께 거처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직접 전수받거나 어느 학파에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송대의 철학자 주돈이(周敦 ), 장재(張載), 정이(程 ), 주희(朱熹) 등의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에 의하여 대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황(李滉), 이이(李珥)이후 근 300년간 계속된 주리(主理)·주기(主氣)의 논쟁을 극복하고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체계를 수립하였으며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이이(李珥), 이진상(李震相), 임성주(任聖周)등과 더불어 조선조 성리학의 6대가(大家)로 불린다. 학문이 점차 원숙기에 들던 40세 이후 경학을 공부하려는 선비들이 모여들어 제자의 예를 갖추었지만, 한번도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고 성현의 도를 닦고 성리(性理)의 학을 탐구할 뿐이었다. 저술이 많지는 않으나 성리학사상 중요한 저술들을 남겼다. 즉, 태극도설(太極圖說)중의 ‘정(定)’자에 대한 해설인 정자설(定字說)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한 우기(偶記 1845), 이기(理氣) 및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대하여 변론한 이통설(理通說 1852), 철학에서 핵심이 되는 납량사의(納凉私議 1874, 초고는 1843년에 작성)와 외필(猥筆1878)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철학사상은 그밖에 제자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답문유편 (答問類編)에도 잘 드러나 있다. 우주의 구성으로부터 인간본질의 해명, 사단칠정과 인심도심(人心道心) 등 심성의 문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문제, 선악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일분수라는 이체이용(理體理用)의 논리로 일관하였다. 이로써 과거 우주현상을 이와 기로 설명하던 이기이원관(理氣二元觀)이 극복되고, 인간심성 내지 도덕의 문제가 가치상 우위에 있는 이의 작용으로 해명되었다. 또, 인물성동이의 문제 역시 이의 완전·불완전으로 설명되어 종래의 주리론과 주기론적인 심성론과 인물성동이론이 종합 지양되었던 것이다. 학문과 사상은 손자인 우만(宇萬)과 김녹휴(金錄休), 기문현(奇文鉉), 조성가(趙性家), 정재규(鄭載圭), 이희석(李僖錫), 이최선(李最善), 기삼연(奇參衍) 등의 제자에게 전수되었으며, 그밖에 많은 학자들이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1882년에 노사집 22권, 1890년에 답문유편 15권이 편집되어, 뒤에 담대헌에서 활자본으로 간행되었고, 1902년 경상남도 단성(지금의 합천군 쌍백면 묵리)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1976년 서울에서 본집 22권, 부록 2권으로 영인본이 나왔다. 1892년에 조성가가 그의 행장을, 1901년에 최익현(崔益鉉)이 신도비문을, 1906년에 정재규가 묘갈명을 지었다. 1927년에 고산서원(高山書院)이 건립되어 그 사우에 조성가 등 문인 6인과 함께 봉안되었고, 춘추로 제사를 지낸다. 1960년 노사연원록(蘆沙淵源錄)과 1968년 고산서원지(高山書院誌)가 간행되었으며, 1978년 고산서원 장판각(藏板閣)이 준공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25세 양연(陽衍)은 1827(순조 27)에 태어나 1895(고종 32)돌아가셨다. 자는 자민(子敏), 호는 백석(柏石). 노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7년(고종 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정언, 예조정랑을 지냈다. 1868년에 지평, 1869년 장령, 1873년 사복시정(司僕侍正)을 지내고, 1874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집상하였다. 1878년 다시 장령을 거쳐 부교리,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이때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일본의 침탈이 본격화되자, 삼정책(三政策)의 상소를 올리고 나서 고향에 은거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본군에 의해 좌절되고 일제의 가세가 강성해지자, 집안식구들과 지리산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공은 학문적인 연구보다는 척사위정의 정신에 투철하였다. 저서로는 백석헌유집(柏石軒遺集)이 있다.
25세 양연(奇亮衍)은 고종조(高宗朝)에 정읍(井邑), 통천(通川), 옥구(沃溝)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도선산을 다시 찾고 정무공 신도비 등의 건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말(韓末)의 유명한 의병장 25세 삼연(參衍)은 1851(철종 2)에 태어나 1908년 순국하셨다. 별명은 백마장군(白馬將軍)이며,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이다. 전라남도 장성출신으로 노사의 문인이다. 을미사변 이후 26세 우만(宇萬)과 거의토적(擧義討賊)을 맹세한 뒤 장성으로부터 나주로 나아가 많은 의병을 소집하여 광산(光山)에서 거의 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부가 선유사(宣諭使)로 신기선(申箕善)과 이겸제(李謙濟)를 파견하여 선유하자, 의병을 해산시켰다. 재거를 밀모하던 중 일진회원의 밀고로 관찰사 조한국(曺漢國)이 파견한 전주진위대 김한정(金漢鼎)에게 붙잡혀 전주옥에 구금되었다. 다시 서울 평리원옥에 이감되어 한달 남짓 수감된 뒤 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군대해산 후 1907년 9월 수련산(隨綠山) 석수승암(石手僧庵)에서 회맹, 호남창의맹소 대장에 추대되었다. 격문을 돌려 대중에 협력하고 적에게 부역하는 자의 처단 및 재산몰수를 경고하였다. 9월 23일 고창 문수암(文殊庵)으로 진군중 접근해오는 적을 맞아 접전 끝에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고창 이민(吏民)들의 협력으로 군기와 군량을 공급 받아 의병들에게 공급하고 영광, 부안, 정읍 등지에서도 연승하였다. 12월 광주의 최상진(崔相鎭) 등 관리의 내응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때 군량비축을 위해 법성포(法聖浦)의 세곡을 탈취할 계획으로, 12월 7일 의병 1백명은 먼저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기습하여 불태운 뒤, 그곳 창곡(倉穀)을 탈취, 군자에 보용하고 남은 것은 모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뒤 전세의 변경으로 전투의 양상을 바꾸어 의진을 소단위로 나누는 유격전으로 돌입, 특히 김준(金準)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무동촌전투(舞童村戰鬪)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뒤 날씨가 추워져 의병들이 분산되자 각지의 산병에게 연락, 동짓날을 기약하여 장성을 공략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우산중(犀牛山中)에서 잠시 휴병한 뒤 재차 고막원(古幕院)을 공략하려다가 중도에서 철수하였다. 12월 27일 의진을 이끌고 설을 쇠기 위해 험준한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밤중에 큰비가 내려 노숙하던 사졸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수비의 허술함을 틈타 적의 포위공격을 받았으나 갑자기 안개가 덮여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다행히 탈출하였다. 탈출한 뒤 순창 복흥(福興)산중의 6촌동생인 구연(九衍)의 집에서 부상을 치료하였다. 그뒤 장졸들에게 설을 쇤 다음 정월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지시하고, 구수동(九水洞)촌가에서 은신하던 중 정월 초하룻날 적 수십명이 돌입하여 주인에게 총검을 들이대므로 자진하여 붙잡혔다. 비보를 접한 김준이 창평에서 적을 무찌르고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양(景陽)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경찰서에 수감된 뒤였다. 1908년 1월 2일 광주 서천교(西川橋)밑 백사장에서 총살당하였다. 그뒤 호남의진은 김준, 이석용(李錫庸), 김용구(金容球) 등 의진과 김준이 순국한 다음 조경환(曺京煥) 등의 의진에 재편되어 항일전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6세 우만(宇萬)은 1846(헌종 12)에 태어나 1916년에 돌아가셨다.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며 전라남도 화순출신이다. 참봉벼슬을 하였으므로 기참봉으로 불리었다. 호남의 거유인 참판 정진(正鎭)의 손자로서 가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대되었다. 1894년 동학운동 당시에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사실을 유생의 수치로 여겼다. 동학군이 향리에 들어왔을 때 학자의 집이라 하여 농민들 스스로 약탈을 삼갔다. 1895년에 나주에서 동학당 토평비를 세우게 되니 그 비문을 지었다. 그러나 그해 황후가 시해당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머리를 깎는 욕은 나라 망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라 말하고,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편이 낫다는 통문의 상소를 올렸다. 1896년 2월 제천의진의 창의대장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이르자 호남지방에도 의거의 기운이 짙어졌다. 3월에 광주향교(光州鄕校)로 들어가서 의사들을 모아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의론하니 며칠 안에 모여드는 의병의 형세가 매우 성대하게 되어 관리들은 모두 도피하였다. 이때, 장성의 기삼연이 장정과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와서 군무를 자원하였다. 이로써 사실상의 호남창의 총수가 되었다.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모든 의진은 일제히 광주로 모이도록 하고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명을 받고 파견된 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의 설득으로 해산의 영을 내리고 말았다. 5월에 장성에서 다시 기병하였으나 10월 16일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 4월에 석방되었다. 1908년 2월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동지 문인들과 다시 거사를 꾀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였음을 듣고 망북통곡(望北痛哭) 후 해산하고 은둔생활을 하며 법령, 호적, 납세, 은사(恩賜)등은 물론 자손들의 교육까지 거부했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일본 것은 모조리 배척했다. 유저로는 송사집 25권과 '호남의병열전(湖南義兵列傳)'을 남겼으며,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됐다. 1980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6세 재(宰)는 1854(철종 5)에 태어나 1921돌아가셨다. 자는 입부(立夫), 호는 식재(植齋)이며 장성(長城)출신이다. 노사의 문인으로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족형(族兄)인 우만(宇萬)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려고 하였는데, 조정에서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조칙을 내리자 몹시 원통해하며 포기하였다.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당시 쉽사리 패배하여 처참하게 유린당하게 된 원인이 농병정책(農兵政策)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데에 있다고 통탄하면서 국가의 안녕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우선 농병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어야 하며, 그 방법으로는 백성에게 전답을 균등하게 분배하여 경제생활을 부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제시하였다. 저서로는 식재집 3책이 있으며 1914년 6차 수보 갑인보(甲寅譜)를 해서문중을 포함하여 발간하였다.
27세 산도(山度)는 1878에 태어나 1926에 돌아가셨다, 다른 이름은 산도(山濤)이며 족보에는 경(慶)이라 기록되있다. 전라남도 장성출신이다. 삼연(參衍)의 조카손자이며, 재(宰)의 맏아들이다. 일찍이 기독교계학교의 교사를 지냈으며, 한국의 식민지화의 주구(走狗) 을사오적을 살해하여 식민지화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905년(광무 9) 11월 박종섭(朴宗燮), 박경하(朴敬夏), 안한주(安漢朱), 이종대(李鍾大) 등과 저격무기를 구입한 뒤, 손성원(孫聖元), 박용현(朴鎔鉉), 김필현(金弼鉉), 이태화(李太華) 등을 파견, 적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1906년 2월 17일 동지 이범진(李範鎭)등 12명과 함께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자택에서 난자했으나 죽이지는 못하고 경무고문 마루야마(丸山重俊)의 부하가 결사대본부인 한성모(韓聖模)의 집을 습격하여 박종섭, 박경하, 안한주, 이종대와 함께 붙잡혔다. 출옥한 뒤 부상한 다리를 이끌고 일생을 유랑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42년에 행주기씨대종중이 창립되었다.
1957년 정유대동보가 발간되었다.
1966년 5월 14일 행주산성에 총무이사 27세 성도(成度)의 4년에 걸친 노력으로 행주기씨유허비가 건립되었다.
1982년 임술대동보가 발간되었다.
2001년 10월 1일 행주기씨대종중 인터넷홈이 문을 열었다.
2005년 1월 25일 9차 대동보 을유보가 발간이 되었다.